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룸메이트(2)
- 씨이발, 박한주.
으득, 이를 가는 계무원의 목소리가 인사를 대신했다. 어른이 되면서 예의는 팔아먹었는지 한주보다 한참 어른인 계무원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젠체하는 알파들과는 달랐다.
- 이 고딩 새끼, 너 이번 주에 내가 도와주었던 거 잊었어?
“VIP를 위한 서비스였잖아요.”
- 몇 년을 안 우리 사이에 이러는 거 아니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엿을 먹이냐, 응? 똥물을 끼얹을 수 있어? 박한주.
유독 이름을 말할 때는 이빨로 아득아득 씹듯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한국어로 해 주세요.”
- 저 사진 찍는 놈 말이야!
계무원이 목소리를 소리를 지르자 오지한의 목소리도 들렸다.
- 어, 무원아, 왜 그래?
- 아, 아니야. 직원이 일을 못해서 목소리가 커졌어.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해서 문제를 키우네.
- 오늘 일요일이야. 일요일에도 직원에게 전화 걸어서 일 시킨 거야? 그러지 마.
- 아니야. 이 직원은 주말 근무자야. 나 그렇게 악덕 사장 아니야. 통화 좀 하고 올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방 밖으로 나왔는지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의 말소리도 들렸다.
- 박한주, 그래, 오지한을 위해서라는 건 이해해, 이해는 하는데…….
무원이 성질을 참느라 심호흡을 했다. 대략 어떤 상황인지 눈에 그려졌다.
“사진을 잘 찍는데 영상 편집도 할 수 있대요. 사부님 채널에 도움이 될 사람이에요.”
- 그건 아는데 둘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잖아! 왜 편집을 저렇게 딱 붙어서 하냐고!
“저한테 말하지 말고 사부에게 말하세요.”
- 좋은 생각이 났어. 이 기회에 영상 편집을 제대로 배워야겠어.
“사부 도와준다고 섬네일 직접 만들겠다면서 포토샵을 배웠다가 강사가 도망갔잖아요. 안 되는 일은 안 돼요. 그냥 포기하세요.”
- 씨이발, 끊어.
오지한의 채널 영상을 좀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사진을 찍은 흥신소 직원을 소개해 주었는데 애먼 불똥이 한주에게 튀었다.
“무원 아저씨는 내가 도장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아하니까.”
하지만 한주는 지한이 서울에 남은 이유이기도 했다. 배우는 회원이 없으면 다 접고 바닷가에 가서 살겠다고 지한은 종종 말했다. 무원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살짝 덧붙이기도 했다.
무원에게 말했다가는 다 정리하고 따라올 거 같다면서 웃었다.
한주가 생각해도 계무원이라면 그럴 사람이었다. 20년을 짝사랑만 하며 버티는 집념의 사나이였다.
교문을 통과해 학교로 올라가는데 우강희가 내려오고 있었다. 학교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기에 그가 교문을 향해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수시로 택시가 오가고 있으니 교문까지 나올 필요는 없었다.
“어디 가?”
“마중.”
그는 한주가 들고 있는 보랭 가방을 가져갔다. 고용진의 냉장고에서 가져온 김치가 들어 있었다.
“방 못 찾을 수 있으니까.”
“용진이가 카스텔라 잘 먹었다고 인사해 달래. 인기 많아서 사기 힘들다면서?”
“아아.”
물론 용진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토요일도 우강희의 스위트룸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었다. 알바 시간에 맞추어 호텔로 오는데 고용진이 한주를 호출했다.
협력자에게 자세한 얘기를 해 줘야 하지 않냐고 주장하며 집으로 오라고 고집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중에 우강희의 방에 들러서 오늘은 같이 잘 수 없다고 말하니까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호텔 알바 끝나고 룸에 들르면 새벽 2시가 넘기 때문에 그대로 친구네 가기로 했는데 강희는 가기 전에 들러 달라고 했다.
기운 없는 목소리에 안 된다고 할 수 없어 그가 있는 스위트룸에 들렀더니 친구와 먹으라면서 카스텔라 두 박스를 주었다.
‘나한테 이걸 갖다주라고 했다고? 도대체 그 우강희라는 알파 뭔데? 왜 네 친구인 나한테까지 잘 보이려고 해? 수상한데.’
카스텔라는 솜사탕처럼 입에 넣자 혀 위에서 녹았다. 감탄할 만한 맛에 용진은 박스를 살피며 혀를 찼다.
‘이거, 요즘 백화점에서 줄 서서 사야 한다는 수플레 카스텔라야. 알파가 그 짓을 했다고? 한주 너한테 다른 속내가 있는 거 아냐? 막 이상한 행동 하지 않아? 허락 없이 몸을 만진다든가.’
‘야, 오메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그만해.’
곧이곧대로 알려 줄 필요는 없으니 우강희에게는 어른스럽게 과대 포장해서 전해 주었다. 우리나라 과자 포장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
“그 카스텔라 사려면 줄 서야 한다던데.”
“……조은석 씨가 사 온 거야.”
우강희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가 부끄러워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은석?”
“서포트하는 공무원.”
“아, 그 아저씨.”
생각해 보니 한주가 강희에게 들렀을 때는 9시가 넘었었다. 갈 때 들러 달라며 카스텔라를 주었으니 그사이에 준비한 것일까.
백화점 식품관에 간다고 해도 늦을 시간이었다.
‘그 아저씨가 먹으려고 산 걸 뺏지는 않았겠지?’
엉뚱한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일요일에 일 시키면 악덕 사장이래.”
“전화만 걸어도 기뻐하는 사람이야. 더 시켜 달라고 매달릴 지경이야. 마조지.”
“엄청 널 챙기기는 했어. 좀 귀찮기도 하겠다.”
동의하는지 우강희가 한숨을 쉬었다.
얘기하다 보니 A동 기숙사였다. 귀소한 알파 학생들이 한주를 보더니 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있는 알파와 수군거렸다.
“허, 베타가 진짜 A동 기숙사로 온 거야?”
“배짱이 좋네.”
“학교가 미쳤나. 기숙사를 더럽히네.”
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이물질을 바라보듯이 그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배척. 물과 기름처럼 결코 섞일 수 없는 알파와 베타.
A동 기숙사에서 지내는 베타는 4명이고 그중 세 명은 빈방을 선점했다고 들었다. 조용히 지내면 된다고 여겼는데 절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에 한주는 좀 안일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왼손.”
“응? 왼손?”
우강희를 따라 손바닥이 하늘을 보도록 들었는데 그의 손이 다가왔다.
손가락 끝부터 미끄러지듯이 들어온 우강희의 손가락이 피부를 스치며 손바닥의 오목한 부분에 닿았다. 전기가 오른 듯이 찌릿한 느낌이 목덜미까지 퍼졌다.
놀라 손을 빼려는데 우강희가 잡았다. 손바닥을 긁고 싶은데 그 잠깐 사이에 손가락을 얽으며 깍지를 껴 단단하게 잡고 한주를 끌어당겼다.
“가자.”
“어?”
그가 앞서 걷자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알파들이 기세에 밀린 사람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처음 들었던 ‘마중’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래서였나.’
첫 번째 삶에서 한주를 보호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성진은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았고 엄마 박예주에게는 미안해서 말하지 못했다.
두 번째 삶은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 바빴다. 혼자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박예주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었다.
졸업장만 따자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옆에 우강희가 서며 어느 알파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방패가 되어 주었다.
한주는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막 이상한 행동 하지 않아? 허락 없이 몸을 만진다든가.’
엉뚱하게 용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건 만지는 게 아니지. 나도 허락했고.’
엘리베이터에 한주와 강희가 타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더는 타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깍지 낀 손에 몰려 있었다. 알파들은 황당한, 경악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문이 닫히자 한주는 손을 뺐다. 우강희가 빠져나가는 손을 다시 꽉 잡았다가 곧 놓아주었다.
“고맙다.”
“긴장이 풀렸어?”
우강희의 눈이 갸름해졌다.
“……긴장하지 않았어.”
“다음에 내가 긴장하면 손잡아 줘.”
부끄러움 없이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으나 앞에 서 있던 학생들은 강희와 한주를 보고 타지 않았다. 6층에서도 문이 열렸다.
“박한주, 알파 기숙사에 어서 와.”
황치운과 이성진이 환영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차원구가 우강희 방에서 환영회를 열자고 했어.”
“난 허락한 적 없어.”
“……그럼 내 방에서 해.”
“웬일이야, 방 어지르는 거 싫어서 사람 들이지 않는 이성진이. 그럼 차원구에게 이성진 방에서 환영 파티 하자고 하면 되겠다.”
고민 없이 치운이 결정해 버렸다.
“됐어. 내 방에서 환영회 하기로 했다면서.”
그때 7층에 딱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차원구가 기다리고 있다가 강희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오, 우리 우강희가 사교성이 높아졌네! 박한주가 알파 하나를 바꾸었구나! 어서 와, 박한주. Welcome! 알파 기숙사!”
원구는 엘리베이터에서 한주만 쏙 빼내 강희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 앞에 박스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박스에서 튀어나온 파스텔의 삼각 가랜드(Galaendeu)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색이 고왔다. 크리스마스트리에나 달 만한 금색의 반짝이 줄도 보였다.
말만 환영회일 줄 알았는데 본격적이었다.
“우강희, 빨리 와서 문 열어. 환영회를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아. 빨리, 빨리.”
“뭘 준비했어?”
“간단한 간식과 웨딩 폭죽, 천장에 띄울 풍선도 있고,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한 현수막도 준비했어. 뭐 더 필요한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낀 원구는 핸드폰으로 검색했다.
“아, 축하 음악이 없구나!”
“적당히 해. 과하면 쫓겨나.”
“박한주 환영 파티인데 그러면 안 되지. 주인공은 박한주인데. 안 그래?”
원구는 능글거리며 문에 붙었다. 강희는 한주에게 보랭 가방을 돌려주고 문 옆에 있던 박스 중에 아래쪽 박스를 들었다. 반짝이 줄이 나와 있는 박스는 그대로 바닥에 두었다.
도어록에 손을 가져간 그가 원구를 보았다. 바닥에 있는 파티 준비물을 툭 발로 쳤다.
“그런데 박스에 풍선은 없던데 준비 안 했어?”
“뭐? 그럴 리 없어. 다 챙겼는데.”
원구가 박스를 열어 확인했다. 강희의 말대로 풍선이 없었는지 같은 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가져올게.”
“그리고 케이크는?”
“……케이크.”
“카페에서 팔아. 내가 사 오지, 뭐.”
치운이 자처해서 사 오겠다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몇 발짝 가다가 돌아보더니 성진에게 당부했다.
“이성진, 우강희가 우릴 들어오지 못하게 다른 곳으로 보내는데 너는 남아서 문 열어 줘야 해.”
한주는 강희가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 * *
한주의 짐은 우강희의 방에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면 된다고 들어서, 긴가민가하면서 쓰레기만 버리고 놔두었는데 책상과 함께 물건들이 이전 방과 똑같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놓았던 이어폰도 위치 그대로 있었다. 침대와 책상이 하나씩 더 생겼는데 방은 좁아 보이지 않았다.
원구가 준비한 화려한 장신구는 강희의 반대로 박스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포장해 온 샐러드와 치킨, 토마토 카프레제, 치운이 사 온 케이크를 테이블에 놓았지만 누구도 손대지 않았다.
“박한주 네가 얼마나 용자인지 모를 거야. 우리 우강희의 철옹성을 뚫다니!”
“적당히 해, 차원구. 우린 감탄을 늘어놓으려고 온 것이 아니야. 더 중요한 얘기를 해야지.”
치운이 원구를 진정시키며 본론을 꺼냈다.
“우강희와 같은 방을 쓰려면 필요한 정보야. 우강희는 주위에 베타가 오는 것을 싫어해.”
한주는 베타였다.
“말을 거는 걸 싫어해. 톡도 안 하고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그러니까 네 톡을 씹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모든 사람에게 다 그러니까.”
일요일 고용진네서 자고 점심시간이 지나 일어나 보니 톡이 와 있었다. 우강희가 보낸 것만 8개.
[박한주]
[일어났어?]
[같이 점심 먹을까?]
[아직 안 일어났나.]
[학교에 갈 때 같이 가자.]
[4시에 전에 만났던 곳에서 보자.]
[일어나면 전화해.]
[메시지 취소]
용진의 어머니가 양평까지 바래다주어 강희와 같이 학교까지 가는 일은 취소되었었다.
성진도 한마디 보탰다.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것도 싫어해.”
종종 우강희가 손을 잡았다. 간혹 머리를 쓸어 주기도 했다. 스위트룸에서 잘 때 잠깐 잠이 깬 적이 있었다. 몸이 따끈따끈해서 눈을 떴더니 강희가 절 안고 자고 있었다.
‘꿈은 아닌데.’
한 침대에서 잤으니 무심코 옆에서 자는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다.
“뭐, 이 모든 문제에서 박한주는 예외겠지. 하지만 우강희는 우강희고, 우리는 별개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원구는 낮게 웃으며 한주의 머리 위를 보았다. 한주가 앉은 소파 뒤에는 벽에 기댄 강희가 서 있었다.
“룸메이트가 되는데 네 친구들 허락도 필요해?”
“아니.”
“허락이 아니라 같이 다닐 거면…….”
“같이 다니지 않아도 돼.”
조금 놀릴 생각에 원구가 웃으며 조건을 말하려는데 한주는 딱 잘라 거절했다.
“우강희와 방을 쓰는 것과 같이 다니는 일은 별개. 자, 다음 용건.”
원구가 별개라고 했던 말을 한주는 그대로 돌려주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당황하는 원구의 표정을 보며 한주는 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에 넣었다. 너무 달지 않아 제법 괜찮아 다시 포크를 푹 찔러 넣었다.
“같은 반에 같이 방까지 쓰면 우리와 어울리게 될 텐데 별개라니? 그게 말이 돼? 잘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생각하지 않아.”
“앞으로의 기숙사 생활을 생각해 봐야지! 평화롭고 잘 지내고 싶으면.”
“혼자서도 충분해.”
“혼자……. 그게 아니라!”
잘 보여서 아부라도 하라고 장난을 치려는데 몇 번을 찔러도 한주는 꿈쩍하지 않았다. 원구가 속이 터져 가슴을 치는데 한주가 드디어 알아차렸다.
“아, 그거구나!”
“그래, 그거야! 그거, 그거!”
기쁘게 동조하며 원구가 논점을 말하려는데 이어지는 말에 입이 막혔다.
“텃세!”
“……텃세?”
성진이 그사이 검색을 했는지 뜻을 알려 주었다.
“……텃세.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뒤에 들어오는 사람에 대해 가지는 특권 의식. 뒷사람을 업신여기는 행동. 검색 엔진 국어사전 발췌.”
그리고 큭, 마지막에 짧게 웃음을 붙였다.
“텃세. 친구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해 질투하는구나. 아, 알겠어. 다 이해했어.”
“뭐?”
툭, 포크를 앞접시에 놓고 한주는 차원구, 황치운, 이성진을 훑어보며 말하면서 하나씩 손가락을 들었다.
“첫째, 우강희와 엮일 생각 없음. 그러니 너희들과 크게 부딪힐 일도 없음.”
“박한주?”
“둘째, 내가 너희로 인해서 학교생활을 편히 하려는 덕을 보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됨. 그럴 생각 없음.”
허세라고 생각하기에는 한주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그동안 보아 온 성격으로도 진심으로 들렸다. 차원구는 우강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한주가 앉은 소파 뒤편에 서 있으면서 허튼소리를 하지 않게 감시하고 있었다. 한마디씩 뱉으며 한주가 선을 그을 때마다 차원구를 보는 그의 눈이 매서워졌다.
“셋째, 이제 이 방은 내 방도 되니까 그만 꺼져 줬으면 좋겠음. 네가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충분히 알았으니 얼굴 그만 볼 수 있게 차원구, 하우스! 방으로 돌아가.”
휙휙, 개를 쫓듯이 한주는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이제 다 놀아 주었으니 그만 가라는 뜻이었다. 한 번도 그런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원구는 입을 뻐끔거렸다.
“너, 와, 너 지금 날…….”
“차원구, 네가 발렸어.”
원구의 어깨를 꾹 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치운은 한주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차원구가 장난기가 심해. 우강희 룸메이니 앞으로 우리와 어울릴 일도 많은데 잘 지내자.”
“나도 장난이야.”
가볍게 악수를 하고 손을 놓았다.
“이래서 베타가 마음에 안 들어. 자기 능력도 파악 못 하고 우선 받아치기부터 하지.”
“원한다면 앞으로 무시해 줄게.”
“와, 한마디도 안 져. 악수는 안 해.”
“나도 할 마음 없어.”
같은 반에 이름도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악수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성진은 생각이 다른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별장 빌려준다는 말은 유효하니 우강희와 맞지 않으면 말해.”
“그건 무슨 소리야? 이성진이 별장을 빌려주다니?”
무심하게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강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와, 우리 성진이가 박한주에게 그런 제안도 했단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귀찮은 일 싫어하는 우리 성진이가?”
“약점 잡혔나?”
“……호의야.”
“호의? 우리 성진이가 호의? 중딩 때 내가 발에 깁스해서 목발 짚고 다닐 때도 귀찮다고 부축도 하지 않았던 네가 호의?”
“그 제안은 거절했어.”
소란이 커질 거 같아 한주가 끼어들었다. 강희의 손에 잡힌 소파 가죽이 빠득빠득 소리를 내서 거슬리기도 했다.
“거절? 거절당한 일을 다시 말했다고? 우리 성진이가?”
원구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이번 말에는 놀랐는지 치운의 눈이 커졌다. 성진은 미간을 좁히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들이 끼어드는 통에 악수를 하지 못했다.
“이성진, 너 진심이구나.”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변해? 이제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고 그렇게 변하다니!”
“베타가 취향이었어?”
“나가.”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며 차원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소란이 커지자 우강희가 드디어 폭발했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한주는 두리번거리며 얼굴들을 확인했다.
강희는 복도로 나가는 현관문을 열었다.
“다 나가.”
“우리 우강희가 박한주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네. 첫날밤인데 우리가 배려해 줘야지. 가자, 가.”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원구는 치운을 팔뚝으로 툭 치며 나갔다. 이성진은 지그시 한주를 보았다.
“……진심이야.”
낮은 목소리는 한주에게만 들렸다. 원구의 말에 대한 대답인지, 아니면 별장을 빌려준다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성진, 나가.”
성진까지 나가서 강희가 문을 닫으려는데 원구가 재빠르게 발을 끼워 막았다. 얼굴만 쏙 내밀어 한주에게 소리쳤다.
“첫날밤 잘 보내라, 박한주!”
음흉한 웃음소리가 방에서 멀어졌다.
“와 봐, 우강희. 규칙을 정하자.”
“규칙?”
“청소는 직원이 알아서 해 주고 정리는 각자 자기 구역을 알아서 하면 되지만 그래도 앞으로 둘이 잘 지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하잖아. 서로에게 이것만은 지켜 달라는 주의점 같은 것.”
강희는 한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앞으로 앞접시와 포크를 놓아 주었다.
“먹어.”
테이블에 있는 치킨 전단지를 뒤집어 펜을 쥐고 한주는 ‘룸메이트 규칙’이라고 썼다.
“먼저 말해 봐.”
“아침 식사 같이하자.”
“안 돼.”
단박에 거절하자 강희의 표정이 굳었다. 아침 식사만큼은 한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침에 잠이 많아서 아침은 같이 못 먹어. 그리고 그건 서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니잖아.”
“아침잠이 많아? 저혈압?”
“그렇지는 않은데 유독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어서 알람은 여러 개 맞춰. 그래도 지각을 한 적은 없어. 넌 몇 시에 일어나?”
“5시 반.”
한주의 표정이 굳었다. 5시 반이라니, 한주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일어나서 뭐 해?”
“가볍게 운동하지.”
“뭐, ……다행이다. 알람 소리 때문에 너 깨울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생각이었네. 알람을 7시부터 10분 간격으로 울리게 해 두었거든.”
“깨워 줄게.”
“아니, 괜찮아. 알아서 일어나니까 내버려 두고 등교하면 돼.”
수면은 두 번째 삶이 시작된 이후 제일 골칫거리가 되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 할 경우 정신력으로 일어났지만 그 후 3일 정도는 정신을 못 차렸다.
박예주와 둘이 온갖 실험을 다 해 보고 ‘지각만 하지 말자’로 결론을 내렸다.
룸메이트가 생기면 다른 부분은 무던하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알람이 가장 문제였다. 아침에 알람으로 상대방을 짜증 나게 할 수 있으니까.
다행히 강희는 일찍 일어난다니 한시름 놓았다.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싶어 한주는 덧붙였다.
“그동안 아침에 일어날 때 꽤 고생해서, 알람 여러 개로 일어나는 생활이 익숙해졌어. 알람 소리가 거슬릴 수 있으니 미리 사과할게. 아침에는 일찍 학교로 가는 게 속 편할 거야.”
“수면 검사는 해 봤어?”
“중학교 때 검사했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나왔어. 아주 푹 잘 잔다고 나왔지.”
“그럼 다행이다.”
우강희는 알람 소리보다 한주의 건강을 생각했다. 알람 소리를 직접 겪고 나면 달라질 수도 있지만.
‘괜찮은 녀석이네.’
한 가지에서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고른 숨소리와 함께 느리게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강희는 한주의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몸을 기대고 잠든 한주를 보았다.
토요일, 처음 같이 잤고 오늘이 두 번째 밤이었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잘 자라는 인사와 함께 누웠다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하자 몸을 돌려 한주를 보았고 이내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페로몬 무감증.’
일요일, 조은석에게 연락해 급히 페로몬 무감증이 있는 알파를 섭외했다. 조은석은 우강희의 말을 듣고 빠르게 움직였고 그날 점심때 밀폐 연구실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정말 페로몬 무감증의 환자에게 우강희의 페로몬이 통하지 않는가.
결과는 실패였다.
‘컥, 커헉!’
흙바닥에 던져둔 물고기처럼 몸이 경련하며 거품을 흘리는 남자를 보며 강희는 움직이지 못했다.
단지 5퍼센트를 열었을 뿐이다.
실험에 참가한 알파는 쇼크가 왔다. 페로몬 차단하는 안전복을 입고 대기하던 연구실 사람들이 재빨리 환자를 데려갔고 페로몬 정화를 위해 에어가 쏟아졌다.
마음은 참담했다.
‘과민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페로몬 무감증이라고 해서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페로몬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기관이 고장 난 사람일 뿐입니다. 조절할 수 없으니까 타인의 페로몬에 무방비가 되어 쇼크를 일으킨 겁니다.’
‘참가한 사람은 괜찮습니까?”’
‘네, 빨리 조치해서 큰 문제는 없고 이미 사전에 동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충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강희를 담당해 온 사지석 박사는 태블릿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말씀하셨던 페로몬 무감증의 베타 환자는 박한주 환자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어떻게? 박한주를 아십니까?’
‘페로몬 무감증은 국내 전체 100여 건도 안 되지만 그중에서도 베타가 그 병에 걸리는 사례는 세 건입니다. 희귀 케이스죠. 세 건 중 한 명은 유아 때 사망하였고 다른 한 환자는 작년에 심장 마비로 죽었습니다. 열 살이었죠. 남은 한 명, 박한주 환자는 연구가 필요한데 보호자의 거부로 초등학교 때 이후 진료를 받지 않았다고 나오네요.’
유아 때 사망, 열 살에 심장 마비.
우강희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페로몬 무감증 때문입니까? 박한주는…… 건강합니다. 그냥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해외의 사례에서 페로몬 무감증이면서 건강한 베타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8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합니다.’
침통한 표정의 강희를 보며 사지석 박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강희 님의 페로몬이 듣지 않았다니 대단히 흥미로운데, 같이 오셔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우려하는 부분을 이야기했다.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혹은 우강희 님의 페로몬에 노출된 양이 많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사례가 없어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페로몬에 의해 쇼크까지 온 사람을 봐서 충격이 컸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기에 더 그랬다.
우강희는 잠든 한주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코 밑에 손을 가져가 숨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닿으면 위험할까 봐 주먹만 꽉 쥐었다.
* * *
재민석은 옷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옷차림을 확인했다.
“오늘부터는 우강희, 이성진과 어울릴 테니까.”
식사 때 면전에서 거절당했지만 괜찮았다. 말을 해 두었으니 최소한 강희가 저를 의식할 것이다. 거절은 했지만 약혼자인 민용의 부탁을 무시할 리 없다.
아버지 재강원은 로열 알파고 어머니는 프라이머 오메가다. 두 사람의 훌륭한 유전자를 이어받았다. 그러니 조만간 자신도 알파로 발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민석은 숨을 가다듬고 교실 문을 열었다.
다른 알파들처럼 자신감을 가지며 여유롭게 보일 수 있도록 자세를 바르게 했다. 교실로 들어가는데 차원구와 황치운, 그 외 몇몇 동급생이 우강희가 아닌 다른 자리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박한주의 자리였다.
민석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무표정하게 꾸미며 강희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인사하려는데 원구가 먼저 강희에게 말을 걸었다.
“야, 우강희. 도대체 밤에 한주에게 뭘 어쨌길래 이 녀석이 등교하자마자 이렇게 계속 자?”
“시끄러워. 좀 저리 가. 시끄러워서 못 자겠잖아!”
참다못해 한주가 버럭 짜증을 내자 원구는 와하하, 웃었다.
“일어났네? 간밤에 둘이 뭘 했어? 우리 우강희는 말이 많은 타입이 아닌데. 불 꺼, 자자, 그 두 마디는 했겠지? 응?”
학생들이 우강희 눈치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관심 없는 듯 돌아앉아 있는 학생들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어깨를 들썩였다.
딱 고1 수준의 모습에 한주는 짜증이 올라왔다. 졸린데 자지 못하게 옆에서 계속 말을 거는 원구에게 한마디 했다.
“적어도 너보다 몸은 좋아.”
다시 주변에서 웃으며 난리 쳤다.
“무슨 소리야! 내 몸이 어디가 어때서! 네가 내 몸을 제대로 보기나 했어? 봐! 제대로 보여 줄게!”
“야, 볼 거 없어. 그냥 있어.”
“차원구 좀 말려!”
그 소란 때문에 민석은 우강희의 근처도 가 보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안 봐도 너보다는 낫지.”
한주가 원구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음을 날리자 주변에서 다시 웃었다. 알파들과 거리감 없이 웃고 떠드는 한주의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누구도 한주가 베타라고 차별을 두지 않았고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였다.
재민석은 얼굴이 뜨거워졌다.
우강희가 한주와 룸메이트가 되었지만 잘 지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최근 그가 한주에게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같이 살면 또 다르니까. 그런데 한주는 우강희의 친구들과도 거리감이 없었다.
일순 우강희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는 눈인사조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재민석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다급히 교실에서 벗어났다. 달리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달리는 것은 경박해 보인다며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들어 왔고 평온하게 등교하는 학생들의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교실과 멀어지자 언제나 심부름을 시키는 2학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2학년이 민석에게 전화를 건 적은 있어도 먼저 건 적은 한 번도 없어서인지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 건방지게 용건이 있으면 교실로 찾아올 것이지 어디서 전화질이야? 맞고 싶어?
“이창원 선배는 언제 퇴원해요?”
민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한주를 눈앞에서 치워 버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별거 아닌 베타가 야금야금 저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분에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2학년은 짜증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 이 새끼가 짜증 나게 뭐라는 거야. 이창원이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적어도 네가 전화해서 찾았다는 건 확실히 전해 줄 테니까 기대해!
“지금 박한주가 얼마나 기고만장하게 다니는 줄 알아? 우강희 룸메이트가 되었어! 언제까지 내가 그 꼴을 봐야 하는데!”
- 이 새끼가. 그 자식 옆에 우강희가 있어! 박한주와 엮인 성정원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 지 손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새끼가 누굴 부리는 사람 취급이야!
“씨발,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었으면서 그딴 거 알려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 하, 이제는 좆만 한 것이 우습게 보네. 너 기다려!
전화가 끊기자 아차 싶었지만 재민석은 더는 기숙사에 살지 않았다. 2학년이지만 재강원 이사장의 아들을 어쩌지는 못한다.
재민석은 핸드폰을 던져 버리려다 꾹 참았다. 모든 운이 가기라도 하듯이 한주는 다 잘 풀리고 있었다.
노력도 안 하는데.
“제발…….”
이를 갈았다. 한주만 치워 버릴 수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박한주만 없애 버릴 수 있다면.
* * *
시선을 들고 보니 수업이 끝나 있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한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후가 되어서 겨우 잠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오전 내내 원구는 한주를 놀렸다.
전부 우강희 때문이다.
한주는 교과서를 정리하는 강희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전날 밤에 아침잠이 많아 늦게 일어난다고 말을 했다. 양해도 구했고 사과도 미리 했다.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10분 간격으로 다섯 개를 맞춰 둔 첫 번째 알람이 울릴 때부터 강희는 한주를 깨웠다.
숨이 넘어가는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하려는 듯이 간절하게 흔들었다.
비몽사몽에 먼저 가라고 말했다. 10분마다 알람이 울리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아마도 말했을 것이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잠을 자기 위해서이니 한주는 분명 잠결이라도 설명을 했을 텐데 강희는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계속 깨웠다.
그런 친절까지는 바라지 않는데!
욕실에 들어가 멍하니 서 있자 우강희는 감시를 했다. 문을 열어 놓고 계속 재촉해서 오래간만에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출 수 있었는데 졸려서 한 숟가락밖에 먹지 못했다.
“저녁 먹으러 가자.”
“박한주, 뭘 꾸물대? 어서 일어나. 짐 챙길 게 뭐 있다고 그렇게 느려?”
원구가 한주의 책상 옆에 서서 발끝으로 탁탁 바닥을 두드렸다.
아침에도 그러더니 우강희는 계속 한주를 챙겼다. 식사뿐만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는 한 번씩 말을 걸었다. 수업 중에는 간혹 한주를 물끄러미 보기도 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알파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강희의 기행에 같은 반 학생들은 대부분 ‘조만간 저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알파들이 가끔 재미로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우강희의 행동도 그런 것으로 여겼다.
“……배고파.”
이성진도 한주를 재촉했다. 원구가 한주의 가방을 들고 성큼 뒷문으로 가 버려서 그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
가방만 돌려받으려고 했는데 그들은 식당으로 갔고, 한주도 식사해야 했기에 그들 옆에 앉았다.
“뭐? 그 호텔에 있었어? 근처 갈빗집에서 식사한다고 호텔 앞을 지나갔었는데. 출판 기념회 연다고 현수막도 봤어.”
“뭐야, 진짜 가까이 있었네. 알았으면 너나 만날걸. 우강희 얼굴만 보고 나와서 할 일도 없었는데. 핸드폰 줘 봐.”
건네주기도 전에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가져가 원구는 번호를 입력했다. 멋대로 다른 이들의 번호도 눌렀다.
“어? 우강희 번호는 있네? 그래도 룸메라고 벌써 번호를 교환했네. 이러면서 왜 우리 번호는 저장 안 했어?”
원구는 한주의 전화로 각각의 번호를 한 번씩 전화를 걸어 통화 이력을 남겨 두었다.
“차원구, 너 개인 정보를 그렇게 멋대로 가르쳐 주어도 돼?”
“어차피 박한주가 먼저 전화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치운이 기가 막혀 한마디 하자 원구는 예리하게 사실을 말했다. 한주도 자신이 먼저 전화할 일은 없을 거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내놔.”
통화 기록에는 현재 한주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의 이름이 차례대로 올라와 있었다.
빠른 솜씨에 한주는 혀를 찼다. 들고 있으면 또 원구에게 가족과 친구 번호까지 털릴까 봐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큰 손이 한주의 핸드폰을 뺏어 갔다. 어이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우강희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내놔.”
한주는 핸드폰을 뺏었다.
‘남의 주소록을 왜 노려봐.’
* * *
방으로 돌아가는데 2학년 한수원이 방 앞에 서 있었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가 한주와 우강희를 보며 인사했다. 항상 놀리는 듯이 웃는 얼굴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는 표정이기도 했다.
“박한주, A동 기숙사에서 지내는 건 어때?”
“이제 하루예요.”
“자, 학생회 임원 신입 환영회 초대장.”
검은 종이봉투를 받았다.
열어 보니 2주 뒤의 금요일 저녁이었다. 학생회장 우천희의 당부도 있었고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하기 위해서라도 참석해야 한다.
우강희가 초대장을 가져가 확인했다.
“그날 일이 있지만 스케줄 조정할게요.”
용건이 끝나 수원이 가려는데 강희가 질문을 던졌다.
“드레스코드는 없습니까?”
“딱히, 편하게 와도 돼.”
“졸업한 학생회 선배들도 올 텐데 편하게 간다고 해도 최소한 갖추어야 할 복장이 있겠죠.”
“……정장.”
한수원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 우강희를 흘겨보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의외네.’
우강희가 베타를 룸메이트로 들였다고 들었을 때는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달랐다. 한주가 망신당하지 않도록 드레스코드까지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굳이 이 일을 우천희에게 말해 줄 마음은 없다.
* * *
방이 엉망이었다. 마음 편하게 B동 기숙사를 나와 산 지 일주일이 되었다. 민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물건을 내던지며 성질을 냈다.
“왜 안 받는 거야?”
재민석은 초조하게 방을 오갔다. 핸드폰에서는 신호음만 들렸다. 손톱 끝이 엉망이 되는 것도 모르고 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어머니의 훈육으로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치기는 했지만 초조해지거나 불안해지면 어김없이 나왔다.
알파 사회에서는 잘 관리된 신체만큼 정신도 중요했고, 불안으로 물어뜯어 짧아진 손톱은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한 증거와 같아 약점이 된다.
재민석도 그걸 알기에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불안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 어, 왜 이렇게 전화하는 거야? 무슨 급한 일 있어?
드디어 재민용이 전화를 받았다. 민석의 얼굴에 겨우 붉은 기가 돌았다.
“뭐 하는데 전화 안 받아?”
- 청평 와 있어. 무슨 일인데?
“그게…….”
막상 말을 하려니 짜증이 났다.
그들은 살가운 형제는 아니다. 형인 재민용은 오메가였고 재민석은 베타지만 알파로 발현할 거라 믿었기에 형을 종종 무시하며 비하했다. 말로 상처 입혔지만 형제라고 민용은 민석이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우강희에게 전화 한 번만 해 줘. 형이 나 챙겨 주라고 부탁했는데 오늘 종일 다른 베타 자식만 챙기고 나는 신경도 안 썼어. 형은 약혼자잖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처남인데.”
말로 내뱉으니 오늘 하루 느꼈던 설움이 훅, 속에서 올라왔다. 언제나 민석에게는 비아냥거리던 차원구도 우강희의 룸메이트가 되었다는 이유로 한주를 챙겼다.
이성진도 그들 무리에 받아 주었다.
“인사하려고 다가갔는데 말도 못 붙였어! 형이 부탁까지 했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 형이 다시 강희에게 전화해서…….”
- 민석아.
한숨과 함께 민용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민석의 턱에 꾹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 재강원이 이름을 부르며 한숨 쉬는 모습이 생각났다.
재강원은 자식을 야단친 적이 없었고 칭찬한 적도 없었다. 자식은 군식구에 불과했다.
- 너도 이제 고1이야.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 동급생인 강희에게 말 한 마디 못 붙여 형에게 징징대지 마. 요즘 초딩도 너처럼은 안 해.
전화는 끊겼다.
“이!”
민석은 전화기를 던지려고 높이 쳐들었다가 푹신한 소파 위에 던졌다. 참지 못하고 쿠션을 잡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물건들을 부쉈다.
“도와준다고 했으면 끝까지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오메가 주제에 형이랍시고 충고질이야! 자기도 우강희에게 말도 못 붙이면서! 내가 알파만 돼 봐! 페로몬으로 눌러 줄 거야! 고개도 못 들게 눌러 줄 거라고!”
성질을 부리다가 곧 헉헉대며 주저앉았다.
우강희가 한주와 같이 식사했다. 원구는 핸드폰을 뺏어 가 번호도 알려 주었다.
재민용의 핸드폰에서 몰래 빼내 겨우 알게 된 우강희의 번호를 한주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이게 다 박한주, 그놈 때문이야!”
한주를 괴롭히는 것만으로 충분했는데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 버리고 싶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당장은 할 수 없다. 우강희 때문에.
“아직 시간은 많아.”
심호흡하며 재민석은 도우미를 불렀다. 방으로 들어온 도우미는 놀라지 않고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학기 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 * *
“언제 철이 들지.”
“동생?”
뒤에서 안아 오며 목덜미를 애무하는 입술에 재민용은 탄성을 터뜨렸다. 뜨거운 알파의 페로몬이 넘실대며 몸을 어루만졌다. 구석구석으로 들어와 본능을 건드리는 페로몬은 러트 직전이라 더 뜨거웠다.
히트사이클이라 욕구가 들끓었다.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다루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약혼자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을 부른 비참함은 욕구에 덮어졌다.
알파의 입술이 자근자근 목덜미를 깨물자 민용이 몸을 돌려 알파의 뺨을 때렸다.
“무슨 짓이야? 그런 짓은 하지 마!”
알파가 오메가의 목덜미를 깨무는 행위는 상대를 지배했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친밀하고 주로 각인한 대상을 소유했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각인한 대상에게만 하는 행동은 아니다.
“말했지, 노팅은 안 돼.”
피임약은 먹었지만 민용은 다시 확인했다.
“걱정 마. 하지 않으니까.”
서늘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알파가 웃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목을 간지럽히며 입술이 움직였다. 쇄골을 빨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알파의 머리에 손을 찔러 넣었다. 민용은 다리를 벌려 상대의 허리에 감았다.
그나마 우강희와 입매가 비슷한 알파를 불렀다. 눈이나 얼굴 생김이 비슷하길 원했지만 업체에서 보낸 사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우강희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강렬하다 못해 아무 생각도 들지 못하게 지배해 버리는 폭발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를, 우강희 외에는 본 적이 없다.
좋은 집안의 여러 알파들과 선을 보았지만 우강희만 한 알파는 없었다. 아쉬움에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그럴 때 사고라지만 그에게 각인했다.
그 사람의 페로몬에만 흥분하며 영향을 받는 각인. 한 사람에게 온전히 소속되었다는 안심에 민용은 잠시 행복했었다.
“하아…….”
유실을 빨며 건드리는 혀 놀림을 느끼자 뒤가 젖었다. 우강희가 아니라도 민용의 몸은 흥분해 젖어 갔다.
* * *
우강희는 침대에 기대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지만 귀는 한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됐어. 끊어. 알파가 되었다고 친구를 등한시했잖아.”
- 미안해, 한주야. 너무 힘든 걸 어떡해. 자고 일어나면 막 몇 센티미터씩 크고 근육도 아프고 요즘은 걷는 연습만 계속하고 있고 페로몬도 제멋대로 나오고…….
“그래도 전화는 했어야지.”
전화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알파로 발현해 유명해진 김지영은 발현 이후 친구인 한주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문자로 연락을 했는데 드디어 전화가 왔다.
한주는 톤이 달라진 친구의 목소리에 “아저씨?”라고 불러 지영을 울렸다.
- 무서웠단 말이야…….
“알파가 됐다고 내가 때리겠냐? 무섭긴 뭐가 무섭다고 연락을 그렇게 딱 끊어?”
- 덩치도 커지고 목소리도 이상해지고…… 네가 싫어할까 봐 무서웠어. 내 목소리도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잖아.
화를 내지만 이미 얼굴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항상 무덤덤한 표정의 한주가 친구와 전화하며 다양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강희는 아예 몸을 돌려 대놓고 보았다.
“넌 이제 고용진에게 약점 잡혔어. 그 녀석이 얼마나 이 일을 벼르고 있는지 모르지? 너 빨대 꽂혔어.”
- 히잉, 한주야, 어떡해…….
굵은 남자 목소리로 히잉이란 소리를 하니 소름이 돋았다.
김지영이 어떻게 변할지, 어떤 목소리가 될지 몰랐다면 한주도 이렇게 빨리 친구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지영의 번호로 전화가 왔다고 해도.
자신이 변해 무서웠다는 말이 유난히 귀에 맴돌았다.
‘그래서 전화를 못 하고 멀리했던 걸까.’
친해도 어긋나기 시작하자 사이는 점점 벌어지게 된다. 처음에 지영은 변한 모습 때문에 전화를 걸지 못했고, 한주는 한주대로 질투하고 서운해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파로 변한 친구를 보고 질투가 심해져서 더욱 멀어졌지만 지영은 자신이 알파로 변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서운해졌을 것이다.
이제야 오해가 풀렸다.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우는소리를 내며 계속 사과하는 지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생각하더니 책상 스탠드를 끄고 핸드폰과 충전기를 챙겼다. 침대로 다가가 베개를 손에 들었다. 방을 나가려는데 강희가 따라오려는 듯이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어디 가?”
“밖에서 통화하다 올게.”
“베개까지 들고?”
“안고 있기 좋으니까. 푹신하잖아.”
그렇게 말하고 한주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다음 날, 한주는 아침에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었는데 이미 등교했어야 할 우강희가 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잤어?”
외박한 남편을 추궁하는 부인 같아 한주는 눈을 끔뻑이다가 대답했다.
“……통화하다가 잠들어 버렸어, 비켜. 교복 입어야 해.”
“들어오지 않아 기다렸어. 핸드폰도 받지 않고.”
한주는 핸드폰이란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침에 알람을 끄면서 확인한 부재중 전화 때문에 깜짝 놀랐었다. 조금 남아 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날 정도였다.
“내 아침잠에서 신경 꺼!”
“어디서 자고 왔냐고 물었잖아.”
“상관하지 마! 여기서 자면 또 아침에 깨웠을 거잖아. 그리고 너, 지금 바가지 긁는 아내 같아.”
한주는 그가 아침에 깨워서 밖에서 잤다며 오히려 강희에게 화냈다.
“아침에 깨워서 밖에서 잤다고? 고작 그것 때문에?”
“고작? 고작이 아니야! 나한테는 그 아침잠이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 엄마도 포기한 일을 네가 왜 하냐고! 오전 내내 조는 꼴 못 봤어? 사람마다 체질이 다른데 왜 너랑 같은 패턴이길 바라는 거야?”
다른 일이라면 시큰둥하게 넘어갈 수 있다. 2학년에게 괴롭힘당하고 계단 내려가다가 갑자기 양동이째 물을 맞아도 괜찮다. 그런 것이야말로 고작 그런 일이지만 아침잠만큼은 달랐다. 원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체질이었고 몸이 그러니까, 자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학년들도 오갈 수 있는 기숙사야. 그러다 위험할 수도 있어.”
“내가 알아서 해.”
한주는 그가 미간을 찌푸리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교복을 입기 위해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그래서 계속 밤에는 밖에서 자겠다고?”
강희가 으르렁거리듯이 목을 울렸다.
“그래. 잠이라도 푹 자고 싶으니까. 네가 아침에 깨우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나도 이러지 않아.”
알파와 지내도 적당히 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우강희가 힘들 거라고 여겼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침잠이 많은 한주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러 깨우는 쓸데없는 수고까지 했다.
말씨름하느라 시간이 줄어들어 빨리 교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그렇게 룸메가 일찍 일어나길 바라면 차라리 내가 이 방을 나갈게. 그럼 되잖아.”
마음이 급한 한주는 강희가 다가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깨가 잡혀 끌어당겨졌다. 육탄전을 한다고 생각해 팔꿈치로 치려고 몸을 돌리는데 머리카락이 목에 닿았다. 목덜미에 이빨을 세우며 우강희가 물었다.
“!”
너무 놀라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살을 찢고 들어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국이 남을 만큼의 강함이었다.
순간 놀라서 팔꿈치를 휘둘렀는데 우강희는 여유 있게 피해 버렸다. 물린 곳이 화끈거리며 욱신거렸다. 목에 묻은 타액을 닦으며 한주는 기가 막혀 강희를 보았다.
“간단히 습격받으면서 알아서 한다고?”
“야! 이…….”
“빨리해, 시간 얼마 없어.”
“야아!”
우강희는 열받아 소리 지르는 한주를 놔두고 먼저 방을 나갔다.
* * *
“방이 있어도 들어가 자지 못하다니.”
엄연히 말하면 방에서 잘 수는 있었지만 이른 아침에 깨워 대는 통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결국 한주가 밤마다 잠자리를 찾아다니며 외박을 하고 있다.
“룸메를 바꿔야 해. 다른 방을 찾든가.”
설마 제 발로 도망 다닐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무심코 뒷덜미를 손으로 주물렀다. 우강희가 물은 이후 가끔 물린 곳이 뜨거워질 때가 있었다.
한주는 반으로 가기 전에 담임인 이무열을 찾아갔다. 그러나 무열의 얼굴을 보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최근 몸이 좋지 않아 보였는데 오늘 더 유난히 창백했다. 핏기가 없고 입술은 푸르스름하게 느껴질 정도로 색이 탁했다. 눈가가 움푹 꺼져 있어서 당장 입원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때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른 반 담임이 옆을 지나갔다. 이무열은 “욱” 약하게 소리를 내며 코와 입을 가리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 * *
“얼굴이 안 좋아 보이나. 최근 속이 좀 좋지 않아서 그래.”
입덧이 시작되었다. 유난스러운 애인지 약간의 과일만 겨우 넘길 수 있었다. 그래도 무열은 버틸 수 있었다. 아이의 투정이니까.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따스한 감성에 제대로 먹지 못해도 허기는 크지 않았다. 사표를 내서 후임자가 들어올 때까지 학교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학교 일로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다.
“병원 가세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세요.”
“걱정해 줘서 고맙다.”
무열은 웃어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강희와 지내는 건 괜찮고?”
“아, 그냥 서로 맞추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잘 지내서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문제 있어? 아침부터 찾아오고.”
한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의 무열을 보자 다른 알파의 방을 알아봐 달라고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걱정을 더할 수 없으니 며칠만 더 지내보자.
“아뇨,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해 주려고요. 선생님 걱정 많이 했으니까요.”
“고맙다. 교실로 돌아가. 곧 수업 시작하겠다.”
“네.”
당장 한주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다.
* * *
한주는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식당으로 가 빠르게 식사하고 어딘가로 가서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반으로 돌아왔다. 자고 오는지 뒷머리가 붕 떠 있고 눈에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용해 보였다.
우강희는 한주가 나가면 따라갔지만 매번 행적을 놓쳤다.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가는 한주를 보며 차원구는 황치운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이 어디서 자는지 찾았어.”
한주가 밤에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치운이 보았다고 하자 원구가 흥미를 보였다. 호기심을 보이더니 직접 움직여 한주가 자는 곳까지 찾아냈다.
우강희는 식사하다 말고 그들을 보았다.
“어디야?”
“양호실. 그 녀석 아침잠이 많은지 얼굴 찔러도 못 일어나더라.”
치운이 그렇게 시간이 남아도냐는 뜻으로 원구에게 물었다.
“아침에 찾아다녔어?”
“어디서 자는지 궁금하잖아.”
“……왜 양호실에서 자는데?”
이성진도 궁금해했다. 타인의 일에 관심이 없으면서 기숙사 투어에도 같이 다녀 주며 한주에게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우강희도 한주가 성진에게 에너지바 다섯 개를 주는 모습을 보았다. 다섯 개는 과하다고 그도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원구가 답했다.
“우리 우강희가 다른 녀석과 같이 자지 못하니까 배려해 주는 거지.”
물론 사실과는 다른 추측이었다. 알파가 불편해서라는 게 당연한 이유였는데 답이 달랐다. 강희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의 시선에 원구는 왜 보냐며 턱을 까딱였다.
“왜 그 고생 하며 기숙사에 있으려는 거지?”
“다른 방을 찾아야겠네. 그렇게 지내면 둘 다 불편하잖아.”
치운은 고개를 움직여 한 테이블 떨어져 혼자 식사하는 민석을 보았다.
“알파가 되려고 안달하는 녀석도 A동 기숙사에서는 살지 않아. 베타에게는 힘든 환경이야.”
그때 원구가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끼어들었다.
“박한주라면 같이 지내도 괜찮을 거 같아. 같이 방 쓰면 심심하진 않겠어. 그냥 내 방으로 이사하라고 할까?”
“관둬. 같이 방 쓰는 일이 쉬운 줄 알아? 룸메이트 되면 절친한 친구와도 싸움 나 등 돌려.”
치운이 말렸지만 원구는 귓등으로 흘렸다.
“박한주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 녀석 2학년에게도 깡으로 버티잖아. 그 정도 성격이면 괜찮지 않아? 우리 우강희, 정 불편하면 널 위해 이 한 몸 희생해 줄 테니 박한주는 내 방으로 보내.”
“됐어.”
우강희는 입맛이 없어졌다.
‘양호실에서 잔단 말이지.’
애꿎은 샐러드를 잘게 잘라 갔다. 기껏 방으로 들였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동안 자신에게 먼저 다가온 사람들을 거부하며 지냈다. 타인이 먼저 호감을 보이며 말이라도 붙이고 싶어 잘해 주고 그의 기분을 맞추려 노력하는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람을 사귀기 위해 먼저 다가가 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한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지 않고 한주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룸메가 되고 그 이상으로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초조해졌다. 식사를 같이하고 등·하교를 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본능적으로 박한주에게는 강하게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알기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조심스러웠다.
친구와 통화하며 보이는 표정이 강희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생각하다가 짜증이 올라와 이내 젓가락을 놓고 고개를 드는데 다른 테이블에 앉은 같은 반의 알파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까딱이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더니 알파가 식당을 나갔다.
* * *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한주는 눈이 떠졌다.
알람 소리가 아니었다.
양호실에 침대가 있어 밤에는 신세 지고 있지만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원구가 찾아와 괴롭히며 깨우기까지 했다.
이것저것 물어 대며 귀찮게 해서 비몽사몽 대충 대답하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천희에게 샀는데 제대로 맛도 못 봤잖아.”
들어 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과학실 의자를 나란히 붙여 두고 그 위에서 잠을 잤기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실험 테이블 아래로 두 사람이 서 있는 하체만 보였다.
두 사람은 가깝게 서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지?’
한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려다가 움직이지 않았다. 재민석과 엮였던 귀찮은 일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나갈 때까지 조용히 있기로 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우강희다.
같은 공간에 한주가 있다는 걸 들키면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엿들은 걸 알면 싫어하겠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상대는 대화를 이어 갔다.
“장사를 하면 AS까지 책임져야지. 적어도 받은 만큼의 값어치는 하라고. 프라이머 알파라도 넌 특별하다며. 너와 블렌딩 시켜 준다고 우천희가 돈을 얼마나 받아 갔는지 알아?”
‘협박인가.’
한주가 들어서는 안 되는 쪽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블렌딩?’
우강희는 협박당하는 사람답지 않게 평온했다. 귀찮아하는 기색이 더 컸다.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지금이라도 받겠다고.”
누워 있는 한주에게도 긴장되는 공기가 느껴졌다.
곧 덜컹, 소리가 들리며 그들이 서 있는 과학실 실험대가 움직였다. 한주가 실험대 밑으로 그들을 봤다. 둘의 하체가 너무 가까웠다.
‘뭐 하는 거지?’
“천천히 페로몬을 내보내. 너도 장사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닐 테니 방법은 알 거 아니야. 우천희가 우강희와 블렌딩을 주선한다는 말에 믿지 않았는데.”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 연인의 다정함처럼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상대를 조롱하면서 기대를 품고 있었다.
‘블렌딩이 뭔데?’
몹쓸 호기심이 한주를 간지럽혔다.
과학실은 조용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한주는 그들이 페로몬으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가까이 붙어 있었고 더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보이는 하체로만 봐서는 알파가 강희를 실험대에 밀어붙인 상황이었다.
‘뭐 하고 있지?’
한주는 허리에 힘을 주어 살짝 상체를 들었다.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쉬는 것처럼 머리만 내밀어 블렌딩이 무엇인지 보고 얼른 숨을 생각이었다. 실험대 위로 살짝 머리를 들어 그들을 확인한 순간,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딱 붙어 ‘키스’라 부를 수 있는 걸 하고 있었다. 알파는 열정적으로 강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곧 입을 떼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야, 왜 하지 않아? 넌 페로몬만 내보내면 되잖아. 돈 받은 만큼 협조해.”
그는 강희가 다른 곳을 보고 있자 고개를 돌렸다가 그들을 바라보는 한주를 발견했다.
“어, 미안.”
호텔에서 여러 사람과 쓰러져 있었던 같은 반 알파였다. 그때 일로 며칠 결석했다가 오늘 등교했다.
한주는 한 손을 들어 변명했다.
“미안한데, 내가 먼저 와 있었어. 너희가 방해한 거야.”
알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순식간에 실험대 두 개를 건너와 의자 위에 어정쩡하게 누워 있는 한주의 멱살을 잡아 실험대에 밀쳤다. 카탕,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쓰러졌다.
힘이 실린 손에 멱살이 잡혀 숨이 막혔다.
“쥐 새끼 같은 베타 새끼!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면 죽을 줄 알아.”
“소문내고 싶지 않았으면 학교 안에서 하지 마. 그렇게 걱정되면 협박이 아니라 말하지 말라고 부탁을 해야지.”
“이 새끼가!”
알파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알파와 베타는 체력적으로나 힘으로 차이가 컸다. 그의 동생이 베타이기에 잘 알았다. 그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들게 교육했다.
베타가 얼마나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지 알기에 똑바로 바라보는 한주를 용납할 수 없었다.
베타는 알파를 이길 수 없다.
알파는 그렇게 믿고 있어서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주먹이 위로 올라갔다.
“이 자식이 베타 주제에 겁도 없이!”
박한주의 멱살을 잡고 실험대에 눌렀다. 체격이나 무게로도 한주의 두 배는 되었고 중력을 실어 눌러서 한주가 느끼는 힘은 더 컸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실전 무술을 배웠다. 몸을 지키기 위해 간단히만 배웠지만 한 번에 제대로 때려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급소를 알았다.
주먹이 빠르게 한주의 머리를 향했다.
주먹의 경로에 한주의 표정이 굳었다. 우강희가 몸을 움직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리려고 알파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한주가 빠르게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한주의 머리가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알파는 실험대 위에 누워 있었다. 쾅! 묵직한 무게가 실험대 위로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가 과학실에 울렸다.
유도에서 엎어치기를 해 상대의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것처럼 한주는 머리 하나는 더 큰 알파를 들어 실험대 책상 위에 내리꽂았다.
* * *
기절한 알파를 내려다보며 한주는 혀를 찼다.
“애 상대로 급소를 노리다니, 무슨 생각이야? 반격도 못 하는 일반인이면 어쨌으려고.”
박제된 개구리처럼 사지를 늘어뜨린 알파를 내려다보다가 목에 손을 대 맥박을 찾았다. 다행히 심장은 뛰었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한주는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 양호실에는 데려가야 하는데…… 도와줘.”
“다시 봐도 대단하다.”
우강희는 아버지 주변에서 경호로 일하는 베타를 본 적이 있었다. 체격으로나 힘으로 알파와 차이가 나지만 그중에는 알파를 뛰어넘는 베타도 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훈련했고 경험을 쌓아서 알파도 거뜬히 상대했지만 한주는 미성년자였다.
전문가도 아닌, 그저 열일곱 살 고등학생.
이전에 성정원을 구타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다시 눈앞에서 보니 경이적이기까지 했다.
한주는 기절한 알파의 팔을 잡아 어깨에 걸쳤다.
“도와줘. 곧 있으면 점심시간 끝나.”
알파를 실험대에서 내리자 무게가 더해졌다. 넘어지려는 찰나 강희가 도와주었다. 과학실을 나와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가드가 다가와서 도와주었다.
기절한 학생이 실려 오자 의사가 황급히 호흡과 바이털을 체크하고 응급 차를 불렀다.
“과학실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며칠 결석했다가 오늘 등교했는데 평소에도 수업 중에 머리를 누르는 모습을 가끔 봤거든요. 심각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정밀 검사 한번 해 보라고 하세요. 큰 병이 아니면 좋겠어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양호실로 데려오면서 힘들었다고 한주는 덧붙였다. 의사는 한주의 옆에 서 있는 소문의 우강희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래, 고생했다. 집에 연락할 테니까 너희는 가 봐.”
“네, 꼭 큰 병원에서 검진해 보라고 하세요. 어떻게 쓰러졌는지 모르지만 발견하지 못했으면 위험할 뻔했어요.”
재차 당부하고 의사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양호실을 나왔다.
매일 양호실에서 신세 지고 있으니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두어 나쁠 것은 없었다. 비록 의사는 한주가 양호실에서 자는지 모르지만.
우강희는 한주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대로 조용히 끝나지는 않아.”
걱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한주는 걸음을 늦추어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베타에게 얻어맞아 정신 잃었다고 자기 입으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할걸.”
2학년 이창원이 그러했다. 캠프의 날, 그를 입원시킨 사람이 한주임을 알면서 자존심 때문에 범인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자존심만은 지키려는 사람이 알파다.
우강희는 기가 막혀 웃음이 났다. 한주의 앞에서라면 어떤 알파도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조심해.”
툭, 걱정을 뱉는 강희를 곁눈질로 보았다가 한주는 그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
‘알파끼리는 키스가 아무렇지도 않나?’
저한테 일어난 일도 아닌데 한주는 뺨이 뜨거워졌다.
* * *
한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전자음이 나서 마음을 졸였는데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은 불도 켜지 않고 컴컴했는데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인데 우강희가 샤워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왔나? 왜 이제 씻어? 얼른 충전기만 가져가야지.’
급히 방을 나오느라 핸드폰 충전기를 놓고 왔다. 노트북은 챙겨 갔지만 연결 잭이 없어 노트북 USB에 연결해 충전할 수도 없었다.
‘어서 다른 방을 찾든가 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야.’
책상 콘센트에 연결된 충전기를 뽑는 순간 찰칵 욕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사부인 오지한에게서 배웠던 무술이 최고의 효과를 발휘했다.
한주는 욕실 문이 열리는 곳과 책상 사이의 공간에 주저앉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우강희가 욕실에서 나왔다. 물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수건에 가려 시야가 협소해져서인지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상의를 벗고 얇은 잠옷 바지를 입은 그는 젖은 발로 걸어 나왔다. 알몸을 훔쳐보는 느낌이라 한주는 고개를 내렸다. 찰박이는 젖은 소리에 괜히 과학실에서 알파와 키스하던 우강희가 생각났다.
블렌딩.
고용진은 블렌딩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 어떻게 보면 입학식에서 지영이 알파로 발현한 일도 블렌딩에 속할 거야. 엄밀히 말하면 지영이 당한 일은 '강제 자각'에 속하지만 블렌딩은 상호 간에 레벨 업을 위한 행위야.
‘레벨 업?’
- 프라이머 알파라도 개인의 차이가 큰데 자기보다 상위의 알파와 페로몬을 섞거나 영향을 받으면 레벨 업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 학회에도 연구 논문이 올라와 있고. 그 과정을 ‘블렌딩’이라고 불러.
‘그게 블렌딩이구나.’
- 근데 웬만해서는 상위 알파가 잘 안 해 주지. 뭐 하러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어. 그게 한두 번 한다고 확 레벨 업 되는 것도 아니고 몇십 번을 해도 될까 말까 한 확률이라는데.
과학실에서 들은 대화를 토대로 생각해 보면 우강희가 그의 형 우천희와 함께 ‘블렌딩’을 팔았다는 뜻이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우강희를 싫어하는 우천희가?’
반에서 지켜보며 겪은 강희의 모습과는 맞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안 보는 사이 방을 빠져나갈까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강희가 욕실 문에서 멀어져 침대로 향하는 모습에 눈을 돌리는데 시야 끝에 이상한 것이 걸렸다.
우강희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수건을 덮어쓴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어두운 방에 핸드폰 불빛이 수건에 비쳤고, 열린 욕실에서 나온 불빛이 그의 붉은 등을 비추었다.
등이 시뻘겠다. 어둠 속에서도 우강희의 등은 긁히고 부어올라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