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룸메이트(3)
한주는 사부 오지한과 대련하며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고 긁혔으며 계무원이 대련을 빙자해 죽도로 한주를 구타한 적도 있었다. 패널이 박혔던 오지한의 흉터도 본 적 있었다.
그중에 우강희의 등에 난 것과 같은 상처는 없었다.
긁힌 듯 붉은 자국이 길게 난, 그런 상처가 우강희의 등에 무수히 많았다.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살짝만 손대도 툭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붉게 부어 있었다. 마치 수십 번을 내려친 듯이, 옛날 영화에서 나오던 노예의 등처럼 울퉁불퉁했다. 오래되지 않은, 금방 만들어진 상흔이었다.
보는 순간 한주는 눈이 뜨거워졌다.
“너, 뭐야?”
갑작스러운 타인의 말소리에도 우강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고개의 움직임에 따라 수건이 살짝 흔들렸을 뿐이다.
그는 침대에 놓여 있는 티셔츠를 느릿하게 들었다. 아픈지 동작이 빠르지 않았다.
“야! 등의 그거, 그거 뭐야?”
단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한주는 우강희에게 다가가 티셔츠를 뺏었다. 어깨를 잡아 등을 자세히 보았다. 갓 생긴 상흔이 후끈한 열기를 뿜었다. 어깨를 잡은 한주의 손이 덜덜 떨렸다.
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아픔에 속이 다글다글 끓어올랐다.
“병신같이…… 왜 맞고 있어! 피했어야지! 도망치든가 한 대 때려야지!”
윽박지르는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과연 피하지 못해서 우강희가 맞았을까?
아니다.
우강희를 잘 모르는 한주가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주가 2학년의 괴롭힘을 견뎠듯이 그저 받아 준 것에 불과했다.
우강희가 학교 안에서 이런 짓을 당하면서 참을 만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다. 우천희.
학생회장이며 우강희의 배다른 형뿐이다.
‘나는 우천희를 거스를 수 없어. 그는 날 탐탁지 않게 여겨서 때때로 건드리지.’
과학실에서 우강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주는 턱에 힘을 꾹 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수건으로 얼굴이 가려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그는 아픈 기색도 없이 한주를 고요히 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지쳐 있는 노동자처럼 힘이 없었다.
“면전에서 욕을 듣기는 처음이야.”
등은 엉망이면서 그는 낮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데. 이래서 네 친구처럼 별사탕을 쏘나.”
한주는 속이 울렁거렸다.
참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 정도까지 참아서는 안 되고 이 정도까지 때려서도 안 된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정도가 있는 법이다.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우강희는 한주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무심하다 싶은 얼굴이 오늘만큼은 적나라하게 감정을 표출했다. 그의 팔뚝을 잡은 한주의 손에 힘이 들어가 살이 일그러졌지만 우강희는 한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붉어졌던 눈에 눈물이 어렸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꾹 참으며 한주는 그를 쏘아보았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세상 잘난 듯이 학교에서는 젠체하던 놈이 맞고 다니냐? 이러고 샤워하는 무식한 놈이 어디 있어! 구급상자는?”
팔을 잡았던 손이 그에게서 떨어지며 화를 참듯이 주먹을 꾹 쥐었다.
“글쎄.”
무심한 대답에 화를 내려고 크게 가슴이 부풀며 열렸던 입이 부들부들 떨며 닫혔다. 간신히 참으며 몸을 돌린 한주는 침대 밑에서 캐리어 가방을 꺼냈다.
“약도 어디 있는지 몰라? 처맞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닐 텐데 적어도 치료는 해야지! 귀찮으면 연고라도 발라! 이건 또 왜 이리 안 열려!”
성질을 내며 한주는 지퍼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천이 찢기는 소리가 나면서 지퍼가 열렸다. 가방 안쪽에 넣어 둔 작은 파우치를 꺼내 침대 위에 쏟아 연고를 찾았다.
“처맞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야.”
한주는 강희를 쏘아보았다.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오면 그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그 정도로 맞는 게 처맞는다는 거야. 덩치는 크면서 완전 물곰이잖아. 돌아서.”
“물곰?”
“그래. 물곰. 물러 터진 곰 새끼! 무식하게 맞는다고 해결되지 않아!”
“물러 터진…… 차원구가 그 소리 들으면 웃다 죽겠네.”
“돌아서기나 해!”
자못 엄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우강희는 말장난은 그만하고 시키는 대로 몸을 돌렸다.
흡, 숨을 삼킨 한주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 * *
간지럽히듯 손끝이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비가 내려앉듯 약을 바른다. 그의 상처에 아픔을 더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약효가 돌기 시작해 등은 더 화끈거렸다.
우강희는 중얼거리는 한주의 욕설을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우천희의 성질을 감당하기 위해 맞아 주지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죄를 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천희가 폭력적으로 대해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맞았지만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한다. 오늘만큼은 한주가 밖에서 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등을 들켜 버렸다.
꾹 참으며 성질부리는 한주를 보고 있으니 그는 그저 재밌기만 했다.
아침에 깨우면 싫어하면서도 기어코 방을 그대로 썼고 그에게 욕을 했지만 등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고개를 돌려 한주를 보았다.
허리 부근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느라 한주는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었다. 욕실의 빛에 목선이 드러났다. 유난히 그 목선이 눈에 박혔다. 티셔츠의 안쪽에 가려진 부분으로 시선이 갔다.
충동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목덜미를 물은 적이 있다. 생각하지 않고 한 행동이었는데 밖으로 나와서야 저가 한 행동을 자각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목덜미를 무는 행위는 특별하다.
그것은 밀접한 관계를 뜻했고 한창 행위 중에 이루어지는 본능이기도 해서 그들 세계에서는 은밀하지만 더없이 적나라한 소유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을 그는 베타인 한주에게 해 버렸다.
시선을 느꼈는지 한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우강희의 시야에 얇은 목이 더 잘 보였다.
몸의 열이 한층 강해지며 목이 말랐다.
“똑바로 앞을 봐. 이대로 누우면 옷이랑 이불에 약이 다 묻어서 위에 거즈라도 붙여야 해.”
말 안 듣는 조카 때리듯이 강희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한주는 파우치에서 가져온 얇은 거즈 뭉치를 한 장씩 펼쳐 등에 붙였다. 연고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 거즈는 잘 붙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의료용 하얀 테이프로 몸통을 감아 고정했다.
우강희는 의도치 않게 기묘한 차림이 되었다. 상체 앞면으로 네 개의 하얀 테이프 줄이 생겼다. 용케 유두는 피했다.
한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작품을 보았다. 웃음을 참느라 볼이 실룩거렸다.
“아, 이 정도면 될 거야.”
“이런 것이 취향이야?”
“농담할 정신은 남았네. 옷 입게 도와줘?”
한주가 옆에서 도와준다는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에 팽개쳐 놓은 티셔츠를 입혀 주었다.
팔을 움직이며 일부러 엄살을 피우며 신음을 내자 한주는 움찔 움직임을 멈추더니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물론 ‘뭐 이 정도로 엄살이냐.’라며 타박하기는 했지만 그 안에 악의는 없었다. 욕을 하는데 그 말이 다정하게 다가왔다.
누군가와 닿는 접촉은 그에게 금기였다.
같은 공간에 타인과 있는 것조차 싫었다.
홈스쿨링을 하며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 우상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라며 조건을 걸었다. 억지로 참으며 그나마 교류가 있었던 이들과 학교생활을 했는데 부지불식간에 침입자가 파고들었다.
게다가 그 침입자는 그가 어떻게 해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존재였다.
막강했다. 온전히 그 자신을 드러내도 아무렇지 않은 상대였다.
한주가 그의 윗옷을 조심스럽게 내려 줄 때 우강희는 신음을 내며 한주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많이 아파?”
“조금만 이대로.”
강희는 다시 신음을 냈다.
꾀병이 진짜인 줄 알고 얌전히 안겨 있어서 그는 한껏 한주를 껴안을 수 있었다. 타인의 체온이 피부에 닿았다.
온기.
언제나 미지근한 그 온기가 싫어 어머니의 손길도 피했는데 한주는 달랐다. 포근하다는 뜻이 무엇인지 느껴지는 온기였다. 몸 안쪽이 뜨끈해졌다.
윗옷을 다 입은 후에도 한주는 방을 나가지 않았다. 다시 도망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이 얽혔다.
우강희는 페로몬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한주에게 향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 적나라한 호감의 색을 띠고 있어 저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한주를 대하고 있는지 뻔히 보였다.
페로몬이란 감출 수는 있어도 속일 수는 없다.
감정이 묻어나는 그것은 자신의 속내를 상대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내보내기도 하지만 원하지 않았던 감정을 들키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상대가 페로몬을 볼 수 있는 알파나 오메가에 한한 것이다. 아니, 평범한 베타만 되어도 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박한주는 모른다. 그래도 들키고 싶지 않아 갈무리하는데 한주의 눈이 커졌다.
“응?”
코를 쫑긋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 또 난다. 페로몬 내보냈어? 나 페로몬 못 맡는데 희한하네.”
킁킁거리며 좀 더 짙은 향기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더니 우강희의 목덜미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는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뭔가 깊은 숲의 냄새가 나. 흐린 날의 눅눅한? ……뭔가 시골 외갓집 내려가서 풀밭을 뛰어다니는 느낌?”
저가 말해 놓고 한주는 푸핫 웃어 버렸다. 그러나 강희의 얼굴을 확인하고 웃음을 지웠다.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종종 외할아버지 집에 맡겨졌다.
여행과 취미 생활로 바빴던 어머니는 아이를 돌볼 줄 몰랐다. 우강희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아이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식이라도 자신 외의 사람을 챙겨야 함을 버거워했다.
고용한 가정부가 아이를 주로 돌보지만 손자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걸 알게 된 외할아버지는 강희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 후 어머니가 집을 비울 때가 아니라도 종종 외할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외할아버지의 집은 서울 외곽의 외진 곳에 있었고 근처에 강이 있어 바람이 강했다. 집 주위로는 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집 뒤로 야트막한 산이 있었지만 외할아버지의 산이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숲은 우거졌다. 외할아버지를 따라 뒷산에 올라 500년 된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줍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넓은 논을 지난 바람이 마당에 나와 있는 그에게까지 강의 습함, 논의 풀냄새, 뒷산의 짙은 이끼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시골이라 아이가 놀 만한 곳은 없지만 그가 마당에 나와 넓은 논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외할아버지는 손짓으로 불러 손을 잡고 산책하러 나갔다.
논의 얇은 둔덕을 걸으면 그의 뒤를 외할아버지가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면 항상 외할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에 주름을 만들며 미소 지어 주었다.
한주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올라왔다.
“어떻게…….”
“응?”
“페로몬 무감증이잖아. 어떻게 페로몬의 향기를 맡지?”
제 마음을 적나라하게 한주에게 들켰지만 알아주었다고 좋아할 수 없다.
그것은 우강희가 가진 페로몬의 향기였다. 그 사람만이 가지는, 그 사람을 나타내는 독특한 향기였지만 보통의 페로몬은 향기가 없었다.
상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유혹하며 구애를 할 때 나오는 향기다. 진실의 페로몬이라고 부르는 그것.
“다른 사람의 페로몬을 맡은 적은 없는데, 이번이 딱 두 번째야. 그것도 네 것만. 전에 과학실에서 네 방으로 오라고 했을 때, 그때도 맡았지.”
우강희는 고개를 숙여 마른세수를 하며 몇 번 문지르다가 얼굴을 가렸다.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귀까지 뜨거워졌다.
제 마음을 이미 한주에게 드러냈다. 오메가나 알파였으면 단박에 눈치챘을 상황이다.
‘맙소사.’
손가락 사이로 한주를 확인하니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는 당장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알파나 오메가에게 이보다 더한 고백은 없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부끄러움에 우강희는 “잠깐”이라고 말하고는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다시 나와 한주의 앞에 앉았다.
“괜찮아? 얼굴이 빨개. 열나?”
“잠깐 실험 좀 해 보자. 페로몬을 느끼는지.”
“아, 그러잖아도 조만간 병원 가서 페로몬 무감증이 나아 가나 검사받으려고 했었어. 해 봐.”
허락에 덥석 한주의 양손을 잡았다. 페로몬을 내보내는데 손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사심이었다. 손을 잡고 있으니 뒷덜미가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천천히 다른 페로몬을 내보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페로몬에 명령을 실을 수 있다. 어떤 명령을 보내면 될까, 잠시 생각하는데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키스.’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흠칫 놀라 머리를 털며 한주를 보았다. 입술에 눈이 갔다. 붉은 입술이 윤기가 있어 눌러 보고 싶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깊은 동공이 보였다.
우강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다른 명령을 떠올려야 해. 그런 스킨십 말고…… 그냥 날 안아 주면.’
“우강희?”
부름에 강희는 눈을 떠 앞에 앉은 한주를 보았다. 그 주위에 우강희의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안고 싶어, 만지고 싶어, 만져 줘, 키스해, 내 거야. 빨고 싶어, 좀 더 가까이 와.
떠올리지 않았던 본능과 우강희의 생각이 페로몬에 섞여 한주에게 애원하며 명령하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눈만 깜빡였다.
“한 거야? 네 냄새만 진해졌는데?”
페로몬 안에는 흉포하게 다루고 싶은 욕망도 섞여 있었다. 한주가 스스로 움직여 저에게 다가오라는 명령도.
그런데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강희의 손이 한주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끌어당겼다. 등을 가로지르며 어깨를 잡아 꽉 끌어안았다.
“야, 우강희?”
당황하면서도 한주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상처를 건드릴까 봐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만 있었다. 그 다정함에 기대어 그는 한주를 깊이 껴안았다.
그는 박한주를 향해 진실한 페로몬을 내보냈다.
“괜찮아. 넌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는 않아.”
“그래? 그럼 좀 놓지?”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쉽사리 팔을 풀 수 없었다. 너무 좋아서.
* * *
“자자. 벌써 자정이 넘었어.”
한주는 툴툴대며 침대에 누웠다.
우강희가 페로몬을 테스트한다면서 껴안아서 분위기가 잠시 묘해졌었다. 절 바라보는 눈빛이 아련해서 등줄기가 간지러워졌다.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일촉즉발 같은, 숨죽이게 하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는 무엇으로 페로몬 명령을 해서 테스트했을까.
차마 묻지는 못했다.
“피곤해 죽겠다. 내일 아침에도 깨우면 등의 상처고 뭐고 봐주지 않아. 진짜 주먹이 나갈 수 있어.”
한주는 하품을 연달아서 했다.
“여기서 자려고?”
“……아침에 안 깨우면.”
조건을 달았지만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강희의 대답을 듣기 전에 잠이 들었다.
“음.”
강희는 더운 숨을 뱉었다.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자신의 몸 상태에 민감했다.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집중력이 흐트러져 페로몬 컨트롤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습관이 된 페로몬 컨트롤이라 자면서도 조심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했다.
어깨가 시렸다. 감기에 걸린 듯 몸이 떨렸다. 반대로 자신도 느낄 만큼 얼굴과 몸은 후끈거렸다. 아는 증상이었다.
난감해 한숨을 뱉었다.
“하필.”
알파의 발정기라는 러트의 전조 증상이었다.
* * *
원래 주기보다 너무 일렀다. 러트 때는 페로몬을 제어하기 힘들어져서 주기를 철저히 체크했는데 이번에는 일주일 빨랐다.
‘러트가 벌써.’
몸살 같은 증상이 지나면 성욕이 평소보다 강해진다. 그래도 다행히 진성 러트는 아니라 약으로 억누를 수 있다. 자신을 감금하지 않아도 된다.
이마가 땀에 흠뻑 젖었다. 옷이 피부에 달라붙어 움직일 때마다 피부를 건드렸다. 이마의 땀을 닦는 손의 촉감은 둔감했다.
우강희는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잠든 한주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미세하게 흘러나온 페로몬이 한주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간다.
“안 돼.”
그는 피어스를 꽉 눌렀다. 따끔한 아픔과 함께 페로몬이 거둬졌다. 아직은 제어력이 있었다.
잘 지어진 건물이라도 쓰나미에 견디지 못한다. 아무리 페로몬 무감증이라 하여도 페로몬이 퍼부어지면 견딜 수 있을까. 50퍼센트는 견뎌도 100퍼센트는 장담할 수 없다.
소중한 사람이다. 다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약…….”
강희는 책상의 제일 밑의 서랍을 열어 다급히 알파용 구급 키트를 꺼냈다. 보통은 알약을 섭취하지만 예상을 벗어나면 응급 키트의 억제제를 썼다.
과도하게 페로몬을 내보내거나 몸의 체질상 과민성으로 러트가 일어나는 환자에게 주로 쓰는 응급용 억제제였다.
그것은 알파 당사자를 위함이 아닌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약이었다.
과도한 페로몬 배출로 주변에 영향을 주어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을 앞당길 수 있었다. 그랬다가는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선은 러트가 온 알파에게 응급 억제제를 주사해 페로몬을 틀어막는다.
온몸의 땀구멍을 다 막는 듯한 독한 약이었다.
열은 몸속에서 돌지만 외부로 나오지 못해서 어지러움과 함께 몸이 통제를 잃게 된다. 혼미한 정신 상태가 되어 싫었지만 현재 그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필요한 약이었다.
응급 억제제의 마개를 제거해 허벅지에 찌르고 피스톤을 눌렀다.
“허억!”
주사액이 온몸에 퍼져 나가는 감각이 기분 나빴다. 자연을 거스르는 약에 온몸이 불쾌감을 주장했지만 페로몬 억제제 알약도 두 알 더 먹었다.
몸의 상태는 급히 막았지만 이미 방은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간신히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침대에 누운 박한주가 보였다.
그의 러트는 주기보다 일주일 빨랐다. 보통은 몸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거나 큰 충격을 받는 등의 자극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는 이상 증상이다. 예정일에서 일주일이라는 거대한 차이는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앞당겨진 이유가 한주를 좋아해서라니.’
큭, 눈앞이 어지러운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박한주가 좋다. 가지고 싶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옆에 두고 싶다. 그 목을 깨물며 몸을 눌러 자신의 것이라 새기고 싶었다.
한 사람을 향해 여러 감정이 흘러넘쳤다.
언젠가 ‘페어’가 생길까. 아니, 페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생기기는 할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의 종착지는 희망적이지 못했고 그 끝에는 언제나 자신만 혼자 남았다.
혼자인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피해 입히지 않고 상처를 입히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재앙이었고 타인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우강희란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
응급 억제제를 주사했으면서도 그의 페로몬은 실낱같이 흘러나와 한주를 향해 뻗어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웃지 않았다. 약이 온몸에 빠르게 퍼져 육체의 통제력을 앗아 갔다. 응급 억제제는 몸을 둔하게 만들고 정신을 흐릿하게 했다.
무기력해서 자신의 존재가 그저 비루한 시체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응급 억제제를 맞은 후 우울증이라는 부작용이 따라왔다. 그래서 몸의 반응에 신경을 써 왔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도 어쩔 수 없다.
진흙탕에 빠져들어 가는 몸을 느끼며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둠에 잠식되면서도 우강희는 한주를 보았다.
‘너라면 다를까.’
이전에 테스트했지만 그래도 불안했고 의심이 들었다.
또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 있다.
그런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다. 한 점의 빛조차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손잡아 줄 누군가를 바랐다. 빛이 없어도 그 체온만 느낄 수 있다면…….
옆으로 서서히 쓰러졌지만 그의 눈은 끝까지 한주만을 담았다.
* * *
알람이 몇 번 울렸지만 한주는 무시했다.
‘행복해.’
알람이 들려도 그저 어딘가에서 들리는 새소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 번이 넘어가자 아무리 아침잠이 많은 한주라도 슬슬 일어나야 했다.
지각은 하지 말자.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등교한 적은 있어도 지각은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씻었다. 찬물이 닿자 그제야 눈이 조금 떠졌다.
‘우강희, 그래도 약속은 지켰네.’
어제 엄포를 놓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는 한주를 깨우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우강희와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다.
아침에만 깨우지 않는다면.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그 상태로 등교한 건가?’
두뇌가 깨자 우강희의 등이 떠올랐다.
반쯤 감은 눈으로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려 책상으로 다가가다가 우강희를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어젯밤에 본 티셔츠 차림으로.
그의 머리맡에는 빨간 응급 키트가 흐트러져 있었다.
한주의 집에도 응급 상황에 대비한 엄마의 응급 키트가 있었고 가족인 한주는 병원에서 사용법을 배웠기 때문에 효과를 알고 있다. 알파 표시가 있지만 엄마의 응급 키트와 다르지 않았다.
“우강희!”
그의 몸을 흔들었다. 어깨를 잡자 몸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얼굴 또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주는 우선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환기다. 창문을 열고 다시 우강희를 살폈다. 정신을 잃었을 뿐 숨은 쉬고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불러야 했다. 한주 혼자서는 처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우강희가 일어나려는 한주의 손목을 잡았다.
“우강희? 정신 들어? 지금 가드를 부를게.”
“안 돼……. 러트야. 이무열…… 담임에게 전화해. 너도 나가면 안 돼.”
내뱉는 호흡이 뜨거웠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그는 한주의 손목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꽉 잡았다. 손이 저릿해질 정도인데 뜨거운 몸이 기대 와서 뿌리칠 수 없었다.
“러트?”
한주도 러트가 무엇인지는 안다. 부지불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우강희는 한주의 허리를 껴안으며 말을 뱉었다.
온몸이 뜨거워서 평범한 체온의 한주가 닿자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놓고 싶지 않았다.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페로몬이 한주의 몸에 묻어서 그 몸에서 맡은 자기 페로몬이 좋았다.
“방이…… 약은 주사했지만 방에 페로몬이 가득해……. 이무열을 불러.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너도 내 것이…… 몸에 묻어서 위험해.”
“아, 알았어. 담임에게 전화할게.”
한주는 급히 이무열에게 전화했다.
신호에 귀를 기울였지만 시선은 자꾸 우강희에게 향했다.
러트를 겪는 알파는 처음이다. 이전의 삶에서 가끔 러트 때문에 급히 양호실로 가거나 결석을 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러트란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러트나 히트사이클의 체질이 일반 삶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다큐 프로그램에서 봤다. 영화 같은 매체에서 로맨틱한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한주의 엄마 박예주는 보통은 약으로 눌렀고 가끔은 외박했다.
습한 숨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우강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다가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우강희!”
- 어, 한주야. 왜?
이무열이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한주는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선생님! 우강희한테 러트가 왔어요! 도와줘요! 열도 나고…….”
- ……뭐? 우강희의 러트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아, 설마 가, 같이 있어? 너는? 너는 괜찮아?
왜 자꾸 강희의 손이 엄한 곳으로 움직이는지 한주는 난처해졌다. 한주는 몸을 파드득 떨며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페로몬 무감증이라서 괜찮은데 우강희가 응급 키트까지 썼어요. 빨리 오세요.”
- 기, 기다려. 방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고 문도 열지 마!
한주는 무열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만 했다.
우강희의 얼굴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한주는 전화를 끊고 움직이지 않게 그의 머리를 잡으며 울먹였다.
“빨리 와요, 선생님. 안 그럼 내가 이 녀석, 기절시킬지도 몰라요…….”
러트 때문에 위험하기보다 한주 자신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도 모르고 우강희는 착실히 움직였다.
* * *
학생들이 등교하고 난 후였기에 처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무열의 지휘로 방문 안쪽으로 1차 연결 에리어가 설치되었다. 그곳을 통해 식사와 그 외 필요한 물건을 전달하게 된다. 다행히 방에는 당사자인 우강희 외에 한주도 있었다.
이무열은 안전복을 입고 방문했는데 한주의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놀랐다. 한주가 페로몬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긴가민가하며 다 믿지 않았었다.
응급 억제제를 맞았다지만 강희의 페로몬은 미약하게 나오고 있었다. 러트가 진정될 때까지는 소취를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같은 층에서 다섯 명이 갑자기 러트가 와서 소취 팀도 바빴다. 도와줄 수 있는 한주가 같은 방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이러한 부득이한 이유로 한주는 우강희와 함께 이틀 동안 방에 감금되었다.
* * *
“같이 지내자마자 이런 일이 터지냐.”
졸지에 같이 감금되어 병간호하게 된 한주는 침대에 앉아 맞은편에 누운 우강희를 보았다.
어쩐지 제 탓인 거 같아 한숨만 나왔다.
그는 신음도 내지 않고 땀에 푹 절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병자라는 느낌보다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평소보다 야하게 느껴졌다.
러트 때 알파들은 이성을 잃기 쉬웠지만 우강희는 응급 억제제를 주사해서 지독한 몸살에 걸린 사람처럼 몸에 기운이 없는 정도일 거라고 무열은 설명했다.
“그냥 탈수 안 일어나게 자주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라고 했는데…….”
가능하면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당부하며 무열은 피하듯이 서둘러 가 버렸다. 안전복을 입고 방독면을 썼지만 그래도 영향이 있는지 도망치듯 동작이 빨랐다.
땀을 흘리는 강희를 보고 있던 한주는 자신이 찝찝해지는 기분에 욕실로 들어가 젖은 타월을 가져왔다.
“우강희, 물 마실래?”
앓는 와중에 한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가늘게 눈을 뜬 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열이 높아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한주는 그의 어깨를 감싸 상체를 안았다. 등에 손이 닿지 않게 조심했다.
“더워…….”
물 마시는 것도 힘겨운지 그는 기운 없이 한주의 어깨에 기대 왔다. 젖은 타월을 그의 눈가에 덮어 주었다. 기분 좋아하는 한숨이 목에 닿았다.
“시원해…….”
“땀에 젖었는데 옷 갈아입을래?”
어깨에 기대고 있던 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손은 한주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무언가를 찾듯이 옷 위를 더듬었다.
간지러워 손을 치워 냈지만 다시 달라붙는다.
“좀 가만히 있어. 기운이 있으면 일어나 앉아 봐. 옷 갈아입혀 줄게.”
말을 듣고도 그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한주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볐다. 간혹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이 스쳤다. 몸이 뜨거웠다.
환자를 거칠게 대할 수도 없고, 난감해진 한주는 경고했다.
“야.”
“좋아…….”
기운 없는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진다.
아프다는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미안해져 한숨을 쉬며 그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 주었다. 옷을 벗길 때 피부를 스치자 강희는 몸을 움칫 떨며 신음을 흘렸다.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굉장했다. 열을 재지는 않았지만 40도는 될 것 같았다.
“원래 러트가 이래?”
“……응급 억제제가 독해서 그래.”
다른 알파였다면 하루는 말도 못 하고 시체 같은 상태로 지내겠지만 그 정도 상황까지 본 적이 없는 한주는 강희의 말을 믿었다.
“바지도.”
“네, 네. 그런데 러트도 주기가 있지 않아? 엄마가 오메가인데 정확하던데.”
약을 미리 먹어 두는데도 박예주는 그 시기가 되면 평소보다 예민하게 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예상보다 빨랐어.”
“……혹시 나 때문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강희는 한주에게서 떨어졌다. 놀라 되물었다.
‘들켰나?’
제 마음을 들켰나 싶어 부끄럽고 민망한데 반응은 하반신으로 왔다.
“역시. 나와 방을 같이 써서 스트레스 받았구나.”
“……그렇지 않아. 이유라면 우천희도 되지. 바지 갈아입혀 줘.”
혼자 앉아 있을 수 있으면 자기 힘으로 갈아입을 수 있을 텐데 강희는 당당히 요구했다.
이 녀석은 환자다.
한주는 성질을 죽이며 바지를 벗겼다. 환자라고 하기에는 아래의 상태가 너무 우람했다.
발정기라고도 불리는 알파의 러트이니 당연한 상태지만 한주는 몹쓸 생각이 자꾸 들어서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보통은 러트 때 어때? 약 안 먹고 지내면 말이야. TV에서 성욕이 강해지고 짜증이 늘어나고…… 참을성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얼음주머니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 계속되었다.
바지도 윗옷과 상태가 다르지 않았다. 열이 심해 온몸이 땀에 절여져 있었다. 바지를 바닥에 던지자 철썩 젖은 소리가 날 정도였다.
“으아, 땀.”
강희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나른하게 뒤로 반쯤 누울 듯 팔로 지탱하며 앉은 그는 평소 서늘한 표정이 아니었다. 열이 오른 불그스름한 얼굴로 나른하게 눈을 뜨고 그윽하게 한주를 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러트 때의 알파.”
우강희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점막을 핥자 목마름이 강해졌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안달이 나지.”
마른 입술을 적시기보다는 닿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 핥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떻게든 그 몸에 닿아서 피부를 느끼며 흔적을 남기고, 내 소유라는 충족감을 느끼고 싶어져.”
하지만 그동안 우강희는 러트 때 그런 욕구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대상이 없었으니까.
지금 그가 말하는 것은 현재 자신이 원하는 바였다.
“야, 상대가 싫어하면…….”
한주는 미소 짓는 얼굴에 말이 막혔다. 일순 위협을 느꼈다. 몸에 힘이 들어가며 긴장했다.
“싫어해? 거절할 수 있을까?”
우강희가 한주의 이마와 눈, 귀, 볼에서 입술의 순서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 시선이 지나가는 곳이 화끈거렸다.
“박한주, 속옷도 갈아입고 싶어.”
“속옷 정도는 네가.”
한주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실수였다.
“어?”
고등학생이 왜 이래?
아무리 알파라 고1때부터 성인과 맞먹는다지만 그곳까지 성인보다 뛰어나다니, 왜 알파를 신의 편애라고 부르는지 알아 버렸다.
가끔 우강희에게서 맡는 그의 페로몬 외에 다른 냄새도 퍼졌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빨리.”
“네, 네가 해!”
찰싹, 한주는 참지 못하고 강희의 등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파…….”
어설프게 앓는 소리를 냈다면 한주도 강하게 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마치 한 마리 작은 뱁새처럼 몸을 떨며 신음했다. 절대 우강희만 한 뱁새는 있을 리 없을 텐데도 그 순간 그를 보며 그런 이미지가 생각났다.
맞은 등을 감싸며 옆으로 몸을 숙인 그는 길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측은지심을 끌어냈다. 비록 키나 체격이나 그 외의 다른 곳까지 모두 크고 한주보다 훌륭했지만 말이다.
상처 난 등을 때려서 더 화를 낼 수 없었다.
“누, 누가 장난치래? 속옷은 네가 갈아입어!”
한주는 침대에서 내려와 우강희의 속옷 서랍에서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하나를 들어 다시 그에게 돌아갔는데 도저히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몸에 힘이 없는지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왼손으로 몸을 지지하며 오른손으로 브리프의 밴딩에 손가락을 걸자 한주는 그곳으로 속옷을 던져 행동을 저지했다.
“여기 있어!”
욕실로 몸을 피하려는데 등 뒤로 쿵, 작지 않은 소리가 들리며 신음이 이어졌다.
돌아보면 안 되지만 외면할 수 없었다. 한주는 침대 밑에 주저앉은 우강희를 보았다가 빠르게 천장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씨…….”
남자로서는 부러운 몸이다.
군살 없는 몸매는 근육이 적당히 잡혀서 성장기 소년의 몸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에 가까웠다.
알파들이 유독 동년배보다 건장했지만 그것이 하반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절절하게 오늘 알았다.
“……도와줘, 박한주.”
연약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해 온다. 뱃사람을 유혹하는 전설 속의 인어처럼 곁으로 불러오려고 속삭인다.
“손에 힘이 없어.”
“아, 씨…….”
오늘따라 알파벳 C가 입에 착착 붙었다.
한주는 눈물을 참으며 가능한 한 그의 몸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가갔다.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다리에 걸쳐진 브리프를 잡아당겼다. 흐물거리는 천의 한 부분이 유독 두드러졌다.
한주는 황급히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만지면 안 될 걸 만진 듯이 손이 찝찝해졌다.
“내가 김지영과 아직 목욕탕도 안 갔는데…….”
엄마들끼리 친하기에 어릴 때부터 지영을 만났지만 부끄러움 많은 친구의 성격 덕에 아직 알몸을 본 적은 없었다.
강희가 코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지영과 친해?”
그가 말을 하자 더운 숨이 한주의 이마에 닿았다.
“……친구니까 친하지. 다 입었으니 그만 떨어져.”
“일으켜 줘. 속옷 갈아입느라 힘이 다 빠졌어.”
감기 걸린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약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지 우강희는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이상을 느끼고 한주는 겨드랑이로 팔을 집어넣어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누우면 땀 닦아 줄게.”
버석하게 닿는 시트의 감촉에 강희는 눈을 떴다. 한주의 침대였다. 젖은 타월을 가져와 한주는 그의 몸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똑바로 누운 그가 걱정되었다.
“등은? 땀 흘려서 젖을 테니 티셔츠는 안 입혔는데, 등은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몸이 뜨거워 등의 상처가 어떤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타월이 피부를 문지르면서 스치는 손길에 신경이 집중되었다.
“곧 열이 내릴 거야. 체온이 떨어지면서 오한이 올 테니 옷을 입어야 해.”
남의 일을 말하듯 강희는 앞으로 한주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 후에 할 일은 없어. 내일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돼. 아무리 억제제를 맞았어도 페로몬이 100퍼센트 차단되지는 않아. 넌 지금 못 느끼겠지만 이 방이며 너도…… 내 페로몬이 잔뜩 묻어 있어. 내일 소취 팀이 온 후에 샤워하고서야 나갈 수 있게 될 거야.”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 그는 담담했다. 곧 끄응, 목을 울리며 몸을 모로 돌려 상체를 일으켰다.
건장한 남자인데 땀에 젖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파리해진 입술 때문인지 곧 쓰러질 것처럼 처연했다.
“옷.”
“어? 잠깐.”
꺼내 놓은 옷을 가져와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입기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에 티셔츠를 씌워 내리자 쑥 목 라인으로 그의 얼굴이 나왔다. 순간 입술에 숨이 닿았다.
한주의 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안이 보이지 않아 두렵지만 거대해 경외감이 느껴지는.
곧 눈꺼풀에 눈이 가려졌다.
강희가 옷을 입으면서 시선을 내리고서야 한주는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프라이머 알파인데도 다른 알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며 어려워하는 알파가 우강희였다.
알파도 위압감을 느끼는 우강희가 얌전히 한주의 손길에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신음도 내지 않고 참는 모습을 보니 한주는 마음이 이상해졌다.
김지영은 체구도 작았고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놀림을 당했다. 마음도 약해 조금만 심한 말을 들으면 눈물을 보여 아이들이 더 놀리며 재밌어했다. 그나마 한주와 다니고 입 험한 고용진에게 익숙해져서 예전만큼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처받는 일이 생기면 한주의 팔을 붙잡으며 옆을 떠나지 않았다.
김지영은 그렇게 한주에게 있어 원래 지켜 줘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우강희는 그런 범주의 인물이 아니었다.
지켜 주지 않아도 되고 혼자서 잘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알파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알파였다. 그런 사람이 형의 폭력을 묵묵히 받아 주고 한주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무술을 배워서 그런지, 사부인 오지한의 가르침 때문인지, 아니면 한주의 천성이 그래서인지 두 번째 삶에서 한주는 약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할 수 없었다.
강희는 오한이 시작된 듯이 어깨를 한껏 웅크리고 이불을 여미며 몸을 떨었다. 간혹 참기 힘든지 한숨을 토했다.
박예주가 혹시 모르니 챙겨 가라면서 짐에 넣어 준 전기장판도 깔아 주었지만 우강희는 너무 뜨겁다면서 꺼 버렸다. 그러면서 이불을 목까지 올렸다.
“의사를 부를까? 양호실 의사 선생님 계시잖아.”
“괜찮아. 내일 되면 괜찮아져.”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고집을 부린다.
모로 누워 몸을 웅크린 우강희의 이마에 손을 대 체온을 쟀다. 그의 말대로 열이 떨어지는지 이마가 차가웠다.
그가 눈을 떠 한주를 보았다. 그의 눈이 살짝 접혔다.
한주를 보며 그의 눈이 호감을 보였다. 눈을 감으며 한주의 손에 이마를 더 붙여 왔다. 어린 짐승이 온기를 찾아 몸을 붙여 오듯이.
때려눕혀도 다시 일어날 것처럼 건강한 사람이 이러니 더 신경이 쓰이고 안쓰러웠다.
“추워?”
“괜찮아.”
괜찮다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파서 잠도 오지 않는지 우강희는 눈을 감고 있지만 간혹 한숨을 쉬었다.
밤 11시가 넘었다. 저녁에 묽은 죽만 마시고 계속 누워 있었다. 필요한 조치는 다 하고 약도 먹고 내일 소취 하면 끝난다지만 같은 방이라도 소파에서 잘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강희, 옆으로 가 봐. 나도 눕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강희의 눈이 번쩍 떴다. 깜빡거리더니 한주를 올려다보았다.
“옆에 눕는다고?”
“사람 체온도 꽤 높다니까. 혼자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왜, 산에서 조난당하면 서로 껴안으며 밤을 버티기도 한다잖아.”
조금 전까지 끙끙거리며 골골대던 사람이 재빠르게 후진하며 한주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들어와.”
그가 이불을 들자 훈훈한 온기와 함께 땀 냄새, 그리고 우강희에게서 맡았던 페로몬 냄새가 풍겨 왔다.
방을 같이 쓰게 되면서 더블 침대가 슈퍼싱글로 바뀌었지만 두 사람이 누울 자리는 충분했다.
실수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주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가 옆에 누웠다. 천장을 보며 눕자 우강희가 모로 누워서 한주의 목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다.
“베개가 작으니까 이거라도.”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감싸면서 몸을 붙여 온다. 그가 뱉는 숨이 귓속까지 들어왔다.
“따뜻해.”
호흡할 때마다 숨이 귀를 간지럽혔다. 오스스 목의 솜털이 섰다.
“잠깐, 자세가 좀, 불편해.”
“그럼 옆으로 누워.”
귀를 문지르며 한주는 옆으로 누웠다. 마주 보면 이상해서 등을 지고 누웠는데 팔베개를 해 준 그의 손이 어깨를 감싸며 더욱 끌어당겼다.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안았다. 등으로 우강희의 가슴이 닿았다.
품에 집어넣듯이 깊이 안아서 그의 입술이 뒤통수에 닿았다. 이전의 포즈보다는 닿는 면적이 넓어 포근한 느낌을 주었지만 한주는 흠칫 몸을 떨었다.
후, 그의 숨이 두피에 닿았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이 바지 밴딩에 걸렸다.
한주는 낮게 경고했다.
“손, 움직이지 마.”
“그래.”
손은 안 움직였는데 입술로 머리카락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조금의 틈만 있으면 꼼지락거렸다
“그만하라고!”
어깨를 감싼 손목을 잡아 떼어 내고 천장을 향한 어깨를 우강희에게 붙여 그대로 아래로 밀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그를 똑바로 눕혀 버린 것이다.
“윽!”
신음을 들으며 한주는 침대에서 내려와 한 발짝 떨어졌다.
우천희에게 맞은 것이 어제였다. 하루가 지나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강하게 누르면 욱신거렸다. 익숙한 아픔이고 참을 수 있는 정도지만 강희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신음을 흘렸다.
맞을 때도 나오지 않던 신음이 지금은 쉽게 나왔다.
“그만하라고 했잖아.”
한주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환자를 대상으로 심하지 않았나 후회하고 있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걱정하지.’
그가 살아온 세계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우강희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공격당하는 약육강식의 알파 세계를 보고 자랐다. 가족끼리도 언제 물어뜯을지 몰라 안심할 수 없는 세계.
그런데 한주는 강한 사람 앞에서는 강하게 대응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저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잊어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하아.”
눈을 질끈 감고 웅크리며 어깨를 떨자 금방 반응이 왔다.
“괜찮아?”
팔을 어루만지며 가까워졌다.
“추워.”
“안고 자 줄 테니 만지지 마. 다음은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아. 조심해.”
강희는 뺨에 힘을 주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눌렀다. 역시 쉽게 넘어왔다. 약한 마음을 파고드는 건 쉬웠다.
옆에 누울 수 있도록 허리를 펴는데 침대 위에 한쪽 무릎을 올린 한주가 침대 커버를 움켜잡았다. 커버를 잡은 채 그대로 천장을 향해 손을 올렸다.
뒹굴, 그의 몸이 반대로 뒤집어져서 한주를 보고 있던 몸이 벽을 보도록 바뀌었다. 그리고 한주는 그의 등을 껴안고 누웠다.
백허그를 당했다.
“됐다. 자.”
“만지지 않을 테니까 몸을 돌리면.”
“안 돼, 너 못 믿어.”
“손은 안 닿도록 하면.”
“다른 건 닿고?”
“하지만 이렇게 자면 추워.”
그 말에는 한주도 대답하지 않았다.
“얌전히 껴안고만 잘게.”
목소리에 기운을 빼고 부탁했다. 잠시 조용히 있던 한주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대로 있어.”
경고에도 몸을 돌리는데 언제 다시 돌아왔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어깨가 잡혔다. 한주는 그의 품에 베개를 안겨 준 뒤 다시 벽을 보도록 옆으로 눕히고 뒤에 누웠다.
“이제 됐지? 품에 베개 껴안고 있으니 앞뒤로 따뜻할 거야.”
한주는 나약한 모습에 마음이 여려져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았다.
제 모습이 우스웠다.
제 것이라 생각한 베타를 이기지 못해 베개를 껴안은 채 한주에게 안겨 있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품에 넣어야만 소유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겨 있으니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박한주.”
“자라.”
한주는 하품했다. 아침부터 쓰러진 우강희를 발견하고 이무열을 호출해 병간호까지 했으니 피곤할 만했다.
간질거리는 웃음을 참으며 우강희는 말했다.
“잠이 안 와.”
“어쩌라고. 좀 자.”
복수하듯이 한주는 강희의 배를 문질렀다. 작은 자극에도 위험한 몸은 좋아하는 사람의 스킨십에 금방 반응했다.
“흣!”
흠칫 떨며 다리를 움츠리자 한주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배에서 손을 떼려 했다.
“미안.”
“미안하면 손잡아 줘.”
허락을 받기 전에 이미 한주의 손 위로 손을 덮어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었다. 얌전히 안고 있는 베개 위에 올렸다.
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아 한주는 안심하며 춥지는 않을까 몸을 더 붙였다. 머리카락이 우강희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이러고 자라니, 잔인하네.’
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아쉬움에 강희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한주의 검지 손가락을 문질렀다.
한주는 저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갈증이 더 강해졌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강희는 아쉬움을 달랬다.
“음…….”
“아직 추워?”
그런 신음이 아닌데 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걱정한다.
조금 기다리자 한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한주는 잠에 빠지면 좀처럼 깨지 못했다.
‘슬슬 몸을 돌려도 괜찮겠지.’
강렬한 욕망에 강희는 슬쩍 몸을 돌리려는데.
“쓰읍. 얌전히 자.”
한주와 눈이 마주치고 강희는 앞을 보았다. 한주의 침대에 누웠으니 베고 있는 베개는 한주 거였다. 베고 있는 베개와 품에 안은 것을 바꾸었다.
그제야 조금 위로가 되었다.
* * *
A동 기숙사 7층의 알파 다섯 명이 주기가 아닌데도 갑자기 러트가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오메가 페로몬이 퍼졌다고만 판단했다. 학생들이 없는 낮에 건물을 전체적으로 소취 했다. 다행히 다른 층으로는 번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우강희의 방을 중심으로 몇몇 방을 관리 팀에서 맡았다. 그래서 우강희의 러트는 비밀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같은 방의 한주까지 결석했으니, 더욱.
* * *
소취 팀이 그들의 방을 청소했다.
호텔에서 전문 팀을 종종 보는 한주는 재강원 고등학교 소취 팀의 일 처리에 놀랐다. 그들은 페로몬이 묻은 한주와 우강희에게 안전복을 입히고 방과 환기구의 필터까지 싹 갈았다.
그 후에 한주와 우강희는 차례차례 욕실로 들어가 몸에 묻은 페로몬을 씻어 냈다. 한주가 씻고 나오자 강희가 욕실로 들어갔다.
“이제 괜찮아졌네.”
작업 진행을 지켜보던 무열은 한주가 욕실에서 나오자 구석구석을 훑어보더니 한주의 머리카락 냄새도 맡았다. 옆에서 체크하던 소취 팀 팀장이 미소를 지었다.
“얘기는 들었지만 페로몬 무감증이 있는 분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강희 님이 마음을 놓았나 봅니다. 아무리 같은 방을 쓴다지만 베타에게 이렇게 페로몬을 묻히지는 않으니까요.”
“소취는 확실히 됐겠죠?”
“네, 저희 소취 팀은 세계 톱급입니다. 이 방은 얘기하신 대로 제일 높은 등급으로 소취 했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말에 무열도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살짝 붉어진 팀장의 뺨을 놓치지 않았다.
직원이 더 남아 있어도 되는데 소취 팀 팀장은 소취가 끝나고 점검하기 전에 일찌감치 직원들을 내보내고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보통의 알파라면 완벽한 소취겠지.’
평소답지 않게 기분이 울렁이는 것은 무열도 마찬가지였다. 임신해서 참을 만한 정도였지만 오래 있으면 괜찮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우강희만 나오면 되니 팀장님은 가 보세요. 나머지는 제가 마무리하고 주의 사항을 알려 주겠습니다.”
“하지만…….”
팀장은 주저했지만 오래 버티면 좋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마무리를 부탁하고 방을 나갔다.
“주의 사항이 더 남았어요?”
방에 사람들이 오가며 청소하고 한바탕 소란이 지나갔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끝났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한주는 또 뭐가 남았냐며 눈썹을 떨어뜨리며 무열을 보았다.
“없어. 러트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하려는 거야. 같은 층에서 몇 명이 갑자기 러트가 와서 팀장님도 바쁘고.”
“아, 그런 것도 서로 영향을 줘요?”
“보통은 알파끼리 영향은 없어. 보통은…….”
그때 강희가 욕실에서 나왔다.
면으로 된 얇은 바지와 티셔츠만을 걸쳤는데도 마치 막 화보 촬영을 끝내고 나온 모델처럼 핏이 달랐다. 한주는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옷장에 있던 그들의 옷은 모두 수거되어 세탁해서 내일 받게 된다. 소취 팀에서 제공한 속옷과 가벼운 옷차림으로 종일 지내야 한다.
강희가 한주에게 다가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주의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잡아 보더니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았다. 그의 숨이 한주의 두피까지 닿았다.
원래도 강희는 한주에게 종종 닿아 오며 주변을 맴돌았지만 러트에 들어서면서 옆을 떠나지 않았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TV를 볼 때도 무릎이 닿았고 한주의 머리카락을 무심결에 만졌다.
이전에는 괜찮았는데 러트 때부터 살짝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제 묻어 있지 않네.”
“페로몬? 약품 때문에 피부가 좀 따갑기는 한데 효과는 확실한가 봐.”
한주는 킁,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평소 쓰는 소취용품은 시트러스 향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병원 알코올 향이 강했다. 어쩐지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끝에 아쉬움이 묻었다.
“우강희.”
엄격한 목소리로 무열이 그를 불렀다.
갑자기 바뀐 목소리 톤에 한주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열은 강희를 노려보았다.
그는 한주를 보고 있다가 무열에게 눈길을 주었다. 보란 듯이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러트라는 핑계로 한주에게 듬뿍 자신의 페로몬을 묻혔던 만족감이 표정에 묻어 있었다. 무열은 경고했다.
“조심해.”
“응급 키트까지 쓸 정도의 사고였습니다.”
“앞으로도 조심하라고.”
“다 끝났으니 그만 가세요.”
학생들이 등교한 후부터 시작한 소취 작업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그때까지 한주와 강희는 몸에 묻은 페로몬이 새어 나가지 않게 갑갑한 안전복을 입고 불편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한주의 곁으로 가자 강희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페로몬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염려되는 상황이었다. 러트가 괜히 발정기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본능이 강해지고 이성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조심해, 우강희.”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는 말이 더 무서웠다. 팔에 닭살이 오스스 돋았지만 무열은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양호실에서의 일로 무열은 그가 두려워졌다.
인간을 벗어난 존재 같았다.
“러트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어. 몸 컨디션에 따라 다시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 우강희 너는 오늘 밖으로 나가지 마. 한주는 오늘만 내 방에서 지내자.”
무열이 한주를 자신의 방으로 피신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강희가 친근하게 한주의 머리카락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끌어당겼다. 한주는 거부감이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태가 나빠지면 한주가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더 부탁할게.”
다정한 목소리로 부탁하지만 무열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
“우강희.”
“이틀 고생했을 뿐인데, 뭐. 선생님, 그냥 방에 있어도 돼요. 우강희도 괜찮다지만,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고. 같이 있을게요.”
자기 뜻대로 된 것이 기꺼워 강희가 한주에게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러트라서 강한 억제제를 맞았다는 핑계로 약한 척하고 있지만 무열에게는 그저 수작 부리는 모습으로 보였다.
“제대로 갚을게.”
“갚을 필요 없어. 네 덕에 기숙사에서 지내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목숨값이지.”
“목숨까지는 아니지만, 마음대로 해.”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무열은 입술을 깨물었다. 막고 싶지만 우강희가 두려웠다. 한주에게 안내장 하나를 꺼내 주었다.
“주의 사항이니까 잘 읽어 보고, 상황이 안 좋으면 연락해.”
“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다고 말하는 말투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무열은 방을 나왔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알파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들의 집착과 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무열은 우강희의 위험성을 알기에 한 발짝 물러났다.
한주의 SOS 전화에 안전복을 입고 처음 방으로 들어갔을 때 느꼈던, 단단한 안전복의 재봉선 틈으로도 들어오던 페로몬에서 우강희의 감정을 느꼈다. 기쁨, 환호, 짙은 소유욕. 정신을 잃어도 타인이 그의 공간에 들어온 것만으로 경계하며 위협했다.
우강희는 박한주를 원한다.
타인조차도 얼굴이 뻘게질 정도로 적나라하게.
무열은 기뻐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우강희는 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 * *
밖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만 하교 전이라 학생이 별로 없다며 강희는 한주를 데리고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식사하는 내내 오가는 말은 없었다. 먹기 바빴다. 한주는 식사를 끝내고 나서야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아, 라면 먹고 싶다. 방에 돌아가면 사발면 하나 먹어야지.”
빈 접시를 치우러 온 서버가 흠칫 놀라며 한주를 보았다. 우강희 역시 서버와 표정이 다를 거 없었다.
테이블 위에 접시가 다섯 개다.
혼자 3인분을 먹었으면서 라면 먹고 싶다는 한주의 말에 강희는 서버가 들고 있는 접시를 다시 확인했다.
그는 옆으로 지나가는 한주의 불룩한 배를 손으로 눌렀다.
“여기에 라면까지 들어가?”
“누르지 마! 올라오잖아!”
몸을 피하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자 짓궂은 장난기가 피어났다. 강희는 도망치는 한주를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안았다. 불룩한 배를 다시 만지자 한주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 말라니까! 어제 너 간호하느라 피곤한 사람한테 무슨 짓이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지 말라 해도 배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자 한주는 강희의 머리를 잡고 마구 헝클였다. 정신없는 손길에도 그는 저항하지 않고 웃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손길을 즐겼다.
한주는 손을 떼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달렸다. 강희가 도착하기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금방이라도 쫓아갈 듯이 움직이던 그의 걸음이 문이 닫히자 느려졌다.
소란스러웠던 모습이 환상인 듯 다시 우강희만이 가지는 특유의 고요함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던 서버들은 분위기가 바뀌자 흠칫 놀라며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는 1층 로비까지 갔다가 다시 최상층 카페테리아로 올라왔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니 한주는 소파에 누워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방 안에 인스턴트 라면 냄새가 떠돌았고 주방에 설거지하지 않은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라면 얘기를 하더니 그가 오기 전에 이미 먹어 치웠다.
“그사이에 벌써 먹었어?”
“역시 라면만 한 것이 없어. 이제 좀 살 만하다.”
“그 정도 먹고도 모자라면 병원 가야 해.”
“어, 엄마다.”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배부른 돼지가 꿈틀대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한주는 영상 통화를 하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아드을.
애달픈 목소리가 쩌렁하게 방에 울렸다.
강희는 한주가 어머니와 통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보통은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가든가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배불러 만사가 귀찮은 한주는 그대로 소파에 드러누워 전화를 받았다.
- 혹시 잘까 싶어서 낮에 톡 보냈는데, 기숙사야? 저녁은?
“금방 먹었어. 라면 먹으니까 좀 살겠어.”
- 라면 먹은 거야?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야지. 그 학교는 기숙사가 잘되어 있던데 음식이 부실해? 그럴 리 없을 텐데.
자리를 피해 주려고 일어나는데 대화가 들렸다. 강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양심을 묻는 그의 눈길에 한주가 재빨리 말했다.
“어, 엄마. 룸메이트 우강희야. 인사드려. 우리 엄마야.”
핸드폰 화면이 순식간에 강희를 향해서 피할 수 없었다. 화면에 뜬 얼굴에 잠시 놀랐지만 그는 예의 바르게 화면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강희입니다.”
-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 한주, 나쁜 애는 아니니까, 잘 지내 줘요.
“엄마, 나 성격 문제없어.”
엄마와 정답게 통화하는 모습을 보며 강희는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살갑게 얘기하는 모자의 모습이 어색했다.
* * *
어릴 때 우강희도 어머니와 단둘만 살았었다.
모자뿐이라 다정할 수도 있지만 그때의 어머니는 한주네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았다. 그것을 아쉬워한 적은 없다.
어머니가 다정하게 전화 걸며 챙겼다면 그는 되레 거리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
느긋하게 양치를 하고 있는데 한주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너 빔프로젝터 어떻게 연결하는지 알아?”
샤워를 빨리 끝내고 바지만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이미 등의 상처도 보인 마당에 몸을 가릴 필요는 없었다.
“아, 됐다!”
방 안이 어두웠다. 한쪽 벽으로 빛이 쏘아지며 화면이 떴다.
요즘 많이들 본다는 인터넷 영화 사이트가 비쳤다. 간접 등까지 끄고 온 한주는 언제 준비했는지 팝콘을 옆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소파에 등을 기대며 바닥에 앉았다.
‘소파에 올라가 앉으면 될 걸 왜 굳이 바닥에 앉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생활 습관이었다. 한주는 종종 그런 식으로, 소파가 있는데도 바닥에 앉았다.
그의 방에 빔프로젝터는 없었다. 물론 팝콘도 방에 있던 물건이 아니다. 우강희의 시선에서 의문을 읽었는지 한주는 노트북으로 영화를 고르며 설명했다.
“엄마가 여기 거 월정액으로 회원 가입했다고 보고 싶은 영화 있으면 보래. 프로젝터도 관리실에 얘기하면 준비해 준다고 들은 적이 있어 연락해 봤더니 금방 가져다주더라. 이거 볼래? 이 시리즈는 몇 번 봐도 재밌어.”
한주는 히어로물 하나를 선택했다. 처음부터 강희의 의견은 필요 없었다. 뻔뻔하게 어서 앉으라고 옆자리를 두드렸다.
한주가 앉은 바닥에는 앉지 않고 소파에 앉자 못 보던 스피커에서 웅장한 음향이 흘러나오며 영화가 시작했다.
“오오!”
취향도 아닌 영화를 보게 된 강희는 티셔츠를 입고 소파에 기댄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주는 그의 손에 팝콘을 쥐여 주었다. 살짝 열이 오른 손끝이 강희의 서늘한 손에 닿았다 떨어졌다.
어쩐지 그 열기가 선명하게 손에 남았다.
“네 거야.”
우강희는 한주의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자다 깼을 때 삐쳤던 머리가 그대로였다. 식사하는 내내 단정하게 가다듬고 싶었다.
영화에 집중하려고 시선을 돌렸지만 취향도 아닌 영화를 보려니 지루하기만 했다. 그것보다 한주의 삐친 머리가 더 신경 쓰였다.
강희는 영화로 시선을 주려고 몇 번 노력하다가 한주의 머리카락을 잡았다. 영화에 집중해서인지 머리카락을 만져도 돌아보지 않았다.
손이 대담하게 움직였다.
삐친 머리카락을 펼 요량으로 만지는데 스르륵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간지러움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되었다. 무심히 계속 만지게 된다.
손의 촉감이 민감해지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이 민감해지며 몸이 달아올랐다.
바짝 붙어 앉은 것도 아닌데 한주에게서 맡았던 피부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나른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강희는 한주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움직였다.
기우뚱 그의 쪽으로 한주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계속 만져도 된다는 허락의 몸짓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머리 만져 주니까 지영이 생각난다. 다음 주부터 온다고 들었는데.”
“네 친구라는?”
“어. 지영이가 머리 만지는 거 좋아하거든. 나보다 작으면서 꼭 남의 머리를 만졌지.”
만지는 사람은 우강희인데 한주는 다른 사람에 대해 얘기했다.
강희는 손을 치웠다. 노곤하게 풀어지던 기분이 찬물을 부은 듯 조여들었다.
“언제부터 친구였어?”
“엄마들끼리 친해서 어릴 때부터. 아, 지영이 어머니는 여배우 민소희야. 촬영이 있으면 그 녀석을 우리 집으로 보내서 어릴 때부터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아. 형제 같은 사이야. 불알은 안 봤지만 그 정도.”
“그래? 부럽네.”
그의 목소리에 부러움은 들어 있지 않았다.
“부럽기는, 너도 형제 있…… 아니다.”
강희는 다시 한주의 머리를 쓸었다. 가볍게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빠져나갔다. 품에 안고 머리카락 사이에 입술을 넣어 속살을 핥고 싶었다.
약을 먹어 본능을 강제로 누르기는 했지만 러트의 영향이 남아 무심코 하는 생각이 진해졌다.
“친구들도 많잖아. 이성진이나 차원구나…… 친하면 친구가 형제나 마찬가지지.”
“그들은 친구가 아니야. 그냥 서로 필요에 의해 어울리는 동료지.”
건조한 대답에 한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알파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서로 그렇게 말해서야?”
강희는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너만큼 내 사적인 부분을 보인 사람은 없어. 이제는 네가 제일 가까운 사람이야. 네가 싫지 않다면.”
감추지 않는 호감의 말에 한주는 부끄러워졌다.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지만 귀로, 뺨으로 열이 올랐다. 강희는 고개를 숙여 한주에게 다가갔다.
“싫어?”
“낯간지럽게 친구끼리 누가 그런 말을 한다고! 영화 보잖아. 저리 가.”
밀어내는 손에 힘은 없었지만 강희는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 몸을 늘어뜨렸다. 종아리가 바닥에 앉은 한주의 무릎에 닿았다.
옷을 입었지만 그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 * *
영화의 엔딩이 올라갔지만 우강희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영화 중간에 한주는 소파에 올라오더니 누워서 보기 시작했다. 배는 부르고 누워 있으니 당연히 잠이 들었다.
강희의 시선은 줄곧 화면이 아닌 한주를 향해 있었다. 소파의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옆으로 등을 구부리고 누운 한주의 발은 우강희에게 닿지 않았지만 가까웠다.
그의 시선이 한주의 얼굴에서 어깨로, 움푹 들어간 허리를 지나 발목으로 내려왔다.
한주는 방으로 돌아오면 편한 반바지를 입었다. 구부리고 있어 무릎이 드러났다. 움푹 들어간 오금 위로 바지에 가려진 허벅지가 보였다.
그의 손이 한주의 복숭아뼈에 닿았다.
얇은 피부 아래, 뼈의 모양을 그리듯 손가락 끝이 움직였다. 나오지 못하는 페로몬이 몸 안에서 꿈틀댔다.
그의 몸이 사선으로 한주를 향해 움직였다.
부드럽게 눌리는 시트는 잠든 한주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영향을 준다 해서 한주가 잠에서 깨지는 않을 테지만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그대로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주의 목덜미를 감쌌다. 잠들어 있어 따끈해진 체온이 서늘한 손에 닿았다. 몸을 달구며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그의 손이 한주의 목을 어루만졌다. 손바닥 전체에 부드러운 피부가 닿았다.
강희는 다른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한주의 목에 얼굴을 가져갔다.
알파나 오메가가 아니니 감정을 담은 페로몬은 없었다. 독한 알코올의 소취제 냄새가 옅어지고 한주에게서 나는 살 내음이 드러났다.
사람에게는 페로몬 외에도 체취가 있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의 향기.
개처럼 섬세한 후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차이지만 강희는 그 귀밑에서 옅디옅은 한주만의 냄새를 맡았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폐부 깊숙이 꾹꾹 눌러 담았다.
잠시 카페테리아에 다녀왔다고 그사이에 타인의 페로몬이 묻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한주의 체취가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에 노출되는 일방적인 번잡함이 없었다. 강제적인 정보가 없는 본연의 체취는 그의 마음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알파와 오메가에게 대적할 페로몬은 없지만 오히려 무방비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상대 또한 무장 해제 시키는 힘을 한주는 가지고 있었다.
‘내 거다.’
욕심이 생겼다.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후천적으로 거세했던 욕구는 자각하기 무섭게 부지불식간에 덩치를 키웠다.
타인은 언제나 그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고 그의 파괴적인 DNA 때문에 원하지 않았지만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는 한주의 얼굴을 확인했다.
잠시 주저했지만 욕망을 무시하지 않았다. 한주와 같은 눈높이에 몸을 낮추며 여린 목을 만지고 과학자가 실험체를 관찰하듯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타인의 피부에 닿은 손으로, 한주의 체온이 그에게 바이러스처럼 옮겨 왔다. 뇌가 푸딩이 되어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머리를 채워 갔다.
강희는 한주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갔다. 숨을 들이마시자 몸 구석구석으로 한주의 냄새가 퍼져 갔다.
흔적을 남기고 싶다. 내 거라고, 남들이 다 알 수 있도록,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속에서 끓어오르는 소유욕에 신음이 나왔다.
그러나 당장 제 속을 내보이며 원하는 대로 하면 안 된다는 이성이 욕망을 붙잡았다.
‘박한주는 베타라 아무것도 몰라. 싫으면 언제든 도망갈 수 있어.’
알파와 대등하게 싸우며 절대 지지 않는 강인함은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도 그러했다.
한주를 가지려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거부하지 못하도록.
깍지를 끼며 얽히듯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 * *
한주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떠 보니 식당이었다. 많은 학생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 쟁반을 들고 테이블에 앉아 저를 힐끔대며 수군거렸다.
“깼어?”
옆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우강희가 보였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움직였다.
“일어나는 시간이 원래 이 시간이었어.”
혼잣말을 중얼대며 그는 아직 잠이 덜 깬 한주의 앞으로 물컵을 밀었다.
“물 마셔.”
“어? 내가 왜 여기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주는 물을 마시며 주변을 보았다. 어떻게 이 시간에 식당에 와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사이 몽유병이 생겼나?’
두 사람을 보고 있었는지 한주가 고개를 돌리는 대로 학생들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느낌으로는 자다 깼는데 눈을 떠 보니 식당이다. 멀쩡히 교복도 입고 있었다. 꿈이라기에는 냄새와 소음이 생생했다.
어리둥절해 눈만 끔뻑이는데 옆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깨우지 말라고 해서, 깨우지 않고 옷 갈아입히고 씻겨서 데려왔어.”
“……뭐?”
우강희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한주의 고개가 살짝 바닥으로 향했다. 다른 방향에서 설명이 날아왔다.
“우강희가 널 안고 오는데도 어떻게 한 번도 안 깰 수 있어? 우강희가 드디어 베타 하나를 해치웠나 생각했어. 자수하러 가는 줄 알았더니 식당으로 널 데려가잖아. 도대체 러트 기간에 방에서 둘이 뭐 했길래 사이가 그렇게 좋아졌냐?”
차원구가 키득거렸다.
“동영상도 찍었어. 이거 평생 소장 각이다.”
원구가 보여 주는 동영상에는 한주를 안고 가는 강희가 찍혀 있었다.
아이를 안은 포즈였다. 교복을 입은 한주의 엉덩이를 받쳐 껴안고 우강희가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주변 학생들의 표정도 생생하게 찍혀 있었다.
다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 경악했다. 어떤 학생은 물건을 떨어뜨렸고 영상을 찍는 학생도 있었다.
“삭제.”
한주는 빠르게 동영상을 지워 버렸다. 원구는 놀라지 않았다.
“영상이 톡방에 남아 있으니 괜찮아.”
재빨리 우강희의 주변을 보았다. 핸드폰이 없자 그의 주머니를 뒤졌다. 강희는 오히려 한주의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는 웃으며 한주에게 속삭였다.
“이런 데서 만지지 마.”
“휴, 찐하다.”
“우강희 핸드폰 내놔! 깨우지 말라고 했으면 그대로 자게 둬야지! 이제까지 지각한 적 없다고!”
“아침도 못 먹잖아.”
톡방에 올려진 영상은 원구 폰으로 톡방을 폭파하지 않는 이상 삭제할 수 없었다. 톡방에는 우강희 외에 이성진과 황치운도 있었다.
한주는 혀를 차며 화면을 노려보았다. 우강희는 한주를 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좋아해, 박한주.”
“시끄러워, 그런 말 한다고 용서해 주지 않아.”
화를 풀어 주기 위한 애교라고 생각해 한주는 코웃음으로 고백을 날려 버렸다.
“허.”
“맙소사.”
“지금 내가 들은 소리가 뭐야?”
주변에서 경악하며 우강희와 한주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도 모르고 한주는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