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옛 인연
“흥미롭네요.”
옆에서 들리는 사지석 박사의 목소리에도 이성진은 유리 너머의 밀폐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에는 책상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한주는 헤드셋을 끼고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몸에 걸친 것 없이 얇은 면바지와 긴 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자기 방처럼 편해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을 당하는지 전혀 모르고.
“……정말 우강희가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습니까?”
“네, 이제 우강희 님이 100퍼센트로 발산할 겁니다.”
100퍼센트.
이성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비교군을 위해 페로몬이 통하는 다른 밀폐실에 알파, 베타를 대기시켰지만 그들은 20퍼센트 때부터 과민 반응을 일으켜 내보냈습니다.”
한주가 앉은 밀폐실 옆방이 모니터에 비쳤다. 사방이 하얀, 창조차 없는 방에 우강희가 서 있었다. 태블릿으로 자신이 현재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사지석 박사는 모니터 한쪽의 수치를 가리켰다.
“우리는 프라이머 알파를 P1, 2, 3, 4, 5의 등급으로 나눕니다. 일반적인 프라이머 알파를 P3이라고 여기고 5가 로열 직전, 1이 베타보다 나은 수치가 되죠. 현재 우강희 님의 20퍼센트 페로몬 발산 수치가 P3의 100퍼센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작 20퍼센트가.
“……발산 수치와 페로몬 영향력은 별개죠.”
“네, 역시 잘 아시는군요.”
- 박한주, 방 밖으로 나와.
스피커에서 우강희의 목소리가 나왔다.
“우강희 님이 시작했습니다.”
페로몬에 명령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환기구를 통해 옆 방으로 페로몬이 넘어가는 모습이 감지 화면에서 색깔로 표시되었다.
방으로 간 페로몬은 점점 공기 중에 퍼졌고 한주의 몸을 휘감았다.
“역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렀다. 사지석의 상체가 모니터에 가까워졌다.
한주는 여전히 게임을 하며 틈틈이 인터넷 검색을 하고 채팅을 했다. 헤드셋을 끼고 있어 우강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페로몬에 의한 반응이 있어야 하지만 일절 없었다.
“……페로몬 무감증이라도 이럴 수 없는데.”
“예, 일전에 페로몬 무감증의 알파에게 실험한 결과 과민 반응을 일으켜 쇼크가 왔습니다. 박한주 군처럼 반응이 아예 차단된 사례는 처음 봅니다.”
화면을 보는 사지석의 뺨이 흥분에 붉어졌다. 그때 다급하게 연구원이 뛰어 들어왔다.
“박사님!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반응했습니다! 분명 우강희 님이 들어간 곳도 밀폐실인데!”
“차단하고 격리해.”
사지석은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연결했다.
“우강희 님, 중단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버튼을 눌렀다.
“박한주 군, 채혈하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렸는지 화면 속의 한주가 헤드셋을 벗었다.
- 또 채혈이요? 벌써 세 번째예요. 간식이라도 먹이면서 뽑아 가세요. 아무리 검사를 위한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요.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평안했다. 사지석은 살살 달랬다.
“끝나면 식당 쿠폰 줄 테니까 한 번만 더 뽑을게요. 일반 병원에서 뽑는 정도로 많이 채혈하지도 않잖아요. 네?”
- 검사 다시는 받나 봐라.
“에이, 한주 군, 다른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네?”
안달 나서 음식 이름을 줄줄이 뱉는 사지석의 말은 이성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주는 변화가 없었다.
성진은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다. 겨울, 한국 호텔의 자선 파티에서 우강희는 45퍼센트를 내보냈다고 들었다.
소연회장이지만 200명이 넘는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장소에서 우강희, 단 한 명이 45퍼센트의 페로몬을 내보낸 것만으로 알파, 오메가는 물론이고 베타까지 이성을 잃을 정도였다.
페로몬의 발산력과 영향력은 별개이지만 반비례하기에 발산력이 높을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그런데 100퍼센트에서도 박한주는 태연했다.
이성진도 겪어 봤기에 우강희의 페로몬이 얼마나 막강한지 안다. 우강희의 명령에 방을 나오기 위해 발광해도 모자랄 텐데 박한주는.
* * *
- 박한주 군, 검사 끝났습니다.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한주는 고개를 들었다. 오후 3시가 넘었다.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어 주었다. 우강희는 두 시간 정도 걸렸다고 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배달해 먹고 쉬는 시간 없이 검사를 속행했다.
- 검사가 다 끝났으니 노트북은 놔두고 그대로 나오세요.
1차로 에어 샤워로 소취를 하고 2차로 욕실에서 물 샤워를 했다. 물에 소취제가 섞여 있어 피부가 살짝 붉어졌다.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고 대기실로 나오니 우강희와 이성진이 있었다.
“어, 이성진, 너도 왔어?”
“……우리 병원이야. 검사를 보러 왔어.”
“와 봤자 재미없을 텐데.”
“……차원구 집에도 가야 하고.”
“그렇지. 아, 나 좀 쉬자. 아우, 내 몸.”
한주는 대기실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몸에 영향이 있나 이성진은 긴장했다가 이어진 말에 한숨을 쉬었다.
“에구, 게임하는데 의자가 너무 불편했어. 엉덩이가 배겨.”
“주물러 줄게.”
“됐다, 우강희. 어디서 은근슬쩍.”
한주가 으르렁대며 우강희를 견제하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사지석이 돌아왔다. 한주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었다. 봉투를 확인하자마자 한주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며 싱글벙글했다.
“원래는 실험에 참여해 줘서 고맙다고 사례금이라도 줘야 하는데, 이건 정말 다시 없을 연구 자료네요. 자, 약속대로 식당 쿠폰, 레스토랑 식사권, 상품권과 쿠폰책!”
“감사합니다.”
사지석은 한주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 순간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고 한주는 재빠르게 손을 뺐다. 단 2초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손이 뿌리쳐져서 당황했지만 서지석은 불쾌하지 않은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다음에, 꼭 다음에도 잘 부탁해요, 박한주 군. 다음에는 채혈 조금만 할게요. 요만큼만.”
그 조금만을 나타내는 엄지와 검지 사이가 꽤 멀어 한주는 뒤로 물러났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페로몬 무감증이 나아지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한주가 궁금한 부분을 우강희가 대신 물었다. 태블릿도 확인하지 않고 사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이상 없습니다. 여기서 이상 없다는 말은 아무런 수치 변화도 없이, 몇 년 전에 검사했던 수치와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그럼 나아지는 것은 아니네요?”
한주는 결과에 조금 실망했다. 일상에 큰 영향도 증상도 없는 병이지만 좋아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다.
“박한주 군이 어떻게 우강희 님의 페로몬 향기를 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향기를 맡은 거 이외에는 다른 이상 증상은 없었다고 했었죠?”
“네.”
“그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르니 정기적인 검사를 하기로 하죠.”
“아뇨, 안 할게요.”
사심이 섞이며 말이 중간에 바뀌었다. 한주가 딱 잘라 거절하자 서지석의 얼굴에 일순 구름이 꼈다.
“제 페로몬에 대한 반응 결과는?”
“그것도 깔끔합니다. 우강희 님의 페로몬에 노출됨에 따른 호르몬 수치를 비교했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변화가 없지만 같은 방이라고 했으니 3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인 검사를 진행하면 좋습니다.”
“진짜요?”
“지금 당장은 괜찮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어떨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대화를 듣고 있던 이성진의 표정이 굳었다.
당장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여서 한주도 안심했다.
“그런데 우강희의 알파 형질이 도대체 뭐예요? 프라이머보다는 강하죠?”
“음, 그걸 ‘강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사지석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우강희 님의 형질은 제가 알려 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 * *
손을 씻고 화장실을 나가려는데 이성진이 한주와 얘기하고 있었다. 한주는 먼저 나갔고 이성진이 우강희를 돌아보았다.
“……먼저 로비에 내려가 있으라고 했어.”
“뭘 말하고 싶지?”
“……박한주를 기숙사에서 내보내. 우리 집 별장을 빌려주면 지낼 곳은 해결돼.”
“내보내지 않아.”
얌전하던 이성진이 우강희의 멱살을 잡았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손에 잡힌 천에서 빠득, 소리가 났다.
“박사님 말 못 들었어? 박한주가 네 것이라며! 그 말은 장난이야?”
“장난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 같이 지내겠다는 말이 나와? 장기적으로 박한주에게 어떤 영향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도 이대로 계속 같이 방을 쓰겠다고?”
우강희의 대답에 이성진은 더 화가 났다.
“박한주는 괜찮아.”
“장담하면 안 되지! 네가 원인이야! 우강희 네 페로몬 때문에 박한주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온 힘을 다해 움켜잡았지만 우강희가 툭, 가볍게 치자 손이 떨어졌다. 항상 나태한 이성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솔직히 말해. 걱정이야? 아니면.”
우강희의 기세가 달라졌다. 거대한 바위가 몸을 미는 느낌으로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나약한 인간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한 느낌에 이성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성진, 박한주를 원하나?”
우강희가 변했다.
항상 페로몬을 제어하며 조금의 발산도 허용하지 않고 억제하던 그가 자신의 힘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알파는 제 것을 넘보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우강희는 이성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경고했다.
“원하는 것을 똑바로 말해. 그래야 널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아무리 자신보다 약하다 해도 덤비면 최선을 다해 싸운다.
* * *
차 안은 조용했다.
조수석에 앉은 성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뒷좌석에 앉은 강희는 한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차가 멈추자마자 한주는 후다닥 내렸다. 오는 내내 두 사람의 기분을 살펴야 해서 피곤이 가중되었다.
“가자.”
눈치를 보며 서 있는데 우강희가 한주를 불렀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생일 파티라고 해서 차원구의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눈앞에 덩그러니 큰 건물만 있었다. 건물 외관에 영문 로고가 박혀 있었는데 생소했다.
이성진이 먼저 건물로 들어가서 따라가자 직원 여섯이 그들을 맞이하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생일 파티에 가신다고요. 드레스코드는 있으신가요?”
“……특별히 정해지지는 않았고 어른들이 많은 자리이지만 오늘은 캐주얼하게 입고 싶습니다.”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직원의 질문에 이성진은 익숙하게 답하며 한주를 보았다.
“……너는 사이즈를 재야지?”
“내가 알아서 챙겨.”
한주가 답하기 전에 우강희는 한주의 옷을 잡아 옆으로 끌어당겼다. 탁, 한주가 그 손을 쳐 냈다.
성진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아 직원에게 말했다.
“……당장 입고 가야 하니까 한주는 사이즈 맞는 것으로. 너무 갑갑하지 않은 핏이면 됩니다.”
“네.”
흘러가는 분위기가 이상해 한주는 강희에게 물었다.
“양복을 입어야 해?”
“어른들이 많이 오는 자리라 예의 차리는 정도면 돼.”
“여기 렌털도 돼?”
“렌털? 옷을 렌털해?”
“사야 해? 카드 안 가져왔는데.”
그러자 우강희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왜 옷을 사?”
“어?”
렌털도 아니고 사지도 않는다면 옷을 어떻게 입고 간다는 말일까? 고급 매장에서 무료 이벤트를 할 리도 없을 텐데.
더 물으려던 한주의 옆으로 직원이 다가왔다.
“수치를 재겠습니다.”
“제가 하죠.”
직원의 손에 들린 줄자를 가져간 강희는 한주의 사이즈를 재기 위해 한 발 다가왔다. 한주는 얼른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네가 왜? 직원이 해야지, 직원이.”
우강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다른 사람이 네 몸을 만지게 두라고?”
한 발 더 뒤로 물러난 한주는 이성진과 옆에 선 직원의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잊었어? 넌 나 만지지 못해. 계약.”
“알아.”
“아는데 네가 한다고? 싫어.”
“만지지 않아도 사이즈를 잴 수 있어. 사이즈를 재지 않으면 차원구의 생일 파티에 가지 못해.”
우강희는 포기하지 않고 다가왔다. 한주는 줄자를 가진 그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게 거리를 두었다. 직원에게 급히 말했다.
“무슨 억지 논리야. 95 입으니까 알아서 준비해 주세요. 이런 거 꼭 사이즈 재지 않아도 프로시니까 대략 아시잖아요. 그렇죠? 보기만 해도 스캔 쫙. 그렇죠?”
“아…….”
직원은 우강희의 눈치를 보았다.
많은 셀럽을 상대하기에 그들은 눈치가 빨랐다. 누구의 의견을 우선으로 따라야 하는지 빠르게 판단했다.
“저희 매장은 사이즈가 세분화되어 있어서 치수를 재야 몸에 맞는 옷을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친구분이 부끄러우신가 본데 안쪽 대기실로 가서 사이즈를 재시죠. 저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니…….”
직원에게 등이 떠밀려 한주는 룸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직원도 같이 들어가서 더는 거부하지 않았다. 직원은 태블릿에 적을 준비를 하며 대기했다.
줄자를 길게 잡은 강희는 한주를 룸 모서리로 몰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보니 등에 벽이 닿았다.
“꼭 네가 해야 해?”
우강희에게 맡겨야 하다니.
프로인 직원을 두고 왜 그가 나서는지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실랑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분도 일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싫다고만 할 거야?”
강희의 말을 들었는지 직원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한주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는 능숙하게 줄자로 한주의 어깨에서 손목까지, 허리둘레와 어깨, 힙과 허리, 그리고 다리 길이 등을 쟀다. 줄자를 잡은 손끝이 슬쩍 한주의 몸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숫자를 불렀다.
담백하게 사이즈를 잴 뿐인데 어쩐지 숨이 막히는 긴장감이 있었다.
팔 길이를 잰다며 어깨 끝에 손가락이 닿으면 이상하게 신경이 집중되었다. 우강희는 무릎을 굽혀 한주의 복숭아뼈에 줄자를 댔다.
“왜 굳이 피곤한 일을 자처하는 거야? 진짜 이해 안 돼.”
“다른 사람이 네 몸을 만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나아.”
“아니, 네 몸도 아니고 내 몸인데 왜 네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우강희의 손이 허벅지 다리 안쪽으로 들어왔다. 움찔, 놀라며 몸을 뒤로 물리려고 하자 어느새 줄자가 허벅지를 잡아 움직이지 못했다.
“가만히 있어. 허벅지 사이즈를 재야 해. 자세 똑바로 해.”
고개를 들어 보자 직원은 태블릿을 보며 사이즈를 불러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의식하나?’
자세를 똑바로 하고 한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강희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스치며 줄자로 허벅지를 조였다. 그의 얼굴이 한주의 배 앞에 있었다. 한주는 다른 곳을 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허벅지 사이즈를 잴 때 어느 쪽으로 수납을 하냐고 묻기도 하지, 아무래도 두드러지니까.”
“수납? 아, 지갑 넣는 주머니?”
“아니, 이거.”
담백한 말에 한주는 우강희를 보며 물었다.
“이거?”
우강희는 한주를 올려다보며 턱짓으로 그의 얼굴 앞에 있는 한주의 것을 가리켰다.
한주의 어깨가 크게 움직이며 귀까지 빨개졌다.
“바지의 어느 쪽으로 놓느냐에 따라 재단이 달라지지만 넌 필요 없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항의하고 싶었는데 직원이 가만히 있다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당연했는데 저만 유난스럽게 의식해 버렸다
우강희의 얼굴은 진지했고 장난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줄자의 처음 부분을 잡은 손이 한주의 바지 앞 버튼에 닿았다. 늘어뜨린 줄이 한주의 앞을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허리 똑바로 세워.”
스치는 느낌이 날 정도로 묵직한 줄자는 아닌데 예감이 좋지 않아 한주가 내려다보자 그가 엄하게 말했다.
그는 오른손의 엄지와 손날을 니은 자로 만들어 사이에 넣었다.
“가만히.”
손날이 들어왔지만 피부에 스치지는 않았다. 늘어진 줄자와 손날로 직각자를 만들어 겹쳐지는 곳의 수치를 확인했다. 줄자를 보던 눈이 잠시 한주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만지거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한주는 귀가 뜨거워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한주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고개 들어. 목둘레도 재야 해.”
“……목둘레까지?”
“고개.”
그의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사이즈를 적고 있던 직원은 강희의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맞춤복을 사 본 적이 없는 한주는 그의 말을 들었다. 고개를 들자 우강희와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한주의 목을 훑고 얼굴을 보았다.
“빨리 재.”
그의 손끝이 한주의 목을 스쳤다.
줄자를 목에 두르면서 조금 조이는 느낌에 불편했지만 한주는 살짝 인상만 찌푸리고 시선을 벽으로 돌렸다. 뒤에서 맞닿은 줄자의 숫자를 보기 위해 그가 고개를 숙이면서 한주의 얼굴에 숨이 스쳤다.
안겨지는 모양새였다.
숨을 멈추었다.
줄자를 본 후 우강희는 살짝 물러났다. 한주와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너, 장난치는 거지?”
“39cm.”
우강희는 한주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목둘레 사이즈까지 재고 뒤로 물러났다.
직원도 사이즈를 적고는 줄자를 받아 갔다. 직원의 뺨이 붉었다.
* * *
직원은 옷을 가져왔다. 몸에 딱 맞았다.
한주는 성진과 자기 옷을 보며 과연 캐주얼하지 않고 격식을 차린 옷이라고 했다면 어떤 슈트로 준비해 주었을지 궁금해졌다.
한주가 보기에는 싱글 투 버튼의 상의와 타이는 캐주얼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은 세 사람을 보며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입발림 말에 익숙한 직원들도 뺨을 붉히며 격하게 반응했다. 한주는 들어갈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매장을 빠져나왔다. 계산도 하지 않았다.
자꾸 매장을 돌아보는 한주의 모습에 성진이 입을 열었다.
“……선물로 사 줄게.”
“내 옷을? 이거 비쌀 텐데.”
“선물은 내가 해. 좋아하는 사람에게 옷 사 줄 돈은 있어.”
“우강희! 너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안 했어.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는 말은 안 했잖아.”
“주어 없다고 문맥을 못 읽겠냐? 경고야!”
“경고 누적이면 계약 파기인가?”
기뻐하는 모습에 한주는 이만 바득바득 갈았다. 점점 우강희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계약이라니?”
이성진까지 두 사람 간의 계약을 알아 버렸다.
* * *
차원구의 집은 주택가에 있었다.
집의 규모를 알려 주듯이 긴 담으로 이어진 주택가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이미 파티가 열리고 있는지 음악 소리가 대문 밖까지 들려왔고 담 옆의 직원 전용문으로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보안에 신경을 쓰는지 문 옆에 선 보안 직원이 오가는 직원들을 체크했다.
한주는 강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남의 집에 처음으로 초대받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작은 꽃다발을 준비했다. 강희나 성진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매번 보는 그들과 처음 만나는 한주는 입장이 달랐다.
엄마를 따라 가끔 친구 김지영의 집에서 여는 파티에 참석한 한주는 작게라도 주인에게 선물은 주는 것이 좋다고 배웠다.
그들이 들어가자 도착을 알렸는지 차원구가 현관으로 마중 나왔다.
“오, 박한주. 사람이 달라졌는데? 그 꽃은 내 선물? 꽃 선물 받기는 오래간만이다.”
“네 거 아니야.”
“그래? 왔으니 부모님께 먼저 인사해. 따라와.”
그는 한창 얘기 중인 어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고1이라지만 성인의 남자들과 비등한 체격이었다. 원구는 다정하게 얘기 중인 부부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고 두 부부의 시선이 한주를 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가족이구나, 알아볼 정도로 서로 닮은 사람들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이성진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도 계시네.”
한주는 걸음을 멈췄다.
“어머, 처음 보는 얼굴이네? 우리 원구가 학교 가더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구나.”
차원구의 어머니는 우아한 사람이었다.
한주의 체격이 확연히 달라서 한눈에 봐도 베타임을 알 텐데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주를 보자 한쪽 눈썹을 올렸다.
“친하게 지내 줘요.”
“저야말로 원구에게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이거, 어머님 선물입니다.”
한주는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핑크와 퍼플의 수국으로 구성된 탐스러운 꽃다발이었다. 작지만 신경을 쓴 마음이 느껴지는 선물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에게? 원구 선물이 아니라?”
“원구 생일에 가장 고생하신 분은 어머니니까요.”
“어머!”
그녀는 소녀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기쁘게 꽃다발을 받아 주었다.
어른을 능숙하게 대하는 사회성 모드의 한주는 꽃다발을 주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과하지 않으며 주목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차원구의 아버지에게 좋은 점수를 땄는지 그가 악수를 청했다.
아무리 아들의 친구라지만 사람을 가리는 차원구의 아버지가 먼저 악수를 청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인은 남편의 행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친구가 생겼구나, 원구야.”
“재밌는 놈이에요.”
“네 형은 라희를 데리러 갔으니까 조금 늦을 거야.”
“네.”
부모끼리 친해서 이성진을 잘 알고 우강희는 가끔 차원구와 어울렸기에 익숙했다. 차원구의 어머니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아들과 그 친구들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얘기하렴.”
“네, 그럼.”
“따라와, 황치운은 안에 있어.”
원구는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니 또 다른 응접실이 나왔는데 그곳에는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부터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부모와 같이 온 미성년들이 모인 장소였다.
파티는 애초에 어른들을 위한 자리여서 같이 온 자녀들은 별도의 공간에 모아 놓았다. 접점이 없어도 파티를 통해 아이들끼리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상황인지 저들끼리 대화를 하며 당구를 치고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우강희와 이성진이 들어오자 반갑게 인사하며 일제히 다가왔다.
“역시 차원구 생일이어야 너희 얼굴을 보는구나. 오랜만이다.”
“반갑다, 이성진. 우강희 너도.”
인사를 건네 오는데 성진은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했고 강희는 아예 그들을 무시하고 한주를 데리고 한쪽에 서 있는 황치운에게로 향했다.
그들도 우강희의 그런 태도가 익숙한 듯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직접 베타를 챙기는 모습에 호기심을 보였다.
“처음 보는데, 누구야? 어느 집?”
“베타네? 외국에서 살던 애인가?”
차갑게 대하며 말을 걸어도 무시하던 그가 부드럽게 표정이 풀어져 옆에 있는 베타에게만 살갑게 대했다. 평소 무뚝뚝하고 차가운 우강희만 보아 온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고 베타의 얘기를 듣기 위해 고개를 숙여 귀를 기울였다. 다정한 태도였다.
“야, 차원구.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현실이야?”
“누구인데 우강희가 저렇게 챙겨?”
집주인이자 파티의 주인공인 원구는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 줘야 했다.
“같은 반 친구.”
“재강원 고등학교 다녀? 아버지가 누군데?”
“친구라고? 우강희가 친구를 만들었어?”
그들은 믿지 않았다. 원구도 그들 마음에 공감했다. 저가 보기에도 우강희가 한주를 대하는 태도는 친구라는 범위를 넘었다. 그렇다고 애인이라고 밝힐 수는 없는 단계다.
한주의 부모를 묻는 말에 원구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강희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주를 벽 방향으로 세우고 그가 가려 주듯이 옆에 섰다. 주변의 다른 이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의 진한 독점욕을 보면서 원구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 * *
“박한주, 완전 여우였어. 엄마에게 꽃을 주다니. 공략 대상을 잘 아네.”
“처음 오는 집인데 빈손으로 올 수 없잖아.”
벽에 기대 있던 성진도 거들었다.
“……왜 꽃을 사나 했더니 꽃 주인이 어머니였어. 좋은 선택이야.”
“조그만 놈이 참 희한하단 말이야. 고1짜리 같지 않아.”
원구가 한주를 칭찬하려고 머리에 손을 올리자 성진이 재빠르게 손목을 잡았다.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강희는 작게 혀를 찼다.
“……만지지 마.”
“어라, 이거 무슨 상황이야? 우강희가 이러면 이해하겠는데, 우리 성진이, 왜 이래?”
말은 성진에게 하면서 한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주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성진이 다시 그 손을 탁 쳤다. 명백히 막고 있었다.
“뭐야? 왜 이래?”
“……박한주 만지지 마.”
“아니 왜?”
“……둘이 계약했다. 남이 박한주를 만지는 만큼 우강희도 만지도록.”
“이성진, 그걸 말하면.”
“……얘기해야 남들이 널 만질 때 막아 주지.”
푸핫! 차원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그럼 우리 우강희를 위해서 철벽 방어를 해 줘야겠네? 우강희, 이 형님만 믿어라. 절대 박한주에게 손끝도 못 대게 해 줄게.”
강희를 놀리는 원구를 보며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거지.”
“좋네. 아주 좋아.”
원구는 한술 더 떴다. 강희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딜을 걸었다.
“어때? 박한주의 만지고 싶은 부위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먼저 만져 줄게. 그럼 너도 만질 수 있잖아.”
“죽고 싶지?”
“왜, 너 좋으라고 제안하는 건데?”
강희가 노려보았지만 원구는 함빡 웃었다.
“음식 가져올게. 배고프다.”
한주는 그들에게서 떨어져 한쪽에 준비된 케이터링에 다가갔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핑거푸드들이 종류별로 있었다. 지켜보는 시선을 모른 척하며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원구의 부모 옆에 서 있던 부부가 떠올랐다.
이성진의 부모님.
세월이 흘렀지만 초등학교 때와는 외모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인은 한주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성원은 한주를 보자 눈이 커졌다.
‘이성진의 부모님이 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성진과 같은 반이니 언젠가 학교 행사를 참관하러 오면 멀리서 그들을 보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다.
‘몇 년 만이라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이성원은 여전히 사람이 좋아 보였고 한주가 기억하는 인상 그대로였다. 되돌아와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어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음식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이동하다 보니 테이블 끝까지 도착했다. 기둥에 기대고 쌍둥이 자매가 대화하고 있었다.
“서라희도 온다며? 무슨 낯짝으로 온대? 자기가 버린 차원구 생파에 오다니, 엿 먹으라는 거지?”
“이제는 원석 오빠 약혼녀잖아. 동생 생일인데 약혼자와 참석해 줘야지. 이미 끝난 사이이고.”
“아니, 사귄 사람은 차원구였는데 왜 저한테 멋대로 각인한 사람에게 가냐고. 진짜, 서라희 꼴도 보기 싫어.”
“야, 듣는다.”
의도하지 않게 엿들어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들이 한주에게 인사했다.
“안녕, 나 아비, 얘는 아리.”
“너도 재강원이라며?”
덜음 집게를 내려놓는데 접시에 부딪쳐 작은 소리가 났다. 한주는 집게를 제 위치에 놓았다.
미묘한 문장이었다.
한주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몸매를 과시하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베타인데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녀? 재강원은 알파 전문 아니야?”
“바보야. 재강원 고등학교에는 베타도 다닐 수 있어.”
“다닐 수 있는 거지, 베타 위주의 학교는 아니잖아.”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너, 부모님이 뭐 하시는 분이야? 부모가 누구길래 우강희가 싸고도냐?”
언제 다가왔는지 나이 많아 보이지만 이 공간에 있으니 미성년임이 분명한 금발의 남자가 한주의 옆에 서 있었다. 명백한 시비였다.
쌍둥이 중의 아비도 궁금했는지 거들었다.
“나, 얘 처음 봤어. 외국 살다 왔어? 어느 나라에 있었어?”
계속 반말을 하기에 같이 반말로 대답했다.
“줄곧 한국에서 살았어.”
“그래? 그러면 한 번쯤은 봤을 텐데 이상하다.”
쌍둥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모님이 최근에 성공한 신흥 부자야?”
남자의 말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남자는 집요했다. 어떻게든 대답을 들으려는지 한주의 떨떠름한 표정을 봤을 텐데 물러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한주의 주변으로 모이자 강희가 다가왔다.
“남의 부모를 묻기 전에 자기소개 먼저 하시죠.”
강희가 막아 주었지만 오히려 흥미를 돋웠는지 남자의 눈이 더 반짝였다.
“뭐야, 얘 편드는 거야? 네 취향이 원래 베타였어? 너 베타 싫어하잖아. 아니야?”
“페로몬 거두세요.”
경고에 남자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모였다. 말을 걸든 시비를 걸든 반응이 없던 우강희가 남자와 대치하자 다들 재미있어했다.
“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야?”
“어쩐지! 그동안 민용 오빠에게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쌍둥이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한주가 무시하면 될 일이었는데 우강희가 나서서 보호하자 그들이 더 흥미를 보였다.
남자는 우강희의 기세에 밀려 안색이 어두워졌다.
소란에 원구까지 끼어들었다. 웃고 있었지만 눈에 짜증이 가득했다.
“남의 파티에 왔으면 조용히 즐기다 가세요.”
“우강희 같은 알파가 이렇게 싸고도는데 어떤 집안의 베타인지 궁금하잖아. 나도 좀 친하게 지내고, 응?”
“요즘 집 어렵다더니, 그 정도예요?”
남자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뭐? 이 자식이, 너 우리 집 무시해? ‘형, 형’거리며 놀아 달라고 쫓아다니던 놈이!”
“그건 여섯 살 때 얘기죠.”
“제 애인도 간수 못 해서 형에게 뺏긴 놈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음악 소리를 제외하고 소음이 사라졌다.
차원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남자도 말실수를 뒤늦게 깨닫고 얼버무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작년에 약 처먹고 무면허로 운전하다가 지나가는 사람 둘이나 골로 보내 버릴 뻔해서 겨우 무마했죠? 이번 중간고사 시험지 유출해서 겨우 반 2등 했는데 아버님은 아십니까? 아, 형이 아버지 애인과 논 거까지는 모르겠네요.”
“너! 차원구, 헉!”
코와 입을 팔로 가리며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주변 사람들이 신음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페로몬 좀 줄여!”
대부분이 알파인데도 어떤 이들은 차원구의 페로몬을 버거워했다.
“건드릴 거면, 죽기 살기로 덤벼!”
항상 웃던 차원구가 화내기 시작하자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우강희가 조용히 저지했다.
“차원구, 그만해.”
“그만하라니, 내가 뭘 했는데! 죽도록 패지도 않고 제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남의 뺨을 때리면 자신도 맞을 각오는 해야지!”
“「멈춰.」”
이성진은 갑작스러운 공기의 변화에 팔짱을 낀 팔을 움켜잡았다. 마치 장소가 바뀐 듯이 공기가 전부 바뀌었다.
차원구의 성난 페로몬에 대항하며 여기저기서 내보낸 적대적인 페로몬이 공간에 차오르고 있었다. 알파나 오메가라면 모를 수 없는 페로몬이 아예 장소가 바뀐 것처럼 전부 사라졌다.
한순간의 변화에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갑자기 페로몬이 사라졌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주위를 보았다.
차원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 상황의 원인인 우강희를 노려보았다.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며 목에 핏대가 섰다. 한주는 상황이 어떤지 몰랐지만 우강희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꽃집 해요.”
불쑥 내뱉은 말을 쌍둥이의 아리가 받아 주었다. 안색은 좋지 않지만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노력했다.
“꽃집? 아, 화훼 쪽으로 사업해?”
꽃집이라고 말했는데도 규모를 키운다. 한주는 작게 웃었다.
“작은 꽃집이야. 직원 하나만 두고 운영하는 자영업자.”
“어, 자영업자? 그래?”
이번엔 아리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부모님이 사업을 한다면 몇백억 단위가 기본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티스트나 프리랜서로 개인이 중소기업 수준의 연봉을 버는 사람들이었다.
“직원이면 비서?”
아무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한주는 정확히 설명했다.
“시급 만 원 받는 직원이야. 아직 대학생이라 오후에만 어머니 일을 돕는데 꽃집 월 매출은 모르고. 꽃집 주소도 불러 줄까?”
가만히 있던 강희가 냉큼 대답했다.
“문자로 보내.”
“너 말고.”
단칼에 잘랐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와 방심할 수 없었다.
“뭘 그렇게 물고 늘어져?”
치운이 가볍게 어깨를 치며 아리를 밀어냈다. 제 자매의 어깨를 감싸며 아비가 짜증 냈다.
“궁금해서 물어본 게 왜? 여기 있는 애들 다 아는 얼굴인데 갑자기 처음 보는 베타를 우강희가 데려오니까 궁금하잖아.”
“그만해. 너네 중학교 올라갔지? 학교 다닐 만해?”
“다 애들이라 재미없어.”
“뭐? 얘네가 중학생이야?”
한주가 당황하자 아비, 아리가 웃었다. 아무리 여자들의 성장이 더 빠르다지만 너무 컸다.
“이거 가져갈까?”
우강희는 한주가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 먼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는 자기 접시를 들고 있지 않았다.
“너는 안 먹어?”
“별로.”
“그렇게 먹어서 그 체구가 유지되나.”
강희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한주의 모습은 친구를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핑거푸드가 대부분이라 양이 적었다. 강희는 한주의 접시 옆에 스푼을 놓았고 한주도 그가 챙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모임이나 파티에서의 우강희는 항상 존재감을 감추려는 듯이 구석에 조용히 있었다. 그에게 흥미를 보여 다가가려는 알파나 오메가는 많았지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차원구나 이성진, 황치운을 제외하고는 그의 옆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런 알파가 한 사람을 챙겨 주었다. 오메가라면 이해되지만 그 상대는 베타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한주를 주시했다.
* * *
바삭한 크런치가 부서지는 카망베르 치즈케이크를 입 안 가득 씹는 한주의 옆에서 강희는 그들을 보는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원래 이곳이 그래. 부모가 누구인가에 따라 많이 좌우되지.”
“괜찮아. 기분 상하지 않았어.”
따끔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무표정하게 옆에 앉아 있는 우강희는 어딘지 시무룩해 보였다.
“초등학생들도 어디 사는지, 집 평수 물어보며 친구 사귀는 시대잖아.”
“괜히 널 데려왔어.”
“됐어. 먹을래?”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가져왔는데 만두가 아니라 디저트였다. 이미 치즈케이크로 입 안이 달고 텁텁해서 먹고 싶지 않아 내려놓았다. 안 먹을 거 알지만 물어보았다.
그런데 강희는 디저트에 시선을 주더니 손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그냥 한 말인데.”
“음료 가져오지. 뭐 마실래?”
“……주스 종류면 돼. 너무 달지 않으면 좋고.”
“그래.”
일어서면서 그의 손이 한주가 앉은 의자 등받이를 스쳤다. 음료와 몇 가지 음식을 더 챙기다가 한주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쳤다.
분명 슈트만 갈아입고 왁스를 약간 발라 거칠게 머리카락을 넘긴 것이 다였는데 공들여 스타일링한 모델 못지않았다. 한주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손에 남은 왁스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을 옆에서 보았는데.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관심 없는 척하며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와, 우강희. 아주 잘 보이려고 폼이란 폼은 다 잡네.”
맞은편에 앉은 원구가 불퉁하게 말했다. 시선은 한주를 향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은 차가웠다.
“너무 마음 주지 마. 너만 좋아해 주는 모습에 마음이 없어도 흔들리겠지만 저래 봤자 각인 한 방이면 순식간에 돌변해.”
방송 매체를 통해 종종 로맨틱한 소재에 이용되는 ‘각인’은 알파와 오메가에게 발생하는 종속 현상이었다. 각인하면 대상의 유혹, 성페로몬에만 반응하게 된다.
60년을 같이 산 사이좋은 부부에게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고 애인 중 한 명만 각인을 하기도 하며 처음 본 사이에 나타나기도 했다. 정확한 이유는 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했다.
“각인?”
“그래, 각인.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발생하기도 해, 짜증 나게.”
각인이 로맨틱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대부분이 사랑과 연관이 있어서였다. 90퍼센트의 알파 오메가는 평생 각인이 발생하지 않기에 ‘운명적 만남’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치 않게 각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원하는 상대에게 각인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고 즐길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돌발 사고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감각이 열려서, 빌어먹게도 느껴 본 적 없는 만족감에 행복해지지. 그래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돼.”
마치 느껴 본 사람처럼 원구는 쓰게 웃었다.
“너는 페로몬이 없는 베타이니 우강희가 너에게 각인할 확률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널 바라보며 좋아한다고 말하던 우강희가 다른 사람에게 각인하면 널 타인 보듯이 하게 될 거야. 애꿎은 너만 상처받고 바보가 되겠지.”
쌍둥이 자매가 얘기하던 차원구의 얘기가 떠올랐다. 사귀던 사람에게 원구의 형이 각인을 해 버렸다는.
그 사람도 각인했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일방적인 각인일 텐데 원구를 버리고 형을 택한 것이다.
“그러니 우강희의 감정이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주지 마. 너만 다쳐.”
한주는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우강희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 짓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한주 앞에 접시가 놓였다.
“무슨 얘기 했어?”
“네 욕 했지.”
그는 가볍게 원구의 말을 무시했다.
“식사도 가능한데 스테이크 달라고 할까?”
“어, 돼?”
“그 정도는 준비했겠지.”
그가 한 손을 어깨 근처로 들자 있는지도 몰랐던 슈트를 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스테이크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드라이 에이징한 티본 스테이크와 부드러운 서로인이 있습니다.”
“둘 다 주세요. 소스는 노 알코올로 약간의 와인도 안 됩니다. 알코올에 약합니다.”
“네, 셰프에게 전하겠습니다.”
직원이 멀어졌다.
“하나만 노 알코올이면 돼. 너도 먹어야지.”
“맛보고 맛있는 것으로 먹어.”
“뭐든 잘 먹으니 상관없는데…….”
라고 말했지만 두 접시 다 한주의 앞에 놓였다.
우강희는 옆으로 가까이 의자를 옮겨 스테이크를 잘라 주고는 두 접시를 다 한주 쪽으로 밀어 주었다.
우물우물 입 안에 가득 찬 고기와 육즙이 마음에 들었다. 맛집이었다. 가끔 엄마와 기분 내려고 갔던 스테이크집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이었다.
“더 먹어.”
“야, 나 그렇게 돼지는 아니야. 너도 먹어.”
쓰지 않은 포크로 고기를 집어 우강희에게 주자 그가 고개를 숙여 고기만 쏙 빼 먹었다.
“맛있네.”
입에 넣자마자 씹지도 않았으면서 맛있다고 말한다.
테이블에 양팔을 포개어서 바라보는 강희의 눈이 곱게 접혔다.
“더 줘?”
“아.”
결코 자기가 포크를 들고 먹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한주는 제일 큰 조각을 찍어 강희 쪽으로 포크를 놓았다.
그는 제 손으로 포크를 들지 않았다. 한주가 입에 넣어 주길 기다린다.
“네가 먹어.”
“그럼 안 먹어.”
“애냐?”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정도 하지 않는다. 얄밉지만 식사량이 많지 않은 그를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스테이크를 넣어 주었다.
원구는 비뚜름하게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 * *
거의 다 먹어 갈 때 직원이 원구에게 다가왔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치운이 주변에 알렸다.
“케이크 자른다고 모이래!”
원구의 얼굴은 붉어졌다.
“오, 올해도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거냐?”
“사랑하는 차원구의…….”
“그만해!”
주위에서 놀렸다. 매해 있는 일인지 그들은 재밌어했다. 평소 능글거리던 원구가 얼굴을 붉히며 파티장으로 나갔다.
3단 케이크는 붉은 장미와 핑크색 장미로 장식되었고 원구의 취향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케이크의 옆에 원구의 부모와 젊은 연인이 서 있었다. 어머니는 활짝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껴안아 축하했고 원구의 형과 그 연인이 축하의 인사말을 건넸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뺨에 키스했다. 성인과 맞먹는 외모지만 그들에게는 이제 고1이 된 아들에 불과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며 유연하게 능글능글 맞받아치던 사람이 뺨이 떨리도록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차원구가 이래서 생일을 싫어해.”
억지 미소를 짓는 얼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지 황치운이 피식피식 웃었다. 언제나 시큰둥하고 뚱한 표정으로 세상에 불만이 많았는데 오늘은 신나 보였다.
몇 개의 간접 등만 남기고 불이 꺼졌다. 유명한 음악의 전주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웃으며 행복한 가족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차원구는 애써 웃던 얼굴을 더 참지 못하고 케이크 뒤로 숨었다가 어머니에게 잡혀 나왔다. 부끄러워하는 얼굴이 더한 볼거리였다.
촛불을 끄자 여기저기서 생일 축하한다는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새빨개진 얼굴로 원구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년에도 원구의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유쾌한 경험이었다.
시선을 돌리다가 한주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성진의 아버지, 이성원이 한주를 보고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다정했다.
옆에 서 있던 이성진은 한주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이성원이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좀 더 활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 * *
선물이 오가며 본격적인 어른들만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먼저 가겠다고 했지만 바래다주겠다고 강희는 한주를 잡았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나오겠다며 같이 가겠냐고 묻는 강희를 안으로 보내고 정원에서 기다렸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이성원이 다가왔다.
“한주, 맞지?”
“성원 아저씨.”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지막으로 대화를 했으니 거의 6년 만이었다. 이름이 불리자 크게 기뻐하며 성큼 다가와 한주의 양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반가워했다.
“역시 맞는구나! 그 꼬맹이가 이렇게 크다니! 좀 안아 봐도 될까?”
“싫어요, 저도 이제 다 커서요.”
“그래, 안기에는 다 컸지.”
거절했는데도 이성원은 와락 한주를 껴안았다. 많이 자랐는데도 그의 품은 여전히 넓었다.
한주의 정수리를 쓰다듬어 머리카락을 헝클고는 놔주었다.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어 고맙기도 했지만 반가워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어릴 때 모습을 떠올리며 한주를 보던 이성원은 흐뭇하게 웃었다.
“잘 자랐구나. 우리 성진이와 같은 반이라고? 네가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가 내 아들 친구가 되어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지네. 예주 씨는 잘 지내고?”
“엄마는 잘 지네요.”
“그래, 진짜 신기하다. 네가 우리 아들과 친구라니, 사람이 이렇게도 다시 만나지는구나.”
이성원은 한때의 좋은 추억으로 한주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럴지 몰랐지만 한주는 아니었다.
엄마나 남 앞에서 잘 울지도 않는 한주는 그날, 이성원의 앞에서 울며 부탁했다. 한주와 박예주에게 친절한 사람이었고 자상한 어른인 그를 좋아했기에 더욱 가슴 아파서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는 당황한 얼굴로 한주를 보았었다.
당황할 만도 했다.
전날까지 아저씨, 아저씨 부르면서 친하게 따르던 아이가 울며 황당한 부탁을 했으니까.
‘만나지 마세요. 제발…… 엄마를 만나지 말아 주세요.’
울며 부탁을 했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이라면 좀 더 다른 유연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필사적이었다. 이성원을 만나지 않는 것이 두 사람, 어머니와 이성원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고, 이거 명함이야. 나중에 연락해. 같이 식사하자. 우리 둘이서만.”
그는 한주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성원이 내민 명함을 받았다. 이제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 피할 필요 없었다.
건물을 등지고 있어 모르겠지만 그의 부인이 남편을 찾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
“사모님이 찾는데 가 보세요. 연락드릴게요. 절 기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성원은 뒤를 돌아 부인을 보았다. 자신이 여기 있다고 부인을 부르지 않았다.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그러면 꼭 연락해, 한주야.”
한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멀어졌다.
알파이지만 성격이 좋았고 다정했으며 어머니 박예주를 잘 챙겨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거부하며 떠나보내야 했다. 이성원을 망칠 수 없었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크다 해도 한주는 두 사람이 불륜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았다.
너무 좋은 사람이고 다정하고, 새아버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가족을 불행하게 하면서 얻고 싶지는 않았다.
바스락, 마른 잎을 밟는 인기척에 한주는 고개를 들었다. 우강희는 이성원이 부인을 데리고 들어간 현관을 보고 있었다.
“인사는 다 했어? 이제 가면 되지?”
“이성진은 부모님과 가겠대.”
“그래.”
의도적으로 이성진을 거론한 것인지, 아니면 괜한 한주가 의식해서인지 묻지 않았다. 모른 척 몸을 돌렸다.
“저 사람, 만날 건가?”
우강희는 조금 상냥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초등학교 때 담당의였던 사람이지? 이성진의 아버지.”
평정심이 흔들렸다.
완전히 정을 떼 버린 친아버지 재강원과는 다른 의미의 사람이었다. 한주에게 아버지라는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이고 처음으로 가슴을 때리는 수치를, 그리고 너무 좋아해서 놔주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자기 얼굴이 굳어진 것이 느껴졌지만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너 나 조사하냐?”
“한국 병원에서 검사할 때 네 진료 기록을 보았어. 예전 담당의에 이성원이란 이름이 있었지. 이성진의 아버지, 이성원이 페로몬 전문의로 유명하니 네 페로몬 무감증을 진찰할 만하고.”
“대단하네. 그걸 보고 그렇게 맞추다니.”
비밀로 할 일은 아니지만 아픈 기억이라 예민하게 반응해 버렸다.
한숨을 쉬며 한주는 바닥을 발로 찼다.
“초등학교 때 이후 오랜만에 만났어. 안 만날 이유가 없잖아. 나한테 아들 대하듯이 잘해 준 분이시고.”
“짜증 나.”
우강희의 입에서는 처음으로 욕을 듣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 그는 초조하게 발을 차며 열일곱 살의 고등학생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제길.”
성질이 덜 풀린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한주에게 다가왔다.
“안았지? 이번에는 봐주지 않고 계약대로 그 사람이 한 것처럼 널 안겠어.”
“어, 그, 그래.”
이성원이 껴안을 때 각오해서 쉽게 대답이 나왔다. 대답을 듣고 강희는 볼이 실룩일 정도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한 대 때릴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긴장했는데 와락, 어깨에 팔이 둘러지며 그의 품에 안겼다.
“화가 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만 이렇게 안달 내며 다른 사람이 널 만지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는 상황이 다 짜증 나. 넌 나와의 계약 따위 쉽게 잊어버리며 몸을 허락하는데.”
“뭐? 야, 아니야. 난.”
우강희는 이성원이 한 것처럼 한주의 정수리를 헝클며 떨어졌다.
“더 짜증 나는 일은.”
거칠게 숨을 뱉으며 우천희에게 맞고 와도 무표정하던 그가 이번에는 꽤 아팠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내가 먼저 그만하자고 말할 수 없다는 거야. 널 놓칠 수 없으니까.”
불쑥 우강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풍겨 오는 그의 페로몬 냄새에 숨을 멈추었다.
폐를 침투하며 들어오는 느낌이 낯설어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해 버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박한주, 네 첫 키스 상대는 나야. 너도 나처럼, 날 보며 심장이 떨리게 만들어 주겠어.”
그리 말하지만 강희는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손을 잡지 않고 까딱였다.
“가자. 큰길까지만 데려다줄게. 오늘은 좀 걸으며 머리를 식혀야겠어.”
* * *
- 한주야! 나 일주일 뒤 월요일에는 진짜 학교 가!
막 변성기를 겪은 저음의 목소리가 발랄한 김지영처럼 말하니 어색했다. 한주는 잠시 핸드폰 화면을 보며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몇 번 통화했지만 이리될 걸 알면서도 낯설었다.
-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나 울어 버릴 거야. 나 보고 그런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절교해 버릴 거야.
“알파 됐다고 연락 딱 끊은 사람이 그깟 한 마디에 절교 소리를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냐?”
- 이번에도 네가 져 줘야지.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 받아 주었어.”
- 그래도 나 좋지?
전혀 다른 사람이고 성격도 다른데 이상하게 우강희를 떠올렸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상대가 받아 줄 것을 아는 믿음, 사랑받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김지영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게 만들겠다고 선포하던 우강희를 생각했다.
“……응, 좋아.”
- 헤헤, 나도.
이렇게 가볍게 내뱉고 받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파트 단지 산책로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변이 너무 밝아 별은 보이지 않고 깜깜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하늘에 별이 있음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 한주야, 무슨 일 있어?
“응? 왜?”
- 아니, 그냥 오늘 좀 목소리가 들떠 보여서.
오히려 생각이 많았는데 김지영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내가?”
- 응.
“아냐, 그런 일 없어. 그보다 이번에 용진이 영상 봤어?”
말을 돌리며 한주는 가볍게 아파트로 들어갔다.
* * *
이성원에게 문자를 남기자 곧장 약속을 잡았다.
한주는 엄마가 사 놓은 새 옷을 꺼내 입고 호텔로 향했다.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지만 한주가 맡은 역할이 커서 인원이 보충될 때까지 일하기로 했다.
이성원은 한주가 한국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한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입점한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했다. 저녁부터 일이 시작하기 때문에 조금 이른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약속 시각에 맞춰 갔는데 이미 이성원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늦었죠.”
“내가 일찍 도착한 거야. 늦지 않았어.”
아직 이른 시간이라 식사는 저녁 타임부터 가능하다는 말에 차를 마시다가 식사를 하기로 했다.
“배고프면 디저트라도 시킬까? 스콘도 있을 텐데.”
“참을 수 있어요. 맛있는 거 먹어야죠.”
“그래, 그럼 녹차와 자몽 에이드, 그리고 블루베리 무스 케이크도 하나. 아, 알코올 분해 효소 결핍증이 있어서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무스 케이크 괜찮은지 확인해 주시고요.”
“예. 파티시에에게 확인하겠습니다.”
직원은 이성원의 주문을 듣고 물러났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초등학생 때 이성원을 만났던 초반에 알레르기 검사와 더불어 잡다하게 검사를 했었는데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 일이니까.”
“일전에도 에너지바 먹고 취해서 학교에서 고생했어요.”
한주의 병명은 알지만 상태를 본 적이 없는 이성원은 재밌어했다.
“에너지바에 알코올이 들어가나?”
“건포도요. 에너지바에 들어간 건포도에 럼주를 약하게 입혀 잡내를 없앴는데 그거에 취한 거래요.”
“뭐? 진짜?”
“우리 반에 그 에너지바를 만든 회사의 아들이 있어서 연구실에 확인했는데 그 이유밖에 없었어요.”
하하, 이성원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주는 부루퉁해져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마침 서버가 차와 자몽 에이드를 가져왔다. 쿠키 네 조각이 같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확인해 보니 무스 케이크에 소량이 들어 있답니다. 다른 디저트를 주문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쿠키 고맙습니다.”
“우리 한주가 그 정도로 약했나?”
“저도 몰랐어요. 집에서는 엄마가 신경 써 주고 저도 밖에서 조심했는데. 그 회사에서만 유독 건포도 처리를 럼주로 해 버려서, 어휴.”
귀가 뜨거워졌다. 한주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이성원은 ‘우리’라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익숙해서 의식도 없이 쓴 말이겠지만 한주는 얼굴에 열이 몰렸다.
“우유와 같이 에너지바 세 개 먹었을 때는 문제 없었어요. 우유와 먹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다음 날 술이 술을 부른다고…….”
이어지는 말에 이성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음소리가 커졌다. 필름까지 끊겨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서는 배를 잡고 몸을 떨었다.
절대 고용진이나 김지영에게는 말 못 할 일이지만 아이스 브레이킹에는 딱 좋았다. 게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교 얘기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성원은 대학을 다니기 위해 국내에 들어온 케이스여서 한국의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이성진은 학교의 세세한 일을 말해 줄 정도로 살가운 아들은 아니었다.
알파들을 위한 학교인 재강원 고등학교의 시스템이나 학업 방식이 지루할 수 있지만 이성원은 흥미를 보이며 들어 주었다.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주말에 알바 할 정도로 학비가 부족해? 예주 씨 혼자 벌면 힘들긴 하겠지만.”
메인 디시로 나온 스테이크를 먹고 있을 때 이성원이 물었다.
“가고 싶었던 학교라 중학교 때부터 모아 온 돈으로 해결했어요. 알바는 작년부터 한 건데 그만하겠다고 말해 두었고요.”
이성원은 한주를 지그시 보다가 제안했다.
“다른 알바를 소개해 줄까?”
“다른 알바요?”
“그래. 좀 더 몸 편하고 시급도 좋은.”
“여기도 시급 좋아요. 꽤 높은데. 더 좋은 알바가 있을까요?”
“페로몬 무감증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라 인터뷰며 자료 조사가 필요해. 네 경우는 베타로서 희귀 케이스고 병에 대해 너도 자세히 알아 두면 좋으니까 도와주지 않을래?”
이성원은 진심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주말에 호텔에서 알바 하는 시간을 나에게 주는 거야. 너무 전문적인 건 밑의 인턴을 시킬 거니 너는 심부름을 하거나 검사에 참여해 주면 돼. 시간을 내주는 만큼 정당하게 알바비도 계산해 줄 거고 검사에 참여하면 임상 참여라 그만큼 금액도 높아지고.”
그러면서 현재 호텔에서 하는 알바 시급의 다섯 배를 불렀다.
“아, 물론 거절해도 돼. 연구 도와 달라고 널 만난 건 아니니까.”
잠시 당황했던 한주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네. 거절할게요. 학교에 집중하고 싶어서 호텔 알바를 그만두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알바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겠다. 마음 바뀌면 말해.”
“네.”
조금 심장이 따끔했다.
잠시지만 이성원의 실망한 표정을 봤다. 옛 추억에 반가워 시간을 내어 고등학생인 자신과 식사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속내가 있을 수 있다.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니 어른의 세상을 이해했지만 조금은 속이 쓰렸다.
이성진의 얘기를 꺼내려는데 레스토랑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문을 등지고 있었지만 한주는 사람들이 일제히 문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성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힘을 가진 물리력이었다.
발소리는 한주를 향해 다가왔다. 돌아보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먼저 상대가 한주의 옆에 앉았다.
우강희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거만한 자세로 이성원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아, 우강희.”
“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지나가다 보여서 들어왔지. 합석해도 됩니까?”
“생일 파티에 같이 온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두 사람 사이가 좋구나.”
이성원은 감탄했다.
사지석 박사의 요청으로 한주의 자료를 보내 주었을 때 두 사람에 대해 들었지만, 단순히 우강희와 박한주의 페로몬 반응 검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가까워 보였다.
“기숙사 룸메이트예요. 같은 반이고요.”
우강희의 탓하는 듯한 눈빛에 한주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은 가족과 보내거나 친구 만난다며.”
전날 강희가 주말에 서울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 * *
금요일. 서울로 가기 전에 기숙사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간단히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이성원에게서 정확한 약속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받아서 답장하는데 우강희가 자기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주말에 뭐 해? 서울에서 만날까?”
“뭐?”
한주에게 고백했으니 밖에서 만나자는 제안은 이상하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 어때? 호텔에서 알바 하니까 그 전에 만나서 놀다가 식사하고 넌 알바 가면 되잖아.”
“아.”
딱 이성원과 약속한 시각이었다.
망설이는 한주에게 강희는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약속 있어?”
“응, 주말은 엄마나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는 편이라서. 주중에는 못 만나니까.”
뒤에 덧붙인 말은 변명 같았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깔끔하게 단념하는 모습이 이상했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에 한주도 인사하고 서울로 왔다.
* * *
그렇게 대화는 끝났는데 우강희는 갑자기 약속 장소에 나타나 한주를 탓했다.
“주말은 가족과 보내거나 친구 만난다며.”
날 버리고 이 남자를 만나고 있냐고 추궁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약속이 있을 수도 있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해?”
우강희의 얼굴이 목덜미로 다가왔다. 나직하게 속삭이지만 으르렁, 짐승의 목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 할 필요는 없는데 날 차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내가 어떤 마음일지는 생각해 봤어야지.”
그는 입술을 꾹 깨물며 한주에게서 멀어졌다. 원망의 눈빛이었다.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물어뜯을 짐승이면서 어린 새끼처럼 한주를 보았다.
‘내가 얘한테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
“내 사생활이야. 널 생각하느라 만나야 할 사람을 거절할 수 없어.”
속닥거려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텐데 이성원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흐뭇하게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한주야, 좋은 친구를 두었구나.”
“그다지 좋은 친구는 아니에요.”
“우강희가 이렇게 걱정하다니, 둘이 많이 친하구나.”
그의 칭찬에 한주는 멋쩍어 시선을 내렸다. 우강희와 이성원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성원에게서 나오는 희미한 페로몬을 읽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어?”
“아. 아저씨가 알바를 제안해 주셨어.”
얼버무리며 간단히 얘기를 끝내려고 했더니 이성원이 덧붙였다.
“호텔에서 늦게까지 알바 한다고 해서 연구 보조를 하지 않겠냐고 말했지. 더 높은 시급으로.”
“연구 보조는 인턴이나 학부생도 충분할 텐데요.”
“아, 한주와 관련이 있어서. 알아 두면 좋은 내용이기도 하고. 페로몬 무감증 관련 연구야. 일전에 사지석 박사에게 둘이 검사받았다는 얘기를 들어서 관심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
“그래서 보조도 시키고 겸사겸사 임상 시험도 참가하고요? 어린 학생이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해 부려 먹으려는 겁니까?”
“야, 우강희! 아저씨는 그 부분까지 설명해 주셨어. 난 할 생각 없어서 거절했고.”
이성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이 짧았구나. 마침 널 만나 생각나서 제안한 거야, 한주야. 깊게 생각하지 마.”
“네, 알아요.”
우강희는 이성원을 노려보았다. 한주는 그의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에게 그러지 마.”
엄히 말하는 목소리에 우강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나 뾰족하게 서 있던 기세는 많이 누그러들었다.
이성원은 나직하게 웃었다.
“정말 죄송해요. 이 녀석이 갑자기 끼어들어서.”
“아니, 재미있었어. 한주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었고. 재강원 고등학교 다닌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잘 지내니 다행이다.”
진짜 아들에게 말하는 듯한 이성원의 모습에 한주는 가슴이 조금 찡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애틋하고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지나간 일이었다.
* * *
이성원을 로비에서 배웅하고 한주는 우강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남들은 무표정하다고 말하겠지만 같은 방을 쓰며 지내 왔다고 표정이 보였다.
“너 어떻게 알고 왔어? 설마 내 핸드폰 복제했냐? 도청 앱 깔았어?”
우연히 지나다가 한주를 보아 레스토랑에 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시간, 그 절묘한 타이밍에 그렇게 나타날 수 없다.
강희는 감추지 않았다.
“무슨 아저씨가 그렇게 많은지, 혹시 연상 취향이야? 나이는 어쩔 수 없지만 몇 년 뒤면 나도 충분히 네 취향에 부합할 수 있어.”
“야!”
“졸업하자마자 돈도 벌고, 지금도 일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지만 네가 만나는 아저씨들을 보니 웬만큼으로는 부족하겠다.”
“야, 우강희! 무슨 돈 보고 사람 만나는 줄 알아? 왜 그리 삐뚤어졌어?”
“나와는 약속도 잡지 않으면서 그 ‘아저씨’들 약속을 우선시하니까!”
큰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보았다. 그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이 한주의 입을 꾹 다물게 했다.
“네 어머니였으면 더 뜯어말렸겠지. 그래서 너도 몰래 만나잖아, 안 그래?”
“너 진짜…….”
2학년이 괴롭히고 반에서 겉돌며 지낼 때는 아무렇지 않던 한주가 조금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우강희는 지켜보았다.
“진짜 짜증 나게 한다, 너.”
“우강희, 널 여기서 보네.”
우천희가 한수원과 호텔 로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반갑게 동생을 부르지만 그는 한주를 주시했다.
“박한주도 있네.”
“안녕하세요.”
학교 선배이니 한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학생회 임원 신입 환영회 이후 처음 만난다.
“무슨 용건입니까?”
우강희가 한주의 팔을 잡아 등 뒤로 보냈다. 보호하기 위해 감추는 행동을 우천희는 놓치지 않았다.
소문을 들었다. 특히 우강희에 대한 소문은 한수원이 빼놓지 않고 알려 주었다.
우강희가 베타를 룸메이트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등교 때 잠든 베타를 식당까지 안고 간다든가, 옆에서 식사를 챙겨 주며 보살핀다는 소문이었다.
세상일이든 가족 일에서든 피붙이인 친엄마에 대해서도 무심하고 초연한 태도를 보이던 우강희가 베타 한주에게 관심을 가졌다.
약점을 내보이며 서슴없이 행동했다.
‘멍청한 놈.’
부모까지 동원하며 학생회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알파들이 수두룩했다. 오늘 한수원과 호텔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OB들을 초대했던 신입 환영회가 우강희와 박한주 때문에 분위기를 망쳐 중단되었고 그로 인해 학생회 임원 자리에 공석이 생겼다. OB들의 투표로 뽑으려 했지만 계획이 어긋났다.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여기저기서 물밑으로 만나기를 바라며 요청해 왔다. 아무리 우천희가 평범한 프라이머 알파라지만 학생회장이라는 감투가 있었다. 그 이름값 때문에라도 알파들은 우천희 앞에서는 적어도 말을 조심했다.
재강원 고등학교 학생회장의 뒤로 거대한 선배들의 인맥이 존재했으니까.
그런데 베타인 한주는 아무렇지 않게 학생회에 들어가기 싫다며 우천희의 면전에서 얘기했었다. 얼굴이 굳어졌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우강희는 나와 같이 가자. 이후에 약속은 없겠지?”
“저와 선약이 있는데요!”
한주는 재빨리 나섰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우천희가 재차 입을 열기 전에 우강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가족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오늘은 이만 갈게. 학교에서 보자.”
“나와 먼저 약속했잖아.”
그의 팔을 잡았다. 도와주려고 나섰는데 우강희는 한주를 밀어냈다.
한주는 붉게 물들었던 등을 떠올리며 강하게 잡았다. 우천희에게 가면 무슨 짓을 당할지 아는데 어떻게 보내겠는가.
우천희는 어떤 결론이 날 줄 아는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 우강희는 저를 거역하지 못한다.
“룸 넘버를 문자로 보낼 테니 얘기 끝나고 올라와.”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보고 한주는 우강희를 말렸다.
“가지 마. 왜 제 발로 가려는 거야? 나와 약속 있다고 거절하면 되잖아. 저 사람은 널…….”
한주의 눈에 저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지금 한주는 오직 우강희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깊은 만족감과 함께 닿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솟아올랐다.
무심코 한주의 얼굴을 감싸려 손을 올렸다가 그는 동작을 멈추었다.
“스킨십 금지였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언제나 한주에게 다가오기만 하던 우강희는 멀어졌다.
“우강희!”
“네가 걱정해 주어 기쁘지만 이건 내가 정리해야 할 일이야.”
“뭐?”
“키스하고 싶지만…… 약속했으니 할 수 없겠다. 먼저 간다.”
“야, 우강희!”
우천희를 따라가면 어찌 될지 아는데도 자청해서 가는 우강희를 막을 수 없었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고 있었다. 어떤 꼴이 될지 알면서 일부러 자신을 상처 내려고 한다.
“우강희!”
한주가 목소리 높여 불렀지만 우강희는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돌아보지 않았기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 표정을 한주는 보지 못했다.
* * *
호텔에서 일한 지 몇 개월은 되었기에 우강희가 어느 객실로 들어갔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객실은 한수원 이름으로 결제되었다.
한주는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번거롭지만 호출이 와 이동하면서 우강희가 들어갔을 객실 층을 매번 들렀다. 더 많이 걸어야 했지만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 우강희를 데려오고 싶었다. 아무리 체격이 어른과 같다지만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이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와 알파와 베타의 차이를 알았지만 오늘만큼 자괴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자신은 우강희를 도울 수 없었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무술을 배웠고 적어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조금은 몸을 쓸 줄 아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가 못 미더워 우강희가 거절한 것이 아님을 알지만…….
여전히 자신은 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 * *
한수원이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와.”
천장이 높고 통창으로 야경이 펼쳐졌다. 복층으로 된 룸은 따뜻한 톤의 실내 디자인이라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수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응접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회장님과 좋은 관계가 되어 기쁘네요. 그럼 잘 부탁할게요.”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드님이 워낙 우수해서 제 추천이 없어도 충분했습니다.”
“좋게 봐 줘서 고마워요. 어, 동생인 우강희 군.”
소파에 앉아 얘기하던 여자는 우강희를 알아보았다. 서두르지 않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살갑게 인사했지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성의 없이 대답한다. 여자의 눈이 우강희의 얼굴에서 몸으로 흘러내렸다. 어떤 사람일지 평가하는 시선이었다.
“우리 인사나 할까요?”
손을 내밀었지만 우강희는 보지도 않았다.
“얘기가 안 끝났으면 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금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학생회장님, 그럼 잘 부탁해요.”
“문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형은 참 예의가 있네요.”
그리 말하면서도 여자의 눈은 훌륭한 수컷 알파를 탐내고 있었다. 우천희는 알면서도 그녀를 현관까지 안내했다.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선객이 떠나자 우천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지난 일주일간 우강희를 떠올릴 틈도 없었다. 엉망이 된 신입 환영회 때문에 OB들에게 전화를 돌려 사과해야 했다. 학생회장의 역량이 부족하다며 바꿔야겠다는 말이 협박이 아니어서 몇몇은 찾아가 선물을 안기며 비위를 맞추었다.
다음 주에도 비슷한 일정이 있는데 마침 호텔에서 우강희를 만난 것이다. 항상 걸림돌이 되는 우강희를.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하며 우천희는 고함을 쳤다.
“우강희! 당장 벗고 테이블에 기대!”
한수원이 2층으로 올라가며 자리를 피했다.
“저번 주에 클럽에서 그렇게 망쳐 놓고 그대로 가 버렸지! 찾아와 사과도 하지 않고! 언제부터 그렇게 건방져진 거지? 내가 만만해 보이나?”
성큼성큼 걸어가며 허리 벨트를 잡았는데 미동 없이 야경을 보고 서 있는 우강희의 모습에 멈추었다.
평소 명령하면 순순히 상의를 벗고 체벌 받을 자세를 취하더니 오늘은 움직일 낌새가 없었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머리에 열이 올랐다. 으득,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이, 그동안 잘해 줬지? 맞아야 말을 듣지! 간만에 제대로 힘 좀 써 줄 테니까, 당장!”
벨트를 빼서 오른손에 한 번 감아 단단히 쥐었다. 이전에는 밖으로 티가 나지 않게 옷을 벗으라고 했었지만 더는 봐줄 생각도 없었다.
“너 이 새끼!”
“그만하세요.”
팔을 치켜들며 우강희를 향해 내리치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어느새 우강희가 앞에 다가와 있었다.
“놔! 이제 같은 고등학생이라고 만만해 보여?”
팔에 힘을 주었지만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고 체격도 우천희보다 더 컸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우천희가 왼손으로 우강희의 얼굴을 후려치자 옆으로 돌아갔다.
“놔, 이 건방진 새끼가.”
순간, 말이 끊어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기묘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듯이 우강희가 저를 돌아보는 모습이 프레임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의 동작이 잔상으로 남았다. 고개를 돌리며 머리카락의 궤적과 눈동자의 움직임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시선이 박혔다.
“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포커스가 맞춰지듯이 사방이 흐려지며 우강희만이 눈에 박히듯 보였다. 그 이외의 물건이나 뒤로 보이는 룸의 풍경이 흐릿해지더니 멀어지는 느낌이 났다.
곧 컴컴해졌다. 완벽한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위아래도 구분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공간이란 개념이 배제된 어둠 속에서 오직 우강희와 자신만이 존재했다.
공포가 덮쳐 왔다.
“이제.”
우천희는 천천히 입을 여는 우강희의 입술을 보았다.
“그만하겠습니다.”
‘그만? 무엇을?’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이어서 말했다.
“당신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고 외할아버지에게 속죄하기 위해서 맞춰 주었지만 이제 더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속죄하며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단단해지고 더 강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옆에 있을 수 없죠.”
제 손을 내려다보던 우강희는 눈을 들어 우천희를 보았다.
감정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폭행을 일삼아 온 우천희를 향한 원망도 없었다.
“지금은 경고로 끝내겠습니다. 다음에 나를 건들거나, 혹은 박한주를 위협하는 일이 생기면.”
우강희는 입을 다물었다.
시야가 회전하며 우강희의 신발을 보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몸이 어딘가에 부딪혔지만 아픔은 둔탁했다.
“우천희? 이게 무슨 짓이야?”
한수원의 외침, 달려오는 발소리, 어깨를 붙잡으며 끌어당기는 억센 손길의 촉감, 모든 감각이 멀어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 * *
한수원은 바닥에 쓰러진 우천희의 몸을 껴안으며 뺨을 가볍게 쳤다. 눈을 감고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심장이 덜컥 떨어져 다급히 몸을 흔들었다.
“우천희! 눈떠 봐! 우천희!”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타인을 향한 말투에 한수원은 고개를 들었다.
“우강희, 너!”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우강희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무생물을 보는 것처럼 온기가 없었고 감정도 배제되었다. 익숙한 우강희인데 거대한 자연을 마주한 것처럼 한수원은 몸이 떨리며 경외감을 느꼈다.
도저히 한낱 인간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기분.
개미가 절 밟으려는 인간을 마주한 듯이 한수원은 숨을 쉬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일도 잊어버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생명에 이상은 없습니다. 구급차를 부르세요.”
탁, 우강희가 나가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한수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억의 일부가 없었다.
분명 우강희가 앞에 서 있었는데 문까지 걸어가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스륵, 품에서 떨어지는 우천희의 몸을 잡고 현실로 돌아왔다.
“우천희! 정신 차려!”
* * *
우강희는 비상구 문에 기댔다. 발현 이후에 쌓아 왔던 깊은 한숨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와 터졌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8년 전, 그는 페로몬으로 사람을 죽였다.
우상진은 우강희의 어머니 송지나와 재혼했다. 송지나는 우상진의 애인이었고 우강희를 낳은 후에도 오직 우상진만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 한결같음과 우강희가 알파 발현 확률이 높다는 점이 집안의 어른들에게 크게 어필되어 재혼을 허락했다.
우천희는 전처의 자식이었다. 서로 애인이 있었지만 우천희 어머니의 애인이 연예인으로 그들 불륜이 대서특필되면서 신원이 드러났다. 이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이혼하고 6개월 만에 송지나와 재혼했다.
우천희가 우강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천진해 더 잔인했고 집안의 왕자님으로 자라 온 우천희는 우강희를 괴롭혔다. 그때의 우강희는 지금처럼 감정 변화가 적었고 우천희의 괴롭힘을 어린애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문제의 그날은 모든 것이 달랐다.
어릴 때부터 우강희를 종종 돌봐 준 외할아버지가 방문한다고 해서 전날 잠을 설치며 기다렸었다.
‘첩 자식 주제에 나랑 같이 식사를 해?’
아침부터 우천희는 우강희의 식사를 밀어 버렸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음식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너같이 빌붙어 먹는 새끼는 저렇게 떨어진 거나 주워 먹어! 제 엄마처럼 천박하지!’
그 정도 말과 괴롭힘은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몸이 무겁게 느껴졌고 머리가 멍해서 또렷하지 않았다. 옷을 입을 때도 피부가 따가웠다. 송지나는 아침부터 모임이 있다며 집에 없었고 우상진은 선거 시즌이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치 볼 부모가 없으니 우천희는 더 기고만장하게 굴었다.
‘누굴 꼬나봐! 눈 깔아!’
퍽, 뒤통수를 맞아 몸이 앞으로 쏠렸다. 우천희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병신, 어디에 대고 인사하는 거야?’
유독 짜증이 났다.
한 살 차이지만 손가락 길이만큼의 키 차이였고 덤비면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우강희는 방으로 들어갔다. 맞설 수 있지만 그 후 어머니 송지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다.
우상진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추고 우천희가 버릇없이 굴어도 ‘어린애니까’라며 참는 송지나는 아들이 전처의 아들인 우천희를 때리면 사과할 사람이었다.
우강희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혼자 참았다. 창고에 가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집사가 열어 주었고 괴롭힘에 크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아침에 괴롭히고 등교를 한 우천희는 집에 돌아오자 분풀이를 하듯이 우강희의 방을 찾아왔다. 어린 손이 던지는 책이라도 몸에 맞으니 아팠다. 종이가 스치며 날카롭게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다 창녀 같은 네 엄마 탓이야! 주는 대로 빌어먹으며 조용히 살 것이지 감히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엄마 행세를 해? 너랑 걸레 같은 네 엄마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돌아오지 못하잖아!’
단단한 쿠션을 잡고 어린 우강희의 몸을 때렸다.
‘그냥 죽어! 죽어 버려! 너만 이 집에서 사라지면 네 엄마도 나가겠지! 그 창녀도!’
참을 수 없었다. 아픔에 열이 올라 눈이 화끈거렸고 송지나를 창녀라고 부르는 소리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너나 죽어!」’
외치자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몸 밖으로 힘있게 뻗어 나갔다. 오랜 시간 참았다 화장실을 간 느낌처럼 분출되는 시원함이 있었다.
이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외할아버지를 발견했다.
‘어, 할아버지?’
언제 왔는지 문에 외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우강희를 보면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면서 안아 주던 사람이 눈을 반쯤 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까지 때리던 우천희도 똑같은 모습으로 쿠션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발코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른의 걸음이라 곧 나란히 걷더니 발코니 창에 외할아버지가 먼저 도착했다.
‘……할아버지?’
삐거덕거리며 다른 사람이 조종하는 목각 인형처럼 발코니 창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상함에 우강희는 외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옷을 움켜잡았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발코니 난간까지는 두 발짝 남았지만 상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부르면 절 보며 눈을 맞춰 주던 외할아버지가 봐 주지 않았다.
‘장난치지 마세요, 할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옷을 잡힌 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외할아버지는 앞으로 가더니 난간을 잡았다. 어른의 허리보다 높았다.
‘뭐 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옆을 보니 우천희가 외할아버지처럼 난간을 잡고 한쪽 발을 올리려고 바둥거리고 있었다. 마치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사람처럼 두 사람이 똑같이 행동했다.
2층인데 난간을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어린 우강희는 외할아버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위험해요!’
퍽, 밀쳐지고 어린 몸은 뒤로 넘어졌다. 외할아버지는 자유롭게 되자 난간을 잡고 몸을 밖으로 쭉 뺐다.
‘안 돼! 그만!’
외침과 함께 또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났고 그 순간 외할아버지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그러나 이미 몸은 난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우강희가 보는 앞에서 외할아버지는 사라졌다. 곧 쿵,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우천희는 그대로 테라스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우천희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2층에서 떨어진 외할아버지는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틀 후 장례식을 치렀다.
그것이 우강희의 첫 발현이었다.
“우강희, 괜찮아?”
고개를 드니 그의 앞에 박한주가 서 있었다.
* * *
층이 많이 차이 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지만 우강희가 신경 쓰여 한주는 비상구로 다녔다. 일전에 그곳에서 만난 적이 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역시 그가 있었다.
우강희는 계단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우강희, 괜찮아?”
한주의 질문에 등을 곧게 펴더니 그는 한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목덜미가 땀에 젖어 있었다. 저녁 내내 뛰어다닌 한주보다 더 지쳐 보였다.
우천희에게 또 맞은 것은 아닌지, 시뻘겋게 부풀었던 등이 떠올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속이 상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주의 속도 모르고 여상하게 인사한다.
“여기서 보네.”
“등은?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갔으면 맞지나 말지, 얼마나 맞았길래 식은땀을 그렇게 흘려?”
몸을 비스듬하게 당겨 윗옷을 들어 등을 확인했다. 깨끗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 폭행은 없었다.
“괜찮네. 놀랐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끝냈어.”
후, 그가 뱉은 숨소리는 무거웠다.
“죄를 뉘우친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걸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고스란히 주워 담을 수 있을까. 그 흔적이 깊게 남아 메꿀 수 없는데 과연 없었던 일이 될까.”
“……무슨 일 있어?”
영문을 모르는 소리만 한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질러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지, 무엇을 속죄하려는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강희가 저지른 일을 알게 되면 한주가 그를 비난할 수도 있을 만큼 무거울 수도 있다.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이제 고1이었다.
겨우 고1.
그의 이마를 만지니 열이 옮았다.
“방 예약했어?”
“아니.”
한주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더블베드로요. 네.”
객실을 예약하고 한주는 우강희를 보았다. 옆에서 통화를 들은 그는 좋아하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걸을 수 있지?”
“……도와줘.”
“혼자 걸을 수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주는 부축해 주었다. 어깨를 감싸며 몸을 바짝 붙여도 투덜대지 않았다. 겉옷을 입고 있었는데도 우강희의 몸은 뜨거웠다. 열이 높았다.
“방값 줄게.”
그를 스탠다드룸의 침대에 앉히며 한주는 짜증 냈다.
“당연하지. 해열제 가져올게.”
우강희가 잡을 틈도 없이 한주는 객실을 나갔다.
혼자 남자 우강희는 일어나 상의를 벗었다. 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후끈대는 열기를 느끼며 강희는 브리프만 입고 침대에 누웠다.
몸이 깊게 가라앉아 갔다.
러트 때처럼 열이 올랐다. 러트는 아니었다.
우천희와의 관계는 마음만 먹으면 끝낼 수 있었지만 가슴에 남았던 죄책감 때문에 정리하지 못했다.
정리한다고 죄를 잊으려는 행동이 아니지만 몸이 반응을 일으켰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다.
박한주의 옆에 있고 싶다.
가지고 싶다. 당당하게 옆에 서며 지켜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강희가 넘어야 할 고통이었다.
* * *
“웃지 마. 짜증 나 죽겠어.”
해열제를 가져온 한주는 생수를 따서 주며 못마땅하게 우강희를 보았다.
“불쌍하게 생각해 줘.”
“네가 원해서 따라가 놓고 뭘 불쌍하게 생각해 달라는 거야?”
털썩, 침대에 걸터앉자 그가 누운 몸을 움직여 한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머리카락이 한주의 다리에 닿았다.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려고 한다.
“가 버리기 전에 머리 치워라.”
“가면 안 되지.”
장난치듯 웃으며 가볍게 말하지만 열이 올라 그의 얼굴은 붉었다. 고작 머리 하나 움직이면서 들으라는 듯이 우강희가 ‘끄응’ 신음을 냈다.
“엄살은.”
그래도 걱정은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천희와 아무 일 없었던 거 맞아?”
“성인이 되어 그 집에서 나올 때까지는 어울려 줄 생각이었는데. 그 후엔 그 집을 떠나 어딘가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살아갈 생각이었어.”
다리에 닿은 한숨이 뜨거웠다.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왔어.”
“잘했어.”
“왜 생각을 바꾸었냐고 묻지 않아?”
“……안 물어. 물으면 너 좋은 일 해 주는 기분이야.”
큭큭, 어깨를 떨며 강희가 웃었다.
“실실 웃지 마.”
“네가 걱정해 주니 좋다. 너 때문에 우천희에게 맞섰어. 네가 날 생각하는 모습은 좋지만 걱정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시답잖은 핑계는.”
낯간지러운 말에 일어나려 하자 우강희가 한주를 불렀다. 침대에 고개를 누이고 올려다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어야 상대가 마음이 흔들릴지 아는 미인은 한주를 유혹하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잘 때까지 옆에 있어 줘. 손잡고 싶어.”
바로 뻗으면 잡을 수 있는데 우강희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허락을 구했다. 가증스럽게 불쌍한 척 연기하지만 알면서도 한주는 거부할 수 없었다.
“……호출 오면 가 봐야 해.”
마지못해 응하는 사람처럼 한주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주인의 허락을 받은 우강희는 옆에 놓인 한주의 손바닥에 손을 겹쳤다.
온몸이 안기듯 부드러운 따뜻함이 그의 손에 퍼졌다. 절로 나오는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몸에 열이 올랐다.
“나 나가면 페로몬 풀어도 돼. 이 호텔 소취 팀 실력 좋아.”
우강희가 유난히 페로몬 조절에 신경 쓰기에 조금 편히 있으라고 말했다.
한주는 타인의 페로몬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의 페로몬이 밖으로 나가거나 몸에 묻히고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모습을 봐 왔다.
한주의 배려하는 말에 그는 웃음이 났다. 손을 맞잡고 있으니 욕심이 나 한주의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손등에 뺨이 닿자 움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을 빼갈까 봐 꼭 쥐는데 한주의 다른 손이 우강희의 이마에 닿았다.
“열이 떨어지지 않네. 해열제 먹었는데 효과가 없어.”
“시간 지나면 괜찮아져. 페로몬을 풀면…… 네가 곤란해져서 안 돼. 네 이름으로 방을 잡았는데 소취 팀이 오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라 생각하긴. 친구가 몸이 안 좋아 잔다고 말했는데,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몸 안 좋은데 자기나 해.”
뒤늦게 우강희의 말뜻을 알아들은 한주는 그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그때 인이어로 호출이 왔다.
한주의 친구가 몸이 좋지 않아 객실을 결제했기에 매니저도 휴식 시간을 주었는데 그 시간이 끝났다.
한주는 인이어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일하러 간다. 불 꺼 줄게. 자.”
“올 때까지 기다릴게.”
“기다리지 마.”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어차피 이 상태로는 잠도 안 와.”
“…….”
한주는 다시 호출이 들려 방을 나갔다. 한주가 나가자마자 우강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더니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약을 먹어 몸에서는 열이 떨어졌는데 그 열이 전부 하체로 몰렸다. 한주가 기겁하기 전에 힘을 빼야 했다.
* * *
“아직 안 잤어?”
객실을 오가는 중에 한주는 우강희에게 들러 음료수를 놓고 가든가 샌드위치를 주고 갔다. 그리고 2시에 일이 끝났는지 방으로 돌아왔다가 아직 환하게 불이 켜진 방에 한숨을 쉬었다.
우강희는 얌전히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이제 끝났어?”
이마를 만져 보니 열은 없었다. 얼굴색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혈색이 좋았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세면도구는 다 구비되어 있고.”
“필요하면 프런트에 부탁하면 돼. 옆에 앉아. 심심해.”
“난 이만 가야지. 안 자?”
“아까 자서 잠이 안 와.”
“너 계속 깨어 있었잖아.”
거짓말하지 말라며 반박했지만 강희는 침대를 토닥거리며 앉으라고 종용했다. 불쌍히 여길 때의 한주는 대부분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같이 TV라도 보자.”
“야, 난 이제까지 일하고 온 사람이야. 가서 자야지.”
“나 혼자 두고 가게? 환자 혼자 호텔에 두겠다고?”
“너 지금 엄청 건강해 보여.”
“피곤할 텐데 씻고 와. 치킨도 시킬까?”
들은 척도 안 하는 우강희에게 결국 한주는 져 주었다.
씻고 나와 치킨을 먹자 몸이 늘어졌다. 우강희에게 신경 쓰며 뛰어다닌 피로가 뒤늦게 몰려왔다. 한주는 침대 헤드에 기대 누워서 하품을 크게 했다.
“스트레스 쌓인다. 이럴 땐 사부랑 몸 움직이면 쫙 풀리는데. 넌 뭐 하며 스트레스 풀어? 맨날 재미없는 뉴스나 보고 있던데, 주말에 친구들 만나면 보통 뭐 하고 놀아?”
“글쎄, 취미라고 할 만한 거면 승마겠지. 알파들은 어릴 때부터 모임에 참가해 카드게임이나 여러 스포츠를 배워서 가리는 것은 없어.”
“평범하네.”
한주는 침실 창에 비치는 침실 모습을 보며 예전 얘기를 꺼냈다. 나란히 우강희와 기대어 누웠는데 그의 얼굴은 한주를 향해 있었다.
“작년 겨울 생각난다. 작년에 스키 타러 갔을 때 진짜 재미있었어. 김지영이랑 고용진, 나, 그리고 우리 엄마랑 갔는데 오다가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도로에 차가 묶인 거야. 차들이 체인을 달아도 진짜 사람이 걷는 게 더 빠르다 싶을 정도로 엉금엉금 가는 데다가 휴게소는 멀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 게임도 금방 질려 버렸고. 그때 갑자기 엄마가 차에 버너랑 냄비 있다면서 라면 끓여 먹자고 하잖아.”
그때 생각이 나서 한주는 히죽거렸다.
“마침 쉼터가 있어서 주차하고 밖에서 라면 끓여 먹었어. 눈 날리고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는데 우리는 차에 연결해서 만든 지붕 아래에서 함박눈을 보며 라면을 끓여 먹었지. 그때 먹은 라면이 제일 맛있었는데, 그때 분위기가 한몫했지. 그때부터 가끔 친구들이랑 캠핑 가게 됐어.”
지난 삶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엄마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한주가 가자고 주장했었다.
“우강희, 다음에는 너도 같이 가자. 재밌을 거야.”
천진한 권유에 우강희는 누워 있는 한주의 위로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 내려다보았다.
“날 데려간다고?”
“내 친구들은 알파라고 어려워하는 녀석들이 아니야. 용진이가 시끄럽겠지만 걔는 막상 밀어붙이면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녀석이라 괜찮아.”
생각도 하지 않고 우강희는 대답했다.
“네가 옆에 있으면 어디든 좋아.”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은 설탕 가루를 뿌린 듯 부드러웠다. 티격태격하며 그의 얼굴에 익숙해졌지만 한주는 새삼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표정을 얻게 된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에 표정이 생기며 애정이 눈에 담기면 그 아름다움은 이전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높아졌다.
고양감.
낯선 기분에 어깨가 간지러워졌다.
사료를 주어도 경계만 하던 길고양이가 저가 보는 앞에서 사료 그릇에 다가와 먹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고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언제든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는 육식 동물이라 귀엽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음에 초대할게.”
부드럽게 접히는 눈웃음을 보며 한주는 혼을 빼앗겨 버렸다.
우강희는 한주와 눈을 마주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렸다. 주변의 시간이 멈춘 듯, 호흡을 할 수 없었다. 한주의 반대쪽 매트리스에 팔을 뻗어 지탱하더니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달칵, 그가 버튼을 누르자 룸의 불이 꺼졌다.
“그만 자자.”
“자, 잘 자!”
한주는 얼굴이 벌게져서 우강희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 * *
우강희는 옆으로 누워 잠든 한주를 바라보았다. 한주가 예약한 방은 스탠다드룸으로 더블베드였다. 슈퍼싱글보다는 넓었지만 남성 둘이 자기에는 좁은 느낌이었다.
잠든 한주의 옆에 모로 누워 마냥 바라보았다.
팔을 뻗으면 어깨를 안을 수 있었고 조금만 목을 빼내면 입술이 닿을 수 있었다. 달콤한 유혹이 그를 건드렸다.
하지만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을 못 참고 한때의 달콤함을 즐길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 기다림의 끝에 얼마나 달고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어 참을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한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김지영이 학교로 오면서 그것이 안일한 생각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