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베타 리턴 3권-15. 안녕 (15/31)

베타 리턴 3권

15. 안녕

이무열은 부동산 앱을 확인하며 한숨을 쉬었다.

“왜 이리 비싸.”

학교에 사직서를 냈지만 아직 후임자는 채용되지 않았다.

B동 기숙사 폐쇄로 잠시 직원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고 한두 달 시간이 지체될 것은 각오했다. 학교로 들어오면서 부모님이 살던 집을 정리했기에 학교를 그만두면 살 곳을 마련해야 한다.

마음에 드는 매물이 별로 없었다.

전세도 힘들고 월세로 살아야 하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면 당분간은 아르바이트하며 퇴직금을 쓰면 되지만 아이를 낳으면 일을 못 한다.

“차라리 지방으로 갈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시골에서 소소하게 지내도 좋지 않을까.

쉽지 않겠지만 행복한 꿈을 꾸었다.

재강원의 애인으로 오래 있었지만 금전적인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그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지키고 싶었다.

떠안기는 물건들을 몇 번 돌려주자 그는 돌려주지 못하는, 쓰고 버리는 것으로 선물을 주었다. 그래서 무열에게 재강원의 흔적은 몇 가지 없었다.

다 낡아 오래전 일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들만 남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주었다는 기억도 못 할 것이다.

주말에는 서울의 부동산을 돌아볼 계획이었다. 차 리모컨을 눌러 시동을 켜고 주차된 차로 다가가는데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승합차의 문이 열리면서 정장을 입은 남자 넷이 내려 무열에게 달려왔다. 귀에 인이어를 끼고 있었다.

그들은 무열을 붙잡아 승합차로 데려갔다. 잠시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누가 시켰습니까? 얌전히 따라갈 테니 손 놓으세요.”

정중하게 말했지만 그들의 손 속은 거칠었다. 무열을 뒷좌석에 던지듯이 집어넣어 양쪽에서 팔을 잡고 고개를 숙이게 했다. 거칠게 다루라고 명령받았을 것이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누가 시켰냐니까!”

몸부림치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얌전히 잡혀가겠지만 그는 이제 혼자 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퍽, 소리가 먼저 들렸다.

충격이 뒤늦게 왔고 신음을 뱉으며 머리를 감싸는데 팔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안 돼…….”

효과는 빠르게 몸에 퍼져 무열을 잠식했다.

의식이 멀어지는데 두근두근, 어디선가 작은 심장 소리가 났다. 너무 작아 언제 꺼질지 모를 촛불 같은 소리였다.

* * *

“이제 눈 뜨지? 마냥 기다려 줄 정도로 시간이 많지 않아.”

알고 있는 여자 목소리에 무열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떴다.

느릿하게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호텔 방이었다.

대학생 아들을 둔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보이는 여자가 소파에 앉아 무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열의 뒤로 그를 데려온 남자 넷이 서 있었다.

“베타라면서 이제 와서 오메가?”

재강원의 부인 오혜주.

좋은 집안에서 고고하게 자란 오메가 오혜주는 재강원과 결혼 후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남편의 애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자신이 넘을 수 없는 존재임을 주지시켰고 남편에게 애인이 있음을 알면서도 허락하는 아내의 포용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와 그들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 주었다.

오혜주는 그중 무열에게는 혹독했다.

재강원의 어머니 때부터 허락한 애인이며 제일 오래 재강원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니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유독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그나마 폭력이 수반되지 않은 것은 그가 베타이기 때문이었다.

재강원의 선물은 거절했지만 오혜주가 남편의 애인들에게 보내는 선물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오혜주는 포주처럼 남편의 애인들 건강을 신경 쓰고 선물을 주며 사생활도 챙겨 주었다.

그것은 단지 관리에 불과했다.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무리 남편의 애인을 혼내기 위해서라지만 먼지 날리는 허름한 창고에 오지는 않을 여자였다.

무열은 적어도 맞지는 않겠다고 안심했다.

“원래부터 오메가였다지. 그이가 로열 알파지만 형질을 발현시킬 정도의 알파는 아니지.”

“……큰 사모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동안 억제제를 먹으며 베타로 살았습니다.”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오혜주에게 무열은 존대했다.

“하긴. 어머님이 그이 옆에 혈통도 좋지 않은 오메가를 둘 리 없어.”

마치 애완견 얘기하듯 말하는 말투에 이제는 상처받지 않는다.

무열에게는 그런 것이 상처로 남지 않을 만큼 흉터가 많았다.

“그런데 왜 지금에서야 오메가라고 말하지? 그이를 흔들고 싶어?”

“그 사람에게는 더는 만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오혜주는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뭔데?”

오히려 표독스러워졌다.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았다.

“네가 그 사람을 만나고 말고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해? 그동안 자기 분수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성질을 죽이고 있었구나. 건방지게 네가 뭔데 그이를 만나고 말고를 선택해?”

오혜주는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짓에 무열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움직였다.

짝, 두툼한 남자의 손이 무열의 뺨을 쳤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나마 룸 바닥이 카펫이어서 다행이었다.

“너는 그 사람이 부르면 오고 다리 벌리라고 하면 벌리면 돼. 그냥 그 사람을 기쁘게 만들 궁리만 하면 된다고. 원래 그런 용도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신음을 참으며 무열은 일어났다.

남자들이 그의 어깨를 눌렀다. 도망가든가 반항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은 겁을 주며 힘으로 눌렀다.

오혜주는 무열의 진심을 비웃었다.

“정말 그만하고 싶었으면 확실히 해야지. 넌 그이의 시선을 끌고 싶어 아양 부리는 거잖아.”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진짜 그만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

만나던 사람을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아도 그에게는 허락이 필요했다. 무열은 그들에게 그런 처지였다.

“진심인데 왜 말로만 해? 그이와 정말 헤어지고 싶으면 좀 더 확실한 방법이 있잖아.”

무열은 숨을 멈추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잖아. 그이는 자기 물건에 다른 사람의 손때가 타는 걸 싫어해. 다른 남자와 자면 쉽게 널 놓아주고 그이와도 정리될 텐데 왜 안 하고 말로만 그래? 그러면서 나에게 믿으라고?”

“만나지 않겠다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몸을 주겠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널 못 믿겠어. 그이 관심을 끌려고 쇼 하는 걸로밖에 안 보여. 진심이면 제대로 행동해 봐.”

“제발, 조용히 끝내고 싶습니다. 진심입니다.”

오혜주는 ‘흐응’ 콧소리를 냈다. 소름이 끼쳤다.

이무열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거라는 신호였다.

“알았어. 그만 만나.”

허락의 말인데도 더 불안해졌다. 순순히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다.

오혜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클러치를 손에 들었다. 퍼를 어깨에 걸친 그녀는 파티에 참석할 듯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시간이 됐네. 오늘 이 호텔에서 부부 동반 모임이 있거든. 그이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가 봐야겠어.”

또각또각 면적이 좁은 하이힐 굽의 소리가 바닥을 가볍게 때리며 무열의 옆을 지나쳤다.

무열은 그녀가 지나갈 때까지 숨을 쉬지 않았다. 작은 숨소리에도 폭탄이 터질 수 있었다.

“그이와 만나고 싶지 않다니까 원하는 대로 해 줘.”

“네.”

오혜주는 기어코 폭탄을 던지고 방을 나갔다.

팔을 잡고 있던 남자들이 그를 풀어 주었다. 억압하는 힘이 없어졌는데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남자들이 못마땅하게 말했다.

“나이가 많은데.”

“그냥 즐겨. 오메가라잖아.”

“페로몬도 안 느껴지는데 오메가는 무슨.”

그들은 평온하게 대화했다. 정장 상의를 벗어 근처 소파에 던졌다. 그리고 재촉하듯 가볍게 구두로 바닥을 찼다.

“나…….”

무열은 몸을 떨며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임신했으니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후가 걱정이었다. 임신했다고 명령을 듣지 않을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임신이 오혜주에게 알려지거나 재씨 집안에 알려지면 어떤 후폭풍이 불어올지 더 불안했다.

“제발, 얌전히 떠나겠습니다. 이대로 곧장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아니 해외로 떠나겠습니다.”

배를 감쌌다. 눈물이 쏟아졌다.

앞으로 어찌 될지 알면서도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피차 피곤하게 가지 맙시다. 우리도 노땅을 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명령에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인 거.”

“제발요, 제발 부탁합니다……. 그 사람한테는 다른 사람과 잤다고 얘기할게요.”

“로열 알파가 속겠습니까? 페로몬은 기가 막히게 맡을 텐데.”

“그럼 묻히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왜 이렇게 피곤하게 하실까.”

말을 받아 주던 남자가 무열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묻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 뻔히 아시잖아요, 아저씨. 안에 쑤시는 페로몬이 다른 걸 알면서 눈 가리고 아웅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 자. 눈물 그치고 준비합시다. 네? 괜히 눈물로 기분 잡치게 해서 몇 대 맞지 말고. 험하게는 굴리지 않을 테니까.”

자못 너그럽게 말하지만 무열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누가 먼저 시작할까?”

“나이순으로 해.”

그 말에 무열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일어나더니 셔츠를 벗었다.

그들은 이무열을 동정하지 않았다.

* * *

“어서 와요. 먼저 도착해 있었어요.”

재강원은 팔짱을 끼는 부인 오혜주를 보았다. 모임 장소가 바로 앞인데 그가 움직이지 않고 보기만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체인 귀걸이가 찰랑 부드러운 라인을 그리며 움직였다.

“왜요?”

“아니.”

그는 오혜주에게 묻어 있는 희미한 페로몬을 맡았다.

이무열의 페로몬.

“그 사람을 만났나?”

누구를 말하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는데 오혜주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네, 당신과 그만 만나고 싶다고 해서 얘기를 좀 나누었어요. 제 역할이잖아요.”

“그렇지.”

재강원은 깔끔하게 긍정하며 오혜주와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 * *

이무열의 아버지는 재강원의 집에서 일하는 세 명의 운전사 중 한 명이었다.

집안 대대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온 그의 본가 주변은 직원들이 사는 집으로 마을을 이룰 정도로 거대했다.

친구의 부모도, 이무열의 부모도 그 집에서 월급을 받았고 주변에서는 큰 어른을 직접 만나 운전하는 이무열의 아버지를 대단하다며 부러워했다.

재강원의 집안만을 위해 이루어진 마을 안에서 그 집안사람들은 왕이었고 절대적인 신이었다.

주인의 말 한마디에 한 가족의 가장이 배척당해 자살했고 죄를 지으면 다음 날 가족들이 다 사라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잘못하고 주인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입 모아 말했다.

하늘과 땅은 큰 차이가 있었고 그저 직원의 가족일 뿐인 이무열은 주인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무열이 그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인 재강원을 만난 것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였다.

또래 애들보다 조용하고 어른스러웠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시험 성적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열은 초등학생인 주인 아들의 놀이 친구가 되었다.

그때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놀이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인의 세계에서의 친구는 무열이 알고 있는 단어와는 차이가 컸다.

무열이 주인 아들의 놀이 친구로 뽑혔다는 말에 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잘 모셔야 한다.’

아버지는 놀이 친구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긴장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본가로 들어간 무열은 처음 본 대저택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택은 TV에서 보던 유럽의 궁전같이 화려했다.

몇 번 주의를 받으며 아버지를 따라간 곳에 어린 재강원이 앉아 있었다.

이무열도 재강원도 아직 발현하지 않았던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이무열은 재강원을 자신의 알파로 인식했다.

첫눈에 호감이 갔다.

어린 꼬꼬마는 상대하지도 않았는데 이제 초등학교 저학년인 소년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감. 단지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도련님이라서가 아니라 이무열의 눈에는 특별하게 보였다.

어린 나이지만 그때부터 재강원은 존재감이 남달랐다.

‘그 아이인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재강원의 어머니가 이무열을 바라보았지만 저는 어린 재강원에게 시선이 빼앗겨 입을 벌리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움직일 거 같지 않은 인형 같은 소년이 무열을 보았다.

미소는 없었다.

인사도 없었다.

하지만 이무열은 그 시선만으로 그에게 잡혀 버렸다.

그것이 길고 긴 짝사랑의 시작이고 지옥의 문인지도 모르고 마냥 가슴이 뛰었다.

* * *

“열어.”

귀에 또렷이 박히는 음성이었다. 바로 귓가에 입을 가져가 들려주는 목소리 같았다.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남자들의 손이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바짝 근육이 긴장한 남자가 다른 사람과 시선을 교환하고 문을 열었다.

이무열은 침대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웠다. 버클이 풀린 바지도 여미지 못하고 티셔츠를 머리에 끼워 넣으려다가 제 앞에서 멈춘 구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재강원이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무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 무서울 거 없어 보이던 남자들은 바짝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서 빼더니 남자들의 뺨을 한 대씩 때렸다.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일어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명령하자 남자들은 비틀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재강원은 다시 일정한 간격으로 타격했다. 코피가 나고 입가로 피가 흐르고 맞은 뺨 쪽의 눈에 핏줄이 터져 뻘겋게 될 때까지 폭행은 두 번 더 행해졌다.

재강원은 제 것에 손을 댄 자들을 응징했다.

“화풀이하지 마, 이 새끼야.”

이를 갈며 욕했다.

재강원이 나타나자 안심했다. 이제 살았구나, 이제 일이 끝났구나, 눈이 뜨거워졌다. 그런데 재강원이 남자들을 차례차례 폭행했다.

무열의 안위를 걱정하지도 않고, 저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차가워지며 열이 끓어올랐다.

자기가 뭔데.

“네가 왜 그 사람들에게 화풀이야? 이게 누구 때문인데!”

퍽, 베개가 재강원의 몸에 맞고 떨어졌다. 남자들이 경악했다.

재강원은 미간도 찌푸리지 않고 무열을 보았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재강원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턱에 힘을 주어 바들바들 떨렸고 목이 뻣뻣해졌다.

“너 때문이잖아! 너 때문에 내가 이 꼴인 거잖아! 건들지 않게 한다며! 네 집안에서 날 건들지 못하게 한다며!”

속에서 열이 끓어올라 살을 파먹고 가슴을 들쑤셨다.

“좆만 휘두르며 돈만 쓸 줄 알았지, 쥐뿔도 힘도 없는 새끼! 집안 백이 아니면 로열 알파라는 허울만 있는 허수아비면서! 부인도 어쩌지 못해 이 꼴을 만들었잖아! 네가 뭔데 명령대로 따른 것밖에 없는 저 사람들을 때려! 네가 뭔데!”

그에게 다시 베개를 던졌다. 의자에 걸쳐져 있는 남자들의 상의도 집어 던졌다. 티슈 케이스가 날았다.

재강원은 피하지 않았다.

“이런 일, 다시는 없을 겁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무열이 아무리 악을 쓰고 소리 질러도 재강원에게는 닿지 않았다.

“왜? 또 당하고 난 다음에 구해 주게? 다시는 없어?”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났다. 눈물이 났다.

“내가 이런 꼴 당하는 게 처음인 거 같아? 이보다 더한 꼴도 당했어! 몸은 멀쩡해도 마음으로 이런 일, 몇 번이나 겪었어! 너덜너덜해지고 찢겨서 수십 수백 번을 가슴에 상처를 입었어! 너 때문에!”

잊었다고 생각한 지난 시간들의 감정이 쓰나미처럼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이무열을 덮쳤다.

“그만하자고 했잖아! 더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도대체 날 어디까지 떨어뜨려야 만족할 건데! 재강원! 차라리 그때 죽게 날 내버려 뒀어야지!”

허억, 이무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러 남자에게 당할 뻔했다는 울화를 쏟아 내고 나니 기운이 빠지며 몸이 떨려 왔다.

진작 이렇게 재강원에게 화를 냈어야 했는데.

어찌 되든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였다. 그나마 아이는 무사하니 재강원에게 쏟아 버릴 용기가 생겼다.

방 안의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널 만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너만 만나지 않았어도…….”

침묵을 깨뜨리며 전화가 울렸다. 재강원은 핸드폰 화면만 확인하고 받지는 않았다.

“방에서 쉬고 있으세요. 끝나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대로 재강원은 방을 나갔다. 남자들이 뒤를 따랐다.

혼자 남겨졌다. 낯선 사내에게 몸을 내줄 뻔했고 아이까지 위험했던 현장에.

무열은 바닥에 떨어진 제 물건을 주웠다. 핸드폰과 지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방을 나갔다.

그만 만나겠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재강원은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라는 말을 했다. 그는 여전히 무열을 자기 사람 취급 했다.

“안 기다려. 우린 끝났어.”

방을 나서는데 뒤에서 무엇인가 주르륵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엉덩이 사이에서 흘러나와 바지를 적셨다.

“어?”

무심히 엉덩이 쪽을 문질렀는데 젖어 있었다. 엉덩이를 만진 손이 빨갰다. 철 냄새도 났다.

“안 돼, 안 돼…….”

피투성이의 손으로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호텔로 올 때는 사이렌을 울렸지만 병원으로 향할 때는 조용했다. 신고를 받았을 때는 일반인이었지만 구급차에 실리며 호텔 책임자가 구급대원과 얘기를 했고 사이렌 소리는 끊겼다.

언젠가 재강원의 어머니와 함께 갔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 *

응급실을 거치지 않고 곧장 VIP 병실로 옮겨진 이무열은 입이 무거운 의료진들에 의해 검사를 받았다. 자기들끼리 무언가 얘기를 하던 의사들은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무열을 냉정한 눈으로 보았다.

그들이 저를 어찌 보든 중요하지 않았다. 무열은 몸을 일으켜 배를 감쌌다.

아랫배가 묵직했다. 그 외의 다른 느낌은 없었다. 임신 중에는 하혈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확인받고 싶었다.

“아기, 아기는요? 무사한 거죠?”

입 안이 쩍쩍 갈라졌다. 목구멍이 말라 말 한 마디조차 힘들었지만 이무열은 물보다 아기의 건강이 더 걱정이었다.

의사는 시선을 피했다.

“스트레스가 심하셨습니다.”

“아기는요?”

“유감스럽지만, 유산되었습니다.”

아니라고,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메마른 피부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던 피처럼.

위로하려는 듯 의사는 설명했다.

“장기간 억제제를 복용한 것으로 나오는데 아기집이 약했습니다. 특히 임신 초기에는 유산되기 쉬워서 몸을 더 조심해야 하고, 이무열 환자님 같은 경우는 입원해서 절대 안정을 취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의사는 오래전 무열이 포기했던 일을 말했다.

“나이가 있고 아기집이 약해서 임신이어도 위험했지만…… 더는 임신이 힘드실 겁니다.”

“안 돼요.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내 아기…….”

겨우 찾아온 가족을 놓쳐 버렸다.

“안 돼!”

울부짖는 무열을 놔두고 의사들은 병실을 나갔다.

* * *

“안 돼……. 내 아기, 내 아기야…….”

한참을 울던 이무열은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을 보고 허겁지겁 침대에서 내려왔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였고 팔에 거추장스러운 링거 줄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피는 닦여 있었고 충전되어 있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재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헐떡이는 자신의 숨소리가 들렸지만 받지 않는 신호음만 귀에 들어왔다.

“받아……. 우리 아기를 살려 줘…….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 재강원, 제발…… 무슨 짓이든 해도 되니까…….”

무열이 먼저 전화를 한 적도 손에 꼽을 정도이지만 그중에 재강원이 전화를 곧장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전 8년 전 그날도 그랬다.

그와 밤을 보내느라 아버지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었다. 사고 소식을 알고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늦어 버린 보호자 때문에 동의를 받지 못해 처치는 지체되었고 아버지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도 이무열은 재강원에게 전화했었다.

무열이 그에게 안겨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었고 그는 보고를 들은 후 잠시 무열을 말없이 보았었다.

이무열은 아버지의 시신을 보자 재강원이 절 보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불길함에 당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리고 그때도 재강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금처럼.

“아아아…….”

천벌이었다.

품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마음에 품고 꿈꾸지 말아야 할 헛된 꿈을 꾸고 아버지가 죽어 가는데도 재강원의 품에서 신음을 질렀다.

예전에 끊어 내지 못한 벌로 이무열은 가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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