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고백과 계약서(2)
한주는 기숙사로 향했지만 목적지는 기숙사가 아니었다.
우강희가 좋아한다며 고백했다.
이전처럼 지내면 좋겠지만 열렬한 눈으로 조금이라도 한주를 챙겨 주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거기까지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스킨십이 늘었다.
‘나는 네 고백을 받아 줄 수 없어.’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절하고 우강희도 알았다고 말했다.
문득 물건을 챙겨 주면서 쓸데없이 한주의 손목을 어루만진다든가 아무 일도 없는데 어깨를 감싸고 손가락 끝으로 옷 위를 쓸었다.
차원구나 이성진, 황치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거리를 두었지만 강희는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그래서 최대한 그와 같은 공간에 있지 않도록 도망 다녔다.
“학교는 지낼 만한가?”
한주는 걸음을 멈췄다.
정장을 입은 재강원이 한주를 보며 산책로에서 나오고 있었다. 입학식과 학교 팸플릿 등에서 사진으로 보았고, 이전의 삶에서 한주가 아들임을 알았어도 “그래서?”라고 말했던 재강원.
평범한 산책로를 패션 화보로 만들 만큼 그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한주는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재강원 이사장님.”
“1학년인데 날 아는군.”
“모를 수 없죠.”
“알파가 대다수인 학교인데 다닐 만한가? 이번에 B동 기숙사가 리모델링으로 폐쇄하게 되어 불편을 끼쳤어.”
갑자기 잘 살고 있던 기숙사를 하루아침에 리모델링 한다고 폐쇄했으면서 이사장은 ‘불편을 끼쳤다.’라고 간단히 말했다. 그의 말투나 태도는 알파들 사이에서 지내는 한주가 느끼기에도 고압적이어서 거부감이 강하게 들었다.
무서운 사람이 없고 자신의 위에 무엇도 두어 본 적이 없는 그는 오만했다.
“적당히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다른 학교와 크게 다를 것도 없고요.”
맹랑한 대답에 재강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학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시설만 좋다고 다 좋은 건 아니죠”
그 외는 별로라는 뜻임을 알면서도 재강원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표정을 하나하나 훑었다.
“동창 중에 베타가 있는데 자네는 그와 닮았어. 베타면서 알파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 성격이.”
말이 끝나자마자 재강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주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에게만큼은 주눅 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주를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눈치로 그가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쯤은 파악했다.
재강원은 한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길이 어디에 머무는지 피부로 느껴졌다.
“외양은 다르지만, 닮았어. 베타가 알파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없는데 그 녀석도 천지 분간 못 하고 날 다른 사람들 대하듯이 그렇게 대했지. 그때는 제법 재미있었어. 지금이라면 봐주지 않겠지만.”
미소 짓고 있는데 그 속에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한주에 덧씌운 과거의 동창을 보며 그립다는 듯이 웃었다.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한주는 그에게 말했다.
“다른 할 말이 없으시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 건방진 모습까지 닮았네. 조금 더 얘기하지. 자네에게 흥미가 생겼어.”
반갑지 않은 말이다.
“저는 하루가 바쁜 학생이라서요. 다른 학생도 많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평소의 한주라면 불편해도 어른에게 예의를 지키겠지만 상대는 재강원이었다. 상대의 스케줄도 묻지 않는 사람에게 일부러 시간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재강원은 쉽게 한주를 보내 주지 않았다.
“건방지네.”
허울로라도 짓고 있는 미소가 사라졌다.
한주는 긴장했다. 마치 사부가 봐주지 않겠다며 1년에 한 번 한주 생일 때 대련해 주는, 그때의 기세와 같았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몰라 긴장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겁먹지 않고 대항하려는 한주를 보며 재강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참이나 어린, 아들과 동갑의 소년이 그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베타 주제에.
누구는 기특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너그럽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는 페로몬을 조절하라는 어른들의 교육에 페로몬으로 베타를 위협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만 사회에 나오면 달랐다. 페로몬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무력과 더불어 힘이 되었다. 그리고 어른은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만하세요!”
그때 무열이 달려와 한주를 뒤로 감추며 재강원 앞에 섰다. 재강원의 표정은 변함없지만 그의 심기가 틀어졌다.
“그만하시죠, 재강원 이사장님. 학생은 보내시죠.”
제 새끼를 보호하는 모습 같아 재강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주말, 오혜주의 행동을 알고 연회 도중에 이무열에게 달려간 그는 오래간만에 제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광경을 보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황이 뻔히 보였다. 그런데 무열은 그를 탓하며 기다리라는 말도 듣지 않고 가 버렸다. 그 뒤로 연락도 받지 않았다.
걱정이 무색하게 무열은 창백했지만 재강원을 노려보는 기색은 대단했다.
“그 애를 위해서 그런 거였습니까?”
무열은 유난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평생을 오메가이면서 베타라고 숨겼으면서, 그 베타를 지키기 위해 오픈한 겁니까? 날 움직여서 기숙사를 폐쇄하기 위해?”
재강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한주가 있는데도 무열이 오메가임을 감추지 않았다.
“학교에 왔으면 볼일 보고 돌아가.”
“마음에 둔 녀석이라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한 겁니까? 베타와 붙어먹으려고?”
언제 다가왔는지 재강원의 페로몬이 무열의 몸을 감쌌다. 다리가 휘청였다. 아무리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베타의 앞이라지만 그는 학생 앞에서 수치도 모르고 무열에게 성애의 페로몬을 보냈다.
“그만.”
재강원에게 붙잡혀 안기면서 무열의 저항은 간단히 제압당했다. 몸은 쉽게 열기에 휩싸였다.
여전히 재강원에게 휘둘렸다. 모든 것을 이 남자에게 빼앗기고 가족을 잃고 제 삶도 없이 살았는데 자신이 끊어 냈어도 여전히 그들의 관계는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언제까지 이럴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선생님.”
한주가 경계하며 무열을 구하기 위해 한 발 다가왔다.
일방적으로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심에 구석으로 몰렸었던 한주는 그들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여 주었다. 힘이 없는 베타라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고 무열에게 보여 주었다.
하지만 무열에게는 그런 힘은 없었다.
없지만, 모든 것을 다 빼앗겼기에, 이제 지킬 것이 없기에 조금이라도 재강원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제 목숨, 인생을 걸어서라도.
“재강원.”
무열은 재강원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의 앞에서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거부하면 고무공처럼 더 반발하니 부드럽게 힘을 가해야 한다.
“그만해, 강원아. 학생 앞이야.”
그만하라고 말하는 이무열의 목소리는 달았다. 재강원의 페로몬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이무열이 ‘강원아’라고 부르는 소리를 좋아했다.
흥분한 무열이 위에 올라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쾌감에 어쩔 줄 몰라 짧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서.
어렸을 때만 재강원을 이름으로 불렀기에 무열이 ‘강원아’라고 그를 부르면 신경이 풀어졌다.
한주는 재강원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변화를 지켜보았다.
이무열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목덜미를 쓸자 사육사를 만난 대형 고양잇과 동물처럼 재강원은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흡사 다정한 연인의 모습 같았다.
“선생님.”
일방적인 추행이 아닌 오래된 사이로 보이지만 한주는 무열을 다시 불렀다.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한주에게 신경 써 준 어른이 재강원과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무열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강원은 무열의 팔을 잡아 한주와 마주 보도록 등 뒤에서 안았다. 그의 입술이 무열의 귀에 닿았다.
“겨우 이딴 애송이 베타 때문에 평생 숨겨 온 일을 드러내고 날 움직인 겁니까? 날 이용해요?”
“재강원.”
무열이 몸을 뒤틀자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꽉 안았다.
“그만해. 네가 왔다는 말이 퍼져서 사람이 모일 거야.”
“남들이 다 알아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당신도 사표를 냈잖아요. 오메가에 이사장과 애인 관계이니 더는 학교에 있을 수 없죠.”
“너…….”
다시는 학교에 남지 못하게 비열한 짓을 했다.
여전히 재강원은 이기적이었고 무열의 삶이 어떨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직 저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만 생각한다.
이무열은 웃음이 나왔다.
그의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발버둥 쳐도 재씨 가문의 직원이라고.
등 뒤의 재강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원해서 선택한 삶이 아닌데 어느새 엮이고 엮여 풀어질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매여 있었다. 저를 풀어 주든 옭아매든 선택은 재강원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기숙사를 폐쇄시킨 것처럼 재강원을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자신 또한 이기적으로 행동하자.
부지불식간에 벽지를 뜯어내듯 무열의 등에서 재강원이 떨어졌다.
한주가 몸을 회전시키며 재강원을 공격한 것이다. 재강원은 몸을 뒤로 물리며 쉽게 거리를 넓혔다.
무열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음에 벌어질 일이 걱정되어 몸을 떨었다. 한주가 위험하다.
재강원이 몸을 똑바로 세우며 한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가 화났다.
“건방지게…….”
“그만둬!”
무열의 목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재강원의 몸에서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페로몬이 한주를 향해 쏟아졌다. 페로몬 무감증이지만 평범한 베타가 로열 알파의 짙은 페로몬을 받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재강원!”
한주의 팔을 잡아 끌어안은 순간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재강원의 페로몬이 유리 벽에 막힌 것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학생 상대로 무슨 짓입니까, 재강원 이사장님.”
우강희가 개입했다. 공격이 막힌 재강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페로몬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힘을 겨루듯 우강희가 친 벽을 넘으려 재강원의 페로몬이 넘실댔다. 강희는 한주와 재강원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자 확연하게 재강원의 페로몬이 밀렸다.
재강원의 것보다 강한 페로몬을 본 적이 없는 무열은 흡, 숨을 삼켰다.
재강원은 우강희를 노려보았다.
“우강희.”
“보는 눈이 많은데 그만하시죠.”
지적에 재강원의 고개가 움직였다.
처음 그와 눈이 마주친 건 아들인 재민석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멀리서 학생 몇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그의 눈이 차갑게 우강희에게 머물렀다. 이걸 어떻게 죽일까 계산하는 것이 한주에게도 보였다.
“이사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소란을 들었는지 우천희까지 왔다.
갑자기 연락도 하지 않고 온 재강원 때문에 당황했는지 빈틈없이 넘긴 헤어스타일이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면 학생회에서 마중 나갔을 텐데 어떻게 갑자기.”
“바쁜 학생들에게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 수는 없지.”
한주는 다가온 학생회장의 행동을 주시했다. 우천희는 우강희의 등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강희도 있었구나.”
우천희는 반갑게 동생을 보았다.
우강희가 인사를 받아 주든 말든 우천희는 관심 없이 재강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 동생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뛰어난 컨트롤로 페로몬을 갈무리했다지만 공기 중에 남은 잔여물로 상황을 읽었을 텐데도 우천희는 우강희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우강희에게 책임을 지우는 모습에 한주가 나서려는데 뒤에서 무열이 잡았다. 고개를 내저으며 말렸다.
한주는 턱에 힘을 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재강원은 흐트러지지 않은 옷을 정리하듯 옷깃을 매만졌다.
“아직 어리니 그럴 수 있지. 아들을 데려다주는 김에 평소에 학생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나 돌아보았는데 다들 기개가 좋아. 아주.”
“혈기왕성한 나이니까요. 여기서 대화하기보다 들어가시죠. 좋아하시는 차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럴까. 자네는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그의 시선이 한주를 향하자 한수원이 나섰다.
“우강희의 룸메이트인 박한주입니다.”
“박한주.”
재강원은 이름을 기억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한주의 팔을 잡은 무열의 손에 힘이 실렸다.
“우강희, 박한주. 두 사람도 같이 가지.”
통보였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청해 주신 건 고맙지만 박한주와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우강희는 재강원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다른 자리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정중히 고사하지만 태도는 건방졌다. 대등하거나 자신보다 하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재강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지만 속은 끓어올랐다. 하지만 학생회 임원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악수를 거부하고 가 버리는 속 좁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올해 1학년은 참 기대돼.”
우강희의 손을 잡아 꽉 쥐었다. 서로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거의 동시에 손을 놓았다.
“그래. 바쁘다는데 이사장인 내가 학생을 방해할 수는 없지. 자네들도 그만 가 봐. 일부러 나와 주었는데 오늘은 그만 가야겠어.”
잠시 재강원은 악수한 손을 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긁힌 상처가 남았다.
우천희는 재강원을 잡았다.
“아닙니다. 이사장님이 오셨는데 급한 일도 미뤄야죠. 다른 일이 있어도 이사장님이 최우선입니다. 가시죠.”
우천희는 재강원의 옆에 서며 길을 안내했다. 재강원과 학생회 학생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한 사람이네.“
간단한 한주의 평가에 우강희는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아무리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아도 로열 알파로서 재씨 일가의 후계자로 살아온 남자였다. 노련한 어른의 위압감이 여타 알파와 다를 텐데도 한주는 언제나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선생님, 괜찮아요?”
무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가 휘청이자 한주가 팔을 잡아 부축했다.
“미안…….”
“왜 선생님이 사과해요? 이사장이 성질내서 그런 건데.”
“……그러네. 내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습관이 참 무섭다.”
무열은 자조했다. 정신을 차렸는지 한주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자기 힘으로 섰다.
“미안하다, 한주야. 내가 오메가인지 몰랐지.”
“선생님이 베타든 오메가든, 아니 알파였어도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선생님이 어떤 형질이었어도 변함없이 저한테는 그냥 선생님일 뿐이에요. 그런데 학교 그만두세요?”
“……아니, 그만두지 않을 거야.”
한주는 울 것 같은 무열의 얼굴을 보고 어깨를 안아 주었다.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무열에게만 들리도록 소곤거렸다.
“다음부터는 남자 보는 눈 좀 키우세요. 왜 저런 사람과 사귀세요.”
“하하, 그러게.”
학생에게 오메가임을 들키고 이사장과 애인 관계라고 들켰는데 아무렇지 않은 한주의 말투에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게 한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친근감이 들었다. 베타라 페로몬을 내보내지도 못하는데 정이 갔다.
“당신이 아버지의 애인이라고?”
재민석이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무열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말이 사실이야? 오메가에 애인이라고? 당신이? 언제부터야? 언제부터 그딴 더러운 짓을…… 우리 아버지는 결혼한 유부남이야!”
충격을 받은 민석은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꼭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무열은 민석이 안타까웠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먼발치에서 보았다. 큰 정은 없었지만 어릴 때부터 보아 왔기에 조금 애틋한 감정이 있는 아이였다. 특히 아버지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받고 싶어 하는 그 몸부림이 무열에게도 보였기에 더 안타까웠다.
“민석아.”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당신 같은 사람이 선생이랍시고 학교에 있다니, 절대 용납 못 해!”
민석은 뛰어가 버렸다.
재강원은 가정적인 아버지는 절대 아니다. 애인도 무열 외에 여럿이 있었고 결혼 전부터 그런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에게 그런 일들을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해도 아버지를 믿는 아들에게 어떻게 얘기하겠는가.
“괜한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 이사장이…… 너한테 다른 말은 안 했어?”
한주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요. 동창 중에 저랑 닮은 베타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렇구나. 그만 가 봐. 혹시 이사장이 불러내면 나한테 연락하고.”
“제 걱정보다 자기 몸 걱정을 하세요. 선생님 얼굴이 창백해요. 양호실에 가서 좀 쉬세요.”
“그럴까. 난 잠시 여기 앉았다 갈 테니 너희는 들어가.”
한주는 강희에게 손짓하며 먼저 걸음을 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가는 뒷모습을 보며 무열은 과거 어느 날의 재강원과 자신도 저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의 미래가 자신들처럼 되지 않기를.
무열은 한주에게 소리쳤다.
“한주야, 아까 강희가 너 찾는 거 같던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
“어, 네.”
한주는 대답은 했지만 강희를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강희를 떼어 놓으려고 발이 빨라졌지만 그 옆으로 따라붙으며 우강희가 어깨를 잡았다. 한주가 기겁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희는 밀리지 않으며 옆으로 붙었다.
투닥거리는 몸짓이 작은 강아지 두 마리 같았다.
“아, 이미 아는구나.”
피하고 달라붙는 모습에 한주가 강희의 마음을 알고 있음이 보였다. 저처럼 일방의 마음이 아니었다.
“너희는 우리와는 다르겠구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부러우면서도 입맛이 썼다. 무열은 등을 돌렸다.
* * *
우강희는 기숙사 로비를 나왔다. 기숙사 앞에는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외부 차량이 서 있어도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세단에서 내린 사람이 강희를 만나자 한 번쯤 시선을 주었다.
집안의 일을 도와주는 직원은 지퍼백을 두 장 꺼냈다.
“샘플은 이쪽에 각각 넣어 주시면 됩니다.”
“손톱 밑에서 채취해야 하는데 면봉이나 다른 도구가 있습니까?”
“네, 준비해 왔습니다.”
직원은 손톱깎이를 꺼내 건넸다.
“한 번도 쓰지 않은 제품으로 소독을 해 두었습니다.”
우강희는 지퍼백에 오른쪽 손의 약지를 가져가 손톱을 깎았다. 손톱에 굳은 피가 묻어 있었다.
직원은 그들을 힐끔거리는 학생들을 잠시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직원은 잠시 우강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명령을 내린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 몇 번 본 적이 전부이지만 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전에는 좀 더 조심스러웠다면 지금은 단단해진 느낌이었다. 무엇이 변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우강희의 분위기가 확실히 이전보다 또렷하고 강했다.
강희는 머리카락이 든 비닐을 지퍼백에 넣고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더미도 몇 샘플 준비하세요. 정확히 5 대 5로 나오도록.”
“네. 결과가 나오면 파기까지 확인하겠습니다.”
우강희는 떠나는 세단을 등지며 기숙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한주가 지내는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온 재민석은 초조하게 형 재민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민용은 한 번에 전화를 받는 법이 없었다.
“대학생이 뭐가 그리 바쁘다고 전화를 안 받아!”
담임인 이무열의 아버지가 오래전에 본가 운전기사였었고 더는 관계가 없다고 해도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일하는 이상 재씨 가문의 직원이었다. 한낱 월급쟁이가 감히 재강원의 애인이라니.
“그 사람이 아버지의 애인이라고?”
베타라고 생각했는데 오메가이고 아버지의 애인이란다.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고 들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는 말할 수 없다. 어머니가 충격받을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재민용과 의논하고 싶었다. 아니, 자신이 받은 충격을 형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신호가 끊기며 드디어 민용이 전화를 받았다.
- 오늘 퇴원했다면서 쉬지 않고 왜 전화한 거야? 지금 중요한 사람 만나는 중인데…….
오늘 퇴원한 걸 알면서 민용은 동생에게 안부 전화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내가 학교에서 오늘 뭘 봤는지 알아? 아버지가…….”
- 아, 아버지가 너 데려다주었다는 건 들었어.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동생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아 온 민용은 또 자랑하고 싶어 전화했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부탁하거나 자랑이 아니면 형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가…… 우리 반 담임이 아버지의 애인이래!”
말을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핑 돌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민석은 심장이 떨렸다. 그러나 민용의 반응은 저와 달랐다.
- 그래? 왜 그런 사람을 애인으로 삼으셨대? 애인이 일하게 두다니 이상하네. 외모가 뛰어나?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 뭐야? 아버지에게 애인이 있다니까! 어머니 말고 남자 오메가가!”
- 몰랐어? 아버지에게 애인 많아. 어머니도 정기적으로 만나 후원하는 애인들이 두 명 있고.
“부, 부부잖아. 부부인데…….”
- 왜 이리 순진한 척해? 두 분은 정략결혼이야. 이미 결혼 전부터 애인들이 있었어. 우리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잖아. 그리고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 언제까지 엄마, 아빠 찾고 어린애 짓이야. 피곤하게.
민용은 동생의 충격을 알아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부모는 TV에서 나오는 가족들처럼 화목하거나 다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부고 서로 간에 애정은 있다고 생각했다. 정기적인 가족 모임이나 집안 행사에 참석해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서로 일이 바빠 집에서 볼 시간이 없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부부니까, 부모이니까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석은 쓰레기를 만진 것처럼 던지듯이 핸드폰을 탁자에 놓았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 손을 닦았다.
핸드폰을 들었던 손에 오만 가지 병균이 득시글거리는 느낌이라 소름이 끼쳤다.
“지저분해. 깨끗이 닦아야 해.”
비누로 두 번, 세 번 손을 닦았다.
* * *
우강희가 고백했다.
같은 프라이머 알파들도 그의 의견을 따랐고 어른 앞에서도 결코 기개가 꺾이지 않는 알파였다. 그런 알파가 베타인 한주에게 고백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데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조금의 틈만 보이면 스킨십하며 닿아 왔다.
친구 김지영이 스킨십을 좋아하고 잘 기대며 팔짱을 낀다든가 손을 만지작거리는 등 잘 안겼기에 한주는 스킨십에 익숙했다. 그래서 그와 닿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손길의 농도가 달랐다.
낮에는 어떻게든 그를 피하고 단둘이만 있지 않도록 노력했다. 저녁이 되면 그가 문 앞을 지키고 있어 도망치지 못했고, 경계했지만 한주가 잠들어 버렸다.
그가 고백한 이후 아침 기상이 빨라지면서 피로가 누적되어 잠이 더 쏟아졌다. 이상한 위화감에 눈을 뜨면 우강희에게 세수나 양치를 당하고 있었고 교복으로 갈아입혀지고 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이상함에 일찍 눈을 떠 보니 우강희에게 티셔츠가 벗겨지고 있었다. 놀라 발로 차 버렸는데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오히려 기뻐했다.
‘날 의식해서 몸을 사리는 거야?’
‘미친놈! 아니야!’
아니라고 박박 우겼지만 우강희는 싱글싱글 웃었다.
특히 오늘 아침은 정말 위험했다. 며칠 잠을 설쳐서 피곤했고 아침에 눈을 뜨기 더 힘들었다. 분명 알람을 세팅해 두었는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 잠을 깨운 것은 우강희의 손길이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손길에 한주는 서서히 잠에서 깼다. 조금은 뻣뻣하게 피부에 닿는 옷감에 ‘오늘도 또 늦었네.’라고 생각했다. 반은 체념했었는데 손길이 더 자게 두지 않았다.
우강희는 누워 있는 한주의 옆에 앉아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두피에 닿을 듯 손가락을 깊이 집어넣어 쓸어 넘겨 주었다. 관자놀이를 지나 두피를 스쳐 지나간 손끝은 한주의 뒷덜미까지 내려갔다가 셔츠의 칼라에 걸려 더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머리로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한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손끝은 마지막으로 뒷덜미에 닿았다. 일전에 그에게 강하게 물린 부위를 둥글게 덧그렸다. 피부를 스치기만 하는 움직임은 어딘가 미묘해 발끝이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만해…….”
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그의 손을 치우며 눈을 떴다. 우강희는 한주와 눈이 마주치자 지그시 눈을 가늘게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햇살을 등지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웃음 섞인 낮은 저음으로 아침 인사를 했다.
그 순간 한주는 잠이 다 달아났다. 일순 온몸에 전류가 지나간 듯이 쭈뼛, 털이 섰다.
* * *
“그 외모에, 그 키에, 거기다 알파이기까지 하니 사람이 잠깐 흔들릴 수 있지.”
애써 합리화하며 의자에 누워 고개를 저었다. 잠깐의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야 한다.
눈을 감는데 드륵 미술실 문이 열렸다. 이젤과 화구, 석고상 등으로 엄폐물이 있어 한주가 누운 자리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가길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여기 있었네.”
“우, 우강희?”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급히 일어나 보니 우강희 외에 같이 어울리던 이들도 있었다. 한주의 위치를 알려 준 사람이 차원구인지 눈만 동그랗게 뜬 한주를 보며 키득거렸다.
“거봐, 미술실에 있다니까.”
“차라리 양호실로 가.”
“미술실 오기 전에 양호실 들러서 한주 있나 확인했으면서.”
뻔히 알면서 양호실을 추천하는 황치운도 그들과 똑같았다.
“뭐야, 다 몰려와서.”
“우리 우강희가 좋아하는 임을 찾길래 도와주었지. 고백했다며? 우리한테 다 말했어.”
분명 찼는데, 우강희는 아예 친구들에게 다 말해 버렸단다. 기가 막혀 한주는 팔짱을 꼈다.
“차인 것도 말했겠지? 우강희, 네 마음은 받아 줄 수 없어. 받아 줄 생각도 없고.”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
1초 만에 돌아온 거부에 한주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거절했다.
“생각해 보고 아니고를 떠나서 누군가를 사귈 생각조차 없어.”
“그럼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지. 고백했으니 이제부터 재고해 봐.”
“야, 왜 얘기가 그렇게 오역되는데?”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네 냄새가 싫지 않았어. 누군가 옆에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 잠도 오지 않는데 네 옆에서는 편하게 잘 수 있었어. 너에게는 연애하는 대상이 이 지상의 어느 누가 될지 가능성이 무한하겠지만…….”
그는 한주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다가왔다. 다가왔는데 그에게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너 하나야.”
싸움을 걸고 괴롭히며 말로 조롱한다면 초연하게 흘릴 수 있다. 너는 떠들어라, 나는 한 귀로 흘린다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데 이런 부분에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거절당한다고 포기할 정도면 고백도 하지 않았어.”
그의 진심이 전해져서 한주는 더 난감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친구들이 팝콘을 씹으며 구경했다.
“우강희가 차이는 꼴을 보다니……. 진짜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언제 이런 꿀잼을 보겠어? 그것도 우강희가 차이는 모습이라니! 동영상 찍어 둘걸…….”
아쉬워하는 차원구의 말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갔다. 그래도 짜증이 남아 툭 차원구의 무릎을 차 버렸다. 그것조차 싫은지 우강희가 한주의 팔을 끌어당겼다.
짝, 한주는 그의 손을 소리 나게 쳐 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에 차원구가 헤벌쭉 웃으며 낄낄거렸다.
“건들지 마라.”
“너도 다른 놈 만지지 마.”
진지한 말인데 옆에서 “히익, 히익, 웃겨, 나 죽네.”라며 낄낄대니 진지함이 살아나지 않았다.
“알파들은 거절당해 보지 않아서 박한주 네가 거절할수록 우강희가 불타오를 수 있어. 알파들은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하면 더 오기가 생겨서 덤비는 천성이 있으니까 적당히 사귀다 헤어지는 편이 효과적일 거야.”
황치운은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도 잔인한 조언을 했다. 옆에서 이성진이 끄덕끄덕 격하게 긍정했다.
“네 일 아니니까 그런 말이 나오지. 알파가 너 좋다고 고백하면 받아 줄 거야?”
“씨X, 미쳤냐?”
차분한 황치운이 욕까지 뱉었다.
“그것 봐! 너도 싫으면서 왜 나한테는 하라고 해.”
“넌 베타잖아.”
“베타여도 싫은 건 싫어!”
“아, 웃겨! 우강희를 몇 번이나 죽이네!”
묵묵히 보고만 있던 이성진이 끼어들었다.
“……우강희, 네가 진심이면 한주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 괴롭히고 싶어 고백하지는 않았잖아.”
한주가 발끈해 따졌다.
“나는 거절했어! 생각해 볼 시간도 필요 없고! 절대 거절이야!”
“……우강희는 고백도 거절도 처음이야. 받아들일 시간을 줘. 너에게 계속 집착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잖아.”
“이성진의 말이 합리적이야. 너도 알파 성향을 모르지는 않잖아. 단칼에 거절하면 피곤해지는 사람은 너야. 게다가 지금 방까지 같이 쓰는데 이런 상황이 방에서도 이어지면 귀찮잖아.”
무작정 싫다고 거절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며칠 동안 그 상황을 겪었다.
분명 고백을 거절했는데 우강희는 포기하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했다.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여간 신경이 쓰였다.
한주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성진의 말에 따른다면 적어도 그 기간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쟤들 말대로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 그동안은 얌전히 있을 수 있어? 만지지도 않고 고백도 금지야.”
“그러지. 친구로 있을게.”
담백한 대답이 오히려 미심쩍었지만 이 이상의 합리적인 해결 방법은 없었다. 고백을 거절했지만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차선을 택해야 한다.
“좋아, 3년, 3년간 생각할게.”
곧장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와, 박한주. 저거 양심도 없네.”
“졸업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해? 속 보인다.”
“……그건 아니지.”
이성진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주일.”
강희가 기간을 딜했다.
“알았어. 알았어……. 한 달로 해. 한 달만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일주일.”
강희가 고집을 부렸지만 한주에게 입술이 붙잡혔다. 더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의 입술을 꽉 잡았다.
원구는 웃다 바닥에 쓰러졌다.
“수 쓰지 마. 더 이상의 협상은 없어. 한 달이야. 한 달 30일!”
못마땅해 강희는 혀를 찼다. 곧 혀를 내밀어 한주의 손가락을 핥는 것으로 기분을 풀었다.
* * *
“나중에 다른 소리 못 하도록 계약서를 써야겠어.”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제안했다.
“좋아, 써.”
오히려 우강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블릿을 들고 소파에 앉은 그는 빈 문서 파일을 열었다. 전용 펜슬로 상단에 ‘계약서’라고 썼다. 한주는 옆으로 다가가 유려한 글씨체를 보았다.
“박한주는 지정한 날짜까지 우강희의 고백에 관해 대답해 준다. 고백의 대답을 우강희는 동의하고 따른다. 30일간 두 사람은 친구 관계를 유지한다? 잠깐 기다려.”
한주는 추가 요구 사항을 말했다.
“사람을 물로 보지 마. 친구 관계? 너무 포괄적이야. 좋아한다는 말도 하지 않고 스킨십도 금지한다고 넣어.”
그 말에서야 은은히 미소 짓고 있던 강희의 표정이 굳었다.
머리 굴리는 알파에게 한 대 먹였다고 생각하며 한주는 씨익 웃었다. 스킨십 금지면 아침에 절 깨우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도 널 만지지 않게 해. 그러면 원하는 조항을 넣지.”
“좋아. 이 학교에서 누가 날 만지겠어.”
딱히 친하게 지내는 학생도 없다. 강희는 거침없이 태블릿에 적어 갔다. 한주는 그가 허튼소리를 넣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계약 기간 동안에 외박하지 않으며 타인과 스킨십한 만큼 우강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이게 무슨 말이야?”
“타인이 널 만지면 나도 똑같이 만지고, 네가 타인을 만지면 똑같이 날 만져야 한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황당하네. 내가 왜 널 만져? 싫어. 지워.”
그는 쉽게 지워 주지 않았다.
“그러면 아예 스킨십 조항은 없애자. 딱 한 달이야. 그 한 달 동안 타인이 널 만지지 않게만 하면 돼. 네가 먼저 다른 사람을 만질 일은 없잖아. 나도 한 달간 참는데 너도 조금의 불편은 감수해야 공정하지.”
하필이면 ‘공정’이라는 단어가 한주의 마음을 건드렸다.
우강희를 노려보며 곰곰이 지난 한 달을 생각했다. 외부에서야 우강희는 모를 테니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학교 내에서도 서로 몸을 부딪치든가 만지며 친밀하게 교류하는 사람도 없었다. 폭행도 스킨십이라면 2학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들도 요즘은 조용했다.
스킨십 조항은 굉장히 중요했고 한주의 아침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인심 쓰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주도 동의했다.
“……타인이란 범위는 가족과 선생님은 제외야. 그리고 폭행에서 생기는 스킨십도 제외고.”
“더는 네가 맞을 일은 없어.”
그는 다른 첨언 없이 한주가 원하는 문장을 정확히 적어 넣었다. 계약이 끝나는 한 달 이후에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의 한 달 동안 아침잠을 사수한 것만으로도 한주는 대단히 만족했다.
날짜를 적으며 마무리하려는 강희에게 추가로 말했다.
“네가 계약을 어길 시, 가령 답을 듣고도 수긍하지 않거나 한 달 이내에 다시 고백하거나 강제로 날 만지거나 그럴 시에 계약은 끝나고 내가 방을 옮기도록 적극 협조 한다. 아, 그리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박한주에게 차였다고 세 번 외친다.”
반드시 계약서를 지키도록 마지막 문장을 넣었다. 자존심 강한 알파가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우강희는 간단히 받아들였다.
“좋아. 그리고 네가 어길 시 이 계약은 무효가 된다.”
한 달 뒤로 미루었다고 해서 한주의 대답이 긍정적으로 변할 리 없다. 무효가 되어도 이전과 다름이 없고.
그렇게 두 사람만의 계약서가 만들어졌다. 각자 사인을 하고 그는 한주의 이메일로 계약서를 보내 주었다. 그 짧은 사이에 강희가 다른 짓을 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았을까, 의심한 한주는 메일을 열어 계약서를 꼼꼼히 확인했다.
“좋아.”
“토요일 오전에 병원 가자. 갔다가 검사하고 차원구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 가면 돼.”
“병원? 나?”
“다니는 병원에 페로몬 연구실이 있는데 담당하는 의사가 내 페로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도 네가 괜찮을지 검사를 하자고 했어.”
“야, 그건 우선 내 동의를 먼저 받고 결정할 일 아니야?”
“페로몬 무감증 때문에 검사해야 한다며. 같이해 달라고 하면 돼.”
잠시 엄마에게 알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이어지는 말에 쉽게 결정되었다.
“국가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비용은 무료야.”
“그러면 나야 고맙지.”
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주는 귀가 뜨거워졌다.
“그런 시선 금지!”
“계약서 작성은 끝났어. 이미 늦었어.”
우강희는 빙긋 웃었다.
한주는 다시 핸드폰 속의 계약서를 확인했다. 분명 원하는 조항을 다 넣었는데 그는 자신만만했다.
계약서가 저에게 불리한가?
쓰자마자 후회되기 시작했다.
* * *
드디어 금요일이 왔다.
학생회 임원 신입 환영회 장소는 여의도의 한 빌딩, 12층에 있는 회원제 클럽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검은 대리석으로 중후한 멋을 낸 로비가 함부로 내디딜 수 없는 압박감을 주었다. 어디로 가라는 안내판도 없어 조명을 따라 걷다 보니 입구가 보였다.
한주는 입학식 때 입었던 짙은 회색 슈트의 끝자락을 습관적으로 잡아당긴 후 직원을 향해 걸었다.
현판도 없었다. 초대장에 있는 것과 같은 로고가 철제문에 박혀 있었다. 모임 시간보다 10분 일찍 왔으니 들어가도 괜찮겠다 싶어 직원에게 다가가 초대장을 보여 주었다.
“오늘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임원 신입 환영회가 이곳에서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맞습니다만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참석하라는 초대장이니까 확인해 보세요.”
직원은 초대장을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알파 회원제 클럽이라 베타인 분은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아하.”
베타가 임원이 된 것을 못마땅해하면서도 한주의 거절을 받아 주지 않고 직접 신입 환영회에 와서 거절하라고 요구하더니 유치한 짓을 꾸몄다.
그나마 우강희가 질문해 준 덕분에 드레스코드는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입장도 못 했다. 그저 졸업생 앞에서 말로 기선 제압을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탁탁 바닥을 두드리며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렸다. 우천희가 바라는 바는 확실했다.
베타에게 수치를 주고 싶은 것이다.
그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에 초대했으나 입장도 거부당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베타를 비웃으며 격차를 보여 주려는 속셈이다.
“유치하네.”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면 방법을 강구해 안으로 들어갈까.
들어가지 않고 가 버리면 왜 오지 않았냐고 시비를 걸며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임원에서 제명하려고 귀찮게 할 것이고 그렇다고 안으로 들어가자니 무력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고민하는데 여러 명의 걸음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소리만 점점 가까워졌다. 코너가 있어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기백이 남달라 한주는 허리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렸다.
언젠가 TV와 경제지, 인터넷에서 보던 기업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위압적인 체구, 훤칠한 키, 또렷한 이목구비가 연륜과 어우러지자 존재감이 대단했다.
10년 전에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천상사 회장으로 취임한 피경성이 제일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직원은 묵직한 철문을 열어 과하지 않게 45도로 허리를 숙였다. 안에서 우천희와 한수원, 그 외 학생회 임원들이 나와 복도 양옆으로 섰다.
“선배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입 환영회가 늦었어.”
“이번에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결원도 있다고 들었는데? 나 때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지.”
“그러잖아도 선배님들의 고견을 듣기 위해 추가 인원의 리스트를 준비했습니다. 후배를 선배님들이 직접 뽑는 이벤트로 환영회에 재미를 더해 보았습니다.”
OB들의 비난에 우천희는 일부러 준비했다며 포장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직원이 문을 닫기 전에 한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우천희 학생회장님.”
알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주의 앞을 지나갈 때 시선도 주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우천희가 나서면서 그들은 멈춰 섰다.
“아, 박한주.”
우천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왔네. 들어가지 않고 왜 밖에 서 있지?”
한주가 불러 처음 봤다는 듯 말한다. 철문이 열리며 눈이 마주쳤으면서.
드라마 대본을 보며 연기하는 배우처럼 한주는 우천희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검은 초대장을 들어 보였다.
“베타라서 입장할 수 없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직접 환영회에 와서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하라고 했잖아요.”
“누구지?”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OB들을 위한 알파 회원제 클럽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베타인데 클럽의 근간인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한다고 말하니 관심을 보였다.
“캠프에서 선발된 베타 박한주입니다.”
“베타가?”
“네.”
기가 막혀 탄성을 터뜨렸다.
“하, 캠프에서 베타가 남아 임원이 되었다고? 요즘 알파 놈들은 얼마나 나약하기에 베타 하나도 못 잡아?”
“약해 빠진 새끼들.”
“할 말이 없습니다.”
OB들의 질타에 우천희는 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타가 학생회 임원이 된 것도 모자라서 그 자리를 거절한다고?”
“어떻게 학생회를 운영하길래 베타 따위가 저 짓거리를 해? 얼마나 만만히 보였길래.”
나이 먹고 연륜이 있는 그들은 학생인 한주를 앞에 두고 말을 가리지 않았다.
밟아 줄 때는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는다. 그것이 사회인의 룰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불렀습니다.”
우천희는 질타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정도는 예상 안이었다.
“알파와 베타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베타입니다. 사리분간 못 하는 어린 학생이죠.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선배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알파인지, 그 기백을 보고 느끼라고 초대했습니다. 선배님들을 뵌 것만으로 충분히 배웠을 겁니다.”
“이번 학생회장이 말은 참 잘해.”
“말은 무슨. 귀찮으니까 떠넘긴 거지.”
“좋게 봐주시죠. 아직 어린 알파 아닙니까.”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기 위해 기획하고 판을 짜 여론을 조작하는 일이 숨 쉴 듯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환경에서 사업을 하는 알파들이었다.
그들은 뻔히 눈에 보이는 어린 알파의 수작을 귀엽게 여겼다.
피경성은 한주를 보았다. 제 시선을 받고도 베타는 크게 긴장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여유도 보인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한 기업가가 입을 열었다.
“제법이구나, 이 정도 알파들을 면전에 두고 그렇게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배포는 칭찬할 만해.”
“배포는 무슨. 베타는 베타야.”
피경성은 차갑게 눈을 내리뜨며 한주를 깔아보았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녀서 네가 알파들과 대등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런 착각도 곧 끝나겠지. 날고 기고 뛰어 봤자 베타는 베타다. 유전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굴레는 벗어날 수 없어.”
단정 지으며 판결을 내린다. 한 톨의 자비도 없었다. 자라는 새싹을 위해 희망도 남겨 주지 않았다.
그런 세상에서 자라 온 알파들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처럼 자수성가한 알파들도 있겠지만 재강원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위해서는 집안이 받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태어난 환경이 다르고 집안이 다르다.
한주는 이제 그런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데 전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하러 왔습니다. 알파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제가 베타인 것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고요. 소꿉놀이 같은 클럽에 낄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파, 알파’거리며 자부심이 대단한 걸 보니 학생회 임원을 해 보고 싶네요. 베타로서.”
“건방지긴.”
“박한주.”
우천희가 나섰다.
“네가 임원을 하든 말든, 넌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베타니까.”
그리고 선배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이런 일도 이번 한 번이다, 우천희.”
“예.”
우천희는 조용히 선배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철문은 닫혔다.
열린 적도 없다는 듯이 조용히.
피식, 같은 베타이면서 직원은 들어가지 못한 한주를 비웃었다.
“와, 할 마음이 없었는데 전투력 오르네.”
한주는 힐끔 직원을 보았다. 곁눈질로 보고 있던 직원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한주는 직원의 몸을 훑어보았다.
가드로서의 훈련을 받았지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다. 어디가 약한지 서 있는 자세만으로 허점이 보였다. 다만 한주가 그렇게 행동해서 안으로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직장에서 해고된다.
이건 자신의 문제다.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여 타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푹 쉬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직원은 한주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뭐, 어쨌든 와서 얘기는 했으니까.”
발을 돌렸다가 그대로 멈췄다. 클럽을 향해 다른 알파가 오고 있었다. 우람한 체격에 단단한 몸이 눈에 익숙해 반가웠다.
“우리 애가 이렇게 간단히 돌아갈 리 없는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남자를 보고 한주는 반가워 활짝 웃었다.
“그래서, 이대로 돌아가려고?”
“아저씨!”
오송중도 재강원 고등학교의 졸업생으로 학생회 OB였다.
* * *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알파들이 거론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직 어리군요.”
“이번 기수는 글렀습니다. 베타를 잡지 못해 임원으로 선발되게 놔두다니!”
“나 때는 베타가 알파와 눈도 못 마주쳤는데!”
아무리 신입 환영회라고 하지만 OB들이 전부 모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비어 가끔 참가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주로 참여하는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그들 중에 기수가 제일 이른 졸업생은 피경성의 무리여서 그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피경성은 알파들 속에서도 우위를 차지하는 기분을 이곳에서 즐겼다. 그러나 그런 것도 위 기수나 재강원이 참가한다면 쏙 들어간다.
“우상진 의원의 아들이라서 괜찮게 봤는데 이거 좀 미덥잖습니다.”
“임원이 확실히 정해지면 학생회 기강을 잡아야겠습니다. 우리 때는 날아다녔는데.”
우천희는 다른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예상한 반응이지만 속이 쓰렸다. 그래도 한주에게 따로 손을 쓰지 않고 이곳에 부르길 잘했다고 자찬했다.
박한주는 학교 내에서 건드리면 안 되는 폭탄이 되었다. 김시훈이 건드렸다가 일이 커져 언론까지 들썩였고, 최근 그 후폭풍으로 김시훈 아버지의 회사가 매각에 난항을 겪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건드리면 더 크게 터지니 귀찮아서 놔둔다.
하지만 한주의 존재는 깔짝깔짝 우천희를 건드렸다. 우강희의 룸메이트였고 그가 다른 태도를 보이며 박한주를 대한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서지 않았다. 지금은 지켜보아야 하는 시기였다.
우강희에게 더 크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
한수원이 피경성의 말 상대를 하는 천희의 어깨를 툭 쳤다.
“저기 오송중 선배가 들어왔는데…….”
“뭐? 오송중 선배가? 빨리 말하지.”
“그래? 오송중이 왔나?”
우천희도 처음 만나는 선배였다. 이전에 오송중이 활발하게 참석했지만 1년 전 아들을 사고로 잃으며 일에만 몰두하느라 OB 모임에는 나오지 않았다.
피경성은 3년 위 기수 선배의 등장에 떨떠름함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오송중에게 인사하려던 알파들의 표정이 굳었다.
오송중의 옆에 박한주가 서 있었다. 그가 베타를 클럽에 들였다.
피경성은 오송중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나오지 않으면서 OB 모임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그가 다시 나오게 되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베타를 데리고 들어오다니, 클럽의 규칙을 어기는 겁니까?”
최근 러시아의 콜탄 광산 입찰 건에서 오송중의 NL네트웍스에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향후 20년간 안정적인 생산을 장담하는 매장량이어서 입찰에 공을 들였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나와서 규칙을 잊으셨나 봅니다.”
“알파 클럽에 베타를 데려오다니.”
“저 베타, 아까 입구에 서 있던 그 녀석이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우천희가 나섰다. 입구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한주는 안까지 들어왔다.
“재능이 출중하구나. 어떻게 동정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베타 출입 금지야.”
우천희의 고갯짓에 한수원이 한주에게 다가갔다.
“오송중 선배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여기는 알파 클럽이니 베타는 내보내겠습니다.”
팔을 잡으려 했으나 오송중이 한주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막았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
“규칙을 잊지는 않았는데 예외 조항이 있지 않나? 기억하는 사람이 없나?”
그 말에 기억을 떠올린 피경성이 헛웃음을 뱉었다. 생각나지 않는 알파들은 영문을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예외 조항? 그런 것도 있어?”
“왜, 10년쯤 전에 성선 그룹이 후계자라면서 베타를 데려왔잖아. 나중에 알파로 발현했고.”
“아!”
10년 전 알파 발현 확률이 높다면서 베타를 후계자라고 데려와 소개한 OB가 있었다. 그때 후계자를 소개할 때는 회원이 아니라도 형질에 상관없이 데려올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생겼다.
피경성은 쌓인 감정까지 더해 오송중을 공격했다.
“미쳤습니까? 아드님이 죽은 것으로 아는데 알파도 아니고, 그 베타를 후계자로 내세우겠다고요?”
박한주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던 우천희는 정보를 보탰다.
“그 베타는 선배님과 혈연관계도 아닐 텐데요. 평범한 꽃집의 아들입니다.”
곳곳에서 풋, 웃음이 터졌다.
“꽃집 아들?”
“진짜로? 오송중이 모를 리 없잖아.”
“무슨 생각이지?”
“아들을 잃더니 미친 거 아니야?”
한주와 베타를 데려온 오송중을 모두가 비웃었다. 우천희는 말을 이었다.
“선배 같은 너그러운 알파가 있으니 그 베타가 제 분수도 모르고 헛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측은지심에 아들 또래의 베타를 지나치지 못하셨겠지만 놀이는 적당히 하시죠. 오히려 그 베타에게는 분수에 맞지 않아 상처가 될 겁니다.”
한수원은 다시 한주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 했지만 오송중의 페로몬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오송중의 페로몬이 사납게 공격해 왔다.
“감히 입에 담기도 아까운 우리 애를 거론해? 언제부터 이렇게 선배를 개무시했지?”
공격적인 페로몬이 장내에 뻗어 나가 날카롭게 알파들을 찔렀지만 그들 또한 페로몬으로 방어했다. 아직 어린 알파들이 힘에 부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원이 몸에 힘을 주며 오송중의 앞에 섰다.
“그만해 주시죠, 선배님. 죄송합니다.”
“예외 조항에 있는 대로 후계자를 데려와 소개했으면 불만이 있어도 입조심해야지.”
오송중이 페로몬을 거두었다. 다른 알파들도 페로몬을 갈무리하며 어깨를 풀었다.
한주의 어깨를 끌어안은 오송중은 주위의 알파들을 일별했다.
“한주야, 넌 이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일부는 사실이죠.”
“내가 네 대부이고, 박한주라는 베타를 진짜 후계자로 삼았는데 정보가 느려.”
사전에 협의된 사항이 아니라 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연히 마주쳐 그저 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만 했고 오송중도 깔끔하게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생각보다 일이 커졌다.
“아저씨.”
“왜?”
“너무 크게 키우지는 마세요. 클럽에 들어온 도움만으로도 충분해요.”
“진심인데.”
“아저씨.”
“아버지라고 불러. 네 나이에 GO투자홀딩스의 최대 투자자인데 충분히 후계자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
말한 적 없는 일을 오송중이 알고 있었지만 한주는 놀라지 않았다.
“아저씨 돈 노리고 접근하지 않았어요.”
“큭, 알아. 자, 안에 들어와서 할 일이 있다며.”
“아, 맞다.”
한주는 큼, 목을 가다듬고 알파들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재강원 고등학교 1학년 박한주입니다.”
“잠깐, 박한주.”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조심하면서 우천희가 말을 막았다.
“네가 오송중 선배 덕에 클럽에 들어왔으니 이것으로 마무리하지. 규칙이라도 예외 조항에 부합하니까. 우선은.”
우천희가 입구와 반대쪽의 문을 가리켰다.
“파트너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장소를 옮기시죠. 기다리다가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럴까.”
“토라지면 귀찮아지니 우선 가 볼까.”
문이 열리자 알파들이 익숙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주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어 자리를 피했다.
“파트너로 인기 드라마의 배우 천서란을 데려왔다면서요?”
“자네 파트너보다는 약하지. IT기업 NL라인의 대표라지?”
“허, 그걸 또 어떻게 알았나.”
“왜들 그렇게 힘을 주었어?”
“저번에 내기가 벌어졌잖아. 누가 더 대단한 파트너를 데려오느냐로. 1등 한 사람이 올해 회장을 맡기로 말이야.”
“짓궂기는. 그래서 피경성도 로열 오메가를 데려왔군.”
“호오, 로열 오메가면 누구?”
“경남의 명문가 이서연.”
“허.”
얘기를 들은 주위의 알파들이 감탄했다.
경상남도의 이씨라면 대대로 우수한 오메가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가정 교육을 잘 받고 미모가 뛰어나며 고고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명망 있는 집안의 알파들과 결혼해서 혈연 인맥이 뛰어나 더 탐내는 집안이었다. 자신의 가치와 몸값을 알기에 쉽사리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오메가가 아니었다.
로열 오메가를 향한 기대감에 알파들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건 오송중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했지만 로열 오메가를 향한 호감은 어느 알파도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로열 오메가까지 참석하다니. 드문 일인데.”
“아저씨는 누구를 데려오셨어요?”
“필요 없어. 내 페어는 공연으로 바쁘고.”
좋은 뜻은 아니었다.
오송중의 페어는 소프라노인데 한시도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오송중은 박한주라는 대체재를 발견해 마음을 치유해 갔지만 오송중의 페어는 공연으로 도피했다. 화목한 가족이기에 아들을 잃은 충격이 더 컸다.
클럽과 연결된 복도를 지나자 클럽과는 별개의 분위기가 펼쳐졌다. 두 면이 창으로 여의도의 야경이 보이고 가볍게 얘기 나누기 좋게 널찍한 소파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가려지는 곳 없이 탁 트여 답답하지 않았다.
“뭐지?”
평소라면 파트너들이 알파들을 반기며 다가올 텐데 그들은 한 장소를 둘러싸고 모여 있었다. 검은 셔츠 입은 남자가 앉아 있는 소파 주위에 몰려 있었다.
오메가들은 열망하는 시선으로 그 사람만을 보았다. 모두 뺨을 붉히며 남자만을 보았다.
파트너들이 알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타인을 보자 무시당한 피경성이 소리쳤다.
“어떤 새끼가 남의 파트너에게 페로몬을 써!”
성큼성큼 앞으로 나간 피경성은 오메가들을 밀쳤다.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다가 흠칫 떨었다.
어른스럽지만 어딘가 완성되지 않은 미숙함이 남은 얼굴은 눈을 내리뜨고 바닥 어딘가를 보며 우수에 젖어 보였다. 이마를 덮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눈이 가리는 것이 안타까워 피경성은 신음을 흘렸다. 날렵한 턱선이 눈길을 끌었고 굵은 목 근육의 굴곡이 유독 짙게 느껴졌다.
오뚝한 콧대는 여성스럽지 않았지만 날렵했고 그 아래 입술이 제법 보기 좋았다.
피경성은 달려가 그 발아래 무릎을 꿇고 싶었다. 억만금, 조를 주고서라도, 아니 전 재산을 주더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소유한 알파가 있다면 죽여 버리면 된다.
욕구가 들끓지만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경외감마저 들었다. 평생 내로라하는 여러 오메가를 보았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누, 누구의 파트너지?”
더듬거렸다.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경성은 맹렬히 솟아오르는 소유욕과 황홀함에 젖었다. 그나마 주위에 알파들이 있어 한 가닥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름이 뭐지?”
오메가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노련한 알파들조차 넋 놓고 보는 사람이 고개를 움직여 눈을 들었다. 시선이 피경성을 지나 뒤로 향했다.
옅게 지은 미소에 눈이 가늘어지자 오메가들과 알파들이 한숨을 쉬었다.
한주는 눈이 마주치자 놀라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우강희? 네가 왜 여기 있어?”
우강희.
그 이름에 알파들은 정신을 차렸다. 이전에 그를 본 적이 있는 알파들은 이름을 듣고 나서야 알아보았다.
이전에 보았을 때도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확연했는데 지금 눈으로 보고 있어도 전혀 떠올리지 못했었다.
“우강희라고?”
“그 우상진 의원의 아들?”
“네? 그 알파 말입니까? 아니, 왜 알파가 파트너처럼 저기에?”
“그 알파라고?”
소문을 들어 본 알파들은 우강희를 ‘그 알파’라고 지칭했다.
웅성거림은 우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사그라들었다. 지대가 높은 것도 아니고 계단 위에 있지도 않았고 그만큼 키가 큰 이들이 많았지만 알파들은 우강희를 올려다보는 느낌을 받았다.
위엄.
공간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가까이 있는 오메가부터 길을 터주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마치 왕을 향해 경의를 표하듯이.
우강희가 다가옴에 따라 알파 또한 물러났다. 비켜 주며 그가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발은 한주의 앞에서 멈췄다.
“우강희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 만나러 왔지. 회원의 파트너라니까 들여보내 주던데.”
“초대장 없잖아?”
“보여 달라는 말은 없었어.”
“흠, 보통은 파트너와 같이 입장하거나 신분 확인을 하는데…….”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오송중이 신음하듯이 말을 흘렸다.
이 정도의 알파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오송중은 온몸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정신을 빠짝 차렸다. 이전부터 소문도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주변의 알파들은 반은 두려움과 반은 경외로 우강희를 보고 있었다. 오송중은 여타의 알파처럼 ‘홀리지’ 않았다.
한주가 호감을 보인 사람이라 오송중은 다른 알파들보다 심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강희가 오송중에게는 페로몬을 조절했다.
한 사람 더, 우천희도 오송중만큼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우강희! 네가 왜 여기 있어?”
우천희가 우강희의 어깨를 움켜잡아 몸을 돌렸다.
“한수원!”
날카로운 부름에 수원이 빠르게 다가왔지만 우강희를 데려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우강희의 어깨를 움켜잡은 우천희의 팔을 잡았다.
수원은 주위에 들리지 않게 낮게 충고했다.
“선배들이 지켜보고 있어.”
“……그래.”
어금니에 힘을 주며 우천희는 우강희의 어깨를 밀치듯이 놓았다. 못마땅한 얼굴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설마 내 동생이 미성년자이면서 파트너로 참가할 줄은 몰랐어. 우강희, 나가라.”
우천희는 어떻게든 쫓아낼 구실을 찾아냈다. 우강희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나중에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우천희의 앞에서만큼은 고분고분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당신도 아직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클럽에 참가했으면서 미성년자라 안 된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미성년자의 파트너이니 미성년자가 되는 것이 맞습니다.”
“우강희, 감히 내 말에 거역해?”
다른 때라면 우천희의 노려보는 시선에 생기 없는 눈을 내리깔며 원하는 대로 행동했을 우강희가 꼿꼿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거부였다. 반항이었고 거역이었다.
처음 겪는 상황에 우천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둘이 있는 공간이라면 옷을 벗고 돌아서라고 윽박지르며 벨트를 손에 쥐었겠지만 지금은 선배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미성년자라고? 아쉽다.”
“저 사람이 그 알파구나. 우상진 의원의 둘째. 과연 대단해.”
파트너로 참가한 오메가들이 한숨을 쉬며 아쉬워했다.
오송중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한쪽 팔로 한주의 어깨를 감쌌다.
“최고의 파트너를 데려온 사람을 올해의 회장으로 뽑는다면 박한주, 네가 되겠구나.”
“전 학생회 임원도 아닌데요. 어쨌든.”
박한주가 한 손을 치켜들어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저 박한주,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굳은 표정의 우천희에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신입 환영회에 참석해 졸업생 선배님들 앞에서 거절했습니다. 이것으로 거절은 확실히 받아들여진 거죠?”
“박한주, 너…….”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우강희, 우린 가자. 아저씨, 다음에 봐요.”
“같이 나가지. 오랜만에 젊은 애들과 같이 식사나 할까.”
오송중은 한주와 우강희의 뒤를 따라갔다.
단 세 명이 빠졌지만 장내는 조용했다.
한주가 거절을 할 걸 알기에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관심을 돌렸는데 오메가들 앞에서 말해 버려 창피를 당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우천희와 더불어 현장에 있는 알파들 전부의 수치였다.
침묵을 깬 사람은 전신을 새하얗게 의상을 맞춘 오메가였다. 오메가들의 이상형이라 불리는 이서연은 입구를 향해 걸었다.
이서연을 파트너로 부른 피경성이 황급히 불렀다.
“어딜 갑니까?”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석했어요. 우강희 님을 뵐 수 있었지만 더는 여기 있는 의미가 없으니 전 갈게요.”
“이, 이서연 씨! 이렇게 가면 어떡합니까?”
천서란도 웨이브 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따라갔다.
“서연 씨, 같이 가요. 이렇게 모인 김에 내 세컨드 하우스에 가서 와인 한잔씩 할래요? 멋진 알파를 보았으니 이대로 끝내기 아쉽잖아요.”
“저도 가고 싶어요.”
그 후 파트너로 참석한 오메가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알파들도 가 버렸다.
“이렇게 최악의 모임은 난생처음이군.”
“시간 낭비를 시키다니.”
“우천희, 네 학생회장 자리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알파들은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한마디씩 남기고 떠났다. 현 학생회 임원들은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했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우천희에게는 그들이 뭐라 하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강희가 변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던 우강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한수원.”
“왜?”
“우강희가 의뢰한 유전자 검사 건, 결과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지?”
우천희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수원은 전화로 들었던 대로 말했다.
“모른대.”
“네 장난을 받아 줄 기분 아니야. 제대로 말해.”
“장난 아니야. 말 그대로 전했어. 그들도 모른대.”
“돈을 받아 놓고 모른다고? 조사를 했으면 결과가 나와야지! 유전자 검사를 했으면 일치든 불일치든 나왔을 거 아니야?”
신경질적인 외침에도 한수원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다.
“가명으로 검사가 이루어졌고 검사소에서 결과를 빼돌렸지만 소용없었어.”
우천희가 돌아보았다. 얼굴이 창백해 핏기가 없었다. 주먹에 힘을 주며 물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용없다니, 결과가 나왔는데 왜?”
“의뢰할 때 처음부터 가짜 비교군을 포함해 검사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어. 검사 샘플들도 떠나기 전에 보는 앞에서 다 처분했대.”
“하, 치밀하네. 미리 더미를 준비한 건가.”
씩씩대던 우천희는 화를 참으며 다시 물었다.
“더미라도 검사 결과를 알려 주었겠지? 그건 어떻게 나왔어?”
“소용없어. 한쪽으로 치우친 결과들이면 추측이라도 할 텐데, 일치 불일치가 5 대 5야.”
“뭐?”
우천희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정확히 동등한 결과물이 나왔어. 그게 무슨 뜻이겠어? 처음부터 결과를 알고 검사했다는 소리야. 그러니 더미도 맞추어서 준비한 거지.”
“설마, ……우강희가 아나?”
“뭐?”
무심코 한 말에 수원이 대답하자 우천희는 자신 외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무리 수원이 수발처럼 행동하고 감출 것이 없다지만 가끔 꺼려졌다.
“나가.”
우천희가 변덕스럽게 명령하는 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수원은 “그럼 내일 보자.”라고 인사하며 나갔다.
“우강희, 이 자식!”
우천희는 소파를 발로 차고 손에 집히는 물건을 벽으로 던졌다. 우강희에게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아악!”
발길질에 묵직한 소파가 흔들렸지만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초조했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애써 아닌 척 가렸지만 불안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누구와 검사했지? 설마 그 자식이 알고 검사한 건 아니겠지?”
만약 우강희가 알고 있다고 해도 어느 한쪽이 비밀을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는 우천희가 나설 수 없다. 먼저 묻는다면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불안하지만 우천희는 알아도 모른 척, 누군가 긁어 드러내기 전까지는 스스로 꺼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우천희를 두렵게 하는 일은 우강희가 변했다는 사실이었다.
* * *
오송중은 배고프다면서 단골집에 가자고 한주를 이끌었다. 그들을 태운 세단은 서초역 인근의 한 빌딩 앞에 섰다.
“NL네트웍스, 아저씨 회사네요.”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뒤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이 오송중을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구내식당 가서 먹자. 특별히 구내식당에 신경 썼더니 일전에 TV에서도 촬영하고 갔어. 돈만 있으면 다 사 먹을 수 있는 가게가 아니야.”
“구내식당! 그 프로그램 봤어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 회사였네요. 음식 진짜 잘 나오던데. 어, 8시가 넘었는데 지금도 해요?”
“이럴 때 특권을 누려야지. 이건 농담이고, 해외 시차에 맞추느라 야근하는 직원들이 있어서 지금도 열려 있지. 가자.”
오송중은 우강희에게 말도 붙이지 않고 한주만 신경 썼다. 그러나 우강희도 똑같이 오송중을 무시하고 있었다.
로비로 들어서자 경비가 황급히 달려왔다.
“대표님, 퇴근하시더니 다시 오셨습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사하러 왔어요.”
뒤따르던 비서는 앞서가 임직원 엘리베이터를 열어 두었다.
“우강희, 올 거면 연락하지. 처음부터 너와 같이 들어가면 되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어.”
“입구에서 베타라고 컷 당해서 그냥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못 만났겠다.”
“나도 한주를 만나러 갔지.”
“어, 아저씨도요?”
오송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저씨가 졸업생에 학생회 임원이었다니, 놀랐어요. 그런데 제가 참석하는 거 아셨어요?”
“원래 올해는 참석할 생각이 없었는데 네가 참석한다는 말에 알파 클럽이라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갔지.”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버지라고 불러.”
“둘만 있을 때만요. 남들이 오해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구내식당으로 올라가며 한주는 회사 사람들에게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오송중은 한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강희를 보았다.
“그렇지, ‘남’이 오해할 수 있으니까.”
한주도 오송중의 시선을 따라 옆에 선 우강희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통성명은 차에 타기 전에 끝냈지만 그 후 오송중과 우강희는 대화하지 않았다. 각자 한주와 대화했고 우강희와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오송중과 얘기하고 있었다.
오송중을 따라 입구에서 식권으로 주문하고 구내식당으로 들어섰다. 식사하던 직원이 몇 명이 대표를 보고 묵례만 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회사 대표인 오송중을 어려워했지만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오송중은 의자를 꺼내 한주 자리를 챙겨 주었다. 오송중의 옆자리이고 우강희와는 마주 보는 자리였다.
비서가 음식을 가져다주자 오송중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 우리 한주를 아침에 그렇게 깨워 대서 괴롭힌다는 룸메이트라고?”
통성명할 때 한주는 우강희를 룸메이트라고 소개했었다.
“아무리 한주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재밌어도 괴롭히면 곤란해.”
“한주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남들이 보면 어린 학생을 데리고 논다고 오해하겠습니다. 어떤 어른들은 돈을 주고 한참 어린 학생을 만나 불법적인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하니까요.”
오송중을 향해 눈을 돌리며 우강희는 웃는 얼굴을 지웠다. 한주에게 소유의 페로몬을 묻힌 알파가 오송중이었다.
“혼자 식사하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 꼬셨지. 그렇지? 한주야.”
“아는 아저씨와 식사하다가 급히 가실 일이 있어서 혼자 있었는데 그때 아저씨가 같이 식사해 주었어.”
“또 무슨 아저씨? 다른 아저씨도 있어?”
우강희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가 아는 아저씨가 그렇게 많나? 한주는 당황했다. 추궁당하는 기분이었다.
“사부 친구야.”
풋, 옆자리의 오송중이 웃음을 터뜨렸다.
“룸메이트라면서 바람날까 안달 난 부인 같네.”
“마음은 그렇습니다. 제가 고백했는데 한주가 검토 중이죠.”
우강희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야! 한 달간은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널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지, 다른 사람은 예외야.”
“너, 나 믿는다며. 이렇게 등치면 안 되지. 나한테 잘 보이고 싶지 않아?”
“다른 놈이 너에게 수작 부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수작? 수작이라니 누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주는 갸우뚱거렸다. 그제야 우강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오송중은 웃음을 참았다.
“이런 녀석이 그 알파라고?”
소문으로 듣던 분위기와 달라 의외였다. 오송중은 한주의 의자에 팔을 걸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8년 전, 그들 사회에 한차례 소문이 돌았다.
로열 알파나 로열 오메가가 태어나면 발 빠르게 소문이 퍼진다. 우상진 의원의 둘째 아들이 프라이머 알파로 발현되었는데 형질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 있었다.
로열도 아니고 프라이머이니 소문은 금방 잠잠해졌다. 게다가 그 둘째 아들이 외부로 활동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금방 잊혔다.
그런데 작년, 다시 도시 전설 같은 소문이 퍼졌다.
연말 자선 파티에서 알파, 오메가는 물론이고 베타까지 휩쓸린 페로몬 사고가 거론되었다. 그 일의 발단이 우상진 의원의 둘째 아들, 우강희라는 말이 돌았다.
한두 명이 참석한 프라이빗 파티도 아니고 자선 파티여서 참석자도 많았다. 페로몬 사고라 쉬쉬하며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 있던 대다수가, 알파 오메가를 가리지 않고 집단 각인이 벌어졌다가 풀렸으니 입단속이 되지 않았다.
강렬했던 기억과 감각을 잊지 못한 일부가 그때 일을 회자했다.
과연 한 사람의 페로몬으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일부의 사람들이 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우강희를 조사했지만 원하는 보고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국가에 등록된 우강희의 형질은 여전히 프라이머 알파였고 형질 검진의 상세 결과는 국가 형질 보호부에 의해 기밀 취급되었다.
로열 알파나 로열 오메가라도 형질 보호부에서 기밀 처리하지 않는다. 심상치 않음은 느꼈지만 서류나 증거가 없으니 크게 언급되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그 알파’라고 언급하며 우강희가 로열을 넘지 않았을까 기대했다.
명칭조차 없는 로열의 위.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오송중은 소름이 돋았었다.
오송중은 프라이머 알파지만 로열에 가까웠고 자신의 페로몬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 잘 알기에 소문이 더 와닿았다.
자선 파티라면 최소 1백 명이 넘는 인원의 모임일 텐데 그 많은 사람에게 이성을 잃을 만한 영향과 각인이 발생했다니, 영향력이 너무 거대해 공포까지 느꼈다.
그런 존재가 오송중의 눈앞에 있었다.
우강희는 한주를 보기만 해도 좋은지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상상하던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심상치 않은 알파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런 알파가 베타를 좋아한다고?
감정을 숨기지 않아 표정에 진심임이 드러나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클럽에서도 졸업생분들이 얘기하던데, 우강희가 유명해요?”
“장래가 유망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미래보다는 현재가 중요하지.”
옆으로 몸을 돌린 오송중은 우물우물 식사하는 한주의 머리를 쓸었다. 로열보다 높을 수 있다는 우강희보다 박한주라는 베타가 더 탐났다.
아직 고1이면서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노련한 알파들을 상대로 긴장하지 않고 페로몬에도 주눅 들지 않았다.
“한주야, 너만 원한다면 이 회사를 물려줄 수 있어.”
“네, 네.”
진심인데 성의 없이 대답한다. 오송중에게는 그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베타였던 아들과는 다르지만 보고 있으면 애틋함이 생겼다. 아직 어린데 세상일에 달관한 듯이 무덤덤하기만 했다.
“희민이가 공연에서 돌아오면 한번 만나 볼래? 그녀도 널 좋아할 거야.”
“아직은 이르지 않을까요? 힘들어하실 수도 있어요.”
“너라면 괜찮을 거 같은데.”
아직 어리고 인생의 고난을 겪어 보지 않을 나이인데 바닥으로 떨어질 정도의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의 지친 다정함이 있었다. 과하지 않게 사려 깊으며, 그저 눈을 마주쳐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았다.
오송중은 웃음을 흘렸다.
단순히 박한주가 마음에 들어 이유를 찾으며 합리화를 할지도 모르지만 죽은 아들과 같은 나이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애정이 샘솟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는 재력과 능력이 있으니까, 아버지에게 말하면 다 들어주마.”
“네, 네.”
성의 없는 대답을 들으며 오송중은 곁눈으로 우강희를 보았다. 시큰둥하게 그들을 보고 있었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 사이가 좁았다.
“아직 고등학생은 못 해 주는 것들을 해 줄 수 있지.”
“그럼 좀 더 먹어도 돼요? 저기 샐러드바 있던데.”
“……그래, 갔다 와. 셀프야.”
“네.”
한주가 일어나 멀어지자 오송중은 자랑하듯이 말했다.
“귀엽지?”
우강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클럽에서는 눈길을 끄는 요염함이 있었다면 한주의 앞에서는 잘 길들여진 개처럼 한 사람만을 보았고 그 사람이 없어지자 맹수로 돌변했다.
눈이 차가워지며 오송중을 노련하게 살폈다.
감추지 않는 경계에 오송중은 웃었다. 한주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룸메이트라는 알파가 한주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해 재미로 일부러 페로몬을 묻혔었다. 그것을 단박에 알아보고 우강희는 오송중을 보자 털을 세웠다.
“당신입니까? 한주에게 페로몬을 묻힌 사람이.”
“한주를 각별히 아끼니까. 룸메이트라는 녀석이 괜히 찝쩍거리는 모양이라 방어를 해 주었지.”
슬금슬금 우강희의 페로몬이 다가왔다.
오송중은 속으로 ‘이거 봐라.’라며 긴장을 눌렀다. 클럽에서도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견제의 대상이 되자 얼마나 그의 페로몬이 거대한지 느껴졌다.
입은 웃지만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스며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베타에게 무슨 짓입니까. 한주를 실망시키지 말고 좋은 어른으로 남으세요.”
“아끼는 애인데 그럴 수는 없지. 나한테 오라고 너처럼 고백할까? 한주는 착해서 불쌍한 아저씨의 마음을 거절하지 못할 거야. 몇 번은 만나 주며 거절을 하겠지만 그사이에 한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우강희의 페로몬이 사납게 찔러 왔다. 오송중은 자신의 페로몬으로 방어막을 치며 좀 더 긁었다.
“한주는 마음이 약해. 알지? 눈물을 흘리면 와서 머리를 기대며 위로해 주지. 섣부르게 달래지 않아.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걸 아니까 밤이 늦더라도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어 주겠지. 그럴 때 분위기를 잘 잡으면? 그것으로 상황 끝이야.”
“당신…….”
표정이 사라지며 조용히 목을 울려 으르렁 경고했다. 금방이라도 목으로 쇠붙이가 날아올 것 같은 살기가 느껴졌다.
오송중은 몸을 억누르는 페로몬을 느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제 페로몬으로 방어한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딪치고 나서야 느꼈다. 압도적인 차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차이였다. 자신이 느끼는 우강희의 페로몬조차 100퍼센트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런데 그 위압적인 공격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강희, 표정이 왜 그리 굳었어?”
한주가 접시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우강희와 오송중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낯을 가려서.”
오송중은 웃음으로 표정을 바꾸는 우강희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순식간에 순한 양의 탈을 썼다.
오송중이 보기에도 집안이 나쁘지 않고 알파로서도 출중했다. 아니 출중을 뛰어넘어 강력했고 어쩌면 세계 유일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 알파가 한주에 대한 마음을 자각했고 행동하기 시작했으니 말리기에는 늦었다.
진심인 알파는 무슨 짓이든 한다.
결코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견제당했던 오송중은 심술이 솟았다. 한주를 아들처럼 여기는데 저에게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우강희는 감히 페로몬으로 위협을 했다.
‘어린 놈의 새끼가. 나와 한주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데.’
어리든 나이 먹든 알파는 알파다.
오송중은 한주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온 김에 대표실에 올라가 차 마시고 가지. 전망이 좋아서 야경이 아름다워. 그런데 포도가 맛있어 보이네?”
“드실래요?”
한주는 접시를 오송중 쪽으로 밀었는데 오송중이 입을 벌렸다.
“하나만, 아.”
직접 먹여 달라고 행동을 보였다. 테이블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한주는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지만 한주는 포크로 찍어 오송중의 입에 포도를 넣어 주었다.
우강희의 성질을 긁으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오히려 가슴이 뻐근해졌다. 여섯 살 때 아들이 엄마의 행동을 따라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주던 추억이 떠올랐다. 눈가에 열이 몰리며 뜨거워져 오송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지.”
“먹고 있어. 잠깐 갔다 올게.”
한주도 포크를 내려놓고 오송중을 따라갔다. 강희는 그나마 먹는 시늉을 하며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유치한 오송중의 행동은 참아 줄 만했지만 더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공기 중에 남은 오송중의 페로몬을 따라 걸었다. 구내식당 입구에서 멀지 않은 창가 1인 테이블에 오송중과 한주가 기대 서 있었다. 한주는 어른에게 몸을 기대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오송중이 어깨를 들썩이며 한주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 눈은 다정하기만 했다.
“어, 대표님이 웃으시네. 누구지? 아드님은 돌아가셨잖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강희의 뒤로 직원들이 잠시 멈춰 섰다.
“양자를 들이셨나? 보기 좋네. 계속 표정이 굳어 있어 걱정되었는데. 회의 분위기도 안 좋고.”
“아, 한동안 사내 분위기 살얼음판이었지. 누군지 모르지만 대표님 웃게 해 줘서 고맙네.”
그 말을 끝내자마자 흠칫 몸을 떨더니 직원들이 우강희에게서 멀어졌다.
“어우, 몸살이 오려나. 갑자기 몸이.”
“나도 그런데, 뭐지?”
한주에게 다가갈수록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떼어 놓고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다시는 한주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게 명령을 보내고 싶었다.
“박한주.”
“아, 식사 다 했어?”
오송중의 시선은 무시하고 우강희는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붙어 있지 마. 질투 나니까.”
한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고백을 거절하고 회피해도 되지만 그가 한주를 좋아하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몇 번이고 말할 것이다.
“야, 너!”
“그리고, 약속대로 해야지.”
“약속?”
우강희는 소리 내지 않고 ‘계약’이라고 입술을 움직였다. 한주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계약 조항이 무엇인지도.
빨개진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여기서 말할까?”
“아, 아저씨! 저희는 이만 가야 해요. 야경은 다음에 보여 주세요!”
인사하고 우강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래, 다음에 보자.”
계획이 어긋났지만 오송중은 웃으며 보내 주었다. 한주의 학교생활을 듣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 * *
빌딩을 나와 인근의 흡연 구역으로 우강희를 데려갔다. 흡연 구역이라지만 관목으로 외부의 시선을 차단한 작은 공원이었다. 퇴근 후의 빌딩가라 사람은 없었다.
“계약이라니, 진심이야?”
“타인과 스킨십한 만큼 우강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계약서에 분명 그렇게 적었고 동의했지.”
“내가 언제 타인에게 스킨십을 했다고? 먼저 만진 적 없어.”
“클럽에서 그 사람이 네 어깨를 안았고 차에서도 팔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머리를 쓰다듬고 또 구내식당에서는 네 머리를 만지면서 네가 포도를 먹여 주고, 창가에서는 어깨를 기대며…….”
“잠깐, 잠깐만!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눈앞에서 그 사람이 널 만지는 꼴을 보고 있었어. 계약 때문에 나도 많이 참았다는 걸 잊지 마.”
한주는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괜히 계약했다. 왜 그런 조항을 넣어서 난감한 상황을 맞아야 했을까.
그 마음을 읽었는지 우강희가 유혹하듯 말했다.
“계약, 파기할까?”
진심인가 표정을 확인하니 그는 기대를 품으며 절 보고 있었다. 미미한 미소는 거짓이 없어 한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 만지고 어깨에 손 올리는 정도면 친구끼리도 수시로 하는 행동이니까.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좋아, 계약대로 정산하자. 뭐라고 했지? 아저씨가 내 어깨에 손 올려서.”
“안았어.”
“안았…… 우리, 그냥 똑같이 하자. 먼저 머리 만져. 두 번 이랬나?”
“두 번은 만지고 한 번은 머리를 껴안았지.”
그때를 떠올리는지 우강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참 디테일하게 말했다.
“좋아. 알았어. 해!”
빨리 끝내 버리자.
빨리빨리 행동하라며 우강희를 보는데 그가 한 발짝 거리로 다가와 마주 섰다.
한주는 안쪽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10시가 가까워 큰길로 몇몇 사람만 다녔다. 지나다니는 차들의 불빛만 관목 뒤에 선 한주와 우강희를 비추고 지나갔다. 그는 한주를 보기만 했다. 그의 눈이 눈동자를 보고 코를 보고 입술로 내려갔다.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호흡하며 우강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느꼈다.
“뭐 해? 어서 해.”
재촉에 드디어 그의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손이 한주에게 가까워졌다. 느린 움직임에 가슴이 답답해 더 두근거렸다.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그에게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조급해졌다.
‘빨리 해치워 버리지!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거야?’
머리를 우강희 손에 가져갈까, 생각하는데 살짝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손은 한주의 정수리에 올라왔고 한층 그와 가까워졌다. 얼굴 옆으로 그의 팔이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끝이 파고드는 움직임은 느려서 팔에 약하게 소름이 돋았다. 미약한 정전기가 지나간 듯이 공기가 피부에 스치는 느낌마저 느껴졌다.
“우강희, 빨리해 버려. 왜 이리 시간을.”
재촉하며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가 한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지나다니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얼굴을 비추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였다. 미약하지만 우강희의 눈가가 붉었다.
음흉한 속내로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계약 후에 약속대로 더는 고백하지 않았다. 만지지 않았고 약속을 잘 지켰다.
그렇다고 감정을 감추지는 않았다.
수업하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무표정한 얼굴에 따스함이 깃들었고 방에서 옷을 정돈하다 거울을 보면 항상 절 보고 있었다.
약속대로 만지지는 않았지만 항상 가까운 곳에 우강희가 있었다.
그의 눈에 열기가 있었다. 곧게 바라보며 누구를 원하는지 눈빛으로 알렸다.
흡, 한주는 숨을 들이마셨다. 뺨에 열이 올랐다. 얼굴이 가까웠다.
어느새 이 정도로 가까워진 걸까.
머리를 감싸는 커다란 손가락이 살을 만지듯이 두피에 닿았다. 찌릿 피부로 미약한 전류가 지나갔다.
어딘가 닿은 것도 아니고 그가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서 밀어내기도 애매했다. 약속한 대로인데 공기의 농도가 달랐다. 그의 숨이 입술에 닿았다. 그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우강희가 입술을 열었다.
“이 정도면 알겠지.”
낮은 목소리는 한층 잠겨 있었다. 손이 떨어지며 거리가 멀어졌다. 영화에서 편집으로 뚝 잘리듯이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참아 주지. 다음에는 봐주지 않아.”
돌아선 그의 귀가 붉었다. 그 열이 한주에게도 옮았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될 거 같은 기분.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대하는 행동이 마치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한주는 돌아선 강희의 팔을 잡아 몸을 돌렸다.
“참지 마! 그냥 다 해 버려! 뭘 참고 말고 할 것이 있다고 참는대? 그냥 해! 겨우 어깨 잡고 머리 끌어안는 것뿐인데 그까짓 게 뭐라고 그렇게 내외를 해?”
저가 먼저 팔을 잡았는데 양 손목이 그에게 잡혔다. 귓가에 부끄러움을 담던 순진한 고등학생은 사라지고 눈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손목을 잡은 손의 엄지가 움직이며 안쪽의 혈관을 눌렀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듯이 맥박 위에 닿았다.
“해도 돼?”
낮게 물어 오는 얼굴은 진지했다. 지나가는 차 불빛에 비쳐서인지 잠시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진짜 할까? 못 참을 수도 있어.”
그는 한주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한주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시, 싫으면 하지 마. 놔. 집에 가야지.”
관목을 나와 큰길에 서자 숨이 트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주변의 소음이 들렸다.
한주는 그제야 다시 강희를 돌아볼 수 있었다. 관목 뒤에서 나온 그는 곧장 한주에게 다가왔다.
평소 보던 얼굴이었다. 낯선 기분에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 그만 가려는데 강희가 입을 열었다.
“내일 10시까지 한국 병원으로 올 수 있어? 검사해야지.”
“아, 맞다. 피 검사도 해? 금식해야 하나?”
“지금부터 먹지 않으면 돼. 물만 마시고 아침은 먹지 말고 와.”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했다. 열에 타올랐던 눈빛은 고요하게 수면 아래로 감춰졌다.
한주는 시선을 돌리며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검사 시간은 얼마나 걸려?”
“글쎄, 내가 받는 검사는 오래 걸리지 않지만 너는 좀 다를 수 있지. 내 페로몬에 반응하는지 혈액도 채취해야 하고.”
“페로몬 무감증이니 간단하지 않을까?”
“……단계적으로 검사를 해야지. 페로몬 발산도 퍼센티지 단위로 조절해서 테스트하니까.”
“와, 그래?”
큰 흥미는 없는지 버스 정류장에 선 한주는 무의미하게 광고를 보며 대답했다. 광고의 문구나 어떤 연예인이 모델이 됐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으로 우강희가 섰다.
“버스 타고 돌아갈 거야? 너는 몇 번 타야 해?”
“오늘은 호텔에서 자.”
“이번 주는 아예 알바 빼서 방에 들르지 못해. 괜히 룸서비스 시키지 마.”
“그래. 내일 차원구 생일 파티까지 가려면 알바를 쉬는 편이 좋지. ……그런데 그 사람이 네 대부야?”
오송중에 대한 대화로 넘어갔다.
“대부라니, 옛날 영화 같다. 오늘 처음 듣는 말이야. 좀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지.”
평범한 대화가 한주의 수런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아마 클럽에 날 들여보낼 핑계를 대느라 그런 말을 했을 거야.”
“알파가 생각 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어. 너한테 바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아저씨가? 글쎄, 부유한 사람이 나한테 원하는 것이 있을까?”
“이상한 짓 하면 어떻게든 빠져나와서 신고해. 나한테라도 알리든가. 당장 달려갈게.”
하하, 웃음이 나왔다.
“그런 사람 아니야. 좋은 분이야, 아저씨는.”
오송중은 위로가 되었다며 한주에게 고마워했지만 한주도 도움을 받고 있었다. 가족이기에 상처받을까 봐 못 하는 말이 있는데 오송중은 좋은 상담자가 되었다.
“그 사람은, 아버지라는 존재의 대용품인가?”
“뭐? 아니야, 그런 거.”
황당한 질문이었다. 크게 웃었던 한주는 한숨으로 웃음을 정리했다.
“무의식에서는 그런 부분도 있겠지. 아저씨도 아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나도 예전에는 아버지란 존재를 그리워하기도 했으니까. 진짜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는.”
“일전에 학교에서 만났을 때?”
“아, 그렇구나. 그때도 만났지.”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이 말하는 한주를 보여 우강희는 그때의 재강원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생각했다.
“네가 아들인지 모르는 사람 같았어.”
“아들이라고 알았어도 그 사람은 변함없이 그런 모습일 거야. 그런데 그 말을 믿어? 재강원 이사장이 내 친부라는 말을?”
“믿어.”
우강희는 유전자 검사 결과를 받아 보았다. 친자 확인 검사는 한주가 말한 대로 친자 관계로 나왔다.
결과에 따라 한주를 보는 시선이 변하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으로 재민석을 보았을까, 하고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다.
“엄마가 날 임신했다는 걸 말하자 그 사람이 곧장 병원으로 데려가 태아 형질 검사를 했대. 알파로 발현할 확률이 희박하다고 나오자 엄마를 버렸고. 외할머니에게 들은 얘기야. 엄마는 이런 얘기 전혀 하지 않아.”
남의 일을 얘기하듯이 태연했다.
“그때도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네. 재민석에게 위로 형이 있잖아. 엄마는 유부남인 줄 모르고 만났고. 유부남이면서 순진한 대학생이던 엄마를 유혹하다니, 진짜 개차반이지.”
담담한 말에는 아픔이나 슬픔, 일말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은 돈을 주고 정리하려 했다는데 엄마는 완전히 인연을 끊는 조건으로 거절했대.”
빛나는 광고 전광판 앞에 홀로 서 있는 한주에게서 강희는 눈을 떼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아버지라고 만나고 싶어서, 자식도 버린 사람인데 인정이라는 것을 받고 싶어 발버둥 치기도 했었지만 깨달았지. 그 사람은…… 유전자를 주었지만 타인이었어. 그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
한주는 버스가 오는 방향을 줄곧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데도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긋지긋할 만큼 아픔에 절여져서 무덤덤하기까지 했다.
한주의 그 강함이 눈부셨다. 박한주라는 사람을 만나고서야 우강희는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희망을 보고서야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강함은 한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해져서 이 사람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다.
“한국 호텔 자선 파티에서, 네가 날 구해 주었지.”
“어, 알고 있었어? 모른 줄 알았는데.”
“방을 같이 쓰기 전에 알았어.”
“아, 그래서 방을 같이 쓰겠다고 했구나.”
“아니.”
“응?”
그런 간단한 이유가 아니었다.
“네가 신경 쓰였어. 내 감정을 확실히 알기 전이었지만 그때도 널 원했지. 네가, 너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오직 저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강해서 몸이 흔들렸다. 외면했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건 한주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그때의 감정에 튀어나온 말이라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의 것이라 흘려 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아도 한주에게는 인생을 흔들 만한 만남이고 말이었다.
한주는 벌떡 일어났다.
“버스 왔다. 내일 봐.”
버스가 맨 뒤에 서 있어서 기다리면 앞으로 올 텐데도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 밖을 보자 강희가 멀어지고 있었다. 손을 흔들 여유도 없이 도망치듯이 반대쪽 좌석에 앉았다.
“우와.”
허리를 숙여 앞 좌석 윗부분에 이마를 댔다. 얼굴이 타듯이 뜨거웠다.
“바보 자식, 콩깍지가 씌어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거야.”
심장이 뻐근해 한주는 한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