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각인(1) (21/31)

21. 각인(1)

한주가 지영의 스킨십을 피했다.

첫날은 괜찮더니 그 이후부터는 손만 잡으려고 해도 화들짝 놀라며 떨쳐 내고 어깨에 손이 닿기도 전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옆에 있으면 괜찮은데 만지거나 닿으려 하면 피했다.

그러면서 한주는 꼭 우강희의 눈치를 봐서 지영을 더 짜증 나게 했다.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대답하는 말에 기어코 눈물 보가 터졌다.

‘이제 다 컸는데 이러는 건 징그럽잖아.’

눈물을 터뜨리며 “이제 내가 싫어졌어?”라든가 “내가 징그러워?”라며 울었다. 안으며 달래 주려고 하다가 한주는 다시 우강희의 눈치를 보며 말로 달래 주어서 지영의 기분은 더 진창으로 떨어졌다.

산책로 벤치에 혼자 앉은 지영은 고용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예전처럼 그렇게 한주에게 치근덕대면 안 되지. 네 덩치를 생각해. 예전에야 작고 귀여운 맛이 있어 한주가 그러려니 하고 받아 주었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아무리 외모가 달라졌다고 해도 나는 나라고 한주가 그랬어.”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고용진이라 웬만해서는 하소연하지 않지만 그만큼 지영은 우울했다.

- 어리광 그만 부려. 이제 네 덩치에 맞게 행동해. 넌 알파잖아.

“누가 되고 싶어서 됐나.”

- 한편으로는 좋으면서 투정은.

“……누가 좋대? 끊어. 도움도 안 돼. 이기적인 놈.”

- 흥, 이럴 때만 전화하면서 남 말 하네.

전화는 끊겼다. 지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고용진에게 위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말하면 기분 전환은 되겠다고 조금은 기대했는데 오히려 기분만 더 상했다.

고용진은 누구에게나 그랬다.

직설적인 거친 말투가 자신을 향할 때가 아니어도 상처를 입을 때가 있었다. 만약 한주가 없었다면 절대 사귀지 않을 타입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따끔한 말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가끔.

“나도 알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지영은 마른세수를 하며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알파가 되어 페로몬을 느끼자 타인과 자신의 차이를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특히 이성진과 우강희, 그들은 여타 알파들과는 달랐다.

차원구나 황치운은 만만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성진과 우강희는 프라이머 알파가 절대 아니었다. 우강희 앞에서는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낭떠러지 절벽 위에 서 있는, 혹은 달려오는 트럭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 우강희가 한주만을 챙겼다. 눈을 떼지 않았고 한주를 향할 때는 온도가 높아졌다.

결코 우정이 아니었고 한주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한주의 바운더리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마음 준 사람에게는 약하더라도 한번 아니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거절했는데 이상하게 우강희를 놔두고 있었다.

“설마, 한주가 받아 주지는 않겠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 * *

우강희의 본가에 가는 날이 왔다.

“여기야.”

버스 정류장에 선 우강희는 다른 사람의 머리 위로 삐죽 보일 정도로 키가 컸다. 아닌 척 우강희의 주위로 몰려 있던 사람들이 그가 손을 들며 반갑게 웃자 누구를 만나는 건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상대를 확인했다.

홍해의 기적이 달리 있을까. 사람들이 비켜 주는 길을 따라 우강희는 한주에게 다가왔다.

“왔어.”

“이리 와.”

한주는 그의 손목을 잡아 버스 정류장과는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우리 집은 그쪽이 아닌데?”

“어쨌든!”

외부에서 만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주목되는 시선에 난감해진다. 전에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무작정 그를 끌고 걸어가는데 우강희가 잡힌 손목에 힘을 주었다. 이제 웬만큼 걸어서 그만 놔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한주의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떨어짐 없이 꽉 맞잡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물렸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손 놔.”

“네가 먼저 잡았잖아. 잊었어? 네가 만진 만큼 나도 만진다.”

이번에는 강희가 성큼 앞장서며 한주를 이끌었다. 당황하며 그에게 끌려갔다.

“그쪽은 너네 집 방향이 아니라며!”

“돌아가도 돼. 데이트잖아.”

“뭔 데이트!”

우강희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 손을 빼려고 했지만 꽉 맞물린 손가락은 한주를 놔주지 않았다. 곧 포기하고 한낮의 햇살을 즐기며 걸었다.

그가 걸음을 늦추며 한주와 보폭을 맞추었다. 기분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에 한주는 시간이 한참 지났어도 손을 빼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을 때처럼 우강희의 얼굴이 편해 보였다.

“아, 저기 좀 들르자.”

한주는 작은 마트를 가리켰다.

“목말라?”

“아니, 처음 방문하니 과일이라도 사 가려고.”

“사지 않아도 돼.”

“그래도, 어떻게 빈손으로 가.”

마트로 가려는데 손이 끌어당겨졌다. 돌아보니 우강희는 우뚝 서 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눈을 반짝이지?

“왜?”

“설레서.”

부드럽게 웃는 얼굴에 한주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친구 집에 놀러 가는데 설레기는.”

“처음으로 우리 집에 인사하러 가잖아.”

이상한 뉘앙스에 한주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보지 않았다. 귀가 뜨거워졌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미묘한 분위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빵빵하게 부푼 풍선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었다.

“의미 부여하지 마.”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그가 귓가에서 낮게 말했다.

“우리가 친구 사이야? 키스했는데.”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거리를 두었다. 숨이 닿았던 귀를 비비며 한주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 진짜! 그런 소리 금지라니까!”

“이제 돌아봤네, 얼굴 마주 보기 힘들다, 한주야.”

“이! 그런 짓 좀 하지 마!”

“왜? 설레?”

“넌 밖에서 기다려! 따라오면 집에 가 버릴 거야!”

다행히 한주는 그를 조교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강희는 한주가 마트에서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 * *

김지영의 집도 컸고 차원구의 생일 파티에 갔던 집도 거대했기에 우강희의 본가에 도착해 집을 올려다보니 재강원 고등학교가 워낙 잘사는 집안의 자제들이 모이는구나, 새삼 느꼈다.

‘이런 집 아들을 데려오려면 그래도 좀 먹여 살릴 능력은 있어야겠지?’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 민망해 한주는 고개를 휘저었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우강희 바이러스가 옮았어.’

그래도 그의 부모에게 좋은 인상으로 인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했지만 애써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어른들이 많았다.

“어머, 강희야! 지금 오면 어떡해.”

우강희를 따라 응접실로 가는데 젊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반갑게 반겼다.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려는데 여자는 한주를 보지도 않고 우강희의 팔을 껴안고 응접실로 끌고 갔다.

“어른들이 기다리시잖아. 얼른 들어가 인사하자.”

아무리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그라도 가족은 허용하네, 하고 생각했는데 우강희가 한주를 돌아보았다.

“인사해, 어머니야. 이쪽은 박한주예요. 같이 방을 쓰는 룸메이트예요.”

사촌 누나나 친누나라고 생각했는데 우강희는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한주는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희와 같은 방을 쓰는 박한주입니다.”

“어, 어서 오렴. 네가 웬일이야? 친구를 데려온다고 해서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그녀는 말을 흐리며 힐끔 한주를 보고는 우강희를 끌고 가듯이 응접실로 데려갔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사장한테 그렇게 항의를 했는데 아직도 베타와 룸메이트로 지내다니, 어찌 된 거야? 우리 아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룸메이트를 둬야 해? 기숙사가 모자라나? 아예 하나 지어 줄까?”

친구들은 지하철 타고 등교한대요, 하는 아들의 말에 철도를 사 준 아랍 부호 아버지의 말투 같았다.

한주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긴장했다. 주말에 모인 가족이라고 보기에는 제법 많은 수의 어른이 응접실에 있었다. 높은 연배의 어른들은 풍기는 분위기가 범인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우천희가 앉아 있었다. 어른들과 얘기 중이었다.

“너는 이 집안 장남이야. 장남의 자리는 어디 굴러들어 온 돌이 빼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하지만 강희는 다르잖은가. 알파 사회는 철저한 힘의 사회야. 천희가 알파이기는 하지만 강희에 비하면…… 좀 떨어지지.”

“더 우월하면 뭐 하나. 강희 저놈은 의욕이란 것이 없어! 이렇게 어른들을 기다리게 해 놓고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 보게.”

우강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지만 들으라는 듯이 한마디씩 했다. 송지나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아들을 그들에게로 떠밀었다.

“우리 아들이 인사할 시간을 주셨어야죠. 아들, 어른들께 인사해야지.”

“…….”

그는 인사말도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저래도 되나? 그래도 어른들인데.’

한주의 생각대로 그의 성의 없는 행동에 어른들은 혀를 찼다. 그러나 행동과는 다르게 어른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있었다.

미워할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은 우강희를 보았다. 자부심이 가득했다.

“고얀 것, 1년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구나. 그렇게 소원했으면 반갑게 와서 인사라도 하고 안부라도 물어야지.”

“놔두게. 알파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알파 놈이 그 정도 강짜는 부려야지.”

“자네들은 너무 물러. 언제까지 어른들이 널 올려다보게 할 참이냐? 냉큼 와서 앉아!”

질책하지만 그들은 우강희를 반겼다. 말 아래에 우강희를 향한 애정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런 자리인데 왜 나까지 데려온 거야. 가족끼리 보내야지.’

지금이라도 인사만 하고 돌아가야 하나 한주는 망설였다. 저는 집안 행사에 끼어든 불청객이었다.

한주가 뒤꿈치에 꾹 힘을 싣는데 우강희가 돌아보며 이름을 불렀다.

“박한주, 이리 와.”

‘야!’

그는 어른들의 권유에도 그들 옆으로 가지 않고 한주를 불렀다. 어른들의 시선이 한주에게 향했다. 그들이 어떻게 베타를 생각하는지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우강희의 룸메이트 박한주입니다.”

한주는 우강희의 옆으로 가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한주에게 잠시 눈길을 주기는 했으나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은 어느 집의 베타가 아니라 우강희였다.

“학교에서 어찌 지내는지 와서 얘기나 해 봐라. 천희는 장남 노릇 한다고 꼬박꼬박 안부 전화도 하는데 너는 도대체 뭐냐? 이렇게 우리가 네 얼굴을 보러 와야만 해?”

“형님이 쌓인 게 많나 보네. 강희야, 네가 앉아만 있어도 형님은 기분이 풀릴 분이니 이리 와. 이리 앉아.”

무시당했지만 딱히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녀서 이런 분위기는 익숙했다.

한주는 강희의 등을 눌렀다.

“그래, 강희야. 어서 가서 얘기 좀 해.”

강희는 한주의 표정을 살피더니 들고 있는 검은 봉지를 가져가 송지나에게 내밀었다. 부스럭 비닐 소리가 낯설어 송지나는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당황해 아들만 보았다.

“박한주가 빈손으로 올 수 없다고 선물로 사 온 과일입니다.”

“어? 어. 고마워요. 굳이 사 오지 않았어도 되는데.”

송지나는 도우미를 불러 봉지를 가져가게 했다. 더러운 물건을 잡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봉지를 잡지도 않았다.

“그럼 강희야.”

“우린 올라가 보겠습니다.”

잡으려는 어머니의 손길을 밀어내고 강희는 한주의 손목을 잡고 2층으로 향했다.

“저런! 고얀 놈!”

“저! 저!”

“역시 알파는 알파인가 봅니다.”

혀를 차며 불만을 토하기는 했지만 웃으며 우강희의 태도를 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똑같이 행동했지만 그래도 우강희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주가 멈추자 우강희도 덩달아 멈추며 돌아보았다.

“어른들인데 가서 얘기 나누다 와. 난 네 방에 있을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계속 집에 오라고 어머니가 성화를 부려서 왔을 뿐이야. 어른들도 얼굴만 비치면 만족하는 사람들이고.”

“그래도 너 보려고 모이신 분들이잖아.”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 아니야.”

강희가 응접실을 나서자 어른들의 눈길이 쫓아왔다. 2층으로 가려고 계단으로 향하여 모습이 보이지 않을 텐데 응접실에서 어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강희가 돌아오지 않을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 잘못 없었지만 한주는 죄진 기분이 들었다.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그를 설득했다.

“너 만나러 오느라 일찍 일어났잖아. 졸려서 그래. 네 방에 가서 잠깐 잘 테니까 가서 30분만 앉아 있다 와. 그사이에 나도 잠시 쉬자.”

한주의 의도를 알면서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순순히 말을 들어 주었다.

“그래, 그러는 편이 마음 편하다면. 따라와. 방을 알려 줄게.”

그의 방은 톤 다운된 블루로 한쪽 벽면을 포인트 주었고 검은 프레임의 침대가 벽에 붙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지만 생활감은 없었다. 색감이나 톤으로는 우강희와 어울렸지만 모델하우스 같았다.

“깔끔하다.”

한주는 우선 욕실로 들어가 먼저 손을 닦았다.

방 안에 소파가 있어 저가 눕기에 길이가 충분해 보였다. 한주의 행동을 지켜보는 우강희를 향해 손짓해 쫓아냈다.

“가 봐. 정말 졸려서 그래. 소파 좀 쓸게.”

강희는 소파에 가려는 한주의 팔을 잡아 침대로 데려갔다.

“제대로 누워서 자.”

“야, 아무리 그래도 남의 침대는 좀. 밖에서 들어왔는데 씻지도 않고 눕기는 미안하지.”

“그럼 씻을래? 옷 가져다줄게.”

우강희의 목소리 톤이 조금 달라졌다.

“아니, 그냥 잘게. 침대 주인인 네가 찝찝하지 않다면야 뭐.”

꾸물꾸물 침대 안으로 들어가자 강희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으려고 하자 한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경하게 말했다.

“나가.”

“많이 봐주는 건 알지?”

“봐주지 않으면 어쩔 건데?”

무술 실력을 믿고 한 말인데 그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 내가 널 어쩌겠어.”

잠시 한주의 머리로 손이 향했지만 의미 없이 베고 있는 베개를 쓸며 그는 일어났다. 창의 암막 커튼을 치자 한낮인데도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차단되었다.

강희는 방을 나가기 전에 잠시 침대에 누운 한주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렸다.

“얼른 불 꺼.”

“그래.”

우강희가 방을 나가고 한주는 혼자 남았다. 한낮인데도 캄캄했다.

‘우강희는 이런 곳에서 자나.’

이불에서는 세제 냄새만 났다. 그가 아팠을 때 그의 기숙사 침대를 쓴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완전한 타인의 방 같은 낯선 공기.

한주의 본가는 5년 전에 이사 왔는데 그사이에 방문이 발차기에 움푹 파였고 손잡이는 두 번 망가져서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천장에는 지영이 붙이고 간 야광 별이 반짝였고 재강원 고등학교 기숙사로 들어오며 책상과 침대 위치를 바꾸어서 벽지에 바래기 전의 벽지 자국이 있었다.

사람이 지내면서 원치 않아도 생기는 생활의 흔적과 엉뚱한 곳에 물건이 놓여 있는 생활감이 우강희의 방에는 없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이 집에서 지냈을 텐데.

적막과 함께 타인을 거부하는 고독이 느껴졌다. 그에게 과몰입해서, 감정이 있어서 혹은 측은하게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슴이 쓰렸다.

“아, 안 되는데.”

멈칫하며 머리카락을 만지지 않던 그가 눈치 보는 아이처럼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집인데도 정을 붙이지 못한 우강희가 안쓰러웠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감정을 이입한 것만은 아니다.

저와 닮았다.

필사적으로 알파가 되고 싶어 발버둥 쳤던 절박함과 저로 인해 힘들었을 가족에 대한 자책, 이루지 못한 절망을 떠올리게 했다.

“아, 진짜 우강희.”

한주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익숙한 냄새가 나던 기숙사 방이 그리워졌다.

* * *

한겨울 이불 안에 있을 때처럼 몸이 따끈따끈했다.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가 기분이 좋았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몸이 슬슬 깨어나는 신호를 보냈다. 일어나기 싫었는데 집에서 맡던 섬유 유연제와는 향기가 달라서 점점 의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낯선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주홍빛을 띠었다. 저녁노을처럼.

“어?”

무심코 옆에 있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아르바이트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깼어?”

귓가로 우강희의 저음이 들리며 허리를 감싼 손이 몸을 끌어당겼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강희가 한주를 끌어안고 누워 있었다.

“야, 어딜 어물쩍 끌어안고 있어. 떨어져라.”

강희의 머리가 뒤통수에 닿았다. 경고하며 한주가 돌아보는데 순간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이 가까웠다.

졸음이 가득한 눈이 느리게 깜빡이다가 곱게 휘어졌다. 언제나 늦잠을 자서 잠에 취한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강희는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한주의 이마에 그의 이마를 댔다.

“더 자.”

“다 깼어, 떨어져.”

우강희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느릿하게 일어나 앉았다. 검은 침대가 마니악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 우강희가 앉으니 화보가 되었다.

“언제부터 껴안고 있었던 거야? 계약서 위반이야.”

“……5분 전에 누웠어.”

강희가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하지 마. 5분 전에 누웠으면서 그렇게 깊이 잠들었다고? 넌 스킨십 횟수 다 채웠어. 더는 안 돼.”

“그래, 좋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더 수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안고 잤길래 그래?”

“……그럼 제대로 계산할까? 내가 언제 누웠는지 증거 댈 수 있어?”

“이, 우와…….”

뻔뻔하게 나오자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언제 방으로 들어갔는지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방으로 들어갔다고 침대에 누운 시간을 증명할 수는 없어.”

“너, 변했다? 이제 잡힌 물고기라는 거야?”

우강희의 눈이 반짝였다.

“잡힌 물고기야?”

“아니, 말이 그렇다고!”

한주는 열이 올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길거리에서 사이비 종교에 잡혀서 조상을 위해 제사 지내 준다고 끌려갔다가 나오는, 어쩐지 사기당한 느낌이었다.

방에서 언제나 사복 차림을 보았지만 사적인 공간에 있어서인지 그의 표정이 더 부드러웠다.

‘그래도 집이라서 그런가, 다행이네.’

조금은 마음을 붙이고 있구나, 안심했다.

“디저트와 과일이 있어. 와서 먹어.”

테이블에 투명한 돔 뚜껑이 덮인 접시가 있었다. 얼음을 넣은 주스였었는지 유리컵에 주스와 물이 층이 나누어져 있었다. 케이크, 샌드위치와 머핀이 접시에 있고 그 옆으로 망고스틴이 든 작은 바구니도 있었다.

한주는 돔 뚜껑을 열며 소파에 앉았다.

“너는?”

“먹어야지. 주스는 다시 가져올게. 얼음이 다 녹았다.”

“괜찮아. 아직 시원하다.”

자고 일어나서 목이 말랐다. 한주는 단숨에 주스 반을 마시고 샌드위치에 손을 뻗었다.

강희는 맞은편에 앉았다.

“어른들은? 아직 계셔?”

밖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방음이 잘되어서인지 1층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녁 드시고 가시겠지.”

“아직 계셔? 내려가 봐야지.”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돼. 어차피 쓸데없는 얘기들이야.”

강희는 망고스틴의 옆면을 과도로 살짝 칼집을 내더니 껍질을 손으로 잡고 부드럽게 눌렀다. 단단하지 않은 두꺼운 겉껍질이 눌리면서 벌어지고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한주의 앞에 놔 주고 다른 망고스틴을 집어서 다시 껍질을 열었다.

포크로 속살을 찍어 입에 넣으니 달콤한 과육이 살살 녹아내렸다.

“잘 익었다. 너도 먹어.”

“이거 다 자르고.”

“하긴 이 정도면 앉은 자리에서 다 먹지. 엄마가 망고스틴을 좋아해서 시즌 되면 자주 먹어.”

앉은 자리에서 10kg을 다 먹은 적도 있었다. 워낙 겉껍질이 두꺼워서 10kg이라도 실제 과육의 양은 많지 않았다. 엄마가 껍질을 까면 한주는 옆에서 하얀 과육을 빼먹었다.

한주는 엄마에게 해 주던 버릇대로 과육을 찍어 강희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먹으면서 해.”

그는 과육을 받아먹고 입 안에서 씨를 굴렸다. 힐끗 한주를 확인했다.

“망고스틴은 꼭 아이스크림 같아.”

푹 자고 좋아하는 것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나도 좋아해.”

그가 씨를 뱉자 한주는 다시 과육을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과육이 입에 맞는지 그는 시종일관 웃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알바 가려면 10분 뒤에 나가야 해. 너네 집에 왔는데 잠만 자고 가네.”

“네 덕분에 나도 잘 잤어.”

“너 30분만 잔 것이 아니지?”

“얼마 만에 잠드는지 다시 누워 볼까?”

“……아니.”

점점 강희의 말발이 세지고 있었다.

과육을 포크로 꺼내려는데 잘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과육을 잡아서 빼냈다.

“아.”

강희가 먼저 입을 벌렸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입에 넣어 주자 과육을 따라 혀가 한주의 손가락을 핥았다.

“달아.”

그제야 한주는 지금까지 저가 우강희에게 먹여 주었음을 깨달았다.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네 손으로 먹어! 껍질도 다 깠잖아! 계약 잊었어? 스킨십 금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물티슈로 손을 닦다가 이어지는 말에 한주는 굳어 버렸다.

“네가 날 만지면 나도 널 똑같이 만져야 하지?”

우강희의 눈이 깊어졌다. 한주는 그를 보다가 눈을 굴렸다.

“아니, 넌 핥았으니까 안 해도 돼!”

“그럼 너도 핥아. 손가락 줄게.”

얼굴이 시뻘게졌다. 같은 고1인데 위험한 발언을 수시로 한다. 이제까지 타인과 거리를 두었으면서 수작은 선수급이었다.

‘우강희 주제에 자꾸 기어오르고, 음흉한 자식!’

한마디 해 주려고 입을 벌리는데 그때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아르바이트 가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강희는 한주 대신 침대에 놓인 핸드폰의 알람을 껐다.

“가야 하지? 바래다줄게.”

“어? 어.”

한주는 두 발짝 떨어져서 강희를 따라 내려갔다. 1층에서 어른들의 화기애애한 웃음과 함께 낯선 목소리도 들렸다.

“진짜 강희가 약혼자는 잘 얻었어. 강희 옆에는 자네 같은 오메가가 있어야지. 집안도 좋고.”

“강희에게 각인까지 하고, 한눈에 반했다니, 젊은 애들은 다르다니까.”

“부끄러운 얘기예요.”

각인.

한주는 우강희를 돌아보았다.

응접실에 앉아 어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젊은 남자, 재민용은 우강희를 보자 반갑게 일어나 다가왔다.

“강희야.”

“저리도 제 약혼자가 좋은가. 보자마자 달려가네.”

“각인한 페어니까.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흐뭇하군.”

어른들은 젊은 연인을 축복했다. 동떨어져 바라보니 더없이 화목한 가족이었다.

우천희가 목소리를 높이며 장남 시늉을 했다.

“오랜만에 네가 집에 와서 민용 형을 불렀지. 약혼한 사이이니 어른들에게 점수 따면 좋잖아.”

한주도 기본적인 지식으로 각인에 대해 알았고 일전에 차원구의 상황을 봤다.

엄마가 지영의 어머니와 통화하며 수다 떠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 각인한 상대가 있다면서 운명적이라며 부러워했었다.

한주는 눈만 깜빡이며 우강희를 보았다. 그도 한주를 보고 있었다.

“각인? 약혼자?”

오메가로 보이는 사람이 우강희의 팔짱을 끼고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오메가의 외향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보이는, 몸 선이 부드럽고 남자이면서 뛰어난 미모와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알파와는 다른 분위기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서는 서로의 성별이 같다고 해서 문제되지 않았다. 차원구의 연인은 저에게 각인한 사람이 연인의 형이라도 택했고,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까칠한 원구도 결국 받아들였다.

“너…… 약혼자가 있었어?”

한주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에게 각인한 상대가 있든 약혼자가 있든 자신과는 상관없다.

재민용은 처음 본 한주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 강희의 룸메이트가 놀러 왔다더니, 이름이 박한주라고 했지? 알파와 방을 같이 쓰기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다. 만나서 반가워. 혹시 재민석이라고 알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이름에 한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우강희의 집에서 민석의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

“……같은 반이에요.”

“그렇구나. 민석이가 내 동생이야. 잘 지내 줘.”

한주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강희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변화도 없었다.

재민용.

그제야 생각났다. 재강원의 큰아들이며 프라이머 오메가. 그 사람이 우강희에게 각인했고 약혼자였다.

허탈해지고 말았다. 한주는 자기도 모르게 비싯 웃고 말았다. 무의식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전 아르바이트 가야 해서 이만 가 볼게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뭐? 아르바이트?”

민용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은 대학생이 되었지만 약혼자도 있고 집안이 좋아 아르바이트는 해 보지도 않았다. 아직 고등학교 1학년인데 아르바이트한다는 말이 신기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나?”

“학교에 아르바이트가 안 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래? 하긴, 어떤 애들은 부모님 일을 도와 미리 인턴십에 참가하니까.”

우강희가 대화에 끼어든 것만으로도 좋아 민용은 그의 팔을 더 껴안았다.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어른들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

“먼저 가겠습니다.”

한주는 꾸벅 고개를 숙여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바래다줄게.”

등 뒤로 우강희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가 한주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한주는 기민하게 몸을 틀어 피했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턱짓으로 응접실을 가리켰다.

“계약 잊었어? 만지지 마.”

저는 화나는데 우강희는 조금 기쁜 듯이 눈을 반짝였다. 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어른들이 보고 있었다.

“나 혼자 가도 돼. 약혼자가 왔는데 같이 있어 줘. 덕분에 잘 쉬다 간다. 학교에서 보자.”

가까이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짜증을 내거나 기분을 내보이지 않았다.

“정리할 일이 있으니 배웅하지 않을게.”

“그래.”

가볍게 한주는 그 집을 빠져나왔다. 버스를 타야 해서 대로를 향해 걷는 걸음은 평온했다. 하지만 무슨 정신으로 거리까지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없었다.

그저 웃음이 나왔다.

“잡지도 않네.”

이제 고1인데 벌써 약혼자가 있었다. 이전 삶에서는 우강희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어차피 사귈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에게 약혼자가 있든 말든, 그것을 한주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속상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 약혼자라는 사람은 재민석의 형이다.

한주가 재강원의 혼외자임을 말했는데도 우강희는 약혼자에 관하여 일언반구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어도 한주가 재강원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알 텐데도.

“우강희도 알파였어.”

말로 뱉어 내서 가라앉은 기분을 털어 내고 싶었는데 더 허탈하기만 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에 베타가 낄 자리는 없었다. 페로몬에 의해 서로 교감이 가능한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세계가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베타는 그저 무지한 존재이며 눈뜬장님에 불과했다.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적나라하게 느꼈는데 지금이 제일 충격이 컸다. 상실감이 몰려왔다.

우강희도 부인을 두고 바람을 피운 한주의 아버지, 재강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엄마 박예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 저녁이어서 바쁠 텐데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어, 한주야. 왜?

“그냥. 엄마 목소리 듣고 싶었어.”

- 애교 부리는 거야? 용돈 달라고?

웃는 목소리에 한주도 미소를 지었다.

“용돈이 필요해서 한 건 아니고…… 인사하고 싶었어.”

- 인사?

“엄마, 나 키워 줘서 고마워.”

- ……한주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친구네 집에 갔는데 엄마 생각이 났어. 우리 엄마만큼 이쁜 사람은 없더라.”

- 싱겁기는.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웃음을 위해 한주는 이제껏 달려왔다. 이 웃음을 지키기 위해서.

손님이 들어왔는지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주는 엄마에게 일하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도장 가서 한바탕 뛰고 싶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5분 뒤에 엄마에게서 용돈이 계좌 이체되어서 진짜로 웃을 수 있었다.

* * *

저녁에 우상진이 귀가했다.

토요일 저녁은 국회 의원 우상진에게 황금의 시간이었지만 집안 어른들과 가족이 다 모였기에 그는 외부 약속을 미루고 가족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넓은 다이닝룸의 12인 테이블이 꽉 찼다. 우상진 부부와 우천희, 우강희 그리고 그 약혼자 재민용과 어른들이 자리를 채웠다. 우강희가 집에 왔다는 소리에 뒤늦게라도 일부러 찾아온 어른도 있었다.

“든든하구나. 듬직한 장남에 출중한 둘째와 그 약혼자까지. 우리 집안을 이끌어 갈 미래의 기둥들이 다 모였어.”

“강희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데 왜 천희는 여태 혼자 놔두고 있어? 내가 집안 좋은 아이를 찾아볼까?”

우천희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닙니다. 작은아버님. 저는 천천히 해도 됩니다. 저한테도 좋은 사람이 나타나겠죠.”

“쯧, 네 어미는 아무리 이혼했다지만 신경 안 쓰고 뭐 하는 거냐. 그리고 지나야.”

어른들은 우강희의 어머니 송지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우강희의 옆에 있던 송지나는 집안 어른의 부름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아무리 천희가 네 자식이 아니라 해도 이 집안에 들어온 이상 네 자식이다. 천희의 친모가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네가 나서서 챙겨야지. 언제까지 첩 노릇을 할 생각이냐? 이제 너도 이 집의 안주인 노릇을 해야지.”

첩 소리를 들어도 송지나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네. 그러잖아도 집안 좋은 얌전한 오메가를 찾고 있어요. 천희에게는 옆에서 내조 잘하며 말을 잘 들어 줄 오메가가 어울려서 고르느라 늦어지고 있어요.”

“그래. 네가 정말 이 집의 안주인이 되고 싶다면 천희의 약혼자를 잘 골라야 할 거다. 강희 덕분에 이 집안에 들어왔지만 적어도 자기 자식 아니라고 차별한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잘 알고 있어요. 더 신경 쓰겠습니다.”

온순하게 대답하는 송지나의 얼굴에 굴욕감이나 분함은 일절 없었다.

송지나는 천성이 그랬다. 좋게 말해 낙천적이었고 뒤끝이 없으며 순진했지만, 나쁘게 말해서는 철이 없었고 물정을 몰랐다.

남들은 송지나가 우상진의 본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기다린 줄 알지만 송지나는 그저 우상진의 원조를 받으며 아들을 키웠을 뿐이다. 그러다 우상진 전처의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터지면서 이혼하게 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으로 들어왔을 뿐이다.

하지만 우강희는 송지나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는 송지나의 옆에서 주위 어른들이 어떤 말을 하고 그의 어머니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지켜보며 자랐다.

“미래의 형님은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으세요?”

민용이 웃으며 송지나에게 묻자 어른 중 하나가 허허 웃었다.

“왜, 너보다 좋은 집안사람이 들어올까 걱정하는 거냐? 어느 누가 명문의 재씨 집안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어머님을 돕고 싶어서 물어보았어요.”

민용은 손사래를 치며 수줍게 웃었다.

어른들은 그 모습을 마냥 예쁘게 보았다. 재씨 가문의 장남이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는 우강희의 약혼자라는 이유가 더 컸다.

“벌써 이 집안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구나. 기특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른들은 흡족해했고 민용도 그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어 배시시 웃었다.

우강희까지 참석해 가족이 다 모여서 화기애애했기에 오늘 자리를 마련한 송지나도 만족했고 우상진도 집안의 어른들에게 가족의 화목함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예비 가족은 재강원의 첫째 자식이었고 자식 중에 그나마 우수한 재목이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오랜 전통의 재씨 집안이 베타인 둘째에게 재강원의 재산을 물려줄 리 없으니 상속자는 오메가인 첫째가 유력했다.

중요한 재산들은 우강희라는 반려자를 둔 첫째 재민용에게 갈 확률이 높았다.

앞으로 더 좋아질 일만 남았기에 식사하는 모두의 얼굴에 온화한 순풍이 흘렀다.

우강희를 제외하고.

그는 수저조차 들지 않았다.

송지나는 이상함을 알아차렸지만 아들의 심기가 틀어져 성질을 부리는 것보다는 조용히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민용은 웃는 와중에 우강희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앞에서 재민용은 언제나 작아졌지만 가족들은 저의 편을 들어 주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만큼은 우강희에게 약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식사하라고 종용하려는데 우천희의 말이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우강희. 어른들과 식사하는 자리야. 기분이 상했어도 티는 내지 말아야지.”

가만히 있는 우강희를 건드렸다.

강희의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 앉은 우천희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우천희가 그런 태도로 식사 자리에 있었다면 혀를 차며 말 한마디라도 했을 큰아버지는 우강희에게는 화내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감추지 않은 애정의 방향에 우천희는 참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룸메이트인 베타를 끼고 돌더니, 어른들이 모이시는 오늘 같은 날에까지 집으로 베타를 데려와? 아무리 네가 그 베타를 각별하게 여긴다지만 어른들 계신 자리에서까지 그렇게 감정을 보이면 안 되지.”

우천희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도록 뺨에 힘을 주었다. 일부러 진중한 장남의 얼굴을 했다. 몇 가지 정보를 넣어 어른들에게 알려 주었다.

우강희가 학교에서도 룸메이트인 박한주를 각별하게 여긴다는 사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행동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우강희가 어른들을 무시한다는 의미도 넣었다.

아무리 어른들이 우천희의 의도를 읽었다고 해도 무시하며 넘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우강희를 아끼는 어른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일보다 그가 베타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말에 더 관심을 보였다.

“강희야. 천희 말이 무슨 뜻이냐? 그 베타를 각별하게 여겨?”

우상진도 그 말에 흥미가 있는지 식사를 멈추었다. 우강희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우천희에게 질문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천희야.”

“이미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큰아버지. 룸메이트인 베타를 아침에 안고 등교하고 아침 식사 때는 직접 음식을 가져다주며 먹여 주기까지 한다고요. 많은 학생이 그 모습을 보았고 이미 소문이 퍼져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고 합니다.”

“뭐?”

갑자기 여당 대표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우상진도 놀랐다.

민용은 진위를 밝히고 싶어 우천희와 우강희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럴 리 없다. 우강희가 어떤 사람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베타에게 할 리 없다.

“그게 무슨 말이지? 강희가 베타를 특별하게 여긴다고?”

모두 식사를 멈추고 우강희를 보았다.

“강희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그런 짓을 해? 베타를 상대로……. 그런 장난도 칠 줄 알다니, 몰랐네.”

애써 웃으며 넘기려고 민용이 노력했지만 우강희의 말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장난이 아닙니다.”

그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단조롭게 말했다.

“저, 재민용과 파혼하겠습니다.”

파급력이 컸다. 민용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은 우강희의 팔을 움켜잡았다. 언젠가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불안했는데 그 일이 오늘 터졌다.

“왜 그래? 파혼이라니…… 장난치지 마, 강희야.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장난 아닙니다.”

“머, 먼저 우리끼리 얘기하자, 강희야. 어떻게 나한테 이래? 약혼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 줘야지. 나와 먼저 얘기하고…….”

매달리는 모습이 애달파 보였지만 그의 감정을 움직이지 못했다.

“말해도 파혼할 생각이 없잖아요.”

“강희야…….”

“이제는 의미가 없는 약혼입니다. 당신도 알고 저도 알고 있죠.”

“왜 그런 말을…….”

삽시간에 민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강희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우천희의 입가가 실룩댔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저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우강희를 깎아내리기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덥석 물어 버리다 못해 폭탄을 터뜨렸다.

어른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지금 어른들 모아 두고 뭐 하는 짓이야! 너희들 문제는 너희끼리 조용히 해결해야지! 다들 있는 자리에서 파혼을 언급하다니! 이게 단지 너희끼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너희의 약혼은 집안끼리의 관계도 엮여 있어! 파혼이라니, 경솔하게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니지, 우강희!”

“파혼은 둘째 치고 민용이는 어쩌려고?”

흠칫, 재민용의 어깨가 튀었다.

“저 아이는 너한테 각인했는데 그건 어쩔 셈이냐? 무책임하게 모른 척하겠다는 거냐?”

어른들의 일에 부드럽게 중재를 했던 작은아버지의 목소리도 커졌다. 민용은 우강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가 말하지 못하게 막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강희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제가 부족해서 강희가 이러는 거예요. 식사 자리인데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문제를 터뜨린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민용이 어른들에게 사과했다.

“쯧,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민용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 약혼자가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거냐?”

“싸움을 하려면 너희 선에서 끝내야지! 남편 될 사람의 기분을 맞추고 내조하는 것이 아내 될 사람의 도리인데 도대체 집에서 뭘 배웠기에.”

“둘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죠. 괜히 아이들 일에 끼어들면 불편해할 겁니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민용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우상진은 우강희를 보았다. 놀라기는 했지만 먼저 우강희가 파혼을 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행동을 보인다.

우상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우강희, 진심이냐?”

목소리를 높이려던 어른들이 입을 다물었다. 집안에서 우상진의 위치를 보여 주듯 그들은 우상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른들 말처럼 너희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강원 씨의 가문과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문제다. 사업도 여럿 얽혀 있어. 그 집안에서도 순순히 받아 주지 않을 텐데 그래도 파혼을 하겠다는 말이냐?”

“아, 아버님…….”

민용의 안색이 백지장같이 하얘졌다. 강하게 원하면 파혼을 들어줄 사람처럼 우상진은 말했다.

“의미 없는 짓을 지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희야!”

흠, 우상진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상진은 싫다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허락하려는 의도를 읽은 어른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의 시간 차로 동시에 일어나서 의자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다이닝룸에 퍼졌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야. 이 일을 얘기하고 싶어서 우리를 불러들인 것이냐? 고작 베타 때문에 재씨 집안의 자제와 파혼을 하겠다고? 진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철이 없을 수가!”

“오늘 일은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우리는 가겠네. 다음에도 같은 말을 듣는 일은 없어야 해.”

“파혼은 쉬운 일이 아니니 다시 생각해 봐라. 다음에 보자.”

어른들이 다이닝룸을 나가려는데 우강희가 일어났다. 그들은 우강희를 등지고 있었지만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발을 멈추었다.

다이닝룸에는 어른들이 내보낸 위압적인 페로몬이 흐르고 있었다. 민용은 그 페로몬에 식은땀을 흘렸는데 우강희를 중심으로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어른들의 페로몬이 밀려났다.

우강희가 페로몬을 내보낸 것은 아니었다. 페로몬과는 다른 무형의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민용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전 결정했습니다. 재민용과 파혼하겠습니다.”

우강희는 우상진을 보았다. 아버지가 아닌 약속을 한 사람 대 사람으로 대했다.

“약속하셨죠. 약혼하면 원할 때 언제든 파혼해도 된다고.”

“그랬지.”

우상진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강희에게 사고로 각인해 버린 오메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지 않는 재강원의 첫째 자식이었다. 약혼 생각은 없었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우강희에게 우상진은 우선은 약혼하라고 권유했다. 그때 파혼 또한 약속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 약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속했지만 사회적 입장이 있으니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다려.”

“알았습니다.”

꾸벅, 우강희는 인사하고 다이닝룸을 나갔다. 주저함 없이 올곧게,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아버님!”

“상진아! 파혼이라니, 안 돼!”

“재강원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그 집안과 엮인 사업이 얼마짜리인데!”

나간 우강희를 붙잡지 못하고 어른들과 민용은 우상진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아무리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다지만 파혼은 재강원 씨를 건드리는 짓이야!”

우상진은 느리게 일어났다. 어른들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제가.”

우상진은 어른들과 재민용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국회 의원으로 항상 옅은 미소가 머무는 입가는 온화한 이미지 메이킹에 큰 역할을 했지만 눈이 차가워지자 상대를 향한 멸시가 가득했다.

“재강원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이 우상진이?”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마저 식사하시고 가세요. 다음에 뵙죠.”

어른들은 우상진이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우강희는 방에서 핸드폰만 챙겼다. 방을 나서려는데 방문 앞에 우천희가 서 있었다.

“네가 먼저 파혼을 꺼내? 너는 아버지의 말에 지나지 않아. 네가 먼저 하니 마니를 정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우강희는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거둬 키워 주었으면 은혜를 갚을 줄 알아야지, 어디서 먼저 파혼 소리를 해?”

나가려는데 우천희의 말이 발을 잡았다.

“무슨 말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놈이 그 베타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널 상처 입히고 싶으면 그 녀석을 건드리면 되나?”

우천희가 어떤 말을 해도 담담하게 바라보며 폭력을 견뎠으며 맞고 나갈 때조차도 원망이나 미움을 담지 않았던 우강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천희는 우강희의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온몸의 털이 바짝 솟아올랐다. 등이 저릿해질 정도로 긴장이 되어 근육이 뭉쳤다.

“일전에 아주 발칙한 짓을 했지? 우강희.”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을 뜨니 병원이었고 한수원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답했다.

우천희의 입술이 한껏 휘어졌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몸에는 소름이 돋아 솜털이 섰지만 머릿속은 마치 설탕물을 주입한 듯 간질거렸다.

약을 먹으면 이런 기분이 될까 싶을 정도로 최고의 기분이었다.

몇 년 동안 괴롭혔지만 몸에 상처를 입힐 수는 있어도 우강희의 마음까지 상처 내지는 못했다. 그의 어머니를 언급하며 모욕해도 잔잔한 호수 수면처럼 파동도 없었다.

“그래, 그 베타였어? 다음에는 널 부르기보다 그 녀석을 부르면 되겠어. 그럼 네가 더 빨리 오려나? 응?”

우천희는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 우천희를 위협했다. 그가 자라면서 집안에서의 위치가 커졌다. 성인이 되기 전에 제대로 밟아 주어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우강희를 휘두르며 상처 입힐 수 있는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몸집도 작은 베타가 몇 대까지 견딜 수 있을까? 응? 몇 대에 울며불며 살려 달라고 빌지 내기할까? 하하…….”

어느새 우강희가 우천희의 코앞에 있었다.

우천희는 그가 자신을 때릴 경우 아버지 우상진에게 어떤 식으로 알릴지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우강희는 테이블에 놓은 볼펜을 쥐어 우천희에게 내밀었다. 느린 슬로 모션의 화면을 보는 기분으로 지켜보며 우천희는 짧은 순간 생각했다.

‘찌르려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거야말로 우천희가 바라던 바였다. 폭력성과 살인 시도로 경찰에 신고해 영원히 씻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기다니, 최고의 흉터다.

그는 볼펜을 우천희의 손에 쥐여 주었다. 두둑, 우천희의 손에 살을 뚫는 감각이 전해졌다. 단단한 막을 힘겹게 한 겹 더 뚫었다. 손안에 쥐어진 얇은 볼펜을 통해 손바닥으로 그 느낌이 전해졌다.

우천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아프지 않다. 피부가 뚫리는 진동을 느꼈는데 통증이 없었다.

우천희는 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우강희에게 잡혀서 그의 배에 닿아 있었다. 우강희는 우천희의 손을 꽉 쥐고 천천히 뽑아냈다.

시뻘겋게 물든 볼펜이 우천희의 손에 있었다.

“어?”

우강희의 검은 티셔츠, 배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려, 좀 더 농도 짙은 검은색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비릿한 쇠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강희는 인상을 찡그리지도, 아프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가져, 당신에게 내 유전자 정보를 주지.”

놀라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우천희의 눈이 커졌다. 항상 존대하던 우강희의 말투가 변했다.

“앞으로 검사할 일이 있으면, 이걸 이용해. 학교만 졸업하면 난 이 집에서 빠질 사람이야. 이 집의 재산, 우상진의 뒤를 이을 자식, 그런 거 아무 의미 없고 욕심나지도 않아. 당신 다 가져.”

우강희는 타인을 얘기하듯이 아버지를 이름으로 거론했다. 제 몸속에 들어갔었던 피 묻은 볼펜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우천희의 손을 꼭 쥐여 주었다.

“그런데도 계속 날 건드리기 위해 한주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면, 그런 생각을 가지기라도 하면…… 우천희.”

피에 젖은 손으로 우천희의 뺨을 감싸며 절 보게 만들었다. 얼굴에 진득해진 피가 묻어 뭉개졌다. 그리고 볼펜을 쥔 손을 우천희의 심장 쪽으로 밀며 조용히 경고했다.

“망가뜨려 줄게.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그 머리를.”

우강희는 웃고 있었다.

“너의 모든 걸 빼앗아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철저하게 망가뜨려 주겠어.”

* * *

‘걱정 마, 친자 확인 검사는 얼마든지 조작 가능해.’

우천희는 그때 여덟 살이었다. 소파 팔걸이에 올린 다리를 까딱이며 김자경은 와인에 취해 누워 있었다.

‘그 정도 머리도 안 돌아가는 사람인 줄 알아? 언제 누구와 밤을 보내 생긴 아이인가는 다 계산해. 설마 별장에서 히트사이클이 터져 관리인과 하룻밤 보낸 게 그렇게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알파 확률이 높아 망정이었지.’

통화하며 깔깔 남의 일처럼 웃었다.

‘한 방에 그렇게 생기다니! 꽤 세긴 했지. 천희도 제 아버지를 닮아 자식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 관리인이 자식만 다섯이라잖아. 일부러라니, 아니야, 그런 거.’

우천희의 어머니는 남편인 우상진만을 바라보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메가를 배출해 내는 가문에서 촉망받는 오메가로 자란 여자는 우천희를 낳고 둘째를 유산하면서 앞으로는 임신이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책임감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밖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알파 오메가 부부들이 각자 애인을 두는 일은 그들 사회에서 빈번했고 우천희도 어머니 김자경에게 따로 애인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자경은 우상진에게 또 다른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알파로 발현될 확률이 높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혼외자가 알파로 발현하면 입지가 줄어들고, 언젠가는 밀려날 수 있다는 걸 예상하고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우상진은 받아 주지 않았고, 공교롭게 그 후 김자경의 스캔들이 터졌다.

김자경은 집을 떠나는 전날 우천희의 방을 찾아왔다. 아이의 양육권은 우상진에게 있었고 저가 키우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우천희도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자경은 우천희가 처음 보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운 아들의 뺨을 어루만졌다. 항상 웃던 사람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더럭 겁이 났다.

‘너는 그 애를 이길 수 없어. 네 가족은 나뿐이니까, 버티고 버티다가 더는 못 견디겠으면 나한테 와. 그 사람은 널 보내 줄 거야.’

누구를 말하는지, 왜 가족은 김자경뿐이라는지 알았다. 어머니의 전화 통화를 들었을 때부터 결정했다.

자신은 우상진의 아들이다. 누가 뭐래도,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런데 우강희가 집에 들어왔다.

우천희는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그들 모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집안에서는 친자 확인 검사를 했다고 들었는데 외모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와 아들.

우수한 유전자인 아버지 우상진의 피는 진했다. 우천희는 명망 높은 오메가인 어머니와도 닮지 않았고 어머니의 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아버지 우상진을 닮은 부분이 없었다.

집안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꼭 친자 확인 검사를 하지만 돈으로 얼마든지 검사가 조작될 수 있었다.

우천희는 우상진의 아들이어야 했다. 저는 오직 우상진의 아들이라는 위치여야만 빛날 수 있었다.

그 불안이 우상진과 똑 닮은 우강희를 보자 분출되었다.

우습게도 우강희는 우천희의 불안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더 분하고 수치스럽다.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는 자신감이 우천희를 더 작아지며 뾰족하게 만들었다.

우천희는 책상 위에 피가 말라붙은 볼펜을 올리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창에 비친, 피 묻은 제 얼굴을 보았다.

“개새끼, 알면서 가지고 놀았어. 날 모욕했어.”

으득 이를 갈며 우천희는 볼펜을 노려보았다.

* * *

한주는 객실 복도에서 매니저와 얘기 중이었다. 블랙 컨슈머의 룸서비스 요청이 한주에게 가서 매니저가 대신 인계받고 있었다.

“박한주.”

복도를 가로지르며 거침없이 이성진이 다가왔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이라 한주는 당황했다.

“이성진? 네가 여기 왜? 놀러 왔어?”

“가자.”

덥석 손목이 잡힌 한주는 잠시 버텼다.

“야, 왜?”

“우강희가 다쳤어.”

“뭐?”

차에서 호텔 측에 전화를 걸어 이미 양해를 구해 두었기에 이성진은 무리 없이 유니폼을 입은 채인 한주를 데려갔다.

이성진은 굳은 표정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항상 느긋하며 나른하던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쳤다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집에 같이 있었는데 그사이에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지금 병원에 있어. 우성 알파가 아니면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태야.”

“뭐?”

“다쳐서 페로몬이 제어되지 않아. 페로몬 억제제는 지혈 억제제가 들어 있어서 쓸 수 없고.”

“지혈 억제제라니…… 피를 흘렸다고?”

우강희는 다른 알파보다는 강하기에 자신의 페로몬에 강박적이었고 타인에게 페로몬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타인을 기피했다.

그가 페로몬 제어를 놓쳤다면 가장 도움이 되는 사람은 한주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급히 내렸다.

로비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이성진을 보자 인사를 하며 직원 엘리베이터로 빠르게 안내했다. 어느새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의사들이 뒤를 따랐다.

“현재 VIP 병동은 폐쇄했고 직원들 출입도 막아 두었습니다. 우강희 님 말씀으로는 볼펜에 찔렸지만 장기를 비껴 나갔으니 지혈 정도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이성진에게 보고했다.

“검사는?”

“못 했습니다. 우강희 님의 일은 사지석 박사의 지시를 우선적으로 따르라는 지침이 있어 그의 말대로 우선은 음압 병상으로 격리하고 있습니다. 치료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탓하지 않습니다. 당장 병원 전체 소취를 하세요. 우강희가 움직인 루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성진의 요구가 의아한지 남자는 되물었다.

“네? 알파와 오메가를 전문적으로 검사하니 기본적인 소취는 하고 있습니다. 전체 소취까지는 하지 않아도.”

“하세요. 해야 합니다.”

“아, 네, 지시 내리겠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로 진행하세요.”

“음, 네.”

더는 왈가불가하지 않고 중년의 남자는 옆의 직원에게 고갯짓을 해 지시를 내렸다.

“사지석 박사는 현재 여수에 내려가셔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도와줄 사람을 데려왔어요.”

도와줄 사람이라는 말에 남자는 이성진과 같이 온 한주를 잠시 보았지만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따라서 내리는데 한주는 VIP 병동 입구와는 반대쪽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저 사람은 우강희 담당 공무원인데?’

이성진이 VIP 병동 입구에 다다른 모습에 한주는 인사할 틈도 없이 따라갔다.

“입구에 에어 샤워 에리어를 만들고 안전복을 입어도 소취 하도록 하세요. 여기서부터는 저와 이 사람만 들어가겠습니다.”

“아, 그럼 친구분께서는 안전복을 입으셔야 하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베타 아닙니까?”

한주의 일인데 대화는 남자와 이성진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한주는 그들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간이 가고 있었다.

“전 페로몬 무감증이라 괜찮아요.”

“아, 그렇군요.”

들어 본 적이 없는지 뒤에 선 의사를 힐끔 보았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병명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원장의 아들인 이성진이 허락한 일이니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박한주, 따라와.”

VIP 병동으로는 이성진과 한주만이 들어갔고 같이 왔던 사람들은 밖에서 대기했다. 페로몬을 막아 주는 특수 마스크를 쓰고 안전복을 입은 간호사가 병실로 안내했다.

“제길.”

작은 욕설에 한주는 이성진을 보았다. 성진은 손으로 코를 덮고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크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박한주, 너 진짜 괜찮아?”

“왜? 페로몬이 심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한주는 우강희가 있을 병실을 보았다. 그 앞에만 카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성진은 새삼스럽게 한주를 보았다.

한주의 페로몬 무감증을 알고 연구실에서도 보았지만 저조차 강하게 느끼는 우강희의 페로몬에 한주가 아무렇지 않자 누가 더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

로열 알파인 저조차도 복도에 깔린 우강희의 페로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며 숨이 막히고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것은 외부적인 효과가 아닌 페로몬에 의한 심리가 몸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이었다. 제 페로몬으로는 약간의 방어로 농도를 낮추는 역할밖에 하지 못해서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어서 들어가 보세요. 우강희 님을 구할 수만 있다면 제, 제 피라도 얼마든지 빼 드릴게요.”

간호사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을 재촉했다. 강희의 상태 때문에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원장의 아들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베타인 간호사는 이성진에게 재차 권유했다. 그녀는 마스크를 했음에도 영향을 받았다.

“밖에서 기다리세요.”

“아, 하지만 제가 도와 드릴게요. 저라도.”

명령했음에도 거부하고 나서려는 간호사를 향해 이성진은 거부의 페로몬을 뿜어냈다. 평소 제어만 하던 페로몬을 거리낌 없이 내보냈다. 그러자 곤두선 신경이 조금은 풀어졌다.

이성진은 힐끔 박한주를 보며 다시 한번 상태를 확인했다.

“우리 둘만 들어갈 겁니다. 박한주, 들어가자.”

“하지만…….”

간호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계속 병실을 보았다. 이성진은 페로몬을 풀었지만 간호사를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아무리 해도 우강희를 이길 수는 없다. 이길 생각도 해 보지 않았지만 막상 그 차이를 느끼니 허탈했다. 쓰게 웃으며 한주를 데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 카트를 끌고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아 잠갔다.

간호사가 밖에서 급히 문을 두드리며 불안을 드러냈다.

“도와 드릴게요. 제가 있어야만 해요. 제가……. 우강희 님에게 제 피라도, 아니 간이나 장기라도 꺼내 드릴 테니 제발…….”

비닐 장막이 드리워진 침상에 우강희가 누워 있었다. 어수선함을 느끼고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복부에 엉성하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

비닐로 막혀 있었지만 언제든 젖히고 나올 수 있는 얄팍한 차단이었다.

한주는 병실에 들어왔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이성진은 카트를 끌고 성큼 다가갔다. 속으로는 마스크를 써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막상 마스크를 쓰겠다고 마음먹어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로열 알파의 자존심이었다.

“볼펜에 쑤셔졌다고? 옷 들어 봐.”

비닐을 젖히자 농도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페로몬에 섞인 감정이 몸을 움직이려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했고 대비하며 저의 페로몬을 보호막처럼 둘렀지만 소용없었다.

“흣!”

이성진은 턱에 힘을 주며 버텼다.

페로몬을 내보내며 우강희의 페로몬에 저항해 침범받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로열 알파인 이성진은 빨리 우강희의 옷을 벗기고 제 팔을 그어서라도 상처를 치료하고 싶어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나마 우강희가 제어하며 원치 않았기에 이 정도였다.

우강희의 시선은 한주에게 박혀 있었다.

“이리 와.”

그가 한주를 불렀다.

이성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박한주를 끌어다가 우강희의 앞에 데려다 놓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저의 의지가 아닌 명령으로 몸이 움직이려 해서 부아가 치밀었다.

“이리 와, 한주야.”

“…….”

한주는 강희를 노려보기만 했다.

“한주야.”

이성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남에게 부탁하는 우강희도 처음이지만 그가 나약한 부탁을 하는 모습도 믿기지 않았다.

갈구하는 눈빛으로 오직 너뿐이라며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도 이성진은 심장이 뛰었다.

“왜 상처가 생겼는데?”

“한주야.”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안 그래?”

한주는 확신했다. 상처 입었으면서 우강희는 태연했다.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공격을 허락했다는 소리다.

우강희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로열 알파인 이성진조차 마음이 흔들리는데 한주는 우강희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냉정한 거부에 이성진은 짜증이 나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둘이 싸우든 말든 우선은 와서 도와. 이 녀석 치료는 해야지.”

“내가 왜?”

한주는 냉정했다.

“우강희, 네가 말해 봐. 그런 상처를 입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피하지 않고 상처 입었어. 안 그래?”

우강희의 페로몬이 짙어졌다. 페로몬은 한주의 몸을 포위하듯이 감싸며 제 영역으로 만들었다. 오메가였다면 폭행이라고 신고할 만큼 짙은 페로몬이었다.

이성진은 우강희의 페로몬 움직임을 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알면서도 걱정이 되어 와 줬잖아. 이성진은 손이 떨려 치료하지 못해. 네가 해야 해.”

이성진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우강희의 말대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원래 손을 떨고 있던 것일까, 아니면 우강희의 말 때문에 생긴 현상일까.

한주도 이성진의 손을 보았는지 속에서부터 끌어 올려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주야.”

힘없는 목소리가 다시 불렀다. 거짓임을 알지만 한주는 침대로 다가갔다.

이성진에게는 우강희가 페로몬으로 한주를 끌어당기는 모습으로 보였다.

사지석 박사의 테스트를 지켜본 후 이성진은 해외 논문까지 전부 찾아보았다. 페로몬 무감증의 환자는 대다수 페로몬에 과민 반응을 일으켰다.

한주처럼 마치 강력한 안전복을 입은 사람처럼 영향을 아예 받지 않는 경우는 논문에 없었다.

한주가 침대로 가까이 가자 우강희의 상태가 잘 보였다. 배에 붕대가 감겨 있지만 피가 묻어 있었다. 대형 병원에서 받았다고 하기에는 허술한 처치였다.

움직여서 상처가 눌렸는지 붕대 위로 피가 진하게 배어 나왔다.

“이성진, 할 수 있겠어?”

이성진의 손을 보니 약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심하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우강희는 상처에서 피가 나오든 말든 관심 없이 한주를 보았다.

“손.”

그는 한주에게 말했다.

“손, 잡아 줘.”

“싫어.”

한주는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성진은 카트에서 은빛의 작은 시저를 꺼내 감아 놓은 붕대를 거침없이 잘랐다. 배를 압박해 놓은 상처가 벌어지면서 주르륵 피가 흘러나왔다.

상처가 난 지 시간이 지났고 배를 압박해 두었는데도 아직 지혈되지 않았다.

처치해도 우강희는 한주만을 보았다.

“재민용이 일방적으로 각인하는 바람에 약혼을 해야 했어. 아버지에게 파혼한다고 말했어.”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 네가 파혼하겠다고 해서 간단하게 파혼이 된다고? 그 사람은 너한테 각인했다면서.”

“각인은 예전에 풀렸어.”

“뭐?”

이성진은 마취 주사를 꺼내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민용 형의 각인이 예전에 풀렸다고?”

“페로몬에 의한 충격으로 각인한 거야. 너희처럼 한동안 날 만나지만 않았으면 풀렸을 가벼운 충격에 불과했어.”

‘너희처럼?’

한주는 이성진의 얼굴을 보았다.

“어른들이 약혼을 진행하는 바람에 나와 정기적으로 만났고 그래서 각인이 지속되었지. 어차피 내가 허락하지 않으니 오래가지 못할 각인이었어.”

마치 그가 타인의 각인을 조절할 수 있다는 듯이 들렸다.

우강희는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주삿바늘이 상처 부위를 찌르며 마취액이 주사되었다.

“똑바로 누워.”

이성진의 말대로 우강희는 한주를 바라보느라 비스듬했던 몸을 똑바로 눕혔다.

여전히 고개는 한주를 향해 있었다.

한주는 고집스럽게 상처 치료만 보았다. 그의 손이 한주의 팔 근처를 배회했다.

마취해서 바늘로 찔러 꿰매도 아프지는 않을 텐데 바늘을 찔러 넣는 순간 강희는 아프다는 듯이 한주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을 탁, 쳐 냈다.

“연기하지 마. 마취했잖아.”

이성진은 속이 시원했다.

* * *

“……상처 부위는 크지 않지만 장기가 모여 있는 복부야. 임시적인 조치이니 진정되면 내일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해.”

“그래.”

드레싱을 끝내고 이성진은 허리를 폈다.

간단한 처치지만 24시간을 뜬눈으로 보낸 사람처럼 피곤했다. 우강희의 페로몬이 저를 향해 있지 않았지만 영향은 지대해서 처치하는 동안 타인의 페로몬에 의해 들쑥날쑥한 감정을 다스리며 자신을 보호하느라 신경을 소모했다.

카트에 처치 도구를 던져 놓고 이성진은 밖으로 향했다.

“……둘이 얘기해. 간다.”

처치하는 내내 강희는 한주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보려고 했지만 매몰차게 거부당했다.

처음에는 누가 우강희를 그런 식으로 대하겠냐란 생각에 재밌었는데 행동이 지속되자 이성진은 조금씩 한주에게 짜증이 났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도 같이 가.”

“잠깐! 윽!”

한주가 이성진의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우강희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신음하며 누웠다. 절 봐 달라는 연기였다.

한주는 무시했지만 이성진은 그렇지 못했다.

“넌 못 나가.”

“왜? 멀쩡한 거 봤으니 더 있을 필요 없잖아.”

이성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의 한주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우강희와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페로몬이 끊임없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주의 몸을 에워쌌다. 어떻게든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우강희의 몸짓과 똑같았다.

이성진은 강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사실대로 말했다.

“……저 녀석이 널 페로몬으로 떡칠해서 나가면 안 돼.”

빠득, 한주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병원인데 소취제 정도는 있잖아. 안 되면 다른 방에서 샤워하고 가면 되고.”

“……저 녀석이 그 정도 수준의 알파이면 날 부르지도 않았어.”

“…….”

“……넌 옆에 있어.”

이성진은 한주를 두고 병실을 나왔다. 복도에 있던 간호사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베타이고 마스크를 썼지만 우강희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 열이 났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과호흡과 함께 쇼크가 올 수도 있다.

한 명에게 맡겨 놓고 교대도 해 주지 않는 행태에 관련자를 질타할 생각을 하며 이성진은 간호사를 데리고 병동 밖으로 나갔다.

* * *

여타 알파와 오메가의 부부들은 쇼윈도 부부가 많았지만 이성진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았다.

아버지 이성원은 강한 부드러움을 가졌고 인격자이며 그의 어머니 또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가씨였다. 아버지에 비해 떨어지는 집안이라서 모임에 다녀오면 가끔 흐린 미소를 지었지만 그 외에는 생활에 만족하며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어른들은 어머니가 내조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했고 그 말이 쌓였는지 집착으로 변했다. 그래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4학년 때, 자다가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아버지의 핸드폰을 몰래 보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초조한 표정으로 핸드폰의 화면을 보고 때로는 화면 사진을 찍었다.

“남의 남편을 흔들다니…… 가만두지 않겠어.”

어렸던 이성진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추궁하지 않았고 바람을 피운 상대를 만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만난 사람은 그녀보다 약하고, 강하게 대할 수 있는 상대였다. 상대의 아들이며 이성진과 같은 나이의 박한주였다.

어머니와 이모의 대화를 듣고 그것을 알았다.

“언니도 참, 형부가 어디 그럴 사람이야? 그리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 여자에게 뭐라고 해야지, 왜 애를 만나? 성진이랑 같은 나이라면서.”

“내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제 엄마가 어떤 행실을 하는지 아들도 알아야지!”

“언니, 형부를 믿어. 아무리 내가 언니 동생이라도 형부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지금은 아닐 수도 있겠지, 내가 미친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앞으로 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그이가 그 사람에게 흔들리면…… 난 절대 그 꼴 못 봐!”

이성진의 어머니는 울었고 이모는 한숨을 쉬며 달래 주었다.

“그이가 정말 그랬다면…… 난 살 수 없어. 그나마 그이가 날 사랑해서, 그 사랑 하나 믿고 이 집안에서 버티는데…… 그 사람이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난…….”

“언니.”

두 사람의 대화는 이성진의 아버지인 이성원도 들었다. 천천히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처럼 이성원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급히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갔다. 직감적으로 그 소년을 만나러 간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가 상처 입힌 소년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어떤 소년일지, 어떤 사람일지.

아버지를 쫓아가 본 소년은 저에 비해 키가 반도 되지 않는, 두 학년은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동갑이라는데 슬픈 표정으로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한주야.”

아버지는 소년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주먹이 이성진에게도 보였다.

“한주야.”

“아저씨.”

앙다문 입이 벌어지며 소년이 고개를 들어 이성원을 보았다.

애써 괜찮은 척 꼿꼿이 서 있었지만 어린 이성진이 보아도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울고 있었다.

“아저씨, 이제 우리 엄마, 만나지 마세요.”

“한주야.”

“더는 아저씨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가 엄마를 만나는 거, 싫어요. 엄마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진은 그 말로 소년이 얼마나 이성원을 좋아하는지 느꼈다. 이성진의 아버지인데, 저가 뺏어 버린 기분이 들어 미안함마저 들었다.

“미안하다, 한주야.”

“다시는…… 엄마에게 연락하지 마세요.”

고개를 숙이고 서 있기만 하니 이성원이 먼저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떠나자 혼자 남은 소년은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였다. 거친 숨을 죽이며 한참을 울었고 이성진은 소년이 그 자리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자 뒤를 따랐다.

미안해서, 그런 것밖에 해 줄 수 없었다.

그 일은 상담을 통해 어머니의 의부증으로 진단되었고 상담 치료를 진행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년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푹 숙이며 혼자 걸어가던 뒷모습.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고 있을지, 이성진은 때때로 소년을 떠올렸었다.

* * *

“한주야, 이리 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한주를 불렀다.

어느새 침대에 일어나 앉은 우강희는 한주가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달려와 붙잡으려는 사람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피가 말라붙어 지저분해졌지만 외모에 흠집을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다쳐서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한주가 바라보고만 있자 다시 불렀다.

“옆에 있어 줘.”

“아니, 갈 거야.”

한주는 거절했다.

“페로몬? 택시 타고 곧장 지영이네 가서 소취 하면 돼. 지영이네 어머니가 페로몬을 싫어해서 고성능 소취제가 구비되어 있어.”

우강희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또 김지영?”

“왜 질투 나?”

주먹이 쥐어졌다.

“그런 놈이 약혼자가 있으면서 고백을 해?”

우강희는 한주의 비난에 가슴이 뛰었다. 이성진에게 한주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과연 만나러 와 줄지 자신이 없었다.

재민용이 그의 약혼자임을 알았을 때 바라보던 한주의 표정, 비난하는 시선이 떠올랐다. 벽을 세우고 차갑게 밀어내며 관계를 잘라 내는 시선이었다.

화를 내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에 우강희는 심장이 두근거렸었다.

질투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한주가 키스하자며 먼저 제안하고 입 맞추는 동안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지만 조금의 불안은 있었다. 그런데 질투하는 모습을 보니, 기뻐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한주 또한 절 좋아한다.

상처를 핑계로 제어를 풀어 버렸다. 페로몬이 흘러나와 주위를 곤란하게 만들었고 노출된 의료진들은 어떻게든 자신이 치료하겠다면서 메스를 들고 다가오기까지 했다.

몸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페로몬은 반대로 우강희를 해칠 수도 있었다. 그의 상처가 더 나빴다면 로열 알파인 이성진이 와도 위험했었다.

오직 한주만이 그를 구해 줄 수 있었다.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

우강희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힘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힘의 논리로 상대를 누르는 사회에서 자란 우강희에게 한주는 예외의 존재였다.

“한국 호텔에서 날 구해 주었을 때.”

한주도 기억하는지 눈만 깜빡였다.

“그날 재민용이 나에게 각인했어.”

두 번째로 최악의 날이었다.

페로몬에 휩쓸려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고, 그에 사람들이 자극받아 이성을 잃었다. 악순환처럼 그들이 내보낸 페로몬이 다시 우강희를 흔들었다.

끔찍한 순간 박한주가 나타났다.

“작년 12월, 한국 호텔 자선 파티에서 우천희가 오메가 페로몬으로 장난을 쳤어. 연회장은 순식간에 페로몬이 흘러넘치며 엉망이 되었지.”

거짓은 말하지 않고 일부의 진실만 말했다.

박한주가 절 무서워하지 않도록.

“그 안에 재민용이 있었어. 너무 가까이 있었지. 오메가 페로몬에 자극받아 폭발한 내 페로몬에 재민용이 충격을 받았고 각인이 일어났어.”

그때의 기억은 생생했지만 절 구해 준 사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호텔 직원이라 여겼지만 그날 근무자 중에는 없었다. 대타를 뛰어 그날만 온 은인은 서류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했어도 베타였기에 제대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우강희만큼 강한 알파나 오메가라고 생각했다. 국내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듣지 못했다. 절 구해 준 사람은 소년이었기에 발현했지만 아직 정부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추측했다.

“그때 나에게 각인한 사람은 밝혀진 것만으로 총 53명이야.”

그것은 일주일이 지났을 때의 숫자였다. 사고 직후에는 수가 더 많았지만 다행히 일주일 만에 53명으로 줄었다.

각인은 일주일 사이에 대부분 풀렸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소수만 남았고 보호자인 아버지는 책임을 지라고 압박을 받고 있었어. 각인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을 다 책임질 수 없으니 한 명을 골라 형식적인 약혼을 하자는 말이 나왔지.”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유독 한 베타가 눈에 들어왔다.

“각인 대상이 약혼하면 일시적인 충격으로 각인된 그 외의 다른 사람은 풀릴 수 있다는 말을 연구소에서 들었어. 테스트로 각인이 풀리는 현상을 확인했고. 원한다면 언제든 파혼을 해도 좋다는 약속과 함께 약혼이 진행된 거야.”

시선을 돌리다가, 기숙사로 돌아가다가, 고개를 돌려보면 시야 안에 한주가 있었다.

“예상대로 약혼식과 함께 다른 사람의 각인은 다 풀렸어. 약혼자로 남은 재민용을 제외하고는.”

우강희는 한주를 보았다.

“약혼은 아무 의미도 없어서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곧 파혼할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파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한주는 자신이 왜 그에게 실망했는지 또박또박 설명했다.

“네 고백이 진심이었다면 넌 약혼자가 있다고 말했어야 해.”

왜 우강희에게 화가 났는지, 어떤 부분에서 감정이 상했는지.

“내 친부가 재강원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믿었다면 네 약혼자가 재민석의 형이라고 말했어야 했어. 네 마음이 진심이라고?”

“나에게 그런 일들은 문제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한주가 화를 내면 낼수록 우강희는 심장이 뜨거워졌다.

“날 좋아했다면 내 입장에서도 생각했어야지. 내가 받을 배신감을 생각하고 내 실망을 걱정하며 말했어야 해.”

“……한주야.”

“이기적인 새끼.”

욕을 먹는데 뇌가 녹아내릴 것처럼 달콤했다. 방 안에 퍼져 있는 페로몬이 한주를 감쌌다.

그를 비난하며 태도를 지적하고 화냈지만 한주의 태도는 분명했다.

한주가 정말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약혼자가 있음을 신경 쓰지도 않았고 비난할 이유도 없었다.

우강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한주에게 고백했다.

“처음이었어. 타인을 좋아하게 된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지. 페로몬 때문에……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날 좋아해 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날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발에 차가운 바닥이 닿았다. 우강희는 한주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박한주, 너는 그 지독한 페로몬 속에서 날 구해 냈어. 오직 너만이 날.”

“아니,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널 구해 냈을 거야.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난.”

“처음 겪는 감정에 서툴러서 널 생각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지만 그렇다고 널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야. 널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급했을 뿐이지 속이려고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침대에 누워. 넌 환자야.”

“그 일은 내 안에서 그저 먼지 한 톨에 불과했어. 중요하지 않으니 말할 생각도 하지 못했어.”

이 와중에도 절 걱정하는 한주의 말이 기뻤다.

“말하지 않아서 화났어?”

다가가도 한주는 물러나지 않았다.

“약혼자가 있는데 너한테 고백해서 서운했어?”

“아니라니까!”

필사적으로 부정하지만 한주의 귀는 붉었다.

“웃지 마! 아니라고!”

병실을 벗어나려고 돌아서는데 우강희가 껴안았다. 쿵, 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손 풀어! 너 방금 배 뚫려서 꿰맨 사람이야. 기껏 꿰매 놓은 상처 터져 버려.”

그가 힘들까 봐 저항하지 못하고 말로만 위협하는 행동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야, 스킨십 금지라고 했잖아!”

“키스해도 돼?”

“안 돼!”

우강희는 웃음이 나와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전에는 왜 하자고 했어?”

“그때는 단지 다른 걸 대신해서 귀찮으니까, 한 방에.”

돌아보는 얼굴을 감싸며 입술을 붙였다.

어설픈 뽀뽀에도 한주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벌려 점막을 핥고 혀를 집어넣어 타액을 빨아들이지도 않았는데 한주의 얼굴은 불타듯이 빨개졌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대로 입술을 맞붙이며 한주의 혀를 끄집어내 빨아 주고 싶었다. 당황하는 사이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부드러운 피부도 만지고 싶었다.

팔딱거리며 뛰는 심장을 가슴으로 누르며 어디를 더 느끼고 어느 부분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같은 사내이니 느끼는 곳은 찾기 쉽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자극이 강해 우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흔들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우강희는 그럴 수 없었다.

입술을 붙인 것만으로도 눈이 동그래지며 붉게 물든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다른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사랑해. 박한주. 진심이야.”

뭉근하게 입술을 문지르며 따끈한 열기를 즐겼다. 한주에게서 그의 페로몬이 풍겼다.

* * *

재민용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민석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주말에는 언제나 저녁 시간 직후에 동생이 돌아왔기에 방에 있을 시간이었다.

“뭐야? 노크도 몰라?”

평소라면 먼저 사과하며 민석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노력했겠지만 민용은 등 돌린 민석의 의자를 돌렸다.

“뭐야?”

베타 주제에 오메가인 형을 무시하고 깔보는 동생이 가엽고 불쌍해 적당히 행동을 받아 주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민용은 붉어진 눈으로 동생을 노려보았다.

“말해 봐. 박한주, 어떤 사람이야?”

“뭐?”

“우강희가…….”

파혼을 말하던 우강희가 생각나 민용은 몸을 떨었다.

어느 국회 의원의 출판 기념회가 있었던 날, 우강희를 향한 각인이 풀렸다.

오래간만에 그를 봐서 좋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갑자기 오메가의 발정기라는 진성 히트사이클이 일어났다.

히트사이클은 각인 대상의 사이클에 맞춰지고 각인 대상이 아닌 사람의 페로몬에는 흥분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성 히트사이클이라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페로몬에 쉽게 흥분하며 몸을 섞었다. 그래서 알았다.

꿈 같은 각인이 끝났다는 것을.

“우강희가…… 박한주라는 베타 때문에 파혼하고 싶대. 가족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그 말을 했어! 아버님도…… 강희의 아버님도 파혼하라고…….”

재민용은 눈물을 흘렸다.

각인의 달콤함을 잊을 수 없었다. 재씨 집안에서 겨우 오메가로 발현하고 나서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언제나 눈치를 봐야 했고 어머니는 어떻게 내 배에서 이런 자식이 태어날 수 있냐는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연못 위에 둥둥 떠 있는 부레옥잠같이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누구도 잡아 주지 않았다.

부모가 있고 가문이 있지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재씨 집안에서 재민용이란 존재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런데 자선 파티의 사고로 우강희에게 각인했다.

각인하고 나서야 민용은 자신이 참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각인은 사고였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감정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의 굉장한 충격이었다.

우강희와 약혼하면서 집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었다.

모든 것이 우강희 덕분이었다.

그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들이었다. 그의 마음이 민용에게는 없지만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기에 이대로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각인이 풀려도 다시 하면 되니까. 파혼만 되지 않으면 괜찮았다.

파혼만 아니라면.

“또 박한주.”

재민석은 한숨을 쉬며 우는 민용을 물끄러미 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