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시 재강원 고등학교
1. 인간은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알파, 오메가, 베타라는 형질로 나뉜다.
2. 오메가는 성별과 관계없이 임신할 수 있으며 대체로 유순하고 예술적인 부분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알파는 오메가를 임신시킬 수 있고 이목을 끄는 카리스마와 리더십,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두뇌, 육체를 가진다.
그 외의 사람들은 베타라 부른다.
3. 1,0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알파 1, 오메가 1, 베타 998의 비율이다.
- 인간은 평등하다.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문장을 보고 한주는 발을 멈추었다.
미래의 리더를 육성하기 위함이라는 교육 목표로 운영하는 재강원 고등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다.
국내 최상급 교육 기관인 재강원 고등학교는 알파들만을 위한 특별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베타도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학교 안에서 베타란 부모의 재력과는 상관없이 그저 최하층의 입장이었다.
멍하니 중앙 계단 홀에서 화면을 보던 한주를 갑자기 누군가 훅 뒤로 잡아당겼다. 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순순히 끌려갔다.
한주가 서 있던 자리에 촤악, 물이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져 바지에 튀었다. 다행히 몸이 젖지는 않았지만 불쾌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제야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옆으로 머리 하나는 더 큰 알파가 지나갔다. 얼음 조각을 깎아 놓은 듯이 차갑고 정연한 얼굴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어?”
도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멀어졌다. 그가 도와주었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한주는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그가 잡았던 팔을 문질렀다.
“우강희가 도와준 거야?”
“도와주기는, 밀쳤겠지. 야, 뿌려.”
비웃음이 들려 고개를 드는 순간 쓰레기가 몸에 뿌려졌다. 휴지통을 쏟은 듯 젖은 휴지와 빈 캔 등의 쓰레기가 몸을 맞고 젖은 발치로 떨어졌다.
웃음이 들렸다.
“지저분해.”
같은 반 재민석이 계단을 내려오며 한주의 모습을 비웃었다.
민석은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단정한 모범생 외모로 수업시간이나 교실에서는 얌전히 지냈지만 치켜 올라간 눈이 본래의 성격을 드러냈다.
민석은 몸에 묻은 쓰레기를 툭툭 떨어내는 한주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며 경멸 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베타.”
어이없을 정도로 적나라한 감정이었다.
민석은 싫어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행동했다. 한주는 미움을 받는 상황이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해자에게 맞서거나 반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민석의 행동은 더 숨김이 없었다.
자신도 베타면서 곧 알파로 발현한다고 믿으며 알파처럼 행동했다.
간혹 성인이 되어 베타에서 알파로 발현하는 케이스가 있다지만 한주가 기억하기로 재강원 고등학교 이사장의 아들인 재민석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까지 알파로 발현하지 않았다.
민석은 한주의 옆을 지나가며 목소리를 키웠다.
“쓰레기 냄새.”
그 뒤를 이어 2학년생들이 계단에서 내려오며 지나쳐 갔다. 민석과 어울리면서 한주를 괴롭히는 이들이었다. 괴롭힘에 학년이 다름은 문제되지 않았다.
2학년은 알파답게 집요하게 굴었다.
“여기 쓰레기통이 있다.”
그들은 마시던 음료를 한주에게 던졌다. 음료 컵은 다행히 한주의 몸에 부딪히지 않았다.
“저리 비켜! 더럽게 언제까지 가로막을 거야?”
그들은 한주의 다리를 발로 찼다. 몸이 휘청였다.
힘을 주어 찼는데도 쓰러지지 않자 짜증 난 2학년은 뒤따라오는 동급생에게 눈짓했다. 또 발길질이 날아왔다.
연타에 한주는 다리에 힘을 빼고 쓰레기가 떨어진 젖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2학년 이창원은 더럽다는 듯이 바닥이 젖지 않은 곳에 서서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학생회 임원으로 한주를 괴롭히는 2학년 무리의 중심이었다. 발을 들어 한주의 어깨를 눌렀다.
“저녁에 보자.”
주위에서 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창원은 신발을 한주의 어깨에 문지른 후 동급생들과 무리 지어 가 버렸다.
지켜보던 1학년들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일어나려는 한주를 1학년이 밀쳐 쓰러뜨리고 돌을 차듯 가볍게 다리를 차며 지나갔다.
일방적인 폭행이었지만 도와주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힐끔 보고 지나갈 뿐이었다.
알파 사회에서 약자는 도태된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서도 버티지 못하는 자는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수십 명이 지나갔지만 누구 하나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 허탈하거나 낙담, 수치,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다.
수업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없어지고 나서야 한주는 가볍게 옷을 털며 일어났다.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던 직원이 한주의 주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베타면 적당히 고개 숙이고 들어가세요. 알파에게 버텨 봤자 당신만 손해입니다.”
한주는 충고하는 직원에게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 관리실에 들러 가볍게 샤워하고 여분의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관리실에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교복이 마련되어 있었다. 몇 번 비슷한 일로 한주가 찾아갔었기에 관리실 직원은 왜 옷이 더러워졌는지 사유도 묻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한주에게 쏠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수업 중인 교수는 눈살을 찌푸릴 뿐 수업에 늦은 학생을 야단치지 않고 수업을 진행했다.
외부의 강사를 초빙해 수업하는 재강원 고등학교 특유의 시스템으로 교수는 아는 지식을 가르칠 뿐이고 학생의 관리는 반의 담임이 했다.
한주는 자리에 앉아 교재를 펼쳤다. 옆자리는 우강희였다. 그가 한주를 도와준 것이 두 번째였다.
반에서 한주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
재민석과 같은 반이기는 했지만 말로만 한주에게 시비를 거는 편이었고 교실에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교실의 학생들이나 다른 반의 1학년들도 대놓고 한주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은 같은 반의 알파 두 명 덕분이었다.
이성진과 우강희.
회귀하기 전의 삶과는 다르게 민석이 주축이 되어 2학년 이창원이 한주를 타깃으로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같은 반의 몇 명도 동참했었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없었다. 약자인 베타는 무시당해 마땅했고 교실에서도 가감이 없었다.
그때 우강희가 나섰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책상이 넘어갔고 날렵하게 일어난 그는 한주를 건드리던 같은 반의 알파 멱살을 잡아 책상에 누르더니 얼굴 옆을 볼펜으로 찍었다.
책상에 꽂힌 볼펜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끼긱 불쾌한 소리를 냈다.
‘시끄러워.’
목소리에서 살기까지 느껴졌다.
가해자는 되어도 피해자가 되어 본 적 없는 오만한 알파 고등학교 1학년생에게는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우강희의 말을 이성진도 나른하게 동조했다.
‘……교실에서는 조용히 지내야지.’
동갑이지만 알파들이 반발하지 않은 것은 상대가 이성진과 우강희이기 때문이었다.
1학년에서 유일한 로열 알파인 성진과 같은 프라이머 알파라도 위압감을 느끼게 만드는 강희의 말이라서.
알파 사이에서도 서열이 있다.
알파나 오메가는 페로몬을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알려 줄 수 있고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일부 우수한 이들은 그 페로몬으로 자신이 원하는 감정으로 상대를 조종할 수 있다.
그 정도에 따라서 일반적인 알파를 프라이머, 페로몬으로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우수한 이는 로열이라고 불렀다.
이성진은 알파 중에서도 1퍼센트로 나타난다는 로열 알파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에 퍼져 있는 모 대학 병원의 서울 원장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제약 기업 회장이었다.
메디컬, 바이오, 헬스에 손을 뻗어 건강 부분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기업이다.
성진과 어울리는 차원구와 황치운은 1학년 알파 중에서도 특출 난 이들이고, 우강희는 그들 중에서는 부모의 힘이 약했지만 학생들이나 교수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았고 어려워했다.
알파 무리에 섞여 있어도 강희는 두드러지는 존재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허락한 친구들 이외에는 주위에 다가오는 것도 싫어했고 타인과 거리를 두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오직 자신이 허용한 이들과만 어울렸다.
어쨌든 그 덕분에 한주는 한동안은 반에서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이전의 삶에서는 없었던 우강희의 행동에 잠시 놀라기는 했지만 덕분에 초반에 반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물론 학생회 임원 선발 캠프 이후부터 상황은 변하겠지만.
우강희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주에게 알파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 은혜는 갚았지.’
두 번째 삶이 주어졌음을 인정하고 더는 알파에 얽매이지 않고 엄마를 불행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한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나이에 강희를 만날 방법은 없었고 그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우상진 의원의 집 앞에서 매복해 본 적도 있었지만 강희는 보지 못했다.
천천히 앞날을 대비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두 번째 삶에서도 한주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왔다.
이전의 삶에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가치였고 목표였지만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애초에 의미가 없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알파를 위한 재강원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라도 한주의 형질이 베타인 이상 봐 주지 않을 사람이기에 미련을 버렸다.
괴롭힘에 지옥 같아 겨우 졸업까지 버틴 학교라서 두 번째 삶이 주어졌을 때 다시는 이 학교 방향으로는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진절머리 냈었다.
그런데 시간이 뭐라고.
나약했던 자신을 단련하면서도 한주는 괴롭힘당했던 학교생활보다 졸업식의 화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며 살고자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모습이 꿈에도 나와 한주를 괴롭혔다. 절 괴롭히던 알파들인데 그저 한낱 인간으로 보게 되자 다가올 미래가 걱정되었다.
재강원 고등학교는 폐쇄적이고 재학생·졸업생·관계자에게만 학교를 오픈하기에 학교 행사에 외부인이 참여할 수 없다. 중간에 전학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비상문까지 다 닫혀 있었으니 방화가 분명해.’
의도적인 방화였다.
방화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내 일이 아니니까’라며 생각도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뻔히 일어날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자신도 바보 같다 생각하면서도 한주는 결국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3년 뒤, 졸업식에 참가한 3학년 학생 전원과 졸업생, 학부모 및 학교 관계자들, 대략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형 화재로 전부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