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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외전)-17화 (191/193)

#외전 17

시상식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라 사영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소란스러운 복도를 지나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향하자 그제야 주변이 조금 조용해졌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본격적인 행사는 시작도 안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 긴장해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던지라 목덜미와 어깨가 다 뻐근했다.

사영은 목을 가볍게 주무르고 이리저리 돌려 스트레칭을 하며 복도를 걷다가, 문득 저만치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거리가 그다지 가깝진 않았지만 누군지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영의 눈에, 온몸의 모든 감각에, 기억에, 시간에 거대한 가시처럼 박혀 있던 사람, 한재우였다.

***

한재우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분명 윤사영이었다.

그간 한재우는 두문불출하며 집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구린 약점을 쥐고 있던 감독을 거의 협박하다시피 해 끼어든 드라마가 크게 망한 후로는 더더욱 그랬다.

어딜 가도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사람과 시선을 마주칠 수도,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온 세상이 전부 다 자신을 욕하는 듯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윤사영은 대단한 은혜를 베푸는 양 법적인 조치까지는 취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한재우에게는 그 이후의 모든 생활이 곧 지독한 처벌이었다.

그래 봤자 사영이 겪은 일과 비교하자면 천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텐데, 재우는 마치 지옥 불에서 타오르는 것처럼 모든 순간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웠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기를 하지 못하는 것은 최악의 형벌이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연락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제 말 한마디에 벌벌 기던 새끼들, 다음에는 꼭 자기 작품을 해 달라고 애원하던 놈들, 전이었다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쓰레기 같은 작품을 들이밀었던 새끼들까지 가리지 않고 배역 하나만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누구도 한재우에게 손을 내미는 이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화를 내며 다시는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꼴좋다는 듯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모멸과 상실도.

윤사영을 잃었다는 사실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그만큼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한재우는 매일 밤 꿈에서 윤사영을 보았다. 꿈에서 자신은 그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연인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러운 사영을 품에 안고 행복한 낮과 밤을 보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지독한 상실감에 울었다. 이미 제 손에 가졌던 완벽한 행복을 제 손으로 망치고 내다 버렸다는 사실에 자기혐오가 밀려왔다.

그럴 때면 재우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한심하고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고 욕을 퍼부으며 오열했다. 어떤 것도 바꾸거나 되돌릴 수 없는 무의미한 후회였다.

그 자학과 자해의 괴로움조차 사영은 더 오랫동안 더 혹독하게 받았다는 걸 한재우는 몰랐다.

그래서였다. 여전히 한재우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서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여기에 와 봤자 초라하고 비참한 제 처지만 더 실감할 뿐이라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재우는 오로지 윤사영을 한 번만 더 만나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꾸역꾸역 시상식에 참여했다.

내가 이렇게 후회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윤사영 하나만을 되찾고 싶어서 이다지도 간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재우는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매달리며 사영의 동정을 사고 싶었다. 죽을 만큼 네가 그립다고 발등에 입이라도 맞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영은 마음이 약하니까. 그토록 오래 한 사람을 사랑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전부 다 증발해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재우는 지금처럼 망가지고 아파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면 사영에게서 손톱만큼의 동정심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고 그 틈을 만들기 위해 사영을 마주칠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그 기회가 찾아왔다.

재우는 점점 더 다가오는 사영을 보며 마른침을 넘겼다. 굳이 제 몰골을 살필 필요는 없었다.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면 보일수록 좋았으니 말이다.

사영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수도 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 같았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다. 온몸에 피가 식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눈짓 하나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신 앞에 선 제물이 된 꼴이었다.

이윽고, 윤사영과 한재우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자리에 섰다.

이미 한참 전부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사영을 바라보던 재우가 무어라 말을 건네려 막 입을 연 순간, 생각지도 못하게 먼저 말을 건넨 건 사영이었다.

“안녕하세요, 한재우 씨. 오랜만에 뵙네요.”

“아… 어?”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랄게요. 그럼 이만.”

그게 끝이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인사까지 마친 사영은 그대로 재우를 지나쳤다. 심지어 사영은 재우의 앞에 멈춰 서지도 않았다. 천천히 스쳐 가는 순간에 평범한 인사를 나눴을 뿐이다.

한재우는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려 하마터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재우는 이 순간이 아주 격정적인 재회가 될 줄 알았다. 사영의 마음을 되돌려 놓진 못해도 완전히 지워 내지 못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다못해 그것이 애증조차 아닌 온전히 분노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아니다. 아무것도 없었다. 사영은 그저 우연히 마주친 동료를 향해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그게 꾸며 낸 연기가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윤사영의 인생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절대 지워질 수 없는 흉터가 되어 절대로 사영이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이 될 거라고 자신했는데.

한재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동료 배우, 한때 스타의 반열에 올랐으나 끝끝내 스스로 그 자리를 무너트린. 

그리고 이제는 무의미해진, 과거의 사람.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사영의 모든 대답이 바로 이 순간에 있었다.

더 이상 비참할 수는 없을 줄 알았는데, 제 발로 찾아와 맞이한 절망의 순간에 한재우의 영혼은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아마도 이번 생에는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거였다.

***

“못 살아….”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회장으로 돌아가던 사영은 저만치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유준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새를 못 참고 기어코 사영을 찾으러 온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영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내심 예상하기는 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영은 한재우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재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있었어도 별로 상관은 없었겠으나 유준이 온 걸 보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날, 시상식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건 사양이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다시 길을 되돌아가야 하면서도 유준은 사영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분명 말도 안 되게 잘난 남자인데 그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조금 바보 같아 보여 사영은 다시 웃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유준을 향해 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만 씻고 갈 건데 뭐 하러 왔어요.”

유준은 시치미를 뗐다.

“나도 손 씻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아, 그랬어요? 그럼 얼른 다녀와요. 나는 안에 들어가서 기다릴게요.”

“근데 안 씻어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는 걸 알았던 유준은 뻔뻔하게 대답하고 사영의 곁에 나란히 서서 다시 손을 잡았다.

회장 입구 쪽에 서 있던 몇몇 스태프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했으나 어차피 공개 연애 하는 마당에 감출 것도 없었다.

찬물로 씻은 탓에 차가워진 사영의 손을 부지런히 조몰락거리며 유준이 물었다.

“별일 없었어요?”

사영은 정말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그냥 손 씻고 온 건데… 별일 있을 틈도 없었어요.”

“이제 곧 시상식 시작인데 뭐 필요한 건 없고?”

오죽했으면 윤사영보다 윤사영의 상태를 더 잘 알아채는 유준조차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사영은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 갔다.

“응. 없어요.”

“혹시 오래 앉아 있으면 추울까 봐 자리에 담요 갖다 놨어요.”

“아… 고마워요.”

사영은 유준을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다시 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조금씩 들어차기 시작한 관객석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유준과 사영은 각각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작은 손 피켓을 들고 있는 팬들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방송 준비를 거의 마친 무대를 바라보며 사영은 기분 좋을 만큼 뛰는 제 심장 박동을 가만히 만끽했다.

방금 한재우와 단둘이 마주쳤다는 사실은 지금 사영의 감정 그 어디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반응이었다.

특별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행동과 말이 나왔다.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한재우와의 마주침이 사영의 마음에 어떤 의미로라도 한 톨만큼의 동요를 불러일으켰다면 사영은 유준에게 말했을 거다.

한재우를 마주쳤다고.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떠하다고 감추지 않고 표현했을 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준에게는 그만큼 솔직해야 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서.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사영은 호흡 하나조차 흔들리지 않아서.

사영은 유준에게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동료 배우를 마주쳐 인사한 정도의 일까지 미주알고주알 말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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