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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리턴 4권-20. 한주의 친구 (20/31)

베타 리턴 4권

20. 한주의 친구

한주는 우강희와 등교하며 본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교직원 주차장을 지나는데 평소 서 있던 차들 중 다른 종류의 차가 눈에 띄었다. 연예인 밴이 주차장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운전석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남자를 보고 한주는 반갑게 뛰어갔다. 차창을 가볍게 노크하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한주를 보더니 빠르게 운전석에서 내렸다.

“한주야! 잘 지냈어? 교복 멋지다!”

“아저씨, 어머니와 오신 거예요? 김지영도 같이 왔어요?”

“그래, 같이 교무실 갔어. 준비할 물건과 기숙사 배정 때문에 왔어. 오늘부터 기숙사에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어서 가 봐.”

“네!”

남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주는 교무실로 달려갔다. 흐뭇하게 뒷모습을 보다가 남자는 앞을 지나가는 우강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여배우의 매니저로 일하며 여러 촬영장을 다녔지만 우강희는 여느 남자 배우보다도 뚜렷한 존재감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우강희에게 내밀었다.

“혹시, 연예인에 관심 있으시면…….”

그러나 강희는 명함을 보지 않았다.

“박한주는?”

“아, 한주를 알아요? 지영이가 왔다는 말에 교무실로 갔어요.”

필요한 말만 듣고 우강희는 가 버렸다. 멍하니 보며 남자는 어린 녀석이 싸가지 없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알파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기에 반말 정도는 가벼운 축이다. 베타로서 평범한 학교를 나오고 알파와 오메가가 많은 연예인에 익숙한 남자조차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은 분위기도 확연히 달랐다.

“그래도 방금 그 학생이 제일 괜찮은데, 아쉽네.”

* * *

한주는 교무실로 뛰어갔다.

인사를 끝냈는지 우아하게 머리를 세팅한 여성이 담임 이무열과 복도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옆에 선, 저보다 큰 남자의 등을 친밀하게 쓸었다. 뒤돌아 있어서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굽 높은 힐을 신은 여자는 힐을 신지 않아도 170이 넘었는데 남자는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원래 김지영은 한주와 키가 비슷했지만 여린 이미지 때문에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성격도 순해서 거절을 하지 못했고 동급생이라도 목소리가 큰 사람을 무서워해 한주의 팔을 자주 붙잡았다.

입학식 때도 자신보다 더 큰 동급생들을 보고 긴장해서 사색이 되기도 했다.

어떻게 변할지 이미 알지만 다시 본 기쁨에 한주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전처럼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영!”

한주의 목소리에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주로 영화에 출연하는 여배우 민소희는 한주의 어머니 박예주의 친구이기도 했다. 빙긋이 웃는 민소희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이 자식 한 대만 때릴게요!”

당당히 말하며 한주는 민소희의 옆에 선 남자의 배를 주먹으로 퍽, 힘있게 때렸다.

“한주는 지영이 모습 처음이겠구나.”

민소희는 가볍게 웃으며 배를 감싸며 허리를 숙인 아들을 보았다. 갈색빛이 도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남자가 고개를 들면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턱에 힘을 주며 입을 꾹 다물고 한주의 눈치를 보았다. 눈꼬리가 아래로 쳐졌다.

“미안.”

한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자 지영은 친구의 옷을 잡았다. 김지영이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미안해. 화내지 마.”

이미 알았고 모습을 보았지만 그래도 낯설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은 그대로였지만 앳되고 고1로 안 보이던 아기 얼굴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한주의 팔을 잡으며 미세하게 떠는 손도 마디가 굵어졌고 목소리도 허스키했다.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대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낯설었다.

“미안해, 한주야. 걱정 끼쳐서 미안.”

전화 통화로 이미 익숙한 목소리가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계속되는 사과에도 한주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자 민소희가 아들을 도와주었다.

“지영이가 걱정 많이 했어. 알파가 되어서 모습이 갑자기 변했잖아. 네가 자기를 싫어하지 않을까,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해서 널 만나지 못하겠다고 밤마다 울었어. 목소리도 이렇게 변했고. 나쁘지는 않지만 예전보다는 너무 갭이 크니 너도 당황했겠다.”

“엄마!”

“엄마한테 소리 지르지 마. 갑자기 뼈가 자라면서 힘들어하면서도 밤에 엉엉 울면서 한주가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만 했잖아.”

“그,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지영은 민소희에게 항의하면서 은근슬쩍 한주를 껴안았다.

한주는 김지영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이미 지영에게 대략 말을 들었지만 민소희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으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한주야…….”

이래서였구나.

캠프 이후에 폭력은 더 거세졌다. 반에서는 그나마 안전했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알파와의 극명한 차이를 느끼며 왜 자신은 알파가 아닐까, 힘들어할 때 김지영이 알파로 변해 학교로 돌아왔다. 연락을 끊은 것도 괘씸한데 모습도 변하고 절 멀리했다.

‘오해였어.’

알파로 발현 후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럴 애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때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미안해, 한주야…….”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한주는 지영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들어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지영은 시선을 피하더니 볼을 붉히며 다시 한주를 보며 웃었다.

“몸은 괜찮아?”

“한주야…….”

미안하거나 어리광을 부리거나 부탁을 할 때의 버릇대로 한주의 이름을 부르며 말끝을 늘였다. 분위기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살살 웃으며 지영은 한주의 팔을 잡았다. 손의 크기도 이전과는 달랐다. 여자 손 같던, 가늘기만 한 손가락이 마디가 두꺼워져서 남자 티가 났다.

‘여전하네.’

한주는 피식 웃었다. 그 미소에 지영의 어깨가 반쯤 내려왔다.

“이렇게 변했으니까 걱정했겠다. 그런데, 김지영.”

“어?”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 연락 끊고 잠수 타면 더 걱정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해? 걱정하는데 만나러 가지도 못하게 해?”

한주는 손에 힘을 빼지 않고 김지영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빡,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어머!”

민소희는 웃음이 터질 거 같아 입을 가렸다. 그동안 징징거리며 걱정하던 아들의 짜증을 들어 주며 참아 왔는데 쑥 속이 뚫렸다.

배를 얻어맞았을 때도 서 있던 지영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며 부들부들 떨었다. 한주는 인정사정없이 그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 짝 소리 나게 스매싱을 날려 때렸다.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전화는 하면서 왜 만나지는 못하는데! 한 번 더 이러면 너 가만 안 둘 줄 알아! 또 이런 식으로 멀리하면 내 쪽에서 차단해 버리고 너는 내 머리에서 영원히 삭제해 버릴 거야!”

“안 돼! 미안해, 한주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차단한다는 말에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지영은 한주의 허리를 안았다. 화는 풀렸지만 그 후 지영의 등을 몇 대 더 가볍게 내리쳤다.

“열받아서 쳐들어갈까 하다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걱정 끼쳐 놓고 웃으면 다 해결되는 줄 알지!”

“아니야, 진짜 반성하고 있어. 미안해. 한주야, 그만 때려. 나 아파. 아직 아프다고…….”

아프다는 말에 연타로 때리던 손이 멈추자 지영은 더욱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서 그렇게 때리면 몸이 흔들려서 더 아파. 관절과 근육이 쑤셔.”

“이 자식, 그런다고 용서할 줄 알아?”

“용서는 천천히 해도 되니까 오늘은 그만 때려.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 오늘은 이만 봐줘, 한주야. 응?”

어느새 등에 찰싹 붙어 뒤에서 한주의 어깨를 껴안으며 머리를 기대왔다. “한주야아.” 어리광 섞인 목소리가 한주의 약해진 마음에 파고들었다.

약하면서 성질은 죽이지 않아 싸움을 일으켰고, 한주가 수습하면 미안해서 어리광 부리며 어물쩍 용서받고 넘어갔다. 그때는 덩치라도 작아서 지켜 줘야 한다는 마음에 쉽게 용서가 되었는데 새삼 덩치가 커졌다고 그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주에게 지영은 언제나 지켜 주어야 할 존재였다.

“그래, 한주야. 지영이가 이렇게 사과하잖아. 얘도 반성 많이 했을 거야. 몸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그만 용서해 줘.”

풀려 가는 분위기에 민소희도 아들을 도와주었다. 아들이 한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았지만 이번에는 좀 놀랐다.

밤마다 힘들어하면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지영은 우울해했다. 징징거리며 피곤하게 한 걸 생각하면 더 맞아도 좋지만 한주에게 매달리는 아들의 약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다음엔 용서 없어.”

“고마워! 역시 한주야!”

한주는 지영의 품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진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흩트려 놓았다. 푸들을 만지는 것처럼 보송한 감촉은 여전했다.

“얼굴만 좀 더 못생겼어도 확 차단해 버렸는데.”

“누구 아들인데 당연히 잘생겨야지. 엄마한테 감사해야 한다, 지영아.”

민소희는 호호 웃으며 뿌듯해했다. 지영이 제일 걱정하던 한주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자 민소희는 이무열에게 용건을 꺼냈다.

“한주도 A동 기숙사에서 산다고 들었어요. 우리 아들이 알파가 되었지만 이대로 갑자기 기숙사 생활을 하면 잘 적응할지 걱정이었는데 마침 같은 기숙사에 한주도 있으니 방을 같이 쓰면 좋겠어요. 한주도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민소희는 학교로 오기 전에도 무열에게 같은 요구를 했었다.

그때는 한주가 잘 적응하고 있어서 방을 바꾸지 않는 편이 좋다고 거절했었는데 민소희는 모른 척 다시 밀어붙였다.

“어머님, 기숙사 일은 이미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무열도 학기 중간에 돌아온 지영이 학교생활에 적응하도록 돕고 싶었다. 하지만 우강희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허락하지 않자 민소희는 당사자를 공략했다.

“한주야, 예주는 잘 지내지? 저번 주에 통화를 했지만 바빠서 얼굴 본 지는 좀 됐네.”

“잘 지내세요. 건강하시고요.”

“그래. 한주야, 너도 잘 모르는 알파와 지내기보다 지영이와 지내는 쪽이 더 편하지 않을까?”

한주라면 그녀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애였다. 한주가 대답하기 전에 우강희가 끼어들었다.

“정말 한주 어머님의 친구 맞습니까? 한주 어머님이 보았으면 서운해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군요.”

우강희는 한주의 손목을 잡은 지영의 손을 잠시 보았다가 민소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주는 모르지만 그가 나타나자 잠시 지영의 날 선 페로몬이 흘러나왔다가 흩어졌다. 우강희는 그런 미약한 페로몬에는 관심 없었다. 민소희는 그의 경계를 미소로 넘겼다.

오메가의 본성으로 빠르게 눈앞의 알파를 파악했다. 느껴지는 페로몬은 없지만 겉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느낌이 강했다.

“학생은?”

“한주의 룸메이트 우강희입니다. 알파 기숙사에 이제야 적응한 사람에게 알파를 돌보라고 강압하며 방까지 바꾸라니요. 아무리 자기 자식이 더 중요하다지만 한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 하시는군요.”

“야, 우강희.”

날 선 말에 한주는 강희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한주 어머님도 한주가 학교에서 잘 적응할지 걱정하고 있으실 텐데 이기적인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요.”

“야, 어머님은 지영이를 걱정하니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우강희는 드물게 한주를 혼냈다.

“너도 이제 겨우 적응한 참인데 네가 누굴 챙겨. 저 녀석도 알파야. 알파 사회에서 겨우 이 정도도 적응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어.”

“듣고 있으려니 좀 말이 심하네요. 한주는 지영이와 친한 친구라 부탁한 거예요.”

“친하니 학교 안에서 신경 써 주면 됩니다. 기숙사도 같은 건물이고, 5분 안에 방에 찾아갈 수 있는데 같은 방까지 쓸 필요는 없습니다.”

“야, 너 이리 좀 와 봐.”

웃고 있던 민소희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자 한주는 강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몇 발자국 떨어졌지만 작은 소리로 말하면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민소희와 지영의 얼굴을 확인한 한주는 그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왜 그래? 어머님은 그저 걱정해서 하시는 말인데.”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저분 말대로 하겠다고 말했겠지.”

“그렇지 않아.”

“마음이 없었다면 당장 거절해.”

한주도 기가 센 알파들 사이에서 지영이 잘 적응할까 걱정이었다. 지영은 일반 베타 중학교에서도 예쁘장한 얼굴로 짓궂은 학생들의 표적이 되고는 했으니까.

그런 한주의 생각을 더 이어 가지 못하게 우강희가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나는 너 못 줘. 못 보내.”

강하게 밀면 한주는 반발할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고 이제 막 발현해 불안정하다지만 알파야. 아니, 상대가 베타든 오메가든 여자든 상관없어. 누가 와도 넌 못 줘.”

“너는 꼭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야겠어?”

“지금 말하지 않으면 언제 하지? 네가 다른 방으로 가 버린 후에?”

강희는 부끄러움도 없이 직선적으로 감정을 보였다. 씨근덕거리며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숨이 거칠어졌다. 노려보는 눈은 사납기보다는 뺏기지 않으려는 오기가 많았다.

한주는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헝클었다.

‘한 달 동안은 직접적인 고백은 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어느새 머릿속에는 지영에 관한 생각은 없었다.

한주가 난감해하며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강희와 지영은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영의 눈이 날카로워지며 적의를 담았다.

우강희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지영이 잠깐 보인 페로몬은 평범한 프라이머 알파보다는 강했다. 이제 막 베타에서 알파로 발현했는데도 로열 알파에 가까웠다. 발현 이후에 약간의 레벨 업 시기가 있음을 고려한다면 1년 후에는 로열 알파가 될 만한 페로몬이었다.

“한주야.”

지영은 한주의 옆으로 다가갔다. 말이 길어지며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한 민소희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보았다.

정리를 할 시간이다.

한주는 김지영의 손을 잡고 어른들에게로 향했다.

“수업은 오후부터 들어와?”

“아니, 내일부터. 오후에는 기숙사 방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들도 챙겨야 해.”

“그럼 수업 끝나면 보겠네.”

지영의 얼굴이 밝아졌다.

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한주와 같이 방을 쓰길 내심 기대했었다. 민소희도 한주의 말을 듣고 안심하며 팔짱을 풀었다.

“그럼 지영이와 같은 방을 쓰는 거지? 한주, 네 짐은 지영이의 방으로 옮겨 놓으라고 할게.”

“아니요. 방은 옮기지 않을 거예요.”

“한주야?”

“어차피 같은 반이고 같은 건물에 방이 있는데 굳이 방까지 같이 쓸 필요는 없잖아.”

“아직도 화 안 풀렸어?”

“애초에 화 안 났어.”

한주는 민소희의 시선을 피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어른의 서운해하는 얼굴에 죄를 지은 것처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친한 친구이고 서로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자주 외박을 했다. 항상 껌딱지처럼 같이 다니고 보살피던 지영은 이제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었다.

이미 한주는 그런 모습을 전에 보았다.

한주는 지영의 손을 잡았다. 버리지 말라는 듯 마주 잡아 오는 손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저가 지켜 줘야만 하던 여린 김지영이 아니다.

길고 굵어진 손마디와 넓게 벌어진 어깨, 훤칠해진 키. 나비가 변태하듯이 확 달라지는 모습.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한주가 좋아하는 친구 지영이다.

“잘 지낼 수 있어. 예전의 네가 아니잖아. 너보다 덩치 큰 사람은 이제 별로 없으니 겁먹지 않아도 돼. 너한테는 페로몬이라는 것도 생겼고…… 이 학교에는 네 편 들어 줄 나도 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한주는 한번 정하면 생각을 잘 바꾸지 않았다. 고집을 알기에 계속 부탁하면 자신에게 질릴 수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억지로 수긍하며 김지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힐끔 우강희를 확인했다.

한주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룸메이트 우강희의 영향이 커 보였다. 잠시 제 페로몬을 내보였을 때 그의 반응은 약했지만 페로몬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강희는 다른 알파들과는 다르다.

“알았어, 같은 건물이고…… 너도 지금 룸메와 많이 친해졌을 텐데, 미안해. 네 생활도 있는데.”

“서운해?”

“……조금.”

솔직한 대답이 지영이다워서 한주는 웃었다.

“삐진 거 아니지?”

“그 정도는 아니야.”

서운한 티를 내지만 지영은 불퉁하게 덧붙였다.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지만 저의 말에 한주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눈치도 본다.

“잘못한 게 있으니까 이번은 넘어가 줄게.”

은근히 자기 잘못을 작은 것으로 넘기는 모습이 약았지만 한주는 웃으며 지영의 옆구리를 찔렀다.

“계산 똑바로 해. 그런 걸로 퉁치지는 못해. 너는 무려 두 달 치야. 어디서 싸게 넘어가려고 그래.”

쳇, 혀 차는 소리를 들으며 한주는 민소희를 보았다. 아들의 반응을 보고 있던 그녀는 더는 안 된다고 느꼈는지 무열에게 말했다.

“가능하면 한주와 방을 같이 쓰게 하고 싶었는데 안 되나 보네요. 지영이에게 룸메가 있을 거라고 하셨는데, 어떤 학생인가요?”

“이 재강원 고등학교 설립자의 손자이며 현 이사장이신 재강원 이사장님의 둘째 아들 재민석 군입니다.”

“그럼 알파끼리 방을 쓰나요?”

“아니요. 재민석 군은 베타입니다. 원래 인근에서 등·하교했는데 아무래도 편의 시설이 기숙사보다 부족해 A동 기숙사로 들어온다고 해서요. 지영 군이 입소하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됐네요!”

민소희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한주는 지영을 보았다.

재민석은 같은 베타를 싫어하니 알파인 지영에게 문제는 없겠지만 유약한 성격이라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괜한 선입견을 주고 싶지 않아 한주는 민석이 어떤 사람인지 언급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우강희가 끼어들었다.

“곧 수업이 시작해서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렇지. 어서 가 봐.”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김지영, 방 배정되면 문자 보내. 같이 저녁 먹자.”

“응, 나중에 봐.”

가볍게 인사하고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니 지영은 계속 한주를 보고 있었다. 지영의 눈에 아쉬움이 절절하게 묻어 있어서, 마치 키우던 강아지를 버리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주의 걸음이 느려지자 강희가 돌아보았다.

“아쉬우면 더 얘기하고 오든가.”

소리가 딱딱했다.

“아니, 이제 계속 볼 텐데 뭐.”

그가 고백하고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한주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갔다지만 지영은 몇 년을 알아 온 친구였다. 안타깝지만 그와는 입장이 달랐다.

만약 한주가 둘 중 한 명을 택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가 아니라 김지영이 된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한주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어필할 수 있지만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너는 베타 때 어땠어?”

한주는 뒤돌아보며 친구에게 다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무룩했던 얼굴이 방긋 밝아지고 양손을 들어 격하게 휘저으며 인사한다.

전에도 예쁜 외모였지만 민소희의 유전자와 함께 알파 발현이 어우러지자 알파들이 우글거리는 재강원 고등학교에서도 눈에 띌 외모가 되었다.

“작고 귀여웠지.”

“농담하지 말고.”

“여덟 살 때 발현해서, 정확히는 몰라.”

“초등학교 때구나. 그러고 보니 초등 6학년 때 같은 반 애가 발현했는데 저 정도로 확 변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한주는 강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초조한 낯빛으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기분 별로야.”

“갑자기 왜 그래?”

“네가 몰라주니 더 최악이고.”

“뭐?”

멀뚱멀뚱 절 바라보는 한주를 보다가 우강희는 심호흡을 하듯이 크게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잠깐. 등을 털어 줄 건데, 손대도 돼?”

“어, 해. 그 정도는 괜찮아.”

우강희는 항상 직선적이라 이제껏 한주가 잘 느끼지 못한 부끄러움을 끌어냈다. 흙 위를 뒹군 것도 아닌데 그는 한주의 등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지영이 한주를 안으며 손이 닿았던 위치였다. 그걸 알아차리자 귀가 뜨거워졌다.

“왜? 뭐 묻었어?”

“먼지가 묻어서. 됐어.”

“어, 지영이 손에 뭐가 묻어 있었나 보네.”

한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귀는 여전히 달아올랐다.

지영이 손이 닿아서 불만이라 털어 주었나? 우강희라면 그럴 만했다. 집착이 장난 아니게 강해서 진짜 사귀기라도 하면 밖으로도 나가지 못하게 하지 않을까. 그럼 답답한데.

‘잠깐, 사귈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집착 때문에 답답할 걸 걱정해? 미쳤어? 안 사귈 거야! 고백도 거절할 거라고!’

의식의 흐름을 따르다가 생각이 꼬여 버렸다. 당황해 엉거주춤하다가 툭, 어딘가에 부딪혔다.

“아, 미안.”

걷다가 재민석의 의자에 부딪혔다. 민석은 한주를 잠시 노려보았다가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만지는 양손은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무열이 재강원의 애인임을 안 이후 민석은 장갑을 끼고 생활하기 시작했다. 수시로 바꿔 끼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유별난 학생들이 많았지만 결벽증은 정신적 불안을 나타내서 대체로 드러내지 않는데 민석은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지영이와 같이 방을 쓰게 될 텐데 해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김지영보다는 내가 더 큰일이지. 왜 우강희가 조용하지?’

분명 지영이 한주를 껴안는 모습을 보았을 텐데 우강희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 * *

김지영은 정리된 방을 둘러보았다. 이미 같이 지낼 룸메이트의 짐이 방 한쪽에 놓여 있었다. 이제까지 한주를 제외하고는 타인과 지내본 적이 없어서 타인의 흔적에 얼굴이 굳어졌었다.

6교시가 끝났다는 멜로디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찾아오겠다며 한주에게서 톡이 왔다. 지영은 창밖을 보며 하나둘 기숙사로 들어오는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입학식 때 쓰러져 눈을 떠 보니 병원이었다. 그 후 엄마의 기뻐하는 얼굴과 함께 알파로 발현했다는 말을 들었다.

왜 축하하지? 싫은데.

뒤늦게 발현하는 경우가 있다지만 지영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베타라 생각했고, 그렇게 살 거라고 믿었다. 남자로 자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는 사실 여자야, 하고 통보받은 것처럼 충격적이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변했다. 그 끔찍한 기분을 어떻게 기뻐해야 할까.

밤마다 성장통으로 다리에 경련이 나고 열이 났다. 관절 마디마디가 아팠고,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끙끙대며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들 때가 많았다. 빠른 성장에 적응하기 위해 고통을 참으며 재활을 했고, 페로몬 제어를 위해 타인의 페로몬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구역질이 나는 일이었다.

페로몬이 그렇게 거부감이 들고 역한 것임을 처음으로 알았다. 부모의 페로몬에조차 거부감이 들어 한동안 그들의 면회도 거부해야 했다.

밤마다 무릎을 부여잡고 통증에 떨며 지영은 한주를 만나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날이 올까 봐 무서웠다. 병원에는 뒤늦게 발현해 입원한 환자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의 면회 온 친구들 반응을 보게 되었다.

잘 알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자 친하다는 사람들조차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들 중에는 발현된 모습에 더욱 호감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질투하며 멀어지는 사람이 더 많았다.

겁이 났다. 마음 한편에서는 기대감도 생겼다. 거울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있었다. 자신조차도 종종 놀랐다.

한주는 어떻게 느낄까.

무어라고 말할까.

이제 자신은 한주에게 지켜지지 않아도 되고 지켜 줄 수 있을 정도로 체격도, 키도 컸다.

언제 연락을 할까, 변한 목소리에 주저하다가 한주의 협박에 통화를 하게 되었다.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한주라면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기대를 안고 학교로 돌아오니 한주의 옆에는 이미 다른 알파가 붙어 있었다. 발현 전의 지영이 베타로서 알파에게 느낀 위압감을 알파가 되어서도 느꼈다.

아니, 자신과의 차이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너구나. 내 희망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영은 주먹의 힘을 풀며 돌아보았다.

한눈에 딱 봐도 베타였다. 빛을 피해 다닌 듯 하얀 피부가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더 하얗게 보이는 소년이 방으로 들어왔다.

재민석은 자기소개를 했다.

“앞으로 같이 방을 쓸 재민석이야. 페로몬에 민감하지 않으니까 방에서는 편하게 지내도 돼.”

빙긋 웃으며 소개하는 얼굴을 보며 지영은 악수를 청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난 김지영이야. 잘 지내보자.”

버석한 촉감이 손에 닿았다. 악수하면서 민석은 검은 장갑을 벗지 않았다. 예의가 아닌데도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구니 지영은 손을 놓으며 손바닥을 가볍게 바지에 문질렀다.

‘이 녀석, 뭐지?’

* * *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하는데 문이 열리며 마침 한주가 내리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얼굴을 보자 그제야 가슴에 답답하게 뭉친 것이 내려갔다.

지영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한주를 껴안았다. 키가 작았을 때는 한주의 품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는 한주가 저의 품에 쏙 들어왔다. 품에 쏙 들어오니 어쩐지 소유했다는 기분이 들어 가슴이 간질거렸다.

지영은 한주의 머리카락에 뺨을 문질렀다.

“김지영?”

“좋다.”

두 달 전과는 달라졌다.

알파가 되어 신체가 변하기도 했지만 타인이 지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지나가는 강아지 귀여워하듯 대했지만 이제는 거리를 두며 호감을 표했고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한 인격체로서 대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렇게 알파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야, 떨어져!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야!”

한주는 지영을 밀어내 떨어뜨렸다. 답답했는지 한주의 뺨에 열기가 남았다.

“방에서 기다리라니까.”

“룸메가 와서 인사하고 나왔어. 슬슬 너도 올 때이고.”

“아, 재민석이 들어왔구나. 기숙사는 둘러봤어?”

“했는데, 다시 안내해 줘. 식사하기에는 조금 이르잖아.”

“하긴.”

한창 얘기하고 있는데 툭툭, 누군가 뒤에서 한주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뒤돌아보니 차원구와 황치운, 이성진, 그리고 제일 뒤에 우강희가 있었다.

원구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한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큰일 났다. 우강희가 다 보고 있어.”

그 말은 무시하고 한주는 그들에게로 몸을 틀었다. 지영을 만난 반가움에 소개를 잊었다.

“이름은 이미 알겠지만 이쪽은 내 오랜 친구 김지영.”

그리고 한 명 한 명 알파들을 소개했다. 한주가 이성진의 이름을 말하며 소개할 때 다른 이들보다 지영의 시선이 더 머무르는 것을 우강희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는 내 룸메이트인 우강희. 아까 봤지?”

“반갑다. 한주랑 같이 방 쓰기 힘들 텐데 대단하네.”

“같이 방 쓰고 싶다고 매달린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데?”

한주는 정정해 주었다. 지영이 발끈해서 따졌다.

“매달린 적 없어. 매달린 사람은 오히려 네 룸메지. 너 붙잡아 두려고 필사적으로 방 바꾸는 거 막았잖아.”

원구가 그 말을 놓칠 리 없었다.

“우리 우강희가 한주에게 침 발라 놓아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리 없지.”

놀리는 말에 한주는 얼굴이 빨개졌다.

“침 바르긴, 무슨 소리야! 가자, 기숙사 구경시켜 줄게.”

지영의 손목을 잡고 한주는 앞장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원구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어라, 재밌게 돌아가네.”

유독 한주의 귓불이 붉었다.

* * *

“좋아하는 거만 담지 말고 골고루 먹어. 왜 가지는 빼?”

“잔소리 들으니 진짜 너 맞다.”

음식을 골라 담는 한주의 옆에서 지영이 쫑알거리며 쫓아다녔다. 강희의 옆자리가 비어 앉았더니 그 옆으로 지영이 앉았다. 지영의 앞에는 남들의 두 배 정도의 양이 놓였다.

“먹는 건 괜찮아?”

“응, 몸이 변해서 갑자기 알레르기가 생기기도 한다던데 나는 괜찮아.”

“알레르기? 알파가?”

“알레르기는 면역력이 강해져서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이니까 발현 때 생길 수 있다고 들었어.”

“그렇구나.”

“당분간 안정될 때까지 벌꿀이나 향이 강한 물건을 피하라고 의사가 그랬어. 향수도 안 되고 샴푸도 향이 강한 것은 피하고 향신료가 강한 음식도 안 되고.”

“그런 것도 있어?”

처음 듣는 소리에 원구가 끼어들었다. 황치운이 설명해 주었다.

“발현 초에는 페로몬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보통은 어릴 때 발현해서 자연스럽게 적응하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고 부모님들이 케어해 주니 모르지.”

신기한 얘기에 한주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렇구나. 그럼 네 페로몬은 어떤 향기야? 진실의 페로몬? 그런 게 있다며. 고유의 향기가 있다고 들었는데.”

식사하던 강희의 어깨가 움찔 작게 튀었다. 원구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어라? 베타인 박한주 네가 진실의 페로몬을 어떻게 알아? 마치 맡아 본 사람 같네?”

“아, 아…… 인터넷에서 보았지.”

얼버무리며 한주는 시선을 피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지영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밤에 네 페로몬 맡게 해 줄 수 있어?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궁금해서.”

일부러 맡아 본 적 없다는 뜻으로 말에 쿠션을 넣었다.

말이 끝내기 무섭게 맞은편에 앉은 원구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뒷자리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동시에 났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식사를 멈추고 일제히 한주를 보았다. 콜록, 한주 뒤에 앉아 식사하던 학생이 사레가 들려 거칠게 기침했다.

“왜? 왜 그래?”

“한주야, 그런 말은.”

지영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빨개졌다.

이성진조차 한주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하아, 옆자리에 앉은 우강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주에게 경고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왜? 그냥 페로몬 좀 맡게 해 달라는 건데, ……다른 뜻이라도 있어?”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강희에게 설명을 요구했는데 원구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너 영화 안 봤어?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물어?”

“‘당신 페로몬을 맡고 싶어’라는 그 대사? 영화 속에 나왔던 대사는 알지만 그건 말 그대로 대사일 뿐이잖아. ……정말 그 말이 그런 뜻이라고?”

주위의 반응을 살피던 한주는 아무도 호응해 주지 않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원구는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며 자세히 설명했다.

“네 페로몬을 맡게 해 달라는 말은 같이 자자는 뜻이야. 진실의 페로몬을 맡을 일이 언제 있겠어? 단둘이 은밀하게 있을 때잖아.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당연히 응응응.”

“알파나 오메가에게는 작업 멘트야. 가벼운 원 나잇을 뜻하기도 하고.”

“……친구인데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이 빨개진 한주는 어색하게 음식을 뒤적였다. 그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는지 지영에게 조용히 속삭였지만 옆에 앉은 강희에게는 다 들렸다.

“나중에 몰래 알려 줘.”

지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옆자리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희는 한주의 옷깃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가까워져 안기다시피 했지만 기술 좋게 닿지는 않았다.

“뭐야?”

“식사를 못 하고 있잖아. 말 그만 시키고 식사해.”

“얜 원래 천천히 먹어.”

“그는 괜찮을지 몰라도 뒤의 사람은 네 말에 신경 쓰느라 못 먹고 있어.”

우강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쟁반을 들고 일제히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 * *

카페테리아로 자리를 옮겼지만 우강희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했다. 불편함을 넘어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진짜 재활만 했는데 이런 근육이 생겨? 와, 완전 사기 캐인데. 유전자 진짜 짜증 난다.”

“간지러워, 한주야. 그만 만져.”

“잠깐, 네가 복근이라니. 헛, 허벅지 왜 이리 단단해? 진짜 운동 안 한다고?”

“하, 한주야…….”

간지럽다고 말리는 지영의 목소리에 비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 * *

물론 김지영이 알파로 변한 모습은 이전의 삶에서 보았지만 그때는 외면하기 바빴다.

말랑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친구의 몸이 두 달 만에 단단하게 변하자 믿기지 않아 근육을 만졌다. 간지러움을 잘 타는 편은 아님에도 지영은 참을 수 없어 손길을 피했다. 한주는 “가만히 좀 있어 봐.”라면서 어깨동무를 하고 지영의 허벅지를 만졌다.

알파가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베타 한주에게 추행당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꽤 재밌는 볼거리라 주변의 알파들이 아닌 척 구경했다.

“복근, 진짜 부럽다.”

“하, 한주야…….”

배를 계속 만지자 벗어날 수 없어서 지영은 아예 몸을 비틀어 한주를 껴안았다. 몸을 붙이고 있으면 만지지 못하니까.

이성진이 벌떡 일어나 각각 어깨를 잡아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덩치가 커졌어도 아직 아직 덩치 큰 남자에게 위압감을 느끼는 지영이 몸을 움츠렸다.

“뭐, 뭐야?”

“……한동안 박한주 터치 금지.”

“뭐? 왜?”

“장난이야, 장난.”

한주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박한주, 왜 안 되는지 알잖아.”

“신경 써 줘서 고마운데 내 일이야.”

“……너 설마.”

성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테라스로 가 버렸다. 토라진 모양새였다.

“우리 성진이가 왜 저래?”

다들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는데 황치운도 일어나 따라갔다. 우강희는 미간을 좁히며 한주를 보더니 그들을 따라 일어섰다.

강희가 자리에서 멀어지자 원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숨 좀 쉬겠네. 우리 성진이까지 왜 저러냐. 박한주 완전 마성이네, 마성이야.”

“뭐?”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한주가 돌아보았다. 지영은 만지지 말라며 한주를 떨어뜨리려고 했으면서 그가 다른 곳을 보자 한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원구는 질린 표정으로 “혼잣말이야.”라고 말했다. 친구라지만 지영이 발현되기 전에 한주와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모습으로 충분히 그려졌다. 예전에는 예쁘장한 외모와 체구도 작아 귀염성이라도 있었겠지만 덩치가 커져 애교 부리니 어울리기는 하지만 닭살이 돋았다.

“너 어쩌려고 그러냐?”

한주와 우강희의 계약을 알기에 한 말이었다.

“내가 알아서 해.”

“뭔 수가 생긴 거야?”

한주는 우강희가 간 테라스를 보았다. 훤칠한 세 명의 알파가 테라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얘기 나누면서도 강희는 계속 한주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매서웠다. 한주가 ‘왜’라고 입 모양으로 물어보려는데 지영이 어깨를 흔들어 말을 걸었다.

“한주야, 고용진 좀 설득해 봐. 연락 끊었다고 세계수의 축복을 자기한테 달라고 그러잖아.”

얼굴에 들이밀어진 핸드폰 화면에 단톡방이 떠 있었다.

고용진은 게임 아이템을 지영에게 말로 강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한주도 고용진 편을 들며 아이템을 주라고 말했다.

게임 얘기로 넘어가는 두 사람의 수다를 들으며 원구는 힐끔 테라스를 확인했다. 입술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우강희에게 득인지 실인지 모를 이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

* * *

“이성진, 행동 똑바로 해.”

“……왜?”

모르는 체하는 이성진를 보며 우강희는 혀를 찼다. 초조한 사람은 자신인데 이성진 역시 그렇게 보였다.

“네 행동. 네가 왜 나서?”

“……김지영이 박한주를 만질수록 너한테 유리하잖아. 박한주를 도와주었을 뿐이야.”

“박한주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우강희도 잘 참고 있잖아. 시간을 주겠다고 하면서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면 미움받을 수 있지.”

우강희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황치운이 말했다. 못마땅해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우강희는 한주를 보았다.

대화하는데 얼굴을 귀 가까이 가져가 굳이 속삭일 필요 없다. 대화할 때마다 박한주의 어깨를 안거나 손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못마땅해 그가 혀를 차자 멀리 있던 지영이 살짝 몸을 떨더니 주변을 살폈다.

같이 방을 쓰니 분명 제게 유리한데 한주의 주변에 쓸데없이 들러붙는 사람이 많아서 초조해진다. 제 사람이 될 걸 알면서도.

“이성진, 박한주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 네 아버지가 주치의였고.”

“……맞아.”

의외의 말에 황치운이 놀랐다.

“왜 말 안 했어?”

우강희도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이성진에게만 에너지바 다섯 개를 줄 때부터, 아니, 그 전에 한주와 가까워지기 전부터 느꼈다. 가끔 시선을 흘리다가 한주를 보면, 이성진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박한주는 날 몰라.”

성진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지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성진, 그 사람이 한주를 만나지 않도록 해.”

“……아버지의 선택이야. 박한주가 싫으면 안 만나겠지.”

“한주가 상처받아도 괜찮다고?”

이성진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이 좋아 보이지만 책임지지 못하는 인정을 흘려서 흔들잖아. 그 사람은…… 한주를 연구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아. 너도 알잖아?”

아무리 시야 안에 있어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다. 한주에게로 향하기 전에 우강희는 경고했다.

“내가 나서기 전에 네 선에서 막아.”

* * *

“내 방보다 넓네.”

지영은 한주와 우강희가 사는 방을 둘러보았다.

저녁을 먹고 밤새 얘기하기로 의기투합했지만 한주든 지영이든 룸메가 있어 어느 방에서 같이 잘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주는 재민석이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라고 아직 말하지 않았고 우강희는 이런 일로 방을 양보해 줄 사람이 아니어서 결국 양호실에서 하룻밤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충전기와 베개를 챙겨야 한다는 한주의 말에 지영이 방으로 따라왔다.

어떻게 우강희와 지내는지 보고 싶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육포 있는데 먹을까?”

“지금은 이빨이 약해져서 딱딱한 음식은 못 먹어.”

“와, 언제까지 그래야 한대? 진짜 불편하겠다.”

“발현하고 1년간은 조심해야 하는데 최소 6개월간은 각별하게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구나. 힘들겠네.”

간식은 챙기지 않기로 하고 한주는 베개를 안았다. 한동안 우강희를 피해서 밖에서 잤기 때문에 베개를 옆구리에 끼는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우강희, 내일 아침에 보자.”

“잠깐.”

지영을 따라 나가려는데 우강희가 한주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등 뒤에서 닫힌 문소리에 지영이 깜짝 놀라며 두드렸다.

“한주야?”

“잠깐 밖에서 기다려.”

한주는 우강희의 얼굴을 보며 지영에게 말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한주가 볼 수 있게 화면을 돌렸다. 그들이 만든 계약서가 떠 있었다. 그의 손이 외박 금지와 스킨십 금지 조항을 가리켰다.

“설마 잊지 않았겠지?”

“어, 잊지 않았어.”

우강희의 눈이 한주를 살피며 가늘어졌다.

“이번에는 다 할 거야. 네가 김지영과 했던 그대로.”

“그래.”

경고해도 한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싫어하며 강한 반응을 보이더니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나올까, 당황한 사람은 우강희였다.

“계약서 잊지 않았어. 똑같이 너에게 해 줘야 하는 것도 알고. 그래서, 가지 못하게 막을 거야?”

“너 무슨 생각으로…….”

이어지는 말에 우강희는 말이 막혔다.

“제대로 정산해 줄 테니까 내일까지 얌전히 기다려, 우강희.”

한주가 문을 열려고 잡아당겼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영의 걱정하는 얼굴이 보였는데 다시 쿵, 문이 닫혔다.

왼쪽 팔로 문을 누르며 강희는 한주와 어깨가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지 않았다.

“기대해도 돼?”

한층 낮아진 목소리. 열망을 품은 기대감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듣는 사람까지 떨리게 만드는 목소리에 한주는 문을 잡아당겼다.

“기다려.”

재빨리 한주는 방을 빠져나갔다.

베개를 껴안은 지영이 불안해하며 아직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

“한주야, 괜찮아? 그가 괴롭혔어?”

“무슨 소리야. 우강희는 그런 사람 아니야. 가자.”

성큼 먼저 걷는 한주를 따라가며 지영은 불안함에 뒤를 돌아보았다. 우강희는 따라오지 않았지만 방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기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려서 지영은 한주의 손목을 붙잡았다.

* * *

양호실은 비어 있었다.

당직 근무는 없지만 급한 환자가 생기면 5분 이내에 달려올 수 있도록 의사는 교직원 숙소에서 지낸다. 한주는 익숙하게 양호실로 들어가 커튼을 치고 침상에 자리를 잡았다. 양호실은 항시 불을 켜 두어야 하지만 침상에 암막 커튼이 한 겹 더 있어 제법 어둑해졌다.

김지영이 옆 침상에 앉아 휴대폰 충전기를 콘센트에 꼈다. 지그시 보다가 한주가 입을 열었다.

“벗어 봐.”

덜컥, 충전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한주는 새빨개진 얼굴을 심드렁히 보았다.

“뭐, 뭐? 버, 벗으라니?”

“근육 좀 제대로 보게 벗어 보라고.”

“어…… 또 만지게?”

금방이라도 겁탈당할 사람처럼 지영이 가슴을 가리며 옷을 움켜잡았다.

지영과 웃으며 얘기했지만 머리 한구석에는 내일 벌어질 일이 자꾸 떠올랐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점점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해졌다.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가볍게 머리를 털며 다시 말했다.

“보기만 할게. 나는 사부와 그렇게 운동해도 밋밋한데 간단히 근육이 생겼잖아. 어서 벗어 봐. 제대로 좀 보자.”

아랫도리를 서로 오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팬티 입고 같이 자던 사이였다. 그런데도 지영은 부끄러워하며 한주 눈치를 보다가 첫날밤 신부처럼 조심스럽게 윗옷을 끌어 올려 벗었다. 눈을 조신하게 내리깔며 벗은 윗옷을 조물거렸다.

“허.”

과하지 않은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상체에 잡혀 있었다. 식스팩이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힘을 주면 금방 굴곡이 생겨 움푹 팼다.

지방 한 점 용납하지 않은 몸은 건강한 육체로 탈바꿈했다.

지영은 뚫어져라 보는 한주의 시선에 쭈뼛대며 말했다.

“재활 치료하면서 운동이 되었는지 근육이 금방 잡혔어. 일부러 근육 만들려고 운동한 건 아니고…….”

“와, 뒤돌아봐. 등 보자, 등.”

“어? 어.”

뒤돌아 앉자 척추를 따라 기립근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한주가 얼굴을 가까이 하자 호흡이 지영의 등에 닿았는지 근육이 움찔거렸다.

“전문적으로 운동한 수준인데?”

“아니야. 발현 직후에 운동을 과하게 하면 몸에 좋지 않다고, 병원에서는 가벼운 산책만 권했어. 병원 다니며 재활 운동한 게 다야.”

“와, 씨. 알파 완전 사기 캐네.”

지영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 동작에 근육이 아름답게 움직였다.

부러움에 한주는 짝 소리 나게 손바닥으로 등을 내리쳤다. 읏, 지영은 신음을 흘렸다.

“뭘 쫄고 그래. 부러워서 그런 건데 괜히 움츠러들지 마. 예전에야 힘이 약하고 체구도 작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웬만한 놈들은 네가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쫄아서 가 버릴걸.”

한주의 손이 지영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오래간만에 머리카락을 만져 주자 지영은 반가워 배시시 웃었다.

“자자.”

“한주야.”

“으악!”

침대에 누우려고 반대편 침대로 가려는데 지영이 등 뒤에서 한주를 안아 왔다.

예전이라면 여려 가벼운 무게였지만 이제는 근육이 단단한 건장한 남자였다. 묵직한 무게가 덮치듯이 누르자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야! 네 무게를 생각해! 예전 몸이 아니야!”

팔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 했지만 허리를 안은 지영의 팔은 풀리지 않았다. 가슴을 가로지르며 안은 팔조차 억세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단단했다. 한눈에 봐도 성인 남자의 팔이었다.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한주의 얼굴 옆으로 쏟아졌다. 더운 숨이 잘게 떨리며 어깨에 뿌려졌다.

“무서웠어.”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한주는 지영에게 깔려 덤덤하게 물었다.

“무서울 것이 뭐가 있다고?”

“갑자기 변해서, 네가 예전처럼 날 대해 주지 않을까 봐. 멀어질까 봐…… 무서웠어.”

“날 뭐로 보고.”

한주는 가볍게 말했지만 미안함은 있었다. 예전에는 질투심에 생각 없는 행동을 했다. 그때는 알파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꽁꽁 묶여서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게. 넌 그럴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몸이 변해서 마음이 약해졌나 봐.”

뒷머리에 지영의 이마가 콩 닿았다. 뒷덜미로 숨이 닿아 한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숨이 닿는 목은 가끔 강희가 성질날 때 물던 곳이어서 갑자기 의식되기 시작했다.

“고마워.”

“알았으니까 그만 내려와. 네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지? 이 돼지야.”

“돼지라니, 너무해!”

밀어냈지만 지영이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때 한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고용진에게서 온 화상 전화에 잘됐다 싶어 통화를 눌렀다.

- 야! 전화한다면서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을성 없는 고용진이 통화가 되자마자 다다다 쏘아붙이다가 말을 뚝 끊었다. 한주는 일어나 앉았지만 지영은 여전히 껌딱지처럼 등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용진? 신호 끊겼나?”

화면은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이 이상한가 들여다보는데 고용진이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인상을 썼다.

- 너희들, 벗고 뭐 하는 거냐? 이거 화면 녹화해서 인터넷에 올리면 조회 수 대박 나오겠다.

고용진에게 비치는 작은 화면을 보니 지영이 윗옷을 벗고 한주를 꼭 껴안고 있었다. 게다가 뒤로는 침대가 보인다. 아무 생각 없는 한주에게도 야릇하게 보이는 화면이었다.

“안 돼! 김지영, 어서 옷 입어!”

“싫어, 한주가 보여 달라고 해서 벗은 건데.”

- 둘이 벌써 진도를 그렇게 나갔구나. 그래. 내가 방해하면 안 되지. 전화 끊어 줄게.

“아니야, 고용진, 장난치지 마!”

지영은 웃음을 터뜨렸고 화면 속의 고용진도 웃었다.

* * *

고용진과 떠들고는 통화가 끝나자 자정이 넘었다. 내일도 수업이 있었다.

“한주야.”

“어.”

눈꺼풀이 무거워 한주는 자기 침대에 누워 눈을 끔뻑거렸다. 옆 침대에 누운 지영이 옆으로 누워 바라보았다.

“나 이상하지 않아? 갑자기 커져서…… 징그럽지 않아?”

내일 포경 수술 해야 하는 사람처럼 지영의 표정이 침울했다. 괜찮다는 말을 몇 번 했는데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지 자주 눈치를 보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신기하긴 해. 갑자기 어른이 된 너를 보는 기분이라…… 하지만 너는 너니까. 우린 여전히 친구잖아.”

“응. ……나, 같이 자도 돼? 네 침대에서.”

둘은 침대를 따로 쓰고 있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한주는 거절했다.

“안 돼.”

“왜?”

“좁아. 덩치도 다 컸는데 징그러워.”

침대가 좁은 이유도 있지만 우강희가 생각나서였다. 계약서를 내밀며 어필하던 모습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필사적으로 보여 귀여웠다.

징그럽다는 말에 지영의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방금까지는 괜찮다며! 어떻게 변해도 나라고 했으면서 징그럽다니! 나 친구라며!”

“양심이 있으면 너도 생각을 해 봐. 이 좁은 곳에서 껴안고 자자고? 넌 고용진과 껴안고 자고 싶어?”

“……아니.”

“그것 봐.”

“그래도 고용진과 넌 다른데…….”

“다를 게 뭐가 있어.”

“그럼, 내 페로몬 맡게 해 줄 테니 같이 자자. 궁금하다며.”

“음……. 궁금하긴 하지만 싫어. 졸려.”

“쳇.”

더는 들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한주는 눈을 감았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몸이 가라앉으며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한주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 * *

“박한주.”

규칙적으로 변한 숨소리에 지영은 다시 이름을 불렀다. 깨우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입 안에 그 이름을 굴리는 것뿐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몇 번씩 한주의 이름을 불렀었다.

“한주야.”

두 달 만에 보았지만 한주는 그대로였다. 시야가 높아 내려다봐야 해서 어색했지만 곧 적응했다.

이제는 안기는 것이 아니라 안아 줄 수 있었다.

한주를 보고 있으면 어깨가 근지러워졌다. 오금이 저릿해지며 누군가 등을 어루만지듯이 몸이 움찔거렸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열이 몸에 고였다.

알파가 되어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변화라고 생각하면서 지영은 다시 한주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흠칫 놀랐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한이 들듯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팔을 내려다보니 닭살이 돋아 있었다.

지영은 무심코 양호실 문을 보았다. 커튼에 가려 문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귀신?’

무서워져서 한주의 침대로 건너갔다. 잠들면 잘 깨지 못하는 한주이기에 커다래진 몸을 웅크리며 옆에 붙이고 누웠다.

소름이 더 강해졌지만 지영은 한주를 더욱 껴안았다. 안고 있어도 몸이 미약하게 떨렸지만 기분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잘 자.”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그때, 양호실 문밖에는 우강희가 서 있었다.

* * *

아침이 괴로운 한주는 방에 돌아와 눈도 뜨지 못하고 욕실로 향했다. 그런 한주를 보는 우강희의 눈썹이 사선을 그리며 갈매기가 되었다.

“왜?”

욕실 문에 기대선 강희의 시선을 느끼고 한주는 바지를 내리려다 허리 고무줄을 움켜잡았다.

“좀 나가지?”

“일어날 시간 아니잖아.”

“양호실에서 잤는데 똑같은 시간에 일어날 수는 없잖아. 지영이가 몸이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아침을 먹여야지…….”

졸음이 가시지 않아 말이 늘어졌다. 우강희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잠자느라 아침 식사는 건너뛸 정도로 아침잠을 사수하더니, 친구 식사를 챙긴다며 일찍 일어났다고?”

그제야 강희의 불만이 무엇인지 한주는 눈치챘다.

“좀 나가. 급해. 못 참겠어.”

버티는 그를 밀어 욕실 문을 닫았다. 그는 한주가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주는 빠르게 씻은 뒤 우강희를 옆에 달고 지영에게 향했다. 평소보다 빠릿빠릿하고 서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강희는 부글거리며 속이 끓어올랐다.

처음으로 ‘차별’이란 단어의 뜻을 경험하고 있었다.

“김지영, 학교 가자.”

방문을 노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렸다. 지영은 교복을 입었는데 등교 첫날이라서인지 얼굴에 불편함이 있었다.

“저, 한주야.”

“아침에 사람들 몰려서 붐비니까 어서 가야 해.”

지영의 뒤에서 재민석이 나오며 말했다. 민석은 한주를 보지도 않고 우강희에게 눈인사만 했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민석을 보며 지영은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몸을 움찔거렸다.

한주는 어깨를 툭 치며 민석과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가자. 아침 먹어야지.”

“민석이도 같이 가도 돼? 너와 같은 반이라고 해서 그러자고 하기는 했는데.”

“상관없어. 우강희도 신경 안 쓸걸.”

예민하던 우강희가 한주에게 바운더리를 허락했기에 타인에게도 어느 정도 허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영의 시선을 받으며 우강희도 그들과 걸었다.

“마음대로 해.”

등교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기묘한 조합에 걸음을 멈추었다.

* * *

차원구, 황치운, 이성진은 점심시간이 되자 늘어난 인원을 알아차렸다. 원구는 상황이 못마땅해 눈을 가늘게 떴다.

한주와 지영이 앞서 걸었고, 그 옆으로 재민석이 있었다. 간혹 민석이 지영에게 말을 걸었고, 지영은 한주와 얘기하다가 민석의 의견을 물어보며 대화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민석이 한주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기에 그들의 대화는 셋이 될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원구는 뒤따르며 지켜보았다.

“막 들어온 순진한 녀석을 물었네. 친구라면서 한주를 괴롭혔던 당사자라는 건 모르나?”

“한주가 말하지 않았어.”

우강희의 답에 원구의 얼굴이 기괴한 것을 보듯 일그러졌다.

대부분의 알파는 적의에 민감했다. 적이라 규정지으면 상대에게 냉정해져서 철저히 배제하며 주위에 오지도 못하게 한다. 그의 친구, 가족, 자기 사람이라 생각한 이들에게 적의를 나타내는 자도 포함되었다.

그러하기에 자신을 괴롭힌 사람과 친구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놔두는 선택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눈치 없나?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지금 대놓고 박한주를 무시하고 있잖아. 저런데도 룸메이트라고 같이 다닌다고?”

“아는데 룸메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겠지.”

“진짜 이해 안 된다.”

옆에서 듣고 있던 황치운이 끼어들었다.

“이해 안 되는 건 저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우강희, 너야.”

“난 재민석이 싫어. 당사자가 봐준다 해도 나와는 별개지. 나까지 저 꼴을 봐줄 생각은 없어.”

민석을 싫어했던 원구는 앞으로의 행동을 예고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같이 점심 먹는 내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고 날카롭게 말을 해 결국 재민석이 식사 중간에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원구는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듯 한주를 보았고 결국 한마디 들었다.

“애냐? 뭐 그리 까칠하게 굴어?”

“너는 호구냐? 뭐가 좋다고 끼워 줘? 그리고 김지영, 너는 한주와 오랜 친구라며? 너도 그러면 안 되지. 상황 파악 못 해?”

지영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한주를 믿고 있었다.

“한주가 괜찮다고 했어. 불편했으면 한주도 말했을 거고.”

“맞아.”

한주도 동의했다. 천하태평 한 표정은 진심이어서 원구의 속을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저 녀석이 너 개무시하잖아.”

“한주라면 괜찮아. 이 녀석 세.”

“세 봤자 베타야.”

“한주는 달라!”

지영은 발끈해서 그동안 있었던 한주의 무용담을 늘어놓았지만 원구의 ‘베타는 알파에게 이길 수 없다.’는 막무가내 논리에 결국은 입을 닫아 버렸다.

떼쓰는 초딩은 이길 수 없다.

한주는 속이 답답해져 가슴을 치는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키 차이가 있어 자세가 불편해졌는데 지영은 기꺼이 고개를 숙여 머리를 내려 주었다.

주인에게 칭찬받아 좋아하는 강아지 같아 귀여웠다.

오랜만에 친구 머리를 쓰다듬다가 한주는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뒤로 물렸다.

전날 밤, 우강희는 한주에게 일부러 계약서까지 보여 주며 경고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어 기다리라고 했고 그도 잘 따라 주었다. 따라 주기보다 참으며 때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지만 눈에 열망이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데려가고 싶지만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개처럼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다.

알면서 한주도 일부러 상황을 유도한 면도 있었다. 우강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한주도 단둘이 남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우강희는 핸드폰을 보더니 그들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한주는 힐끔 그를 확인하고 지영과 교실로 향했다.

우강희는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무심한 표정으로 들었다.

- 그러니까 이번 주말에는 꼭 본가로 와. 너 주말에도 서울 왔으면서 들르지 않았잖아. 무뚝뚝한 성격은 알지만 엄마는 진짜 서운해.

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경고가 들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는 집에서 모임이 있거나 파티가 있을 때였다.

“…….”

대답이 없자 애가 닳은 어머니는 애원했다.

- 강희야, 꼭 와야 해. 집안 어르신들이 오는데 네가 빠지면 엄마 체면이 뭐가 되겠어. 넌 그이의 뒤를 이을 자식이야.

“우천희가 있습니다.”

- 그이가 잘도 천희에게 주겠다. 천희는 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어떻게 그런 애에게 그이의 뒤를 이으라고 하겠어? 그저 장자를 선호했으면 어르신들이 날 집안에 들이지 않았겠지. 안 그래? 네가 있어서 엄마가 그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어.

그녀는 낮게 코웃음 치며 자신만만해했다.

- 강희야, 와야 해, 반드시.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그는 집안 어른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정말 그가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확정되었다면 말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피곤함이 몰려와 느른하게 숨을 쉬었다.

그 자리에 없는 한주의 몸짓을 떠올렸다. 무방비하게 친구를 만지고 그 몸을 아무렇지 않게 내주었다. 긴장감도 없고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한주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니 머릿속이 노곤해졌다.

계약은 잊지 않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가슴이 울렁이며 기대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적신 우강희는 걸음을 옮겼다.

- 우강희!

인내심이 닳은 어머니의 목소리에 조건을 제시했다.

“가겠습니다. 다만 혼자는 아닐 겁니다.”

- 네가 오기만 하면 상관없어. 꼭 와야 한다. 기다릴게.

“네.”

만족했는지 전화는 끊겼다.

어느 날 우천희의 어머니가 만나는 애인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왔다.

알파와 오메가의 가정에서 배우자 이외의 애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들 알지만 눈감아 주고 쉬쉬해 주어 터부도 되지 않았지만 유명한 정치인의 아내와 연예인의 문란한 사생활 사진이 터져서 무마할 수 없었다.

온라인의 기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집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혼은 빠르게 이루어졌고 우상진은 아내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남자가 되었다.

속내가 너무 뻔히 보이는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강희도 이해는 되었다.

속내가 다 보이기에 우상진은 어머니 송지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그의 손안에서만 움직이는 병졸은 편리한 수에 불과하니 우상진에게 올 리스크는 적다.

그리고 우강희라는 알파 아들도 한 명 늘었으니 적당히 대외적으로 보이는 화목한 가정을 연출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입장을 알면서도 상황을 충분히 즐겼고 결론적으로 보면 궁합이 좋은 부부였다.

하지만 우천희는 입지가 좁아졌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우강희라는 혼외자가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집안사람들이 다 환영하는, 우수한 알파가 될 아이.

우천희는 어렸지만 집안 분위기로 자신의 위치를 간파했고 자신이 버티려면 우강희를 쫓아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우강희는 집안일에 끼어들 생각도 없는데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하고 주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우상진에게 원하는 것은 없다. 바라지도 않고 우상진의 뒤를 이를 생각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에서 나갈 생각이어서 그것을 딜로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알면서 우상진은 아직 공표하지 않았다.

우강희의 마음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천희를 키우기 위함인지는 그 속내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우상진의 속을 모르는 어머니나 집안사람들, 우천희가 귀찮게 굴지 않으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하루의 시간은 정말 짧았다.

한주는 저녁 식사 전까지 지영에게 수업 진도를 알려 준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있었다. 우강희는 승마를 하겠다며 따라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한 후에는 카페테리아에서 놀았다. 한주는 도통 지영이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마음을 결정했지만 심란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망설여졌다.

시간이 지나며 슬슬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면서 지영이도 피곤한지 자주 하품을 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9시가 되자 우강희는 한주를 데리러 왔다.

풀어 놓았던 양 떼를 집으로 몰고 가려는 목동처럼 팔짱을 끼고 옆에 서서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기다릴까?”

“한주야, 너 우강희랑 할 일이 있었어? 말하지. 그럼 나도 이만 방으로 돌아가 볼게. 좀 피곤해서…….”

지영은 수업이 끝난 후 도서실과 카페테리아에 계속 앉아 있었다. 아직 여물지 못한 관절이 아프고 오래간만에 장시간 앉아 있었더니 근육통이 올라왔다. 우강희와 한주가 단둘이 있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이제는 눕고 싶었다.

반가워하는 지영의 표정에 한주는 한숨을 쉬며 반성했다. 자기 일이 급해 친구를 배려하지 못했다.

“가자.”

느릿하게 걸음을 걸었으나 카페테리아에서 방까지는 엘리베이터 한 번만 타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띠릭, 전자음이 들리며 방문이 잠겼다. 불편한 긴장감을 느끼며 한주는 돌아서서 우강희를 보았다. 그는 평온했지만 조급해 보이기도 했다. 눈동자가 한주만을 보고 있었지만 기대감에 반짝였다.

‘어쩌다 이 녀석이랑 엮였을까.’

“우선 좀 씻고 올게.”

“약속했잖아.”

도망치는 줄 알고 강희는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약속은 지키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마음먹었지만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긴장되어 심장이 난리가 났다. 잠시 심장을 가라앉힐 시간을 가지러 한주는 욕실로 들어갔다.

* * *

‘같은 남자잖아. 지영이와도 자주 안았고 사부와 몸을 비비며 대련했지. 이게 뭐 별거라고.’

씻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주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성큼 그가 다가와 두 사람의 간격이 손을 뻗으면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각오했는데 뒤로 물러나고 싶어 무릎이 움찔 튀었다.

강희의 눈이 한주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알았어. 계약은 잊지 않았으니까, 하자.”

“손잡기 45분, 앞에서 허리 껴안기 65분, 등 뒤에서 몸 붙이고 32분, 등 뒤에서 껴안기 19분, 머리 만지기 7분. 목에 얼굴 붙이기 3분이야.”

“그 정도는 아니야!”

당황해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냥 손 몇 번 만져지고 안기는 정도겠거니 생각했지만 우강희는 집요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네가 김지영을 만진 것은 제외한 거야. 김지영의 복근을 보자며 배를 더듬었고 허벅지 만지고 가슴도 만지고.”

“그리고? 또 있어?”

“한 달 동안은 외박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양호실에서 외박했고. 그리고 둘이 딱 붙어서 잤지.”

“딱 붙어서 잤다니……. 너, 어떻게 알고 있어? 왔었어?”

“왜? 비밀이었어?”

“왜 그렇게 삐딱하게 말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우강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때 일을 떠올리자 턱에 꾹 힘이 들어갔다. 그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약속했으니 그는 두 사람의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정까지 다스리지는 못했다.

지영은 그의 상대는 되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한주를 마음껏 껴안고 만지는 모습을 보니 인내심이 바닥을 찍었다. 보고 있으면 짜증 나고 눈앞에 없으면 단둘이서 무엇을 할까 더 신경 쓰였다.

경고할 겸 양호실을 갔더니 그의 기운에 지영이 겁을 먹어 오히려 한주의 침대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널 만질 거야. 그리고 김지영에게 한 것처럼 너도 날 만져.”

“야, 좀 진정해.”

“관리 팀에 CCTV 보내 달라고 할까? 네 부분만 편집해 달라고 하면 세 시간 이내에 볼 수 있어. 영상으로 보면 시간이 더 나오겠지.”

우강희의 집요함에 한주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야,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우강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너한테만 그래.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한 번쯤은 미쳐야지.”

“내가 그럴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왜…….”

웃으며 얼버무리고 싶었는데 그는 진지하기만 했다. 꿀렁 움직이는 목젖의 움직임을 보고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한주의 얼굴을 바라보다 뺨을 훑으며 내려가 목으로 흘러내려 갔다. 그 시선의 움직임에 몸이 움찔 떨렸다. 아무리 운동해도 근육이 잘 붙지 않았고 아직 성장기라서 별 볼 일 없는 몸인데 시선은 가슴을 지나 밑으로 내려갔다.

한주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도망치려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우강희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는지 빠르게 한주의 팔을 붙잡았다.

“손잡기 45분 있었어.”

저의 행동이 합리적임을 계약으로 핑계 댄다.

저항하지 않으니 팔을 꼭 쥐었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손목으로 흘러내려 곧 손바닥에 우강희의 손가락이 닿았다. 부드럽게 마른 피부가 오목한 곳에 닿았다.

그의 숨이 조심스러워졌고, 그것을 한주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죽였다. 손끝으로 만져 오는 움직임에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허리 껴안기도 있어.”

우강희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저 원하는 대로 핑계를 붙이고 있지만 한주도 그를 그대로 두었다. 그가 허리를 껴안았다. 얼굴이 그의 어깨에 닿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

저도 모르게 나온 소리에 한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껴안느라 상체가 겹쳐지며 하체가 아슬하게 닿을 듯 말 듯 부딪쳤다.

껴안는다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는데 쿵쾅거리는 빠른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의 마음을 보여 주듯이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다른 변화도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도 몸이 굳어 가만히 있었는데 하체가 조금씩 눌리기 시작했다.

오른 다리는 뒤로 뻗으며 안긴 자세 그대로 거리를 벌리려 했는데 우강희가 귀신같이 눈치를 챘다. 한주가 멀어지려 하자 그는 몸을 숙여 한주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등을 꽉 껴안았다.

“우강희…….”

아직 여물지 않은 가느다란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한주의 목덜미를 향해 얼굴을 숙였다. 종일 밖에 있다가 들어와 옅은 땀과 먼지의 냄새가 났다. 마른 햇빛 냄새에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알파와 오메가와는 다른, 불순물이 없는 순결한 냄새가 폐부를 채웠다.

“좋아.”

“흐읏, 잠깐만.”

바둥거리며 그의 어깨를 짚은 손이 구깃구깃하게 옷을 잡았다.

좀 더 닿고 싶다.

머릿속이 작은 자극에도 형체를 바꿀 상온의 버터처럼 녹진하게 풀어졌다.

한주의 등을 감싸고 있던 손 하나가 등줄기를 훑으며 허리를 껴안았다. 팔에 무게가 실리며 바르작거리는 몸이 밀착되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에 한주는 솜털이 바짝 섰다. 허리를 안으며 끌어당기는 바람에 하체에 그의 것이 닿았다. 비비거나 다른 동작을 하며 자극했다면 벗어났을 텐데 부피를 키운 것이 묵직하게 눌러 올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듯이.

어색해서 잡은 옷 아래의 피부가 뜨거웠다. 거세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한주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저 긴장이 옮았다고 이유를 찾지만 얄팍한 핑계였다.

우강희는 모르지만 한주에게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 은인이었다. 고백을 하며 서슴없이 보여 주는 행동과 질투, 한결같은 눈빛이 서서히 한주를 흔들었다.

한주는 우강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미하게 붉어진 뺨, 조심스러워진 숨소리, 빠르게 뛰는 심장.

그의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다른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단지 호기심인지, 우강희의 푸시에 그저 감정이 동조한 것뿐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키스할래?”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야 한다.

* * *

우강희를 알게 되고 대화를 하다 보니 ‘제법 괜찮은 녀석이네’에서 ‘좀 더 오래가고 싶은 친구’로 바뀌었다. 그때 고백을 받았다.

종종 그가 질투를 보였지만 어차피 받아 줄 마음은 없었으니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계약대로 놔두었는데 어느새 ‘얘라면 괜찮지 않을까’로 생각이 변해 있었다.

이미 우강희에게 빼앗긴 첫 키스에 의미를 두는 성격도 아니지만 옆에서 떠나지를 않으며 계속 좋아한다고 마음을 어필하니 익숙해져 버렸다.

마음을 제일 알기 쉬운 방법은 스킨십이라고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운지, 상대를 만지고 싶은지, 상대방과의 스킨십이 기분 좋은지.

‘두 번째는 제대로 해 보자. 그럼 내 감정을 확실히 알겠지.’

한번 실험해 보고 싶었다.

키스하면 자신도 떨릴까.

스킨십을 모두 포함해서 키스와 맞바꾸자고 말하면 우강희는 받아들일 테니까 한주에게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키스할래?”

예상한 대로 우강희는 당황했다.

“뭐?”

“그냥 매일 안고 손잡고 5분씩 하기보다 한 방에 정산하자.”

곧장 대답할 줄 알았던 그는 들뜬 낯을 가라앉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손잡기, 안기, 껴안기, 네가 김지영에게 했던 행동들을 키스 한 번으로 대신하겠다고?”

“그래.”

“왜? 나와 닿는 것도 싫어하잖아.”

“싫지 않아. 아, 아니. 그냥 닿는 것. 의도적인 스킨십은 별도고.”

“키스가 더 거부감이 들 텐데 왜?”

‘왜 이리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그냥 해 버리면 되는데.’

조금 기분이 삐뚤어졌다.

키스하자고 말하면 좋다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여유 있게 생각하고 계산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얘 정말 날 좋아하는 거 맞아?’

입술을 삐죽거리며 게슴츠레하게 우강희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해야 되는 거 한 방에 끝내면 좋잖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강하게 나서자 그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좋아. 단, 키스에 네 외박은 포함되지 않아.”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포함해야지!”

“하룻밤을 키스 한 번으로 계산하자고? 다른 스킨십도 다 포함인데? 그런 식으로는 안 해. 네 외박은 주말에 우리 집에 방문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어때?”

“너네 집은 왜?”

“자고 가라는 말이 아니야. 초대야. 한동안 본가에 안 갔더니 집에서 오라고 성화를 부려서. 네가 같이 가면 본가에서도 시간이 빨리 지나갈 테고.”

“왜 내가 너네 본가에…….”

순간 우천희가 떠올라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도 우강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집에서는 더하지 않을까.

아픈 강아지가 주인의 관심을 끌어 보고 싶어 더 끙끙거리며 소리를 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 한주의 양심을 건드리는 걸 알지만 폭력은 허상이 아닌 진실이었다.

한주는 한숨을 거하게 쉬며 자기 머리를 헝클었다.

“싫어?”

“알았어. 외박은 빼고 다른 스킨십만 키스로 퉁치자.”

“좋아.”

“이리 와, 하자.”

우강희의 팔을 잡고 한 발짝 다가갔다.

‘이거 꼭 내가 키스하자고 매달리는 모습 같지 않나?’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곧 지워 버리고 뒤꿈치를 들어 고개를 올렸다. 그러나 한주의 입술은 그의 손에 막혔다.

“키스라면 어디까지?”

“……뭐?”

한주의 입술 움직임에 손바닥이 간지러워 우강희는 입 안에 고인 군침을 꿀꺽 삼켰다. 심장이 뛰며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억눌렀다. 성급히 덤벼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덮고 있는 제 손등 위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입술만 닿는 버드 키스?”

한주의 눈이 커지고 눈동자가 떨렸다.

당황하는 모습이 즐거웠다. 저 때문에 한주의 감정이 흔들린다.

혀를 내밀어 손등에 살짝 닿았다 떨어뜨렸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게 할짝, 젖은 소리를 일부러 냈다.

“혀까지 허용하는 프렌치 키스.”

숨을 삼키는 긴장감이 입술을 덮은 손에 느껴졌다.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뺨이 붉어졌다.

저와의 키스를 상상할까.

우강희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제 욕망을 섞었다.

“그보다 더 진한 딥 키스도 있어.”

뒤로 도망치려 하자 팔을 잡고 그만큼 다시 거리를 좁혔다.

“잠깐.”

한주가 입술을 덮은 손을 잡으며 떼어 내려 하자 우강희가 한마디로 행동을 막았다.

“그 손을 떼면 당장 키스할 수 있어.”

“윽!”

한주의 손이 후다닥 떨어졌다.

“많이 참고 있으니까 놔둬.”

거칠어진 한주의 숨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우강희는 당장 손을 치우고 입술을 겹치고 싶었다. 비스듬히 입술을 겹쳐 뭉개지도록 누르며 입을 벌려 안을 핥고 싶었다. 한번 맛보았기에 참는 것이 힘들었다.

상상만으로 열이 몰려 바지 속이 답답해졌지만 우강희는 한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키스로 할래?”

“다, 당연히 입술만이지!”

“끝날 때까지 도망가지 마.”

“안 그런다니까! 난 한번 말하면 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강희가 손을 치우고 덤볐다. 기세는 대단했는데 입술은 살포시 닿았다.

놀라 한주는 저도 모르게 우강희의 어깨를 잡으며 밀어냈다. 쪽,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아, 돼, 됐지! 한 번 했으니까!”

밀어냈지만 그는 한주의 얼굴을 감싸더니 입술 위에서 달싹거리며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읍!”

입술이 다시 막혔다.

입술이 겹쳐지며 그는 한주의 아랫입술을 빨며 혀를 내밀어 핥았다. 입술 안쪽으로 밀어 넣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더 야한 짓을 하는 느낌이었다.

“음…….”

기분이 좋아 낮게 목을 울리며 그는 한주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입술을 떼지 않았다. 호흡이 부딪쳐 섞이며 점점 뜨거워졌다. 차례차례 아랫입술과 윗입술만을 희롱하고 쪽쪽 빨면서 혀로 적시며 문질렀다.

한주는 몰아치는 그의 감정에 휘말려 그저 팔을 붙들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마나 빨며 문질러 댔는지 감각이 없어질 즘에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옅은 숨이 식어 가는 한주의 입술을 다시 데웠다.

“좋아해, 박한주.”

짐승이 제 몸을 비비듯이 고백과 함께 다시 입술이 뭉개졌다.

* * *

“한주야, 무슨 일이야? 벌써 등교했네?”

지영은 반갑게 책상에 엎드려 있는 한주에게 다가갔다. 아침잠이 많기에 아침에 같이 식사하는 것도 어제가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

당연하게 한주는 지영을 데리러 오지 않았고 재민석과 식사하고 반으로 왔는데 한주가 먼저 교실에 앉아 있었다.

“일어났으면 방으로 오지. 같이 식사하면 좋았잖아.”

반가움에 한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끝이 닿는 순간, 전광석화처럼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영과 네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어?”

“갑자기 만지지 마. 놀라잖아.”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지영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 입술 왜 그래?”

한주의 입술이 부어 있었다. 아랫입술 한쪽은 상처도 나 붉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한주는 책상 위에 엎드려 눈만 내놓았다. 입술을 가리는 모양새였다.

“어제저녁에 매운 라면 먹고 잤더니 이래.”

지영과 한주는 오랜 친구로 서로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너 그런 적 없잖아.”

“모, 몰라. 나도 아침에 거울 보고 놀랐어.”

“이상하네. 꼭 한 대 얻어맞은 거 같아. 너 전에 사부랑 대련하다가 입술 그렇게 만들고 온 적 있잖아.”

“그, 그랬지. 나 더 잘 테니까 깨우지 마.”

“알았어.”

“만지지도 마.”

“네, 네.”

한주는 아침잠을 푹 못 자면 예민해지기에 지영은 슬금슬금 피해 자기 자리에 앉았다.

한주가 속으로 한숨을 폭 쉬었다. 지영이란 산을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우강희가 들어왔다.

얼굴에서 평소와는 다른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느낌은 한주만의 착각은 아닌지 뒤따라 들어오는 차원구가 눈을 비볐다.

“우리 우강희, 오늘따라 기분이 좋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나? 혹시 계약?”

흠칫 어깨가 튀며 우강희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고개를 돌려 팔 위에 엎드렸다. 옆자리에 우강희가 앉는 소리가 들렸다.

“박한주는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 나와 있고, 수상하네.”

흐응,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야릇한 코웃음을 흘리는 차원구 때문에 한주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네 자리에 앉아.”

끼익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우강희가 어떤 자세를 하는지 상상이 됐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나른한 자세를 취한 그는 한주를 보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지 시선이 닿는 부분이 뜨거웠다. 한주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지난밤, 우강희는 약속을 지켰다.

입술만 부딪치는 키스.

분명 버드 키스인데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우강희는 한주의 얼굴만 감싸며 입술을 부딪칠 뿐인데 반응은 온몸에서 일어났다.

‘아직, 아직 안 끝났어.’

아직도 우강희의 저음이 귓가에 생생했다. 낮게 속삭이지만 쉰 듯한 목소리가 허스키했다.

버드 키스인데 눈치를 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며 건드렸고 떼어 내려고 머리카락을 움켜쥐자 더욱 흥분해 숨이 거칠어졌다.

‘한주야.’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애정이 담겼다.

“그러는 게 아닌데…….”

누구도 들을 수 없게 입술만 움직이며 혼잣말을 했는데 의자 등받이에 우강희가 팔을 얹었다.

그가 앉은 쪽의 옆구리가 따뜻해졌다. 닿지는 않았는데도 온기가 느껴졌다.

키스는 싫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더 진도를 나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입술을 떼며, 우강희를 올려다보며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그의 눈이 야살스럽게 붉었다. 한주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듯이 바라보는 눈동자는 오히려 전보다 더 굶주려 흉흉해졌다.

사귀어도 되지만 그 후는?

계속 방을 같이 써야 하는데 참을 수 있을까?

혈기왕성한 나이라 키스 다음의 진도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등받이에 올린 우강희의 손이 툭툭 의자를 두드리며 신호를 보냈다. 이제 그만 얼굴을 보여 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옆으로 눕히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만으로 좋다고 강희의 눈이 가늘어지며 웃는다.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고 함부로 만지지도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으로도 넘칠 만큼 감정이 보였다.

‘아, 부끄러움도 모르는 녀석.’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한주는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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