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학생회 임원 선발 캠프(2)
사람은 누구나 본성을 누르고 살아간다.
타인을 짓밟으며 상처입히고 싶은 잔인한 본능, 이기심, 이간질, 가스라이팅.
충동은 얇은 도덕심 아래에 도사리며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빈틈을 뚫고 나온다.
타인과 적당히 맞추며 어울려 살기 위해 자제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무리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한 방식이며 또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자기 억제는 안전한 일상을 지켜 준다.
어릴 때부터 주입된,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규칙 안에서 본성을 누르며 타인을 해치지 않고 피해 입히지 않으며 같이 사는 사회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배운다고 그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 자제하며 억눌러 두었을 뿐 작은 자극과 준비된 환경, 허락이 있다면 언제든지 드러나게 된다.
유전적 형질로 본능이 강한 알파와 오메가는 일상생활에서 더 자신을 억눌러야 했기에 스트레스가 그만큼 강했다.
그들에게는 베타보다 ‘하면 안 되는 일’이 많았고 페로몬이라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물질을 제어하기 위해 평소에도 많은 자제가 필요했다.
그런 알파들에게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무엇이든 해도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무마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베타’라는 같은 인간을 사냥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사나운 본능이 뛰쳐나왔다.
짐승이 되었다.
인간성을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거리낌 없이 페로몬을 발산했다.
그들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베타를 쫓았다.
평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알파들은 힘을 감추지 않고 같은 알파에게 주먹다짐을 하며 서열을 정했다. 팽팽하게 맞붙은 학생들은 피를 보며 싸웠다.
“이 새끼가!”
“좆만 한 것이, 덤벼!”
우강희는 싸우는 학생들을 피해 걸었다.
같이 다니던 치운과 원구는 베타를 잡겠다고 흩어졌고 성진은 귀찮다며 대강당 구석에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학생회 임원들이 성진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로열 알파를 쫓아낼 간이 큰 알파는 없었다.
강희는 사냥을 끝낸 학생들이 대강당으로 돌아오면 소란스러워지기에 조용한 곳을 찾아 본관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미묘한 페로몬이 신경을 건드렸다.
알파들만이 있는 재강원 고등학교에서는 맡을 수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아무리 허락이 떨어졌고 판이 벌어졌다지만 알파들의 흥분은 과했는데, 다 오메가 페로몬 탓이었다.
“이런 장난질까지 치다니.”
미간을 찌푸리며 공기 중의 페로몬을 보았다.
시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시각화했다.
얽히고설킨 알파의 페로몬들 사이에서 실같이 흩어진 한 줄기 오메가 페로몬을 찾아냈다.
학생들이 혼란스럽게 뛰어다니는 복도였지만 뚜렷한 지문처럼, 마치 그곳만 컬러풀한 느낌처럼 오메가의 페로몬이 또렷하게 보였다.
강희는 도발하는 페로몬의 흔적을 좇아 천천히 따라갔다.
‘박한주는 숨었을까.’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가 아는 한주라면 괴롭힘에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본능이 풀어진 알파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이를 드러내고 싸웠지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강희에게 닿지 않도록 피했다.
혼란 속에서도 그의 주위만은 평온했다.
* * *
제약이 없는 알파들은 학생회 임원 선발 캠프에서 잔인하게 행동했다.
베타를 잡아 린치하고 머리카락을 잡고 끌고 갔다. 인간이 아니라 동물, 아니, 그보다는 물건 취급을 했다.
끊임없이 폭력이 쏟아졌다.
알파들은 한 명씩 한 명씩 게임을 하듯이 번갈아 가며 때렸다. 누가 먼저 쓰러뜨리나, 누가 먼저 베타를 굴복시키나 내기를 했다.
울며 그만둬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옷과 속옷을 벗었지만 더한 굴욕과 고통을 느껴야 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외쳤다.
‘나는 버러지 같은 베타입니다. 인간쓰레기입니다.’
알파들은 그런 한주를 보며 웃었고 사진을 찍었고 조롱했다. 죽으라고 창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힘이 없는 약자에게는 그래도 되는 짐승의 세계.
오직 힘만이 전부인 약육강식.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한주는 생각했다.
그렇게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라면, 알파도 저들보다 강한 자가 나타난다면 달라질까.
힘의 논리를 따른다면 베타라도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강하다면.
교내 방송이 울렸다.
- D반 종료. D반 종료되었습니다. D반 학생들은 가드들에게 학생증을 제시하면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선택에 따라 본관에 남아 있으셔도 됩니다.
마치 게임을 하듯이 몇 반이 끝나고 몇 명이 남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악! 놔! 내 발로 가겠다니까!”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시끄러워. 이제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데 벌써 끝낼 수는 없지.”
“너희들…….”
신음과 발소리가 지나가고 한주는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다.
휘청이는 베타의 목을 움켜쥐고 알파들이 기세등등하게 가고 있었다. 그들은 빈 교실 하나를 택하더니 베타를 밀어 넣고 같이 들어갔다.
우당탕,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반항하는 소리도 났지만 알파들의 웃음이 뒤따랐다.
기숙사 옆방을 쓰는 베타였다.
부모님이 교육 사업을 크게 하는 집안으로 베타면서도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특권 의식이 있는 민석과는 달리 그는 보통 학생처럼 한주를 대했다.
옆방이라 얼굴만 아는 정도였고 반으로 찾아갈 정도의 친분은 없었다. 다만 이전의 삶에서 한주는 그에게 잘못한 일이 있었다.
한주가 알파들에게 잡혀 당할 때 그가 나타나 이목을 끌어 주었다. 잠깐의 틈이었지만 한주는 그사이에 도망쳤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때 그가 한주 대신 잡혔고 캠프가 끝나고 장기 입원하느라 자퇴했다. 나중에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주는 신음이 들려오는 교실을 바라보았다.
창문과 문이 닫혀 있는데도 복도까지 신음과 폭행의 소리가 들렸다. 둔탁한 타격음, 낄낄거리는 저열한 웃음.
알파들은 타인의 고통을 즐겼다.
베타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형질이 나뉘었을 뿐인데.
“사부가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는데.”
입은 투덜거려도 손은 근처의 분사형 빨간 소화기로 향했다.
학생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했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던 알파들이 한주를 발견하고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럼 나한테도 유리하지.”
손에 소화기가 들려 있어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경계하지 않았다. 캠프 시작 초반에 급히 베타를 잡으려던 조급함은 없었다.
배부른 짐승이 재미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한주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들에게 등을 돌려 교실 문을 열었다. 바닥에 쓰러진 베타의 위에 알파가 걸터앉아 웃옷을 벗기고 있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이전에 자신도 당해 봤다.
폭력보다 수치, 모멸감, 굴복이 더 괴로웠다.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재밌겠는데 나도 끼워 주지?”
한주는 돌아보는 알파들을 향해 소화기를 뿌리자 하얀 분말이 사방으로 퍼졌다.
“뭐야?”
“아, 저 새끼!”
욕설을 뱉으며 학생들이 팔을 휘저었다. 복도에서 따라 들어온 학생들에게도 소화기를 분사했다. 하얀 소화기 가루가 날리며 사방이 뿌옇게 변했다.
“악! 저 새끼 잡아!”
“콜록! 콜록! 잡아, 저 자식! 가만 안 둬!”
알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소화기를 던져 버리고 한주는 바닥에 누워 있는 베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뛰어!”
허둥대는 통에 무게가 실렸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약이 오른 알파들이 그들을 쫓아왔다. 평소라면 적당히 쫓다가 다른 타깃을 찾았을 텐데 소화기 분말에 반격을 당하자 오기가 났는지 한주만을 따라왔다.
“2층에 직원 휴게실이 있어.”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들었는지 베타의 헐떡이는 숨이 흔들렸다.
“그곳에 낮은 철제 캐비닛이 있는데 한 사람쯤은 들어갈 수 있으니까 해 뜰 때까지 숨어 있어.”
“뭐?”
달리다가 복도 코너 직후에 있는 빈 교실의 문이 열려 있자, 베타를 밀어 넣었다. 알파들은 한 명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이를 갈며 한주를 쫓았다.
“잡아! 저 새끼!”
“오늘 가만 안 둬!”
* * *
한주는 달렸다.
도망치는 방향에서 알파가 나타나 길을 막자 그제야 도망이 끝났다. 알파는 지구력도 강했다. 타고난 근골격이 달라 체력적인 한계가 왔다.
밤이 깊어 도망 다니기도 슬슬 피곤하고.
“잡았다!”
교실이 늘어선 복도라서 다른 층으로 빠져나갈 수 없었고 도망칠 곳은 사방이 막힌 교실뿐이었다. 좁혀 오는 포위망에 한주는 한숨을 쉬며 교실로 들어갔다.
복도보다 더 폐쇄적이라 도망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교실에는 선객이 있었다.
“뭐야, 복도가 시끄럽다 했더니 제 발로 베타가 찾아왔네.”
“손님이구나, 어서 와. 아, 얘 몇 반이지?”
“우강희 반 베타.”
“오, 우강희, 이성진이 있는.”
알파 넷이 교실에 둥그렇게 서 있었다.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학생이 고개를 까딱이며 한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도 꿇어.”
당연하다는 듯이 명령한다.
교무실에서 한주의 등을 떠밀었던 베타가 알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상의는 어디 갔는지, 셔츠와 바지만을 걸치고 무릎 꿇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옷에 신발 자국이 선명했다.
“이 새끼! 하,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더니 드디어 잡았다!”
뒤에서 다가온 알파에게 머리카락이 잡혔다. 씩씩거리며 교실로 들어온 알파들은 옷에 하얀 소화기 가루가 묻어 있었다.
알파는 이를 갈며 한주를 교실로 밀어 넣었다.
“제법 재미있었어, 응? 베타 주제에 제법이야.”
“간만에 제대로 열받게 하네.”
한주의 등을 발로 찼다. 몸에 힘을 빼고 있어서 바닥에 굴렀다.
그 모습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알파는 교실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를 질질 끌고 왔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왜? 너네도 이성진과 거래하게? 이 녀석 너네와는 다른 반이잖아.”
“이 자식이 도망이나 갈 것이지, 우리가 잡은 놈을 구하겠다고 끼어들었어. 그놈은 도망쳤고.”
“이성진이 와도 네놈은 안 넘겨. 해 뜨기 전까지만 우리랑 있자. 응? 재밌게 놀아 보자고.”
소화기에 당해 화가 났는지 이를 갈았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한주의 멱살을 잡아 뺨을 후려쳤다. 얼굴만이 아니라 어깨도 돌아갔다. 멱살을 잡고 있어서 쓰러지지 않았지만 아픔은 더 강했다.
화끈한 감각은 뒤늦게 몰려왔다.
입 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먼저 자리 잡았으니 다른 곳으로 가지? 우리는 보이지 않냐? 가루 날리지 말고 나가.”
한주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다시 손을 올리던 알파는 미간을 좁혔다. 먼저 교실을 차지하고 있던 알파가 텃세를 부리자 호승심이 일어났다.
평소 상대가 싸움을 걸어오면 귀찮아 적당히 피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 허락이 있었다.
“아니꼬우면 너희들이 나가. 여기서 나갈지 말지는 내가 정해.”
“하, 이 새끼. 성질부리네.”
“이 기회에 제대로 붙어 보든가.”
자기들끼리의 싸움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입구에서 지켜보던 알파들이 다른 쪽으로 부추겼다. 자극적인 이벤트에 많은 학생이 본관에 남아 있었다. 혈기왕성한 피는 쉽게 식지 않았다.
“누가 이 교실에 남을지 게임으로 정해. 우리가 승패를 가려 줄게. 어때?”
“좋은데. 우리 반은 이미 끝나서 이대로 끝내기 아쉬웠는데, 구경이나 하자.”
“좋지!”
와하하, 질 나쁜 웃음소리가 터지며 다들 동조했다. 그리고 누군가 게임을 지정했다.
“페로몬 게임으로 해. 게네들 베타잖아. 누구 페로몬이 더 센지 겨뤄 봐.”
* * *
페로몬.
알파와 오메가만이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인 페로몬은 곤충들끼리 정보를 전달하는 호르몬 매개체를 지칭하는 단어다.
언어로 소통하는 인간에게는 퇴화한 기관의 하나이지만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페로몬을 이용해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상대에게 알렸고 공격하는 파워로 이용했다.
일반적으로는 베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만 베타 또한 퇴화한 페로몬 기관이 남아 있었고 알파나 오메가처럼 페로몬을 또렷이 읽지는 못해도 감각의 하나로 느꼈다.
베타는 페로몬을 ‘분위기’로 읽는다.
침묵하고 있어도 상대가 화가 났는지, 토라졌는지, 그저 아무 생각이 없는지 분위기나 눈치로 느끼는 것처럼 페로몬의 영향은 ‘어, 갑자기 저 사람이 불편해지네.’, ‘껄끄럽네.’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파와 오메가가 페로몬을 또렷이 느끼며 읽는 것과는 달리 막 하나를 둔 것처럼 둔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가 페로몬의 영향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한다는 걸 자각 못 한다.
그것이 페로몬을 가진 자와 베타의 차이였다.
“페로몬 게임이라, 좋지.”
페로몬 게임은 상대를 페로몬으로 굴복시켜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었다.
알파가 자기 페로몬을 과시하기 위해 오메가를 대상으로, 주로 술자리에서 하는 게임이었다. 오메가는 강한 페로몬에 거절 못 하고 따르게 된다.
“해. 자신 있어.”
교실에 먼저 와 있던 알파가 도발했다.
그 말을 들은 베타는 몸을 떨었다.
프라이머 알파의 페로몬은 베타에게 강한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심하게 노출될 경우 쇼크가 올 수 있고 미성년자의 경우 호르몬의 균형이 흔들려 버려 평생 약을 먹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베타가 페로몬 게임을 꺼리는 건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건강 문제보다도 알파의 페로몬을 덕지덕지 묻히면 알파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수치스러워서였다.
“좋아, 해. 누가 더 강한지 해보자.”
한주의 머리카락을 놓고 알파는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 있던 알파들이 물러나 흥미진진한 상황에 눈을 빛냈다.
그때 복도에서 한 톤 높은 목소리가 들리며 일시에 조용해졌다.
“우강희다.”
모두의 시선이 복도로 향했다.
오직 한 사람의 발소리만 들렸다. 앞문에 서 있던 학생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한주는 머리카락이 잡혔던 뒷머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가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한겨울 깊은 숲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고요.
그의 눈에 감정은 없었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그를 확인한 알파 한 명이 눈치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우강희, 너도 참가할 거지? 저 베타, 너네 반이잖아.”
동조하며 주위의 몇 명이 말을 보탰다.
“그러고 보니 우강희가 저 베타를 눈여겨본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 걔가 저 베타야?”
“그럼 참가하겠네?”
웅성거리는 소리에 불안한지 알파가 소리쳤다.
“우, 웃기지 마! 내가 먼저 잡았어!”
호기롭게 외쳤지만 소리친 알파도 지켜보던 다른 알파들도 긴장하며 강희의 눈치를 보았다.
우강희의 것에 소유권을 주장했으니까.
그는 교실에 있는 알파 중에 한주를 가장 원할 사람이었다. 게다가 박한주를 보호하는 말을 했었다. 직접 보호하거나 자기 무리에 두지는 않아도 주시하는 한주를 다른 알파가 건드린다면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야, 옷 벗어.”
도발하듯 교실에 있던 알파가 무릎 꿇은 베타에게 명령했다. 강희에게 시선이 몰리자 기분이 상해 거칠게 다시 말했다.
“벗으라고!”
“뭐? 여, 여기서?”
“그래, 「벗어.」”
알파가 페로몬을 쓰기 시작했다.
우강희를 향한 도발이었다.
같은 프라이머 알파인데 패배감을 느꼈다. 차라리 로열 알파 이성진이 상대라면 자신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수긍하겠지만 강희는 같은 프라이머 알파였다. 같은 프라이머 알파에게 패배감을 느낀다니, 반발심이 일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응원했다. 턱을 치켜들며 강희를 보았다.
상대가 강희라면 지더라도 해 볼 만한 게임이었다. 오히려 진다 해도 ‘우강희라면 어쩔 수 없지’라며 맞게임을 했다며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또한 패배를 밑바탕에 깔아 놓은 무의식적인 생각이었지만 자각하지는 못했다.
강희는 도발을 무시하고 한주를 보았다. 그 시선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이긴 녀석에게 박한주를 넘기는 건가? 재미있는 게임을 하네.”
학생들이 일제히 뒷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2학년 이창원이 교실로 들어왔다. 재민석이 뒤따르고 있었다. 민석은 창원의 어깨 너머로 한주를 확인하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찾아다닌 한주가 이미 알파들에게 둘러싸여 있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2학년이 끼어들자 구경하던 1학년 중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2학년이 1학년 행사에 끼어들다니, 반칙 아닙니까?”
“끼어든 적 없어. 니들처럼 구경꾼이야. 그리고 박한주는 어차피 학생회로 넘어올 베타이니 굳이 대강당에서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우선 누가 저 녀석을 가지는가 확인해야지.”
교실 안에 베타는 셋이었지만 이창원은 일부러 한주만을 거론했다.
“우강희, 너도 참가하나?”
“안 합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흥미는 있는지 강희는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댔다.
알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둘만의 게임으로 누가 베타를 굴복시키느냐가 아니라 우강희 앞에서 누가 더 뛰어난가를 증명하는 게임이 되었다.
교실 안에 알파의 페로몬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알파들은 베타를 보았다. 먼저 교실을 차지했던 알파가 시작했다.
“우선, 「바지 벗어.」”
지켜보는 강희를 견제하기 위해 페로몬을 더 강하게 내보냈다.
보통의 프라이머 알파의 페로몬은 베타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알면서도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페로몬 게임을 하는 것이다.
핏기없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베타의 눈이 한주와 부딪쳤다. 하얀 셔츠를 입은 마른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베타는 눈을 질끈 감고 버클을 풀었다. 괜히 버티다가 알파의 페로몬을 몸에 묻히며 나중에 보복당하느니 먼저 벗고 알파의 비위를 맞추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바지가 다리를 타고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근육이 제대로 붙지 않은 마른 다리에 입은 검은 브리프를 하얀 셔츠로 숨겼다.
맨다리에 셔츠만을 걸친 베타에게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키득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전염이 되듯 번졌다.
“뭘 보고만 있어? 다음은 네 차례야.”
옷에 소화기 가루를 묻힌 알파가 한주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흔들었다. 아픔에 한주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신음은 나오지 않았다.
알파는 손에 힘주어 기어코 신음을 뽑아냈다.
“윽!”
“도와줄까?”
이창원이 살살 웃으며 옆에서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2학년이 끼어들자 머리카락을 움켜쥔 알파의 손에 힘이 실렸다. 한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와 달라고 빌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부탁해 봐. 개처럼 기어 와서 신발을 핥아. 성의를 보이면 도와주지.”
저열한 욕망을 감추지 않고 수치도 모르고 굴복하라며 종용했다. 가만히 올려다보던 한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을 강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저 때나 이때나 바뀌는 게 하나 없네요. 레퍼토리라도 바꾸든가.”
“뭐? 뭐라고 말하는 거야? 똑바로 말해.”
“내뱉는 말이 구리다고요. 요즘 초딩도 그런 말은 안 해요. 기어 와서 신발을 핥으라니.”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변함이 없다.
한주는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 알파들이 신이 나 모여들더니 2학년 이창원까지 끼어들었다. 민석은 어차피 2학년에게 빌붙은 존재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창원은 전혀 겁먹지 않은 베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이 녀석이 아직 기가 살았네. 올해 1학년들은 약해 빠져서 베타 하나 굴복시키지도 못하고 뭐 하는 거야?”
“그거, 지금 나한테 하는 말입니까?”
한주의 머리카락을 잡은 알파의 페로몬이 짙어졌다. 구경하는 알파들은 거북해져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페로몬을 내보냈다. 복종시키며 제압하려는 페로몬이 한주에게 달려들었다.
강희의 눈이 한주를 감싸는 페로몬을 좇았다.
“바닥에 엎드려서 「신발을 핥아.」”
한주를 향해 창원이 내린 것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학생들은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그동안 괴롭힘에 잘 버티던 베타 얘기는 들었기에 드디어 굴복하는구나 흥미진진해했다.
한주의 고개가 내려가며 몸이 흔들렸다. 페로몬이 먹혔다고 생각한 알파는 머리카락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흥분한 민석은 입술을 핥으며 박한주를 지켜보았다.
민석은 한주가 싫었다. 같은 베타라는 이유만은 아니다.
박한주는 알파들 사이에서 태연했다.
아무리 잘난 부모를 가진 베타 학생이라도 재강원 고등학교에 와서는 주눅이 들고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은 아껴 주는 가족에게 멘털 보호를 받았지만 날고 기는 알파들과 지내다 보니 알파와 베타의 격차를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민석은 어떻게든 알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맞추었지만 알파 무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박한주는 달랐다.
절 무시하며 경시하고 비하하는 알파들을 한주는 상대하지 않았고 허세나 오기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반에 녹아들었다. 알파든 베타든 모두 똑같이 대했다.
민석은 그것이 싫었다. 알파를 상대로 한주는 다른 베타와는 다른 것처럼 고고하게 굴었고 민석을 불쌍하게 보았다. 게다가 우강희까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마침내 오늘 한주가 굴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너도 당해 봐, 박한주!’
* * *
고개를 숙였던 한주가 머리카락을 잡은 알파의 손이 느슨해진 순간 겨드랑이를 주먹으로 쳐 손을 떼어 냈다. 알파는 악,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베타에게 반격당한 알파를 보며 학생들은 웃고 야유를 보냈다. 그사이 한주는 창문을 열어 창틀에 올라섰다.
3층이었다. 1층처럼 창으로 탈출할 가능성이 없는 높이이기에 방범창은 없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인데도 지켜보는 알파들의 눈에 긴장감은 없었다. 그들은 한주가 발악하다가 다시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나약한 베타니까.
“야, 그런다고 여길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베타가 떨어져서 죽는다고 누구 하나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학교에서는 사고사로 적당히 덮어 버릴 뿐이야.”
“내버려 둬. 발악하는 모습이 재밌잖아.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고.”
“저런다고 우리가 겁먹고 놓아줄 줄 아나 보지?”
학생들은 비웃었다. 한주가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볼 뿐이었다.
그 잔인함을 이전에도 겪었다.
3층 창틀에 동급생이 서 있어도 그들은 말리지도 않았다. 상처를 입고 돌밭을 구르고 무릎이 다치는 아픔을 겪어 보지 않았기에 타인의 아픔이나 위험에 공감하지 못했다. 육체는 성인이지만 정신은 아직 철없는 아이여서 아무렇지 않게 남을 상처 입히고 잠자리의 날개를 뜯듯이 잔인한 행동을 했다.
창원이 이죽거렸다.
“짜증 나니까 내려와. 그런다고 변하는 것은 없어. 뛰어내릴 거면 빨리 뛰어내리든가!”
“내려와!”
페로몬이 통하지 않자 알파가 화를 내며 한주에게 다가갔다.
“뛰어!”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도 동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뛰어라! 뛰어내려!”
“뛰어! 뛰어!”
그때 강희가 벽에서 등을 떼며 똑바로 서더니 입을 열었다.
“박한주, 이리 와.”
타인의 일에 관심도 없고 개입도 하지 않던 우강희였다. 한주에게 뛰어내리라고 소리치던 학생들이 일제히 그를 보았다.
“이리 와.”
강희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소화기 가루가 묻은 알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먹이를 눈앞에서 빼앗긴 상황이었다.
“「박한주! 뛰어내려!」”
빼앗기기 전에 없애 버린다. 페로몬을 다 열어 명령을 실었다. 프라이머 알파의 페로몬이 베타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럴 마음’이 들도록 흔들 수는 있었다. 만약 뛰어내릴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프라이머 페로몬의 명령에 등이 떠밀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주는 무덤덤한 눈으로 창 아래를 확인했다.
“박한주?”
민석은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불렀다. 동요하지 않는 한주는 보고 있자니 소름이 끼쳤다.
“혼자서는 나서지도 못하는 놈들이 말은 많지.”
차가운 바람이 한주를 스치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조용한 교실이라 학생들에게 또렷이 들렸다.
“너희가 무시하는 베타 한 명조차 혼자서 어쩌지 못해서 떠돌이 개떼처럼 집단으로 몰아넣었어, 1 대 1로는 맞붙을 용기도 없는 겁먹은 개처럼 꼭 무리 지어 다니지.”
“하, 뭐? 저 건방진!”
창원이 턱에 힘을 주며 한 발 내디뎠다.
한주는 창틀을 잡고 힙 팩에서 유리구슬 두 개를 꺼냈다. 2리터짜리 생수통 입구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특별히 주문 제작한 구슬로 세 개를 챙겨 가지고 다녔지만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아직 쓰지 않았다.
지금이 딱 쓸 때였다.
“알파도 울 줄은 알겠지. 너희가 한 만큼 눈물 콧물 좀 쏟아 봐.”
교실 중앙으로 유리구슬을 던지고 박한주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저!”
“뛰어내렸어!”
파삭, 유리구슬이 깨지자마자 안에 들었던 액체가 기화했다. 하얀 연기를 뿜으며 교실 안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마치 연막탄이 터지듯이 진한 연기였다.
“악! 콜록! 이, 이거 뭐야?”
“콜록, 콜록, 매, 매워! 내 눈!”
“이거 독가스 아니야? 교실을 나가!”
“콜록, 저 미친 새끼!”
알파들이 허겁지겁 교실을 뛰쳐나갔다.
그저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흡입하자 재채기와 함께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며 닿은 곳이 매웠다. 처음 겪는 고통이었다. 폭력과는 다른 고통에 알파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과 타액을 쏟아 냈다.
“야! 누가 뛰어내린 놈을 확인해!”
창원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소리쳤다.
교실 가운데에 있던 이들이 연기에 직격탄을 맞았기에 구경하던 이들은 몇몇만 피할 수 있었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며 연기가 복도까지 나오자 알파 둘이 연기가 없는 뒷문으로 들어가 창 아래를 확인했다.
“어, 없어! 그 베타 없어!”
“……없는데?”
1층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바닥에 뒹굴든가 누워 있든가 어떻게든 사람이 보여야 하는데 한주는 없었다. 시체라도 있어야 했는데 마치 환상처럼 흔적도 없자 뒤따라 들어와 확인한 학생들은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그들은 교실을 둘러보며 확인했다.
“도망친 거야? 아니 어떻게?”
“뛰어내리는 모습 봤잖아? 야, 봤지? 나만 본 거 아니지?”
“허, 도망쳤어? 3층에서?”
“제법이네, 그놈.”
연기에 당하지 않은 알파들은 화내기보다는 제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알파들은 원래 그랬다. 그들의 세상은 철저히 힘의 논리 위에 이루어졌다. 약한 자에게 강하며, 강한 자에게 도전하고 더욱 강한 자에게는 굴복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상대가 반항하며 도전하는 것을 즐겼으며 기꺼워했다.
약해서 순응하는 자보다 반발하며 덤비는 자를 더 인정했다. 그래서 알파들은 한주의 행동을 베타 주제에, 하고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제길!”
먹이를 놓친 알파가 욕을 뱉었다.
“야, 그럼 이제 게임 못 하겠네.”
“무슨 소리야? 계속해야지!”
누군가의 말에 소화기 분말을 뒤집어쓴 알파는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주변을 보자 강희도 보이지 않았다.
페로몬을 썼음에도 베타가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 망신을 만회해야 했다. 그의 고개가 이창원을 향했다.
그 뒤에 서 있는 베타 재민석에게.
“베타가 한 명 더 있잖아. 「너, 이리 와.」”
강한 페로몬이 순식간에 재민석의 몸을 휘감았다. 정교한 제어로 오직 민석만이 짙은 페로몬에 휩싸였다.
민석은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언제나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압박감보다는 약하지만 알파의 페로몬 느낌이었다.
“나, 나는 재강원 이사장의 아들이야!”
한주를 놓친 직후라 다시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알파는 페로몬을 짙게 내보냈다. 민석은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몸의 감각이 둔해졌다.
알파가 민석의 팔을 잡아 교실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게임을 재개해.”
“놔! 안 돼! 놓으라고!”
거부는 공기 중에 흩어졌다.
* * *
차원구는 대강당으로 돌아왔다.
이성진은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구는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처음 한 시간은 신나게 베타를 찾으러 돌아다녔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재미없어. 우리 성진이, 우리 반은 아직이야?”
“……아직.”
“하긴 잡았어도 아침까지는 가지고 놀겠지. 간만에 할 마음이 들었는데 우리 반 베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
원구는 모여 있는 학생회 임원을 보았다. 한주를 주로 괴롭히던 이창원도 없었다. 한주에 대해서는 관심 없지만 2학년의 누가 자기 반 베타를 괴롭히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박한주는 누군가에게 잡혔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숨었나? 재민석은?”
“……이창원을 따라갔어.”
“그래? 돌아다니면서 보지 못했는데.”
“……그래?”
원구는 성진을 툭툭 건드렸다. 부추기기보다는 심심해서였다.
“우리 성진이, 정말 참가 안 해? 네 페로몬이면 한 방에 끝인데. 확 쓸어 버리자. 이 기회에 로열 알파가 어떤지도 한번 테스트해 보고, 응?”
“……피곤해.”
원구도 성진이 말을 따라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우리 성진이, 페어를 만나도 이러려나? 먹자, 자자, 피곤해. 이러는 거 아냐?”
원구는 키득거리며 일어섰다. 성진의 옆에 있어 봤자 재미없었다.
“박한주 찾으러 갔다 올게. 바이바이.”
성진은 힐끗 멀어지는 원구를 보았다.
“……박한주라.”
그는 허리를 세워 일어나 앉는 정도의 관심은 보였지만 원구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 * *
“분명 2층으로 도망쳤을 텐데.”
이창원은 한주가 3층 창에서 도망치자마자 2층으로 내려왔다. 눈물과 콧물을 쏟아서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거칠게 교실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오늘 제대로 손봐 주려고 벼르며 기다렸더니, 쥐새끼 같은 놈.”
아무리 재강원 고등학교에 징계가 없다지만 창원은 사회적인 계산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폭행이 과하면 자신에게도 좋지 않기에 괴롭힘은 적당히 가감했다. 나름대로 봐주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정도로.
학생회 임원 선발의 캠프에서 제대로 손봐 주겠다고 기다렸는데 계획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몇 번 베타를 혼내 주고 말 생각이었다. 민석이 옆에서 부추겼지만 그 속내가 뻔히 보여 한두 번 말하는 대로 어울려 주며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이사장의 아들이지만 베타였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맥이었다.
입학식에서 민석을 보았지만 재강원의 옆에 서 있으면서 관심도 받지 못했다.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임을 알았다.
“이사장도 불쌍하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프라이머 오메가에 하나는 베타였다. 형인 프라이머 오메가도 사실은 프라이머도 되지 않는데 재강원의 부인이 억지로 등급을 올렸다는 말도 있었다.
재강원의 첫째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오메가 페로몬이 희미했었다. 그 집안이라면 충분히 미등급 오메가를 프라이머로 만들 수 있었다.
알파 자식이 하나도 없으니 집안에서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 정도면 혼외자라도 자식으로 받아들였을 텐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즉, 밖에서도 알파 자식 하나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창원은 로열 알파이고 아버지뻘의 재강원 이사장이 열등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잘나면 뭐 하겠는가.
“돈이 많으면 뭐 해. 로열 알파면 뭐 하냐고. 씨가 그 꼴인데.”
생각은 민석의 가족사에서 다시 한주에게 향했다.
한주는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부유층의 자식 중에 베타도 많았다. 집안이 좋으니 알파만큼 자신감이 넘치는 베타도 있기에 한주의 태도만을 건방지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창원은 한주가 거슬렸다.
많은 학생이 있어도 단번에 찾을 정도로 눈에 띄었고 실제로 수많은 학생이 움직일 때 한 번에 한주를 찾은 적도 있었다.
페로몬도 없는 고작 베타를 페로몬으로 제압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 아무리 괴롭혀도 상처 입지 않는 그 눈을 보고 있으면 하얀 눈밭에 가장 먼저 발을 내디뎌 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본능이었다.
바닥에 꿇어 앉혀 굴복시키고 울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정복욕을 불러일으켰다. 저를 보면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박한주, 어디 있는 거냐, 응?”
아직 시간은 있다.
한주를 잡았을 때를 생각하니 기대감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자기만의 페어를 만나는 것처럼 설레는 두근거림도 있었다.
창원은 준비실로 들어갔다. 수업에 필요한 자료나 기자재들이 있어 사람 하나 숨을 공간이 많은 장소였다. 책상 아래나 캐비닛을 열어 안을 살피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절 찾았습니까?”
“박한주.”
한주는 준비실 문에 서 있었다.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할 얘기가 많죠.”
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창원을 보는 눈은 무덤덤했다. 씨익 창원이 입을 길게 늘이며 웃었다.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보통은 계속 참겠는데 오늘은 무슨 일이 생겨도 없었던 일로 해 준다니까 선배가 생각났어요. 괜한 곳에 계속 돈을 쓰게 되니까. 내가 직접 세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떨 때는 옷을 새로 사야 할 정도라서요.”
이창원의 괴롭힘이 한주에게는 ‘돈을 쓰게 해서 귀찮은’ 정도일 뿐이었다. 창원의 팔에 솜털이 바짝 섰다.
존재가 다른 대상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소름. 그것은 경외와 공포의 어딘가에 존재했다.
겨우 베타를 상대로 그리 느꼈다.
창원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이 일부러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사자에게 궁지에 몰려 털을 세우는 고양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사자가 아니라 쥐 새끼라고 여기던 베타였다.
“베타가 알파 상대로 뭘 하려고. 기껏해야 살려 달라고 빌거나 바지나 벗겠지.”
왜 자신의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지 의아했다. 그런 느낌 자체가 소름이 끼쳤다.
상대는 알파도 아니다. 자신보다 상위의 로열 알파도 아니고 페로몬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몸은 경고를 보냈다.
창원이 한껏 긴장하고 있는데 한주는 작게 하품을 하며 준비실 문을 닫았다.
“해 뜰 때까지 조금이라도 자 두고 싶으니까…… 빨리 끝내죠.”
한주는 창원에게 한 발 다가섰다.
* * *
자정이 넘었다.
들개 떼처럼 몰려다니며 각 반을 뒤지던 알파들은 더 이상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의 반이 종료되었다고 교내 방송이 나왔지만 본관을 돌아다니는 학생들의 수는 줄지 않았다.
다른 반의 베타를 사냥해서 가지고 노는 무리도 있었고 이 기회에 서로의 우열을 가리려고 맞붙은 이들도 있었다. 잘 시간이 넘었지만 긴장으로 팽팽해진 신경은 졸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빈 복도를 확인하고 한주는 다시 몸을 숨겼다.
“아, 쓰라려.”
손가락 끝이 붉게 쓸려 엉망이었다.
도망 다닐 때 2층 창을 열어 두었다. 만일을 생각해 대비했는데 정말 이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알파들이 뛰어내리라며 일제히 소리쳐서 열받아 뛰어내려 버렸다. 3층 바닥 턱을 잡아 몸을 지탱하다가 손가락 끝이 거친 시멘트에 쓸렸다.
그때는 아픔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쉬고 있자니 통증이 올라왔다. 창원을 정리한 건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았다.
복도로 알파들이 지나갔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물 만난 물고기들이네.”
잡혀 줄 생각은 없다. 생각해 두었던 은신처는 다른 베타에게 알려 주었으니 B안으로 생각해 둔 직원 탕비실로 가기로 했다.
“우선은 자리를 바꾸자.”
몸을 일으켜 계단 뒤에서 나왔다. 그런데 복도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근처에 열려 있는 도서실로 들어갔다. 책장이 많으니 몸을 숨기기 좋았다.
몸을 숨기자마자 앞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여기도 있었네.”
우강희였다.
설마 자신에게 페로몬을 묻혀 둔 것일까. 소취제로 대비는 했는데.
긴장하며 몸을 수그리는데 강희는 마치 무언가를 보는 듯이 허공을 훑더니 도서실의 접수처로 다가갔다. 안쪽 책상에서 작은 방향제를 꺼내더니 못마땅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창문으로 향했다.
그가 창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이 도서실로 들어왔다.
“애써 준비한 선물을 누가 치우나 했더니, 우강희, 넌가.”
학생회장 우천희, 그리고 그 뒤를 한수원이 따라 들어왔다. 부회장 한수원은 항시 학생회장인 우천희 옆을 떠나지 않았다. 순찰하는 경비처럼 강희를 보지도 않고 도서실을 돌아다녔다.
강희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지만 놀라지 않았다.
“페로몬으로 장난을 친 사람이 당신이었습니까?”
“전통적으로 사용한 방법이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꼬꼬마 1학년들이니 사냥하라고 풀어 줘도 굳어 버리니까. 가벼운 촉진제로 사용하지.”
천희는 “학교 측에 알려도 아무 문제 없어.”라면서 강희의 손에서 방향제를 가져갔다. 그리고 손을 휘둘러 강희의 뺨을 때렸다. 짝, 피부가 부딪치는 날것의 소리가 났다.
돌아다니는 수원 때문에 다른 곳으로 숨으려 했던 한주는 놀라 그들을 보았다. 천희가 턱에 힘을 주며 화를 참았다.
“참가하지 않을 거면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건방지게 나서지 말고. 왜 하필 이 학교로 온 거지? 거절하라고 했잖아.”
“아버지 명령이었습니다.”
“싫다고 했어야지. 왜 내가…… 학교에서까지 네 형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세컨드 자식 주제에!”
수원은 평온한 목소리로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이제 세컨드는 아니야. 아버님과 정식으로 결혼하셨잖아.”
“넌 조용히 해!”
천희는 신경질을 냈지만 수원은 “예, 명대로 하죠.”라면서 이죽거렸다.
“그럼 직접 아버지께 말하시죠. 전학시키라고.”
“너…….”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한주에게도 들렸다.
이전의 삶에서 2학년 때, 우연히 잡지에 실린 우상진 의원 가족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우상진 의원과 부인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뒤에 각각 천희와 강희가 서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이 형제임을 알았다.
학교에서는 표정이 없어도 집에서는 그나마 미소를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 후 학생들의 대화로 그들이 배다른 형제라는 가족사를 들었지만 이 정도로 사이가 나쁠 줄은 몰랐다.
타인의 사생활을 계속 보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눈을 돌리는데 수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흐음.”
많은 뉘앙스를 품고 있는 수원의 목소리가 천희의 시선을 끌었다. 다행히 그의 위치에서는 한주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누가 있어?”
수원은 한주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아니, 방금 생각났는데, 우리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운 거 같지 않아? 강당에 한 번씩은 가 봐야지.”
“이 시간이면 찾아올 녀석도 없어. 다들 한창 즐기고 있겠지.”
“그렇기는 하지만…… 강당에 놔두고 온 임원들이 네가 자러 간 것은 아닐까 의심은 하지 않겠지. 학생회장이 등장하면 긴장할 테고.”
수원은 한주를 보며 얘기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입으로 천희에게는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눈으로는 한주를 주시했다.
한주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돌아가.”
천희는 수원을 불렀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부르는 손짓에 수원은 불쾌해하지도 않고 제 주인에게 다가갔다. 한주가 그 안에 숨어 있다고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천희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도서실을 나가기 전, 손에 든 방향제를 바닥으로 던졌다. 파삭, 가벼운 소리를 내며 병이 부서졌다.
“선물이다. 우강희, 너도 오늘 좀 즐겨야지.”
불길한 소리를 남기고 그들은 도서실을 나갔다.
강희가 나가기를 기다리며 한주는 조심스럽게 책장에 등을 기댔다. 알파 사회에서는 가십 거리도 되지 않을 가정사지만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을 사람은 없다. 아무리 강희가 무심한 편이라지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천희…….”
강희가 이를 갈았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곧 신음을 뱉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며 쓰러지는 소리도 났다.
‘뭐지? 왜 안 나가?’
한주의 위치에서는 강희의 다리만 보였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도서실 문을 향하지 않고 창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아까 한수원이 창문을 다 닫았지.’
문득 왜 수원이 창문을 닫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윽! 제길! 우천희!”
강희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천희가 나가면서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한주는 벌떡 일어나 빠르게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주를 보며 강희는 눈을 크게 떴다.
“너, 박한주? 네가 왜 여기에……?”
오메가인 엄마 박예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한주가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었다. 알파나 오메가의 가족이라면 알아야 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한주가 하는 아르바이트도 페로몬과 관련한 일이어서 기본적인 대처 방법은 알고 있었다.
알파나 오메가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가장 먼저 환기를 한다. 환기를 하고 대상자를 격리한다.
타인에게 페로몬으로 피해를 주지 않도록.
“내가 먼저 와 있었어. 말해. 또 뭘 해야 해?”
창문을 다 열고 도서실 문을 열려는데 열리지 않았다.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문만 덜컹거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도로 난 창은 세로로 된 길쭉한 폐쇄 창이라 열 수 없었다.
“잠그고 나갔어. 문이 안 열려.”
“밖으로 나가…….”
온 힘을 긁어모으는 저음. 평소의 우강희와는 다르게 선명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절박함도 있었다.
수원이 한주를 발견하고도 웃으며 그대로 나가서 눈감아 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어. 문이 다 잠겼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페로몬이.”
“나가!”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강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시 고함을 질렀다.
“나가라고!”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이나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다. 비록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리지만 이유 없이 소리 지를 강희가 아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그는 몸을 웅크렸다.
“나가, 위험해…….”
“우강희, 난 괜찮아. 난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어?”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책상에 있던 볼펜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자기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강희의 손목을 잡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볼펜이 피부를 뚫고 들어갔을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진심이었는지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막으려고 잡은 한주의 손도 같이 떨렸다.
“놔, 어서…… 나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며 강희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한주를 밀쳤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한주는 버둥대는 팔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부림에 데스크 위의 종이가 바닥에 흩어졌다.
“놔! 꺼지라고! 빨리 나가!”
“우강희, 정신 차려! 난 괜찮아.”
“나가!”
“아, 정말. 문 잠겼는데 어떻게 나가냐고!”
자신보다 몸집도 컸고 상대는 필사적이었다. 밀쳐 내는 손에 힘이 실렸고 어깨를 쳤다. 근접전이라 한주의 힘으로는 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강희를 제압하다 보니 그의 흥분이 몸에 닿았다. 알고 싶지 않은 타인의,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의 크기를 알아 버렸다.
“나도 어쩔 수 없어 하는 행동이니 나중에 화내지 마! 널 위한 행동이야!”
한주는 그의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강희는 맞았으면서도 한주의 양 손목을 움켜잡아 바닥에 눌렀다.
“안 돼…….”
몸에 힘이 빠지며 그가 기절했다.
“말을 좀 들어라.”
바닥에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한주는 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힘이 빠진 몸이 한주의 몸을 눌렀다. 머리카락이 한주의 어깨에 흩어졌고 짙은 땀내와 함께 하체가 붙었다. 온전한 그의 체중이 한주의 몸을 눌렀다.
“으아……. 야, 좀, 몸!”
옆으로 육중한 몸을 밀어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엎드려 있는 강희에게서 떨어지며 팔을 거칠게 비볐다.
“알파라지만 너무하잖아. 뭐 저런 크기가.”
바닥에 흩어진 방향제의 잔재를 내려다보았다. 향은 강하지 않았지만 강희의 반응으로 보아 천희가 깨뜨린 방향제가 문제인 것 같았다. 도서실 데스크를 뒤져 티슈를 가져왔다.
깨진 방향제를 주워 창밖으로 던졌다. 바닥을 닦은 휴지도 같이 던져 버렸다. 페로몬이라면 실내의 쓰레기통에 버릴 수 없었다.
아직 5월이었고 밤에는 조금 추웠지만 환기해야 해서 창을 닫을 수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 강희를 내려다보다가 도서실 구석에 있는 무릎 담요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알파들이 의식하며 한 수 접어 주던 그가 지금은 창백한 얼굴로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자신 때문에 기절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알파도 고생이네.”
문이 잠겨 있어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리번거리다 한주는 밖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를 찾아 책상 안쪽으로 들어가 등을 기댔다.
“두 번 도와준 셈인가.”
찬 바닥에 누운 강희를 보다가 한주도 눈을 감았다.
* * *
차가운 공기에 우강희는 잠에서 깼다.
모로 누워 있어 목에서 통증이 올라왔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경직되었던 근육이 서서히 풀렸다. 눈을 뜨니 책장들이 보였다. 창으로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왔다.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이르게 느껴졌다.
‘잤나?’
잠을 잤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급히 일어났다. 자신의 방이 아닌 낯선 공간이었다. 습관처럼 자신과 같은 공간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어야 했다.
있어서는 안 된다.
“아!”
도서실에 그 혼자가 아니었다. 데스크 아래에 박한주가 누워 있었다. 그가 숨을 쉬는 같은 공간에 베타가 있었다. 손 뻗으면 닿을, 가까운 거리였다.
믿기지 않았다.
시선으로 한주의 얼굴을 훑었다. 멀쩡해 보였다. 다친 곳도 어긋난 곳도 부러진 곳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 했다.
죽지는 않았는지.
살아 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한주의 코밑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얕은 호흡이 그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살아 있다.
믿기지 않아 한주의 목을 감싸며 맥박을 찾았다. 피부는 따뜻했는데 맥박이 느껴지지 않았다. 깊은 곳에 있어 느껴지지 않는 것인가 싶어 손끝에 힘을 주자 그 압력이 불편했는지 한주가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으응…….”
꿈지럭대더니 다시 잠들었다.
“……어떻게?”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은 페로몬을 확인했다. 환기했지만 바닥에 지난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우천희가 던지고 간 방향제는 오메가의 유혹 페로몬이었다. 파티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흥분을 돋우기 위해 사용하는 종류로 발화가 빠르고 일시적으로 흥분을 높이지만 지속성은 약했다. 학생회 임원 선발에 참여하는 알파들의 기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본관 곳곳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평소라면 그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사방이 막힌 도서실 안에 오메가의 유혹 페로몬이 터지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본관을 돌아다니며 호전적인 알파 페로몬과 곳곳에 퍼진 오메가의 유혹 페로몬에 노출된 상태라 영향력이 커졌다.
주위의 페로몬을 차단하며 잘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예민해진 신경에 직격탄으로 맞아 버렸다.
페로몬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휘감으며 흥분시켰다. 제어했지만 몸에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몸을 웅크리고 참았지만 틈 사이로 빠져나가기 시작해 막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페로몬이 퍼진 공간에 박한주도 있었다.
잠든 한주를 보았다.
믿기지 않아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겪어 왔기에 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페로몬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주위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잠든 한주의 존재가 더 믿기지 않았다.
“박, 한주?”
어느 순간부터 한주라는 베타가 시선 끝에 걸렸다.
누군가가 생각나서.
상대는 모자와 천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한주를 보면 호텔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키는 비슷했지만 한주 정도의 키를 가진 남자는 세상에 많았다. 은인이 한주라고 단정 지을 단서는 없지만 절 구해 주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었다.
“설마.”
확인은 간단했다.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해도 될까.
테스트만으로도 큰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조금만 제어를 놓친다면 인명사고로 이어지고 걷잡을 수 없어진다.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우강희는 페로몬을 조심스럽게 내보냈다. 바늘로 톡 찔렀을 때 피 한 방울이 맺히는 정도의 극소량이었다.
“「일어나. 박한주.」”
크지 않은 목소리. 상대를 깨우려는 의도는 없는 크기였지만 강희는 목소리를 더 높이지 않았다. 목소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는 기적을 본 적이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어서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기적이었다. 한주에게 일어나라고 페로몬에 명령을 실어 보냈지만 머리의 한구석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의 페로몬이 살금살금 한주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 갔다. 거미줄처럼 얇게 뒤덮었다.
한주가 반응을 보여야 하는 순간 덜컹, 도서실 문이 움직였다. 열리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잡아당기고 있어서 그 바람에 덜컹거렸다.
강희는 흠칫 놀라며 문을 보았다.
“뭐야, 밖에서 잠겼어.”
“안에 우강희가 있네. 우강희, 뭐 해?”
차원구가 창으로 안을 확인했다. 그리고 철컥 잠금쇠가 풀리며 도서실 문이 열리는 순간 강희가 막았다.
“열지 마.”
원구는 강희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손을 멈추더니 작게 열린 문 틈으로 안을 확인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원구는 강희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뭐야? 뭔데 그래? 안에 우강희가 있어?”
옆에서 물어 오는 말에도 원구는 긴장한 눈을 돌리지 않고 강희를 보았다.
“우리 우강희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가 봐. 다른 곳으로 가자. 우강희! 박한주 보면 연락해. 그 녀석 아직 잡히지 않았어!”
안에 들으라는 듯이 소리치고 원구는 알파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곧 해 뜰 텐데 박한주는 어디 숨은 거야? 이성진도 참가 안 한다더니 박한주가 잡히지 않으니까 찾으러 가더라.”
“다른 반은 다 끝났지?”
“들었어? 박한주가 3층에서 뛰어내렸대.”
“알파도 3층에서 뛰어내리면 중상이야. 가능하겠냐?”
“하긴. 그런데 희한하네. 졸렸는데 여기 오니까 잠이 확 깨 버렸어.”
대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희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어느새 한주가 잠에서 깨 데스크 밑에서 고개를 내밀고 복도를 보고 있었다. 금방 잠에서 깨었는지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너.”
한주는 강희를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기절시킨 일은 불가항력이었어. 알지? 나중에 복수한다느니 그러지 마라. 문 열렸으니 난 이만 간다.”
빠르게 자기 할 말만 하고 한주는 몸을 일으켰다. 강희는 빠르게 한주의 팔을 잡았다.
“왜?”
잠깐 열렸던 복도 문으로 복도의 공기가 도서실 안으로 들어오며 옅게 남은 그의 페로몬을 창밖으로 밀어냈다. 그의 페로몬은 분명 도서실에 퍼져 있었다. 자신의 페로몬을 못 알아볼 정도로 힘이 약하지 않았다.
“베타가…… 내 페로몬을 견뎠다고?”
“뭐? 아, 난 괜찮아.”
“너.”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더 비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아, 씨. 화장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달려왔다. 강희는 흠칫 놀라는 한주를 끌어당겨 문 옆으로 같이 숨었다. 한주를 모서리에 넣고 그 앞을 그가 덮듯이 가렸다.
몸이 닿을 듯이 거리가 가까워서 그가 숨 쉴 때마다 한주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발소리는 잠시 도서실 앞에서 느려졌다. 조금 전에 원구와 지나갔던 알파였다.
“우강희는 다른 곳으로 갔나?”
기웃거리더니 급히 도서실 앞을 떠났다. 발소리가 멀어져 들리지 않자 한주는 강희의 어깨를 밀며 참았던 숨을 뱉었다.
“어, 고마워. 난 간다.”
조용한 복도를 확인하고 원구가 간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한주는 어깨를 움츠리며 잠깐 뒤따라오지 않는지 확인하고 발을 재게 놀렸다.
“괜히 쫄았네.”
가까이 붙어 있자 그가 쓰러질 때 닿았던 우람한 것이 떠올랐다. 강희에게 밀려 벽에 기대면서 닿지 않았는데도 유독 하체가 신경 쓰였다.
“에이, 뭘 생각하는 거야. 남의 거야, 남의 거.”
머리를 흔들며 엄한 생각을 털어 냈다.
해가 뜰 때까지 박한주는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았다.
* * *
해가 뜨면서 본관의 스피커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며 1층 방범 창이 올라갔다.
외부 출구를 막고 있던 가드들이 본관을 돌아다니며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드들은 그때까지 싸우고 있던 학생들에게 소취제를 뿌려 싸움을 중지시켰고 상황을 정리했다. 상처가 심한 학생들은 병원으로 이송했고 남은 이들은 기숙사로 보냈다.
몇 대의 구급차가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조용히 재강원 고등학교를 빠져나갔다.
흥분을 가라앉힌 알파들은 하나둘 기숙사로 돌아갔다. 밤을 새우는 캠프가 있었지만 다음 날 수업은 있었다. 알파의 체력을 생각해도 밤샘 행사 이후에 특별히 하루를 쉴 필요도 없고 그 정도로 결석한다면 그것 나름대로 알파 사회에서는 약하다는 증거이기에 학생들은 피곤해도 수업에 참여했다.
고등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로 나가도 고등학교 때의 인맥이 이어졌고 부모들은 한 다리 건너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라도 허투루 약점을 보일 수 없었다.
1학년들은 스트레스를 발산한 작은 행사라고 생각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지만 학생회 임원은 웃을 수 없었다.
일출 전에 베타를 데려온 알파들 리스트로 학생회 임원 선발이 거의 끝났다. 그러나 명단에는 딱 한 자리가 비었다.
일출 때까지는 맞추어 올 거라고 생각하며 대강당에서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학생회장 우천희는 화는 내지 못하고 명단을 테이블에 던지듯이 놓았다. 빈칸을 툭 손가락 끝으로 쳤다.
“회장.”
핸드폰을 보고 있던 한수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천희를 불렀다.
“이창원 병원에 실려 갔대.”
“뭐? 이창원이 왜 병원에 가?”
“쌍코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다리가 부러졌대.”
“이창원이? 누구와 싸웠는데?”
창원의 호전적인 성격을 아는 천희는 짜증 냈다. 쉽게 당할 리 없는 알파가 당했다. 수원은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그건 모르지. 나도 방금 연락받았을 뿐이라.”
“쯧, 어떻게 그런 놈이 임원이 됐지.”
천희는 창을 보았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는 떴지만 마지막 베타를 데려오는 알파는 없었다.
해가 떴으니 지금 데려와도 소용없다.
최악으로 베타 혼자 도착하는 상황보다는 나았기에 누군가 늦게라도 베타를 데리고 오기를 기다렸다. 임원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기에 누구도 그만 끝내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라, 저거 우강희네 반의 베타지? 아직 오지 않은 녀석.”
수원이 무료하게 창밖을 보고 있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행사 전에 각 반의 베타들 사진과 명단을 확인했기에 알아보았다. 리스트를 가져가 사진과 대조하며 다시 확인했다.
“박한주. 쟤 아직 오지 않은 그 녀석 맞는데?”
“뭐?”
천희는 수원의 옆으로 가 창밖을 보았다.
수원이 ‘저기’라며 손가락으로 기숙사로 향하는 학생 중 하나를 가리켰다. 건장한 체구의 알파들 속에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작은 체구의 학생은 단연 눈에 띄었다. 주위의 알파들이 베타를 힐끔거렸다.
천희는 행사 시작 전에 건방지게 질문하던 베타 하나를 떠올렸다. 100여 명에 가까운 알파에 둘러싸여 베타를 사냥한다는 말을 들은 베타의 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마치 우강희처럼.
“저 자식…… 기숙사로 돌아가는 거야? 이곳으로 오지도 않고?”
“우리 학생회를 뭐로 보고.”
임원들이 창에 줄줄이 서서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오히려 다행이지 않아? 베타를 학생회 임원으로 받지 않을 핑계가 생겼잖아. 저 녀석이 해 뜨고 여기로 왔다면 학생회 최초로 베타 임원이 선발되는 거야. 졸업한 선배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건데?”
천희는 낙천적으로 말하는 수원을 노려보았다. 선배들이란 말에 연초에 학생회장이 되면서 초청되었던 OB 모임을 떠올렸다.
애송이 알파는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압박감이 대단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등줄기가 긴장으로 흠뻑 젖었었다.
천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래서 좋아하라고? 베타 한 명을 잡아 오지 못하고 학생회가 무시당해서 임원에 결원이 생겼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베타 한 명도 못 잡아 농락당한 걸 어떻게 설명할 건데?”
“고지식하기는.”
듣고 있던 학생회 임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간혹 베타 중에도 알파 못지않은 능력을 타고나는 이가 있다. 최초로 베타가 재강원 고등학교의 임원이 된다면 최소한 그 변명을 댈 수 있다. 하지만 임원 선발에 결원이 생긴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베타가 학생회를 무시하고 물먹이는 상황이다. 재강원 고등학교의 학생회는 베타에게 무시당했다.
그들을 무시하고 일출 후에도 대강당으로 오지 않은 베타.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는 대대로 막강한 알파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학생회 임원이라는 이유로 선배들과 인맥이 생긴다. 그것은 사회로 이어져 거대한 권력이 되기에 재강원 고등학교의 학생회 임원이란 타이틀은 부모에게도 자랑이 되는 자부심이었다.
그것을 일개 베타가 무시했다.
천희는 주먹을 꾹 쥐며 기숙사로 걸어가는 한주를 노려보았다.
“저 베타를 불러와. 이대로 끝낼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