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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박한주라는 베타(1) (6/31)

6. 박한주라는 베타(1)

“우리 반 박한주, 제법이지 않아? 그 녀석이 학생회를 물먹였어.”

마치 자기가 그랬다는 듯이 차원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주 재밌어 죽겠다는 감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아직 베타가 학생회 임원을 한 전례는 없대.”

“곧 학생회에서 박한주를 호출하겠네.”

우강희는 황치운과 차원구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식당은 아침 식사하는 학생들로 붐비었다. 치운과 원구가 떠들면 성진과 강희는 듣기만 했다.

원구는 강희를 보았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강희는 한 번씩 젓가락질을 멈추고 등 뒤를 신경 썼다. 뒷자리에 재민석이 혼자 식사 중이었다.

우강희는 주변에 베타가 다가오면 불편해했고 그것을 같이 어울리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변에 베타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쫓아내지는 않았지만 불편함을 감추지도 않았다.

“같은 베타인데도 참 달라.”

용케 자기 얘기인 걸 알았는지 그 순간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이 반이나 남아 있었다.

원구와 치운의 시선이 민석에게 잠시 향했다. 원구는 웃음이 났다. 얕은수를 쓴 민석은 심부름을 하며 2학년들과 어울렸지만 그 포지션을 거부한다면 떨려날, 위태로운 위치였다. 알면서 그런 자리로 찾아간 사람이었다.

민석은 입술을 깨물며 못 들은 척 그들에게서 멀어져 식당을 빠져나갔다.

“박한주 집안은 어느 쪽이야?”

“글쎄, 딱히 들은 거 없는데. 소문이 없으면 별 볼 일 없겠지.”

“2학년에게 괴롭힘당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던데 괜찮은 집안인가 해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진이 툭 뱉었다.

“……평범해.”

“응? 우리 성진이, 뭐 아는 거 있어?”

냉큼 원구가 물었지만 성진은 남의 얘기 듣듯이 식사에 열중했다.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성격을 알기에 원구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날 도와주었던 소년은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강희를 아는 듯이 말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강희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지지 않았고 소년은 그의 기억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재민석과 2학년이 박한주를 괴롭히지?”

“오, 우리 우강희가 베타에게 흥미를 보이다니! 왜, 3주 전에 작은 소란이 있었잖아.”

강희가 흥미를 보이자 원구는 신나게 그때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 * *

한주가 2학년 이창원에게 찍히게 된 일의 발단은 3주 전에 일어났다.

보통 재강원 고등학교는 한 반에 두세 명의 베타 학생이 있었고 한주의 반에는 베타가 한주 외에 민석, 두 명뿐이었다. 알파들은 형질이 다른 베타를 무시했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학기 초에 민석은 자신을 이사장인 재강원의 아들이라고 밝혔다. 이에 호기심을 가진 알파 몇 명이 그와 어울리기는 했으나 흥미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은 민석이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하자마자 상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통하지 않자 민석은 다른 반에서 자기 무리를 만들려 했지만 그들 역시 이틀이 지나자 더는 상대하지 않았다.

반에서 단 두 명뿐인 베타라면 서로 친해질 만도 하지만 민석은 한주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싫어하고 경시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억지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성격이 아닌 한주는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알파의 특성을 생각해 타인과 협력하는 수업이 적어서 같은 반 학생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한주는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었다.

한주는 기숙사까지 돌아가지 않아도 쉴 수 있는 빈 교실을 자신만의 아지트로 삼았다. 시끄러운 교실에 있느니 낮잠이라도 잘 수 있는 장소로 음악실 근처의 미술실로 찾아갔다.

감상을 위주로, 안목을 키우는 데 주력하는 분위기라서 실습 때가 아니면 미술실을 사용하지 않았다. 간혹 회화가 취미인 학생도 있지만 자기 방에 화구를 두었기에 미술실의 사용은 현저히 낮았다. 음악실에는 가끔 2학년들이 들를 뿐 미술실로 들어오지는 않아서 그들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그날도 한주는 점심시간에 미술실에서 구석에 의자를 이어 놓고 짧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젤들이 늘어서 있는 뒤쪽이라 다른 사람이 와도 발견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날은 불청객이 있었다.

‘빨리 들어와. 잘해야 할 거야. 제대로 해야 네가 원하는 알파 페로몬을 내보낼 마음이 들지.’

한주는 목소리만으로도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계속 누워 있었다면 그들도 같은 장소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한주는 일어났다.

독점으로 쓰는 장소가 아니기에 피해 주려고 했다.

‘나갈 테니 교실 쓰세…….’

민석이 2학년의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셔츠에 작은 작대기로 학년 표시가 되어 있어 상대가 몇 학년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2학년보다 민석이 더 놀랐다.

‘너, 뭐야? 왜 여기에!.’

‘1학년? 어서 나가. 꺼져.’

이전의 삶에서 민석은 그저 타인이었다. 그때도 그는 한주를 무시했고 한주도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같은 베타면서 무시하는 재수 없는 녀석이었고 재강원의 아들이기에 질투도 했었다.

상관하고 싶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에게 달려가 민석의 어깨를 잡아 등 뒤로 밀어냈다.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 자식이 어딜 끼어드는 거야? 관계없는 놈은 꺼져.’

윽박지르기만 하는 2학년에게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한주는 미술실 밖으로 나가 가드를 불렀다.

목소리를 듣고 아래층에서 가드가 달려왔고, 그날 교사들이 소집되었다. 한주는 자신이 본 상황을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민석이 이상하게 말했다. 그저 친한 선배와 격의 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한주가 오해해 가드를 불렀다고 말이다.

결국 그 일은 조사도 하지 않고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그 과정에서 개교 이래 학생에게 징계가 내려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학년 이창원이 한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민석과 같이 있던 2학년이 창원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끄는 무리의 일원이었다.

한주의 행동을 2학년에 대한 하극상으로 본 창원은 베타가 기어오르지 못하게 폭력으로라도 눌러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학년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 * *

하룻밤 동안 폭풍을 겪은 1학년들은 평소와 같은 일상을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겨우 등교한 한주는 책상에 녹아내려 일어나지 못했다.

“제길.”

교실에서 나오는 재민석은 핸드폰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 끝에 난 상처가 쓰라렸다. 지난밤의 일이 생각나자 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몸이 떨렸다.

반으로 돌아가고 있던 우강희는 그들 방향으로 오는 민석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창가 쪽으로 몸을 움직여 베타를 피했다. 민석이 그들을 힐끔 보며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데 교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차원구는 지나치는 짧은 순간 민석의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는지 비웃었다.

“아직도 2학년 심부름을 하나? 참 나, 저렇게까지 어울리고 싶을까.”

같은 학년에서 어울릴 무리를 찾지 못하자 민석은 2학년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상황을 2학년들은 알기에 쓰기 좋은 부하로 부렸다.

“그런데, 우리 우강희. 이번 주말의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

“아버지 호출이니까.”

“그럼 거기서 보겠네. 전에 자서전 썼다면서 또 무슨 책을 출판했다는지 그 아저씨도 진짜 정성이야.”

황치운은 원구의 말을 고쳐 주었다.

“어차피 다 대필이야. 자서전을 본인이 쓸 리 없잖아.”

“정치권에 있으면 한두 권씩은 필요한가?”

먼저 교실로 들어간 원구가 반갑게 외쳤다.

“어, 박한주! 오후 수업에는 나왔네!”

산책 나왔다가 주인 만난 개처럼 원구가 한주의 옆으로 달려갔다. 평소 말도 붙이지 않는 알파가 친근하게 다가오자 한주는 몸을 일으키며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푹 잤어? 하룻밤 새웠다고 어떻게 그렇게 약 먹은 사람처럼 휘청일 수 있지?”

“잠이 많아.”

“그래?”

한주의 책상에 팔을 올려 턱을 기대고 원구는 싱글거렸다.

‘왜 이러지?’

원구는 다른 알파들과 비교하면 쾌활하고 쉽게 타인에게 다가가지만 돌아서면 냉정하게 잘라 내는 성격이었다.

오전 내내 원구는 강희 옆에서 한주가 어떻게 천희와 학생회를 물먹였으며 기숙사로 들어갔을 때 졸음에 휘청거렸다며 신나게 얘기했다. 덕분에 한주에게 관심이 없었던 같은 반 학생들조차 아침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은 오후에 한주가 등교하자 안 보는 척하며 그를 힐끔댔다. 그들의 시선은 알았지만 한주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강희가 반으로 들어오자 학생들의 시선이 한주에게서 그에게로 향했다. 로열 알파인 성진과 다녀도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강희에게 오래 머물렀다.

“아, 근데 2학년에서 누가 병원으로 실려 갔다며? 1학년이 아니고 왜 2학년이 다친 거야? 구급차 왔었다던데, 쪽팔리겠다.”

“2학년 이창원이야.”

학생들의 말을 들으며 한주는 하품했다. 오전 내내 잤지만 그래도 잠이 부족했다.

“수업 시작합니다.”

교수가 교실로 들어왔다.

성진을 보았다가 자연스럽게 강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다른 때라면 곧 그가 고개를 돌렸겠지만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싫어해서 노려보는 느낌은 아니었다.

‘도서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가?’

입학하고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이전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자신감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자신을 보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피해 보아도 언제든 갚아 줄 수 있으니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도 살 수 있었는데.

베타 박한주도 제법 괜찮은 사람인데.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이 우강희였다.

아직 절 보고 있는 강희에게 씨익 웃어 주고 한주는 수업에 집중했다. 교수의 수업은 말을 어렵게 꼬아 놓을 때가 있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정신없이 필기하고 수업을 듣다 보니 오후 수업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강희는 줄곧 한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 *

종례가 끝났다. 한주는 편의점에서 빵을 사 먹고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잘 생각이었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적당한 수면 시간을 넘기면 정신을 차릴 수 없어진다. 머리가 몽롱해서 두뇌 회전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

“박한주.”

이름이 불려 돌아보니 2학년 알파가 뒷문에 서 있었다.

“학생회 호출. 따라와.”

“성정원.”

웃고 있던 2학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건방지게, 선배 소리는 어디 갔어?”

호기심에 지켜보고 있던 동급생들이 성정원을 알아보았다.

“아, 맞다. 2학년 성정원.”

“학생회에서 올 줄 알았지만 당일 찾아오다니, 빨리 왔네.”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정원의 목소리도 커졌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움직여.”

“학생회에서 부르면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는 교칙이 있습니까?”

졸려서 예민해졌다. 다른 때 같으면 귀찮아서 묻지 않고 따라갔을 텐데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 배를 채우고 잘 생각이 방해받으니 마음이 삐뚤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원을 보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알파들이 교실을 나가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그래서 안 가겠다고?”

“최소한 저한테 용건이 있으면 자신이 누구이고 무슨 용건 때문에 부르는지 알리며 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해야 옳다는 겁니다. 그게 예의죠. 안 그렇습니까?”

“하, 또라이 새끼. 캠프 때도 학생회를 물로 보더니, 뭐? 베타를 상대로 양해? 예의?”

이전에는 학생회를 만날 일이 없었다. 학교생활을 버티기 바빴고 알파들을 피해 다녔다.

철저한 피해자로서, 당해도 말 못 하는 약자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긴, 박한주 말이 맞지. 학생회가 학생 대표로 일을 처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 위에 있는 입장은 아니지.”

차원구가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날이 서며 대치했다. 한주의 편을 드는가 싶던 원구는 한주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도, 박한주. 차라리 빨리 용건을 듣고 끝내는 것이 좋지 않아? 설마 학생회에서 임원 문제로 널 때리거나 하겠어?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가 그런 저열한 짓은 하지 않겠지.”

“차원구, 차라리 끼어들지나 마.”

황치운이 원구를 끌고 갔다.

“왜? 내가 뭐 어쨌다고?”

차원구는 싱글싱글 웃으며 눈치 없는 척했다.

한주도 정원을 보자 기분이 나빠져서 그렇지 학생회에 갈 생각이긴 했다.

“하, 이 반 놈들은 다 왜 이래?”

“동급으로 엮지 마시죠?”

누군가 토를 달자 와르르 웃음이 터졌다. 한주는 가방을 들고 정원에게 다가갔다.

“학생회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안내해 주세요.”

“시건방지게. 봐주는 줄 알아.”

한주가 정원을 따라가자 지켜보고 있던 치운이 이성진과 우강희를 보았다. 주변 일에 관심 없는 두 사람이 종례가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주시하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한주였다.

“……화장실.”

성진이 먼저 교실을 떠났다.

“그렇게 말해 놨으니 정말 때리지는 않겠지?”

“뻔히 그 속내 보였어.”

“그래? 속내가 보였으면 더 잘 알아들었겠지.”

치운은 가만히 원구를 보았다.

“왜?”

“박한주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봐? 네가 편까지 들어 주고.”

“재밌잖아. 알파들만 바글거려 페로몬 때문에 짜증 나는데 저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우리 치운이. 너도 그렇잖아.”

원구가 툭, 팔꿈치로 옆구리를 쳐 왔다. 치운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 * *

학생회실은 1층에 있었다.

긴 테이블의 상석에는 학생회장 우천희가 앉았고 한주원은 창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정원은 한주에게 문과 제일 가까운, 테이블 끝자리에 앉으라고 지시하고 천희의 근처에 앉았다. 자리로 거리감을 두고 신분이 다르다는 듯 차이를 보여 주는 모습이 유치해 실소가 나왔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천희는 처음에는 부드럽게 말을 시작했다.

“박한주랬지? 학생회 임원 선발에서 베타가 된 적은 처음이야. 대단해.”

“그렇다고 듣기는 했어요.”

“그래? 들었어? 그런데 왜 오지 않았지? 해 뜰 때까지가 타임 리미트였으니 그 후에는 왔어야지.”

조용히 얘기하던 우천희의 말투에 날카로움이 섞였다.

‘이게 용건인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주는 굳이 천희의 기분을 맞춰 주지 않았다.

“잊었어요. 졸려서 빨리 돌아가 자고 싶었고.”

“아, 잊었다고.”

“학생회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아니, 생각이 없어도 해야 해. 네가 임원 선발에 뽑혔으니까.”

의외로 천희는 한주의 말을 기뻐하지 않았다.

“정당하게 임원 선발에 뽑혔으니 해야지. 정말 학생회에 뜻이 없었으면 일찍 알파에게 잡혀서 오든가. 그랬으면 이렇게 피곤하게 얼굴 마주 보며 불편할 일도 없었을 거야.”

“그랬으면 몸이 온전하지는 않았겠죠.”

누구의 몸을 뜻하는지 한주는 주어를 붙이지는 않았다.

“학생회 임원이 되고 싶지 않은데 거부하면 안 되는 강제성이 있습니까?”

“이 또라이 새끼, 베타가 거부한다고?”

듣고만 있던 정원이 이를 갈았다. 천희는 손을 들어 자중시키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누구도, 학생회 임원 임명을 거부한 학생은 없어.”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의 OB라는 인맥은 관심 없는 학생들조차 탐내는 상품이었다. 학생회 졸업생이라는 타이틀 외에도 핵심적인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며 그 안에서는 한국을 움직이는 정보가 오갔다.

OB의 지위와 직업도 대단하지만 그에 얽혀 그들 부모까지 거미줄이 뻗어 나가듯이 연결된다. 그 졸업 후 특전이 따라붙었기에 부모들은 자식을 재강원 고등학교에 넣고 싶어 했다.

학부모들조차 학생회라고 하면 잘 보이고 싶어 말조심하는데 베타인 박한주는 임원 임명을 거부했으니 학생회임을 자부심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모욕으로 느낄 만한 일이었다.

거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천희의 표정이 굳었다.

“네 거부는 받아 줄 수 없어.”

“학생 개인이 부 활동조차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겁니까?”

“박한주! 시건방진 새끼! 학생회를 부 활동으로 치부해?”

학생회를 고작 취미 모임인 부 활동으로 깎아내리자 정원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베타 새끼를 학생회에 받아 준다면 감사합니다, 절은 못 할망정 뭐? 부 활동? 학생회가 애들 장난으로 보여?”

“아직 미성년자이니 애들 모임이죠.”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계속 나불대네!”

“그래, 네 뜻은 알았다.”

천희가 일어나면서 의자가 뒤로 밀렸다.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비명처럼 학생회실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거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 본래대로면 넌 임원을 해야 하지만 학생회 약관에 이런 항목은 있지.”

불쾌한 표정을 지우며 천희는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임원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다면 다시 임원을 선발할 수 있다.”

우천희의 눈이 한주의 다리로 잠시 내려갔다.

협박.

“성정원, 네가 좀 더 박한주와 얘기해 봐. 학생회에 들어오면 뭐가 좋은지 잘 모르는 거 같으니 차근차근 설명해 주고.”

“네.”

천희가 학생회실을 나가자 수원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정원과 한주만 남았다. 정원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한주를 조용히 보기만 했다.

“학생회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바뀌지 않으니까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배고파, 졸려.’

눈이 감기려 했다. 한다, 안 한다의 사이에 협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좁힐 의견 차이도 혹할 제안도 없다.

한주가 일어서자 정원이 명령했다.

“「앉아.」”

학생회실 안의 공기가 변했다.

한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페로몬을 많이 접해 보아서 페로몬을 느끼거나 영향을 받지는 못해도 눈치로 알아차릴 수는 있었다. 지금 정원이 페로몬을 쓰고 있었다.

“1학년들 애송이가 페로몬으로 베타에게 장난질 쳤다는 말은 들었지만 1학년은 아직 미숙하지. 힘도 약해서 효과가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놈들과는 달라. 같은 프라이머라도 급이 다르지.”

공기의 밀도가 높아졌다. 작은 불씨에도 확 폭탄이 터질 듯이 긴장감이 높아졌다.

“건방진 그 성격, 내가 고쳐 주지.”

성정원이 페로몬으로 명령했다.

“「박한주, 바닥에 무릎 꿇어.」”

개인의 능력은 인성과는 상관없었다. 정원은 평균적인 프라이머에 비해 알파 수치가 높았다. 로열에 가깝지만 로열은 되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 수치가 변화하는 경우도 있고 매해 받는 정기 검진에서 수치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으니 로열 알파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정원도 자신의 형질 수치를 잘 알고 있었다. 말로 안 되면 힘으로 굴복시키면 된다. 몸을 일으켜 박한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알파였다. 베타를 지배할 알파.

“건방진 놈. 알파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지.”

그때 노크도 없이 학생회실 문이 열렸다. 이성진이 들어왔다.

“……얘기 다 끝났나?”

형질을 힘의 논리로 본다면, 베타 위에는 알파가 있다면 프라이머 알파 위에는 로열 알파가 있었다.

로열 알파 이성진은 학생회실 안에 깔린 정원의 페로몬을 훑고는 가볍게 페로몬을 내보냈다. 다른 알파의 제압 페로몬은 기분 나쁘니까 제 것으로 덮어 버린다.

“읏! 이성진, 너…….”

페로몬으로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억지로 버티고 버둥댄다고 이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페로몬이라 패배감은 더했다.

절대 이길 수 없다.

인생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패배감을 느낀 순간 성정원은 이미 진 것이다. 그래도 오기가 생겼다.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러나 성진은 정원을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박한주, 얘기 다 끝났나?”

“어? 어.”

“……그럼 가면 돼?”

“그…… 렇지?”

“얘기 끝나지 않았어! 허락도 하지 않았어!”

성진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저를 향한 순간, 정원은 숨통이 조였다. 목을 잡으며 피부를 긁었다. 목을 조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숨구멍이 틀어막힌 듯이 숨을 쉴 수 없었다.

“커헉! 억! 억!”

“……가는 데 허락을 맡아야 하나?”

“컥! 수, 숨이!”

“……숨을 허락받고 쉴 필요는 없지.”

“커헉! 쿨럭! 쿨럭!”

성진이 페로몬을 갈무리하자 정원은 그제야 숨을 들이마셨다.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침을 흘리는 것도 모르고 헐떡거렸다.

“……가자.”

한주는 성진을 따라 학생회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갈 때까지 정원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로열 알파와 프라이머 알파의 차이는 컸다. 자신감 넘치며 베타를 눈 아래로만 보던 거만한 정원조차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진은 로열 알파지만 자신을 과시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귀찮아하며 나서지 않았다. 언제나 한발 뒤로 물러나 관조하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전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유학 가기 전까지 성진은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한주가 괴롭힘을 당하고 쓰러지면 어디선가 나타나 양호실로 데려다주었다.

부러운 사람이었다. 그 부모와 형질까지 모든 것을 부러워했었다. 그런 사람이 힘들 때 도와주었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사막에서 헐떡이며 마른 목을 부여잡은 사람에게 물 몇 모금을 주어 살리면 원수라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했지만 성진은 왜 저가 한주를 도와주었었는지 얘기했다.

그리고 한주의 마음은 그날로 끝났다.

“고맙다.”

다시 학교에서 만난 성진은 그저 반가운 옛 추억이 되었다.

“……부탁받았어.”

“부탁?”

본관 1층을 나가는데 우강희가 통로에 기대서 있었다. 성진은 강희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부탁은 하지 마.”

“우천희 앞에 나서면 더 강하게 나올 테니까 어쩔 수 없지.”

“……귀찮아.”

손을 휘저으며 이성진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두 사람을 남기고 식당으로 향했다.

‘우강희의 부탁이었나?’

한주는 무표정한 강희를 보았다. 그도 한주를 보고 있었다.

‘은근히 날 도와주네?’

한주가 과거와 다른 행동을 보이니 주변도 소소하게 바뀌었지만 강희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한주와 접점이 있었지만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강희의 행동과 한주를 향한 관심은 확연히 이전과 달랐다.

“학생회 임원이 되기로 했나?”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아니. 하지 않아. 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우천희, 학생회에서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고 말하더라. 거절도 거부라고 받아 주지 않았어. 그래도 본인이 하고 싶지 않다는데 어쩌겠어.”

한주는 힐끔 강희를 보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왜?”

“……배고파서.”

“식당 가.”

“너는 먹었어? 같이 갈래?”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강희가 불쾌함을 내비쳤다. 거절할 줄 알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한주는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했어.”

분명 그렇게 대화가 끊어졌는데 강희는 여전히 한주의 옆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왜 다른 곳으로 안 가지?’

* * *

성정원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테이블을 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이 고꾸라질 것 같았다.

“박한주, 임원이 되는 것이 싫으면 할 수 없게 만들어 주지.”

입가의 침을 닦으며 이를 갈았다.

성정원의 눈이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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