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룸메이트(1)
- 3302호실, 배스타월 한 장.
호출은 늘상 있는 일이지만 한주는 엘리베이터로 움직이려다가 멈춰 섰다.
“33층이요? 스위트인데 제가 해도 돼요?”
- 그래, 3302호실만 하면 돼.
“네.”
33층은 스위트룸 중에서는 두 번째로 넓은 룸이 있었다. 층을 담당하는 서버가 따로 있었고 책임을 지지 못하는 미성년의 한주를 보내지 않는 구역이었다.
“어디 아프신가?”
담당 서버가 몸 상태가 안 좋아져 빠지게 되어도 매니저가 한주에게 콜을 할 리 없었다.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로 경력이 있는 직원들로만 배치하는 층이었다. 겨우 작년에 일하기 시작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는 한주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상하지만 시키는 대로 33층으로 향했다. 보관실에서 대형 타월을 가지고 3302호실로 향했다.
룸 앞에 서서 잠시 옷차림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룸서비스입니다.”
문이 열려서 한주는 과하지 않게 눈을 맞추며 고객에게 인사를 하려고 숙이다가, 그대로 멈추었다.
우강희가 서 있었다.
“……고객님?”
이 방 숙박 고객이 우강희?
몇 시간 전에 교실에서 봤으며 헤어질 때 일요일에 A동 기숙사 룸에서 보자고 말한 우강희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한주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내일까지 여기서 묵어. 가구와 짐을 옮느라 어수선해진다고 해서 나왔어.”
“아, 그래? 배스타월 부탁했지? 여기.”
“들어와.”
“안 돼. 지금 바쁜 시간이라 쉴 수 없어. 그럼 학교에서 보자.”
- 2326호실, 어메니티 부족.
“네, 가요.”
인이어로 들어오는 호출에 가볍게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집이 근처일 텐데 여기서 자네?’
의문이 들었지만 곧 우강희의 가족 상황을 떠올렸다. 누구에게나 다 사정이 있는 법이다. 한주가 이번 주말에도 친구 고용진네서 자는 것처럼.
금요일은 바빠서 한주는 곧 강희의 일을 잊었다. 아니, 그대로 잊을 뻔했다.
* * *
- 3302호실, 일회용 칫솔 추가.
“칫솔을 변기에 빠뜨려서.”
기본적으로 룸마다 두 개의 일회용 칫솔을 세팅했다. 룸까지 들어가지 않아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언제 끝나? 저녁은 먹었어?”
“당연히 먹고 하지. 주말은 좀 바빠서 새벽 2시쯤 끝나. 난 갈게.”
세면대가 있는데 왜 변기에 빠뜨리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뭐, 우연으로 칫솔 두 개를 다 변기에 빠뜨릴 수도 있으니까.
* * *
- 3302호실, 리모컨 고장.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아.”
한주는 직접 리모컨을 눌러 TV가 켜지지 않음을 확인했다. 가지고 간 여분의 리모컨으로 전원이 들어오는 TV를 확인하고 테이블에 놓았다.
“다른 필요한 건 없고?”
“박한주.”
강희는 다른 말을 했다.
“오늘은 어디서 자?”
“오늘도 친구네서. 알바 끝나면 간다고 말은 해 두었어.”
“게임 방송한다는?”
“응. 그럼 또 필요한 거 없으면 간다.”
강희는 문에 비스듬히 기대며 한주를 배웅해 주었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커플이 우강희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는 물론 남자 또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늘씬한 체격은 단단했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깊은 눈은 이국적인 매력이 있었다. 많은 알파들이 지내는 재강원 고등학교 안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성인과 같지만 어딘지 완성되지 않은 경계선의, 아슬아슬해서 더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최근 가깝게 지내는 한주조차도 가끔은 넋 놓고 보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일반 사람에게 우강희의 존재감은 더 대단했다.
‘설마 또 부르지는 않겠지.’
설마 했지만 설마가 진짜 이루어졌다.
* * *
- 3302호실, 디너, 테이블 서비스.
한숨이 나왔다.
“매니저님. 3302호실에서 저 지명했어요?”
- 나도 이런 친구 있으면 좋겠다. 음식 거의 다 되었으니 15분 후에 33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기.
매니저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니 33층 담당자가 트롤리를 밀며 내렸다.
“3302호실이야. 거실에 테이블 서비스하면 돼.”
식기는 두 세트였다.
‘누가 왔나?’
33층 담당 시니어는 대략 어떤 음식인지 설명을 해 주고는 한주가 가기 전에 말했다.
“좋은 시간 보내라.”
“……네?”
한 박자 늦게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 버렸다.
“들어와.”
강희는 룸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옆으로 비키며 공간을 만들었다. 한주는 턱에 힘을 꾹 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세팅해 드리겠습니다.”
“자주 불러서 화났어?”
“너, 나 일하는데 와서 왜 훼방을!”
“식사하자.”
와락 소리 지르는데 강희가 한주의 어깨를 잡고 거실로 이끌었다.
“박한주 직원을 한 시간 대여했어. 프런트에서도 금요일이라 한 시간밖에 안 된다고 허락했고. 네 몫까지 양갈비 스테이크 시켰어. 저녁 먹었지만 배고플 시간이니까. 먹을 거지?”
“우강희, 너…….”
당연하다는 듯이 강희는 한주에게 의자를 빼 주고 자리에 앉았다.
“이러면 감동받지! 잘 먹을게! 그러잖아도 이 시간쯤 되면 배고파서 잠깐잠깐 초코바를 먹는데.”
“초코바?”
강희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에너지바처럼 건포도가 들은 건 아니겠지?”
“……조심하고 있어.”
한주도 그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재빨리 테이블에 세팅했다. 사이드로 제철 야채 구이를 곁들인 양갈비 스테이크를 놓았다. 향긋한 냄새가 식욕을 돋웠다.
“오늘 여기서 자는 거야?”
“내일까지.”
“아, 히든 메뉴로 잔치 국수가 있는데 다음에는 그거 먹어 봐. 국물이 진짜 끝내줘.”
“그럼 내일 먹어 볼까.”
“완전 추천이야.”
한주는 큼직하게 썬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가득 물고 씹었다. 입 안에 육즙이 꽉 차면서 고기가 씹히는 식감이 몸서리치게 좋았다. 한창 돌아다녀 딱 배고플 시간이었다.
“이것도 먹어.”
자근자근 아스파라거스를 씹는 한주의 접시에 그는 스테이크 반과 가지, 구운 방울토마토를 올려 주었다.
“너는?”
“그다지 배고프지 않아.”
“고맙다.”
우물우물 입에 넣고 씹으면서 강희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주가 먹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이지만 한주와 시선을 맞추며 눈을 떼지 않았다.
일부러 한주를 먹이려고 식사를 주문한 사람처럼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이전에는 말조차 걸지 못했던, 대화도 졸업식 죽기 직전이 전부였던 우강희는 친구들과 있을 때도 대화를 잘 하지 않는 과묵한 타입이었다. 알파들도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던 그는 한주와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우강희가 절 보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이거.”
손이 다가와 한주의 입술 끝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손끝이 닿는 순간 따끔한 정전기가 일었다. 문지르거나 누르지 않고 금방 떨어졌다.
“얼굴에 상처가 남았어. 저번 주에도 그래서 집에 가지 않았지?”
“어? 어.”
며칠 지났지만 입술에 딱지가 남았다. 게다가 납치당했을 때 전문가들과의 싸움이어서 팔뚝과 종아리에 짙은 멍이 남았다. 엄마에게 들킬 수 있어서 이번 주에도 못 간다고 말했더니 내 아들이 변했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다음 주에는 꼭 집에 가겠다며 겨우겨우 엄마를 달랬다.
말하지 않았는데 강희는 짐작하고 있었다.
“착하네.”
그의 손이 슬쩍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피까지 닿지 않는데 안쪽으로 들어오는 느낌에 한주는 순간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새벽 2시에 끝나면 집까지 지하철 타고 가?”
“지하철이나 버스는 그 시간에 다니지 않아.”
“그래?”
“가끔 택시 타거나…… 걸을 수 있는 거리라서 운동 삼아 조깅도 해.”
조깅은 좀 허세였다. 몇 번 그렇게 갔다가 다음 날 오후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자게 되었다. 후유증이 커서 그다음부터 택시를 주로 탔다.
예상대로 강희는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한주를 보았다. 그런 반응을 보고 싶어 약간의 허세를 부린 것인데 막상 예상한 반응을 보이자 부끄러워졌다.
“고용진네서 자면 아침까지 붙들려서 게임을 해야 해. 이틀 연속으로 걔네 집에서 자면 좀 피곤해.”
“그러면 여기서 자.”
우강희는 아무렇지 않게 권했다.
“어차피 모레부터 같이 잘 사이니까 미리 연습 삼아.”
그가 테이블에 양팔을 얹어 기대며 한주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오늘 밤, 같이 자자.”
한주는 시선을 피해 보이지 않는 침실을 확인하는 척했다.
어차피 같이 방을 쓸 사이고 스위트라 킹사이즈 침대가 있어 자리도 넓었다. 불편하면 거실에서 잘 수 있을 정도로 소파도 컸다.
그런데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긍정적인 대답을 하려는데 우강희가 물었다.
“호텔에 부탁하면 게임기도 가져다줘. 하고 싶은 게임 있어?”
“어?”
마침 요즘 나온 신작 게임이 떠올라 한주는 게임명을 말했다. 그랬더니 강희는 “잠깐”이라고 말하며 일어나더니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
“준비해 준대. 30분 정도 걸린다네.”
“있대?”
나온 지 이틀 되었고 시리즈 게임이라 판매 전부터 기대를 모아 첫 판매 때는 전날 밤부터 텐트를 치며 줄을 서서 사 갔다고 고용진에게 들었다. 그런데 그 게임이 호텔에 있단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게임 오면 먼저 하지 마. 꼭 같이해야 해.”
‘후후, 난 이미 해 본 게임이지.’
이전에는 고용진이 발매 일주일 뒤에 구매했다. 이미 해 본 경험자이니 강희보다 나을 것이다. 한주는 얼굴에 떠오르려는 미소를 꾹꾹 눌렀다.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한주가 한 시간 쉰 덕분에 같이 일하는 팀원은 땀나게 돌아다녀야 해서 미적거릴 수 없었다.
가져왔던 트롤리에 빈 접시들을 놓고 다시 방을 나갔다.
“오기 전에 전화해 줘. 편의점이라도 다녀올 수 있으니까. 네 번호 몇 번이야?”
“아, 010에.”
뒷번호도 불렀다. 곧 한주의 핸드폰이 울리며 강희의 번호가 떴다.
“저장해 둬. 그럼 이따가 보자.”
문이 닫히고 복도에 한주 혼자 남았지만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이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 * *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자 입꼬리를 한껏 올린 30대의 남자가 우강희에게 게임팩을 내밀었다. 강희를 서포트하는 공무원 조은석은 그가 전화를 주어 한껏 들떠 있었다.
“우강희 님, 이런 게임까지 좋아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구하기 힘들었는데 마침 부하가 자기 샀다고 자랑을 해서 가져왔습니다.”
뺏어 왔다는 소리다.
강희가 게임팩을 가져가려 하자 조은석은 슬쩍 뒤로 뺐다. 언제나 정해진 행보를 하던 강희가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동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 우려할 방향은 아니다.
“갑자기 호텔에 묵는다고 해서 놀라서 스위트를 준비하기는 했는데 너무 작지는 않습니까? 펜트하우스로 당장 준비해 드릴 수 있는데요.”
“너무 넓은 곳보다 이 정도가 좋아요. 주세요.”
조은석의 입이 한껏 벌어졌다.
무표정하게 노려보며 말했지만 조은석의 뇌 필터링에는 여덟 살 우강희가 ‘주세요.’라고 말했다.
“조은석 씨.”
“핫, 네. 그럼요. 그리고 또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우강희 님의 즐거운 게임 라이프를 위한 패키지! 손목 보호대와 심심하지 않도록 종류별 팝콘과 탄산음료, 그리고 게임하기 편한 자세를 위한 수유 쿠션까지!”
게임팩을 뺏고 문을 닫아 버렸다.
프런트에 전화를 했을 때 게임기는 구비되어 설치 가능하고 가능한 게임 리스트에 우강희가 말한 게임팩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한주가 간 뒤에 조은석에게 전화를 걸어 준비를 부탁했다.
전화조차 잘 하지 않는 강희가 호텔 숙박에 이어 게임팩 조달까지 말하니 조은석은 한껏 기뻐하며 준비해 주었다.
한주가 끝날 시간을 아니까 그때까지 다른 일을 하면 되는데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시간이 가지 않아 욕조를 들락거렸고 언제 전화가 올까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결국에는 벽에 기대어 현관문만 보게 되었다.
바보 같은 짓이고 누군가 그 같은 행동을 한다면 비웃을 텐데 자신이 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을까.
타인과 있는 공간을 피하며 살았다.
자신이 타인에게 위험한 존재임을 안 이후부터, 알파로 발현을 한 이후 줄곧 그렇게 살았다.
새벽 2시가 넘고 5분이 지나자 전화가 왔다.
- 지금 지하니까 곧 올라갈게.
“그래.”
용건만 말하고 한주의 전화는 끊겼다.
우강희는 줄곧 현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아 이상한지 박한주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화장실 들어갔나?”
목소리가 들리며 강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핸드폰 화면에 한주의 이름이 떴다.
열심히 왜 문을 열지 않는지 그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우강희? 강희야.”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찌나 단지 그는 5분 뒤에야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한주는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당당하게 내밀었다.
“선물.”
에너지바 열 개.
수백 개의 비눗방울이 하늘에 날아오르듯 가슴이 간질거렸다. 우강희는 웃음을 터뜨리며 한주를 껴안았다.
* * *
“으어, 좋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직원 형이 빌려준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항상 일 끝나고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졸지 않도록 노력했는데 엘리베이터만 타고 올라와 씻으니 너무 편했다.
편의점에서 강희에게 줄 에너지바와 팝콘을 튀겨 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캐러멜 맛과 버터 맛 두 가지, 아이스크림과 과자, 컵 떡볶이도 샀다.
한주는 친구와 외박하는 기분에 신이 났다.
게다가 신상 게임까지 있다.
‘뭐, 이미 해 본 게임이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신상이지.’
기쁘게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우강희, 다 씻었어. 게임하자!”
그런데 촤악, 몸에 액체가 뿌려지며 새큼한 오렌지 향이 퍼졌다. 빈 컵을 든 우강희가 당황하며 사과했다.
“미안. 목마를까 봐 주스 준다고 가져왔는데.”
오렌지 주스에 티셔츠며 바지까지 젖어 주스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씻고 이걸로 다시 갈아입어.”
라면서 강희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옷을 내밀었다.
“어, 고마워.”
귀찮기는 하지만 오렌지 주스가 끈적해지니 다시 샤워했다. 우강희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태그도 제거하지 않은 새 옷은 한주 사이즈보다 한 치수 컸지만 우강희에게는 작은 사이즈였다.
뭔가 ‘당했다’는 기분이 드는 이상한 찝찝함이 남았다.
“에이, 우강희가 일부러 주스를 뿌릴 리 없잖아.”
일부러 그랬다면 그에게 이득이 되는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게임은 침실 TV에 설치되어 있었다. 팝콘을 우강희에게 안겨 주고 컨트롤러를 하나씩 쥐고 침대 위에 앉았다.
화면에 스토리가 진행되었다. 화면에 집중한 강희를 보며 한주는 씨익 웃었다.
‘후후, 인생 2회차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우강희. 자기가 게임 못한다고 삐지면 어쩌나.’
생각만으로도 신났다.
* * *
“안 해!”
한주는 컨트롤러를 팽개치고 강희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게임 컨트롤러가 처음인 그는 게임 초반에는 뭘 눌러야 하는지 버벅거렸다. 우강희도 처음 하는 것에는 이렇구나, 귀엽게 보였다. 좀 사람답게 보였달까.
다른 세상 사람 같던 그가 조금 가깝게 느껴졌었다.
초반 10분까지만.
컨트롤이 점점 능숙해지더니 게임 공략을 알고 있는 한주조차도 모르는 힌트를 찾아 히든 게임을 진행한다든가 듣도 보도 못한 아이템을 획득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스토리가 진행하게 되자 인생이란 무엇일까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외모도 좋고 집도 좋고 능력도 좋은 놈은 뭐든 잘하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 게임을 몇 번이고 플레이했는데! 어떻게 나보다 잘하냐고!’
외칠 수는 없어 이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억울한 기분을 풀었다. 인생 2회차인데 이길 수 없는 놈은 이길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분하기만 했다.
졸업식에서 화재로 죽었는데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졌다. 가끔 이 회귀에 무슨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다시 과거를 살게 된 것만으로 한주의 인생이 크게 바뀌었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위해 신이 시간을 되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기척과 함께 등 뒤의 매트리스가 기울어졌다. 힐끔 눈을 돌리니 강희가 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임 잘하다가 왜 그래?”
“게임을 잘하는 건 너지!”
“잘하고 못하고가 어딨어. 배틀 게임도 아니고 같이하는 플레이인데. 그래서 화났어?”
“내가 애냐? 그런 거로 화나겠냐! 피곤해서 그래. 좀 저리 가 봐.”
내려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뒤로 밀고 이불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새벽 5시였다. 밖이 환해지고 있었다.
“쉬고 다시 해.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이불 안에 들어가니 체온에 따끈따끈해지면서 몸이 나른해졌다.
“박한주, 자?”
“안 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는 이미 녹아 가고 있었다.
“낮에 사부한테 가야 하는데…….”
“사부?”
조용하게 묻는 목소리가 졸음을 부추겼다.
“나 무영권 가르쳐 준 사부.”
“무술이야? 들어 보지 못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우리 사부가 유일한 후계자인 무술이래.”
“그래서 싸움을 잘하는구나.”
강희는 한주의 말을 듣고 조곤조곤 호응해 주었다. 누워 있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의 편안한 목소리였다. 그가 잘 들어 주니 말이 술술 나갔다.
“사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만나야 하는데…….”
“누구?”
“잘 찍는 사람…….”
“응?”
한주는 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 * *
신기했다.
위험할 수 있어 페로몬을 제어하기는 했지만 게임을 하다 보니 페로몬에 대한 걱정을 잊었다. 희미하게 주위에 떠도는 체취 같은 페로몬에 놀라 한주를 종종 확인했다. 무사한지, 영향은 없는지.
우강희는 한주의 옆에 누웠다.
곯아떨어져 숨만 고르게 쉰다.
저녁에는 가족 식사에 참석해야 해서 점심에 한주와 국수를 먹기로 했다.
이제 자야 하는데 오히려 눈은 또렷해졌다.
한주의 뒤통수와 귀, 목, 넓지 않은 등이 보였지만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쪽으로 돌아누워, 떨어지겠다.”
킹사이즈라 둘이 누워도 충분히 공간이 있었고 한주도 가장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잠결에 강희의 말을 들었는지 끌어당기는 대로 오면서 몸을 돌렸다.
이불 안에서 몸이 닿지는 않았지만 지척에 타인의 체온이 느껴졌다.
베개 위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가지런한 속눈썹에 눈꺼풀은 닫혀 있지만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확인하지 않아도 남자임을 아는데 계속 보게 된다.
강희는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눈꺼풀에 걸린 앞머리를 옆으로 쓸었다. 절로 숨을 멈추게 된다.
“으응.”
한주는 몸을 뒤척였지만 곧 조용해졌다.
공기가 따끈따끈하다. 난방이 필요 없는 계절이지만 추운 겨울 난로 앞에 있는 것처럼 가슴까지 따뜻하게 만든다.
자각하고 보니 흐읍, 박한주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와 같은 어메니티의 샴푸 향기가 났다. 우강희는 좀 더 고개를 내려 한주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갔다. 입술에 잠시 피부가 닿아 간지러웠다.
비누 향 외에 다른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인공 향과는 다른 피부 냄새가 있었다.
‘이게 박한주의 향.’
베타이니 알파나 오메가처럼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주의 향기라고 생각하자 몸이 뜨거워졌다.
달콤한 솜사탕을 한입 가득 입에 넣은 것처럼 달콤함이 핏속으로 퍼져 갔다.
맛을 음미하고 싶어 혀로 입천장을 문질렀다.
좀 더 가까이 가고 싶다.
숨을 죽이며 한주의 등을 한쪽 팔로 감쌌다. 손바닥을 펼쳐 아직 어린 등을 감싸고 척추뼈를 따라 천천히 내렸다. 버석거리는 도톰한 이불 위지만 몸의 굴곡이 느껴졌다.
끌어당기자 조금 더 몸이 가까워졌다. 한주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우강희가 움직였다.
한 베개를 같이 베며 서로의 숨이 닿을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잠의 전조.
한주와 같은 방을 쓸 수는 있겠지만 잠드는 일은 별개였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잠이 찾아왔다.
“잘 자.”
누군가와 잠을 자는 것은 발현 이후 처음이었다.
잠에 빠지며 우강희는 한주의 품에 파고들었다.
* * *
눈을 뜨니 오후 4시였다.
눈을 뜨자마자 침실 창가의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들고 있는 우강희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몇 시?”
“4시 12분.”
끄응, 신음을 뱉으며 한주는 몸을 일으켰다. 고용진의 집에서 자면 아침에 자게 되어서 눈뜨면 저녁인 적이 종종 있었다.
“깨지도 않고 계속 잤어.”
강희는 조금 걱정스럽게 다가와 생수를 건넸다.
“원래 그래. 도장에 가야 해.”
한주는 화장실로 들어가며 핸드폰으로 어딘가로 연락했다. 주소를 보내 줄 테니 그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지금 가려고?”
“응, 씻고 잔치 국수 먹고 게임 한판 하고 나가면 딱 맞아.”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계획에 강희는 웃었다.
* * *
식사만 같이하자는 어머니의 반복되는 전화에 어쩔 수 없이 우강희는 저녁 식사 시간에 딱 맞추어 집으로 갔다.
어제부터 고층에 있던 기분은 본가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서 와, 강희야.”
“……안녕.”
재민용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옆에 있던 재민석은 동갑인데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곧 본인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고개만 까딱였다.
우강희의 어머니 송지나는 오래간만에 보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강희야, 지금 오면 어떡해. 언제 오나 기다렸잖아. 전화도 안 받고.”
“7시에 식사한다고 해서 맞춰서 왔습니다.”
“아무리 식사 시간이 7시라고 했어도 좀 더 일찍 와서 엄마와 대화도 하고 그러면 좋잖아. 이렇게 애교 없다니까. 좀 이해해 줘, 민용아.”
“알죠, 강희는 그게 매력이잖아요.”
“민용이가 어른스러워서 다행이야. 둘이 참 잘 만났어.”
“식사하죠.”
다이닝룸으로 들어가니 4인 식사만 준비되어 있었다. 우천희와 아버지 우상진은 없었다.
“민용아, 민석아, 와서 앉아. 식사하자.”
“네, 어머니.”
“강희야, 아버지와 천희는 스케줄이 있어. 아버지도 강희와 같이 식사하고 싶었다면서 아쉬워하셨어. 이해하지?”
송지나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대답은 민용이 했다.
“강희도 이해할 거예요. 저희 아버지도 언제나 바쁘신걸요. 오늘도 일 때문에 약속이 있다면서 나가시는 모습을 보고 왔고요.”
“그래, 큰일 하는 사람들은 가족이 이해해 줘야 해. 민용이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 내조를 잘할 거야. 얼마나 안심인지 몰라.”
상석에 송지나가 앉자 민용이 살갑게 대답하며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이 강희의 자리였다.
“어서 민용이가 우리 집에 시집오면 좋겠다. 강희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약혼만 하다니, 각인한 민용이에게는 가혹하지. 내가 언제나 우리 민용이에게 미안해.”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저는 지금이라도 하고 싶지만 강희도 자기 삶이 있잖아요. 그래도 강희와 같이 대학 생활을 하고 싶어서 내년 3학년부터는 휴학할 예정이에요.”
“아유, 민용이가 이렇게 우리 강희를 좋아하지. 강희야, 고맙게 생각하고 약혼자를 아껴 줘야 해. 이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알아.”
송지나는 아들의 팔을 쓰다듬으며 연신 민용에게 말을 걸었다. 두 사람 외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우강희는 한주와 먹었던 잔치 국수가 생각났다. 한주는 국물을 마시며 감탄하고 양념 고기와 국수를 먹으며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하지만 강희는 그다지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감탄할 만한 음식인가, 의아하기는 했지만 한주의 탄성과 후루룩 넘기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 그릇을 다 비우게 되었다.
그때보다 반찬 가짓수도 많고 잘 먹는 음식들로 채워진 식탁인데 좀처럼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식욕이 없었다.
좀처럼 손을 움직이지 않는 강희를 보았는지 민용이 걱정했다.
“강희야, 아줌마에게 네가 좋아하는 요리로 해 달라고 했는데, 별로야?”
“어머, 강희가 별로 식사를 못 했네. 속이 안 좋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서요.”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말을 걸지 말기를 바라지만 두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도 소용없다. 냉정하게 밀어내도 두 배로 걱정하며 옆을 더 떠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5시쯤 잔치 국수를 먹어서 식욕이 없습니다.”
“같이 식사하자고 했는데 좀 참지. 그런데 국수 잘 먹지 않잖아? 국수 종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아, 그래요, 어머니? 기억해 둘게요.”
“시간은 많단다, 민용아. 차근차근 알아 가. 둘이 데이트하면서 서로의 취향을 알아 가는 재미도 있으니까. 뭘 좋아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말이야.”
“네, 어머니.”
송지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들에게 각인해 맹목적으로 좋아하며 수줍어하는 미래의 며느리는 재강원의 첫째 아들이었다. 그 옆에 앉은 재민석은 고1인 우강희와 비교해도 체격만으로도 현저히 차이가 났고 베타임이 드러났다. 매년 형질 검사를 하지만 알파로 발현할 확률은 없다고 들었다.
재씨 가문의 가주인 재강원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오메가이고 하나는 베타였다.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은 형질에서 유리한 재민용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우강희는 재씨 가문이라는 막강한 처가가 생긴다.
다이아몬드만을 뿌린 오색 보석 길이 아들 우강희의 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송지나는 그런 우강희의 어머니였다.
아들과 미래의 며느리와 같이 식사하는 자리가 즐거워 송지나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돈인 민석 군은 우리 강희와 같은 반이라고 했지?”
“네, 같은 반입니다.”
“잘 지내 줘. 강희가 말이 없고 무뚝뚝하잖아. 사람들이 다가가기 힘들어하는데 속이 깊고 다정한 아이야.”
“네.”
민석의 볼이 붉어졌다. 툭, 팔꿈치로 민용의 팔을 치며 신호를 보냈다. 못마땅한지 민용이 미간을 좁히더니 강희를 보았다.
“강희야.”
이름을 부르자마자 집사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사모님, 전화 왔습니다. 이준원 의원의 사모님이십니다.”
울리는 핸드폰을 뺏듯이 받아 송지나는 거실로 나갔다.
“마저 식사들 하고 있어. 어머, 사모님. 아, 식사 중이었어요. 아들 약혼자가 와서요. 예, 재강원 씨의. 네, 네.”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송지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다이닝룸에 셋이 있지만 조용했다.
민용은 눈치를 보며 강희에게 말을 걸었다.
“강희야, 아버지 때문에 미안해. 갑자기 베타 기숙사를 폐쇄한다고 해서…… 네가 베타 하나를 책임져 주기로 했다면서. 너무 고맙다.”
“형이 고마워할 일이 아니에요. 원해서 결정한 일입니다.”
“숨기지 않아도 돼. 다 알아.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베타 기숙사 폐쇄로 학생이 숙소를 못 구한다면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여론이 생길 수 있으니까. 어머님 말씀대로 강희가 은근 다정하고 속이 깊다니까.”
자기는 다 안다는 듯이 민용은 강희를 보았다.
강희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송지나가 일어났으니 식사는 끝났다. 그도 일어나려는데 민용이 민석을 보며 재촉했다.
“민석아,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네가 강희와 자리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잖아. 어머님도 바쁘신데 일부러 시간 내서 식사 자리를 만들어 주셨어. 어서 말해.”
민석이 뻘게진 얼굴로 민용을 노려보았다.
“형! 그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얘가 부끄러워서 그래. 강희야, 네가 보기에 민석이가 학교에서 적응을 잘 못 하니?”
“글쎄요. 2학년과는 잘 어울리던데요.”
“어머, 그래?”
민석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러면서 왜 나까지. 뭐, 덕분에 강희 너와 식사도 했지만. 강희야. 네가 민석이와 같이 다니며 신경 좀 써 줘. 부탁해.”
눈치 없는 민용도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동생 편을 들어 주었다.
“알파들 사이에서 힘들 거야. 민석이는 베타잖아.”
그 말은 민석을 더욱 작게 만들었다. 얼마나 동생을 무시하는 말인지 민용은 생각하지 않았다.
강희가 대답을 하기 전에 통화가 끝난 송지나가 다이닝룸으로 돌아왔다.
“어머, 무슨 말이니? 민석 군이 학교에서 적응 못 하니? 저런.”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지만 송지나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 강희야, 처남이니까 학교에서 민석이와 같이 어울려 줘.”
“식사 다 했으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약속이 있어 가 봐야 합니다.”
일어나 나가는데 민석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박한주는 뭐가 달라?”
갑작스러운 말에 민용과 송지나가 눈만 동그랗게 떴다. 얌전하고 조용하던 민석이 일어났다. 주먹을 꽉 쥐며 긴장을 참았다.
“박한주도 베타잖아. 그런데 그 녀석은 뭐가 다르기에 네가 그렇게 신경 써 주는데?”
“박한주면 우강희 네 룸메이트가 된다는 그 베타?”
“어머, 왜 강희가 베타와 룸메이트가 되니? 그게 무슨 소리야?”
B동 기숙사 폐쇄를 전해 듣지 못한 송지나는 처음 듣는 말에 놀랐다. 한창 기분 좋았는데 아들이 다른 사람과, 그것도 베타와 같이 방을 쓰게 된다는 말에 표정이 굳었다.
사돈인 재강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자식의 약혼자에게 이런 푸대접을 하다니, 무시당하는 기분에 참을 수 없었다.
“민용아, 이게 무슨 소리야? 너 알고 있었니?”
“아니, 어머님. 그게요.”
어쩔 줄 모르는 민용을 구해 준 사람은 우강희였다.
“제가 그러겠다고 결정한 일입니다. 베타에게 적응하는 연습을 위해서예요. 어머니는 참견하지 마세요.”
“하지만 강희야, 넌…….”
우강희의 페로몬에 대해 아는 송지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페로몬 때문에 대인 기피증 같은 증상을 보이는 우강희를 치료하려고 상담도 받고 노력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당사자가 거부하니 상담은 진척이 없었다.
그런데 자처해서 룸메이트를 들였단다.
송지나는 상대가 베타라는 말에 안심했다. 알파끼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베타니까. 설마 무슨 일이 나지는 않을 거라고 안도했다.
강희는 현관으로 향했다.
“우강희, 잠깐만.”
재민석이 따라와 팔을 잡았다. 곧 퍽, 소리가 나며 뿌리쳐졌다.
“박한주가 뭐가 다르냐고?”
더러운 것이 만졌다는 듯이 팔을 툭툭 털어 냈다.
“적어도 박한주는,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해. 너처럼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교우 관계를 형에게 부탁하지 않아.”
“그, 그 자식은 그렇게 부탁할 형도, 집안도 없잖아! 가진 걸 이용하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것도 다 내 능력이야!”
강희는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페로몬으로 사람을 죽였다면서.’
민석은 입 밖으로 나가려는 말을 참았다. 이 자리에서 말할 카드가 아니었다. 좀 더 중요한 순간에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집안의 직원이 우강희를 조사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다지 특별한 부분은 없었고 대외적으로 손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이따위 조사를 하냐고 전화를 걸어 따졌을 때 직원이 말했다.
- 조사하던 중에 형질 보호부에서 압력이 들어왔습니다.
형질 보호부는 알파, 오메가가 차별과 불합리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국가 기관이다. 전국의 알파, 오메가를 관리하지만 개인의 조사에 나설 기관은 아니었다.
- 우강희 님의 조사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믿기지 않았지만 가문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헛된 보고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 국가에서 보호·관리 감독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조사를 하면서 한 가지 특이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직원은 우강희가 페로몬으로 누구를 죽였는지 알려 주었다.
- 우강희 님의 발현일이 외조부의 기일과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