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한주라는 베타(2)
- 미친놈.
로열 알파의 페로몬이 얼마나 강한지 이성진의 페로몬 능력을 친구 고용진에게 말했더니 짧게 감상이 돌아왔다. 용진은 언제나 현실적이고 냉정했다.
- 그래서 면전에서 거절해? 미쳤냐? 알파들이 미치면 무슨 짓 하는지 몰라? 게다가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알파야. 세상 두려울 것 없는 놈들이라고.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네엡, 하며 학생회 임원이 될 순 없잖아. 귀찮게.”
- 생각해 보겠다고 시간을 끌면 되잖아!
“거기까진 생각 안 했어.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니까 반발심에 말이 튀어나오더라.”
- 다른 때는 생각 깊은 녀석이 꼭 그럴 때 일 저지르지.
한주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물었다.
식사하고 기숙사로 돌아와 한숨 자니 다시 허기가 져서 밤에 편의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기숙사 내의 카페테리아에는 수제 빵이나 몸에 좋은 유기농 농산물을 이용한 먹거리만 팔았다. 제 입맛에 맞지 않아서 일부러 직원들이 이용하는 편의점까지 다녀왔다.
이 학교에서 반소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은 한주밖에 없었다.
- 다음에는 밟아 버려! 괜히 적당히 맞춰 주니까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선배랍시고 그렇게 깝죽대지.
격한 말에 한주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다 넣어 버렸다.
“말이 쉽지. 네가 여기 학생들을 못 봐서 그래. 고1인데도 체격이 어른보다 커. 2학년은 아예 성인이야, 성인.”
- 내가 알파 체격을 몰라서 이런 소리 하겠냐. 박한주,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성격 다 죽었네.
“내 성격이 뭐가 어떻다고. 건들지만 않으면 얼마나 얌전한데.”
- 너 자신을 좀 알라.
친구의 콧방귀 소리에 한주도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 입이 거칠어야 고용진이지.”
용진은 게임 잘하고 냉철하며 살벌한 말발로 개인 방송에서 인기를 끌어서 용돈까지 벌고 있다. 지나가는 말로 적금을 들었다고도.
- 그냥 비위 잘 맞추어서 돈 많은 알파를 물어.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건 어때? 진짜 생각만 해도 개꿀이지 않아?
그 말에 문득 저에게 호감을 보이며 도와주었던 우강희가 떠올랐다. 푸핫, 한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개냐? 물게. 그리고 알파는 오메가에게나 끌리지, 베타는 사람 취급도 안 해.”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며 방으로 향했다.
- 왜, 로맨스 드라마에서 보면 처음에는 앙숙이지만 나중에 미운 정이 쌓이고 의외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빠지기도 하잖아. 넌 이미 1단계 클리어했어.
“죽고 싶냐? 상상만 해도 소름 끼쳐.”
정원과 로맨스라니. 성별을 떠나서 얼굴도 떠올리기 싫었다.
- 김지영에게 문자는?
“왔어.”
점심쯤에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하니 지영에게서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새벽 2시 넘어서 온 문자였다. 도서실에서 자고 있을 때였다.
[한주야, 목소리는 좀 그렇고 문자로 할게.]
[미안해ㅠㅠ]
“문자 씹는 횟수대로 한 대씩 꿀밤이 적립될 거라니까 결국 하더라.”
- 참 나, 그 녀석이 알파라니.
발이 멈추었다. 한주의 방 앞에 2학년 베타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한주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들의 몸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야, 나 손님 왔다. 다음에 통화하자.”
- 너 그 학교에 친구 없는데 무슨 손님? 아, 적당히 해.
키득대는 웃음을 들으며 통화를 끝냈다.
그동안 2학년 알파들만 나서서 기숙사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2학년 알파가 2학년 베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상황이.
“초인종 눌러도 대답이 없어서 무서워서 그러나 했더니 안에 없었네.”
“무슨 일이에요?”
“소란 피울 생각하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왜 학생회를 건드려서 우리까지 이 고생을 시키냐? 너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했다며?”
2학년이 퍽, 한주의 뒤통수를 치고 어깨를 강하게 쥐어 끌어당겼다. 복도를 지나가는 학생들이 힐끔 그들을 보았지만 도와주지는 않았다.
“누가 데려오라고 했어요?”
“성정원. 가서 그냥 넙죽 엎드려라. 성정원 성격은 2학년 알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아.”
“괜히 뻗대다가 구급차에 실려 나가는 수가 있어.”
“아, 이창원 선배가 구급차에 실려 갔다고 들었어요.”
2학년이 뜨악한 표정으로 한주를 돌아보았다.
“와, 이 자식 봐라.”
“허, 성정원이 이를 갈 만한 이유가 있네.”
이창원 얘기는 2학년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안 좋은 쪽으로.
1학년들을 위한 이벤트에서 주최자에 속하는 학생회 임원 창원이 당해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2학년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이 자식 겁먹지도 않네.”
“겁이 없으니까 개겼겠지. 야, 너 이창원에게 찍혔던 녀석이지? 이창원 없다고 살맛 나나 본데 그가 없어도 넌 좆밥이야. 2학년 알파들이 얼마나 독한데. 그냥 적당히 당해 주지, 왜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 요령을 부려.”
한주의 입이 불룩 나왔다. 자신도 얌전히 지내고 싶었다. 그들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태연하게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2학년 베타들은 한숨을 쉬었다.
학생회 임원 자리를 찼다는 말을 듣고 담이 세다고는 생각했는데 직접 얘기를 나누어 보니 담이 센 게 아니라 그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요즘 애들 왜 이러냐’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와, 얘가 아직도 뭘 모르네. 이러다 진짜 큰일 치르는 거 아냐? 괜히 우리가 덤터기 쓰지 않을까 모르겠네.”
“적당히 조절하겠지. 설마 죽이기까지 하겠어. 어디 한군데 망가져도 돈으로 무마할 테고.”
얘기를 듣고 한주가 겁을 먹길 바라는 투였다.
“맞으면 때릴 수도 있는데……. 그럼 정당방위로 생각해 주겠죠?”
“뭐?”
“몇 대를 맞은 후에 때려야 정당방위일까요?”
여상히 말하는 한주의 말에 2학년은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정원이 그들에게 명령할 때 예감이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불길한 느낌이 더 강해졌다.
* * *
2학년 베타들은 한주를 본관 2학년 교실로 데려갔다.
교실에는 2학년 세 명이 의자에 앉아 나이프를 공중에 던졌다 받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쇠붙이를 보고 2학년 베타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곱게 자란 도련님들에겐 험한 무기였다. 그들은 한주를 교실로 밀어 넣고 도망쳤다.
성정원이 한주를 보자 책상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세 명 중 두 명은 이창원과 같이 다니던 알파였다.
“얘기를 마무리 져야지.”
정원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른한 사자처럼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나른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베타 주제에 학생회 임원을 하기 싫다니. 애초에 임원을 시켜 줄 마음도 없었어.”
“야, 학생회가 우습냐? 무시도 이런 개무시가 없어. 베타 주제에 얼마나 잘났다고 학생회를 거부해?”
2학년들은 학생회 임원도 아니면서 저들이 무시당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원의 서열이 제일 높은지 2학년들에게 명령했다.
“문 잠가.”
2학년들이 교실 앞뒤로 다 잠그자마자 정원이 한주에게 다가갔다.
복부에 주먹이 들어왔다. 허리가 꺾였다.
“윽!”
어디를 때려야 대미지가 클지 알면서 질러 오는 주먹에 한주는 짜증이 났다. 지금까지 창원이 주도한 괴롭힘은 애들 장난이었다는 듯이 정원은 상대가 베타여도 힘 조절을 하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고통에 한주의 등이 둥글게 말렸다. 맞은 부위의 근육이 오그라들었고 바닥을 짚고 지탱하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발이 날아왔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빗맞아 구두의 단단한 모서리에 오른쪽 눈가가 긁혔다. 무딘 칼로 피부를 긁는 느낌이었다. 화끈한 감각이 피부를 스쳤다.
“이 새끼가 아직 버틸 만하지!”
피한 대가로 다시 복부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정원은 이성진에게 페로몬으로 당해서 더 흥분한 상태였다. 마구잡이로 질러 대는 발길질에 맞으며 한주는 몸을 웅크렸다. 방어하는 모습이 성질을 돋웠는지 정원의 발에 힘이 더 실렸다.
정원의 흥분을 옆에서 지켜보던 알파들이 웃으며 그를 말렸다.
“야, 야. 적당히 해.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쟤 얼굴에 상처 났어. 너한테 맞았다고 학교에 이르면 어쩌려고 그래?”
입으로만 말렸다. 일전에 한주가 재민석을 도와준다고 가드를 불렀던 일을 비꼬고 있었다. 정원은 제법 기분이 풀렸는지 발길질을 한 번 더 날렸다. 힘이 실려 한주는 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웅크렸다.
때리는 입장도 체력 소모가 심하지만 맞는 한주도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폭력에서 몸을 지키다 보니 지쳐 갔다.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데 뺨을 타고 주르륵 액체가 흘렀다.
“야, 피난다.”
한주는 얼굴을 타고 바닥으로 툭 떨어진 핏방울을 보았다.
정원은 숨을 고르며 미소 지었다.
“이르고 싶으면 일러. 베타인 선생들이 뭘 도와줄 수 있을까? 월급쟁이가 우리에게 징계를 내릴 수 있을 거 같아? 해 봤자 잔소리지. 어떤 집안인데 일개 베타가 건드릴 수나 있겠어?”
벌컥벌컥 생수 한 통을 비우고 반쯤 남은 것을 한주에게 던졌다. 몸을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주는 속으로 욕을 했다. 목이 말라 곱게 주면 마시기라도 했을 텐데.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괜히 선배들이 조용히 있는 게 아니니까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이창원도 이 녀석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고.”
“그 자식,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어디서 맞아 놓고 베타에게도 쫄아. 겁쟁이 새끼.”
한주는 한숨을 쉬었다.
전신이 욱신댔다. 요령 좋게 피했지만 내일이면 온몸에 멍이 올라온다. 등이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다른 사람에게 발길질당하고 주먹질로 맞았다는 증거가 된다.
고통은 있었지만 한주에게도 다른 생각이 있었다.
‘아, 이번 주에도 집에 못 가겠네. 엄마에게 뭐라고 핑계 대지. 슬슬 짜증 나는데.’
“학생회실에서 이랬으면 늦게 운동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때 교육하지, 왜 안 한 거야?”
“이 녀석이 도망쳤지.”
정원은 성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한주는 심호흡했다.
‘이 정도 맞았으니 정당방위가 성립되겠지?’
머릿속으로 어디를 어떻게 요령 좋게 때려야 맞은 분풀이도 하면서 상대가 공포를 느낄지 계산했다. 어느 정도까지 때려야 정당방위로 때렸다는 변명이 먹힐까.
차라리 한동안 돌아다니지 못하게 발을 부러뜨려도 좋을 거 같았다. 한 번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사람 뼈는 의외로 단단하지만 부러지면 생활에 큰 불편을 초래한다. 그리고 불편할 때마다 가해자를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부러뜨리는 것은 좀.’
교실이라 무기로 삼을 것들은 많았고 무기가 없더라도 밟아 버려 ‘단 한 번의 실수로’ 상대의 뼈가 부러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려면 정원이 1학년 베타 후배를 끌고 와 폭행을 했다고 스스로 자백해야 한다.
학교에서 징계를 내리지 않는다면 피해자인 한주에게도 유리한 상황인데 정원은 저가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눈 떠. 어디서 정신 잃은 척 연기하고 있어?”
생각에 잠겨 있던 한주는 몸을 건드리는 발길에 눈을 떴다.
정원은 한주를 보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폭행당한 피해자인데 한주의 눈에는 가해자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맞았으면 고통이 있고 고통을 준 상대방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그런 공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폭력에도 꺾이지 않는 눈빛에 정원은 소름이 끼치면서 잔인한 오기가 솟았다.
“이래서 이창원이 그렇게 돈 건가.”
그는 뒤에 있던 알파들에게 말했다.
“야, 이 녀석 붙잡아. 의자 하나 가져오고.”
“왜? 뭐 하려고?”
“슬슬 정리해야지. 학생회 임원이라도 활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신체 결함이 생기면 그만둘 수 있는 사유가 되지, 임원이 하기 싫다니 핑계를 만들어 주게.”
정원은 한주의 발목을 보았다.
“원하는 대로 학생회와는 상관없이 평범하게 살게 해 줄게. 평생 다리를 절면 네 부모가 자책하겠지. 자식을 일부러 알파 고등학교에 넣었다가 병신이 되었다고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일로 후회할 부모였으면 자식을 재강원 고등학교에 넣지도 않았겠지만.”
그도 한주와 같은 생각을 했다.
제 말에 화를 내며 분에 받쳐 소리 지를 얼굴을 생각했던 정원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박한주는 미소 짓고 있었다.
“고맙게 내 양심을 지켜 주네. 너무 과한가 싶어서 망설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뭐?”
한주는 엎드리자마자 허리를 틀어 발을 휘둘렀다. 발목을 맞은 정원은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자세가 바뀌었다. 바닥에 쓰러져 올려다보는 정원을 내려다보며 한주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폭행의 증거는 다 녹음했으니 초소형 녹음기를 껐다.
“부모는 건드리지 말아야지.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입이 문제야.”
* * *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지낸 3년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언제인지 꼽는다면 2학년 때가 아닐까 싶다. 1학년 때는 처음 겪는 폭력과 아픔에, 베타인 게 무슨 죄라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정신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일주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지났고 어느새 2학년이 되어 있었다.
과연 폭력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체념을 겪으며 버텼다. 2학년이나 3학년까지만 견디면 된다고 자조했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폭력은 심해졌다. 베타들이 하나둘 학교를 떠나서 괴롭힐 베타가 적어지자 스트레스가 쌓인 알파들은 잔인해졌다.
2학년이 되어도 동급생의 괴롭힘과 폭행은 줄어들지 않았고 이를 갈며 하루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 3학년인 성정원이 폭행의 현장에 끼어들었다.
3학년이 되면 사회에 나갈 준비와 유학, 혹은 인턴십 등으로 등교생이 줄어드는데 학기 초라 심심했다고 그가 말했다.
‘재밌게 노네.’
한주가 맞는 모습을 보며 정원이 말했다.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버텨? 빨리 학교 그만두면 몸 편하고 좋을 텐데.’
이죽거리며 구경했다.
‘너네 부모도 참 불쌍하다. 베타면 일반 고등학교나 보내지, 왜 알파 고등학교까지 보내서 자식에게 이 꼴을 당하게 해. 능력이 없으면 분수를 알아야지.’
그 정도는 참아 줄 만했다. 그런데 한주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말이 나왔다.
‘뭐? 미혼모? 오메가인데 베타를 낳았다고 버려진 거야? 푸핫! 얼마나 실망했으면 자식을 버릴까.’
그즈음 엄마가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소개했고 한주는 반대했었다. 그래도 엄마는 결혼을 강행했다. 사이가 어색해져 한집에 있어도 대화를 하지 않았고 본가에 잘 가지 않았다.
‘안 봐도 뻔하다. 너네 엄마도 별 볼 일 없네. 그러면 몸 굴려서 돈이라도 벌지. 뭐 좋은 꼴 보겠다고 베타를 끼고 있어? 투자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런 생각도 못 하는 머리를 가지니 자식이 이 모양 이 꼴이지.’
한밤중에 부엌에 가느라 잠시 1층에 내려왔을 때 맞고 있는 엄마를 보았다. 새아버지인 남자는 엄마를 돈으로 ‘샀다’고 얘기했다.
그때 알았다.
한주의 억지에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어서 엄마는 대출을 받아야 했다. 분기마다 내는 학비는 대학교 1년 학비만큼 비싸서 작은 자영업으로는 힘들었다. 이자와 함께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서 엄마 혼자 해결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았던 다음 날 정원의 말을 듣게 된 것이다.
‘네가 잘될 수 있을 거 같아? 유전자는 무시 못 해. 태생을 그렇게 태어났으니 평생 그렇게 살겠지. 너네 엄마처럼.’
때로는 폭력보다 말이 더 상처를 입힌다. 그 원인이 한주 자신 때문이기에 아픔은 더 컸고 폭력으로 정신없었던 1학년보다 2학년 때의 그 이죽거림이 한주를 더 힘들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엄마에게 잘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정원의 말이 더 가슴에 비수를 찔렀지만 한주의 집안 사정도 모르고 비아냥대는 지금의 그를 보니 웃음만 나왔다.
“그런 말에 휘둘리다니 나도 여유가 없었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베타 새끼가 날 쳐?”
“성정원, 괜찮아? 이 자식이!”
“야! 쳐!”
의자를 들어 휘두르는 알파를 보며 한주는 신발 앞을 탁탁 쳤다.
“그냥 뇌 상태가 썩은 놈의 말일 뿐이었는데.”
퍽! 둔탁한 타격음이 교실에 울리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우강희는 반짝거리며 허공에 길을 만든 자신의 페로몬을 보았다. 평소 극도로 제어하며 페로몬을 발산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어력이 뛰어났다. 페로몬을 한 자리 퍼센티지 단위로 발산을 제어할 수 있었다.
환기를 위해 열었던 기숙사 방 창문을 닫으려고 할 때 멀리서 반짝거리는 자신의 페로몬을 발견했다.
거리가 멀었지만 도서실에서 박한주에게 묻힌 자신의 페로몬이었다. 금방 지나간 자리는 페로몬의 잔재가 좀 더 진한 색을 냈기에 한주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밤 11시가 되어 가는데 학교 본관을 갈 일이 무엇일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제 페로몬의 잔재를 따라 걸었다.
그에게 도서실에서의 일은 상당한 충격을 남겼다. 이전에 자선 파티에서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충격이었지만 근처에도 그런 사람이 또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과연 그런 사람이 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같은 사람일까.
타인이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오면 긴장하게 된다. 황치운과 이성진, 차원구는 그가 허락한 사람들이었다. 학교에 다니고 있어 원하지 않아도 침범당하기는 했지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베타는 좀 더 조심했다. 재민석은 제게 다가오고 싶어 해서 거슬렸고 박한주는 무관심해서 시선이 갔다. 한주가 2학년들에게 찍혀 괴롭힘을 당해 가끔 수업에 늦게 들어오거나 교복에 신발 자국이 찍힌 채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고 어쩌다 의도치 않게 도와준 적도 있었다.
시선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되는 정도이고 다른 알파들에 비해서는 한 번 더 시선이 머무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랬는데.
“윽!”
신음을 듣고 강희는 걸음을 멈췄다. 페로몬이 끊긴 2학년 교실에 불이 켜져 있고 안에서 타격음이 들렸다.
교실 안에는 박한주가 있었다. 자신을 향해 의자를 풀 스윙하는 2학년의 복부를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는 알파의 손목을 잡아 움직임을 제압하더니 목뒤를 내리쳤다.
“박한주, 이 베타 새끼!”
성정원이 벌떡 일어나 한주에게 덤볐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정원은 체격도 컸지만 한주는 당황하지 않고 대적했다.
“기껏 욕해 봤자 ‘새끼’지. 욕도 제대로 못 하는 도련님. 적어도 시발 새끼 정도는 뱉어.”
“뭐? 이 자식이!”
빡! 한주가 정원의 손목을 잡자마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신음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처음 복부를 맞았던 2학년이 배를 움켜잡으며 다시 덤볐지만 정원과 같은 수순을 밟았다.
일격에 기절해 버렸다.
“똑같이 해 주고 싶지만 안전장치도 준비해 둬야지. 알파들은 집요하니까.”
알파들을 끌고 교실 가운데에 나란히 눕히더니 한주는 그들 허리 옆에 쪼그려 앉아 그들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밖에서 지켜보던 강희는 깜짝 놀라 교실로 뛰어들어 가 그 팔을 잡았다.
“박한주, 멈춰!”
“어? 우강희?”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지퍼를 내리기 전에 손목을 잡았다. 강희는 한주를 끌어당겨 알파들에게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갑자기 우강희가 나타난 것보다 빠르게 변하는 그의 표정에 한주는 더 놀랐다.
“어? 왜?”
“하, 지금 남의 바지를, 아니 뭘 하려고.”
“굴욕 사진 찍게. 이런 거라도 찍어 두어야 앞으로 건드리지 않겠지.”
“굴욕 사진? 그래서 바지를 벗긴다고?”
“아, 역시 그것만으로는 약하겠지? 그럼 팬티까지 벗기고 찍을까? 남의 것은 보고 싶지 않은데.”
“박한주.”
한주의 팔을 잡은 강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상관도 없는데 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내가 처리할 테니 물러나 있어.”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성격들이 아닐 텐데.”
그는 화가 난 듯이 표정을 굳히고 다시 말했다.
“앞으로 널 건드리지 못하게, 이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도대체 왜 그 지저분한 걸 보려고 안달을 내지? 취향인가?”
“아니야! 절대!”
턱에 힘을 주며 말하더니 강희가 한숨을 쉬었다. 짜증까지 냈다.
“근데 왜.”
“나도 보고 싶지는 않은데 보험으로 찍어 둬야지.”
“보험도 필요 없어.”
“네가 어떻게 하려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를 밀어내고 기절한 알파들에게 다가가려는데 강희가 다시 팔을 잡아 제지했다.
“너도 날 도와주었잖아. 갚는 셈 치고 내가 할게.”
“……2학년인데? 네가 처리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시 날 건드리면?”
“내가 실패한다고?”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럴 일은 없어. 만약 저들이 다시 네 앞에 나타나면…… 뭘 들어줄까? 소원이라도 들어줘?”
“아니, 됐어.”
이전에는 베타와 대화도 하지 않던 강희가 한주를 도와주려고 안달 냈다. 항상 주변에 무심하고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만 살던 사람이 변했다.
“선배들에게 뭘 어떻게 할 건데?”
강희가 한숨을 쉬며 바닥에 누운 2학년에게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더니 잠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한다고 먼저 나섰지만 표정이 불편해 보였다.
한주는 한숨을 쉬며 그를 말렸다.
“사진 안 찍을 테니 안 해도 돼.”
강희는 한주를 힐끔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2학년을 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페로몬을 쓰기는 처음이야.”
그는 긴장한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기절한 이들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박한주를 무서워한다.」”
가볍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2학년들의 이마에 검지와 중지 손끝으로 톡톡 연지를 찍듯이 가볍게 눌렀다가 떼어 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주는 오싹, 전신의 솜털이 빠짝 서는 것을 느꼈다. 왜 저의 몸이 그런 반응을 하는지 의아했다. 팔을 쓰다듬으며 소름을 잠재우는데 강희가 일어나 한주를 보았다.
반응을 살피는 눈길로 한주의 얼굴을 보았다.
“끝났어?”
“가자.”
“……그걸로 정말 끝?”
“내일 보면 알겠지.”
알파들은 제 페로몬을 공격적으로 과시했었지만 강희는 그저 손끝이 닿았다 떨어지는 정도로 끝냈다. 페로몬을 읽을 수 없어서 한주는 그가 제대로 했나 의아했다.
프라이머 알파끼리의 페로몬이 영향이 있을까?
한주는 미심쩍어 2학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이라도 사진 찍을까?”
“가자.”
강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주를 끌고 나왔다. 한주는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여러 번 닿았다.
이전의 삶에서 1학년 2학기 때 가을 학교 행사 때문에 3학년까지 대강당에 모인 일이 있었다. 알던 사이인지 2학년이 강희를 부르며 다가왔었다. 반가워하며 어깨를 잡았다가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강희는 신음하는 2학년을 발로 차며 화를 냈다.
‘어딜 만져!’
주위에 베타가 다가오면 싫어했지만 알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친구들은 그걸 알기에 화내는 강희를 말리지 않았고 곧 없었던 일처럼 정리되었다.
그런 우강희가 먼저 한주의 손목을 잡았다.
‘도서실에서의 일로 바뀐 건가?’
이전과는 다르게 변했다. 학생회 임원 선발에서 잡히지 않았고 학생회 임원이 되라는 압력도 받았다. 무엇보다 강희와 엮이는 일이 많아졌다.
‘뭐, 1학년이 끝나면 같은 반이 되지 않으니까 더는 엮일 일은 없겠지.’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겼다.
어쩌다 만난 짧은 소나기라고.
* * *
“한주야? 박한주!”
본관을 빠져나가기 전이었다. 담임 이무열이 헐떡거리며 한주에게 달려왔다. 한주의 얼굴 옆으로 흐른 핏자국과 몸 여기저기에 찍힌 신발 자국을 확인한 무열은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2학년이 이런 거지? 누구야? 이름 알아?”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1학년이 내 방으로 찾아와 알려 주었어. 네가 2학년에게 끌려갔다고 해서 가드를 부르려 했는데, 널 데려간 2학년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더라.”
“그래도 그 선배들 양심은 있었네요.”
“지금 그런 말 할 때가 아니잖아! 이렇게 다쳤는데…….”
무열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한주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소독이 우선이었다. 문득 무열이 “욱” 입을 막으며 한주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페로몬…….”
무열은 주머니에서 소취제를 꺼내 한주에게 뿌렸다. 소취제 특유의 상큼한 시트러스 계열의 인공적인 향을 맡자 한주는 배가 고파졌다.
“가자, 선생님 방에 구급약 있어. 널 불러냈던 2학년들은?”
“아, 우강희가 도와주어서…… 어?”
둘러댈 말이 필요해 강희의 핑계를 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방금까지 옆에서 같이 걸었던 그가 없었다.
“우강희가? 누굴 도와줄 애가 아닌데.”
무열은 한주에게 올 때부터 강희를 보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담임 선생님이라지만 누군가가 우강희를 ‘애’라고 지칭하는 말이 웃겨 한주는 웃음이 났다. 동급생이니 한주와 동갑이라 어른에게는 ‘애’가 맞지만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무열은 웃는 한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주의 팔을 잡은 무열의 손이 더 떨렸다. 한주는 그 손을 마주 잡고 다른 손으로 무열의 어깨를 쓸어 주었다. 맞은 사람이 위로했다.
“저 괜찮아요, 선생님.”
“정말 괜찮은 거지? 다른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 맞아? 그들이 널 만졌다거나.”
“그런 일 없어요.”
무열은 다시 한주의 몸을 훑어보고 그 말을 믿었다. 한주의 손을 꼭 잡아 왔다.
“미안해, 한주야. 도움도 못 되는 담임이라서. 밤에 열이 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선생님 방에서 자. 2학년들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네, 알았어요. 가요.”
강희는 2학년을 막아 주겠다고 장담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사진을 찍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몸을 움직였더니 배가 고팠다.
B동 기숙사로 향하면서 한주는 무열에게 물었다.
“선생님, 방에 먹을 거 있어요?”
* * *
B동 기숙사로 가는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던 우강희는 기숙사 문이 닫히자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페로몬을 사용했다.
과하지 않게 적정량을 사용하기 위해 집중을 해서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의도를 가지고 명령을 심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이지만 명령은 성공하리라. 우강희, 그의 페로몬이니까.
* * *
여기저기에 멍이 든 몸이 욕실 거울에 비쳤다. 눈썹 끝에서 흘러내린 피는 말라붙었고 피가 옷에 떨어져 굉장한 폭행을 당한 사람처럼 보였다. 내일이면 멍이 더 짙어질 것이다.
“주말에 알바 가야 하는데. 용진이네서 자야겠다.”
집에 갔다가 엄마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진다.
샤워하며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지만 참을 만했다. 눈가에 굳은 피를 살살 닦아 냈다. 무열이 욕실 안에 넣어 준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은 한주는 밖으로 나왔다. 언제 데워 왔는지 무열이 따뜻한 우유를 건넸다.
“놀랐을 텐데 마시면 진정이 될 거야.”
진정이 필요한 사람은 무열이었다. 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지만 한주는 순순히 컵을 받았다. 데운 우유라니, 고1인데 어린애 취급을 한다. 배고파 군말하지 않고 단숨에 마셨다.
“혹시 빵이나 과자 있어요? 움직였더니 배고파서요.”
“아, 맞다. 배고프다고 했지. 잠깐만. 먹을 게 있기는 한데.”
무열은 옷장에서 에너지바 한 박스를 꺼냈다.
각종 견과류와 말린 베리가 뭉쳐진 에너지바는 간단히 영양을 챙기기에 좋아서 무열이 애용하는 간식이었다. 한주는 앉은 자리에서 에너지바 세 개를 먹었다.
한주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혹시나’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무열은 마음이 놓였다.
“치료해 줄게. 이리 앉아 봐.”
다행히 반창고로 상처가 커버되었다.
“선생님은 괜찮아요? 저보다 얼굴이 더 안 좋아요.”
되레 걱정하는 한주의 말에 무열은 한숨을 쉬었다.
“난 괜찮아. 나보다 네 걱정이나 해.”
한주는 에너지바 세 개와 우유 두 잔을 먹고 나자 배가 찼는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저보다 선생님을 더 걱정했을걸요. 몸 안 좋아 보여요.”
“놀라서 그래. 그것보다 앞으로 어떡하냐. 2학년들이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텐데.”
한주는 교실에 기절했을 2학년보다 강희를 떠올렸다. 간단히 손만 대고 끝냈지만 그는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페로몬을 썼겠지?’
알파들도 어려워하는 우강희이니 믿는 구석이 있어 그런 자신감을 보이지 않았을까.
“아마…… 한동안은 조용할 거 같아요. 마음껏 움직였으니까요.”
“진짜 미안하다, 한주야. 담임인데…… 학생도 지키지 못하는 선생이라니…….”
무열은 3주 전에도 같은 말을 했다. 재민석의 일을 말했지만 어떠한 조사나 징계도 없었다. 무열은 거짓말을 한 민석을 안타까워했고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 한주에게 미안해했다.
그런 무열의 모습에서 한주는 엄마 박예주가 생각났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박예주도 한주에게 미안해했다. 그 미안함이 듣기 싫어 한주는 박예주의 기분을 풀어 줄 때 쓰는 방법을 사용했다. 무열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미안하면 저 이거 다 주세요.”
한주는 묵직한 에너지바 박스를 들었다. 마트에서 들고 온 박스라 B동 기숙사 학생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무열은 한주의 위로 방식에 웃음을 보였다.
“잠깐만.”
옷장을 열어 컵라면 박스까지 꺼내 얹어 주었다.
“이것도 먹어.”
“우와, 선생님! 진짜 감동했어요!”
한주는 한쪽 팔로 무열을 꼭 껴안았다가 놔주고는 얼른 박스를 들었다. 주말마다 집에 가지만 한창 자라는 성장기 청소년에게 주말에 들여온 식량은 이틀이면 동이 났다. 학교 내에 편의점이 있지만 판매하는 음식들은 다 비싸거나 유기농이라 배는 채워 줄 뿐 자극적인 맛이 없어 먹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몸이 멍투성이가 된 터라 당분간은 주말에 집에 가지 못할 테니 비상식량이 절실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싱글싱글 웃는 한주를 보며 무열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럼 전 방에 가 볼게요.”
“뭐? 몸도 좋지 않은데 여기서 자고 가.”
“괜찮아요. 하도 많이 맞아 봐서 이 정도는 끄떡없어요.”
‘사부가 얼마나 훈련을 독하게 시키는데, 이 정도야, 하루 푹 자면 될 정도지.’
한주의 생각을 모르는 무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종례 때 한주의 옷이 흐트러져 있거나 학교 내의 비품실에서 박한주가 교복을 가져갔다는 말을 듣고 괴롭힘이 있다고만 추측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폭력이 심각했다.
한주는 박스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무열의 방을 나서다가 멈춰 섰다.
“선생님.”
“응?”
“나중에,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늘 2학년 선배에게 당했던 일, 증언해 주셔야 해요. 정당방위였다고요.”
“뭐?”
자세히 묻기도 전에 한주는 박스를 안고 방을 나갔다. 험한 일을 당했는데도 한주의 얼굴은 밝았다. 1학년생의 건강함에 무열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2학년 알파가 이대로 포기할 리 없다. 알파의 집요함은 누구보다 잘 알았고 어릴수록 가감을 몰라 잔인했다. 특히 상대가 베타라면.
‘나만이 저 애를 지켜 줄 수 있어.’
* * *
다음 날, 이무열은 교무실로 가기 전에 학생 주임을 찾아갔다. 학교 내의 학생들 문제는 먼저 학생 주임이 판단해서 위에 알리고 있었다. 항상 학교에 일찍 나와 휴게실의 주전부리를 처리하기에 학생 주임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 어젯밤에 2학년이 우리 반 박한주를 교실로 끌고 가 폭행했습니다. 아무래도 교장 선생님께도 알려서 위원회를 열어야겠습니다.”
“이무열 선생님.”
학생 주임은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무열 선생님이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오신 지 3년째시죠? 그 정도 일하셨으면 상황 파악은 다 하셨을 텐데…… 눈치가 없는 겁니까? 아니면 그 베타만 편애하는 겁니까?”
“편애라니,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왜 올해만 유독 그러십니까? 작년에도 베타를 괴롭히는 학생은 있었고 재작년에도 있었잖아요. 매년 있는 일입니다, 매년.”
“그건……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더는 참을 수 없어서.”
“2년이나 지나서요? 허, 거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까지 참 오래 걸리시네요.”
“비꼬지 마시죠. 지금 그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요!”
무열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학생 주임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2년은 일해 봤으니 알 텐데. 그 정도 일로 위원회를 열 수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 정도 일이요? 학생 하나가 끌려가서 폭행을 당해 몸에 멍이 들고 피를 흘렸는데!”
“베타니까요. 뭘 새삼스럽게.”
“주임 선생님!”
“조례 시간 다 되어 갑니다. 교실로 가 보세요. 그 베타 하나 때문에 나머지 알파 학생들이 다 기다리게 생겼어요.”
“이렇게 넘길 일이 아니라고요!”
“거참, 이래서 낙하산은 피곤하다니까.”
낙하산이라는 말에 무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절대 그런 일로 위원회 소집은 안 되니까, 정 문제 삼고 싶으면 재강원 이사장님을 찾아가세요.”
“네?”
“모르는 척하시네. 다들 알아요. 이무열 선생님이 재강원 이사장님 백으로 이 학교 들어왔다는 거. 친분이 있으실 텐데 차라리 그분에게 얘기하세요. 왜 힘없는 저한테 이럽니까? 더 큰 백을 놔두고.”
학생 주임은 먼저 휴게실을 나갔다. 가식적인 무열의 말에 짜증이 올라왔다.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연봉이나 복지가 대기업급으로 다른 사립 학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대우가 좋았다. 그렇기에 직원 채용은 300 대 1로 치열했고 어린 알파들의 무시에도 사표를 쓰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이래서 곱게 자란 놈은 안 된다니까. 쓴맛을 모르니 다 자기 뜻대로 될 줄 알지.”
* * *
조례에 갈 시간이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학생 주임에게 재강원 이사장의 말을 듣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충격이 컸다.
“재강원…….”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학생 주임의 말대로 재강원에게 부탁하면 가장 효과적이었다. 다만 그러고 싶지 않으니 문제다.
재강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그를 움직여야 한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무열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떠올렸다.
박한주를 지키고 싶다.
안타까워도 지켜보기만 했던 다른 학생들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한주를 지키기 위해서, 최소한 폭행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무열은 곧장 양호실로 향했다.
결심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양호실로 들어가자 담당 의사가 인사도 안 하고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영양제라도 놔 드릴까요?”
“영양제보다는…… 다른 약이 필요해서요.”
의사는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을 억지로 침대에 눕힐 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다음 주 학회에 가야 해서 준비해야 할 자료가 많았다. 바쁘지 않고 페이가 좋은 재강원 고등학교는 개인적으로 공부하기에 좋았다.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 의사는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약을 드릴까요?”
무열은 잠시 망설였다. 원하는 약은 방에도 있었지만 양호실에 와서 공개적으로 요구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면 어떤 파장이 있을지 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그리고 양호실에서의 일을 보고받은 재강원이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했다. 앞으로의 모든 변화를 예상하고도 무열은 말하기로 결심했다. 평생 속여 온 일이었지만 한 학생을 위해서라면 밝힐 수 있었다.
무열은 자료를 정리하느라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의사에게 말했다.
“페로몬 억제제, 오메가용 페로몬 억제제를 주세요. 제가 먹을 겁니다.”
의사는 자판을 두드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이무열을 보았다.
이 학교에서 반을 맡는 담당 선생님들은 대부분 베타였다. 알파들을 위한 학교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지 몰라 오메가는 채용하지 않는다. 가끔 초빙 교수로 오메가 교수가 오기는 했고 만일의 사태를 위해 양호실에 오메가 페로몬 억제제를 갖춰 두기는 했지만 쓰인 적은 없었다.
입을 쩍 벌리며 경악하는 의사의 표정을 보며 무열은 다시 요구했다.
“오메가용 페로몬 억제제를 주시죠.”
폭탄을 던졌다.
* * *
재민석은 한주가 등교하기를 기다렸다. 박한주는 언제나 담임의 조회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편이었다. 지난밤 2학년이 한주를 불러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그 태연한 얼굴이 엉망이 됐겠다는 기대감에 등교하는 내내 어깨가 가벼웠다. 한주가 학생회 임원이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베타가 어딜 감히.
어떤 얼굴을 하고 교실로 들어올까.
아니면 도망쳐 영영 학교에서 떠났을까.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복도에서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뒷문이 열리며 한주가 들어왔다. 눈썹 옆에 반창고를 붙였고 입술에 작은 상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분명 전날 폭행을 당했으면서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모여 얘기 중인 알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인사하기까지 한다.
아침에는 흐느적대며 교실로 들어오던 평소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다들 좋은 아침!”
한주는 한 손에 쥔 에너지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사람은 아침을 먹어야 해. 아침을 먹으니 이렇게 기운이 솟고 기분도 좋잖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는데 앞자리의 알파와 눈이 마주치자 ‘안 그래?’라며 묻기까지 했다. 그 알파는 얼떨결에 물었다.
“B동 기숙사도 조식이 있을 텐데?”
“저혈압이라 아침에 제정신이 아니야. 이 학교 와서 아침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어. 아, 이거 너 줄게. 견과류가 70퍼센트나 들어 있어서 몸에는 무조건 좋을 거야.”
알파의 손에 에너지바 하나를 쥐여 준 한주는 민석과 눈이 마주치자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끼익, 민석이 앉은 의자가 뒤로 밀렸지만 발 앞까지 다가온 한주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때리려는 건가? 날 때리려고?’
한주는 긴장한 민석의 손에 에너지바 하나를 쥐여 주었다.
“먹어. 견과류가 뇌 발달에 좋대. 너한테 정말 필요한 음식이야.”
한주는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치는 학생들 책상마다 에너지바를 하나씩 놓아 주었다. 작은 가방에서 에너지바가 끊임없이 나왔다. 평소에 말도 걸지 않고 무시하는 베타가 싱글벙글 웃으니 알파 학생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멍하니 한주를 보았다.
반에 단 두 명 있는 베타지만 뭘 하든 관심이 없었고 한주는 언제나 조용했다. 괴롭힘을 당해도 주눅 들지는 않았지만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주에게 관심 없듯이 한주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2학년이 괴롭혀도 버티는, 다른 베타와 비교해 그저 좀 오기가 있는 녀석. 학생회 임원 선발로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한주는 딱 그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변했다.
우강희 주위에 서 있던 황치운, 차원구에게도 하나씩 주더니 한주는 이성진에게 다섯 개를 한꺼번에 주었다. 원구는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성진만 다섯 개를 받자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왜 이성진만 다섯 개 줘? 난 하나고, 이성진은 왜 다섯 개야?”
“이성진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강희는 성진을 보았다.
“그리고 차원구, 네 모토를 생각해. 받은 것이 있어야 주는 것이 있다. 준 것도 없는 네가 나한테 뭘 바라면 안 되지.”
놀란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하고 원구는 평소처럼 실실 웃었다.
“그러니 나한테 잘해 주면 너한테도 좋을 텐데?”
“필요 없어. 그래도 뭐, 어차피 에너지바는 많으니까.”
인심 쓴다면서 원구의 손에 하나를 더 쥐여 주었다. 두 개를 가졌지만 원구는 만족하지는 않았다.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할 말이 많은 듯 한주를 보았다.
치운은 혀를 찼다. 아침을 먹어 기분 좋다고 보기에는 한주는 너무 들떠 있었다.
“약 먹었나?”
“……이상해.”
성진도 치운의 말에 동감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원구는 자리에 앉아 기분 좋게 에너지바를 먹고 있는 한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 어젯밤에 2학년에게 불려 갔다며? 생각보다 멀쩡하다?”
전날 밤 한주가 2학년에게 불려 간 일은 소문이 퍼졌지만 그 후의 얘기는 듣지 못했다. 모르는 척 책을 보던 민석의 어깨가 작게 튀었다.
“아아, 그 선배들. 별거 없었어. 그냥 조금 때리다가 말던데.”
맞은 사람이면서 한주는 키득거렸다. 볼이 붉었다. 치운은 에너지바 성분을 확인했다. 뜯어서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달콤한 초콜릿 냄새만 났다.
“약 묻었나? 박한주, 너 취했어?”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일제히 손에 쥔 에너지바 성분을 확인했다. 관심 없는 척 등 돌리고 있어도 다들 이 상황을 재밌어하고 있었다.
성분은 지극히 평범했다.
한주는 교실로 들어온 이후 세 번째 에너지바를 뜯었다.
“우리 성진이, 다섯 개나 받은 네가 가서 말려 봐. 저거 또 먹는다.”
성진은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특별히 다섯 개나 받을 정도로 총애받는 사람이 가야지.”
뼈가 있는 원구의 말에 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세 번째 에너지바를 한입 먹으려는데 성진이 한주의 팔을 잡아 말렸다.
“……그만 먹어.”
“어? 이성진. ……그래. 알았어. 이성진이 말하는데 들어야지.”
싫다고 할 줄 알았던 한주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며 에너지바를 다시 봉지 안에 넣었다. 뜯지 않은 상태로 만들려는지 찢어진 봉지를 만지며 꼼지락거렸다.
“이성진이 그만 먹으라고 해서 그만 먹는다고? 이거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해?”
원구가 눈을 빛내며 두 사람을 보았다.
성진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강희의 요청으로 한주를 학생회에서 빼내 주었을 뿐이다. 한주도 진짜 도와준 사람은 강희임을 알 텐데 성진에게 더 큰 도움을 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반대쪽에 있던 강희가 벌떡 일어나더니 한주에게 손을 뻗었다.
“이성진, 잡아.”
“뭐?”
몸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한주의 몸이 팔에 힘없이 안겼다. 강희도 반대쪽 팔을 잡아서 한주는 바닥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불편한 자세일 텐데 눈을 감고 새근새근 소리를 내는 폼이 잠든 모습이었다.
“어? 박한주?”
“뭐야? 기절했어?”
치운이 다가오자 대답하듯이 한주가 웅얼거렸다.
“더 먹을 수 있어…….”
의사 집안의 성진이 한주의 눈꺼풀을 열어 보고 그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취했어.”
“설마 어제 2학년이 약 먹인 거 아니야?”
“밤에는 괜찮았어.”
대답은 강희가 했다.
“뭐?”
강희는 한주의 어깨를 감싸더니 무릎 뒤로 팔을 집어넣어 안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을 지켜본 학생들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호실에 데려간다.”
“……네가?”
학생의 편의와 케어를 위해 존재하는 직원이 있고 복도에는 가드들이 항시 서 있어서 부르기만 하면 되는데 강희는 직접 움직였다.
아니, 우강희가 움직여서 문제였다.
그는 베타를 싫어해 가까이 오기만 해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같이 다니던 차원구, 황치운, 이성진은 주위에 베타만 와도 미간을 좁히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런 사람이 먼저 나서서 베타를 안았다.
집중된 시선을 무시하며 그는 한주를 안고 교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드가 도와주려고 다가왔지만 한주를 넘기지 않고 강희는 양호실로 향했다.
* * *
1교시가 시작한다는 벨 소리가 교내에 퍼졌다.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갔고 복도에는 가드만 남았다. 학교 내에서는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하는 가드들은 당황을 숨겼다.
누구보다 학생들을 세밀히 관찰해 온 가드들은 학생들만큼이나 우강희에 대해 잘 알았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정어리 떼가 고래를 피하듯이 강희만 나타나면 알파들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들은 경외와 존경의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같은 사람이라도 베타라는 이유로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말이다.
그럼에도 강희는 타인에게 무관심했고 오직 자신이 허락한 사람만을 옆에 두었기에 학생들은 그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정신을 잃은 베타를 안고 지나갔다.
가드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 * *
우강희가 박한주를 양호실 침대에 내려놓았다.
재강원 고등학교는 알파들을 위한 학교이기에 환기 시설이 잘되어 있고 아프면 페로몬 조절이 더 힘들어지기에 양호실의 환기 시스템은 국내에서도 손꼽혔다.
강희는 양호실을 잠그고 벽에 붙은 조절기로 환기를 껐다.
누운 박한주를 돌아보는 그의 호흡이 조심스러워졌다. 발현 이후 그는 다른 사람과 밀폐된 공간에 있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누군가 그가 자는 사이에 방으로 들어올까 봐 방문을 잠갔고 그래도 걱정되어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깼다.
발현 이후에는 항상 그렇게 살았다.
항시 긴장감을 놓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호흡에서, 그의 피부에서 페로몬이 조금이라도 나올까 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의도를 가지고 한주를 직접 데려왔지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강희는 옆의 침상에 기대어 한주를 지켜보았다.
그는 알파로 발현한 후 인생이 바뀌었다. 결코 좋은 쪽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처와 이혼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강희가 알파로 발현할 거라면서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의 형이 된 우천희는 갑자기 나타난 배다른 형제를 반기지 않았고 그도 일부러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행복해하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우강희가 알파로 발현했다.
부모는 기뻐했지만 그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 했다. 필사적으로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고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다.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었고 마음을 놓을 수도 없었다.
누구와도 닿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밀폐된 공간에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알파든 베타든 오메가든 주위에 있으면 그는 항시 긴장했다.
한주가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음을 알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계속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오랜 세월 심리적으로 타인을 경계하며 살아온 그는 다른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페로몬을 내보내는 상황이 불편했다. 전날 처음으로 쓰기는 했지만 극소량이었고 바닷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수준이었다.
한주가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음은 알지만 좀 더 테스트가 필요했다. 극소량보다 조금 더, 도서실에서보다 더 많은 페로몬으로,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알아야 했다.
연구실처럼 완전히 밀폐된 장소가 아니기에 100퍼센트로 페로몬을 열 수 없지만 재강원 고등학교 환기 시설로는 50퍼센트까지는 처리할 수 있었다.
우강희는 심호흡을 하며 한주에게 다가갔다.
창은 닫혀 있었다. 한주가 누운 침상을 보며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의 눈이 잠든 한주의 얼굴을 훑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해도 될까.
일순 망설임이 지나갔다.
거칠게 얼굴을 훑는데 귀에 끼어 둔 검은 피어스가 손에 스쳤다. 피어스는 족쇄였다. 목줄이었고 그를 감시하기 위한 매개체였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감을 주었다.
우강희라는 위험한 알파를 제어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반대로 그가 원하지 않아도 위험한 짓을 저지르게 되면 처리해 줄 사람이 온다는 안전장치였다.
“박한주.”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음성에 페로몬이 섞였다. 미약하게 섞인 그것은 바로 앞에 있는 한주에게 닿았다.
강희는 천천히 페로몬에 명령을 실었다.
“「눈떠.」”
몸에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한주를 향해 흘러가 누워 있는 몸 주위에 짙은 막을 형성하며 커지기 시작했다. 고치를 만들듯이 조금씩 두꺼워지며 짙어졌다.
“「박한주, 눈떠.」”
좀 더 단호하게 목소리를 내보냈다.
자신의 페로몬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의 페로몬에 거부하는 존재를 보지 못했다.
그날, 자선 파티에서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우강희의 페로몬을 거부하지 못했다.
조용히 잠든 한주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깨어나는 기색도 없다. 아무리 약에 취하고 정신을 잃었어도, 술에 취해도 눈을 떠야 하는데 그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강희의 눈이 붉어졌다.
“「눈 떠.」”
다시 한번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눈을 뜨지 않길 바라지만 눈을 뜨라는 명령을 실어 페로몬을 한주에게 보냈다.
50퍼센트.
자선 파티에서도 제어하고 억눌러 45퍼센트의 페로몬을 내보냈었다. 알파로 발현한 이후 처음으로 반을 열었다. 페로몬이 억제에서 풀려나 기뻐하며 날뛰었다. 어깨가 쾌감에 오싹거렸다. 손끝이 저릿해지며 오감이 예민해졌다.
강희는 한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떠. 박한주. 눈을 떠.」”
미동도 없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강희는 몸을 떨며 한주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따뜻했고 맥박은 평온한 박동을 유지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강희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 한주가 기숙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를 서포트하는 공무원에게 연락했다. 일전에 조사를 지시한 일이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 네, 확인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호텔에 박한주라는 미성년자가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날은 오프인데 대타로 나와서 기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이력서에 적혀 있었습니다.
“특이한 점?”
웬만해서는 그런 단어를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 박한주는 ‘페로몬 무감증’입니다.
“페로몬 무감증?”
처음 들어 보는 병명이었다.
“기록이 있다면 보내 주세요.”
- 네. 다음 연락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통화를 끊고 우강희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 * *
그의 페로몬에 의해 난교가 벌어진 자선 파티에서 한 소년만이 페로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를 구해 주었다. 베타·알파·오메가, 형질에 상관없이 다들 페로몬에 취했던 상황인데 그 소년만이 오롯이 이성을 유지했다.
페로몬을 제어하느라 시야가 흐릿했고 모자와 마스크를 써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박한주였다.
“역시 너였어.”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좋을지 모를 기묘한 흥분이 우강희의 몸을 자극했다.
아무도 이해 못 할 감동이었다.
신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우강희에게 지상에 유일한 ‘예외’를 남겨 주었다.
* * *
“성정원은?”
점심을 먹고 학생회실로 향하던 우천희는 뒤따라오는 한수원을 보며 물었다. 그 미간에 짜증이 가득했다.
“밤에 박한주를 불러냈다고는 들었는데 그 후 소식이 없는데?”
“같은 반이잖아. 오전에 봤을 거 아냐.”
“등교 안 했어.”
“등교를 안 해? 왜?”
“모르지, 어제 너무 많이 움직였나?”
수원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부회장이기는 하지만 학생회에 그다지 애착은 없었다. 평소에도 그런 태도이기에 천희는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다.
“연락해 봐.”
“나중에 오겠지. 아, 박한주가 오전 내내 양호실에 누워 있었다는 말은 들었다.”
천희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양호실? 겨우?”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었나 봐.”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기분이 나쁘지만 학생들이 지나가며 눈인사를 하자 천희는 웃어 보였다. 가식적인 그 표정을 보며 수원은 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만 끊을까 생각하는데 신호음이 끊어지며 정원이 전화를 받았다. 분명 수원의 전화임을 알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정원, 왜 연락이 없어?”
수원이 정원과 통화하자 천희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니? 어제 박한주, 그 베타를 불러냈다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보고는 해야지.”
양호실에 보냈으면 어느 정도 움직였다는 소리인데 정원은 일언반구 없었다. 베타를 어떻게 손봐 주었는지 자랑할 성격인데 조용했다.
- 그딴 일…….
숨소리가 거칠었다. 압박을 받는 듯이 목소리가 낮았다.
“성정원?”
- 끊어. 그 베타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연결이 끊겼다.
천희가 무슨 얘기를 들었냐고 지그시 바라보았지만 수원은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박한주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면서 끊었어.”
“뭐?”
“목소리가 이상하던데.”
그 말을 천희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제대로 처리 못 했으니 꽁무니 뺐군. 알파들이 다 왜 이 모양이야? 이창원은 캠프에서 다쳐서 입원하고, 베타 하나를 잡지도 못하고 임원으로 만들고, 게다가 성정원은 그 녀석을 제대로 손봐 주지도 못하다니.”
“글쎄.”
잠시 생각하던 수원이 머릿속에 떠오른 바를 말했다.
“알파가 문제일까, 베타가 문제일까.”
수원은 다 한주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정원 말이야, 이 학교에 징계가 왜 없는지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은 아닐까. 학생 징계라는 오점을 만들지 않고 아예 쫓아내니까 이 학교에 징계가 없잖아. ”
“겨우 그 정도로?”
“알파들은 체면을 중시하니까. 이 좁은 알파 사회에 누구 집 아들이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쫓겨났다고 소문이 퍼질 텐데, 본인은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해도 부모들은 다르지. 명성에 먹칠한 자식을 얼마나 이해해 주겠어?”
“나약하기는.”
천희는 더는 파고들지 않았다. 싫다고 꼬리 말고 도망친 알파를 억지로 움직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정원의 행동이 변한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호전적이며 학생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정원이 가볍게 그런 판단을 할 리 없었다.
“임원 건은 보류하고, 박한주가 어떤 놈인지 조사해.”
“알았어.”
* * *
한주가 강희에게 안겨 교실을 나간 후 무열은 뒤늦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 취한 듯이 보였다는 학생들의 말에 학생 세부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아, 알코올 분해 효소 결핍증이 있네.”
“……ADH deficiency요?”
성진이 다가와 태블릿을 확인하는 모습에 무열은 잠시 놀랐다.
“……에너지바?”
“에너지바에 알코올을 왜 쓰겠어. 한주가 먹은 에너지바는 어제 내가 준 거야. 어제 두 개인가 세 개 먹었을 때는 괜찮았어.”
그때 반에 있던 알파 중 하나가 핸드폰을 꺼냈다.
“우리 계열사니까 연락해 볼게요.”
에너지바를 만든 회사 그룹의 사장 아들이 연구실에 전화를 걸어 표시된 성분 외에 알코올이 추가되었는지 확인했다. 알파는 “네? 정말요? 알았습니다.”로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잡향을 없애고 향을 풍부하게 만들려고 건포도에 럼을 미세 분사한답니다.”
“뭐? 건포도에 묻은 럼 때문에 그런다고? 그래 봤자 0.000몇 퍼센트밖에 되지 않을 텐데?”
“에너지바를 먹고 취했다면 그 이유밖에 없겠지. 알코올 분해 효소 결핍증이라잖아.”
“진짜 그럴 수 있어?”
학생들은 신기한 놈이라며 웃었지만 성진은 웃지 않았다.
무열은 오전에는 서류 작업과 학생회 임원 선발 캠프 이후의 뒤처리로 각 가정에 보낼 통신문을 작성하느라 바빴다. 양호실에 들러 확인하기 전에 반에 들렀는데 우강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오전 내내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다.
“우강희는?”
친하게 지내는 차원구에게 물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모른다고 말했다.
“전화 안 걸어 봤어?”
“볼일이 있으니까 안 왔겠죠. 박한주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쉬러 갔을 수도 있고.”
무열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치운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고개를 저어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어려도 알파는 알파지. 하여간 알파들이란.”
알파의 독립적인 성격을 알고 있지만 가끔은 정나미가 떨어졌다. 자주 어울리고 같이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연락도 없는데 그들은 전화도 안 했다.
“오면 연락해.”
무열은 한숨을 쉬며 교실을 나왔다. 이미 기숙사에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강희는 승마 클럽 외에 학교 본관과 기숙사만 오가며 단조로운 생활을 했기에 더 찾기 힘들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고작 몇 시간 뿐이기에 좀 더 지켜보자며 양호실로 향했다.
* * *
양호실 담당 의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무열을 맞았다. 아침에 무열이 폭탄을 터뜨려서 놀랐던 그는 아침 일은 이미 잊은 듯 반겨 주었다.
“잘 오셨습니다.”
“박한주 학생은 어떤가요?”
“아직 자고 있습니다. 박한주보다는…….”
의사의 시선을 따라 침상을 본 무열 역시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강희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한주를 보고 있었다.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해도 관심 없고 간섭하지 않고 무의미하게 일상을 보내며 다가오지 않게 벽을 치던 강희가 한주만을.
그 모습을 보자 무열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우강희가 베타인 박한주를 진지하게 보고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무열이 같은 공간에 들어왔는데도 고개도 들지 않고 오직 한주만 보인다는 듯이 고개도 움직이지 않았다. 알파의 집착이 어떤 것인지 안다.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도 그 독점욕과 집착으로 파경이 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한주는 베타. 그 미래에 결코 꽃길만 펼쳐지지 않는다. 한 발만 어긋나도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우강희, 안 돼.”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소리에 강희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의 눈길에 실내 온도가 훅 떨어졌다. 그는 평소 사람들이 다가올까 봐 긴장하며 경계했지만 무관심한 경향이 강했다. 그런 그의 눈에 감정이 깃들었다. 무열의 말에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불쾌감이 무열에게도 느껴졌다.
“안 돼.”
재차 말했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희가 어떤 알파인지도 잊었다. 그 상대가 박한주여서는 안 된다. 어떤 불운이 한주를 덮칠지 알기에 무열은 반대했다.
그의 짧은 말에서 이무열의 마음을 알아차린 우강희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속이 울렁였다. 무열은 시선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강희!”
“자신조차도 속이는 당신이 타인의 일에 끼어들 입장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강희가 변했다.
이무열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강희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바라보기만 했는데도 위압감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까딱, 고개를 움직이는 그의 동작에 무열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한주를…… 한주를 괴롭히지 마.”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당신이 알파 때문에 괴롭다고 해서 한주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만이죠. 남에게 충고할 시간에 자신을 돌보세요. 이제…… 몸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희의 시선이 무열의 배로 잠시 향했다.
흠칫 놀라며 배를 감쌌다. 왜 강희가 제 배를 보는지 모르지만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는 누워 있는 한주를 다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무열은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벌벌 떨렸다. 한겨울 숲에서 맹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은 공포에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강희의 손이 무열의 어깨를 툭 치자 압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한주에게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그는 양호실을 나갔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열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 이무열 선생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식은땀이 엄청나요.”
의사가 사색이 된 무열의 안색을 살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전자 체온계로 이무열의 체온을 쟀다.
“열이 있으시네요.
“우강희…… 우강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목소리가 떨리고 힘이 없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네? 우강희요? 우강희면…… 선생님네 반 학생이죠? 로열 알파인 이성진과 같이 다니는. 그는 여기 안 왔는데요?”
방금 우강희가 나가는 모습을 보았으면서 의사는 이상한 말을 했다. 기묘함에 소름이 끼쳤다.
“한주, 한주를 데려왔잖아요. 방금 나가기도 했고…….”
“아…….”
그제야 생각났는지 의사가 말했다.
“어느 학생이 데려오기는 했는데……. 누구였는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네요. 아무튼 우강희는 여기 오지 않았어요. 왔으면 기억하죠. 그런 알파는 흔치 않잖아요. 같은 알파가 봐도 장래가 기대되는데.”
진실로 그리 믿는 얼굴이었다.
무열은 사색이 되었다. 의사의 기억에서 우강희는 삭제되었다. 존재를 지운 것이다.
의도적으로 한 일일까 아니면 충격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 버린 것일까.
어느 쪽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우강희를 정말 못 봤다고요? 지금 나갔잖아요! 방금까지 저 의자에 있었는데!”
“네? 이무열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아침에 갑자기 오메가라고 말하더니……. 아까부터 우강희를 왜 찾으세요?”
“정말 못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정말로요.”
의사는 강희가 앉았던 의자를 힐끔 보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진짜 못 봤다고 말했다. 무열을 바라보는 눈빛이 걱정에서 불안으로 바뀌었다. 무열 때문에 병원에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무열은 믿기지 않아 우강희가 나간 문을 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몸의 떨림이 가라앉질 않았다. 생존 본능을 위협하는 공포가 아직 몸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그때, 무열이 안 된다며 반대했을 때, 우강희는 절 죽일 수도 있었다.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살인이 아닐까.
“선생님? 몸 괜찮으세요?”
부축하려고 다가온 의사는 아침때와는 다르게 살가웠다. 무열의 어깨를 감싸며 도와주려 했지만 그 손이 닿는 순간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다.
다른 알파의 손길을 몸이 거부했다. 밀치고 싶은 욕구를 누르고 느릿하게 의사를 밀어냈다.
긴장 때문인지 우강희의 위협 때문인지 배가 아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