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각인(2) (22/31)

22. 각인(2)

이성진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강희의 병실에 들렀다. 한주는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다가 성진이 들어오자 벌떡 일어났다.

“소취제!”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자. 계속 환기 중이니까 내일 아침에는 비치된 소취제로도 괜찮을 거야. 그런데…….”

이성진은 침대를 보았다.

우강희가 누워 있었는데 자고 있다고 보기에는 누운 모양이 이상했다.

똑바로 누웠지만 한쪽 팔과 한쪽 다리는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고 자고 있는데 입술은 웃고 있었다.

기괴한 모습에 이성진은 눈을 떼지 못했다.

“……우강희는 자?”

“……기절했어.”

“……왜?”

“다쳤는데 자꾸 움직여서…….”

한주는 말을 흐렸다. 다쳤는데 자꾸 움직여서 기절했다는 말이 이상했지만 이성진은 문득 얼마 전에 보았던 페이퍼가 떠올랐다.

우강희가 한주에게 고백했다는 말을 들은 후 한주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박한주가 어떤 학교에 다녔으며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호텔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는 것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무술을 배운다는 것도.

딱 평균적인 고등학교 1학년의 체형으로 마른 몸의 한주는 별로 근육은 없어 보였다.

우강희가 괜히 움직이다가 자제하지 못해 기절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진은 찰떡같이 ‘한주가 우강희를 기절시켰다.’라고 이해했다.

유독 박한주의 볼이 붉었으니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좀 더 앳되고, 좀 더 감정을 터트리던 한주를 떠올렸다.

“……잘 지내네.”

“뭐? 아, 우강희와?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어.”

이성진은 미소를 지으며 한주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엷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스쳤지만 따끔하게 피부를 공격하는 페로몬도 있었다.

마킹하듯 박한주의 몸에 묻은 우강희의 페로몬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한주를 만진 이를 거부했다.

로열 알파인 이성진은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꿋꿋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을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지만 이성진은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이성진?”

계속 머리를 헝클이는 손을 밀어내다가 서로의 손이 닿았다. 우강희의 페로몬은 이성진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했고 한주에게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소취 하고 싶으면 사람을 보내 줄게. 집에 가도 돼.”

“아냐, 됐어. 아침이 되면 옅어진다며. 아침에 알아서 소취 할게. 엄마에게도 내일 들어간다고 전화 걸어 두었고.”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응?”

병실에 있기 힘들었다. 깨어난 기척은 없는데 우강희의 페로몬이 아프게 피부를 건드렸다. 의식이 없어도 본능적으로 제 것을 지키는 그 집요함이 이성진을 공격했다.

“……우강희를 좋아해?”

“뭐? 무슨, 그런…… 뭘 그런 걸 물어.”

한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지만 뺨은 달아올랐다.

고백을 받고 우강희의 약혼자를 알았으면서도 옆에 있으니 이미 대답은 나와 있었다. 그래도 이성진은 확인하고 싶었다.

“……널 만난 적이 있었어.”

“아, 그때. 날 봤었다고 했지.”

마치 누군가에게 들은 듯이 말했다.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이성진은 초등학생의 한주가 이성원에게 마지막을 말했을 때라는 것을 알았다.

박한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했다.

“그때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야. 엄마와 난 잘 지내고 있고, 네가 그 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돼. 지금은 친구잖아.”

“……친구.”

입 안이 썼다. 우강희의 페로몬에도 버텼지만 친구라는 말에 무너졌다.

“……그래, 그럼 쉬어. 난 간다.”

우강희보다 먼저 만났다면 달라졌을까.

이성진은 부질없는 의문을 삼켰다.

* * *

전신을 감싼 하얀 안전복과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병실로 들어와 우강희에게 연결된 기계를 확인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주는 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보폭이 넓고 키가 큰 남자였다. 이제까지 간호사가 한 번씩 같은 복장으로 체크하고 갔지만 남자 간호사는 그중에 없었다.

“우강희 담당 공무원이시죠?”

조은석은 흠칫 놀랐다. 단박에 눈치챌 줄은 몰랐다.

“예리하시군요.”

“그거, 태블릿에 스티커요.”

래핑해서 들고 있는 태블릿 뒷면에 보란 듯이 국가에서 제공했다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아,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깍듯이 인사해서 그대로 나갈 줄 알았는데 조은석은 슬금슬금 한주의 옆으로 왔다.

“언젠가 인사하게 될 것 같았는데, 이런 차림이라 명함을 드릴 수는 없고, 전 우강희 님을 담당하는 조은석이라고 합니다.”

“박한주예요.”

한주는 일어나 같이 인사했다.

조은석은 우강희가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제법 멀쩡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페로몬 무감증이라 우강희 님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보고를 받기는 했지만…… 정말이었군요.”

한주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네, 아무렇지 않아요.”

“우리는 박한주 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담당인 조은석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이렇게 우강희 님이 상해를 입는 일은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걸 왜 저한테 말하세요?”

“박한주 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안전복과 마스크를 하고 있어 조은석의 눈만 보여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이지 않았다.

“왜 저 때문인데요? 전 저 녀석 경호원도 아니고, 다치는 순간 그 자리에 없었어요.”

“압니다. 우강희 님은 댁에서 우천희 님과의 트러블로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자세한 상황이 궁금하시겠지만 프라이버시라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너는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지, 정도의 자랑 같았다. 안전복 너머의 눈이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뭐지? 이 사람. 그냥 사생 팬인가?’

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불법 도청이죠? 공무원이 그래도 됩니까?”

“도청했다는 증거 있습니까?”

활짝 웃는 얼굴이 안전복 너머로 그려졌다. 짜증 나 본론으로 돌아왔다.

“우강희가 다친 것이 저와 무슨 상관인데요?”

“네, 박한주 님 때문입니다. 우천희 님이 무슨 짓을 하든 놔두었을 우강희 님이 제대로 움직이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마치 연극 무대에 오른 사람처럼 조은석은 한주를 향해 팔을 벌렸다.

“박한주 님, 당신을 원해서.”

일순 광기에 사로잡힌 사이비 광신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감정 변화 없이 식물처럼 지내시던 분이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방해되는 주변을 정리하시는 거죠. 박한주 님에게 조금의 위해도 가하지 못하게.”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담겨 있어 팔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우강희 님을 너무 자극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해 주면서 얌전히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좀 더 산 사람의 조언인데 너무 애태우면 애정이 떠나갈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조은석은 우강희를 걱정하며 아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한주는 무례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구는 호인은 아니었다.

“이거, 우강희에게 얘기해 둘게요. 너 때문에 네 담당 공무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고.”

“네? 아니 왜요? 이,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잖아요? 우강희 님 몰래 그저 도움을 드리려는 것뿐인데 왜요?”

“큰 소리 내면 깰 수 있어요.”

흡, 조은석이 입을 다물고 우강희를 살폈다. 한 대 맞고 기절한 사람이 눈을 뜰 리 없다. 키스하며 어찌나 질척대는지 좀 쉬라고 손을 썼다.

한주는 메모지와 펜을 조은석의 앞에 내밀었다.

“아저씨 직통 전화번호 적어 주세요. 앞으로 개인적으로 연락할 일도 있을 테니까.”

“아, 아저씨는 아닌데.”

조은석은 메모지에 개인 번호를 적으며 힐끔힐끔 한주를 보았다. 기선 제압을 하려고 접근했다가 오히려 목줄을 잡혀 버렸다.

한주는 조은석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번호가 맞는지 확인한 후에 풀어 주었다.

* * *

우강희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했다.

발현한 이후 그렇게 변했다. 특히 장소가 바뀌면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기계를 확인한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잠시 낯선 환경에 긴장했던 몸이 지난밤이 생각나자 느슨하게 풀어졌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불빛에 그는 다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페로몬에서 정보를 읽었다.

애정과 소유욕, 질투가 섞인 페로몬은 한 사람을 향했다.

화장실 문이 열리며 한주가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우강희는 나직하게 웃었다.

잠에 취해 눈도 뜨지 않은 한주는 느리게 움직였다.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소파를 잘 찾아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소파의 이불을 들더니 몸을 돌려 그에게로 왔다. 침대 주위에 둘린 얇은 비닐을 젖혔다. 한주가 누우려는 모습에 얼른 몸을 옆으로 움직여 자리를 만들자 자기 자리인 듯 누워 버렸다.

곧 이불을 덮고 고른 숨을 쉬며 잠들었다. 목소리를 낸다 해서 한주가 깨지는 않겠지만 그는 손으로 입을 가려 숨소리도 막았다.

무의식으로 옆자리로 찾아와 주었다. 몸을 옆으로 돌리자 상처가 눌려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금이 현실임을 알려 주는 반가운 통증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

“네가 찾아왔어.”

우강희는 한주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가슴에 한주의 등이 닿으며 얇은 옷 너머로 체온이 전해졌다.

머리카락에 입술을 문지르는데 이질적인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다. 이성진의 페로몬이 한주의 머리카락에 묻어 있었다. 우강희의 페로몬이 경계했을 텐데도 머리카락을 만졌다. 노골적으로 페로몬까지 남기고.

일순 우강희의 눈이 가늘어지며 한주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몸에서는 다른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몸을 감싸 안으며 바짝 끌어당겼지만 저항은 없었다.

입술이 조금씩 피부를 어루만지며 목덜미에 타액을 발랐다. 머리카락과 뒷덜미가 만나는 경계를 이빨로 깔짝깔짝 가볍게 긁다가 입에 넣어 빨았다.

한주를 깨울 만큼 강하게 깨물어 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저항하며 싫다고 몸을 뒤척여도 꽉 잡고 강렬하게 자국을 새겨 넣고 싶었다.

“아마 그 전에 얻어맞겠지.”

충분히 현실적이어서 우강희는 웃음이 났다. 한주의 목에 옅은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만족하며 더 품에 안았다.

* * *

“테이블에 놓고 가세요.”

낮은 목소리에 한주는 서서히 잠에서 깼다. 수면 위로 밀려난 의식은 흠뻑 잠에 젖어 있어 금방 또렷해지지는 않았다. 달칵거리며 그릇 소리가 나서 일어나야 하나 고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배를 감싸며 허리에 얹어진 팔이 한주의 몸을 끌어당겨 깊이 안았다.

목덜미에 타인의 숨이 닿았다.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일요일 한낮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나른함에 몸이 늘어졌지만 공기 중에 음식 냄새가 나서 한주는 눈이 떠졌다.

전날 밤 저가 잤던 소파가 보였다. 비닐 차단막도 가까이에 보였고 침대의 안전대가 올라와 있었다.

“깼어?”

“떨어져. 날 왜 침대에…….”

“자다가 네가 여기로 올라왔어.”

한주는 끙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또…….”

“또? 잠버릇이야? 기숙사에서는 못 봤는데.”

“밖에서 잘 때 가끔 나와.”

우강희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오래 누워 있었는지 손끝에 닿은 매트리스가 따뜻했다. 귀에 열이 몰려 얼굴은 더 뜨끈해졌다.

우강희의 단단해진 하체가 엉덩이에 닿아서 서둘러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주 역시 앞섶에 텐트를 쳤다.

아침의 생리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화장실을 가려는데 우강희가 허리를 잡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옆에 있어.”

“떨어져. 스킨십 금지잖아.”

“움직이지 마, 아파.”

전날 상처를 봉합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다. 엄살이라도 거짓은 아니다. 저항이 줄어든 한주를 품에 안고 우강희는 물었다.

“잠결에 잠자리 옮겨 다니는 몽유병이야?”

“그런 거 아니야. 그저…….”

한주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저?”

묻는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친밀한 사람, 자신의 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잠결에 그 옆에 가서 누웠다.

처음에는 따뜻한 온기를 찾아가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과 잘 때는 지영의 옆자리로 갔고 엄마와 김지영이 같은 방에서 잔다면 엄마의 옆으로 갔다. 신뢰도가 높고 좀 더 친밀한 사람의 옆자리로 찾아갔다.

그런 얘기를 우강희에게 절대 할 수 없다.

“추웠나 보지.”

팔을 밀어냈지만 끈질기게 달라붙더니 오히려 더 꼭 안겨졌다.

“병원에서 춥다고? 그리고 너 잘 때는 몸에 열나는 타입이잖아.”

“추웠다니까.”

우강희를 거칠게 밀치고 음식이 차려진 탁자로 갔다. 침대에 누운 그는 ‘아야야’란 귀엽지 못한 꾀병을 부렸다.

매섭게 노려보다가 눈빛이 누그러졌다. 괜찮아 보이기는 했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서인지 우강희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침 식사 해. 아, 가져다줘야 하나?”

머리 한쪽이 삐죽 올라온 상태로 한주는 식탁 앞에 앉아 돌아보았다. 그가 웃자 대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불만으로 삐딱하게 나오는 말투, 우강희가 왜 웃는지 궁금해하는 표정, 그러면서도 병실을 나가지는 않는다.

“아침이 아니라 점심이야.”

강희는 침대에서 내려와 배를 보았다. 방수 거즈가 붙여진 봉합 부위가 땅겼지만 볼펜에 의한 창상이라 겉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한주가 자는 사이 정밀 검사를 받았다. 몇 밀리만 옆을 찔렀다면 장기가 손상됐을 거라며 의사는 천운이라고 말했다.

계산 안이었다. 몸에 대미지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우천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한주의 앞자리에 앉았다.

“어제 이성진이 네 머리를 만졌던데.”

“넌 나 안고 잤잖아.”

“그건 네가 내 침대로 올라왔다니까. 환자가 널 어떻게 안고 옮기겠어.”

“알았어, 둘 다 없었던 일로 쳐.”

은근슬쩍 넘어가는 모습이 귀여워 그는 툭 던졌다.

“그래서, 우리 1일?”

쿨럭, 쿨럭 식사하던 한주가 크게 기침을 했다.

* * *

몸에 남은 페로몬을 소취 하고 병원을 나온 한주는 지영의 집으로 향했다. 우강희가 잡았지만 지영과의 약속이 먼저였다. 학교까지 대중교통으로 가 보고 싶다고 해서 기숙사로 돌아갈 때 지영과 같이 가기로 했다.

“오늘부터 1일이냐니, 그런 말을 하는데 어떻게 같이 있냐고.”

자꾸 우강희의 얼굴을 멍하니 보게 되었다. 입술에 시선이 갔고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놈은 남자인데…….”

저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크고 잘생기고 형질도 뛰어났다. 자신은 페로몬을 이해해 줄 수 없는 입장이고 영화에서처럼 서로의 페로몬으로 교감을 할 수도 없었다.

“으…… 박한주. 교감이라니,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야.”

“박한주?”

“한주야, 대문 앞에서 뭐 해?”

집에서 나오던 민소희와 그녀의 매니저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한주를 발견했다.

“아, 어머니. 지영이랑 같이 학교 가려고 왔어요.”

“그래, 들어가 봐.”

“네.”

한주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민소희는 미간을 좁히며 돌아보았다. 희미하지만 알파의 페로몬이 한주의 몸에서 느껴졌다.

소취제의 시트러스 향이 강했는데 그 아래에 알파의 페로몬도 있었다. 소취제가 웬만한 페로몬은 다 지우는데도 그것을 이기며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떤 알파길래?”

“네?”

“아니야.”

민소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밴에 올랐다.

* * *

민소희는 사생활이 많이 노출되는 연예인이라 집에서만은 가족들과 있고 싶어 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시간에 맞추어 일하는 사람이 오갔기에 집에 도우미는 없었다.

“나 왔어!”

2층 지영의 방을 향해 소리치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옷 갈아입고 나갈게!”

“천천히 나와.”

병원에서 소취 전에 샤워도 하고 우강희가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한주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쇼트케이크 몇 조각이 든 작은 상자와 베이글, 말린 과일과 과일 주스가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들여다보고 있는데 지영이 1층으로 내려왔다.

“배고파? 점심 안 먹었어?”

“먹었는데, 그냥 생각나서.”

“케이크 먹어.”

예전이라면 케이크를 보자마자 달려들었겠지만 재강원 고등학교의 카페테리아의 퀄리티도 높고 너무 달지 않은 케이크에 입맛이 길들여져 버렸다. 한주는 망설이다가 오렌지를 꺼냈다.

“이거 먹으면 돼.”

몸에 소취제의 시트러스 향이 감돌아 괜스레 군침이 고였다.

한주의 옆으로 온 지영도 소취제의 냄새를 맡았다. 페로몬을 못 맡는 사람이 소취제를 왜 썼을까. 지영의 눈이 대번에 매서워졌다.

“왜 소취제를 뿌렸어?”

“아, 페로몬이 좀 묻어서.”

한주는 얼버무리며 오렌지 껍질을 깠다. 상큼한 향이 공기 중에 퍼졌다.

어쩐지 우강희가 생각났다.

오렌지의 상큼함과 우강희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

“너, 페로몬 못 느끼잖아. 어떻게 알고 소취제를 뿌린 거야?”

지영은 신경이 곤두섰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는데 예감이 신경을 건드렸다. 마치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연상적으로 우강희가 떠올랐다.

“우강희가 다쳤다고 해서 어제 병문안 갔다가 병실에서 잤어. 그때 페로몬이 묻었다고 해서 아침에 소취제를 뿌렸고. 아직 페로몬이 남아 있어? 강한 타입의 소취제라고 했는데.”

“우강희가 베타인 너한테 페로몬을 묻혔다고?”

“아, 일부러가 아니라 아프면 제어력이 좀 떨어져서 묻었대.”

한주는 팔을 들어 옷 냄새를 맡았다. 페로몬인지 향수인지 구분을 못 할 텐데 유난스럽게 행동해서 더 부자연스러웠다.

“어?”

이상한 흔적이 지영의 눈에 들어왔다.

부산을 떨며 고개를 돌리는 한주의 목뒤에 울혈이 있었다. 흉터가 잘 남지 않는 한주의 피부에 색이 변하지 않은 붉은 순흔이 있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것을 보자 미세하게 남아 있는 타인의 페로몬이 크게 느껴졌다.

“……우강희와 있었다고?”

“어. 다쳐서 입원했어.”

“걔가 아픈데 네가 왜 가?”

“병문안이라고 말했잖아. 룸메가 갑자기 다쳤다는데 당연히 가 봐야지.”

식탁에 엉덩이를 기대고 한주는 오렌지를 입에 넣으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망고만큼 맛이 달아 한 조각을 잘라 지영에게 주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너, 우강희와 뭐 했어?”

의례적으로 안부 묻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한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얼굴에 드러났다.

“하기는 뭘.”

팔을 빼내며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얼버무렸다.

“병문안 갔다고 했잖아. 아픈 녀석과 뭘 한다고 그래?”

목소리가 갈라지고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말보다 행동이 정직했다.

“안 돼.”

“뭐?”

뜬금없는 반대였다.

얘가 왜 이러나 바라보는데 지영이 한주의 손목을 움켜잡고는 잡아당겼다. 반대편에 있어서 식탁 위로 한주의 몸이 엎드리다시피 눕혀졌다.

지영은 그대로 한주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달콤한 오렌지 향이 코끝에서 퍼졌다.

팍, 몸이 밀쳐졌다.

지영은 이제 한주와는 체격 차이가 컸다. 예전처럼 밀쳐졌다고 뒤로 넘어지는 무게가 아니었다.

“야? 뭐 하는 거야?”

“왜 나는 안 되는데!”

“아니, 우강희 그 녀석은 그냥…….”

말하다가 한주는 입을 제 손으로 막아 버렸다. 키스했다고 자백해 버린 꼴이었다.

지영은 테이블을 돌아서 한주에게 달려들었다. 양 손목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어 입술을 부딪쳤지만 잠깐 스칠 뿐이었다. 한주는 몸을 뒤로 물리며 피했다.

피할수록 지영은 더 오기가 났다.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먼저였어!”

아무리 몸이 커지고 힘이 센 알파가 되었지만 한주를 이길 수는 없었다. 거칠게 떠밀려 냉장고에 등이 부딪쳐 주저앉았다.

“갑자기 뽀뽀하지 않나,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너 러트야?”

지영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키스하고 위협적인 행동을 했지만 한주는 사랑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그것이 더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욱신거리는 머리보다, 우강희의 페로몬을 묻히고 온 한주보다도 더 가슴을 아프게 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머리를 감싸고 앉아 있자 한주가 지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알파로 발현해 이제 겨우 학교에 나오기 시작한 친구에게 폭력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환자인데.

“야, 그러니까 왜 그런 장난을 쳐? 이해할게. 발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호르몬이 오락가락해서 그럴 수 있어.”

장난으로만 치부했다. 단순한 충동으로 여겼다.

“왜 그래? 많이 아파? 어지러워? 앰뷸런스 부를까? 응?”

묻는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너무해.”

“야, 네가 이상한 짓을 하니까…… 그렇게 아파?”

* * *

어릴 때부터 지영에게 한주는 보호자이고 조력자이며 형제이고 친구였다. 그리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갑자기 어른스럽게 변하더니 알파가 아니라도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고 언제나 저를 구해 주는 히어로였다.

가족들이나 의사는 많은 알파 페로몬에 갑자기 노출되어 알파로 발현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심리적인 원인도 있었다. 한주 때문이었다.

알파들만 모인 재강원 고등학교 입학식에 참가해 보니 동년배인데도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 성인의 육체를 가진 알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한주가 약해 보였다. 자신이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알파였다면 자신도 저들만큼 컸겠지.

알파였다면 저들에게서 한주를 지켜 줄 수 있겠지.

알파였다면 한주도 기댈 수 있을 텐데.

한주는 베타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다른 학교에 가라고 저가 먼저 반대했어야 했다. 자신은 한주를 지켜 줄 수 없는데 재강원 고등학교는 베타에게 너무 위험했다.

‘내가 지켜 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현이 시작되었다.

눈앞이 핑 돌며 어지러워졌고 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주변 알파들이 보내는 페로몬에 담긴 장난기·욕정·호승심·베타를 우습게 보는 마음 등이 저와 한주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겨우 이겨 내고, 변한 절 어떻게 볼까 불안감을 누르며 돌아왔더니 한주에게 우강희라는 알파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주의 첫 키스도 가져갔다.

“야, 김지영! 너 왜 이래? 미쳤어?”

지영은 한주의 몸을 밀어 식탁 위에 쓰러뜨렸다.

손목을 잡고 제압했다. 식탁 위에 누운 한주의 다리 사이에 몸을 밀어 넣어 붙이자 안쪽이 지영의 허리에 닿았다.

다른 곳보다 체온이 높았다.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간지러운 열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한주야…….”

지영은 신음하며 허겁지겁 한주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붙였다. 입술에 닿고 싶었지만 한주가 얼굴을 돌리며 피해서 어디든 키스했다.

저의 페로몬을 한주에게 묻혔다.

“야,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언제나 네 옆에 있던 사람은 나였는데, 내가 먼저인데…… 왜 우강희 같은 놈이야?”

허리를 굽히며 지영은 한주에게 몸을 붙였다. 배에 한주의 다리 사이가 부딪쳤다.

아직은 누구도 닿지 못한 곳.

불안과 초조함에 몸을 밀어붙이며 한주의 목을 깨물었다.

“야!”

퍼뜩, 한주의 몸이 움직였다. 저가 준 자극 때문에 한주가 몸을 떨자 지영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윽!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목을 무는 거야!”

제압해서 힘으로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한주의 손목이 빠져나가며 머리에 충격이 왔다.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악!”

지영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멀찍이 떨어졌던 한주는 지영이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 머리를 만지고 있자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제는 듬직한 등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에서 괴롭힘당하고 구석에 숨어 울던 김지영이 생각났다.

“야아, 김지영…….”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며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얼굴을 들지 않았다. 한주는 덜컥 겁이 났다.

“너 설마 얼굴 맞았어? 그나마 봐 줄 게 얼굴밖에 없는데, 얼굴 봐 봐, 응? 야, 얼굴 좀 봐. 미안해, 가끔 조절이 안 되어서 그래.”

언제나 달래 주던 것처럼 한주는 먼저 사과했다. 그것이 오히려 지영의 자존심을 건드려 버렸다. 예전에는 한주가 먼저 져 주고 사과하는 것이 당연해서 미안한 일을 해도 계속 심통 난 모습을 보였었다.

애정의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한주는 자신을 좋아하니까 먼저 사과해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한주는 그저 약하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라 져 주었을 뿐이다.

지영을 동등하게 보지 않아서였다. 달려들어 키스까지 했는데도 경계하지 않았다.

“김지영, 미안해. 응?”

지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벌떡 일어나는데 중심이 잡히지 않아 잠시 휘청이자 한주가 재빠르게 팔을 잡아 부축했다.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그 손을 밀쳐 냈다.

“뭐가 미안한데? 내가 먼저 너한테 달려들었잖아!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아니, 그래도 널 때렸으니까.”

“당연히 때려야지! 너한테 키스했잖아!”

“걱정 마. 그 정도는 키스도 아니야. 그냥 닿은 것뿐이잖아. 난 괜찮으니 마음에 두지 마.”

피해자가 가해자를 위로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한다.

“왜 모르는 거야? 난 전혀 남자로는 안 보이는 거야?”

“뭐?”

중얼거리던 지영이 눈물을 가득 담은 눈으로 한주를 노려보았다. 평소 삐져서 토라지던 표정이 아니었다. 선이 굵은 남성으로 변해서 더 표정이 매서워졌다.

지영은 고개를 돌리며 일어나 등을 돌렸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한주를 거부했다.

“당분간은 떨어져 지내자. 학교에서도 알은척하지 마.”

“김지영?”

화내며 감정을 터뜨리지 않는 모습이 어색해 당황한 사이 지영은 집을 나갔다. 뒤늦게 쫓아 나왔지만 거리에서 지영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이번엔 진짜 많이 화났나 본데.”

난감해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목에 손끝이 스쳤다. 지영이 물은 곳을 카메라 셀카 모드로 찍어서 확인해 보니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우강희가 이걸 보면 또 어떤 얼굴을 할지 한숨이 나왔다.

“알파가 되면 다들 무는 것을 좋아하나?”

100퍼센트 놀림감이라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는 일이다. 한주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천천히 걸으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모든 대답은 인터넷에 있다.

“사랑하는 상대에서 소유욕을 표현할 때 알파가 뭅니다? 사랑하는 상대?”

우강희가 떠올랐다. 단순히 그의 강압적인 행동이라고 핑계를 대기에는 한주도 적극적으로 방어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상대가 환자라지만 중환자도 아니고 정말 싫었다면.

평온하게 살고 싶은데 인생이 꼬여 가지만 불안하면서도 한구석에는 설렘도 있었다. 타인에 의해 한주가 생각하는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 * *

재강원 고등학교로 돌아와 기숙사로 가자마자 지영을 찾아갔다.

기숙사 방들은 개인 잠금장치가 되어 있어서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재민석이 인터폰을 받았다.

- 왜?

분명 방에 돌아와 있고 인터폰으로 한주의 얼굴을 봤을 텐데 지영이 받지 않았다.

“지영이, 방에 있어?”

- 있는데 널 만나고 싶지 않대.

핑계도 대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오는 내내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답장도 하지 않았으니 방으로 찾아가도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면전에서 거절당하자 슬슬 성질이 올라왔다.

“그럼 지영이 좀 바꿔 줘.”

복도를 지나는 알파들이 방문 앞에서 인터폰으로만 얘기하는 한주를 힐끔거렸다.

- 싫대.

“싫든 좋든 직접 얘기하라고 전해.”

- 싫다잖아.

한주는 처음으로 재민석에게 짜증이 났다. 아무리 절 싫어하고 2학년을 이용해 괴롭혔지만 민석에게 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저 ‘피곤하게 사는구나.’라는 감상을 일으킬 뿐이었는데 오늘은 좀 성질을 건드렸다.

“여기서 뭐 해?”

병원에 있어야 할 우강희였다.

그의 시선이 한주의 몸을 훑었다.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병원에 있어야지.”

“퇴원했어.”

“야! 아무리 그래도 배가 뚫렸는데!”

“작은 창상이야. 김지영은 왜?”

“아, 얘기 좀 하려는데…….”

문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인터폰은 끊기지 않았다.

“재민석, 지영에게 직접 얘기하자고 전해 줘.”

- 얘기하고 싶지 않대.

다시 민석이 지영의 말을 전했다.

한주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걸었다. 방 안에서 벨 소리가 들리다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핸드폰에서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싸웠어?”

대답하지 않고 한주는 인터폰을 보았다.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지영은 한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김지영, 오늘은 가 볼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용건이 끝나 보이자 한주의 손가락 사이로 우강희가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꼈다. 지영이 때문에 신경 쓰이는데 그는 옆에서 치근덕거렸다. 손을 털었지만 놓지 않았다.

“가자.”

“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김지영이 쉴 수 있게 방으로 돌아가. 시간이 필요할 거야.”

우강희는 한주와 지영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면서 위로했다. 단지 손을 잡고 싶었을 뿐이겠지만 그의 말도 맞았다.

가끔 이해 못 할 일로 지영의 기분이 토라지는 경우가 있었고 보통은 먼저 사과하면 풀렸는데 이번에는 단단히 삐졌는지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한주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며 우강희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돌아갔다.

* * *

민석은 인터폰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지영은 침대에 기대앉아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한주에게서 온 전화를 거부했으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표정이 더 침울해졌다.

무슨 일인지는 듣지 않았지만 재민석에게는 보였다.

일방적인 애정. 쌍방이 될 수 없는, 오직 일방통행의 애정은 누구보다 저가 잘 안다.

지영의 옆에 앉았다. 베타였다가 뒤늦게 알파로 발현되어서인지 김지영은 다른 알파들처럼 베타를 무시하거나 베타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큰 부딪침 없이 같이 방을 쓸 수 있었다.

민석은 위로해 주는 척하며 저가 아는 일을 알려 주고 싶었다.

“우리 형은 우강희와 약혼했어.”

지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뭐? 우강희에게 약혼자가 있단 말이야?”

“약혼자였지. 약혼했었는데 어제 파혼당했어. 우강희가 박한주 때문에 파혼하자고 말했대.”

“그런…….”

일그러지는 지영의 얼굴을 보며 민석은 어깨를 보듬으며 위로했다.

“우강희가 한주를? 설마. 아닐 거야.”

“페로몬을 읽을 줄 아니 나보다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페로몬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며.”

“그건…….”

친한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민석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주는 그저 평범했다. 대단한 미형도 아니고 누구나 다 그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성격 좋은 사람도, 한 가지 분야에서 특출 난 재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재강원은 한주에게 신경 썼고 우강희는 한주를 좋아한다며 아예 파혼까지 했다.

재민석을 싫어하는 우강희의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로열 알파인 이성진 또한 묘하게 친절했다.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민석은 눈물을 흘리는 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루만지며 위로는 하지 않았다.

“한주야…….”

박한주의 이름을 부르며 지영은 울었다.

단 한 명의 베타 때문에 민석의 형도, 자신도, 알파들도 엉망이 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여럿이 힘들다면, 그 사람이 사라지면 되지 않을까.

* * *

“손 놔. 너 자꾸 계약을 막 깬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한주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강희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주를 끌어당겨 다른 손마저 잡았다. 다리로 차 버릴 수 있지만 상대는 환자라 양심상 공격은 선택에 없었다.

“이제 계약은 상관없잖아. 사귀는 사이니까.”

“아니! 난 아직 대답 안 했어!”

“스킨신 대신 네가 먼저 키스하자고도 했었잖아.”

“그건 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였다.

아차, 한주는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그건?”

강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이 뺨 근처에 닿았다.

“얼마나 잘하는지 궁금했어? 그때는 버드 키스였으니까 딥 키스로 해 볼까?”

“네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만 차 있지!”

무릎을 들어 힘있게 그의 발을 밟았다. 제법 아팠는지 윽, 비틀거리며 강희는 손을 풀어 주었다.

“첫 키스를 가져갔으면 책임져야지.”

“채, 책임은 무슨!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겨우 키스했다고 책임을 져?“

“싫어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서…….”

185가 넘는 키에 건장한 육체를 가진 남자였지만 표정 하나로 언제 꽃대가 쓰러질지 모르는 가녀린 꽃이 되었다.

“가만히 안 있었어! 너 기절시켰잖아.”

“왜 그렇게 부정해? 사귄다고 몸이 닳는 것도 아니고 사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나는 널 위해서 파혼했는데 그저 사귀는 것도 안 돼?”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말려드는 기분에 한주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분명 노력은 했는데 강희의 얼굴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럼 사귀는 거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

“키스가 싫었어? 기분 나빴어?”

“그렇지는 않아, 다만…….”

아니라는 말에 강희는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분명 키스는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읏!”

한주는 입술을 꾹 다물며 침범하지 못하게 경계했지만 그는 가볍게 쪽쪽 입술만 부딪히다가 한주의 어깨를 양팔로 꽉 껴안았다.

볼을 머리카락에 비비는 행동이 그는 흡사 주인 만난 개 같았다. 꼬리가 있다면 선풍기처럼 모터 달았을지도.

“좋다.”

‘이렇게 놔두면 안 되는데…….’

아는데 거절하면 좀 불쌍하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 * *

같은 건물에 살고 같은 반이니 좁은 생활 반경 안에서 지영이 한주를 피할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아슬아슬하게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고 있었다.

오늘도 피하겠다고 마음먹고 지영은 문을 열었는데 이미 방 앞에 한주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지만 한주의 손이 빨랐다.

“우리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으르렁대며 한주는 문이 닫히지 않게 꽉 잡았다. 우강희를 떼어 놓고 혼자 지영을 만나러 오기 위해 몸을 희생했다.

그는 한주의 뜻대로 해 주는 대신 한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조건을 걸었다가 한 대 맞았다. 손만 잡고 하룻밤만 같이 자자고 다시 제안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옥신각신하며 하루 데이트로 합의했다. 온전히 하루를 그에게 주기로 말이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애초에 목표가 데이트로 그저 강희에게 당했다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얻은 귀한 시간이었다.

문득 왜 그의 허락이 필요한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지만 우선은 지영과의 대화가 시급했기에 생각은 밀려났다.

“얌전히 대화할래? 아니면 한 대 맞고 대화할래?”

알파가 되어도 어리광 부리는 지영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지영이 억지를 부릴 때처럼 한주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들어와.”

노려보거나 울멍거리는 눈으로 절 탓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영은 진지한 목소리로 한주를 안으로 들였다. 거울을 보며 교복 넥타이를 매만지던 재민석이 한쪽 눈썹을 들며 불편하게 한주를 보았다.

지영은 민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지만 얘기 좀 하게 자리를 비켜 줘.”

“그래.”

차분해진 분위기, 낮아진 목소리, 냉정한 얼굴에 잠시 당황했지만 지영의 변한 모습이 한주는 낯설지 않았다. 이전의 삶에서 보았던 알파 김지영의 모습이었다.

알파로 발현한 후 학교로 돌아와 서로 데면데면하며 거리가 멀어졌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2학기쯤에 때때로 절 바라보는 지영과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말을 걸고 다가오지도 않으면서 무언가를 바라듯이 한주를 보곤 했었다.

지금 지영의 모습은 그때와 같았다. 어른스럽고 알파다운 모습.

민석이 방을 나가고 지영은 가방을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한주를 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거야?”

한주의 질문에 김지영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몰라?”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표정이 전혀 예상도 못 하는 얼굴이었다. 키스하고 손목을 잡아 밀어붙이는 등의 위협적인 행동을 했는데도 장난이나 그저 기분이 토라졌다고 생각한다.

“정말 몰라?”

“미안해.”

잘못을 알고 하는 사과가 아니라 더 속이 상했다. 한주는 이 상황의 본질을 몰랐다.

“뭐가 미안한데?”

“그, 그걸 몰라서?”

지영은 한주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이면 몸이 닿을 거리로 손을 뻗으면 얼굴을 붙잡고 입 맞출 수 있었다. 이미 지영에게 강제로 키스당해 봤으면서 한주는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박한주, 널 사랑해.”

“……어, 네가 날?”

“그래.”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지영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주도 이 상황에서 ‘나도 널 친구로 좋아해.’라는 눈치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당황해 눈을 끔벅였다.

“아, 아…….”

탄성은 부정적인 뉘앙스였다. 한주의 목에서 울혈을 발현했을 때부터 이럴 줄 알았지만 막상 반응을 보자 속이 꽉 막힌 듯이 무거워졌다.

왜 나는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묻고 싶지만 한주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지영은 어리광 부리며 지켜 줘야 하는 친구로 남고 싶지 않았다.

눈을 굴리더니 한주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달싹거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곧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했다.

“미안하다.”

여지를 주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지영은 깊이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한주라면 이렇게 거절할 줄 알았다. 할 마음이 없으면 여지도 주지 않았다.

“나는 널 그런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는 내 친구고 가족이고 내 형제야.”

“그래, 알았어.”

속을 후벼 파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영은 울지 않았다.

한주는 안타까웠다.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지영이 알파가 되었어도 그들의 사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어긋나는 것일까.

거절을 한 입장에서 지영에게 이전과 같은 관계로 지내자고 요구할 수 없었다.

거절당한 지영은 입을 다물고 바닥에 의미 없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더는 이어 갈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주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등교해야 할 시간이었다.

“먼저 나갈게. 나중에 보자.”

“박한주.”

한 뼘 정도 문을 열었을 때 바로 뒤에서 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척을 느끼지 못해서 놀라 돌아보는데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어?”

툭, 등에 밀리며 문이 다시 닫히고 입술이 눌렸다. 지영의 눈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도전적인 강함은 이전의 지영에게서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입술은 가볍게 떨어졌고 지영은 한주를 내려다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깨를 끌어당겨 문을 열었다.

“우강희가 상대라도 포기하지 않아. 각오해, 한주야.”

지영은 한주를 남기고 먼저 방을 나섰다. 이제 고작 고1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시간이 남아 있다.

* * *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며 담임 이무열은 2주 후에 있을 학교 행사에 관해 얘기했다.

“2주 후 금요일 재강원 고등학교 창립자이신 재선철 님을 기리는 동백제가 열립니다.”

한주는 코웃음을 쳤다. 말은 창립자를 기린다지만 그날은 재강원의 생일이었다. 동백도 재강원이 좋아하는 나무였다.

“재강원 이사장님을 비롯해 졸업생, 사회에서 저명한 인사들과 학부모님들이 초청되는 자리입니다.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기 바랍니다.”

귀찮아하는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한 주 전부터 교내 곳곳 알림판의 포스터로 홍보 중이었다. 가수와 졸업생, 유명인의 강연, 국내 내한 공연 중인 프랑스 뮤지컬 팀의 짧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다.

“알아? 학교 행사 때 학부모 참석률이 95퍼센트래. 학교 행사로 인맥 넓히려는 거지. 학교는 우리가 다니는데 부모들이 더 신이 났다니까.”

차원구는 학교에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 싫다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네 어머니도 오시지?”

“글쎄, 말하지는 않았는데. 엄마는 행사를 하는지도 모를걸.”

“네가 말 안 해도 학교에서 부모들에게 연락 다 해. 재씨 가문에서 이런 인맥 넓힐 수 있는 행사를 놓칠 리 없지.”

“엄마가 알고 있다 해도 꽃집을 열어야 해서 안 올 거야.”

이전 삶에서 재강원의 생일이라는 걸 알기 전에는 엄마가 참석하지 않아 못마땅해했다. 다른 가족들은 다 참석하는데 한주의 엄마만 없었으니까.

하지만 엄마에겐 자신을 버린 남자의 생일 기념일이었다. 누가 참석하고 싶을까.

종례가 끝나고 한주는 지영을 잠시 시야에 담고는 교실을 나갔다. 재민석이 일어나서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지영에게 다가갔다.

“가자.”

“먼저 가. 지금 가면 식당에서 마주칠 수 있어.”

“그럼 조금 있다가 가자.”

민석이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너 저녁에 과외받아야 하잖아. 가서 저녁 먹어.”

“아, 그렇지. 그래, 그럼 방에서 봐.”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친구잖아.”

교실을 나가는 민석을 보고 지영은 교과서를 한 번 더 들춰 보았다. 수업 중이나 쉬는 시간에 한주는 지영에게 시선을 주었다. 한주가 원하는 것을 알지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처럼 친구로만 남고 싶지 않으니까.

관계를 바꾸려면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

“박한주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풀어.”

교실을 나간 줄 알았던 황치운이 뒷문에 서 있었다.

“남의 일이야. 참견 마.”

“참견하고 싶지 않은데 신경이 쓰이니 차라리 빨리 해결하려고.”

“해결? 네가?”

귀찮아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데 황치운은 물러나지 않았다.

“웬만해선 박한주와 화해해. 네가 재민석과 어울려도 한주는 이해하잖아.”

“재민석과 한주가 사이좋지 않은 건 알고 있어.”

같은 반의 베타가 두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다. 한주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재민석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황치운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민석 때문에 한주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듣지 못했나? 구정물에 젖고 2학년에게 찍혀서 밤에 끌려간 적도 있어.”

한주는 절대 그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한주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믿을 만한 소리를 해.”

“왜 거짓말을 하겠어?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재민석이 박한주를 괴롭힌 것은 1학년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다 알아.”

“그럴 리 없어. 한주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올해 들은 얘기 중에 제일 웃기네.”

“정 못 믿겠으면 재민석에게 물어봐. 왜 박한주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나도 궁금하네.”

확신에 찬 어조였다. 황치운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지영은 혼란스러워 고개를 돌려 아직 교실에 남아 있는 학생을 보았다.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일어난다며 움직이는 모습을 오해해서인지, 한 학생이 지영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떡, 위아래로 움직이고 교실을 나갔다.

지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때때로 재민석과 대화하다 보면 이상함을 느꼈다. 대놓고 한주를 욕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베타를 비하했다.

불쾌감은 앙금처럼 가라앉았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는 미묘한 수위였다. 단순히 이래서 한주가 재민석과 어울리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지영은 황치운의 팔을 잡았다.

“제대로 말해 봐. 그동안 한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지영이 녀석, 삐뚤어지면 골치 아픈데.”

“응?”

우강희는 한주의 옆에 앉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한주와 지영을 단둘이 있게 해 주는 대가로 하루 데이트를 얻어 냈다. 지영을 신경 쓰는 모습이 싫어 빨리 해결하라고 적당히 타협해 주는 척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더 신경 썼다.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며. 그래도 걱정이야?”

“그 녀석도 알파니까?”

베타든 알파든 구분하지 않는 한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의외였다.

“김지영을 보면 고용진의 알파 이론이 맞는 거 같기도 해.”

“고용진이라면 네 친구?”

“어. 그 녀석이 그랬거든. 알파는 성격으로 구분된대. 집요한 구석이 꼭 한 가지씩 있다고 말이야.”

“……재밌는 말을 하네.”

강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가끔 한주와 전화 통화를 하며 게임 얘기에 열을 올리는 한주의 친구 고용진은 알파를 싫어해 한주가 우강희와 인사하라고 말하자 질색을 하며 피했던 사람이다.

지영보다는 거리가 있는 건전한 친구 관계를 유지해 우강희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지영이를 보면서 했다는 거야. 가끔 지영이가 하나에 미쳐 집요하게 굴 때가 있어서…… 이번에도 그러는 건 아닌지 걱정이야.”

“집요하게 구는 것이 뭐가 이상하다고?”

“행동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문제야. 걔가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기는 했어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도 아니야. 한 번은.”

말을 방해하려는 듯이 강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밤에 오는 전화가 반가운 내용일 리 없다.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 바라보는 한주의 시선에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한주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손끝으로 두피를 쓸고 귓바퀴를 어루만지며 멀어졌다.

“하는 행동으로는 완전 꾼인데.”

한주는 빨개진 귀를 문질렀다.

* * *

우강희는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힘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알파 사회에서 일반인의 노약자는 무의미했지만 한주는 온화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우강희도 한주 앞에서는 전화가 오면 받았고 어른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다.

한주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고 싶어서.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지만 끝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네.”

- 할 얘기가 있으니 내일 보지.

“알겠습니다.”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약속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도착했다. 너무 짧은 통화에 한주가 의아해하며 그를 보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재강원 이사장이 내일 만나자는 전화야.”

강희는 누구의 전화인지 일부러 말했다.

한주를 보며 달콤한 상상을 한다. 핸드폰을 검사하기 위해 비번을 알려 달라면서 통화한 상대가 누구인지 일일이 캐묻는 한주. 한주가 저에게 집착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의 몸에 잇자국을 내며 소유욕을 보인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재민용과 파혼하겠다고 했으니 그에 관한 얘기를 하자는 거야.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니 아들의 파혼이라도 회유하지는 않겠지. 얘기는 들어 보자고 부르는 거야.”

“괜찮아?”

키스 한 번에 책임지라고 말하자 한주는 길길이 날뛰었었다.

안 된다고 거부했으면서 어깨를 붙이고 머리카락을 만지면 가만히 있었다. 유약해 보이기보다는 강자의 너그러움이었다.

“재강원은 날 건드리지 못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그럼 다행이고.”

계약의 스킨십 금지는 흐지부지해지고 한주는 친밀한 거리를 허락했다. 기습적으로 키스하면 맞기는 했지만 완벽한 거절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서울에 다녀와야 하는데 뭐 사 올까?”

“그래?”

부탁은 너무 사소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며 우강희는 먼 미래를 그렸다.

* * *

우강희에게 약혼은 그저 현실을 모면하기 위한 반창고에 불과했다. 재민용의 각인은 ‘사고’였고 언젠가는 나을 상처였다.

그것을 어른들의 이득을 위해 약혼이라는 이름으로 연결 고리를 만들어 일부러 지속시켰다. 약혼은 했지만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파혼할 예정이었다.

“파혼하겠다고?”

재강원은 우강희를 회사 대표실로 불렀다. 그가 지배하는 세계로 끌어들여 무엇을 거절했는지 보여 주었다.

묵직한 짙은 색 가죽이 덮인, 중후한 소파가 놓인 대표실은 온통 검은색의 가구뿐이었다.

타인을 억누르는 존재감. 대표실에 들어오는 이들은 하나같이 위압감을 느껴야 했다.

우강희는 앞에 놓인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네, 약혼을 유지할 이유는 이제 없습니다.”

“그 얘기는 들었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네.”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재강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두려워하지 않고 바라보는 우강희의 눈이 알파의 본성을 건드렸다.

그의 본성이 우강희에게 대적하고자 들끓으며 DNA에 새겨진 본능이 당장 그와 겨루길 원했다. 저보다 약한 자를 무릎 꿇리려는 정복욕이 아니라 대등하게 싸우고 싶은 호승심이었다.

재강원은 턱에 힘을 주며 미소를 지었다. 어리다고, 나이 먹었다고 봐주지 않는다. 뜻을 거스르려는 자를 너그럽게 봐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체면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 그렇다면 파혼해야지.”

아들에게 살갑지 않았고 가족은 그저 부속품에 불과했지만 타인이 저의 것에 흠집을 내는 일은 다른 얘기였다.

재강원의 장남인데도 우강희는 태연하게 파혼을 원했다. 그것은 저를 향한 모독이고 무시였다.

“아시겠지만 각인은 이미 풀렸습니다. 파혼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풀린 지는 한참 되었을 텐데.”

풀린 걸 알면서 약혼을 놔두었던 우강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재강원 또한 각인 상태를 알고 있었다.

재강원은 태연하게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어쩔 수 없지. 파혼해.”

“아버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존재감 없이 앉아 있던 재민용이 소리쳤다.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재강원까지 허락해 버렸다. 그래도 재강원이 부르면 우강희라도 조금은 태도를 바꾸든가 좀 더 고민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소용없었다.

“파혼할 수 없어요! 우강희의 약혼자는 저예요!”

“파혼할 수 없다니…… 그럼 내 아들이 우강희와 파혼하지 않으려고 바짓자락이라도 잡겠다고?”

“강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재민용.”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민용은 사색이 되었다.

우강희를 향한 호승심을 누르고 있어 재강원은 인내심이 얇아졌다. 아들이라도 재씨 가문에 수치를 주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거역을 하면 베일 것처럼 날이 선 재강원의 시선에 민용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가 재강원과 싸우고, 아니, 싸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짜증을 내고 돌아서며 하던 말을 잊지 않았다.

‘당신 결혼 왜 한 거야? 적어도 민용이 민석이는 당신 자식이야! 어떻게 애들을 한 번을 안아 주지 않을 수 있어? 진짜 이런 결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둘째인 재민석을 낳고 조금은 희망을 가졌던 어머니는 점점 의무적이 되었고 부부는 하우스메이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되었다.

재민용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애정이 없음을 동생인 재민석이 태어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어릴 때 놓아 버렸지만 민석은 멍청해서 주눅 들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

아버지의 눈길을 받기 위해 눈치 보는 개처럼 행동하는 동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떨어지지 않는 감을 바라보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이니까.

세상에는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고 그중의 하나가 재강원의 관심과 애정이었다.

그랬던 민용은 재강원의 시선에 그렇게 비웃던 동생과 자신이 다를 것 없음을 깨달았다.

우강희에게 각인해서 약혼 얘기가 오가자 처음으로 재강원에게 칭찬을 받았다. 약혼을 알리자 방을 나가면서 민용의 어깨를 묵직하게 툭 치고 지나갔다.

처음으로 격려이자 칭찬의 몸짓을 받았다.

아무리 성적을 잘 받아도, 아무리 성과가 좋아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칭찬 한마디 없던 재강원이 절 칭찬했다.

그때의 희열을 기억하는 민용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을지 마주할 수 없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파혼…… 하겠습니다.”

“그렇다는군. 되었나?”

재강원은 우강희만을 보고 있었다. 민용이 어떤 마음으로 파혼을 받아들이는지, 이 일로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안중에도 없었다.

우강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이렇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럼.”

그는 가볍게 인사하고 대표실을 나갔다. 파혼에 관한 사과가 아니라 예전에 일으킨 각인 사고에 관한 사과였다.

재강원은 우강희가 대표실을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공식적으로 프라이머 알파로 알려졌지만 그를 대면하는 알파라면 누구나 그 형질이 틀림을 알았다.

알파라면 모를 수 없다. 프라이머 알파가 가질 수 있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자식은 프라이머 오메가거나 알파 발현 확률도 낮은 베타뿐이었고 그나마 첫째가 오메가라 괜찮은 종마를 얻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놓쳐 버렸다.

혼외자 중에도 알파는 없었다.

친척들 중에서는 오래전부터 민용과 민석의 형질을 들먹이며 재강원의 후계 자리에 자신들의 알파 자식을 밀어 넣으려고 고군분투했다.

가문, 외모, 재력, 사회적 지위, 무엇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재강원에게 오직 하나 흠이 있다면 변변치 못한 자식이었다.

흔한 프라이머 알파도 생산하지 못한 알파.

그것이 재강원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쓸모없게.”

쯧, 재강원이 혀를 차자 민용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오메가라면서 알파 하나 네 뜻대로 잡아 두지 못하는구나. 오메가로서도 무능해.”

“……죄송합니다.”

민용은 얼굴이 새하얘져 식은땀을 흘리며 사죄했다. 아들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은 타인보다도 냉정했다.

탁, 꼬고 있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자 가볍게 구두가 바닥에 닿았다.

“나가라.”

“예…….”

재민용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대표실을 나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걸음이 휘청였지만 재강원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 아들을 부르지 않았다.

* * *

“재강원 고등학교로 가.”

차를 타자마자 민용은 운전사에게 명령하고 시트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흐느끼지도 못하고 숨죽여 울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변의 사람은 다 재강원의 사람들이라 재민용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보고된다.

알지만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보고된다고 해서 아들이 괜찮을까 들여다볼 사람이 아니다. 서러움이 더 커져 틀어막은 울음이 터졌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운전사는 민용의 명령으로 밖에서 대기했다. 한참을 운 민용은 재강원 고등학교 기숙사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온 것이 아니다.

원망도 들었지만 우강희와 같은 방을 쓴다는 베타에게 더 미움이 컸다. 그렇다고 오메가가 베타를 찾아가 왜 내 약혼자를 유혹했냐고 따질 수도 없다.

페로몬까지 쓰는 오메가가 베타에게 져서 알파를 빼앗기다니, 수치스러운 일은 사방팔방 알릴 수 없다. 아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민용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똑똑, 가볍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민석이 보였다.

잠금장치를 풀었다.

동생이 옆에 앉자 훅 소취제의 향기가 풍겨 와 민용은 짜증 났다. 누구는 알파에게 파혼당했는데 동생은 베타면서 알파 페로몬을 지우려고 소취제를 잔뜩 퍼붓고 다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학교에서 이렇게 소취제 냄새를 풍기며 다녀?”

“남이사. 차가 보여서 나왔더니…… 형이 이 밤에 웬일이야?”

민용은 민석을 보고 기분이 조금 풀렸다. 야단맞았다고 민석은 저의 눈치를 보았다.

알파 발현 확률이 높아졌다고 신이 나 목소리가 커졌던 민석이 주눅 들어 보이니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동생이지만 우강희의 룸메이트와 같은 베타가 그런 모습을 보여서 대리 만족이 되었다.

“……우강희와 룸메이트라는 베타 녀석, 어떤 놈이야?”

“박한주? 아.”

어머니 오혜주도 민용의 파혼 얘기를 듣고 민석에게 우강희의 룸메이트에 관해 물었었다.

“평범해. 베타에…… 잘난 거 없는데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그 녀석에게만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어.”

“평범? 평범한 놈이 우강희를 그렇게 꼬여 냈다고?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인데?”

형의 짜증에 민석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핸드폰을 꺼냈다.

룸메이트 지영의 태도가 변해 짜증 나는 일투성이인데 형까지 찾아와 한주 얘기를 꺼냈다.

지영이 한주의 일을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 반성하며 언젠가 사과하겠다고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아무리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지만 지영은 여전히 한주를 좋아하니 일부러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후 지영은 민석이 알파 페로몬을 원하는 것까지 알아내서 도와주겠다며 강압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한주의 일에 대한 복수였다.

“여기.”

예전에 박한주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었는데 그때 받았던 보고를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라는 사람도 프라이머 오메가에 불과해. 작게 꽃집을 운영하는 정도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집안도 특이점 없고.”

“재강원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겨우 그 정도라고? 어떻게 입학을 했지? 우리 학교는 재력도 보지만 그 부모의 지위도 보는데?”

휙휙 화면을 빠르게 넘기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굳어 버린 민용의 얼굴을 보고 민석은 화면을 확인했다. 자신이 읽었던 보고서 그대로였다.

“왜? 문제 있어?”

“왜…… 아버지 쪽이 비었지?”

“뭐? 아, 없으니까 비어 있지. 그 사람들도 찾지 못했으니 없는 거잖아. 미혼모니까.”

민용은 핸드폰의 주소록에서 번호 하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 직원에게 조사시킨 거지?”

“응. 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핸드폰을 쥔 민용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직원이 곧 전화를 받았고 민용은 빠르게 확인했다.

“민석이가 이전에 부탁한 건이 있을 겁니다. 박한주에 관한 조사 보고인데, 이거…… 부모 중에 아버지난이 비어 있던데, 정보가 누락된 겁니까?”

- 아니요. 넣지 않았습니다.

“왜, 왜요?”

- 규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규정!”

- 규정이라 말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민용은 다시 보고서를 보았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형?”

이상함에 민석은 조심스럽게 형을 불렀다.

민용은 몇 번 조사를 보고받아 본 적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나 의심 가는 사람, 혹은 치워 버리고 싶어 약점을 알고 싶은 사람을 조사했었다.

가문의 직원은 프로라 보고서는 깔끔했고 두 번 부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원하는 부분들로 확실하게 보고서를 꾸몄기에 재차 일을 지시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보았기에 민용은 어떤 형식으로 그들이 어떤 것들을 보고하는지 알았다.

부모 중 한 명이 부재이면 최소한 어떤 사유로 없는지, 혹은 소문이라도 적혀 있어야 한다. 미혼모의 자식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들 조사에도 걸리지 않는다면 최소한 ‘미상’으로 적혀 있었다.

절대로 공란으로는 두지 않았다.

민용은 보고서를 보면서 웃어 버렸다.

그 보고서처럼 아버지난이 아예 없는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어머니가 보던 보고서였다.

“기가 막혀.”

“도대체 뭔데?”

민석은 답답해 민용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창백해졌다가 웃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노려보는 민용의 변화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에게 자식이 몇인지 알아?”

“뭐? 자식이 몇이냐니…… 우리 둘이잖아.”

“나도 아버지 자식이 몇 명인지 몰라. 어머니만 알고 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아버지 자식이 몇 명인지 모르다니…… 아버지에게 우리 외에 다른 자식이 있다는 거야?”

대답 없는 형의 얼굴을 보고 민석은 창백해졌다. 아버지의 애인에 대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충격은 더 컸다.

민용은 끊지 않은 전화를 입술에 가져가 다시 물었다.

“박한주, 아버지의 자식입니까?”

- 네.

당황하지도 않고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민석에게도 그 대답이 확실히 들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곧 정신 차리고 핸드폰을 뺏어서 직원에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박한주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니? 왜 박한주가 아버지의 자식이 될 수 있어?”

- 박한주 씨의 모친인 박예주 씨와 잠시 애인 관계였고 박한주 씨가 태어나자 친자 확인을 했습니다. 친자였으나 베타이므로 호적에 입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예전에 친자 확인을 했다는 말에 민석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그렇게 싫어하고 눈엣가시인 박한주가 그와 형제였다.

민석과 같은 피가 흐르는, 아버지 재강원의 핏줄이었다.

베타지만 알파로 발현할 거라고 믿었다. 아버지가 로열 알파인 재강원이니까. 그 피를 이어받은 저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렇게 싫어하는, 같은 반의 알파들에게 호감을 받는 한주 또한 재강원의 아들이란다.

아버지의 혼외자.

배다른 형제.

그 어머니 또한 프라이머 오메가였다.

박한주와 재민석의 차이는 부모의 결혼 여부뿐이었다.

그 결혼도 그저 서류로만 유지하고 있을 뿐 언제 갈라서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이다 보니 민석은 눈앞이 컴컴해졌다.

“그 자식이…….”

한주는 베타라는 이유로 재강원의 친자이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베타라서.

그것은 민석에게 다행으로 여겨지는 일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저가 한주의 입장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저도 아버지 재강원에게 버려질 수도 있다.

민석은 주먹을 움켜쥐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민용은 헛웃음만 내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민석도 이를 갈며 민용을 노려보았다.

“박한주와 같은 피가 흐른다고? 그 자식이 나와 형제라고?”

한주를 보면서 느꼈던 이질감과 혐오, 그동안의 기억이 쏟아지며 감정이 터졌다.

2학년의 무릎 사이에 꿇어앉은 절 보고 놀라던 한주의 얼굴과 절 지키겠다며 앞에 나서서 막아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불쌍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기억났다.

“죽여 버리겠어.”

민석은 또렷하게 말했어.

“박한주, 그 새끼, 죽여 버리겠어.”

절 동정하며 형을 파혼시켰다. 게다가 재강원의 아들이며 그들의 형제였다. 민용은 민석을 말리지 않고 빠르게 조언했다.

“우리가 알았으니 아버지에게도 보고가 들어갈 거야. 행동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해. 우리한테 감시가 붙기 전에.”

재강원은 혈육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명예와 재씨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사람이었다. 혈육 간의 불화로 싸움이 일어나는 모습을 참지 않을 것이다.

“박한주를 밖으로 불러내야 해.”

“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고 룸메가 그 녀석과 틀어졌지만 도움은 되지 못해.”

“다른 사람은?”

민석은 고개를 들었다. 광기에 눈이 번들거렸다.

“도와줄 사람을 알고 있어. 그 사람이라면 우릴 도와줄 거야. 박한주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말에, 제일 화낼 사람이야.”

민석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박한주에게 감정이 있고 모의를 할 만한 두뇌가 있으며 같은 목적을 가질 남자가 학교 안에 있었다.

* * *

우강희의 손에 든 검은 봉지가 흔들거리며 부스럭거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봉지를 들고 기숙사 건물로 가는데 3학년 기숙사 건물에서 우천희가 나오고 있었다.

우강희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천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살을 찌르며 피부가 뚫리던 느낌이 손에 남아서 그날 이후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악몽에서 깨면 꿈이 아닐까 볼펜을 확인했다.

우강희의 피가 묻은 볼펜은 오염되지 않게 투명한 아크릴 케이스에 넣어 두었다. 우강희를 찔렀던 충격으로 악몽을 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을 잠재워 주는 것 또한 우강희의 피가 묻은 볼펜이었다.

자의가 아닌 우강희에 의해 그런 상해가 이루어졌다니, 우천희에게는 굴욕이었다.

우강희는 우천희를 보았지만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지나쳐서 기숙사로 들어갔다.

무시당했다.

우천희는 주먹을 움켜쥐며 우강희가 들어간 기숙사를 노려보았다. 이전에는 최소한 고개를 까딱이는 정도의 인사는 했던 그가 이제는 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우강희…….”

상처를 주고 싶다. 어떤 짓을 해도 눈 깜짝하지 않는 우강희에게 절대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절대 잊지 못하도록.

툭, 무릎에서 퍼지는 통증에 우천희는 흠칫 놀랐다. 정신을 차리니 바닥에 두 무릎이 닿아 있었다. 흡사 힘이 빠져 주저앉은 모양새였다.

“어, 잠시 어지러웠나?”

누가 볼까 봐 얼른 일어나려는데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얼룩을 만들었다. 코끝이 간질거리며 주르르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

손등으로 슥 훑으니 피가 묻었다.

“코피? 요즘 무리한 것도 없는데.“

그런데 투두둑, 단순히 몇 방울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둘러 손바닥으로 코를 막았지만 손을 다 적실 정도로 흥건해졌다.

그 순간, 우강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망가뜨려 줄게.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그 머리를.’

‘너의 모든 걸 빼앗아 다시는 꿈도 꾸지 못하게, 철저하게 망가뜨려 주겠어.’

* * *

“떡볶이는?”

우강희가 방으로 들어가자 한주는 책상에 앉아서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뭐 사 갈까, 하는 말에 떡볶이를 부탁하며 주소를 보내기는 했는데 우강희가 정말로 동네 분식점을 찾아가 떡볶이를 포장해 온다는 기대는 없었다.

그가 검은 봉지를 들어 보이자 한주는 활짝 얼굴이 밝아지더니 더욱 반갑게 맞았다. 재빨리 봉지를 가져가서 쪼르르 테이블에 놓았다.

“와서 앉아. 저녁은?”

“아직.”

“같이 먹자. 여기 떡볶이 진짜 맛있어.”

기분이 좋은지 한주는 말이 많아졌다.

“중학교 때는 일부러 고용진과 이거 사 먹으려고 찾아가기도 했어. 그 녀석이 떡볶이 킬러거든. 누나 둘 있는데 누나들은 떡볶이 맛집 지도까지 만들어서 전국을 찾아다니는 분들이야. 아마 걔네 집은 나중에 떡볶이 가게 할걸.”

일부러 떡볶이를 사 온 보람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누나들이 떡볶이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데 바빠서 잘 안 만들어 주거든. 누나들이 얼굴 엄청 따지니 너 가면 단박에 만들어 줄걸.”

가족 얘기를 하듯 친근하게 말하는 한주는 강희가 한입 먹고 나서야 먹기 시작했다.

한주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며 우강희는 입술에 묻은 매콤한 소스를 핥았다.

“재강원 이사장에게 파혼한다고 말하고 왔어.”

잠시 손을 멈추더니 느릿하게 떡볶이를 입에 넣고 한주는 꾸역꾸역 씹었다.

“재강원 이사장이 받아 줘? 파혼이…… 집안 문제이기도 하고 쉬운 일은 아닐 거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싫다는 사람을 잡지는 않아. 파혼하라고 허락했고.”

“그래?”

“그러니까, 이제 우리 사이는 아무 문제 없어.”

꿀꺽, 한주는 입 안의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선전포고다.

한주는 우강희의 시선을 피해 떡볶이로 눈을 돌렸다.

“우리 사이가 뭐라고…….”

“사귀잖아.”

물을 마시던 한주는 콜록거리며 기침했다.

우강희는 씨익 웃었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고 시선을 피하지만 한주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샤워하면 거즈 붙여 줘.”

“실밥은 언제 뽑는대?”

“금요일쯤 양호실에서 뽑으면 돼.”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 봐야 하잖아. 안까지 찔렸는데.”

“그런가. 병원은 싫은 기억이 있어서 가고 싶지 않은데…… 주말에 같이 가 줄래? 병원 가는 김에 약속대로 데이트하자.”

밖에서도 같이 지낼 궁리를 하는 말을 한주는 거절하지 않았다.

“낮에 가? 그럼 같이 갈 수 있어.”

“호텔은 아직 사람 구해지지 않았어?”

“어, 아직.”

“그 사람들 널 놓치기 싫어서 어영부영 시간 끄는 모양인데. 한국 호텔에서 직원 채용에 그렇게 시간이 걸릴 리 없어. 다시 얘기해 봐.”

“알아서 하겠지.”

“주말에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

“…….”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인가 그가 한주의 옆자리에 있었다. 한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붙여 왔다. 이어지는 말 때문에 한주는 몸을 피하지 못했다.

“열이 나나 봐.”

“야, 너…….”

꿍꿍이가 보이지만 한주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기대 오는 몸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만져 보라는 듯이 우강희는 한주의 목덜미에 이마를 문질렀는데 목에 닿은 피부가 뜨거웠다.

“너, 진짜 열 있어.”

우강희의 목을 만져 보고 한주는 화들짝 놀랐다. 생각보다 체온이 높았다. 한주의 손이 닿자 옅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좋다, 시원해.”

“의사 부르자.”

핸드폰을 가지러 일어나려 하자 우강희는 한주의 허리를 감싸며 제 무릎에 앉혔다.

“시간 지나서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때 불러도 돼.”

덩치는 컸지만 품에 안겨 오는 몸짓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한주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안쓰럽다니, 난 왜 얘한테 이렇게 약하지?’

흑심이 있어 약한 척하는 모습은 빤히 보였는데 정말 열이 나서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애써 핑계를 찾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난 소파에 앉을게.”

소파로 엉덩이를 내리는데 딸려 오듯이 우강희의 몸이 기울어졌다. 그는 몸의 힘을 풀며 자연스럽게 한주에게 무게를 실었다. 소파 팔걸이에 등이 닿으며 반쯤 눕게 되었다.

천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로 몸 전체가 따끈했다.

“이렇게 열이 나면서 왜 기숙사까지 온 거야? 서울에 있을 때 병원을 가지.”

“떡볶이 사 온다고 약속했잖아.”

우강희는 고개만 들어 한주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상체를 들자 허리가 밀착되며 묵직하게 다리 사이가 눌렸다. 한주는 붙지 않도록 허리를 좀 더 뒤로 물렸다.

“야, 떡볶이가 뭐가 중요하다고…….”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

숨김없는 애정 표현에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뜨거운 애정이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너는 진짜 잘도 그런 말을…… 부끄럽지도 않냐?”

“그래야 네가 내 마음을 알 수 있겠지.”

팔에 힘을 빼며 강희는 한주의 위로 몸을 포갰다. 심장이 맞닿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한주의 목에 우강희의 숨이 닿았다. 뜨거운 숨은 목을 간지럽히며 흩어졌다.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다리가 배의 상처에 닿았는지 우강희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때문에 한주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차라리 불순한 의도로 움직였다면 환자라도 매몰차게 밀어냈을 텐데 그는 한주를 껴안기만 했다.

끄응, 신음으로 불만을 표했다. 작은 소리가 귀여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흑심에 그의 것이 단단해졌지만 허리를 내려 한주에게 닿지 않게 노력했다.

아직은 참아야 한다.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다가가야 했다.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당장 욕심을 부리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게 상황이 악화되고 미움을 받을 수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주의 마음이지 그 껍데기뿐인 몸이 아니니까.

그는 한주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눈을 감고 있자 한주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어, 사탕.”

지루했는지 한주가 테이블에 있던 사탕을 발견하고 버둥거리며 손을 뻗었다. 껍질을 까 무심코 입에 넣었는데 곧장 이빨 사이에 사탕을 끼웠다.

“에이.”

“왜?”

“바카사탕이야. 이그 시른데.”

앞니에 사탕을 끼우고 말을 하다가 혀로 사탕을 핥자 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향도 향이지만 왜 사탕 주제에 화한 맛이 나는지 이해 안 된다.

“으…….”

사탕을 이빨 사이로 물고 있어서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박하 맛 타액이 입 안에 고이고 있다.

사탕을 빼려 했는데 손이 잡혔다.

“아?”

그의 손이 한주의 머리 뒤를 감쌌고 얼굴이 가까워지며 그가 입을 벌렸다.

놀라 멈춰 세울 사이도 없이 그는 한주의 이빨 사이에 끼워진 사탕을 가져갔다. 입술이 살짝 부딪쳤지만 우강희는 사탕만 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 안으로 하얀 사탕이 쏙 들어갔다.

꼴깍, 한주는 놀라서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우강희는 사탕을 볼 한쪽으로 밀어 넣어 맛을 음미했다.

“박하사탕은 처음 먹어 보는데, 나쁘진 않네.”

태연한 말투에 한주의 손이 움직였다.

우강희의 머리 옆을 쳤다. 충격으로 입에 들어갔던 사탕이 톡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왜, 왜 남의 사탕을!”

“바닥에 떨어졌잖아. 아깝게…… 맛이 괜찮았는데.”

“이…… 수치도 모르는!”

한주만 얼굴이 새빨개져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우강희는 아쉬워 입술을 핥았다.

* * *

“우강희, 그 녀석…… 갑자기 그런…….”

생각만으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전날의 일인데도 박하사탕 맛이 입 안에 감도는 느낌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받아 주는 것이 아닌데.

방심하고 있었더니 생각지도 않은 공격을 받았다.

“사부가 알면 혹독하게 훈련할 거야.”

아무리 갑자기 공격받았다지만 사부에게 받은 교육이 무색하게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실력이 죽은 건가, 한주가 주먹을 움켜쥐어 보는데 담임 이무열이 교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 선생님. 아침 드셨어요?”

인사했는데 무열은 대답도 하지 않고 한주의 옆을 지나갔다. 잠시 스쳤던 눈길이 차갑다.

“선생님?”

돌아보며 다시 불렀지만 무열은 멈춰 서지 않고 멀어졌다.

단지 오늘 무열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때때로 아침부터 기분이 저기압이라 인상을 찌푸리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고 고용진도 기분이 안 좋은 날은 아예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며 선포하니까.

아침 조례로 무열이 교실로 들어왔다. 학생들에게 조곤조곤 얘기하며 웃어 주던 무열이 한주를 보자 차가워졌다.

극명한 온도 차였다.

다른 학생들보다 한주를 잘 챙겼고 학생 중에 무열의 방에 가 본 사람은 한주가 유일할 정도였다.

한주 자신도 무열이 학생들 중에 자기를 더 이뻐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왜?

이유도 없이 이럴 리 없다. 최근 무열과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고 그러니 실수한 일도 없었다.

조회를 끝내고 나가는 무열을 따라 나갔다.

“선생님.”

자각하지 못하지만 말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무열을 불렀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이번에는 걸음을 멈추었다.

“선생님.”

차가운 눈으로 무열은 돌아보았다.

차라리 타인을 보는 무심함이었다면 한주도 이해했겠지만 그 눈에는 미움과 원망이 들어 있었다.

최근 우강희와 어울리느라 무열에게는 소홀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과했다.

“선생님.”

“불렀으면 용건을 말해.”

싸늘했다.

“제가 선생님께 실수한 것이 있어요?”

“실수? 아니.”

“그런데 왜 선생님은…….”

한주도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말을 멈추었다.

잠깐의 침묵이지만 무열은 기다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전이라면 무슨 일이냐며 기다려 주었을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떴다.

“바쁜 사람 잡고 장난치지 마.”

더는 묻지도 않고 가 버렸다. 당황해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말이라도 한 번 더 걸어 주고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를 해 주며 다정하던 무열이 돌변했다.

“아, 왜 저러지? 진짜 뭔가 실수했나? 문자라도 잘못 보냈나?”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왜 그래?”

우강희가 옆으로 다가왔다. 한주는 복도를 한번 보고는 그와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민석과 눈이 마주쳤다.

지영과 같은 방을 쓰게 되면서 둘이 어울렸고 한주가 가까이 오면 피했다. 마치 한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일관적으로 시선도 두지 않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비웃거나 노려보지도 않았다.

민석에게서 어딘가 여유가 느껴졌다.

항상 쫓기듯이 다급한 감정으로 한주를 향한 질투와 분노를 보이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마음을 정리했나 보구나, 하고 생각하기에는 불안함이 남았다.

“아예 찰싹 붙어 다니네.”

차원구가 한탄을 하며 한주와 우강희를 놀리는 통에 곧 민석의 일은 잊었다.

“너네 언제 결혼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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