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고백과 계약서(1)
재민석은 클럽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만 바라보았다.
유력 집안의 알파 2세들이 모이는 전용 클럽은 알파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회원제였다. 민석은 가끔 클럽 주변을 서성이며 언젠가 들어갈 날을 꿈꿨다.
B동 기숙사가 A동 기숙사와 합쳐지면서 외부에서 등·하교하게 되었을 때는 더는 다른 베타들과 같은 건물을 쓰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B동도 1인 1실로 운영되어 방에 돌아가면 혼자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문밖으로 베타들이 돌아다니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 신경 쓰였었다.
게다가 기숙사는 주중에 외출할 때 담임에게 알려야 해서 귀찮았는데 외부에서 사니 외출도 자유롭고 편했다.
가정부가 냉장고에 음식을 채우고 청소해 주어 기숙사에서와 같은 편의를 제공받았고 민석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점점 하교하는 시간이 늦어졌다.
조용해서 좋았는데 그 적막이 거슬렸다.
기숙사에 있을 때는 복도에서 베타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는 달리 자신은 알파가 될 거라는 자신감에 공부에 집중했는데 혼자 있자 불안감이 적막을 채웠다.
민석은 주말이 특히 싫어서 본가로 꼬박꼬박 돌아왔다. 하지만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어머니 눈치가 보여서 약속이 있다며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 이렇게 들어가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클럽 주변을 서성였다.
민석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옆의 테라스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블렌딩은 언제 할 수 있는데? 돈값은 해야지. 네 동생은 네 말이라면 뭐든 듣는다며.”
“보채지 마. 너네가 잘 붙들어 두었으면 됐을 텐데 다루지도 못하면서 블렌딩을 한다고 그러다가 다들 그 사달이 일어났잖아. 정신이나 잃고.”
우천희의 목소리였다. 같이 있는 남자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재민석의 귀에 ‘블렌딩’이라는 단어가 또렷이 들렸다.
탁, 뒤에서 민석의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깜짝 놀라 벽으로 몸을 붙였다. 한수원이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부회장 한수원은 우천희 아버지의 비서 아들이라 우천희의 부하나 마찬가지였다. 수원이 손짓으로 클럽과 반대쪽을 가리켰다. 얼굴이 빨개진 민석은 후다닥 그곳을 벗어났다.
마른침을 삼켰다.
미성년자의 블렌딩은 불법이다.
성인의 경우 형질이 자리 잡아 변화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안정되어서 제재하지 않았지만 미성년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페로몬에 노출되어 자극을 받아 최악의 경우 코마에 빠질 수도 있었다.
뇌에 충격을 줄 수 있고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기에 미성년자의 블렌딩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을 우강희가 했다고.’
민석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은 기회였다.
* * *
한주는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떴다. 배고파서 잠이 깼다.
눈은 떴지만 아직 잠이 덜 깨어 머리가 멍했다. 본능적으로 머리맡과 베개 주변을 손으로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오후 1시가 넘었다.
아침잠이 많은 아들을 위해 어머니 박예주는 한주를 깨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주말이라도 푹 자라는 배려였다. 잘 때 문을 닫고 잤는데 자는 사이 박예주가 들어왔다가 나갔는지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거실에서 떠드는 소리가 틈새로 들려왔다.
“걔 남편이 그 정도야? 남편이 괜찮다는 말은 들었는데, 대단하다.”
“모아 놓은 돈은 쥐뿔도 없어서 결혼할 때 걔네 부모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상대 집에서 혼수로…….”
“뭐? 그렇게나 많이? 하긴. 그 정도로 잘사는 집이니 그렇기는 하겠다.”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한주는 더는 뭉그적거리며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느릿하게 일어나 방을 나왔다.
“할머니 오셨어요.”
거실에 앉아 있던 한주의 할머니 송이연, 주변 사람들에게는 송 여사로 불리는 그녀는 베개 자국이 선명히 찍힌 한주의 얼굴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주말이라지만 친구들과 적당히 놀아야지. 매번 너무 늦게 들어오는 거 아니냐? 아무리 고등학생이라지만 주말에나 겨우 엄마 얼굴을 볼 텐데 일찍 들어와야지. 네 엄마 말 들어 보니 어제도 새벽 3시 넘어서 들어왔다던데.”
“주말이 아니면 친구들 만날 시간이 없어서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한주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맨날 말만 그렇지.”
잔소리는 한 귀로 흘렸다.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데 박예주가 옆으로 다가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배고프지? 케일즙 만들어 놓았는데 그거 먼저 마셔. 조금 있다가 밥 차려 줄게.”
“알아서 먹을게.”
“할머니가 너 먹으라고 갈비찜 해 왔어.”
“갈비찜 좋지.”
목소리는 컸지만 한주는 냉장고를 열어 확인하지는 않았다. 물에 빠진 고기보다 불에 구운 고기가 더 좋다.
갈비찜을 좋아하는 건 박예주였다.
식탁 위의 사과를 한입 베어 무는데 송 여사와 눈이 마주쳤다. 갸름하게 바라보는 눈매가 서늘해졌다. 한주가 고개를 까딱여 묵례를 하니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손주 얼굴도 보았으니 이만 가야지.”
“저녁 먹고 가.”
“일주일 만에 아들 만났는데 같이 있을 시간은 있어야지. 그렇게 눈치 없는 할머니는 아니야.”
꼬장꼬장하게 말하며 송 여사는 가방을 들었다. 그 뒤를 박예주와 한주가 따라갔지만 한주는 엘리베이터 앞까지만 마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송 여사는 손자인 한주의 배웅은 서운해하지 않았지만 자식인 예주가 1층까지 마중하지 않으면 매일 하던 전화를 뚝 끊어서 서운한 심기를 드러냈다.
집으로 돌아오니 식탁 위에 못 보던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송 여사의 것이었다.
“똑같이 이런 짓을 하시네.”
이미 겪어 보았던 일이지만 한주는 송 여사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니 예주와 송 여사가 아파트 산책로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름길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코너를 돌면 송 여사가 지나가는 산책로였다.
봄꽃이 피고 지며 여린 잎들이 나무들을 장식해서 송 여사와 예주는 가까이 다가온 한주를 보지 못했다.
“참 철도 없다. 제 엄마는 돈 번다고 고생하는데 그 학비 비싼 학교를 들어가다니.”
예주는 아들을 변호했다.
“엄마, 말했잖아. 한주가 자기 힘으로 돈 벌어서 학비를 냈어. 알바 해서 모은 돈이 있으니 괜찮다고 얘기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엄마에게도 말했었잖아.”
“자기가 모으기는. 내 돈도 들어갔는데.”
“뭐?”
예주의 눈이 동그래지자 송 여사는 혀를 찼다.
“나도 그 애를 키웠으니까. 그리고 그 비싼 학교에 학비만 들어가니? 아니잖아. 베타면서 무슨 알파 학교를 들어가겠다고 그 난리야. 아직 철들려면 멀었어.”
“친구랑 꼭 같이 들어가고 싶었대. 그리고 그 고등학교는 베타 학생도 있어.”
“한 반에 겨우 한두 명뿐이라면서. 명목상 받는 거지. 그런다고 제가 알파가 될 수 있는 줄 아나. 어차피 그 애는 글렀는데.”
“엄마.”
나긋하던 예주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송 여사에게 박예주는 자식이지만 한주의 엄마이기도 했다.
송 여사가 열에 한 번 한주의 험담을 해서 항상 좋게 말을 말렸지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친구랑 같은 학교 가고 싶은데 엄마에게 부담 주기 싫다고 알바까지 하면서 돈을 모았어. 나는 그 애에게 너무 미안해.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런 부담 느낄 정도로 못 해 준 건가 싶어서.”
알파들이 다니는 재강원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 박예주가 지었던 표정이 어떤지 한주는 기억하고 있었다.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미묘한 망설임도 있었다.
한순간 지나가는 복잡한 감정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친구 핑계를 대면서 알바 해서 돈을 모아 학비를 마련했다고 설명했지만 예주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말보다 자기 힘으로 학비를 모았다는 말에 더 충격을 받았다.
이전에는 박예주가 어찌 생각할지 보지 못했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어서 엄마가 무슨 생각으로 허락했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송 여사는 냉정했다.
“낳아 주고 키워 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어차피 자식은 어릴 때나 품 안의 자식이야.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어. 너 역시도 그랬고.”
“엄마도 참.”
송 여사가 예전 일로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기에 박예주는 팔짱을 끼며 살살 몸을 흔들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니 재혼도 생각해 봐. 만나는 사람 있으면 붙잡아. 애 딸렸다고 해도 넌 아직 젊어. 한주 역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자기 일로 바빠져서 너는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너도 네 삶을 살아야지.”
“꽃집 잘 운영하고 있잖아. 누가 들으면 내가 집에서 살림만 하는 줄 알겠다.”
“그 꽃집이 누구 돈인데. 내가 투자해서 차린 거잖아.”
“알지이. 그래서 내가 송 여사에게 얼마나 감사하는데. 내 마음 알지?”
냉정한 현실을 알려 주자 박예주는 어머니 송 여사에게 애교를 부렸다.
자식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독립한다는 말에 반대하며 네 힘으로 살아 보라고 등 돌렸지만 결국 백기를 든 사람은 송 여사였다. 그녀는 박예주에게 가게를 하나 차려 주었다.
할머니 송 여사가 자식인 박예주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한주는 잘 알고 있었다. 송 여사와 눈이 마주치자 한주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핸드폰 놓고 가셨어요.”
예주는 갑자기 한주가 나타나 깜짝 놀랐지만 송 여사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 핸드폰 안 챙겼어?”
“놓고 왔었네. 고맙구나, 한주야. 여기까지 마중해 주었으면 되었어. 들어가 봐. 한주 밥도 챙겨 줘야지. 배고프겠다.”
“알았어.”
서슴없이 나오는 대답에 송 여사의 입매가 굳어졌다. 하지만 박예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한주만 알아본 미묘한 변화였고 송 여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인사하며 몸을 돌렸다.
대로까지 배웅해 주길 바라던 송 여사의 완곡한 말을 박예주는 알아듣지 못했다. 한주는 눈치는 챘지만 어머니에게 따라가 보라고 말하지 않았다.
혼자 걸어가는 송 여사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들은 집으로 향했다.
한주는 1층 현관 비밀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좋은 사람 있으면 재혼해. 난 이제 엄마 재혼 반대하지 않아.”
“어, 너 들었어?”
당황하는 예주의 얼굴은 우습다기보다 예뻤다. 한주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돈보다 엄마를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으로 골라.”
“난 너만 있으면 돼.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꽃집을 하는 박예주에게 반해 구애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고 한주에게 자랑도 했지만 박예주는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대학교에 다니느라 한주를 할머니에게 맡겨서 그 시간을 미안해했다. 한주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사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박예주는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주에게는 고맙지만 가슴 아픈 약속이었다.
“오랜만에 오늘 저녁은 한주와 먹어야지.”
“좀 일찍 먹어야 해. 저녁에 약속 있어.”
“어떻게 어른인 나보다 네가 더 바빠?”
소소한 대화를 하며 한주는 박예주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박예주는 집안의 유일한 오메가다.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 자식을 낳으면 높은 확률로 알파나 오메가가 태어나지만 박예주에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베타 자식을 임신했다는 이유로 사랑하던 남자에게 버려졌다. 오메가로 태어났으니 좋은 집안의 사람과 결혼해 다른 삶을 살 줄 알았던 자식이 버림받고 미혼모가 되어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못마땅하지만 애틋한 자식이라 송 여사는 박예주가 대학을 다니게 하려고 어린 한주를 대신 돌봐 주었다.
아무리 어린 한주의 부모라지만 자식이 안타깝고 버린 남자는 얄미우니 송 여사는 한주의 앞에서는 말을 가리지 않았다.
어린아이 앞이라서, 기억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에 거침이 없었다.
‘너만 생기지 않았어도 너네 엄마가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알파로 태어났으면 버림받지는 않잖아.’
‘어휴, 이 짐 덩어리.’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박예주가 학교에 가면 깊은 한숨과 함께 송 여사는 어린 한주에게 속을 풀어냈다.
그렇다고 폭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때 식사와 간식을 챙겨 주고 씻겨 주며 할 일은 다 했지만 연신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았다.
박예주가 없을 때만.
갑자기 자식이 사고를 치고 생각지도 않은 육아를 하게 된 부모의 괴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풀어낼 곳이 없어 말이라도 그렇게 뱉었겠지만 그 불만은 어린 한주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타인이라고 생각했으면 좀 편했을 텐데.”
이전의 삶을 떠올리며 한주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핸드폰을 놓고 가서 가져다주게 하면서 재혼 얘기를 듣게 했다.
악의적이지만 지금은 뻔한 속내가 보여 재미있었다.
가족이고, 엄마의 엄마니까,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인식 때문에 송 여사의 못마땅한 눈빛과 말 한마디, 눈치 주는 뉘앙스가 더 상처가 되었다.
타인으로 생각하면 조금은 보호막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선을 긋기가 쉽지 않았다.
* * *
한주는 약속이 있어 영화관 건물 도로 앞에서 사람을 기다렸다. 그 앞으로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한주도 알고 있는 마크를 단 차에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깍듯한 인사에 한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한주를 태운 차는 멀지 않은 주택가로 향했다. 눈에 보이는 건물들이 주택으로 변하자 한주는 두리번거렸다. 지영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차는 주차장으로 들어갔고 운전사가 뒷문을 열어 한주를 안내해 주었다. 주차장의 엘리베이터에 타자 층수를 눌러 주고 운전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리시면 대표님이 계실 겁니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서 문이 열렸다. 깔끔하고 회색빛의 모던한 분위기라 가정집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3층과 연결된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우람한 남자가 내려왔다.
“왔구나, 한주야.”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버지라고 부르라니까.”
NL네트웍스 대표 오송중. 그는 팔을 벌려 다정하게 한주를 안아 주었다.
우강희보다 덩치도 크고 우람해서 그가 끌어안자 품에 폭 안겼다. 어깨를 꽉 끌어안아 뒤꿈치가 들렸다. 스킨 향이 강했다.
“아저씨.”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면 안 놓아준다.”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 이 상황을 즐기는 오송중에게 한주는 항복했다. 끄응, 신음을 듣자 몸이 흔들리도록 오송중이 웃었다.
“아버지.”
“좀 더 이렇게 있고 싶은데.”
“스트레스 많으셨어요?”
그는 한주를 풀어 주었다.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언제 크지? 원래 네 나이에는 부쩍부쩍 크지 않나? 난 한 달에 10cm씩 크고 그랬는데.”
“천천히 클 거예요.”
슬프게도 한주는 자신의 최대 키를 알고 있었다. 고3이 되어도 지금보다 5cm 더 클 뿐이다.
하얀 셔츠 위로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비서가 안쪽에서 나왔다.
“식사하세요, 준비 다 했습니다.”
“가자, 어제 러시아에서 돌아온 참이라 매콤한 음식이 먹고 싶어서 낙지볶음을 준비하라고 했는데, 괜찮나?”
“네, 좋아해요. 가리는 거 없어요.”
이르게 엄마와 점심을 먹고 영화관에서 주전부리를 먹었지만 슬슬 출출할 시간이었다.
오송중은 다이닝룸으로 들어가 먼저 테이블에 앉았다. 비서가 한주의 의자를 빼 주었다.
“어, 한주 군. 다쳤어요? 입가에 흉터가 있는데.”
“뭐?”
그 말을 듣자마자 기역 자 자리에 앉아 있던 오송중이 한주의 턱을 잡아당겼다. 흉터가 흐릿해졌는데 용케 비서가 알아보았다.
오송중도 흉터의 흔적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새끼야?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이놈들이 남의 아들 얼굴에 이런 짓을 해?”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한주는 턱을 잡은 그의 손을 토닥였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잡힌 살이 아팠다.
“아버지, 손.”
“한주 군 턱에 멍 들겠어요.”
“아, 이런.”
손을 뗐지만 그새 벌겋게 자국이 남았다. 그는 미안함에 엄지로 부드럽게 피부를 문질러 주었다.
“학교 측에 언질을 해 두었어야 했는데.”
“이제 괜찮아요. 다 알아서 정리했어요.”
“예주 씨 성격을 닮아서 알아서 잘하겠지만 힘들 때는 어른을 의지해.”
“감사합니다.”
오송중과는 인연이 묘했다.
NL네트웍스는 무역 회사로 주력은 자원 개발 투자였다. 계무원의 GO투자홀딩스와 사업상 사이가 좋지 않아 계무원을 만나면 말로 총칼이 오갔다.
계무원과 한주가 식사하던 레스토랑에 오송중이 와서 인사하다가―그때 한주는 펑크 낸 오지한의 대용이었다―계무원이 오지한의 전화에 가 버리게 되었다. 음식은 시켰지만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한주는 혼자 식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눈에 걸렸는지 오송중이 합석을 제안했다.
그때 인연으로 오송중은 가끔 한 번씩 한주와 만나게 되었다. 한 해 전에 사고로 잃어버린 외아들이 한주와 같은 나이여서 그는 한주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알파들이 너무 심하게 굴면 아버지에게 일러. 다 처리해 줄 테니까. 그 나이 대는 짐승이나 다름없어서 매가 약이야. 네가 예주 씨를 닮아 걱정이야.”
한주는 웃느라 오송중이 비서에게 눈짓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엄마는 대학교 때 어땠어요?”
오송중은 박예주와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1학년에 굉장한 미인이 입학했다고 난리가 났었지. 내가 4학년 때 예주 씨가 1학년으로 입학해서 소문은 많이 들었어. 똑똑하고, 미인인 오메가가 들어왔다고 다들 술렁였지.”
음식이 나왔다. 넓은 접시에 시뻘건 낙지볶음 두 접시가 각각 앞에 놓였다.
“지금도 인기 많지?”
“그러잖아도 오늘도 같이 영화 보러 갔었는데 어떤 남자가 변호사라면서 명함 엄마에게 주었어요. 같이 온 사람도 있으면서 다음에 같이 식사하자고 당당하게 대시하던데요.”
오송중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작 변호사가?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네.”
“엄마는 전혀 관심도 없었어요.”
그랬을 거라며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식사를 이어 갔다.
“낙지볶음이 너무 맛있어서 밥 비벼 먹고 싶은데 그릇이 있을까요?”
“갖다줄게요.”
비서가 주방으로 보이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곧 도기로 된 볼을 가져왔다. 참기름이 담긴 종지와 양념을 하지 않은 마른 김도 함께였다.
“고맙습니다.”
한주는 볼에 밥을 넣고 양념과 나물 몇 가지를 넣고 참기름까지 살짝 둘러 야무지게 비볐다. 점심때 고기를 먹었더니 매콤한 낙지를 한입 먹기 시작하자 쑥쑥 들어갔다.
비벼서 한 숟가락 들고 마른 김을 올려 입에 넣으려는데 오송중과 시선이 마주쳤다. 입을 벌리고 있던 한주는 입에 넣지도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한 숟가락 드실래요?'
풉,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먹던 걸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맛있어 보이는군.”
가져오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비서는 한주에게 갖다준 대로 볼과 비빔 재료를 오송중의 옆에 놔주었다. 오송중이 손수 음식을 비비는 모습을 보다가 한주는 또 한입 먹었다.
김과 참기름을 넣고 비비니 더 맛있어졌다.
오송중은 식사하는 한주를 보았다. 같은 음식을 먹는데 한주의 것이 더 맛있어 보였다. 그의 앞에서 긴장하지 않아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그건 그가 박한주를 좋게 보는 부분의 하나였다.
베타이니 어른의 알파를 어렵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한주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도 베타였지만 아버지를 살갑게 대하며 애교가 많았어도 어려워할 때가 많았다.
다정한 눈으로 한주를 보던 남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었다.
“괜찮으세요?”
“우리 기준이 생각이 나서…… 미안해. 미안하네.”
이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룸에서 나갔다. 한주는 오송중이 나간 방향을 보았다.
그는 한주를 만나면 한 번씩 눈물을 보였다. 아들이 죽은 지 이제 겨우 2년째였다.
“차라리 절 만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괜히 더 생각나고.”
“그렇지 않아요, 한주 군. 그나마 대표님이 한주 군을 만나서 웃고 울고 감정을 보이시는 겁니다. 저렇게 감정을 표출하여야 마음에 좋다고 카운셀러도 권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비서의 말에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송중을 만나 대화하면 좋기는 하지만 타인의 나약한 부분을 이용하는 느낌이라 죄책감이 들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힘들어하는 오송중과 아버지가 없는 한주. 서로가 없는 것을 대용품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으로 물질적인 이득을 볼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같이 식사하고 대화하는 정도라서 그를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오송중이 돌아오지 않아 한주는 일어나 그가 들어간 안쪽으로 향했다. 비서도 말리지 않았다.
그는 깔끔한 서재 같은 방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주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오송중의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주는 구부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어설프게 위로하기보다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이번에 기숙사가 폐쇄되어서 알파와 방을 같이 쓰게 되었는데요.”
“뭐? 알파와?”
오송중이 즉각 반응했다. 눈이 붉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 자식이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아뇨, 룸메는 착해요. 오히려 절 도와주었어요. 처음에는 서로 맞지 않아서 고생했지만.”
그는 한주가 거짓말을 하는지 표정을 살폈다.
“고생?”
“아침잠이 많다고 말했는데 꼭 알람 한 번에 일어나지 않으면 깨우는 거예요.”
“아, 일찍 일어나면 며칠 고생한다고 했지.”
오송중과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잠깐 했던 말을 기억해 주었다.
“그러니까요. 결국 밤에 양호실로 가서 잤는데 그건 또 싫어해서 밖에서 자지 못하게 하려고 막고, 며칠은 완전 첩보전을 펼쳤어요.”
“……왜 밖에서도 못 자게 해?”
“몰라요. 깨우지 말라고 해도 싫다, 밖에서 자는 것도 싫다. 나보고 어쩌라고. 그래도 지금은 잘 해결이…… 어쨌든 잘 해결…….”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우강희는 여전히 한주를 깨우지 않고 한주의 등교 준비를 멋대로 했다. 잠이 덜 깨면 비몽사몽에 움직이기라도 한다는 것을 알고 세수와 양치를 시켰다.
다행히 안겨서 식당에 데려갔던 첫날을 제외하고는 방에서 한주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점심시간은 낮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잠에서 깨니 입을 벌리고 우강희에게 양치당하고 있었다. 완전 최악의 기상이다.
한주가 말을 멈추자 오송중의 눈두덩이에 그늘이 졌다.
“왜, 그놈이 무슨 짓을 했어?”
“아뇨. 저 힘세요. 아시잖아요. 가만히 당하지 않아요. 그리고 룸메는 폭력을 쓰는 타입도 아니고요. 그 녀석은…… 버려진 강아지 같은 녀석이라. 덩치는 크지만 그런 이미지예요.”
“……알파가?”
아무리 세상에 여러 성격의 알파가 있다지만 오송중은 한주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알파가 버려진 강아지 같다니, 그럴 리 없어.”
이상한지 그는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제 ‘페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네?”
오송중은 한주를 보았다.
베타치고는 나쁘지 않은 외모였다. 맑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머리카락, 다정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상냥함, 그리고 알파를 어려워하지 않는 성격은 큰 매력이었다.
“시간이 늦어졌네. 기숙사에 귀소 시간이 있다고 했지?”
말을 돌리며 오송중은 일어났다.
“데려다주지.”
“바쁘지 않으세요? 양평이라 시간이 걸리는데.”
“일요일이잖아. 가면서 네 룸메라는 알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어 보자.”
오송중의 눈빛이 번뜩였다.
* * *
일요일,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낸 우강희는 핸드폰 소리에 욕실에서 나왔다.
이름 없이 뜬 번호에 그는 수신을 거부했다. 그런데도 재차 울리는 전화도 거부하니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재민석이었다.
[재민석이야. 양평 카페에 있어. 네 비밀을 지키고 싶으면 카페로 와.]
글만으로도 자신감이 느껴졌다.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 양 평소에는 우강희에게 말도 못 붙이면서 당당히 불러냈다.
그는 지도가 첨부된 문자를 끄고 핸드폰을 책상에 놓았다. 나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읽으려고 든 책이 페이지 석 장을 넘기지 못했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주었다.
“비밀?”
그의 입매가 길쭉하게 늘어졌다.
* * *
재민석은 형의 핸드폰에서 우강희의 번호를 알아내 저장해 두었지만 한 번도 그 번호로 전화를 건 적은 없었다. 처음 전화를 걸 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이 떨렸다. 창백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걱정되어 카페 직원이 힐끔거리는데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민석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용기를 내 걸었던 통화는 거부당했고, 두 번째 걸었을 때도 거부당하자 들떴던 기분은 침착해졌다.
지금 우위에 선 사람은 우강희가 아니라 민석이었다. 벌벌 떨 필요는 없었다.
협박이 섞인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소파에 등을 기댈 수 있었다. 등에 닿자 땀이 났었는지 옷이 피부에 닿자 차갑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택시를 타도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도 우강희는 오지 않았다.
협박에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조함에 민석이 다리를 덜덜 떨며 다시 문자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들었을 때 카페 밖으로 택시가 멈췄다.
기다림에 보답하듯이 우강희가 택시에서 내렸다.
민석은 벌떡 일어나려는 몸을 눌렀다. 그가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이성을 다스렸다.
자신은 우강희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불러냈다고 화라도 내면 좋을 텐데 그는 무감한 시선으로 민석을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앞자리에 앉았다.
협박을 받은 사람은 그이고 비밀이라는 말에 찔려 결국 오고 만 사람도 본인인데 따지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열면 자신의 초조함을 들키는 셈이었지만 민석은 참을 수 없었다.
“비밀이라고 하니 너라도 겁이 났나 봐.”
우강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시선도 받지 못하자 민석은 자기 패를 내보였다.
“네가 블렌딩 했다는 걸 알고 있어.”
미성년자에게는 불법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던 우강희의 손이 멈추었다.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비밀로 해 줄 테니 나와도 해 줘.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그제야 우강희가 눈을 들었다. 민석은 속으로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알파들도 어려워하는 우강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환희에 뺨이 실룩거렸다.
“네가 천희 형이랑 짜고 블렌딩 했잖아. 미성년의 블렌딩은 불법인 거 알지? 비밀로 해 줄 테니 나와도 해. 내가 알파가 되도록 도와주면…….”
민석은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주변으로 차단막이 내려진 듯이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리가 끊겼다.
조용히 들려오던 카페 BGM, 멀리서 대화하는 사람들의 소리, 카페 밖으로 지나가는 차 소리, 원두를 내리는 기계의 소음조차 전부 사라지며 ‘무(無)’가 되었다.
“어…….”
추위가 찾아왔다.
턱이 덜덜 떨리며 몸까지 잘게 떨렸다. 제 몸 상태가 이상해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우강희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박제되어 핀에 고정된 채로 진열된 곤충처럼 눈동자만 움직일 수 있었다. 우강희 뒤로 보이는 매장 안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강희를 가리키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재민석은 보이지도 않는 듯이.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공기조차 격리된 기분이었다.
“흐!”
상태를 자각하자 온몸의 털이란 털이 다 쭈뼛 섰다.
재민석은 알지 못하지만 눈의 실핏줄이 터져 붉어지고 있었다.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못해 눈이 시려 왔다.
우강희는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무기질의 물체를 보듯이 민석을 보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었지?”
머리를 후려치듯 그의 저음이 민석의 몸에 내리꽂히며 화살에 맞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살을 째고 뼈에 박히는 무형의 것이 있었다.
재민석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뻐끔뻐끔 입을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말해. 누구에게 들었지?”
마치 타인의 손이 턱을 잡고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우연히 우천희의 말을 들었던 일이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심장을 쥐어짜며 속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것이 있었다.
“아…….”
민석은 소리를 냈다. 자신이 원해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몸의 움직임에 뒤늦게 ‘무섭다’는 단어가 떠올랐다.
‘뭐야? 이게 뭐야?’
꽁꽁 묶인 것처럼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입이 뻐끔거리며 우강희가 원하는 답을 말하려 하고 있었다. 우천희의 말을 몰래 들었던 장면이 머릿속을 지배해 갔다.
‘싫어! 안 돼! 이런 거 싫어!’
재민석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사위는 조용했다.
‘싫어! 이건 내가 아니야! 이게 뭐야? 우강희가 이러는 건가? 내 몸인데!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우…….”
재민석의 턱이 캐스터네츠를 치는 것처럼 딱딱딱 빠르게 움직였다. 울고 있었지만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느끼지 못했다.
우강희는 지겨운 이 자리를 끝내기로 했다. 섬세하게 페로몬을 조절했다.
발현 이후 끊임없이 노력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페로몬을 한 가닥도 내보내지 않도록 훈련했고, 고행 끝에 퍼센티지로 페로몬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성과를 바라보는 우상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기저에 깔린 두려움을 아들이 읽을까 봐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어른 알파조차도 그렇게 느낄 우강희의 페로몬에 베타인 재민석이 저항할 리 없었다.
절대 거역하지 못할 걸 알기에 그는 약간의 압박을 더 주었다.
“우, 우…….”
차가운 우강희의 시선을 받으며 제 뜻과는 상관없이 턱이 움직였다. 민석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싫어! 왜 나한테만 이래? 박한주에게는 이렇게 대하지 않았잖아!’
“한주…… 박한주가…….”
단말마를 지르듯이 재민석의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
우천희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우천희는 언제나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일을 저질렀으며 우강희에게 자극도 되지 않는 짓들을 벌였다. 또 어디서 말하다가 흘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민석은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우강희의 룸메이트인 ‘박한주’의 이름을.
잠시 앉아 있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갔다. 그가 카페를 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재민석은 바닥에 쓰러지며 콜록, 피를 토했다.
“1, 119! 119 불러요! 구급차!”
사람들의 소란을 느끼며 민석은 정신을 잃었다. 자신이 기적에 가까운 일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몰랐다.
* * *
택시를 타자 카페 안의 상황이 보였다. 사람들이 그가 앉았던 자리를 둘러싸며 웅성거렸고 직원이 다급히 움직였다. 곧 구급차가 카페에 도착했다.
우강희는 그 모습들에서 눈을 돌렸다.
“뭔 일이래요?”
택시 기사가 무심히 창밖을 보며 물었다.
“재강원 고등학교요.”
먼 거리에 택시 기사는 더는 묻지 않았다.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화면에 한주의 연락처가 떠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흘렸든 상관없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재민석의 입에서 한주의 이름이 나오자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아릿한 아픔까지 남겼다.
배신감.
우스운 말이었다.
배신이라는 것은 믿음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단어였다. 한주를 좋아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과 믿음은 별개다. 자신의 감정과 한주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다른데도 우강희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쾌하게 올라오는 악취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그가 페로몬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본능적인 감각이 경고를 보낼 텐데 한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행동으로 우강희를 대했다. 그는 그 평범함이 기꺼웠다.
남들과 다름에 철저히 자신의 본성을 누르고 감추며 살았다. 평범하게 대해 주는 한주에게 친근함을 넘어 호감을 느꼈다. 제 옆에서도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고 무사할 수 있고, 그를 구해 주었던 일까지 더해져서 감정은 눈덩이를 굴리듯이 부피를 더해 점점 커져 갔다.
그것은 지구에 온전히 두 사람만 남은 상황과도 같았다. 안타깝게도 우강희에게만 적용되는 상황이라 그만 한주를 바라보는 경우였다.
짝사랑이랄 수 있는 감정.
그의 세계에는 오직 한주만이 존재하지만 한주의 세계에는 우강희를 제외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급해지고 초조해지는데 우강희에게 불리한 일을 한주가 남에게 발설했다고 한다.
재민석의 말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느끼는 배신감이 이전에 느끼던 불안과 함께 아프게 가슴을 조였다.
“박한주.”
차라리 박한주라는 존재를 몰랐다면 이런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행복도, 희망도 없었겠지만 가슴을 찔러 대는 통증에 원망만 들었다.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택시 기사가 식은땀에 젖어 앞만 보며 운전하는 모습을 보고 우강희는 뒷좌석 창을 열었다.
바람이 차 안을 쓸고 나갔다. 휘몰아치듯 들어와 빠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며 페로몬을 밖으로 내보냈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힐끔 우강희를 보았다. 뒷좌석에서 창문을 열자 체한 듯 꽉 막혔던 속이 편해졌다. 심상치 않은 표정에 기사는 앞만 보며 달렸다.
* * *
교문에는 차들이 선착순으로 줄을 서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아 한주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바래다주어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보자.”
오송중의 차는 U턴을 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주는 인도를 따라 기숙사로 향했다.
귀소한 학생들에 끼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주는 7층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성진이 7층 복도에 서 있었다.
“우강희 방에 놀러 가는 거야?”
“……조심해. 우강희 기분이 안 좋아.”
“뭐?”
이성진은 한주에게 그 말을 하기 위해 기다렸던 듯 이어서 말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가드를 불러. 문 잠가 두지 않을 테니 내 방으로 피해.”
경고. 잘 나서지 않는 그가 먼저 한주를 기다리며 경고할 정도면, 로열 알파인 이성진이 생각해도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한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방으로 향했다.
“뭐야, 얼마나 기분이 안 좋길래?”
방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갑자기 등줄기로 차가운 냉수를 붓듯 소름이 지나갔다. 한주는 손잡이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사부 오지한에게서 무술을 배우며 페로몬이 아닌 상대의 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길을 가다 이상한 느낌이 든 사람을 몰래 따라갔다가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발견해 저지한 적도 있었다.
그런 한주의 예민한 신경이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위험을 감지했다.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문을 열었다. 작게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강희는 나갔나?’
컴컴해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 우강희가 서 있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한주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평온하게 말하는 모습이 더 위협적이었다.
“아, 편의점에 갔다 오려고 하는데, 필요한 거 있어?”
“뭐가 필요한데?”
“아,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
“냉동실에 있어.”
“다, 다른 게 먹고 싶어서. 네 것도 사다 줄게. 조금만 기다려.”
몸을 돌렸지만 덜컥 손목이 잡혔다.
“필요 없어.”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중1 때부터 한주는 사부에게 맞아 가며 무술을 배웠다. 위험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든가 더 위험한 일을 피하고자 몸을 단련했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니까.
‘그런데 사부, 우강희에게는 소용이 없어요.’
힘을 주어 버티려 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들어 갔다. 등 뒤로 문이 닫혔다.
* * *
미숙한 소년의 손목은 아직 가늘고 힘이 없었다. 힘주어 잡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움켜잡아 방으로 끌어들이자 그의 손가락 끝으로 맥박이 닿았다.
생생하게 닿아 오는 피의 흐름에 우강희는 그 손목을 물어뜯고 싶었다. 진득하게 입을 채워야지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이 조금은 진정되지 않을까.
제어를 넘어서는 흉포한 욕구에 실낱같이 남아 있는 이성으로 우강희는 한주의 손목을 놓았다.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화를 참으며 심호흡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과학실에서 블렌딩에 대해 들었지?”
“뭐? 어, 듣기는 했지.”
“누구에게 말했지?”
“뭐? 말 안 했어. 왜 그런 걸 말하겠어. 내 일도 아니고…… 무슨 일인데 그래? 너 지금 표정 엄청 심각해.”
한주는 정말 무슨 일인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재민석을 만났어.”
“재민석? 왜? 무슨 말을 했는데? 재민석이 네가 블렌딩 한 걸 알고 있대?”
우강희는 눈 깜빡임도 없이 한주를 보고 있었다. 그 잠깐의 사이에 무언가를 놓치지 않을까 경계한다. 그 긴장감이 한주에게도 느껴졌다.
“그래. 내가 블렌딩 한 일을 알고 있다면서 그 얘기를 해 준 사람이 너라고 말했어.”
“뭐? 내가?”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녀석은 베타를 싫어해서 내가 말 걸면 싫어하잖아. 최근에는 말 한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야? 재민석이 나에게 들었다고 말했다니, 말도 안 돼. 네 블렌딩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그 말 그대로였다.
한주는 재민석에게 그런 수다를 떨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민석은 베타를 경시해 말도 붙이지 않았다.
같은 반이라 우강희도 모르지 않았다. 아는데 자꾸 마음이 수런거렸다. 깔짝거리며 머리 한쪽을 긁는 느낌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우강희, 넌 그 말을 믿어?”
되묻는 목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페로몬이 풍겨 왔다. 짙게 묻은 스킨 향과 알파의 페로몬. 한주를 제 것이라고 소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알파가 한주에게 접근해 묻혀 놓았다.
묵직한 우강희의 페로몬은 바닥으로 흘러 한주의 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얇은 소년의 육신을 핥으며 자신이 어떤 위험에 놓인지도 모르게 침범했다.
위험을 감지한 어린것이 도망치려 발버둥 치겠지만 이미 늦었다. 연약한 목덜미를 잡고 태초부터 사냥물의 숨통을 조이는 짐승처럼 자신의 아래에 놓으면 된다.
“우강희?”
이름을 불리자 우강희는 이성을 차렸다. 한주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코가 닿을 듯이 가까이 있었다. 몇 년을 해 온 훈련이 무색하게 참지 못하고 저지를 뻔했다.
저질러 버리고 싶은 욕망과 참아야 한다는 이성이 충돌했지만 한주를 보고 있으니 간단히 정리되었다.
“거짓말이 아니겠지?”
믿고 싶어 되물었는데 그 말이 한주를 건드렸다.
오래 알아 온 사이도 아니고 믿고 말고를 따질 만큼 잘 아는 사이도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 룸메이트가,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이 의심하니 오송중이 한 말이 생각났다.
오송중의 차를 타고 학교까지 오면서 기숙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룸메이트는 어떤 알파인지 얘기했다. 보통 오송중은 한주의 얘기를 잘 들어 주기는 해도 파고들지는 않았는데 오늘은 집요했다.
학교에 다 와 갈 무렵 오송중은 흠,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네 룸메이트라는 알파, 널 정말로 친구로 생각할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흘려들었던 그 말이 우강희가 의심을 하자 불쑥 생각났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하면, 넌 그 말은 믿을 수 있어?”
도발에 우강희의 눈이 커졌다.
“나한테 들었다는 재민석의 말을 듣고 이렇게 확인하며 불안해하는데, 그럼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못 믿겠으니 되묻고 추궁하는 거잖아.”
“나는, 믿고 싶어.”
믿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믿고 싶었다. 한주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 생각을 말이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수없이 경험했다.
그 실패로 혈육을 잃었다. 잠시 긴장을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봐 왔다.
“나도 널 믿고 싶어.”
우강희 안의 짐승은 이성을 모르고 날뛰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많은 사람을 쉽게 해했다.
어떻게 섣불리 믿을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의심하며 긴장해야 하는 삶에서 쉽게 타인을 믿고 자신을 맡길 수 없었다.
괴로워 일그러지는 우강희의 얼굴을 보며 한주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일부러 널 시기하고 질투해서 뒤통수치고 싶어 그런 짓까지 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고,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네가 오해한다면 그게 진실이 되겠지.”
이어지는 한주의 말을 듣고, 우강희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느꼈다.
“그러니까, 똑같이 비밀을 교환하자.”
“교환?”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한주를 몰아붙여서는 안 되었는데, 제 행동이 너무 섣불렀다.
감정에 휘둘려 실수를 해 버리고 말았다.
“지금 네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가 네 비밀을 내가 밖에 말했다고 생각해서이잖아. 그러니까, 뭐 딱히 비밀은 아니지만 나도 남들이 알면 껄끄러운 사적인 일을 하나 알려 줄게.”
한주는 한숨을 삼켰다. 비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말로 뱉으려니 가슴이 묵직했다.
“아니, 미안하다.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실수했어.”
우강희는 말렸지만 이미 말해 주기로 한주는 정했다. 그저 과거의 편린에 잠시 감정이 올라왔을 뿐이다.
“재강원 이사장이 유전학적 친아버지야.”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잠시 떠올랐지만 마주 선 사람이 우강희였다.
한주를 구원해 준 사람.
알파를 선망하는 굴레에서 구해 준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베타라는 이유로 엄마와 날 버렸어.”
한주의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오히려 평소와 같은 일상적인 어조였다. 올곧게 우강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한주, 너…….”
한주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은 수많은 감정을 겪은 후에야 나올 수 있는 시간이 묻어 있었다.
습기 어리는 눈을 보고 한주는 괜히 우강희를 들쑤셨구나, 후회했다. 믿지 못하는 모습에 짜증이 나 괜한 말을 했다.
“딱히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 없고. 그 사람 아들이라고 나설 생각도 없어. 그냥 타인인데 유전자가 섞였을 뿐이야. 행복하게 자랐고 엄마도 많이 사랑해 주었으니까 다른 이상한, 그러니까 우울한 상상은 하지 않아도 돼.”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주는 고개를 돌렸다. 멋쩍었다. 가정사를 말해서가 아니라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어색한 감정 때문이었다.
“너니까 이런 말을 하지. 그냥 믿어 봐. 뭐가 그리 복잡해.”
기묘한 쾌감이 우강희의 머리에 스며들었다.
“우강희?”
감정에 따라 한주를 껴안았다.
갇혀 있기만 했던 페로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흘러나왔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페로몬은 영역을 넓히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공기 틈틈이 빈자리가 없도록 그의 페로몬이 방 안을 장악해 갔다.
언제나 긴장으로 뻐근했던 그의 등이 꿈틀대며 기분 좋은 개운함을 알렸다. 방 안의 공기를 온전히 그의 페로몬으로 잠식한 강희는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쾌감에 몸을 맡기며 가늘게 눈을 뜨고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뇌를 잠식하는 희열을 느끼며 강희는 말라 오는 입술을 핥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건 목을 내놓고 그의 공격을 기다리는 가녀리고 하찮은 미물일 뿐이었다.
“야, 뭐 해? 좀 떨어져.”
밀어내는 손이 본능을 건드렸다.
우강희는 마른 목구멍을 울리며 한주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야!”
놀라 한주가 저항했지만 우강희도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실전 무술을 배웠다. 잡고 잡히지 않으려고 뒤엉켰지만 마침내 박한주를 침대에 밀치고 우강희는 우위를 차지했다.
한주의 양 손목을 잡아 침대에 밀어붙였다. 거친 숨소리를 훅훅 내뱉으며 그는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믿으라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한주는 황당해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의미라니……. 단어 그대로지. 우선 비켜.”
옆구리로 훅 들어오는 느낌에 우강희는 몸을 피했으나 한주에게 잡혀 자세가 뒤바뀌었다.
몸을 누르며 그의 위에 한주가 앉았다.
한주는 손목을 어루만졌다. 강희의 힘 때문에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조금은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네가 블렌딩을 했다는 것을 신경 쓰니까 내 비밀도 얘기해 준 것뿐이야. 당해 주니 내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나 본데, 나야말로 널 적당히 봐주고 있어.”
우강희는 하,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어린 양은 강희에게 돌을 던져 놓고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마음에 어떤 태풍을 만들었는지 모르고.
한주의 허리를 잡았다. 옷을 움켜쥐는 손길에 긴장하는 몸이 느껴졌다. 그러나 느릿한 손의 움직임에 한주는 공격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지 허벅지의 힘을 풀었다.
배 위에 앉아 있어 한주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훅, 숨을 들이마셨다.
깊은 심연에서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
네 거야.
도망치지 못하게 너의 것으로 만들어.
이를 박아 넣고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해 네 페로몬으로 절여 버려.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너만 생각하도록 지배해.
흉포하지만 감미로운 유혹에 우강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믿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이 한주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끌어당겼다. 한주는 피하려 했지만 다가오는 강희의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사나운 맹수가 눈을 빛내며 한주를 노렸다.
“또 깨물려고!”
성질을 건드리는 일이 있으면 그는 한주의 목을 깨물었다. 목을 내주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대로 우강희의 입술이 한주의 입술에 닿았다.
메마르고 뜨거운 살이 한주의 입술을 쭉 빨았다. 저항할 틈도 없이 입술을 벌리며 더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으며 접촉했다.
“읍!”
처음 느껴 보는,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질감의 것이 혀를 감으며 혀 아래쪽을 훑고 숨이 닿을 듯 다가와 입천장을 문질렀다.
어깨가 쭈뼛 서며 소름이 끼쳤다. 강렬한 느낌이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가 머릿속을 때렸다. 오금이 간지러워졌다.
키스를 해 보지 않은 한주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가만히 있다가 혀를 빨리자 정신이 들었다.
“너!”
한주가 우강희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자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에 그와 어디가 닿았는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너, 지금 무슨 짓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강희가 다시 덤볐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었지만 오히려 등을 허락해 등 뒤에서 껴안겼다. 풀썩, 침대에 엎어져 버렸다.
등 뒤에서 우강희의 몸이 묵직하게 한주를 옥죄듯 껴안았다. 팔꿈치를 휘둘렀지만 그의 몸에 닿지 못했다.
떼어 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등껍질에 눌린 거북이처럼 거대한 우강희가 등을 누르고 있어 꿈쩍할 수 없었다.
“너 비키지 않으면!”
“좋아해.”
나직한 한 마디가 한주의 행동을 막았다.
“좋아한다, 박한주.”
입술이 한주의 뒷덜미에 닿았다. 부드럽게 애무하듯 목을 입술로 물었다가 놓았다. 어린 새끼를 어르는 듯이 다정한 움직임이었다.
“좋아해. 네가 좋아.”
“뭐?”
고백인데 절박함이 느껴졌다.
돌아보려는 순간 우강희는 그대로 한주의 뒷덜미를 깨물었다. 이제까지 약한 흔적만 남을 정도의 힘이 아니었다. 강하게 이빨을 박아 넣어 피부에 새겨 결코 흔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강한 힘이었다.
“악!”
한주는 몸이 떨렸다.
단지 깨물린다는 물리적 아픔만이 아니다. 붙잡혀 버린 사냥감의 동물적 위험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불씨가 있었다.
우강희의 숨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두피에 닿았고 잘근거리며 빠는 그의 입질은 더 강해졌다.
영혼을 빨아들이듯이.
오싹한 소름이 목덜미를 죄어 왔다.
“아프다고! 이 짐승 새!”
목을 깨무는 힘이 강해질수록 강희가 절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지 느껴졌다.
좋아한다는 고백보다 몸이 더 정직하다.
“이!”
한주는 있는 힘껏 팔꿈치를 휘둘러 우강희의 관자놀이에 박았다. 빡, 소리가 나며 강희는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온 한주는 방문을 향해 뛰었다. 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나가면 안 돼.”
한주가 문을 열려는 순간 우강희가 말했다.
“네 몸에 내 페로몬이 묻었어. 나가면 안 돼. 네 몸에 묻은 페로몬을 보고, 다른 사람이 다 알아차릴 거야.”
한주를 보는 그의 뺨이 붉어졌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것을.”
“이…… 짐승 새끼야!”
한주는 열받아 발을 구르며 소리 질렀다.
* * *
환기 시스템을 돌리고 창을 열었다. 온 방 안에 우강희가 싫어하는 소취제를 잔뜩 뿌렸다. 한주는 샤워하고 나와 방에서는 안 입는 긴팔 긴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았다. 쿠션을 끌어안고 강희를 경계했다.
그는 한주의 견제로 침대에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얘기하자면서.”
“그래, 넌 거기서, 난 여기서.”
“건드리지 않아.”
한주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못 믿어!”
“너를 믿으라면서 나는 못 믿어?”
벌떡 일어난 한주는 우강희의 아래를 삿대질했다.
“거기나 좀 가라앉히고 믿으라는 소리를 해! 너라면 믿겠냐?”
다리를 벌리고 앉은 강희는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감출 생각도 없어 보는 사람이 오히려 민망해진다.
옆에 있는 쿠션을 강희에게 던졌지만 방이 넓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 좀!”
“정직해서 내 마음대로 되는 놈이 아니야.”
그리고 강희는 보란 듯이 입술을 오므렸다가 쪽 소리를 내며 벌렸다.
“키! 으악!”
한주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후드 줄을 쭉 당겨 눈과 코만 보이도록 묶었다. 우강희를 노려보았다.
그는 입술을 핥으며 은은한 저음으로 다시 말했다.
“좋아해, 박한주.”
“왜, 왜 거기서 그런 말이 나와!”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하지.”
“아니 난 베타고! 남자고!”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 없어.”
“네 감정은 알려 주지 않아도 돼! 그냥…… 나는…….”
열렬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맞받아쳤지만 결국 한주는 져 버렸다. 난감해져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난처하고 난감하고 황당하고 기가 막히고, 그리고 자꾸 우강희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부딪치고 벌리며 들어와 순식간에 점막을 핥았었다. 이전의 삶까지 합쳐도 한주에게는 첫 키스였다.
입맞춤을 떠올리자 물렸던 뒷덜미에 열이 몰려 화끈거렸다.
“어릴 때 많은 시간을 외할아버지 댁에서 보냈어.”
우강희가 추억을 꺼냈다.
“집 뒤로는 얕은 동산이 있고 앞으로는 넓은 논이 펼쳐진 곳이야.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네가 말한 그런 냄새가 났었지.”
그의 개인적인 얘기는 처음 들었다. 우강희는 그리운 과거를 회상하다가 한주를 보았다.
“그곳에서 맡았던 냄새가 내 진실한 페로몬을 닮았어. 네가 말했던 내 페로몬의 향기.”
“아, 그 냄새? 진실한 페로몬이라니?”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로맨틱한 소재로 종종 나왔다. 특히 상대에게 빠져 각인했다고 나올 때.
“마음을 자각하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어. 너를 유혹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고백은 자연스럽게 나왔다.
“네가 좋으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한주는 벌떡 일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 산책! 한 바퀴 돌고 올게!”
“잠깐.”
나가려고 문으로 향하는데 우강희가 일어나 잡았다. 한주는 놀라 그를 경계했다.
“오늘 만난 알파, 누구야?”
“어? 알파를 만났는지 어떻게 알았어?”
“누구야?”
경계하는 모습에 멈춰 섰던 그가 한 발짝 다가왔다.
“어, 그건 왜?”
“그 알파가 너한테 페로몬을 묻혔어.”
미세하게 강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불쾌해하며, 마치 누구와 바람을 피웠냐고 의심하는 부인 같아서 한주는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아, 그 사람인가 보다. 낮에 엄마와 영화관 갔다가 엄마에게 호감 보인 사람이 있거든. 나한테 적의의 페로몬을 보냈다고 그러더라.”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 한주의 등에 문이 닿았다.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럼 난 나갔다가 올게.”
“도망가지 마.”
“그거나 처리해!”
한주는 최대한 방에서 멀어졌다. 복도를 달려 비상구의 계단으로 1층까지 뛰어 내려갔다.
이전의 삶은 폭행에 얼룩져서 밤에 스스로 처리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잔인한 알파들에 의해 바지를 벗으며 수치를 배웠기에 만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성진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그것은 뚜렷한 감정의 형체를 가지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두 번째 삶을 살 때는 너무 바빴다. 사부에게 무영권을 배우고 집에 와 누우면 곯아떨어졌고 중3 때는 주말에 알바를 했다. 이전의 삶의 기억이 남아 있어 아예 만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아한다며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우강희의 모습이 낯설고 불편했다. 게다가 그 우강희가 아닌가.
“고백을 했으니 사귀자는 소리인가.”
우강희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강희와 데이트를 하는 그림도 상상이 되지 않았고 연인으로 뭘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같이 방을 쓰는데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고…….”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으아…….”
그 생각 안에 우강희를 거절한다는 가정은 없었다.
* * *
이성진이 차원구의 방에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복도와 온도 차가 10도 이상은 나는 것처럼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평소 미소가 떠나지 않던 원구도 표정을 지우고 창가에 서 있는 우강희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황치운, 차원구를 지나 이성진에게서 멈추었다.
“박한주에게 고백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라 놀라는 사람은 없었지만 치운이 다시 확인했다.
“상대는 베타야. 진심이야?”
“그래.”
그가 가볍게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다. 원구와 치운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서 박한주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성진은 그나마 그들 중에 우강희의 압박을 적게 받는 사람이었다.
“……박한주는 평범한 베타야. 괜히 건드리지 말고 평범하게 살게 놔둬.”
원구는 성진을 보았다.
귀찮아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성진이 한주의 일에서만큼은 적극적이었다. 2학년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구해 주었다는 말도 들었고 기숙사 폐쇄했을 때 별장을 빌려주겠다는 말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우강희가 박한주에게 고백을 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선언한다는 뜻이다.
알면서도 성진은 한주를 대놓고 두둔했다.
우강희는 화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온화하게 받아 주지도 않았다.
“이미 늦었어.”
차원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공기가 묵직해지며 압박감이 느껴졌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둡게 느껴져서 창밖의 가로등이 방으로 들어와 비추는 기분이었다.
“박한주를 건드리지 않도록 지켜.”
명백한 명령이었다.
“박한주는 내 사람이야.”
“……아니. 아직은 아니지.”
몸을 억누르는 무게를 느끼지만 이성진은 페로몬을 내보내 대항하며 보호막을 쳤다. 저항하자 우강희에게서 느껴지는 압력은 더 강해졌다. 그렇다고 무릎을 꿇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입학 전에 자선 파티에서 네 페로몬을 알고 우리는 네 옆에 있기를 선택했지만 넌 아직 불안정해. 지금의 너는 페로몬도 제대로 못 쓰는 어린애에 불과해. 정말 우리가 따라도 좋을 사람인지 능력을 입증하지 않았어.”
그날 파티에 참석했던 대다수가 우강희에게 각인했다. 알파, 오메가를 가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페로몬에 지배당했다. 사고 같은 각인은 며칠 만에 풀렸지만 뇌리에 강한 충격을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너무 거대한 차이라 경외하며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우강희가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말에 옆에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파였다. 경외하여도 약점을 보이면 언제든 물어뜯는 이들이었다.
차원구는 미소를 지었다. 긴장에 굳어 있어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일말의 오기가 솟았다.
“지켜는 보겠지만 도와주지 못하겠네. 나도 그 녀석에게 호감이 있어서.”
호기롭게 말했지만 우강희의 시선이 절 향하자 무의식적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원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기에 우강희는 경고도 하지 않았다.
“증명은 이제부터 한다.”
우강희가 박한주를 가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도대체 어떻게 생활하기에 카페에서 쓰러지는 거야? 가정부 붙여 주었잖니. 몸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죄송합니다.”
아들의 사과도 마음에 들지 않아 오혜주는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오혜주는 자식이라도 베타라서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알파의 페로몬에 당했다고 말하면 더 분위기가 악화될 걸 알기에 재민석은 ‘그냥 요즘 몸이 안 좋았다.’라고 변명했다.
쇼크의 원인은 아무리 검사를 해도 나오지 않을 테니까.
응급실에서도 페로몬에 의한 쇼크를 걱정해 검사했지만 일상에서 묻어날 수 있는 미약한 페로몬이 나와 의사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재민석은 분명 우강희에게 페로몬 공격을 받았는데 그 페로몬조차 남기지 않았다.
“기숙사로 들어가.”
창백한 얼굴색이 더 창백해졌다. 민석은 황급히 오혜주를 보았다.
“네? B동 기숙사 폐쇄되어서 돌아갈 수도 없어요.”
오혜주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 안에 스며 있는, 자기보다 급이 다른 인간을 보는 경멸에 민석은 다시 고개가 수그러졌다.
“그것도 모르고 말하는 거 같니? 알파들이 지내는 A동 기숙사에서도 네가 지낼 수 있다며.”
“아, 안 돼요. 방이 없어서 알파와 룸메이트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그렇게 되면…….”
“그럼 또 수치스럽게 길에서 쓰러질래? 이게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날 어떻게 생각할지…….”
아들이 쓰러진 일보다 남편이 알게 되는 것이 더 싫다며 그녀는 잘 다듬어진 손톱을 입으로 가져가다 흠칫 놀라 두 손을 꼭 쥐었다.
“어, 어머니. 어떻게 알파와 룸메이트를 하라는 거예요? 안 돼요!”
“그럼 쓰러지질 말든가!”
“어머니, 이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다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애원하는 소리는 병실 문이 열리면서 뚝 끊겼다. 아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녀는 들어오는 의사를 보고 침대 옆으로 한 발 다가갔다.
“사모님, 이제 퇴원해도 됩니다. 민석 군이 왜 쓰러졌나 했더니, 좋은 소식을 알려 주려고 그랬나 봅니다.”
오혜주의 손이 다정하게 민석의 등을 쓰다듬었지만 금방이라도 손톱을 세워 찌를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연기는 전문 배우보다 훌륭했다.
“좋은 소식이라니요?”
“민석 군의 알파 발현 가능성이 5퍼센트 올라서 25퍼센트가 되었습니다! 민석 군도 알파가 되길 희망했었는데 이대로 호르몬 수치가 조금씩 올라간다면 스무 살 때는 발현할 가능성이 큽니다.”
호탕하게 웃는 의사의 말에 재민석의 눈이 커졌다.
“25퍼센트…….”
“아, 그런가요? 어머, 민석아, 정말 잘됐다!”
오혜주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와락 아들을 껴안았지만 민석에게는 의사만 보였다.
이제까지 알파 발현 확률 20퍼센트로 낮은 수치를 유지했고 2학년과 어울리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5퍼센트 증가는 낮으면 낮다고 말할 수 있는 수치지만, 처음 검사한 이후 미동도 없었기에 굉장하다고 말할 수 있는 변화였다.
‘설마 우강희? 우강희의 페로몬 덕분에?’
온몸에 소름이 지나갔다. 퇴원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 우강희를 볼 것이 두려워 몸이 떨렸는데 그 감정을 기쁨이 덮어 버렸다.
‘블렌딩이야, 블렌딩이 되었어! 우강희의 페로몬이라서 이렇게 빠르게!’
민석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마음이 급해졌다.
“퇴원할게요. 어머니, 그리고 저 A동 기숙사로 들어갈게요.”
알파와 불편하게 지내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재민석에게 알파 발현은 생존의 문제였다.
* * *
다음 날, 재민석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병원 입구에 서 있었다. 담당 의사와 원장의 배웅을 받으며 입구까지 나왔지만 오혜주도 마중을 나온 담당 의사와 병원 원장, 누구도 가지 않고 기다렸다.
긴장했지만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해 민석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세단이 병원 입구로 들어서자 재민석과 오혜주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의사들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차는 민석의 앞에 섰다. 운전사가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다. 의사들이 뒷문으로 다가가 뒷좌석에 앉은 재강원에게 인사했다.
“축하드립니다. 아드님의 알파 발현 확률이 5퍼센트나 올랐습니다. 이렇게 오르면 스무 살 때는 알파 아드님을 갖게 되실 겁니다.”
“베타에서 알파로 발현되다니, 역시 유전자가 남다릅니다.”
원장이 팔꿈치로 눈치 없는 의사의 옆구리를 쳤다. 그 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말하기에는 자식 둘 다 특출 나지 않았다.
원장이 웃으며 민석을 보았다.
“재민석 군, 어서 타세요. 이사장님이 학교까지 데려다주시다니, 자상한 아버지입니다. 부럽습니다.”
재민석은 뒷좌석으로 시선을 주었다. 재강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혜주가 어깨를 감싸며 차에 타라고 부드럽게 밀었다.
“아버지도 이렇게 기뻐하며 널 신경 쓰고 있구나, 민석아.”
재민석의 알파 발현 확률이 5퍼센트 올랐다는 말에 오혜주는 제일 먼저 남편에게 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상사에게 성과를 자랑하듯이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며 기뻐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이 아니었고 가족에게 남편은 냉정했다. 오혜주는 결혼할 때부터 화기애애한 가정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막상 남편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민석은 아버지 옆에 앉았다.
병원 원장과 의사들의 90도 인사를 받으며 차는 출발했다. 오혜주가 꼿꼿이 서서 차를 바라보는 모습을 확인한 민석은 옆에 앉은 재강원을 의식해 앞을 보았다.
처음이었다.
가족 모임으로 연회에 참석할 때도 바쁜 재강원은 가족과는 따로 움직여서 다른 차로 도착했기에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재강원의 옆자리는 아내인 오혜주의 자리였다.
차 안은 조용했다.
그는 쇼크로 쓰러졌다가 퇴원한 아들의 안부를 묻지 않았고 알파 발현 확률이 올랐다고 들었어도 축하하지 않았다.
민석이 먼저 그에게 인사했다. 아들임에도 아버지를 향한 목소리는 긴장이 가득했다.
“아버지, 양평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학교에 볼일이 있어 가는 길이니 양평 집까지 데려다주마.”
재강원이 ‘집’이라고 지칭하자 가족의 울타리에서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저, 저도 학교에서 가져올 물건이 있어서, 학교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번거롭게 양평 집까지 데려다주시지 않아도요.”
“그렇게 하든가.”
오늘 퇴원한 아들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차가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민석은 아버지와 같이 있을 수 있어 기뻤다. 몇 마디지만 그와 대화한다는 기쁨에 민석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성장을 보고했다.
오혜주가 재강원에게 보고하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아버지에게서 축하의 말을 듣고 싶었다.
“어머니께 들으셨겠지만 저, 알파 발현 확률이 5퍼센트나 올랐습니다.”
“총 몇 퍼센트가 되지?”
아버지가 질문하는 일이 별로 없어 기뻤지만 민석의 얼굴은 굳었다. 아들이 대답을 망설이든 말든 관심이 없는 재강원은 재촉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민석은 식은땀이 났다.
“……25퍼센트입니다.”
“그래.”
민석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짧은 대답은 고작 그런 걸로 자랑을 하느냐는 질타와 같았다.
우수한 알파와 명문가의 오메가 어머니를 두었지만 자식은 오메가 장남과 베타 차남뿐이었다. 민석은 우수한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결함품이었다.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겨우 그 정도냐는 시선이었다.
말도 아깝다는 듯이 재강원은 베타인 아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언젠가 알파가 된다고 믿고 있었고 그 미래의 어느 날에 아버지가 저에게 시선을 주며 자랑스러워하길 바랐다.
“다음 주부터, ……알파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알파가 될 거라는 암시였다.
“아버지가 B동 기숙사를 리모델링 한다고 폐쇄했을 때는 베타들을 학교에서 몰아내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알파 발현에 도움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후가 잘못되었지만 재민석은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B동 기숙사가 폐쇄되어 저 말고 엉뚱한 베타 놈이 득을 보기는 했지만요.”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속으로 후회했는데 조용히 정면을 보던 재강원의 시선이 민석을 향했다. 그는 흥미를 보였다.
“엉뚱한 베타가 득을 봤다?”
“별거 아닙니다. 반에 자기 분수도 모르는 베타 녀석이 있는데 건방진 성격 때문에 2학년들에게 찍혀 있었습니다. B동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담임이 그 녀석을 편애해서 우강희의 룸메이트로 만들었고요.”
“네 반 담임이?”
“네. 덕분에 그 녀석은 알파 기숙사에 들어가서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우강희 덕에 2학년들도 그 녀석에게는 더는 손을 못 대고 있죠. 아마 B동 기숙사 폐쇄로 제일 득을 본 건 그 녀석일 거예요.”
박한주가 얼마나 건방진지 떠들고 싶었지만 타인을 욕하는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남의 약함으로 커버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다른 녀석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알려 주고 싶었다.
민석은 학교에서 자신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는지 떠들었지만 재강원의 무반응 앞에서 수다는 길어지지 않았다.
하찮은 베타 얘기 때 같은 반응을 끌어낼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차는 재강원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이 학교는 재강원의 할아버지가 손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만든 학교로 소중한 손자의 탄탄한 앞날을 위한 인맥과 최상의 교육을 위해 설립한 고등학교였다. 그리고 그가 졸업 후 후배들은 재강원 고등학교의 졸업생으로 재강원의 든든한 인맥이 되었다.
재강원 이사장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알렸다면 직원들이 현관에 도열해 환영했겠지만 조용한 방문에 환영 인파는 없었다. 재민석은 조금 실망했다.
재강원보다 먼저 내려 기다리는데 멀리 한주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
재강원은 아들의 목소리에 같은 방향을 보았다.
“아, 저 녀석입니다. 담임이 편애하는 녀석이요.”
“베타?”
“아, 네. 뭐, 아버님이 신경 쓰실 만한 녀석은 아닙니다. 교장실로 가실 건가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도 잘 아니 안내는 필요 없다. 오늘 퇴원했는데 볼일 보고 집으로 가 쉬어.”
“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심한 아버지의 걱정에 재민석의 볼에 열이 올랐다.
재강원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민석은 아쉬움에 그가 산책로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담임 이무열이 있는 교무실로 향했다.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의 핑계를 들키게 된다.
‘A동 기숙사로 들어가겠다고 담임에게 말해 둬야지. 우강희와 같은 방을 쓸 거야.’
이 학교는 재씨 가문이 설립했다. 재강원 이사장 아들의 말이니 일개 직원인 담임 이무열이 거역할 리 없다.
* * *
“재강원 이사장님이 학교에 왔어?”
“네. 아버지가 여기까지 데려다주셨어요.”
민석의 자랑을 들은 무열은 시큰둥했다. 창백해 금방 쓰러질 듯이 핏기가 없었다.
학교 이사장이 학교에 방문했다면 다른 선생에게 알려 환영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데 무열은 무덤덤했다.
재민석은 작게 혀를 찼다. 처음 담임으로 교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A동 기숙사로 들어가려는데, 우강희와 같이 방을 쓰고 싶어요. 정리해 주세요.”
거절을 염두에 두지 않는 말에 무열은 쓰게 웃었다. 도련님은 타인의 불편은 전혀 안중에 없었다.
“우강희는 이미 박한주와 룸메이트로 잘 지내고 있어. 조율해서 다른 방을 만들 테니까 기다려.”
“선생님.”
민석은 무열의 말을 끊었다.
“그동안 봐 드렸는데, 너무하시네요. 선생님은 우리 집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다면서 앞으로 재씨 가문을 물려받아 이끌어 갈 절 너무 무시하고 있어요. 제가 우강희와 같이 방을 쓰고 싶다고 말하잖아요.”
무시하는 소리에 무열의 얼굴이 굳었다.
아버지가 재씨 가문에서 일하면서 무열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집을 나오고 더는 듣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 말을, 재강원조차 이무열에게 하지 않는 말을 그 아들이 했다. 다 타올라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목뒤가 뻣뻣해졌다.
“재민석, 넌 지금 무례한 말을 하고 있어. 나는 너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 학교에서 월급을 받고 있잖아요. 그게 우리 집안에서 일하는 직원이란 소리죠. 안 그래요?”
평소의 재민석이라면 담임에게 안 좋은 말을 들으면 집에 돌아가서 혼자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스무 살이면 알파가 된다. 알파만 된다면 거대한 재씨 가문은 저의 것이 된다.
룸메이트가 우강희라면 알파로 발현되는 시기는 더 빨라질 수 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한주를 내보내고 우강희의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자신감이 생기자 말투부터 달라졌다.
“앞으로 이 학교에서 계속 일하고 싶으시면 제 말을 들으세요. 박한주를 다른 방으로 보내고 절 우강희 룸메이트로 만드세요.”
창백한 무열의 얼굴을 보며 민석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가 그려졌다. 알파가 되어 당당하게 재씨 가문을 이어받으면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일 것이다.
“민석아.”
“명령하잖아요. 못 들으셨어요?”
고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도 오래가지 못했다.
“내 쪽에서 거절이야. 너와 룸메이트를 하느니 차라리 내가 기숙사를 나가지.”
우강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언제 문이 열렸는지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우강희가 상담실 문에 서 있었다. 차가운 시선이 재민석을 훑고 이무열에게 향했다.
그가 상담실을 둘러보고 몸을 돌리자 무열이 불렀다.
“강희야, 무슨 일이야?”
“그냥 들렀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찾기 위해 들른 모습이라 신경 쓰였지만 무열은 지금 만사가 다 귀찮았다.
아기를 잃고 오열하며 보낸 주말이 꿈인 듯이 몸은 멀쩡했고 여전히 학교에 나왔다. 재씨 가문이 싫어 나왔고 재강원과도 끝냈는데 그의 부인은 자신을 여전히 위협했고 그 아들은 종 부리듯 명령했다.
여전히 지긋지긋하게 재강원과 얽혀 있었다.
“왜 박한주야? 넌 베타를 싫어했잖아.”
재민석이 나가려는 우강희의 옷을 잡았다.
“선생님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 녀석 얘기에만 흥미를 보이고, 너도 왜 그 녀석만 괜찮은 건데? 왜 다들 박한주에게만 그러는데?”
무열은 민석의 말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재강원이…… 한주 얘기에 흥미를 보이다니?”
“당신은 빠져. 당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민석이 답해 주지 않았지만 무열은 불길한 예감에 상담실을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본 우강희는 여전히 옷을 잡고 있는 민석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주먹을 꼭 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강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강희의 페로몬 때문에 쇼크를 일으켰으면서 그를 마주한 용기는 기특하다고 말할 만했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 슬금슬금 민석은 옷을 놓았다.
“그 녀석이 괜찮은 게 아니라, 재민석, 너라서 싫어.”
말은 재민석을 아프게 때렸다. 같은 베타인데 한주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민석이라 안 된다니,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었다.
우강희는 민석이 어떤 표정을 짓든 관심 없이 무열이 달려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열의 다급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