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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인 (5/31)

5. 은인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우강희는 어느 연말 자선 파티에 참석했었다.

아버지 우상진의 명령이었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많은 사람에게 적응해야 하지 않겠냐며 참석을 강요했다.

참석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역하다고 생각한 페로몬은 넓은 연회장에 퍼져 있었다.

알파, 오메가의 페로몬.

견제하고 적대하며 호감을 보이고 유혹을 하는 온갖 감정이 섞여 멀미가 났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페로몬이 나오지 않도록 훈련하며 철저히 제어해 왔지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바위가 파이듯이 틈이 생겼다.

어쩌면 방심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우천희의 장난질이 과했을 수도 있다. 원인을 따지기 전에 순식간에 상황은 나빠졌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 제발!”

“사, 살려 줘!”

최대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연회장에 있던 고객과 내부에서 일하던 호텔 직원들까지 누구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직원들도 음악 엔지니어도 연주자도 다들 신음을 내질렀다.

60대 나이 지긋한 어느 회사 대표부터 성악가로 유명한 우아한 소프라노도, 젊잖다 호평하며 도덕적이라고 칭송받는 자선 사업가와 아직은 앳된 20대 대학생도 다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이성을 잃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처럼 행동했고 누울 자리와 설 자리만 있으면 아비규환이 되었지만 연회장의 한곳만은 둥글게 비어 있었다. 짐승처럼 행동해도 그들은 닿지 못하는 한 사람을 열망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공터를 만든 곳 가운데에 우강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열망하며 닿고 싶어 하면서도 둥근 보호막에 막힌 듯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가지 못했다.

우강희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이성은 있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알파와 오메가가 유혹하는 페로몬이 폐 안에 가득 들어왔고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세포를 달구었다.

우강희는 실낱같은 이성으로 가까스로 참았다. 제정신을 유지하지 않으면 잡아먹히고 만다.

“조, 좋아!”

“미치겠네!”

사방에서 들리는 신음이 우강희의 이성을 자극하며 흩트렸다.

흔들리지 않도록 슈트를 꽉 움켜쥐었다. 벌게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그럴 때마다 그의 가까이에 오지 못한 사람들은 술렁이며 한 발 다가왔고 곧 이성을 되찾고 노려보는 시선에 안타까워하며 멀어졌다. 그들은 밀고 당기며 기회를 노렸다.

귀를 막았지만 그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수십 명의 눈이 강희를 보며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했다.

차라리 호흡을 멈추면 편해지지 않을까.

폐쇄된 연회장에서 100명이 넘는 인원이 뿜어내고 있는 페로몬은 농도가 짙었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유혹이나 플러팅보다 강한, 시각적인 자극과 말초를 건드리는 유혹 페로몬은 이성을 망가뜨렸다.

조금이라도 그가 이성을 잃는다면 사람들은 참지 않고 행동할 것이다.

차라리 죽을까.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죽음밖에 없었다.

죽고 싶다.

끝내고 싶다.

그의 눈에 깨진 접시가 들어왔다.

음식도 묻지 않은 깨끗한 접시는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만지기만 해도 피부를 갈라 붉은 피를 쏟을 간단한 도구가 눈에 띄었다.

죽어 버리면 끝나겠지.

한번 떠오른 달콤한 상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죽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귀를 막은 오른손이 천천히 깨진 접시로 향했다.

더는 힘들어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만 마음을 정하면 됐을 일이다. 왜 자신은 존재하는가를 물으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로 사라지는 것이 더 편하다.

쉬운 일을 괜스레 끌어왔구나.

후련함, 기쁨이 가슴을 채울 줄 알았다.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늘로 끝내자.

그때 선명한 온기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사람의 따뜻함.

자신이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와 접촉할 수 없으니까.

한 소년이 우강희의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포진한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괜찮아?”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얇은 일회용 검은 마스크 하나만을 걸친 소년은 그의 손목을 붙잡아 정신 차리라는 듯이 흔들었다. 청바지와 소매가 긴 검은 티셔츠 위에 호텔 직원용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검은 마스크는 덴탈용으로 얇디얇아서 먼지도 걸러 주지 못할 아이템이었다.

페로몬이 가득한 곳에서는 덴탈 마스크는 쓰나 안 쓰나 똑같았다.

말도 안 돼.

믿기지 않았다.

“헉, 헉…… 어, 어떻게……?”

간신히 접근 불가 영역을 만들었다.

그의 페로몬이 형형하게 주변 공기를 제압하며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데 소년은 그의 영역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 인간이라면 절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도, 만질 수도 없어야 하는데.

인간이라면.

“일어설 수 있어? 나가자.”

모자를 쓴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리한 시선은 사람들의 정적인 모습에 잠시 동요했지만 곧 냉정함을 찾았다. 소년은 그들을 경계하며 강희를 일으켜 세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강한 악력에 아픔이 느껴져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

그들이 일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따라왔다.

“벽을 따라 천천히 움직여.”

소년은 사람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를 이끌었다. 수십 마리의 사자 떼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긴장감.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달려들어 물어뜯을 분위기였다.

그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베타도 이성을 잃고 바지를 벗어 버릴 정도의 페로몬이었다. 누구도 그의 페로몬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소년은 조금 긴장했을 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폭발물이라도 된다는 듯 사람들은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면 달려들 듯이 노려보았지만 결코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본능을 누르지 못하고 계속 신음을 질렀다.

소년과 그가 움직일수록 긴장이 고조되었고 그 소리는 더 격해져 커졌다.

“직원들이 문 앞을 다 막았으니까 나가기만 하면 돼.”

나직이 설명하며 소년이 문을 향해 움직였다. 그 말에 꾹 손으로 옷을 누르며 강희는 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안 돼! 밖으로 나가면…… 아무도 없는…… 밀폐된 장소에 들어가야 해…….”

소년의 시선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갈 수 없어. 내 페로몬 때문에…… 위험해.”

이마에서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차라리 이 기이한 소년이라도 내보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안 좋은 상황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살리고자 도움 주러 온 사람을 같이 지옥으로 끌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안 돼……. 난 여기 있어야…….”

“사람이 없으면 되지? 직원 통로 쪽에 창고가 있어. 거기로 가자.”

“아무도, 누구도 없어야 해!”

재차 외치자 소년은 잠시 그를 보다가 문을 열어 통로를 확인했다. 문 사이로 맑은 공기가 흘러들어 왔다.

“하아…….”

잠시지만 폐로 깨끗한 공기가 들어왔다. 겨우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숨이 트였다.

직원 전용 문을 열어 본 소년은 인이어로 매니저에게 말했다.

“매니저님, 현재 노멀한 고객 한 명을 찾았으나 격리가 필요해 물품 창고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키친 방향 직원 통로를 비워 주세요. 고객이 강력히 요청한 부분입니다.”

- 고객 상태는?

“걸을 수 있습니다만 페로몬 때문에 당장 외부로 나갈 수 없어 보입니다.”

- 비워지면 연락하지.

곧 매니저에게서 통로가 비워졌다는 연락이 왔다.

소년이 강희를 데리고 재빨리 통로로 나와 문을 닫아 잠가 버렸다. 덜컥덜컥 문이 흔들리며 안에서 열려는 시도가 있었다.

“와, 씨. 무슨 좀비 영화 같네.”

태연한 말이 더 비현실적이라 강희는 멍하니 소년을 보았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지금 그의 앞에 있었다.

소년은 그의 팔을 끌어 통로 한쪽에 있는 물품 창고로 들어갔다. 비품을 임시로 넣어 두는 창고는 가정집의 팬트리처럼 작았다. 안에 들어가자마자 긴장이 풀려 그는 구석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비닐, 비닐이 있으면 환풍기를 막아. 퍼지지 않게…….”

헐떡이며 소년이 해야 할 일들을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소년을 관찰했다. 연회장보다 밀폐된 공간이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다 하여도 변화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갈증이 일었다. 목이 말랐지만 입 안에 끈적한 군침이 고였다. 짧게 커트친 머리카락 아래의 목선에 시선이 갔다. 소년이 물건을 살피며 고개를 돌릴 때 턱선이 선명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가 마른 입술을 핥자 소년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여기 물.”

선반 구석에 직원들이 마시려고 둔 생수 몇 병이 있었다. 소년이 병뚜껑을 따 내밀자 그는 머리에 부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몸부림쳤다.

“대단하다, 너.”

소년은 감탄하며 그가 말했던 것을 잊지 않고 비닐을 찾아 환풍구를 막았다.

머리를 흘러내리는 물은 몸의 열기 때문에 곧 뜨거워졌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창고라는 작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 소년은 일상을 보내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너…….”

“눈 감고 쉬어. 힘들었을 텐데.”

숨을 헐떡이는데 따뜻한 손이 그의 눈을 덮었다. 온기가 눈을 덮자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힘들었을 텐데.

그 가벼운 말이 뭐라고 눈물이 나려 했다.

아직 미성년의 소년에게는 페로몬을 떠나 연회장의 일이 시각적으로도 자극이 심했을 텐데 시종일관 침착했다. 그 침착함이 기묘하면서도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닿아 있는 체온 때문인지, 페로몬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소년을 보아서인지 우강희는 몸 안의 배터리가 소진되는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안 돼…….”

혼자 잠이 들 때도 불안해 문을 걸어 잠갔는지 확인했고 잠이 들었어도 작은 소리에 깼다. 누가 방에 들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그는 자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일어난 대혼란과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있던 긴장이 좁은 공간에 들어서자 풀리기 시작했다.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소년이 옆에 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빚은 갚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소년을 의지하고 싶었다. 처음 만나 알지도 못하는 소년인데 그는 눈물이 흘렀다. 문득 처음 느껴 본 그리움이 밀려왔다.

“너…….”

소년의 손을 치우고 정체를 묻고 싶었다.

직원 옷을 입고 있으니 찾기 쉽다는 논리가 머리 한쪽에 떠오르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더는 이성을 붙잡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마치 한순간 스위치를 끄듯 훅, 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 * *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발현한 이후 저를 전담한다면서 나타난 공무원이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날 구해 준 사람은?”

“호텔 안전 관리 팀에서 일을 잘 처리해 주었습니다.”

“……내 옆에 누가 있었을 텐데?”

공무원은 핸드폰으로 VIP가 눈을 떴다고 알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직원 창고에는 혼자 계셨습니다.”

“아니.”

“네?”

강희는 거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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