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외전)-16화 (190/193)

#외전 16

사영의 드라마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유준의 차기작이 발표됐다.

평소 개성 있고 창의적인 작품으로 늘 작품성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흥행 면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던 감독의 작품이었다. 많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선택이었다.

작품은 김유준의 이름 하나만으로 글로벌 OTT 기업의 투자를 받아 냈다.

글로벌 기업의 자본과 감독의 독창성, 그리고 김유준의 연기력과 흥행력이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애정을 감추지 않고 여기저기 드러내며 연애 역시 문제없이 순항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다. 바야흐로 시상식 시즌이 시작되고 있었다.

***

“긴장돼요?”

유준은 아까부터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는 사영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평소 같으면 사영이 한숨을 내쉬었다는 사실에 심장부터 떨어졌겠으나 오늘은 짐작 가는 이유가 있어 웃음이 먼저 나왔다.

오늘은 올해 사영의 드라마가 방영된 방송국의 드라마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유준은 올해 방영한 드라마는 없었지만 올해의 연기 대상 시상자로 선정되어 시상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우종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시상식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영은 제 손을 잡아 오는 유준의 손길에 고개를 돌려 유준과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긴장된다기보단… 너무 설레요. 복귀 후에는 첫 시상식이라….”

“그러고 보니 데뷔작도 이 방송국이었죠?”

“네! 어떻게 알아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사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유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겪고도 사영은 김유준의 집착을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내가 모르는 게 있을까 봐요?”

“하긴, 세상에서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유준 씨죠.”

사영은 그렇게 말하며 유준을 향해 사랑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유준은 사영이 전하고 싶은 말을 마음으로 들었다.

이 세상에 윤사영이 죽고 회귀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니, 말 그대로 김유준은 윤사영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게 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하고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어서, 유준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며 잡고 있던 사영의 손을 당겨 손등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온기에 웃음을 터트린 사영은 유준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으며 자꾸만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수년 전 사영은 바로 이 시상식에서 데뷔작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자신을 보는 이들의 눈에서 재능 있는 어린 배우를 보는 기대감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많은 기대를 산산조각 내며 끝끝내 무너지고 말았던 과거의 날들이 문득 해일처럼 사영의 기억을 덮쳐 왔다.

후회스럽고 뼈아픈 날들이었다. 그러나 사영은 이제 그런 기억에 무너지지 않는다.

너무 많은 길을 헤맸어도 결국 돌아왔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섰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곁에는 이제 그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

지난날을 후회하며 슬퍼하기엔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해서, 사영은 이제 그 어떤 시간으로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 여기가, 윤사영의 천국이었다.

“윤사영 씨.”

“네?”

그때 유준이 다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사영을 불렀다. 유준은 사영의 감정이 크게 너울거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나쁘진 않았다. 그 감정이 어디까지나 행복에 기반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유준은 분위기를 조금 바꾸고 싶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사영을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시상식에서… 절대 잊어버리면 안 돼요.”

“…뭐를요?”

전혀 짐작 가는 게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 사영에게 유준이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려 웃으며 말했다.

“대상 타면 꼭, 꼭 카메라에 대고 김유준 씨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아….”

“떨리고 긴장해서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요. 그냥 엉엉 울다가 내려와도 안 돼요. 김유준 씨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고 꼭 말해야 해요, 꼭!”

며칠 전부터 유준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유준은 윤사영의 대상을 거의 따 놓은 당상처럼 여기고 있었다.

사영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대상을 탈지 못 탈지도 모르는데요.”

“윤사영 씨가 백 프로 탄다니까요? 나 못 믿어요?”

“…전 모르겠어요.”

사영의 다소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사영이 대상을 받을 거라고 하는 건 비단 유준 혼자만의 예측은 아니었다. 팬들은 물론이고 각종 커뮤니티와 언론 모두가 유력한 수상자로 윤사영을 가장 앞에 두었다.

심지어 방송국 시상식뿐만 아니라 이후 열리는 종합 예술 시상식에서도 드라마 부분에서 사영을 유력 수상 후보로 예측할 정도였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사영도 제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알았다. 남자 최우수상 후보로 선정되었으니 반드시 참석해 달라는 당부도 들었던 터다.

그러나 올해 드라마 부분은 경쟁이 꽤 치열했다. 시청률이나 화제성으로는 <수난>이 압도적이었으나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은 드라마가 적지 않았고 그중 사영도 감탄할 정도의 연기력을 보여 준 선후배 배우들도 적지 않았다.

오랫동안 꾸준히 그 자리에서 노력해 왔던 이들을 두고 자신이 상을 타는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드라마가 워낙에 잘됐으니 정말로 운이 좋으면 최우수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정도가 사영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두고 봐요. 내 말이 틀리는지.”

그러나 유준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사영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겸손이 아니라, 사영은 진심으로 수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탄다면 좋겠지만 무관으로 그쳐도 상관없다.

다시 드라마를 찍고, 그 작품으로 인정받고, 시상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모든 상을 다 받은 기분이었다. 그걸로 족했다.

“내 이름 꼭 불러요. 안 부르면 진짜 삐질 겁니다.”

물론 김유준은 여전히 진심이었다.

***

레드 카펫 앞에 두 대의 차가 앞뒤로 서자 기자는 물론이고 앞을 가득 채운 인파가 유난하게 소란스러워졌다.

오늘 두 사람이 함께 레드 카펫을 걸을 인물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 다 알고 있었던 탓이다.

닫힌 차 문 앞으로 경호원들이 배치됐다. 문을 열고 등장한 인물들에 대한 기대감이 한없이 부풀었다. 타이밍상 그들이 가장 기다리는 커플이 나올 때가 되었다.

이윽고 두 대의 차 중 앞에 선 차의 문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멋들어진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가 밖으로 나온 순간, 엄청난 함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빠르게 눌리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이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라고 일컬어지는 김유준이었다.

쏟아지는 빛 사이에서 잠시 서서 가볍게 인사를 남긴 유준은 이내 뒤에 서 있는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소란과 함성이 점점 더 고조되기 시작했다.

유준은 뒤의 차 문을 직접 열고 안에서 내리는 이를 손수 에스코트했다. 유준이 다정하게 내민 손을 잡고 내린 이는 지금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가장 핫이슈인 인물, 윤사영이었다.

유준과 사영이 나란히 섰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근방을 뒤흔들었다. 카메라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 사영은 눈가를 조금 찡그렸고, 유준은 여유롭게 웃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레드 카펫을 걸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현실감이 없어 사영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어 정신이 멍해지는 자신을 일깨워야 했다.

유준이 없이 혼자 걸었다면 멍청하게 다리가 풀려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로 복귀한 이후 어디에서나 많은 관심을 받아 왔던 사영이지만 오늘의 화려함은 그간 느껴 왔던 순간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괜찮아요?”

사영이 그야말로 얼빠진 상태가 되었을 때, 옆으로 고개를 살짝 숙인 유준이 사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비명과 같은 환성이 들리고 기자들은 더욱 손이 바빠졌다. 사영은 시선을 돌려 유준을 쳐다보았다.

별빛이 무수히 쏟아지는 세상 안에서 오로지 유준만이 느긋하고 여유만만해 보여 그게 또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를 덥석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픈 충동을 참으며 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하게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세상을 가득 채웠다.

***

“아….”

시상식이 시작하기 전 사영은 제 손에 무언가 끈적한 게 묻은 걸 발견했다. 이리저리 인사를 나누던 중 어딘가에서 묻은 모양이었다.

옆에 있는 유준은 자리까지 찾아온 한 감독과 가벼운 사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잠깐 틈이 생겼을 때 사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감독님, 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세요.”

“어디 가요?”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는 사영을 붙든 건 유준이었다. 사영이 살짝 눈가를 찡긋하며 대답했다.

“손에 뭐가 좀 묻어서… 얼른 손 씻고 올게요.”

“잠깐만. 같이 가요.”

유준이 곧바로 같이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였기에 식겁한 사영이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손 씻는 건데 뭘 같이 가요. 대화 나누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유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주머니에 넣어 가고 싶을 정도로 귀엽기는 했으나 둘 중 한 사람은 이성을 차려야 했기에 사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히 유준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도 사영을 따라오진 않았다.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평소 존경하던 감독님이었기에 안간힘을 써 챙긴 사회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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