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 리턴 2권
10. B동 기숙사 폐쇄(2)
“한주야, 기숙사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어?”
월요일, 조례가 끝나자마자 이무열은 한주를 복도로 불러냈다.
“재민석은 근처에 집을 구해서 다닌다던데 넌 어떻게 하기로 했어?”
“A동 기숙사로 들어갈게요.”
뜻밖의 말에 무열은 입을 다물었다.
주로 한주를 괴롭혔던 2학년 이창원은 입원해 병원에 있지만 퇴원하면 기숙사로 돌아올 것이고 기숙사에는 학생회 임원들이 있었다. 건물 동이 다르지만 언제든 2학년들은 1학년 기숙사로 갈 수 있었다.
학교 외부에서 등·하교하여 2학년들과 접점을 줄이려는 계산으로 재강원까지 끌어들였는데 한주는 A동 기숙사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제 발로 사지로 들어간다니 무열은 당황했다. 지금 알파 기숙사로 들어가는 일은 한 우리에 포식자와 피식자를 같이 집어넣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우강희였다.
“한주야, 어머니와 상의해 봤어? 어머님도 그렇게 하래?”
“어머니는 제 의견을 존중하는 분이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자취해도 되잖아. 굳이 A동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
“일부러 돈을 들이고 싶지 않아요.”
“아…….”
이무열은 입학 초에 했던 학부모 면담에서 만났던 한주의 엄마를 떠올렸다.
조곤조곤 조리 있게 말하며 자식의 말을 경청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차림새는 다른 학부모들과 차이가 있었다. 상위 1퍼센트의 집안 학부모들을 만나다 보니 비교할 생각을 하지 않아도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생각이 짧았다. 섣부른 판단으로 오히려 한주를 위험에 빠뜨렸다.
“우강희가 방을 같이 써도 된다고 말해서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거야? 빈방은 이미 다른 반에서 가져갔는데…… 우강희 말고, 다른 알파의 방을 알아봐 줄게.”
한주는 무열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베타와 한방을 쓰고 싶어 할 알파가 있을까요?”
무열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내다가 문제가 생기면 외부에서 다닐게요. 우선은 우강희와 지내보고요.”
오히려 안심시키려는 모습에 무열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A동 기숙사를 들어가는 것도 문제지만 우강희가 더 큰 복병이었다. 그는 한주에게 호기심을 넘어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호감의 문제보다 무열은 다른 일을 걱정했다.
한주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우호적이라며 좋아할 수 있다. 우강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그래도 찾아볼게. 우리 좀 더 알아보자, 응?”
포기하지 않은 무열의 말을 들으며 한주는 교실을 보았다.
우강희는 책상에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었다.
한주가 등교했을 때부터 그 상태였다.
교실로 들어갔을 때부터 같은 자세였다. 전날, 같이 학교에 왔으니 친해졌다고 생각해 인사하려 했는데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다. 단지 눈을 감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건드리면 터질 듯이 날이 서 있었다.
표정을 험악하게 짓는다든가 제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의 분위기에 물들어서인지 반 학생들도 조용했다. 조례 전에 수다를 떨던 차원구조차 가만히 있었다.
모든 일이 리셋된 것처럼 우강희는 예전의 타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룸메이트가 누가 되든, A동 기숙사로 들어갈게요.”
“그래, 선생님이 괜찮은 룸메이트를 찾아볼게.”
한주의 말을 허락으로 생각했는지 무열은 바쁘게 태블릿을 확인했다. 소용없는 짓을 하는 무열의 곁을 떠나 교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며 마찰음이 났는데도 우강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는 자세를 고수했다.
‘무슨 일이 있나?’
이상함보다 걱정이 커졌다.
* * *
3교시 수업이 끝나자마자 1학년 알파 김시훈이 한주를 불렀다.
“박한주, 할 얘기 있으니 나와.”
한주가 소화기 가루를 뿌렸던 다른 반 알파였다.
학생들은 힐끔 보았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한마디 끼어들 만한 차원구도 지켜보기만 했다.
“뭐야?”
“학생회 일.”
“그건 이미 학생회장에게 거절했어.”
“네 마음대로 하기 싫다고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얘기를 마무리 져야지. 따라와.”
“4교시 남았는데?”
김시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짧게 끝나.”
앞서 걷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 층을 내려가 끝 교실로 향했다. 목적지는 2학년 교실이었다.
“2학년?”
한주는 성정원을 기절시켰던 일을 떠올렸다. 보복하거나 그 후 성정원이 불러내는 등 2학년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오늘 외부 수업으로 교실이 비어.”
‘곧 수업이 다시 시작하니 엉뚱한 짓은 하지 않겠지.’
앞서 걷던 시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2학년한테는 무슨 짓을 한 거야?”
“2학년?”
“성정원 선배.”
수수께끼처럼 던지는 말에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짓이라는 것의 범위를 생각했다.
“그들이 왜?”
“모르니까 묻잖아. 네 얘기만 하면 이를 갈면서도 피해서 그날 무슨 짓을 한 건가 궁금했어.”
“글쎄? 그들이 날 때리기는 했지.”
여상한 대답. 목소리에 떨림이나 주저함은 없었다. 김시훈은 한주의 얼굴을 한번 확인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자신이 맞은 얘기를 하면서 피해자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한주는 캠프에서 알파를 상대로 끝까지 버티며 끝내 잡히지 않고 살아남아 학생회 임원이 되었다. 김시훈은 박한주를 무시하지 않았다. 베타라도 가끔 알파보다 뛰어난 이들은 있다. 그들보다 몸집이 작은 한주지만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는 않았다.
다른 베타에 비해서는 제법 담력이 세다고 생각할 뿐.
비록 베타가 뿌린 소화기 가루 때문에 온몸이 하얗게 변했었고 주위 알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는 했지만 그 일로 보복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일은 학생회를 위한 공적인 행동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한주는 교실 안을 확인하고 걸음을 멈췄다. 성정원과 2학년 두 명이 놀란 표정으로 절 보고 있었다. 한주가 기절시켰던 세 명이었다. 학생회 임원으로 선발된 1학년 알파 셋이 더 있었다.
그들은 이전의 삶에서도 학생회 임원이었다.
“……우릴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더니 그게 박한주야?”
성정원이 이를 갈았다. 1학년들은 정원을 겁내지 않았다.
“선배로서 모범을 보여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주시죠. 마무리는 직접 하시라고 마련했습니다.”
“제대로 끝내지도 않으셔서 후배들이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보여 주세요, 선배.”
1학년 알파들의 말에 제일 처음 반응한 사람은 2학년 둘이었다. 놀라 한주만을 보고 있던 2학년 둘이 움직였다.
“바, 박한주? 으아악!”
“비, 비, 비켜!”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교실을 뛰쳐나갔다. 기겁하며 도망쳤다는 말이 어울렸다. 2차전을 예상했는데 그들이 먼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교실에 있던 1학년은 물론 한주도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왜 저래?”
기가 막혀 1학년들이 정원을 보았다. 그도 일어나 있었다.
한주가 보기에는 도망치려다가 실패해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 같았다. 정원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꾸몄지만 한주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저 자식들, 미쳤나?”
태연하게 말하지만 미세하게 정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1학년 알파들도 눈치챘다.
“성정원 선배?”
“조용히 해! 건방지게 이런 일을 벌이다니! 아직 수업도 다 안 끝났는데 무슨 짓이야!”
출석 체크가 없고 생활 태도를 반영하는 학생부가 없기에 학생들은 수업에 자율 참석이었다. 그저 다른 알파들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수업에 참석하고 성적을 유지했다.
“니들이 판 깔아 주지 않아도, 하면 내가 해! 건방진 새끼들! 수업 시작하니까 오늘은 가 봐!”
그의 말이 끝나자 4교시가 시작한다는 멜로디가 복도에 울렸다. 그나마 복도를 돌아다니던 학생들도 교실로 들어갔고 수업에 조금 늦은 교수는 서둘렀다.
정원은 한주가 선 뒷문이 아니라 앞문으로 나가려고 몸을 틀었다.
그쪽에 서 있던 1학년이 문 앞을 막아섰다.
“이미 수업 시작했습니다. 이 반은 외부 수업이라 오늘 비어요.”
“비켜!”
“설마, 선배도 도망가는 겁니까?”
김시훈의 말이 성정원을 붙들었다.
“……뭐?”
“지금도 봐요. 박한주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데. 마치 겁먹은 사람처럼요.”
“무서운 건 아니죠? 선배. 알파가 베타를요?”
허를 찔린 듯이 정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진짜로 한주를 무서워하는 듯이 보였다.
한주는 그 상황을 지켜보며 문득 우강희가 떠올랐다.
‘박한주를 무서워한다.’
다시 덤비지 못하게 하려고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우강희가 자신이 처리하겠다며 나섰었다. 그저 기절한 2학년들의 이마에 손을 대기만 했다.
잠깐의 접촉만 있었다.
‘설마. 페로몬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어 정원을 보는데 눈이 마주쳤다. 눈을 부릅뜨며 바라보는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벌린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이 달싹이는데 지켜보던 1학년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선배?”
“미쳤어! 지금 실금한 거야?”
노릿한 냄새가 교실에 퍼졌다. 바지가 젖으며 바닥으로 물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도 성정원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주만을 보았다.
극한 공포에 몰려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나와, 박한주.”
그때 교실 뒷문이 열렸다. 우강희가 서 있었다.
그는 한주를 보았다가 성정원을 보았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성정원은 풀썩 주저앉더니 최면에서 풀린 사람처럼 자신의 상황을 인지했다.
“이, 이게 뭐야? 무슨 일이야? 윽! 냄새! 이게 무슨…….”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 내가? 이…… 아아아악!”
성정원은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뭐야? 저 선배, 왜 저래?”
“이게 무슨 일이야?”
1학년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우강희를 보고 성정원이 겁먹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실금했다.
“가자.”
강희는 절 보고만 있는 한주의 손목을 잡고 교실을 나왔다.
1학년 알파들은 나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 * *
믿기지 않았다.
페로몬 싸움을 하는 알파들을 본 적은 있어도 이 정도의 영향력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페로몬이 부딪히는 상황에서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런데 당사자도 없는 상황, 페로몬을 쓰지도 않았는데 이전에 묻혀 둔 페로몬이 영향을 끼쳐 다른 사람을 보고 겁먹게 할 수 있을까.
한주는 호텔 일을 하면서 알파의 페로몬에 대해 교육을 받고 직원들에게 어메이징한 알파의 페로몬 효과에 대해 주워듣기도 했지만 이 정도 영향력은 들어 보지 못했다.
“네가 한 거야? 2학년.”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도록 해 준다고 했는데 실패했어.”
우강희는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그들의 발소리만 울렸다. 그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한주는 강희의 옆으로 걸으며 예전 일을 상기시켰다.
“……그럼 내 소원 들어줘야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됐다고 했지. 그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야.”
강희가 한주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수업에 참여하기에는 늦었는데 기숙사 구경할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한주의 손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놓지 않으려는 듯 손가락 사이를 얽으며 깍지 꼈다.
* * *
한주는 일반 중학교에 다녔었다.
태어나면서 형질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은 성인이 되기 전, 청소년기에 발현했다.
알파, 오메가란 유전적 희귀 형질은 천 명 중 한두 명 정도로 드물게 나타났고 일반 학교에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의 알파와 오메가가 있을 정도로 그 수는 적었다.
그들이 흔치 않은 존재다 보니 인터넷이나 TV에서 알파를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사회 지도층이나 재벌 중에 알파의 비율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타고난 형질로 사람들이 편을 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한주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절절히 느꼈다.
베타와 알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힘, 두뇌, 체격.
이길 수 없다는 절망을 매번 겪으며 작게 자존심이 깎여 나갔다. 그리고 나중에는 살기 위해, 이긴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버티기만 하던 삶이 끝나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사람들이 다 다른 것처럼 그들의 특성을 인정하고 한주는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우강희는 달랐다.
* * *
“너무 다른데?”
“뭐?”
A동 기숙사는 1동, 2동, 3동으로 나뉘었다. 학년에 따라 기숙사 동이 배정되었다. A1동은 1학년이 머물렀는데 2학년이 지내는 A2동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알파는 1학년 때부터 성인의 체격과 다를 것이 없지만 3학년의 경우 사회에 나가기 전이라 예민해서 A3동은 3학년만 출입 가능했다.
두 번째 다니는 고등학교지만 A동 기숙사는 처음이었다. B동 기숙사와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달랐다.
“학비에 기숙사비가 포함되었는데 A동 기숙사와 B동 기숙사가 너무 차이 나지 않아?”
“그래?”
B동 기숙사를 가 보지 않은 우강희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파 학생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기숙사 건물의 크기 차이는 있을 수 있었지만 내부는 비슷하게 꾸며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학생들을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 학교의 당연한 자세였는데 이 학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외관은 B동 기숙사와 다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플로어가 나왔다. 흡사 6성급 호텔의 분위기였다.
1층에는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파가 배치되어 있었고 2층에는 대회의장이 있었다. 3층은 피트니스, 영화 감상실, 토론실 등이 있고 그 위로는 학생들 기숙사였다. 최상층에는 루프톱 카페가 있었다.
한주의 옆에 선 이성진이 대답했다.
“……기숙사는 졸업생의 기부로 운영돼. 학비는 알파든 베타든 똑같이 쓰여. 학교 홈페이지에 작년도 예산 운용 결산 보고서가 올라와 있으니 확인해 봐.”
“기숙사 시설이 다른데 어떻게 운영비가 똑같아?”
“……시설과 운영비도 기부야.”
평소 귀찮아 차원구의 말에도 잘 대답하지 않는 성진이 성실히 말해 주었다.
한주는 나른한 시선으로 절 보는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우강희에게 손이 잡혀 A동 기숙사를 가는데 인기척에 뒤돌아보니 성진이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자체 휴식.”이라고 답했다.
어차피 A동 기숙사로 가는 길이니 푹 쉬려고 4교시부터 수업을 빠지는구나, 생각했는데 성진은 그들을 계속 따라왔다.
직원들은 수업 시간에 A동 기숙사로 온 한주를 주시했다. 체격만으로도 베타와 알파는 확연히 구분되기에 베타임을 모를 수 없었다. 딱히 A동 기숙사에 베타 출입이 금지되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알파의 피지컬에 눌려 오지 않을 뿐이라 직원들은 한주를 신기해했다.
반대쪽에 선 우강희가 이성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못마땅한지 미간이 좁아졌다.
“이성진, 왜 따라오지?”
“……수업 시작하자마자 우강희가 갑자기 박차고 나가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했어.”
“그것을 묻는 게 아니야.”
“뭐? 나 나오자마자 쫓아왔어?”
성진이 대답했는데 한주가 강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대답은 다시 성진이 했다.
“……너 나가고 한참 뒤에 나갔어.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할 텐데 찾아낸 것을 보면, 페로몬을 묻혔겠지. 자기 페로몬은 추적할 수 있으니까.”
우강희는 성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평소에는 귀찮아 대답도 잘 하지 않으면서 한주의 질문에는 쓸데없는 것까지 말한다.
그에게 불리한 것들로만.
“나한테 페로몬을 묻혀? 우강희, 진짜야?”
“오늘은 안 묻혔어.”
이전에 묻혀 두었던 흔적을 따라온 거였다.
대답하기 전에 잠깐 망설이자 한주는 기숙사 1층의 헬프 데스크로 뛰어갔다.
“소취제 좀 주세요.”
“아, 네.”
한주는 직원에게 소취제를 받자마자 온몸에 뿌리고 각 층 안내판 앞에 서 있는 그들에게 다가왔다. 한주의 몸에 소취제의 시트러스 향이 풀풀 났다.
우강희와 이성진은 동시에 미간을 찌푸렸다.
알파는 소취제의 향을 싫어한다. 소취제의 향기는 페로몬을 지우기 때문에 알파든 오메가든 모두 싫어했다.
“한 번 더 묻히면 화낸다, 우강희.”
우스웠다. 유치원생을 협박하듯이 화낸다고 말하니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화낼 거냐고 묻고 싶은데 강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 질문은 성진이 했다.
“……어떻게 화낼 건데?”
“정말 화나면…… 무시해 버려.”
대답하면서 한주는 김지영을 떠올렸다.
김지영은 알파가 된 후 한주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는 지영이 알파가 되었다고 유세 부린다고 생각했고 질투도 했다. 지영이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어긋난 사이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왜 그러냐고 묻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어디부터 볼까? 어디를 자주 가?”
“카페테리아. 보통은 그곳을 자주 이용하지.”
기숙사로 돌아오면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 이성진과 우강희는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강희가 카페테리아를 자주 간다고 말했다.
성진의 입꼬리가 실룩 움직였다.
“……위에서부터 둘러보며 내려오면 될 거야.”
“그럴까?”
엘리베이터로 가니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가드가 버튼을 눌러 주었다. 베타인 한주를 보며 친절하게 미소 지었다.
12층에 루프톱 카페가 있다. B동은 옥상에 올라가지도 못하게 잠가 놓았으면서 A동에서는 카페테리아로 운영하며 서비스를 제공했다.
“카페테리아면 디저트나 음료를 파는 건가?”
“식사도 가능해. 빵 종류도 있고.”
“몇 시까지 하는데? 야식 먹고 싶으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니 좋겠다.”
맑은 전자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면서 조금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성진도 그들을 따라 내렸다.
검은 프레임으로 인테리어한 공간에는 짙은 월넛색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바람이 불자 한낮의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 쳐 놓은 하얀 가림막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앉아 있지 않았다면 고급 바나 마찬가지였다.
알파 기숙사를 방문한 베타를 신기하게 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카페를 둘러보았다. 한주 눈에는 비싸 보인다는 점 외에 다른 특징은 없었다.
대충 전체적으로 훑어보다가 잠시 빵이 진열된 케이스에 한주의 눈이 멈추었는데 강희가 놓치지 않았다.
“먹을래?”
“아, 아니. 조금 있으면 점심 먹어야 하니 괜찮아.”
“기다려.”
“어?”
분명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강희는 계산대로 가 빵 몇 가지를 가리켰다. 많이 배고플 시간이긴 하다.
‘사 주려나?’
한주는 조금 기대했다.
“……A동 기숙사로 들어오려고?”
조용하던 성진이 입을 열었다.
“어. 자취할 수는 없으니까.”
“……우강희와 진짜 같이 지낼 수 있겠어?”
“살아 봐야지. 본인도 괜찮다고 하고. 덕분에 방 구할 걱정도 덜었고.”
의외로 강희가 먼저 룸메이트를 제안했다. 물론 한주가 그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갑자기 알파가 호감을 보이며 곁을 내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희는 다른 알파들보다는 더 경계심이 많으니까.
그 점이 의아하기는 하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그의 호의를 받기로 했다.
“……양평에 별장이 있어.”
“그래? 양평에 별장이 많긴 하더라.”
‘이성진이 자기 집 재산 자랑도 하네.’
귀엽게 느껴져 한주는 속으로 웃었다.
“……쓸래?”
포장한 빵을 받으며 계산을 하는 강희를 지켜보던 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뜻밖의 제안에 놀랐는지 눈만 깜빡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니 한주는 더 어려 보였다.
“뭐?”
“……어차피 여름방학 시즌에만 쓰는 별장이라 비어 있어. 청소하는 관리인도 근처에 상주해서 살기 나쁘지 않고. 빌려줄게.”
“아니.”
단박에 거절했다. 한주는 깊게 생각해 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해 주지 않아도 돼.”
마치 이성진이 이미 많은 것을 해 주었다는 듯이 거절했다. 그저 남아도는 별장 하나를 빌려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거절당하니 성진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 한쪽에 따끔, 작은 통증이 일었다.
“……왜?”
알파와 룸메이트가 되는 상황보다는 나을 텐데 왜 거절할까?
우강희가 같이 방을 쓰자는 말은 받아들였으면서 성진의 더 좋은 제안은 거절했다.
“……왜 거절하지?”
한주는 성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절 바라보는 시선인데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삐딱하게 서 있던 성진이 허리에 힘을 주었다. 한주의 대답에 표정이 굳었다.
“괜찮아, 이성진.”
소름이 돋았다.
대화의 내용에 맞지 않는 말이지만 속내를 들킨 듯이 성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 예전 일은 잊어도 돼.”
성진이 왜 한주에게 신경 쓰는지 아는 말투였다. 기억하기로 한주는 절 만난 적이 없었다.
“박한주, 너 날…….”
“이성진, 박한주와 무슨 얘기해?”
우강희가 끼어들었다. 잠깐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을 신경 쓰며 빵이 든 종이봉투를 한주에게 건네주지만 눈은 성진을 향했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며 성진을 경계했다.
“너와 방을 쓸 수 있겠냐고 걱정해 주었어. 알파와 방을 같이 쓰기가 쉽지는 않은가 봐. 담임도 그렇고 이성진까지 이렇게 걱정할 정도니.”
“방 주인인 내가 허락했어. 잘 지낼 수 있어.”
“응, 나도 우선 살아 보겠다고 말했어.”
대답 잘했다며 강희는 한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한주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친구 김지영이 자주 한주의 머리를 만지거나 팔짱을 잘 껴서 스킨십에 익숙하지만 강희가 그러자 느낌이 달랐다.
그의 시선을 피하며 강희가 만졌던 곳을 헝클었다. 어색했다.
“머리 만지지 마.”
한주를 보던 눈이 성진을 향하자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강희가 페로몬을 내보내지 않았지만 그의 경고가 이성진의 피부를 찔렀다. 솜털이 섰다.
제 것의 주위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경계였다. 더 적극적으로 강희가 행동하기 시작했다. 성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업 끝나면 사람이 많아지니 그 전에 둘러보자.”
“다른 시설은 2층과 3층에 몰려 있었지?”
“이성진, 너도 계속 같이 다닐 거야?”
“……난 방에.”
분위기만 볼 생각이어서 한주는 엘리베이터로 다가갔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안에서 2학년이 내렸다. 그들은 한주의 옆을 지나며 빤히 쳐다보았다.
“걔지?”
“베타인 거 같은데 설마 여기로 들어올 생각은 아니겠지? 왜 이창원은 저 베타를 건드리지 말라는 거야?”
“언제까지 입원해 있을 거래? 누구에게 당한 건지 아직도 말 안 해?”
“하겠어? 나 같아도 쪽팔려서 얘기 안 한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한주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우강희는 7층을 눌렀다.
“7층? 7층에 뭐 있어?”
“내 방. 앞으로 살 방인데, 미리 확인해 봐.”
“아, 그래. 그렇네.”
짐은 직원이 옮겨 준다고 들었지만 미리 둘러보고 필요한 것은 없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한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성진이 끼어들었다. 강희와 눈싸움을 하며 말했다.
“……나도, 나도 우강희 방에 가 보지 못했어.”
* * *
7층에서 내리니 방문과 방문 사이가 넓었다. 베타 기숙사보다는 더.
우강희의 뒤를 따르며 한주는 평소 걷던 보폭으로 걸음 수를 셌다. B동 기숙사로 돌아가면 옆방과의 방문 간격과 비교해 볼 생각이다. 알파 졸업생의 기부로 시설이 좋을 수 있지만 방까지 차별하면 익명으로 민원을 넣을 생각까지 했다.
“이 방이야.”
강희가 문을 열고 한주를 기다렸다.
다른 학생의 방은 처음 가 본다. 친구 고용진의 집을 처음 갔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멋쩍달까.
평소 입지 않던 스타일의 옷을 입어 거울에 비춰 보는 느낌이었다. 어색하고 이상한데 나쁘지 않은 느낌.
방으로 들어가는데 쿵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우강희, 나 아직 안 들어갔어.”
돌아보니 성진이 문을 닫으려는 강희와 대치하고 있었다. 문틈에 성진의 발이 끼워져서 닫을 수 없었다.
“방은 다 똑같아, 이성진. 방이 궁금하면 네 방을 봐.”
“……박한주와 단둘이서 뭘 하려고?”
“그게 왜 궁금한데?”
안팎으로 서로 문을 밀고 당겨서 문이 삐걱대며 움직였다. 방으로 들어가며 훑어보던 한주는 툭 말을 뱉었다.
“너희 진짜 친하다.”
“……안 친해.”
우강희가 혀를 차며 문을 놓아주었다. 성진은 방으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을 들이기는 박한주, 네가 처음이야.”
“뭐? 설마. 같이 다니고 기숙사도 같잖아?”
“……그러니 굳이 방까지 찾아갈 일은 없지.”
“얘기할 일이 있어도 카페테리아가 있고, 따로 얘기가 필요하면 주로 차원구 방에서 모였으니까.”
잠시 멈칫하더니 강희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박한주, 네가 처음이야.”
“아? 그래?”
창으로 가 바깥 풍경을 보며 한주는 흘려들었다. 강희를 지켜보고 있던 성진이 들으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난 두 번째고. 고마워, 우강희.”
“두 번째부터는 의미 없어.”
“……차원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성진은 가볍게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 차원구와 황치운이 있는 단톡방이 떠 있었다.
[지금 우강희 방.]
[뭐? 우강희 방이라니, 기숙사 방에 있다고? 이성진, 널 방에 들였어?]
[(방 사진)]
[박한주도 있잖아!]
[박한주가 우강희 방 첫 번째 방문자. 난 두 번째]
[우강희 너무해!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다니! 세 번째는 나!]
[어, 그럼 난 네 번째?]
분명 수업 중일 텐데 원구의 반응이 격렬했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이런 일에 관심 없을 황치운조차 네 번째를 예약했다.
“내 방과 구조는 똑같네. 이 정도면 침대와 책상 한 세트 더 들어와도 좁지 않겠다.”
강희와 성진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한주는 방을 구경했다.
기숙사 방에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가구들이 있었다. 학생이 자기 물건만 챙겨 오면 되도록 침구와 수건까지 제공했는데 남들과 같은 디자인의 물건을 쓰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자기들 취향대로 기숙사 방을 새롭게 꾸몄다.
우강희의 방은 기본 타입 그대로였다. 방은 한주 방보다 넓었다.
“7층은 다른 층보다 룸이 넓어.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다행이지.”
“화장실이야? 열어 봐도 돼?”
허락을 받아 화장실과 욕실, 드레스 룸도 열어 보았다. 학교에서 식사를 다 제공하기 때문에 1구짜리 인덕션이 붙은 간이 주방이 있는 구조는 똑같았다.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만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권 있는 책을 제외하고는 깔끔한 호텔 룸 같았다. 노트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는 사양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방에서 주로 뭘 해?”
“책을 읽든가 온라인 강의를 들어. 너는?”
“과제 하고, 예능 프로그램 보고 친구와 주로 게임?”
“아, 그 게임 방송한다는 친구와?”
“응.”
“……친구가 게임 방송을 해?”
성진이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강희가 차단했다.
“게임 관심 없잖아, 이성진.”
“……앞으로 할 수도 있지.”
“네가?”
다시 아옹거리는 두 사람을 놔두고 한주는 가구 배치를 확인했다.
“침대와 책상이 왼쪽으로 빠지면서 이쯤에 침대와 책상이 들어오려나?”
어디에 가구를 놓을지 생활 동선을 가늠하는데 우강희가 옆에 서 있어 거치적거렸다. 한주는 침대를 보며 그의 등을 꾹 밀었다.
“좀 옆으로 가 봐.”
강희의 등을 밀고 나서 이상함을 눈치챘다. 손에 뜨거움이 남아 있었다.
“어?”
그를 보니 화장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급똥?”
성진은 강희의 상태를 추측했다.
한주는 그 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사람은 둘인데 화장실은 하나이니 배변 시간이 겹치면 문제가 된다.
* * *
우강희는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레버를 내렸다. 벽을 짚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물소리에 신음이 묻혔다.
“하필…….”
우천희는 피를 보기 직전까지 때렸다. 점점 손이 매워졌고 힘이 들어갔다. 맞고 난 후가 더 기분이 더러웠다. 맞을 때는 순간의 아픔이지만 맞은 후에는 밤새 등에 열이 나며 이틀을 고생해야 했다.
옷이 상처를, 부은 피부를 건드렸고 똑바로 눕거나 편히 등을 기대며 앉을 수 없었다.
그나마 치유력이 좋은 알파이니 그 정도다.
아니, 애초에 알파가 아닌 오메가나 베타였다면 우천희가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저 프라이머 알파였어도.
‘내가 받아야 할 죗값이야.’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았다.
한주의 손이 그의 등을 누를 때 신음이 나올 뻔했다. 손이 닿은 부위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터졌다. 우천희가 때렸을 때보다 와 닿는 고통이 강했다.
무방비한 상태였다.
우강희는 헛웃음을 흘렸다. 타인과 있으면서 긴장하지 않고 무방비했다.
자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어서.
그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기에, 그리고 한주는 알파를 기절시킬 정도로 강하니까.
인간 대 인간이라는, 상대를 자신과 대등하게 생각하는 것뿐이지만 그에게는 어려운 인식이었다.
“우강희, 큰 거야? 방금 점심시간 시작했어.”
문밖에서 들리는 한주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평범하게 그를 대하며 평범하게 말을 걸었고, 자신 또한 한주라면 같은 방에 있어도 두렵지 않았다.
발현 이후 타인과 있어도 두렵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가족은 가족이기에 더 두려웠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누구도 우강희에게 안식이 되지 못했다.
“나, 빵 먹는다?”
그가 사 주었지만 먼저 먹기가 미안했는지 이미 입에 빵을 넣고 우물거리며 양해를 구한다. 우천희에게 맞은 다음 날인데 웃을 수 있었다.
“응? 이성진 네 방도? 그래, 우강희 방은 다 봤으니까.”
우강희는 화장실을 박차고 나갔다.
* * *
며칠만 더 기숙사에 살면 끝난다 생각하니 재민석은 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베타들이 바글거리는 B동 기숙사는 공기마저 더럽게 느껴졌다. 그들 때문에 알파로 발현이 늦어지는 느낌이었다.
- 준비는 다 끝났으니 주말에 직원들이 짐을 옮길 거야.
민석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수업이 다 끝나서 늦게까지 남은 몇 명도 교실을 나오고 있었다.
“그럼 오늘 당장 들어가도 되나요?”
- 그래도 되지만 보는 눈이 많잖니. 기숙사 폐쇄된다고 이사장의 아들인 네가 냉큼 나오면 보기에는 좋지 않지.
“아, 그렇네요. 그럼 어머니 말씀대로 이번 주까지는 기숙사에서 지낼게요.”
- 그래, 그렇게 해.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며. 방학 시즌도 아닌데 갑자기 기숙사 리모델링이라니.
어머니의 푸념이 끝나며 통화가 끝났다.
“점심시간쯤에 박한주가 A동 기숙사를 둘러봤다는데 정말 들어올 생각인가 봐.”
“그 베타보다 우강희가 이해 안 돼. 진심으로 베타와 룸메이트를 할 생각인가? 베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괜히 불편을 감수하겠어? 뭔가 생각이 있겠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학생 둘이 교실을 나오며 복도에 선 민석을 흘겨보았다. 말은 걸지 않았다.
무관심.
재민석이라는 인간에게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때와는 온도 차가 컸다. 그때는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이었다. 일찍 형질이 발현된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재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 집안의 학생들이라 민석이 무슨 말이라도 하면 관심을 보였다.
같은 나이의 학생이지만 잘 보이려고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알파들의 고등학교이지만 창립자의 손자인 재강원이 그의 아버지였으니까.
누가 자신을 건드리겠는가.
오만한 알파들도 재강원의 아들은 건드리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맞았다. 건드리지 않았고 철저히 무시했다. 베타라서.
아버지 재강원은 로열 알파였고 어머니는 오메가가 많은 집안의 우수한 프라이머 오메가였다. 알파와 오메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높은 확률로 발현했다.
“누가 베타야. 나도 졸업 전에는 알파로 발현할 거야.”
그래서 베타 기숙사라고 불리는 B동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었다. 재강원 이사장의 자식이 밖에서 학교에 다닐 생각이냐는 어머니의 차가운 눈길에 고집을 부릴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 B동 기숙사가 잠정 폐쇄한다고 한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재민석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B동 기숙사에서 베타들과 지내기 싫다고 은근히 내비쳤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아버지 재강원이 그래도 절 생각해 주었구나, 기뻐했다. 물론 A동 기숙사에 들어갈 생각도 없다. 기숙사 폐쇄 핑계로 근처 별장에서 다니기로 했다.
다 잘되고 있다고 기뻐했는데 우강희가 박한주를 룸메이트로 허락한 것이다. 게다가 직접 A동 기숙사를 구경시켜 주었다고 한다.
“알파가 베타와 룸메이트를 할 리 없잖아.”
민석은 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다른 학생들보다도 그를 조금 더 알았다. 누가 닿는 것도 싫어하고 근처에 오는 것도 싫어하는 우강희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일을 벌일 리 없다.
창밖을 보다가 본관 앞에 조성된 공원으로 들어가는 이무열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무열은 우리 집안 직원이었지.”
집안 신년 행사에서 본 적은 없지만 무열의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운전사였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었다. 재씨 가문에는 대대로 일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다른 알파와 방을 쓰라고 하면 박한주도 어쩌지 못하지.”
아무리 우강희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고 해도 한주가 같이 방을 쓰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다른 반이지만 김시훈이 캠프에서 박한주에게 당했었지. 그 방으로 보내면 되겠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워 콧노래가 나왔다. 민석은 무열이 간 방향을 눈여겨보며 1층으로 내려갔다.
* * *
이무열이 종례를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갔을 때였다. 자리에 앉는데 뒤따라 들어오던, 2학년을 담당하는 동료가 한탄하며 말을 꺼냈다.
“참, 별일이네. 2학년이 전학 간다니. 그것도 알파가 세 명이나.”
제 얘기를 들어 달라는 듯이 목소리가 컸다. 베타는 많지만 알파는 유학을 제외하고는 전학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재강원 고등학교의 졸업생이라는, 한국 알파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맥을 노리고 입학하기 때문에 부득이한 사정이 아닌 이상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
교무실에 있던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네? 2학년 알파가 전학을요?”
“허, 거참. 갑자기 무슨 일이래?”
“그것도 세 명이나요. 아시죠? 성정원과 이지언, 한 명. 그 세 사람이요.”
“어? 학생회의 성정원이요? 설마. 학생회 임원인데 전학 갈 리 없잖아요.”
“그 학생 맞습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그만둔다고 말하고 집에 갔어요. 방금 부모님들과 통화하고 오는 길입니다. 자식이 왜 그러냐고 나한테 추궁하는데…… 말만 담임이지, 우리가 뭘 안다고. 어휴.”
“그러게요.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래요? 알파가 그럴 리 없는데. 게다가 학생회면…….”
“저도 이유를 알면 좋겠습니다.”
한숨이 커졌다. 그때 무열의 옆자리에 있던 옆 반 1학년 담임이 혼잣말을 했다.
“낮의 일 때문인가?”
“네?”
“음, 들으셨어요? 이거 말하기가 좀 그런데…….”
주위에 누가 듣지는 않을까 확인하더니 무열에게 어깨를 붙이며 속삭였다.
“점심시간 전에 우리 반 김시훈이 그 2학년 세 명을 만났었는데, 글쎄 성정원이 1학년과 우강희가 있는 자리에서 실수를 했다지 뭐예요.”
“……실수요?”
“그게…… 소변을 지렸대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세요. ”
꼭 비밀로 하라며, 쉿 검지를 입술 앞에 세웠다. 괜히 말이라도 퍼졌다가 명예 훼손으로 고소가 들어올 수 있었다.
직장에서 해고되는 문제가 아니라 집안이 탈탈 털리며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질 수 있었다. 이 학교의 학부모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무열은 핸드폰을 들고 급히 교무실을 나왔다.
전학을 신청했다는 2학년 세 명은 한밤중에 한주를 불러내 폭행한 이들이었다. 무열은 한주가 2학년에게 불려 간 다음 날 CCTV를 확인했기에 누구 짓인지 알았다. 뒤늦게 교실로 강희도 들어갔었다.
그리고 성정원이 실수한 그 순간, 그 장소에 우강희도 있었다.
* * *
그래서 강희를 불렀다. 그가 한주에게 기숙사를 안내해 주었다는 것도 학생들의 얘기를 들어서 알았다.
무열은 아직 한주의 룸메이트를 찾지 못했다.
베타든 알파든 다른 학생과 방을 쓰겠다는 알파는 없었다. 그나마 인성이 온화한 알파에게 말을 걸어 보았지만 “아, 박한주라면 우강희가 룸메이트로 찍었다는 애 아니에요? 그럼 좀.”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우강희의 일이다. 학교 내에 소문이 안 퍼질 리 없다.
당사자들이 서로 허락했고, 다른 룸메이트는 없고 대안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한주는 강희의 룸메이트가 된다.
우강희는 이무열의 전화를 받고 공원으로 왔다.
“한주를 폭행했던 그 2학년 세 명, 성정원, 이지언, 한 명이 전학 간대. 네 짓이지?”
확신이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우강희밖에 없었다.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름은 몰라도 네가 한 짓인 건 알겠지. 이래도 괜찮다고? 이러다 박한주에게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한주의 이름이 나오자 우강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박한주는 페로몬 무감증입니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무열도 알고 있었다.
처음 본 병명이기에 어떤 병인지 찾아보았다. 베타라서 일상에 영향은 없지만 알파나 오메가였으면 치명적인 불치병이었다.
“너는 다르지. 알잖아, 우강희. 아무리 페로몬 무감증이라도 너는!”
“내 페로몬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무열은 강희의 페로몬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알기에 그 말을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뭐?”
“테스트했습니다. 괜찮았고 영향은 없었습니다.”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박한주에게 테스트해 보았다고? 네 페로몬을? 우강희, 박한주를 죽일 셈이야?”
멱살을 잡았다. 테스트라니, 그가 한주를 죽일 수 있었다.
“페로몬을 다 열어서 확인했어? 아니잖아! 못했겠지! 사람도 죽이는 페로몬인데 그렇게는 확인 못 하잖아, 너도 무서우니까!”
무표정한 우강희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는 반박할 수 없었다. 무열의 말대로였다.
한주의 페로몬 무감증을 확인할 때 50퍼센트까지는 열었지만 그 이상은 테스트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환기 시설 때문이라며 이유를 붙였지만 그 이상을 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도 예상할 수 없다.
그저 한주를 깨우는 명령을 페로몬에 실었지만 페로몬은 의지만 포함되지는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아니면 의식적으로라도, 그가 잠시라도 ‘죽음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을 생각했다면.
그때도 한주의 페로몬 무감증은 만능일까.
이무열은 부정하지 못하는 우강희를 떠밀었다.
“네가 말했었지? 네가 누군가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았냐고. 어. 이제 보았어. 2학년 세 명을 학교에서 내보냈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페로몬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도 그저 들키지 않겠다는 뜻임을 알았고!”
우강희가 한 짓은 살인 미수였다. 그저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알파라고 선입견을 가지지 말라고? 우강희. 네가 뭐가 다른데? 제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페로몬을 쓰면서 너는 뭐가 다른데!”
거친 숨에 어깨가 들썩였다. 이런 반응이 과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무열은 한주를 걱정해 우강희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죄책감도 들었다.
화풀이였다. 제가 재강원에게 당해 왔던 울분을 터뜨리는 것뿐이다. 알지만 참을 수 없었다.
“우강희, 진심으로 부탁하니까, 한주는 건드리지 마. 한주에게 일말의 호감이라도 있다면…….”
제발 절 놓아 달라고, 절 아끼거나 조금의 호감이 있다면 그만 놓아 달라고.
자신은 하지 못했기에 한주만은 지키고 싶었다.
“박한주의 옆에서 떨어져. 조금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우강희도 이무열이 말하는 바를 잘 알았다. 그도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 지키고 싶어서 긴장을 놓지 못하고, 죽이고 싶지 않기에 자신을 통제하며 거리를 두었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삶은 날카로운 칼날을 만지는 것과 같았다. 그 칼날이 향하는 방향은 자신이 아니라 주변 사람이었다.
우강희는 절박한 표정의 이무열을 보았다.
지친 그의 얼굴에 무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외면했다.
“계속 사람을 죽였다며 비난하는데, 당신은 알잖아. 내가 누굴 죽인 건지. 나 때문에 누가 죽었는지.”
“알아. 아니까 더 이러는 거야, 우강희.”
“잔인하네.”
과연 이렇게 계속 살 이유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때 박한주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박한주를 아끼는 건 알겠는데…….”
단 하나의 예외였다.
그에게는 기적이었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찌르는 당신은 뭔데? 그것이 담임이라며 학생을 위하는 척하는 당신의 정의인가?”
한 발 무열에게 다가갔다. 계속 반대만 하며 한주를 보호한다면서 절 말로 공격했다.
적이다.
“우, 우강희?”
우강희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 변화를 무열은 피부로 느꼈다. 솜털이 서며 소름이 끼쳤다. 몸이 떨리는데 식은땀이 났다.
본능이 외쳤다. 죽을 수 있다.
우강희의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열은 그가 자신을 죽일 거라는 공포에 빠졌다.
“박한주는 당신 것이 아니야. 당신이 지켜야 하는 건…….”
우강희의 눈이 이무열의 배를 보았다. 무열은 저도 모르게 양팔로 배를 감쌌다.
“당신 배 속에 있잖아. 혼자 몸이 아니니 오늘은 이걸로 끝내지.”
어깨를 짓누르며 강희만을 보게 만들던 압박이 풀렸다. 그러나 무열은 놀라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뭐? 배 속에 내 거? 무슨 말이야? 내가 임신이라도 했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무열은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
배는 납작했다. 임신할 리 없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알파가 오메가를 베타로 착각할 정도로 강한 페로몬 억제제를 복용했다. 독한 약을 장기간 복용해서 몸이 멀쩡할 수 없었다.
의사는 오메가로서의 인생은 살 수 없을 거라고 경고했고 이무열은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재강원의 옆에 있고 싶었으니까.
오래전에는 그런 풋풋한 생각도 했었다.
“오지랖 부려서 남 걱정하기 전에 자기 아이를 먼저 생각하세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마지막이니 다음은 참지 않습니다.”
속삭이는 우강희의 경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숙사로 향하는 그의 등을 보며 이무열은 문득 이전의 일이 생각났다.
상담실에서 한주와 룸메이트가 되는 일을 반대했을 때, 그때도 우강희는 무열의 배를 잠시 보았었다. 그리고 양호실에서도.
그는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무열이 임신했다는 것을.
“……내가?”
최근 몸이 피곤했다.
감정 기복이 심했고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났다. 예민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임신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재강원의 아이.
하하, 마른 웃음이 입에서 터졌다. 곧 얼굴을 흠뻑 적시며 눈물이 흘렀다.
‘강요가 아니야. 네가 선택해야지. 베타로서 그 애의 옆에 있을지, 오메가가 되어 떠날지.’
독한 페로몬 억제제를 손에 들고 우아하게 말하던 재강원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로열 알파의 어머니이며 재씨 가문의 안주인이기도 했다.
제 뜻과 다른 일은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이를 모시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주세요.’
재강원의 애인들을 모아 놓고 얘기하던 그의 아내도 떠올랐다.
아버지를 올려다보던 어린 재민용, 재민석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강원이 떠올랐다.
첫 섹스 후에 병원으로 데려가 형질 검사를 다시 했던 남자다.
누구도 이무열의 아기를 환영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뻤다.
너무 기뻐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 * *
재민석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환호성이 나올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제가 들은 것이 무엇인지 다시 곱씹었다.
“우강희가 페로몬으로 사람을 죽였어?”
한주를 다른 알파와 방을 쓰게 하라고 말하려고 무열을 찾아갔다. 본관 앞에 조성된 공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따라갔더니 우강희와 함께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는데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페로몬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페로몬은 그저 의사소통의 보조 수단이었고 강한 페로몬을 가진 로열 알파는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사람을 죽게 할 정도는 아니다.
페로몬을 지속적으로 써서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선택이지 타인의 페로몬에 의한 명령은 아니었다.
삶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본능이고 절대명령이니까.
자기 보호 본능으로, 절대적 본능에 반하는 ‘죽음’은 아무리 강한 페로몬이라도 거부하게 된다.
그런데 우강희의 페로몬이 그 본능을 깼다고 한다.
재민석은 전율했다.
강희가 프라이머 알파라도 여타 알파와는 다름을 느꼈지만 저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했다. 민석은 집안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키패드를 터치하는 손가락이 떨렸다.
집안의 자질구레한 부탁부터 은밀한 일까지 처리하며 서포트하는 직원이었다. 신호가 세 번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우강희, 우상진 의원의 둘째 우강희에 대해 조사해. 특히 발현 이후의 상황을. 알파 등급이 무엇인지도 자세하게.”
역시 우강희는 달랐다.
* * *
2학년이 전학 갔다는 얘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들 집안의 사업에 다른 이상설이나 부도는 없었으니 외부 요인은 아니었다.
아무런 문제 없이 학교에 다녔고 그중 한 명은 학생회 임원이었다.
당사자의 적극적인 의사로 전학 갔다는 말에 더욱 의아해졌다.
직원들과 어른들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조심스럽게 우강희가 관련되어 있다고 거론되었다.
정작 당사자는 베타인 한주였지만 문제의 시발점이 된 자리에 강희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닌가라고 말이 나왔다. 그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 우강희의 존재는 컸다.
“우강희가 페로몬으로 2학년을 눌렀다고?”
“아니면 베타가 뭘 어쩌겠어? 그 자리에 늦게 들어왔다지만 복도에라도 있었겠지.”
“그렇게 세단 말이야? 프라이머 알파잖아. 분명 입학 전에 진단 검사 받지? 서류에 써야 하잖아.”
“로열 알파가 되기 직전인가? 이성진도 로열 알파잖아. 끼리끼리 다니네. 1학년에 로열 알파가 둘이라니, 개쩐다.”
한주는 교복을 옷걸이에 걸어 로커에 넣었다. 한 칸 너머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얘기하는 알파들의 대화는 저도 관련되어 있기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로열 알파?’
이전의 삶에서는 들어 보지 못했다.
프라이머에서 로열로 등급이 상향되었다면 학교가 떠들썩해졌을 텐데 졸업 때까지 우강희가 로열 알파가 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무리 현생이 고달프고 학교에서 친구가 없어 소문을 듣지 못한다고 하여도 놓칠 수 없는 이슈였다. 그만큼 로열 알파라는 타이틀은 특별했다.
“우리 우강희, 안 가시나?”
“먼저 가.”
로커에 가려 몰랐지만 다음 라인에서 우강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파들은 급히 로커를 잠그고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수업 시작이 가까워져서 한주도 로커를 닫으려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문자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친구나 엄마는 대화창을 많이 썼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로 등교하는 고용진의 사진이 도착했다. 그리고 한주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사진이 한 장 더 도착했다.
엄마 박예주가 꽃집에서 일하는 사진.
“수업 시간 다 되었어.”
한주는 핸드폰 화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라인이 들어간 검은 테니스복으로 갈아입은 우강희가 서 있었다. 늘 같이 다니던 다른 이들은 없었다.
“어, 가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한주는 강희의 옆으로 갔다. 룸메이트가 되기로 했지만 아직 다른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같이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끔 강희는 한주를 챙기는 사람처럼 기다려 주었다.
“다른 애들은 먼저 갔어?”
“테니스를 좋아하니 수업 전에 미리 치고 있겠지.”
“잠깐.”
우강희는 한주의 어깨를 잡더니 허리 부근의 상의를 정리해 주었다.
“말려 있었어. 가자.”
툭 어깨를 가볍게 친 우강희의 손이 팔을 타고 부드럽게 내려왔다. 손끝은 반팔 아래로 내려와 팔꿈치를 훑고 팔뚝을 쓸며 손목으로 향했다.
피부를 스치는 손끝이 부드러웠다.
곧 손을 잡을 것 같아 한주는 성큼 걸으며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멀어지자 우강희의 손이 떨어졌다. 손끝이 가볍게 손목을 긁었다.
그는 한주의 바지 주머니를 지그시 보더니 옆에서 걸었다. 테니스장을 향하면서 한 번씩 한주의 손이 들어간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우강희는 호시탐탐 한주의 손을 노렸다.
이동 수업 때문에 다른 교실로 가다 보면 어느새 한주의 옆에 서 있었고, 과학실 등 별도로 자리가 지정되지 않은 수업에서는 한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아 왔다.
수업을 들으며 교과서를 보고 있다가 어두워서 고개를 들면 우강희가 한주의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에 비해 거리가 한층 가까웠다.
긴 속눈썹이 깜빡이며 그의 눈동자가 한주를 보면 자신이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게 된다.
‘예쁘기로 따지면 김지영이 더 예쁜데.’
친구 김지영은 친한 사람에게 스킨십이 많은 타입이라 자주 팔짱도 끼고 앉아 있으면 어깨에 기대고, 종종 뒤에서 허리를 껴안으며 몸을 붙였다. 한주보다 키와 체구도 작고 얼굴도 예쁘고 어릴 때부터 붙어 지내서 그런지 지영이 스킨십하면 아무렇지 않았는데 우강희가 만지면 어색했다.
뒤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고의적인 움직임이어서 고개를 돌리니 우강희가 손끝을 문지르고 있었다.
“먼지 붙어 있었어.”
“어, 그래?”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뒷머리를 한번 흩뜨렸다. 귓불에 열이 몰렸다.
* * *
아침에 고용진이 등교하는 사진과 박예주가 도매 시장에서 꽃을 사 차에 싣는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도착했다.
실시간으로 찍어 보내고 있었다.
한주는 등교하면서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무슨 카메라를 쓰지? 이 정도면 엄마 인생 사진인데.”
박예주는 화보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아름다웠다.
사진이 너무 잘 나왔다. 꽃을 들고 있어서일까, 일부러 효과를 준 듯이 화사했다.
문자를 보내오는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한주가 누구냐는 문자를 보내도 답은 없었다. 오직 일방적으로 상대가 사진과 원하는 목적을 말하며 협박했다.
“박한주.”
가까이 다가온 인기척은 느끼고 있어서 놀라지 않았다. 손목을 잡는 손을 털어 내지 않았다. 다른 손에 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강희는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처음 보네. 보통 조례 시작 직전에 등교하던데.”
“어, 오늘은 학생회에 들러야 해서 좀 일찍 일어났어.”
학생회 임원들이 종종 학생회실에 머무르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강희는 잠시 멈춰 서더니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이야?”
“학생회 임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거절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한주가 잡혀 있는 손을 비틀자 강희가 잠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 그의 표정이 더 심각했다.
“학생회에서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아니, 아직.”
아직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한주는 다시 강희의 손을 떼어 내고 본관으로 들어섰다. 그가 따라왔다.
“혼자서도 괜찮아. 얘기만 하고 나올 거야.”
“상대가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
그는 한주의 실력을 봤으면서도 걱정했다.
“……그럼 밖에서 기다려. 너 표정이 너무 굳어서, 괜히 사고 칠까 봐 걱정된다.”
강희는 내키지 않아 대답하지 않았다. 한주는 학생회실 앞에 멈추어 섰다. 강희를 미심쩍은 눈으로 돌아보고는 노크를 했다.
한수원이 나왔다. 한주와 뒤에 선 강희를 보더니 한쪽 눈썹꼬리를 쓱 올라갔다.
“학생회 임원 일로 학생회장에게 용건이 있어 왔습니다.”
“뒤도?”
“아니요, 저 혼자만요.”
“좋아, 들어와.”
수원은 안에 이름이 들릴까 봐 우강희를 거론하지 않았다. 복도의 문을 지나 문 하나를 더 열고 들어가야 학생회실이 있는 구조라 우천희는 우강희를 보지 못했다.
우천희가 우강희를 만나면 예민해지고 신경질과 짜증을 더 내서 수원은 피곤해진다. 그는 한주를 들이고 안쪽 문을 열었다.
“베타 박한주가 용건이 있다네.”
한주는 연장자에 대한 예우로 학생회장과 2학년 임원 두 명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천희는 힐끔 한주를 보고는 들고 있는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렸다. 2학년들은 미간을 구겼다.
“무슨 용건이지?”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한주도 오래 얘기를 할 생각은 없어 본론을 꺼냈다.
“학생회 임원 건을 거절하려고 왔습니다.”
“그 건은 이미 전에 네가 거절했지. 아닌가?”
우천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네, 하지만 거부는 거절이라면서 학생회 약관에 있는 항목을 알려 주셨죠. 임원으로 활동할 수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다면 다시 선발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 전까지는 거부를 받아 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2학년 두 명은 우천희를 보았다. 그들은 천희가 한주를 불렀을 때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무슨 얘기를 할지 흥미는 있지만 천희가 싫어할 걸 알기에 2학년은 서로 눈짓을 하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 됐어. 박한주, 계속 얘기해.”
우천희는 그들을 막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임원에 선발은 되었지만 학생회 임원이 되겠다고 동의하지 않았으니 애초에 학생회 약관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안 그런가요?”
“선발되면 자동으로 학생회 임원이 되니 약관을 적용하는 거야.”
“하지만 선발 캠프에서 그런 부분을 미리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캠프조차 강제 참가였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제대로 고지하지 않고 동의도 없는 계약은 계약이 아니죠.”
철저히 알파의 입장에서만 벌어진 일이었다. 알파가 캠프를 거부할 리 없고 알파가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임원이 됨을 싫어할 리 없으니까.
베타의 입장과 개인의 찬반은 묵살되었다.
“그래서, 용건.”
불쾌함을 숨기지 않아 우천희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한주는 고집 센 알파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학생회 임원은 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건방진 베타를 바라보던 우천희는 의자에서 산뜻하게 일어났다. 한주의 거부를 불쾌해하더니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좋아.”
그는 책장에서 작년에 발송했던 학생회 임원 신입 환영회 초대장을 꺼냈다. 1대부터 검은 카드에 심플한 하얀 글자로 날짜와 시간만을 적어 발송해 왔다.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오직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임원과 학생회 OB만 들어갈 수 있는 알파 회원제 클럽에서 열린다.
“그래도 학생회에는 나름의 절차와 전통이 있어서 개인의 거부로 함부로 임원 명단을 바꿀 수 없어. 임원을 거부하겠다면 나로서는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지.”
“절차요?”
“박한주, 네가 직접 선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중히 거절해.”
숨을 죽이며 우천희의 말을 듣고 있던 2학년들이 긴장했다.
“그 정도는 하겠지? 그렇게 임원이 되기 싫다면서 학생회를 곤란하게 했으니까.”
“그럼 언제 하면 되나요?”
“곧 초대장을 발송할 거야. 기다려.”
“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천희는 깊이 묻지 않는 어수룩한 베타를 비웃었다.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던 한주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사진은 더는 보내지 않겠죠?”
“사진?”
영문을 모르는 말에 우천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무엇을 얘기하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학생회 일이 아닌가 보네요. 알았습니다.”
다시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복도로 나오자 우강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주에게 캐묻지 않았다.
“수업 시작하겠다. 가자.”
자연스럽게 한주의 손을 잡으며 이끌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강희와 맞잡은 손, 한주를 차례대로 보았다.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우강희,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안심하라고 말했는데 그는 걸음을 멈췄다. 한주의 얼굴을 보지는 않았다. 몸 주위에 무언가 묻었다는 듯이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소취제 뿌려야 해.”
“아.”
한주는 휴대용을 가지고 다니는 소취제를 꺼내 몸에 뿌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며 혀를 찼다.
강희도 시트러스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주의 머리카락을 살살 털어 주었다.
“이제 됐어.”
“잠깐.”
다시 움직이려는데 강희에게 팔뚝이 잡혔다. 어깨를 잡은 그에게 안겼다. 한주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두피까지 닿았다.
다시 한숨을 쉬며 그는 한주를 놓아주었다.
“잔향이 남았어.”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하던데.”
강희는 미간을 구기며 다시 한번 한주의 머리카락을 털어 우천희의 페로몬을 떨어냈다.
사정을 모르는 그도 학생회가 행동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무심한 듯이 2학년의 괴롭힘을 받아 주던 한주였다. 약해서가 아니라 봐주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직접 학생회에 찾아갈 정도면 결코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학생회에 같이 들어갈 수 없었다. 한주와 같이 들어가면 일이 더 틀어질 수 있다.
우강희가 아끼는 물건을 종종 망가뜨리며 건드리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지켜보던 우천희는 어떻게든 우강희를 상처 입히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한주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때려도 꼼짝하지 않는 그보다 한주를 괴롭히기 시작할 것이 자명했다.
예상했지만 막상 한주가 우천희의 호전적인 페로몬을 묻히고 나오니 불쾌함을 넘어 짜증이 났다. 날카로운 가시가 속에서 삐쭉거리며 올라왔다.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해.”
주머니에 넣어 둔 한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박예주의 고화질 몰카 사진이 떴다. 여전히 화질과 화사함은 뛰어났다.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어.”
한주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학생회의 짓은 아니다. 성정원처럼 개인이 단독으로 벌일 수도 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자신을 향한 화살은 참아 줄 수 있지만 가족은 안 된다.
* * *
한주가 나가고 잠시 학생회실은 조용했다. 2학년이 우천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신입 환영회에 저 베타를 초대하려는 겁니까?”
1학년 임원을 선발했으니 학생회 OB들을 초대해 환영회를 열어야 하는데 1학년 중에 베타가 끼는 바람에 난처해졌다는 말은 들었다.
“임원이니 초대해야지. 날짜 잡아서 초대장 발송해. 언제까지 선배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고.”
전날 졸업한 학생회 OB 중 한 명과 통화했다. 학생회 신입 환영회 초대장이 왜 아직 오지 않냐고 다그쳤다. 도대체 학생회를 어찌 운영하고 있냐면서 우천희의 자존심을 긁었다.
“베타가 클럽에…….”
2학년은 처음 클럽을 갔을 때를 떠올렸다. 장내의 분위기에 압도되고 쟁쟁한 OB들의 페로몬에 기가 눌려 지지 않으려고 고생했었다.
“그렇게 싫다니 어떤 것을 거절했는지 보여 줘야지.”
우천희는 싸늘하게 웃었다.
제 선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그들의 앞까지 끌고 왔다고 무능하다는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포장하느냐의 나름이었다.
세상일이 지루한 OB들이니 이벤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 * *
점심을 먹고 한주는 빈 교실에서 낮잠을 잤다. 이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두 번째 삶에서는 유독 잠이 많았다. 수면제를 먹고 전날 푹 잠을 자도 똑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 두 번째 인생을 사는 반동이라고 여겼다.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고 교실로 돌아왔다. 한주가 교실로 들어가자 조금 전까지 들리던 소음이 싹 사라지고 조용해졌다. 학생들은 조금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한주를 주시했다.
교과서와 한주의 물건, 노트들이 엉망이 되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보란 듯이.
잠시 그 모습을 내려다본 한주는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누가 이랬어?”
그저 ‘다음 수업 뭐야?’라고 묻는 정도의 평온함이었다. 화도 내지 않고 짜증이나 수치도 없었다.
차원구가 대답했다.
“반에 돌아오니 그렇게 되어 있었어. 본 녀석 얘기로는 1학년 C반 베타 송원호였대.”
“그래?”
한주는 엉망이 되어 다시 쓸 수 없는 물건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행히 음료를 뿌리거나 더럽히지는 않았다.
C반이면 베타의 이름을 들었지만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C반 알파 김시훈이 떠올랐다.
“다음 수업이 고등 수학1이었지?”
“교과서는 담임에게 연락하면 줄 거야.”
“나중에.”
다행히 수업 때까지는 아직 8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당장 전화를 하면 무열이 교과서를 들고 오겠지만 한주는 교실을 나가 C반으로 향했다.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뒷문을 열자 누군가 한주를 알아보았다.
“어, A반 베타, 박한주다.”
“뭐?”
교실의 알파들이 하나둘 돌아보았고 베타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전의 삶에서 1학년 후반에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결국 전학을 간 학생이었다.
한주는 베타가 아닌, 김시훈에게 다가갔다.
“김시훈, 너네 오늘 고등 수학1 수업 있지?”
이미 교실 뒤에 붙은 수업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전에 수업이 있었다.
베타가 아닌 저에게 다가온 한주를 보며 김시훈은 짜증 냈다.
“뭐야?”
“교과서, 빌려줘.”
“……뭐?”
헛, 주위에서 숨을 삼켰다.
“내가 왜?”
“이유 알잖아.”
잠시 베타를 보았다가 다시 김시훈을 보았다. 그 눈길을 보았으면서 시훈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모른 척했다.
“뭐?”
“학생회 일이라면 이미 학생회장에게 얘기했어. 듣지 못했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
“학생회장과 얘기가 끝난 일인데 네가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나서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적어도 고맙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안 그래? 나보다는 같은 알파니 네가 더 잘 알잖아.”
시훈은 태평하게 말하는 한주를 노려보았다.
한주를 따라온 우강희와 차원구가 뒷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같은 반 베타를 시켰는데 한주는 정확히 김시훈이 시킨 일임을 알고 찾아왔다.
“어쭙잖게 건드리지 말고 일을 키우기 전에 여기서 끝내. 아니면 정정당당하게 날 치든가. 주위 사람 건드리는 짓은 양아치나 하는 짓이잖아.”
살살 신경을 건드리는 말에 김시훈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모두가 지켜보는데 베타의 기세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학생회장 우천희도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라 자신이 나서서 해결하면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지만 우천희의 체면을 떨어뜨린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 그렇게 원하면 제대로 해 주지.”
겁을 먹으라고 목소리를 깔았지만 한주는 어깨를 으쓱 털며 가볍게 대응했다.
“그래, 알파잖아. 베타 상대로 지질한 짓 하지 마. 네가 한 짓이니 책임은 져. 교과서 빌려줘.”
“하, 이 자식. 가져가. 돌려주지 않아도 돼.”
퍽, 한주의 가슴에 교과서가 부딪쳤다. 한주는 “고맙다.”라고 말하며 교실을 나갔다.
원구가 휘파람을 불며 한주를 따라갔고 곧 수업 시작 음악이 울렸다. 강희는 김시훈을 지그시 쳐다보기는 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가자 김시훈은 의자를 들어 베타를 향해 던졌다. 재빨리 피해서 다친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처리한 거야?”
“마, 말한 대로 했는데…….”
베타는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무슨 소란입니까? 수업 시작합니다.”
마침 앞문으로 교수가 들어왔다. 김시훈은 핸드폰을 들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수업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우강희까지 관심을 가지며 구경할 줄은 몰랐다.
그가 한주를 룸메이트로 찍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저 부리기 좋은 베타 하나 방에 들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 보던 우강희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우강희는 프라이머 알파다. 학교 안이라면 몰라도 사회에 나가면 고작 정치인의 아들일 뿐이다.
* * *
한주가 화장실에 간 사이 상황을 보았던 차원구는 그때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무슨 싸움이 일어날까 해서 구경 갔더니 그런 모습을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뭔데?”
참지 못하고 호기심을 가진 알파 하나가 물었다.
“그냥 말로 발라 버렸어. 학생회장과 담판 지은 일인데 네가 끼어들면 학생회장 꼴이 뭐가 되냐면서 알파가 양아치처럼 깨작거리지 말고 제대로 덤비라고 말이야. 그러면서, 저 박한주 책상에 있는 교과서, 그거 김시훈 거인데 그걸 딱, 갈취해 왔지.”
“갈취가 아니라 빌린 것인데 김시훈이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
“그 말이 그 말이지. 우리 우강희, 참 빡빡해.”
과장하는 원구와 정정하는 강희의 말을 듣고 상황을 파악한 학생들이 하나둘 끼어들었다.
“우강희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렇겠지. 1학년들은 우강희가 박한주 찍은 거 다 아는데 섣불리 건드리겠어?”
“아니라니까. 진짜 강희에게 쫄았으면 베타 시켜서 남의 물건을 그렇게 만들었겠어? 생각을 좀 해 봐라.”
원구는 그때의 모습을 재현이라도 하듯이 앉아 있는 강희의 옆에 서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딱 내려다보면서 조곤조곤 말하는데…… 박한주가 홀딱 젖었네.”
“뭐?”
강희는 원구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한주가 사물함에서 꺼낸 체육복을 들고 있었다. 쫄딱 젖어서.
모두가 조용히 지켜보는데도 자기 자리에 체육복을 걸쳐 두고 상의를 벗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서 옷 벗기 불편한지 단추만 몇 개 풀어 위로 훌렁 벗어 버렸다.
머리에서 뭉친 옷이 걸려서 끙끙거렸지만 강희가 다가가 도와주었다.
“아, 고마워.”
젖은 옷을 짜서 머리의 물기를 닦기도 전에 강희가 체육복 상의를 입혀 버렸다.
“아, 머리 먼저 닦아야 하는데.”
“누구야?”
“화장실 안에 들어갔다가 당했어. 물은 깨끗해서 냄새는 나지 않아.”
밀어내기 전에 강희가 먼저 상의의 지퍼를 올려 주었다. 젖은 옷을 의자에 걸치고 바지를 벗으려고 버클에 올린 양 손목이 잡혔다.
“왜?”
“올, 우강희 놔둬. 박한주 몸 좀 구경하자. 상체는 제법 근육이 있던데.”
원구가 키득거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학생들이 한주와 눈이 마주쳤다.
다들 구경하고 있었다.
“뭐 어떻다고.”
다시 바지를 벗으려는데 이번에는 허리가 잡혔다. 한주의 허리를 잡아 올리더니 우강희는 성큼 복도로 나갔다. 그의 팔에 체육복 바지가 걸쳐 있었다. 그는 한주를 복도에 내려 주었다.
“우강희?”
“여기서 갈아입어.”
“복도야! 여기가 더 부끄러워!”
“교실보다는 사람이 적지. 가려 줄 테니 어서 갈아입어.”
고집을 꺾지 않을 기세에 한주는 한숨을 쉬며 머리의 물기를 떨었다.
젖은 바지를 간신히 벗고 체육복 바지를 입으려고 다리를 들었다. 수업 시작 직전이라 복도에 사람은 없었다. 직원과 교실을 향하는 교사들만 멀리 보였다.
강희는 등을 돌리고 벽에 기대어 바지 갈아입는 모습을 가려 주고 있었다.
“김시훈이야?”
“몰라. 보지 못했어.”
화장실로 들어가자마자 뒤에서 물을 뒤집어썼다.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괜히 주변에 있던 학생들에게도 물이 튀었다.
“뭐, 적당히 하다 말겠지.”
“이게 적당히라고?”
강희는 몸을 돌려 벽에 기댔다. 한주에게 가까워졌다. 한주는 그에게서 한 발 물러나 바지를 입었다.
“언제까지 참을 건데?”
우강희가 다시 다가왔다. 그는 한주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주르르 물이 볼 위로 흘렀다. 얼굴을 보고 있던 우강희는 볼을 감싸듯이 엄지로 닦았다. 볼을 문지르고 돌아온 엄지가 입꼬리를 눌렀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이런 모습, 못 참겠어.”
한주는 씨익 웃으며 강희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가볍게 쳤다.
“우강희가 친구라 든든하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
그에게 턱이 잡혀 서로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깨가 간지러워졌다.
그의 손을 떼 내고 젖은 바지를 들었다.
그런데 우강희가 조용했다. 그는 눈 깜빡하지 않고 한주를 보고 있었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뜻밖의 말을 들어 놀랐다기보다는 작은 충격을 받은 느낌이었다.
“우강희?”
강희가 양손으로 한주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파르르 속눈썹이 떨렸다.
“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할 때 그의 숨이 한주의 입술에 닿았다. 툭 서로의 이마가 닿았다.
“박한주…….”
끄응, 목을 울리며 강희가 신음처럼 한주의 이름을 뱉었다. 얼굴을 감싼 손이 턱을 만지며 손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순간 소름에 어깨가 오싹해졌다.
“내, 내가 닦을게. 알아서 할 테니까…….”
한주가 엉거주춤 몸을 뒤로 물리자 우강희의 몸이 따라왔다. 가까운 얼굴의 간격은 더욱더 좁아져 코끝이 서로 닿았다.
“좋다, 박한주…….”
옅은 한숨이 한주의 입술에 다시 닿았다. 어깨를 움츠리며 그를 밀어내려는데 문득 향기가 퍼졌다.
젖은 숲의 향기. 습하고 태풍이 올 듯이 불안감은 있지만 너무 거대하여 경이롭게 느껴지는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는 느낌의 향기.
우강희가 미간을 좁히며 한주의 눈을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해도 되겠습니까?”
우천희는 앞에 서 있는 1학년 김시훈을 보았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방으로 불렀더니 시훈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
우천희가 대답하지 않자 말을 덧붙였다.
“물론 회장님이 박한주와 얘기가 끝났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다만 회장님이 나서기 전에 같은 1학년인 제 선에서 처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할 수 있겠어?”
“네.”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걸고? 실패하면 제명이다. 어차피 박한주 대신 임원을 뽑아야 하는데 한 명을 뽑든 두 명을 뽑든 큰 차이는 없어.”
“네, 성공할 테니 임원 자리는 문제없습니다.”
임원 자리까지 걸라는 말에 잠시 주저했지만 시훈은 받아들였다.
“좋아.”
박한주의 프로필을 보았지만 재강원 고등학교에서는 하등급에 속했다. 한부모 가정에 작은 꽃집을 운영했고 현재 사는 집을 제외하고 다른 재산도 없었다.
그런데도 박한주는 알파들 앞에서 당당했다.
무엇을 믿고?
우천희도 박한주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 * *
[양평 카페로 와.]
사진을 보내오던 문자로 주소도 같이 왔다. 드디어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이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한주는 지갑을 챙기고 기숙사 방을 나왔다.
“약속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개념이 없네. 미리미리 좀 알려 줘야지. 밤에 나가기 귀찮은데.”
이 시간에 양평 카페를 가다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직원들 셔틀버스도 끊긴 시간이라 외부로 나가는 교통수단은 택시밖에 없었다.
본관 근처에 택시 정류장이 있지만 대기하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핸드폰으로 콜을 하려고 앱을 열며 정문으로 향하는데 택시 한 대가 오고 있었다. 한주는 손을 들어 택시를 세워 탔다.
“양평 카페까지요.”
핸드폰을 확인하고 답장을 쓰는 등 이것저것 하다가 고개를 드니 사방이 어두웠다. 카페는 지도상 시내에 있어 슬슬 간판 불빛으로 밝아야 하는데 간혹 건물은 나왔지만 가로등이 없어 컴컴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아저씨, 이 길이 아닌데요? 양평 카페는.”
“약속 장소는 이쪽이 맞습니다.”
“네?”
되물으려는데 운전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보고했다.
“손님이 눈치채셨습니다. 5분 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한주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주시죠. 혹시나 싶어서 말하는데 경찰에 신고하면 다른 사진을 받아 보게 될 거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시키는 대로 핸드폰을 건넸다.
택시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건물은 없었다. 두 대의 차가 상향등을 켜고 공터에 주차되어 있었다. 양복을 입은 어른 넷이 한곳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단단한 체격의 몸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택시가 서자 남자 하나가 뒷문을 열어 한주의 팔을 잡아 끌어 내렸다. 내리면서 한주는 그 팔을 쳐 냈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카페에서 만나자는 말에 기숙사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와서 반바지와 긴팔 차림이었다. 한주는 발을 구르며 드러난 종아리를 툭툭 쳤다.
“모기! 산 모기는 독한데.”
“허, 이거 봐라. 모기 걱정할 때가 아닌데.”
진심으로 짜증 났다.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이라 숲이 있는 야외에 나오면 한주는 모기 기피제를 꼭 뿌렸다. 물린 곳에 약을 바르기는 하지만 한번 긁기 시작하면 참을 수 없어진다.
“이거 납치인 거 아시죠? 누가 시킨 겁니까?”
어린놈의 허세라고 생각하는지 남자가 웃으며 승용차 뒷문을 열었다. 김시훈이 내렸다.
한주는 놀라지 않았다.
“여전히 여유가 넘치네. 캠프 때 알파들에게 쫓길 때도 그랬지, 너는.”
“여기가 카페냐?”
시훈은 으쓱 어깨를 가볍게 움직였다.
“요즘은 CCTV가 곳곳에 있어서. 지우는 건 문제없지만 귀찮거든.”
“그건 인정. 가끔은 CCTV 때문에 피곤하긴 해.”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었다.
“허, 야. 이거 네 일이야. 긴장 좀 타.”
옆에 서 있던 동료가 끼어들지 말라면서 남자의 팔을 잡아당겨 눈치를 주었다.
김시훈도 끼어든 남자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았다가 다시 한주를 보았다.
“보내 준 사진은 잘 봤지? 괜히 가족과 친구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네 다리 하나로 끝내자. 깔끔하게 한 달만 깁스하고 지내. 너 좋고 나 좋고.”
“그게 어떻게 나까지 좋다는 말이야? 계산 못 해? 수학 점수 별로지? 하긴 빌려 갔던 교과서가 너무 깨끗하기는 했어.”
“박한주!”
시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수학이 약해 주말마다 별도로 과외를 받고 있는데도 성적은 겨우 중간이었다. 어머니는 앞으로 열심히 하면 괜찮을 거라고 칭찬했고 아버지는 수학 따위 중요하지 않다며 야단치지 않았다. 정작 당사자인 시훈은 다른 과목 중 수학만 반 토막이라 부끄러웠다.
“이 베타 자식! 뚫린 입이라고 나불나불!”
성큼 다가와 손을 휘둘렀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스피드도 빨랐다. 하지만 한주는 상체를 뒤로 빼 그 손을 피했다.
맞지 않고 피해서 시훈이 중심을 놓쳐 휘청거렸다.
“저 새끼, 잡아!”
남자 둘이 한주의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시훈은 이번에는 성공했다. 한 대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한 대 더 때렸다.
“멍청한 새끼들이 꼭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능력이 없으면 가만히라도 있어, 대가리 굴리다가 몸만 더 피곤해져.”
턱짓을 하자 남자들이 한주를 놔주었다. 맞아서 그들에게 기대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틀거리지도 않고 한주는 똑바로 섰다.
“알파라 손맛은 세네.”
입 안이 터져 피 맛이 났다. 한주는 삼키기 싫어 퉤,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사람을 쓰지 않고, 혼자서는 못 하지.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직접 하라고.”
“왜 베타 말을 내가 들어야 하는데? 이런 일 하라고 고용된 사람들이니 일을 시켜 줘야 월급을 받고 계속 고용되는 거야. 그게 경제야, 우리가 돈을 써야 너네가 살아. 너 같은 베타는 평생 이렇게 남의 돈이나 먹고살 테고.”
한주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만 묻자.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시훈은 성난 기분이 진정되지 않았다. 분명 그들은 인원수도 많고 박한주는 납치를 당한 상황이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건물도 없고 핸드폰도 뺏었는데 박한주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주는 한심하게 김시훈을 보았다.
베타 따위가.
누구도 저를 그런 눈으로 본 적 없었다.
“베타 따위가 제 분수도 모르고 나대니까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지. 버러지가 학생회를 욕보이게 만들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가족을 협박하고 이렇게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납치해?”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어중간하게 하니까 네가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을 수 있는 거야.”
김시훈은 차에 타 직원들에게 명령했다.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 반항하면 조용히 시키고. 죽이지는 말아. 일이 귀찮아지니까.”
그리고 한주에게 한마디 남겼다.
“박한주, 소화기 건은 이걸로 갚는다.”
한주와 직원 넷을 남겨 두고 시훈이 탄 차가 떠났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한주를 둥글게 에워쌌다. 누가 먼저 시작할지 눈짓을 했다.
“할 겁니까? 어른이 고작 고1짜리 하나 다리 부러뜨리겠다고, 4 대 1로?”
그런 말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웃지도 못했다. 두려움 없이 고요하게 바라보는 한주의 시선은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고작 고1짜리가.
* * *
이철성은 그룹의 경호 팀에서 VIP 경호로 자리를 옮긴 지 한 달째였다. VIP 경호라고 해도 외동아들 김시환의 경호에 배정되어서 꿀 빨고 있었다. 고1짜리 도련님은 기숙사에 있기에 주중에는 다른 가족 경호를 3교대 로테이션했고 주말에만 간단히 경호하면 되었다. 클럽이나 모임을 주로 갔기에 몸이 편했다.
주중에 갑자기 야간 호출이 있었는데 처음엔 그저 어딘가 놀러 간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모시는 도련님은 같은 동급생이 못마땅했는지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라고 요구했다.
회사의 월급을 받아 먹고사는 입장에서 그들 업무에 포함된 일이기는 했고 타인을 폭행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것이 비리비리하고 여물지 않은 고1짜리라 해도 일이면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쉬운 상대라 러키, 하는 생각도 했다.
“할 겁니까? 어른이 고작 고1짜리 하나 다리 부러뜨리겠다고, 4 대 1로.”
자신을 둘러싼 장정 넷을 한 명씩 확인하는 박한주라는 베타를 보며 이철성은 속으로 ‘어쭈’ 감탄했다.
납치당해 공터로 끌려왔으면서 모기 걱정이나 하며 태연한 척할 때 분위기 파악 못 한다고 혀를 찼었다. 아직 애새끼니까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까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지 않을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일이라. 들었잖아. 월급 받는 월급쟁이라 까라면 까야지.”
“하긴, 아저씨들 잘못은 아니죠.”
“그래, 좋게좋게 생각해. 다리 하나면 오히려 많이 봐준 거 같은데 고맙게 생각해. 죽이지는 말라잖아. 근처에 산이 많으니 묻으면 간단한데 얼마나 너그럽냐.”
그 말은 진심이었다.
듣는 것이 많아서 다른 회사의 얘기도 많이 듣는데 알파들의 세계는 살벌했다.
“너만 얌전히 있으면 한 방에 끝내 줄게. 짧게 가자. 괜히 저항한다면서 몇 대 맞아서 우리 기분 건드리지 말고. 우리도 아무리 시켜서 한다지만 몇 대 맞고 때리면 손에 힘이 실려서 너 위험해.”
“짧게요.”
“그래, 불안해하는 건 알지만 그게 제일 깔끔하지.”
불안해하다? 누가?
이철성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이 말이 많기는 하지만 대상자를 데리고 수다를 떠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을 하게 될까.
이철성의 맞은편에 선 동료도 느꼈는지 눈짓으로 그만하라고 신호를 주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철성은 손바닥을 바지에 슥 문질러 닦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촉촉했다.
이상했다.
“내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끝나면 돌려줄 거다. 병원까지는 데려다주지.”
다른 동료가 목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트렁크에 망치 있지? 너네 둘이 애 다리 잡으면 망치로 내리쳐서 깔끔하게 부러뜨려 줘. 괜히 발 쓰다가 얘 평생 불구 될 수 있어.”
얘기를 듣고 동료 하나가 차로 가 트렁크를 열었다.
이철성은 태연히 듣고 있는 박한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 다리를 부러뜨리기 위해 연장을 가지러 갔는데 한숨을 쉬기만 한다.
‘넌, 이 새끼, 네 감을 믿어. 짐승 같은 그 감각이 네 목숨을 살릴 거다.’
야간 훈련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이철성을 보며 교관이 감탄했었다. 매복과 습격에서 끝까지 남은 사람은 이철성뿐이었다. 극악한 훈련이라 3년간 통과자가 한 명도 없다고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박한주가 입을 열었다.
“짧게 끝내죠.”
고개를 내리며 박한주가 가까이 있는 직원을 보았다. 그리고 몸을 움직였다. 다들 갑자기 대상자가 움직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철성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피해!”
퍽, 그의 목소리와 함께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그들의 팀장으로 얼굴은 앳돼 보여도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소싯적에 특수 부대 교관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술자리에서도 취할 만큼 마시지 않고 절제하며 철저히 자신을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몸을 떤다든가 신음을 내거나 뒤척이지도 않았다.
“기절한 거예요. 죽이지는 않아요.”
가볍게 주먹을 풀며 한주는 절 향해 다가오는 다른 직원을 상대했다.
단 일격.
일격에 사람을 기절시키기는 쉽지 않다. 급소를 알지만 사람은 의외로 단단하여 목을 졸라 숨통을 조이지 않으면 쉽사리 기절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겨우 고1, 아직 근육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애송이가 숙련자를 일격에 기절시켰다.
한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봤기에 다음 타깃이 된 동료는 방심하지 않았다. 망치를 던지고 다른 동료도 끼어들었다.
2 대 1.
게다가 한 팀으로 손발을 맞추고 서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동료들이라서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잘 알았다. 두 명이라도 세 명처럼 공격이 끊임없었다. 하지만 한주는 잘 피했다. 직접 타격을 받지 않도록 상대의 공격을 흘렸고 작은 체격을 십분 활용했다.
“이철성! 뭐 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한 명이 소리쳤다. 이철성도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한주의 움직임이 기민하며 대단하지만 어쩐지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몸을 누르는 느낌이었다.
어딘가에서 맹수가 숨통을 끊기 위해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동료들이 제법 버티기는 했지만 급소를 맞고 바닥을 뒹굴었고 제일 기량이 좋다는 동료도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몸을 똑바로 펴지도 못했다.
“이 새끼! 너 뭐 해! 같이 안 싸우고!”
“해, 하는데…….”
한주는 숨을 고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쓰러져 끙끙대는 동료에게 다가가더니 등 돌리고 앉았다. 곧 툭, 그 몸이 힘없이 바닥에 누웠다.
“야! 죽이지는 마! 우리도 너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잖아!”
이철성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기절시켰어요. 괜히 일어나서 끼어들면 피곤해지니까.”
“고, 고맙다.”
동료가 이철성을 노려보았다. ‘이 띨띨한 자식!’이라고 눈빛으로 욕을 먹었지만 이철성은 진짜 살고 싶었다. 오히려 절 노려보는 동료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압도하며 누르는 무거운 공포를 느끼지 못하다니 이상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끝까지 할 거예요?”
“그래도 아직 2 대 1이다.”
동료는 직접 부딪쳐 봤으면서 명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련한 놈.’
이철성은 항복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쓰러진 동료를 데리고 가게 해 달라고 한주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료는 다시 움직였다.
다가오는 적을 향해 한주가 자세를 낮추며 준비하는데 부아앙,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SUV 한 대가 도착했다. 이철성 같은 직업을 가진 자들이 급히 차에서 내려 한주를 보호했다.
“박한주 님, 괜찮으십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따라 한 팀이 더 올 겁니다.”
“중간에 핸드폰이 꺼졌을 텐데 용케 찾았네요.”
“드론을 띄웠습니다. 이들입니까?”
동료가 혀를 찼다. 이철성도 같은 마음이었다.
좆됐다.
괴물 같은 고1을 제외하고라도 4 대 2였다. 이철성은 재빨리 양손을 들었다. 몸 쓰는 직업이니 상황 파악이 빨라야 몸을 아낄 수 있다.
“항복! 우리도 도련님이 시킨 일이라 했을 뿐이지 더는 할 마음 없습니다.”
“이 새끼야!”
“보시다시피 그쪽 도련님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했지. 더는 할 마음이 없으니까 이만 끝내 주시면 저기 쓰러진 동료만 데리고 얌전히 가겠습니다.”
“야! 이철성!”
“고지식하긴! 주위를 봐! 이미 우린 졌어!”
답답해 이철성이 동료의 뒤통수를 한 대 쳤다. 싸우면 피가 끓어 이성적인 판단이 안 될 때가 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한주 님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들었습니다.”
“보내 주세요. 오래간만에 실전으로 몸을 풀어서 연습이 되었어요. 아, 모기 기피제 있으세요? 벌써 세 방은 물렸는데.”
“아, 차에 있습니다.”
남자의 뒤에 서 있던 직원들이 기절한 사람들을 차에 실어 주었다. 그리고 이철성네가 차에 타는 모습까지 옆에서 지켜봤다.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조곤조곤 한주에게 보고하는 남자에게서 눈을 돌려 이철성은 그 장소를 떠났다.
“씨발, 평범한 집안의 베타라고 들었는데 뭐야, 저 인원은.”
조수석에 앉은 동료는 뒤늦게 온 통증에 명치를 누르며 신음했다. 팀장에게 들은 것이 있었는지 분해했다.
“내일 깨지겠네.”
“우리 죽다 살아난 거야. 그것만으로도 난 감사해.”
심각하게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을까 고민했다.
* * *
한주는 다리에 모기 기피제를 뿌렸다. 밝은 곳에서 보니 물린 곳이 더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긴 바지 입었을 텐데.”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멍은 들겠지만 뼈까지 다치지는 않았어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학교에서만 덤빌 줄 알았는데 직원까지 쓸 줄은 몰랐어요.”
“그 택시 기사는 경찰에 넘겼습니다.”
“여기, 핸드폰 찾았습니다.”
다른 직원이 진동하는 핸드폰을 찾아왔다. 박예주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 엄마.”
- 한주야, 왜 이리 전화를 안 받아? 두 시간 넘게 계속 전화했잖아. 기숙사에 전화 걸어 볼 참이었어.
한주는 남자가 문을 열어 준 SUV 뒷좌석에 올랐다.
“게임하느라 몰랐어. 미안.”
- 그놈의 게임.
“근데 왜 전화했어?”
- 그냥. 집에 오는데 모르는 사람이 따라오는 기분도 들고 뒤숭숭해서 우리 아들 생각이 났지.
통화를 들었는지 조수석에 탄 직원이 돌아보며 자신을 가리켰다. ‘우리 직원입니다.’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했다.
“우리 엄마가 너무 미인이지.”
- 아무 일 없으면 됐어. 주말에 올 거지?
“어…… 모르겠는데.”
- 흥, 이제 다 컸다 이거지. 노는 게 좋아도 밥은 잘 챙겨 먹어.
“응, 알았어.”
통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다른 곳에 전화했다.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 김시훈이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였으니 한주 역시 똑같이 대응해 줄 생각이었다.
- 왜?
계무원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이미 보고를 다 받았을 텐데 걱정하는 기색도 없다.
“먼저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지 않아요?”
- 오지한 제자가? 너 다치면 오지한에게 이른다. 제대로 다시 교육하라고.
상상만으로도 유쾌한지 계무원이 큭큭 웃었다.
“아, 그건…….”
- 그래서, 김시훈이 확실해? 사람까지 썼다며.
“네, 전에 얘기한 대로 처리해 주세요.”
- 그래.
용건은 간단했다. 계무원이 말은 퉁명스러워도 은근 잔정이 많았다. 몸이 풀려서 시트에 등을 기대며 창밖을 보다가 한주는 발딱 일어났다.
“아저씨, 잔치 국수! 국수 먹고 가요!”
학교 안에서는 절대 팔지 않는 음식이었다. 차는 지나친 국수집을 향해 유턴했다.
* * *
한주가 탄 차까지 떠나자 공터에 빛은 사라졌다. 어두워지자 공터 가장자리에 있던 나무 뒤에서 우강희가 나왔다.
한주가 갑자기 택시 타고 학교를 나왔다는 보고를 듣고 급히 따라오기는 했지만 그가 도착해 보니 김시훈이 떠나고 있었다. 실력이 있어 혼자서도 괜찮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상대는 전문가 넷이었다. 잘 피했지만 한주를 향해 주먹을 뻗거나 발이 날아오면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려서 참는 데 고생을 했다.
뒤늦게라도 다른 사람이 도우러 오지 않았다면 그가 나섰을 것이다.
절 올려다보던 한주가 떠올랐다. 젖은 머리카락으로 얼굴이 잡혀도 무방비하게 올려다보던 눈,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알파들을 위한 학교에서, 최약체라고 볼 수 있는 베타이면서 일반인을 대하듯 알파를 상대하는 모습이 결코 불안하거나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막막한 사막의 바다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어도 박한주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단했다.
어쩌면 그렇게 강할 수 있을까.
우강희는 내일 아침이 되어야 한주를 볼 수 있음이 아쉬워 한숨을 뱉었다.
* * *
다음 날, 3교시 수업 중인데 앞문을 노크하고 이무열이 들어왔다. 한껏 굳은 표정의 무열은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주를 불렀다.
“박한주, 따라와.”
한주는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었다. 우강희가 일어나려 하자 한주가 그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앉히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말했다.
“별일 아니야.”
무열을 따라 복도로 나오자 팔을 잡아 한주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어깨를 어루만지고 머리를 확인했다.
“한주야, 몸은 괜찮아? 어제 납치당했었다며.”
“괜찮아요. 경찰이 왔죠?”
“어? 어.”
한주는 동요하지 않았다. 납치되었었다는데 입술 끝의 작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보기에 다친 곳은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해요?”
“접대실. 경찰이 와서 김시훈도 불려 왔어. 김시훈의 부모님도 오시는 중이고.”
“우리 집은 어머니 말고 대리인이 올 거예요.”
“대리인?”
“네, 대리인을 통해 경찰에 신고했어요. 양평에 있다고 연락을 받았으니 곧 올 거예요. 가요.”
한주가 먼저 접대실로 향했다. 귀빈이나 학부모와 상담을 할 때 접대실을 썼다.
무열이 먼저 들어가고 한주가 따라 들어갔다.
60대 중반의 교장은 경찰 둘과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경찰의 노고를 치하하는 환담이 대부분이었다.
한주가 들어와도 보지 않았다. 교장의 뒤에 서 있던 학생 주임이 미간을 찌푸렸다.
김시훈은 다리를 꼬고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다가 놀라며 몸을 세웠다. 보이는 곳에 큰 상처도 없고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는 한주를 확인하더니 못마땅해 인상을 찡그렸다.
“박한주를 데려왔습니다.”
“앉아요.”
교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김시훈의 맞은편 자리의 소파를 가리켰다. 무열은 앉지 않고 뒤에 섰다.
“아직 어린 학생이라 좀 과하게 장난을 치다 보니 번거롭게 바쁜 경찰분들까지 오시게 했습니다. 장래가 기대되는 학생들입니다. 모쪼록 선처를 바랍니다.”
“네, 걱정 마십시오. 이런 일이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아직 혈기왕성한 학생들이다 보니 종종 이런 일이 있습니다. 재강원 고등학교는 명문이지 않습니까. 인근 고등학교만 봐도 장난이 아닙니다. 애들이 하루에 한 번씩은 경찰서를 들락거려요. 질이 아주 나쁘죠.”
이무열은 경찰이 와서 교장과 나누는 얘기를 들어 한주가 납치를 당해 위험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정작 경찰은 가벼운 장난으로 치부하며 신고가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고 말했다.
끼어들려 했지만 학생 주임이 툭 치며 주의를 주었다.
경찰 하나가 태블릿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박한주, 김시훈 학생이죠? 어젯밤에 학생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고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당사자들에게 간단한 질의만 하고 갈 겁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김시훈 학생, 어제저녁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제 같은 학생회 임원인 박한주와 얘기할 것이 있어 밖에서 만났습니다. 얘기가 끝난 후 돌아와 계속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김시훈은 왜 한주가 멀쩡한지 화를 내지 않고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저한테 유리하도록 말을 만들어 갔다.
“어떤 얘기를 했습니까?”
“학생회는 개교 이래로 계속 알파 학생들이 임원을 맡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베타가 되었습니다. 저 박한주가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생회라 베타로서 적응하기 힘들 거 같아 도움을 줄 겸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시훈은 천연덕스럽게 눈을 내리깔며 연기를 계속했다. 한숨을 뱉어 저의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이런 모함으로 경찰에게 신고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도움을 주려 했을 뿐인데 당사자는 불쾌했을 수도 있겠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나빴으면 나빴다고 말해 주면 되는데…….”
“저런.”
학생 주임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가끔 삐뚤어진 애들이 타인의 선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절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죠. 이래서 베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알파와는 태생부터가 이리 다르니.”
접대실 내에 학생 주임과 김시훈을 제외하고 모두 베타였다.
한주는 조용히 얘기를 듣기만 했다.
“김시훈 학생은 이번에 학생회 임원으로 선발될 정도로 우수한 모범생입니다.”
교장에 뒤이어 학생 주임이 끼어들었다.
“그에 비해 박한주는, 선생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지만 거짓을 말할 수 없으니 말해 드립니다. 여기 박한주는 한 달 전쯤에 거짓말로 소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습니다. 어휴.”
순식간에 문제 학생은 한주가 되었다.
“주임 선생님, 그 일은!”
“이무열 선생님, 선생님이 평소 박한주를 많이 아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두둔하는 건 오히려 박한주에게 안 좋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잘못을 하면 벌을 받고 잘못을 직시하게 해야죠. 그것이 진정으로 선생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학생 주임은 접대실 안에서 유일하게 한주의 편을 들어 주는 이무열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 한 학생을 편애해서 두둔하고 있다고.
“이무열 선생님, 박한주가 한 달 전쯤에 같은 반 학생이 폭행당했다며 소란을 피운 일이 거짓입니까? 제가 없었던 일을 얘기한다는 겁니까? 그 일이 진실로 판명되었습니까?”
“그건,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잖습니까.”
“왜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끝낸 건지 아실 텐데요?”
무열은 학생 주임을 이길 수 없었다. 연속된 질문에 당황했고 한주에게 불리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재민석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부정했습니다.”
말은 순서와 뉘앙스가 중요하다.
‘그가 훔친 것은 사과일 뿐이다’와 ‘그는 사과를 훔쳤다’는 듣는 사람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아무리 본질이 같다 해도 사과가 가지는 무게는 달라진다.
언론 뉴스 타이틀에서 자주 쓰는 기법이었다.
평소 다른 선생들을 무시하며 가스라이팅에 능숙한 학생 주임의 말에 무열은 휘말렸다.
“네, 당사자가 직접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조사도 하지 않고 끝났습니다. 그 학생은 이 학교 이사장의 아들이었고요. 벌어지지도 않은 일인데 저 박한주 학생이 이사장의 아들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런 허무맹랑한 일을 벌였던 겁니다.”
한주에게 거짓말한 전적이 있으며 이런 일이 두 번째임을 강조했다. 그러니 이번 일도 분명 거짓말이라고.
잠깐 사이에 눈덩이를 굴리듯이 상황을 다른 방향으로 불려 나갔다.
“그때 일은 나도 기억하지. 우리 학교에 저런 학생이 있다니 참 안타까워.”
“교장 선생님!”
교장도 그때 일이 못마땅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분위기는 한주에게 불리해졌다.
납치와 폭행 사주라는 범죄는 한주의 시기 질투로 인한 거짓말로 포장되었다.
멀쩡한 경찰이었다면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공정하게 한주에게도 정황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한쪽의 말과 주변인들의 얘기만을 듣고 경찰은 거기서 상황을 정리했다.
“허, 그렇군요. 요즘 애들이 참 맹랑합니다. 뻔히 보이는 일인데 거짓말을 잘해요. 선생님들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허허, 우리야 늘상 하는 일이지만 괜히 경찰분들까지 불러 수고를 끼쳤습니다.”
“그럼 박한주 학생 건은 학교 측에 맡기겠습니다. 굳이 경찰까지 올 일은 아니었네요. 애들이 이렇습니다. 별거 아닌데 저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크니까 일을 크게 부풀려요.”
“잘 알죠.”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학생 주임이 배웅해 드릴 겁니다. 나가시면서 수고하시는 경찰분들 나눠 드시라고 사과 한 박스 챙겨 드리겠습니다. 학부모님들이 매년 학교에 챙겨 주시는데 양이 많아 이웃분들과 나눠 먹고 있습니다. 놔두면 썩는 사과라도 위에서 뭐라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윗분께 따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아이구, 그렇게까지 마음 써 주시다니.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이렇게 가시면!”
“이무열 선생님! 좀 조용히 있죠.”
학생 주임이 팍, 이무열의 팔을 잡아당겨 뒤로 보내더니 경찰들을 안내하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그걸로 조사는 끝이었다. 한 명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경찰들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한 여자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김시훈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았다.
“어머니!”
“우리 아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네가 잘못을 했다고 호출이 오다니!”
“이거 사모님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마침 일이 잘 해결되어 경찰분들이 돌아가시던 참입니다.”
“가벼운 장난으로 결론이 나왔습니다.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자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한주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올려 짝, 소리 나도록 뺨을 때렸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무열이 얼른 다가와 한주를 뒤로 끌어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어제 다쳤던 입술이 다시 터져 피가 주르륵 났다.
“우리 귀한 시훈이를 모함했는데 엄마가 돼서 화도 내지 말라는 건가요? 어떻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우리 아들보다 가해자인 저 애를 감싸는 겁니까? 당신이 그래도 선생이야?”
“너무 화내지 마시고요. 아드님이 더 놀라지 않습니까. 다 잘 해결되었습니다. 여기 경찰분들이 많이 수고해 주셨고요.”
교장이 사람 좋게 위로하자 여자는 표정을 싹 바꾸며 경찰을 보았다.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아들밖에 모르는 여린 엄마의 모습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래서 경찰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저런 학생이 이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니는지, 베타라고 들었는데 정말 베타는 어쩔 수 없네요. 이대로 처분도 없이 끝내실 건 아니죠? 우리 애의 명예를 실추시켰어요.”
“걱정 마십시오, 사모님. 저희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징계는 학교 측에 맡기고 이 일은 여기 변호사가 나서서 정리할 거예요. 이런 일을 벌이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고소해서 철저히 알려 줄 생각입니다. 어딜 귀한 우리 아들에게.”
상황은 그렇게 속전속결로 정리가 되는 듯이 보였다.
경찰들은 접대실을 나가고 있었고 여자는 아들 김시훈을 보듬으며 한주를 노려보았다.
그때 바닥을 보며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한주가 입을 열었다.
“친구와 엄마를 미행해 사진을 찍어 보내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경찰은 걸음을 멈추었다.
“택시 기사를 매수해 절 납치해서 인적이 드문 장소로 데려갔습니다.”
학생 주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문가를 시켜 폭행을 사주했습니다. 이게 단지 애들 싸움이라고요?”
“박한주 학생!”
온화한 표정의 교장이 큰 목소리를 냈다.
“아니, 우리 애가 뭘 했다고! 반성을 안 하는구나! 발칙한 것! 부모가 어찌 키웠으면 저렇게 엉망으로 자랐는지 안 봐도 뻔하네!”
한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화면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핸드폰을 들었다.
“다, 잘 들었습니다.”
화면에는 고용진이란 글자가 떠 있었다. 그리고 접대실의 열린 문으로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들어왔다. 안경 뒤 중년 남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박한주 님. GO투자홀딩스의 법무 팀이자 VIP 전담 변호사 원철한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박한주 님의 대리로 제가 상황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접대실 안의 다수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흥, 그깟 변호사! 흔해 빠진 것이 변호사인데 뭐 대단하다고! 우리도 데려왔어요!”
이제까지 여자의 뒤에 있던 남자가 등이 떠밀려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남자는 원철한의 앞으로 냉큼 가더니 90도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한국대 법학과 *8년 졸업생 하부진입니다.”
냉랭한 표정으로 여자의 뒤에 서 있던 변호사의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아, 내 까마득한 후배군. 우린 변호사 대 변호사로 만난 거니까 선배 대우는 하지 말지. 일은 일로 처리해야지.”
“아, 예!”
원철한이 툭툭 하부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하자 그가 다시 90도로 굽혀 인사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 여자가 짜증 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신 동창회 하라고 데려온 줄 알아?”
날카롭게 소리치자 변호사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푹 쉬며 귀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변호사 선배였다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원철한은 그들 세계에서는 전설이었다.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존재라서 흥분을 참지 못했다.
원철한은 접대실 내부의 사람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모든 대화는 녹음되어서 차후에 증거로 쓰일 겁니다.”
“뭐? 불법입니다!”
학생 주임이 놀라며 소리쳤다.
“녹음 당사자인 박한주 님이 이 자리에 있고 변호사도 배석한 자리의 대화이니 불법은 아닙니다.”
원철한은 뒤에 선 시니어 변호사가 건네주는 자료를 받아 한 장 한 장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제 있었던 관련자인 택시 기사의 신병을 확보해 두었으며 사주받아 박한주 님을 납치했다는 자백을 받아 두었습니다. 택시 기사의 핸드폰에서 통화한 내역도 확보했습니다.”
“아니, 이게! 그냥 애들 장난입니다! 무슨 일을 이렇게 벌입니까?”
“납치·폭행 사주·협박·주변인 도촬 및 미행이 애들 장난이라고요. 집에서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게 애들 장난이라는 겁니까.”
원철한의 시선이 잠시 김시훈의 엄마에게 닿았다.
“거기 김시훈 군이 박한주 님에게 한 납치·협박·위협, 그리고 사람을 부려 폭행을 사주한 일, 가족과 친구에게 사람을 붙여 미행하고 사진을 찍어 보냈던 일, 그때 쓰였던 대포폰까지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아, 하고 말하며 추가로 말했다.
“그리고 경찰을 매수해 납치를 포함한 특수 폭행을 무마하려 했으며 뇌물에 해당하는 금전이 오갔다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 있어, 별도로 관할 서에 감찰을 받도록 말을 넣어 둘 예정입니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린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변호사가 의심만으로 사람을 잡네!”
경찰 둘이 펄쩍 뛰었다. 접대실을 바삐 나가는 그들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원철한은 목소리를 높였다.
“뭐, 사과 박스에 진짜 사과만 들었다면 좋겠군요. 그 사과 박스는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이 증거물을 확보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룹을 이끄는 사장의 부인이었다. 여러 가지 일을 보고 듣고 겪었던 여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개인의 증거품 확보는 신빙성이 없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전문 팀을 꾸리고 있습니다. 다 아실 텐데요. 이 모든 일은 제대로 법적 절차를 밟았습니다.”
“하, 마음대로 하세요. 변호사를 통해 연락하면 됩니다. 누가 이기나 보죠! 가자, 시훈아.”
“네.”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원철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사모님이 박한주 님의 뺨을 때려 상처를 입힌 것도 추가해 두겠습니다. 오늘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을 예정이니 그것도 준비해 두시지요.”
“마음대로 해! 누가 그런다고 사과할 줄 알아? 나는 우리 아들을 모함했다고 생각해서 흥분한 상태였어! 정상 참작이 될 테니 아무런 대미지도 주지 않아!”
“뭐, 그렇겠죠.”
원철한은 가볍게 수긍했다. 그에 학생 주임이 끼어들었다.
“박한주 군! 억울하고 힘들었으면 학교 측에 먼저 알렸어야지! 이게 무슨 소동인가! 학교 측에 알렸으면 알아서 잘 처리를 했을 텐데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면 어떡해!”
“학교 측에 말했었는데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무마시켜 버린 전적이 있죠. 한 달 전쯤에.”
“그건 네가 피해자라고 주장한 학생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학교에 징계는 없다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처리하는데요?”
“전학이나 퇴학이지!”
학생 주임의 말에 원철한이 감탄했다.
“역시 나이가 깡패군요. 납치, 폭행 사주 등등의 특수 범죄가 전학, 퇴학으로 처리되다니, 고등학생이란 정말 대단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 미성년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순간의 실수로 잘못을 했을 수도 있죠!”
“그 정도 판단도 못 하다니 정신과 감정이라도 받아 봐야겠습니다. 여섯 살도 사리 분간을 하고 옳고 그름을 아는데 유치원생보다 못하군요.”
“누가 모자라서 그런지 알아?”
“김시훈!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하지만 어머니! 절 머저리 취급 하잖아요!”
난장판이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처럼 악역이 응징을 당하지도 않고 미약한 반격은 그들을 갱생시키지 못한다. 심청이의 아버지가 눈을 뜨듯이 극적인 전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악역은 여전히 악역이었고 당하는 자는 여전히 당했다.
지켜 줘야 할 기관은 일을 키운 피해자를 탓하고 가해자는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경찰은 힘없고 지식 없는 약자에게 더 강하게 나오며 합의를 종용한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 안에서 제일 가슴에 응어리가 남는 일은 자신이 당했다는 기억이 아니다. 당했는데 찍 소리도 못 하고 가만히 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아 두고두고 가슴에 쌓인다.
미약한 반격이라도 그때 해 봤으면, 말을 받아치며 소리라도 쳐 볼걸, 그 화가 꾸역꾸역 쌓이며 가슴을 시커멓게 갉아먹는다.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나는 피해자인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한주는 원철한을 보았다.
“변호사님.”
“네, 말씀하시죠.”
“친구가 오늘 개교기념일이라 통화를 하다가 접대실에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전화를 끊지 못했습니다.”
한주는 아직 고용진이라고 떠 있는 화면을 모두가 보도록 다시 들었다. 통화 시간은 일 초 일 초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 친구가 게임을 하면서 개인 방송을 하고 있어서요. 지금 얘기가 친구 개인 방송에 다 나갔을 텐데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까요?”
“이런! 그런 실수를!”
이미 사전에 원철한과 논의가 끝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실수는 일상에서 종종 벌어질 수 있는 해프닝이죠.”
“흥! 개인 방송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다고! 인터넷에 공개했다고 협박하고 싶은가 본데, 그깟 거 얼마든지 지울 수 있어! 인터넷이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조작할 수 있어! 어린놈이 협박이나 하고!”
“앞날이 창창한 미성년자의 실수라고 생각하세요. 거기 김시훈처럼.”
“건방진 놈! 가자, 시훈아! 엄마가 다 처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여자는 아들을 데리고 접대실을 빠져나갔다. 경찰들도 허둥지둥 나갔다.
“박한주!”
학생 주임이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잡으려다가 변호사를 보고 겨우 이성을 지켰다.
“무슨 생각이야? 학교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까지 키워야겠어? 이렇게 변호사까지 대동했으면 좀 더!”
“그 말은 김시훈에게 하세요. 사람을 시켜 납치하고 폭행을 지시한 김시훈에게요.”
“박한주!”
“어떻게 학교를 믿어요? 이미 학생을 지켜 주지 않는 상황을 겪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이, 이 새끼!”
학생 주임은 손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한주를 때리지는 못했다. 원철한의 뒤에 있던 시니어 변호사가 그 장면을 찰칵 사진 찍었다.
“국내 최고의 명문 알파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했군요. 아니면 학생이 베타라서 인권을 무시했든가. 이 부분도 교육부에 따로 진정서를 내겠습니다.”
“이!”
“그만! 그만하게! 일이 다 끝났으면 나가!”
“교장 선생님!”
교장이 비틀거리며 이마를 눌렀다. 학생 주임이 얼른 교장을 부축하며 주위 사람들을 노려보았고 한주와 이무열, 원철한 등은 밖으로 나왔다.
한주는 잊었던 것이 생각나 원철한에게 물었다.
“그 사람 찾았어요? 엄마 사진을 찍은.”
“아, 네. 흥신소를 이용했더군요. 여기 명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은 흥신소 직원은 왜?”
“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한주는 명함을 훑어보고 주머니에 넣었다.
“대단하구나, 한주야.”
바람이 빠지듯 힘없는 목소리로 무열이 감탄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자신은 절대 약자로 그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한주는 달랐다.
“넌 대단해.”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하지만…….”
무열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재벌가들의 생리를 알기에 더 걱정되었다. 괜히 벌집을 들쑤신 것은 아닐까.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염려에도 한주는 씨익 웃기만 했다.
죽어 엎드릴 때까지 계속 밟는 자들이었다. 자신을 향한 적의는 참지 않았고 상대가 약할수록 더 강하게 나갔다. 무열은 한주가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누구도 게임 방송을 하는 한주 친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간 뒤부터 재강원 고등학교로 전화가 빗발쳤다.
고용진은 실시간 방송을 하면 시청자 수가 7천 명 정도 되는 대기업에 속했다. 돌발 소통 방송이라 1천 명이 조금 넘게 들어왔지만 알파 고등학교에서 학생의 특수 폭행을 무마하려는 목소리가 실시간으로 방송을 타면서 끝나기 전에는 3만 명을 넘게 되었다. 곧 기사가 뜨며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베타 학생의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며 기사화되고 포털 검색어 1위를 하게 된다.
이 일로 재강원 고등학교는 사과문을 홈페이지에 걸었고 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반응하면 더 날뛰는 대중을 알기에 조용히 침묵했다.
학교 측보다는 김시훈 집안에 불똥이 크게 튀었다.
인터넷 기사를 조작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여자가 중소형 검색 엔진을 소유한 그룹의 사모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뜨겁게 기사에 올랐다. 시기가 하필 매각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여서 곤두박질친 신뢰성을 복구할 수 없어 계약은 파기가 되고 이때의 손실이 두고두고 남아 그룹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지막으로 김시훈은 전학 간다.
다음 날 학생회와 면담을 한 후 곧장 학교를 나간다. 나중에 누군가 다리에 깁스를 한 김시훈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다리를 절기 전의 밤에 김시훈 집 근처에서 우강희를 보았다는 말도 돌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졌다.
김시훈이 법적인 처벌을 받았는지는 누구도 관심이 없어 소문도 나지 않았다.
물론 일련의 일들은 좀 더 미래의 일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한주를 건드리는 학생은 더는 없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건드리면 제대로 반격하며 일을 키우기 때문에 귀찮아서였다.
* * *
금요일, 조례가 끝나고 무열은 한주와 우강희를 복도로 불렀다.
“한주야, 기숙사 방 정해졌어.”
한주는 강희를 힐끔 보았다.
“우강희요?”
“그래, 우선 둘이 써 보고…… 문제가 있다면 그때 다시 정하자. 한주 너라면…….”
무열은 강희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 강해 두려울 정도였다. 아직 어리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이제 2년. 어떤 식으로 성장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주라면 괜찮지 않을까.
부디 이번에는 자신의 판단이 맞길 바랐다.
“너라면 잘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둘이 룸메이트로 생활해 봐.”
“네.”
“그러죠.”
대답하는 강희의 얼굴을 보며 무열은 잠시 넋이 빠졌다. 생각해 보니 강희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멍하니 교무실로 온 무열은 교장을 찾아갔다. 드디어 서랍에서 계속 간직한 봉투를 꺼낼 수 있었다.
“이 학교를 그만두겠습니다.”
자신도 용기를 내 보자.
무열은 재강원에게서 정말로 벗어나기로 했다.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