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우강희(1) (23/31)

23. 우강희(1)

알파 위주의 커리큘럼이라 수업은 대학 수업에 뒤지지 않는 높은 난이도로 진행되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면 훅 진도가 나가서 쫓아가느라 힘들어지기 때문에 수업에 집중했다.

고등학생 2회차가 되어 다시 공부하니 제법 할 만했다. 그렇다고 날고 기는 알파들 사이에서 1등 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수업 중에 딴생각하며 여유를 부릴 정도는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시나?’

무열의 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교수의 수식 풀이는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나갔다. 의미 없이 교과서 빈자리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는데 옆으로 강희가 책상을 붙여 왔다.

“이건 이렇게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돼.”

묻지도 않았는데 한주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종이 빈자리에 볼펜을 가져갔다. 책상 위에 기대고 있던 왼쪽 팔에 그의 팔이 스쳤다.

〈금요일에도 호텔에서 잘 건데 밤에 뭐 할까?〉

한주는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그 아래 썼다.

〈토요일만.〉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려 강조했다.

“아, 그렇게 이해했네. 이렇게 생각하면 어렵지.”

〈금요일 자정 넘으면 토요일.〉

누가 보면 친절하게 풀이를 가르쳐 주는 모습이었다.

“아, 그래?”

〈저녁 6시도 토요일이지.〉

한주의 알바는 오후 7시부터 시작이었다.

“그렇네, 그 부분을 생각 못 했어.”

〈서울까지 같이 가자는 소리?〉

〈엎기 전에 장난 그만해라.〉

〈나만 데이트를 기다리나. 서운해.〉

마음을 대변하듯이 우강희는 ‘서운해’ 뒤로 눈물이 매달린 눈을 그렸다. 정작 눈이 마주치면 턱을 괴고 씨익 웃었다.

한주는 턱을 괴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췄다.

‘덩치는 큰 녀석이 하는 짓이 왜 이렇게 귀엽지?’

무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데 우강희가 눈치 없이 수작질만 부려 짜증 났었다. 그 짜증도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방 쓰는데 뭘 데이트를 그리 기다려. 기껏해야 밖에서 만나는 건데.〉

〈단둘이 만나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하트에 한주는 툭툭 하트 주위에 털을 그렸다.

‘아니, 텍스트로는 왜 이래? 이런 성격이 아니잖아. 왜 이렇게 귀엽게 굴어.’

툭 우강희가 어깨를 부딪쳐 왔다.

꼬리로 툭 치듯이 간지러운 장난기가 가득했다. 실상은 대형종이지만 텍스트에서 하는 짓은 강아지였다.

〈토요일 오전에 병원 가서 실밥 뽑아야 해. 끝나고 신발 사러 가자.〉

〈신발?〉

강희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무슨 그림인가 고개를 기울였다. 라인으로 운동화를 그렸는데 그가 사려는 디자인 같았다. 꽤 그림을 잘 그렸다.

“오.”

작게 감탄하자 신이 났는지 그 옆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라 손에 가려 고개를 빼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교수가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보드를 마카로 두드리더니 설명을 이어 갔다. 잠시 교수를 보고 풀이법을 확인하고는 한주는 다시 강희의 그림을 보았다.

동그라미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보고 있다가 재빨리 책을 덮어 버렸다.

수업 중이라 좀 큰 소리가 났다. 은근히 신경 쓰고 있던 교수가 그제야 돌아보며 지적했다.

“뭐지?”

“죄송합니다.”

“집중하세요.”

“네.”

얼굴이 뜨거운데 원흉인 우강희는 흐뭇하게 눈웃음치고 있었다. 소리는 안 나도록 그가 쪽 입술을 오므렸다가 풀었다.

“이!”

목소리가 커지려고 해서 입술을 꾹 물었다. 얼른 주변을 보니 소리를 들은 학생 몇몇이 저를 보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지만 곧 슬금 돌아보았다.

호기심과 놀람, 재미있어하는 기분이 얼굴에 가득했다.

한주는 시뻘게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책상을 살짝 들어 우강희에게서 멀어졌다.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절 바라볼 얼굴을 떠올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데 눈이 다시 그쪽으로 간다.

생각했던 표정 그대로 강희는 계속 한주를 보고 있었다.

‘저 뻔뻔한 자식!’

* * *

한주의 눈이 마주치자 지영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틈이 없어 한숨을 쉬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가자.”

종례가 끝나고 담임 무열은 잠시 한주에게 시선을 주더니 반을 나갔다. 차갑게 무시하던 무열이 보인 잠깐의 신호를 한주는 놓치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서 강희는 일어났는데 한주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 가?”

“아, 가야지. 잠깐.”

가방을 드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금방 반에서 나간 담임 무열이 보낸 문자였다.

[할 얘기가 있으니 지금 아래 주소로 와.]

학교는 아니지만 양평 인근이었다.

‘할 말이 있다면 상담실로 부르면 되는데.’

조금 이상했지만 무열이 왜 그러는지 궁금하고, 괜히 이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약속 있어서 잠깐 학교를 나가야겠어. 너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

갑자기 문자를 보고 한주가 약속이 있다고 한다. 서두르지는 않고 한주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강희가 옆으로 걸었다.

“혼자 가려고?”

“어. 갔다 올게.”

“그럼 가방 줘. 방에 가져다 둘게.”

“응, 고마워.”

가방을 넘기고 한주는 계단을 내려가 본관 앞으로 가자 외부 손님이 타고 온 택시가 마침 서 있었다. 택시에 올라 학교를 빠져나갔다.

무열은 갑자기 왜 태도를 바꾸었을까.

이전의 삶에서 한주는 이유 없는 폭력을 이가 갈리도록 겪었다.

외할머니 송 여사는 자신이 베타라서 엄마를 버림받게 했고 미래가 창창한 자식의 앞날을 망쳤다며 싫어했다.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베타는 약자고 당연한 샌드백 취급을 당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던 2학년이 괴롭히기 시작했고 그들은 베타를 혐오했으며 베타라는 이유로 비하하고 폭행을 했다.

하지만 담임 이무열은 달랐다.

이전의 삶에서 너무 힘들고 좁게 생각해서 잘해 주는 무열에게 짜증 내며 삐뚤게 보고 멀리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 조건이나 사심 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온정을 베푸는 사람을 만났는데 비꼬인 마음 때문에 고맙다는 말도 못 했다.

두 번째 기회가 오면서 한주는 무열과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것이다.

왜 그럴까.

처음부터 같은 태도였다면 모를까 잘해 주다가 돌변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한주가 탄 택시는 한적한 주택 앞에 섰다. 대문이 열려 있어 안까지 아무런 저지 없이 들어갔다.

“별장인가? 으리으리하네요.”

택시 기사는 한주가 입은 재강원 고등학교의 교복을 보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떠났다.

별장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 건물은 안이 잘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주위 풍광을 즐기기보다는 폐쇄적이었다. 1층에 통창이 있었지만 나무로 가려져서 정원이 보이지 않을 거 같았다.

“박한주.”

무열의 목소리에 2층을 보던 한주는 고개를 내렸다. 정원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길 주변은 키 작은 나무로 길을 만들어 시야가 가려졌다. 그 길 끝에 무열이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선생님.”

다가가려는데 무열이 손을 들어 막았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괴로워 보였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한주야, 네가 모를 수 있지만 확인하고 싶어서.”

잠시 망설이며 주저했지만 용건을 말했다.

“네 친아버지가…… 재강원 이사장이야?”

재강원이 무열과 사귀는 것을 알았어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숨길 생각은 없기에 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유전학적으로는요.”

말을 듣자마자 무열이 휘청거리다가 나무를 잡았다. 크게 등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선생님?”

“오지 마!”

날카로운 외침에 다가가려던 한주는 움직이지 못했다. 무열은 흐느끼며 절망했다.

“알고 있었구나. 네가, 네가 재강원의 아이라니…….”

몸을 떨어 가며 흐느끼는 목소리에 원망이 실렸다. 재강원의 아들임이 잘못이라는 뉘앙스였다.

그것이 그렇게 충격일까?

재강원과는 타인이라고 여겼기에 한주는 무열이 충격에 힘들어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연인의 혼외자라는 사실이 아끼는 학생이 싫어질 정도의 일일까?

이미 재강원이 유부남임을 알 텐데.

절 보던 무열의 차가운 시선이 다시 생각났다.

“선생님.”

“네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니…….”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데 핏줄이라고 끈질기게 재강원의 꼬리표는 한주를 따라다녔다.

“선생님, 아버지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에요.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를 버렸고,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아들이라고 나설 생각도 없고…… 그런데도 그게 그렇게…… 제가 싫으세요?”

“그 사람의 피를 이었잖아! 네가 부정해도 너는 재강원의 아들이야!”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는데도 무열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절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렸고 노려보았다.

“난 몰랐어. 네가 그 사람의 아들이었다니…… 몰랐는데도 너한테 잘해 줬다니…….”

“선생님.”

무열은 그동안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님, ……저도 원해서 그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알았으면, 잘해 주지 않았을 텐데…….”

그 말은 좀 아팠다. 한주는 속이 쓰렸다. 이런 일로 무열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재강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고 있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원망을 들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예주는!’

외할머니 송 여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제 벗어났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다시금 심장을 찔렀다.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에게 선생님은 소중한 사람이에요.”

울며 노려보던 무열의 표정이 변했다. 놀라며 한주의 뒤쪽을 보고 있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한주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하며 뒤돌았다.

“한주야! 뒤!”

양복을 입은 전문가들이 어느새 한주의 등 뒤에 다가와 있었다.

“악!”

치지직 전자음이 나며 허리에 충격이 들어왔다. 온몸을 관통하는 전류에 몸을 퍼덕이며 떨다가 반항도 하지 못하고 한주는 바닥에 쓰러졌다.

“한주야!”

흐릿해진 시야로 무열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재민석이 있었다.

“하…… 결국 너였어…….”

팔을 잡아당겨 남자들이 부축하면서 한주는 정신을 잃었다.

* * *

재민석이 부른 직원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한주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한주야!”

깜짝 놀라 따라가려는데 민석이 잡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한주와 할 얘기가 있으니 불러 달라며!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제 손으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민석은 천진난만하게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어차피 선생님은 이럴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잖아요. 그동안 내가 박한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봐 왔잖아요.”

“나는 그냥, 네가 한주에게 따질 줄 알았어. 네 형제라고 알았으니까, 혹시 때리지는 않을까 걱정해서…….”

얄팍한 핑계에 민석은 웃었다. 그리고 빠르게 손을 놀려 무열의 뺨을 쳤다.

“누가 형제라는 거야? 뭘 따져? 그 말을 누가 믿을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박한주를 부르지 않았겠지. 당신은 그저 그 녀석과 내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잖아. 재강원의 자식이라.”

민석은 무열이 아버지의 애인임을 알고 개인적으로 사람을 써서 보고받았다. 가문의 직원을 쓰면 아버지에게 보고가 들어가기에 사적으로 구했다.

자신은 유산까지 했는데 저가 아끼던 베타 학생이 재강원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떨까.

한주를 불러낼 조력자를 구하는 데 이무열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박한주와 무열, 두 사람에게 다 상처를 줄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었다.

“아니야!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한주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평소에는 애지중지하며 뭐라도 더 챙겨 주려고 신경 쓰던 박한주를 그렇게 노려봤다고? 정말 아무 감정이 없었어? 당신은 놓쳐 버린, 아버지의 아이잖아.”

무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창백해진 그는 놀라 민석을 보았다.

“긴 시간을 아버지 애인으로 살았으니 아이를 원했을 텐데 허락받지 못했잖아. 생겼지만 결국 놓쳤고. 그런데 아끼던 학생이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하니 미워지는 게 당연하지.”

이무열은 재민석을 노려보았다. 재밋거리로 얘기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일은 무열의 평생이었다.

“한주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별거 안 해요, 나는.”

재민석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밖으로 걸어갔다. 비굴하게 느껴지던 초조함이 이제 재민석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우선은 그 얼굴에 되돌릴 수 없는 흉터 하나를 만들어 줄 생각이에요. 두 번 다시 알파에게 꼬리 칠 수 없게.”

“안 돼!”

떠나는 민석을 잡으려 했지만 지켜보던 직원이 무열을 제지했다.

“그런 짓 하면 아들이라고 해도 재강원이 가만두지는 않을 거야! 이 일을 알면 네가 아들이라도 재강원은!”

그 말이 발을 잡았다.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에 본능적으로 멈춰 섰을 뿐이었다. 무열을 돌아본 민석은 한껏 웃었다.

“알파다운 짓을 했다고 칭찬하겠죠. 안 그래요? 선생님은 아버지의 가장 오래된 애인이니 알잖아요.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애초에…….”

가볍게 노래하듯 흥얼거리던 말이 잠시 멈추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 사람은, 가족애니 인간애라는 것이 없는, 오직 자기 자신만 중요한 사람이라…… 다른 자식을 후계에서 밀어냈다고 한다면…… 저에게 시선 한 번쯤은 주지 않을까요.”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추측이었다.

“한주를 건드리지 마, 한주가 무슨 잘못이라고…….”

“그러는 선생님도 저와 박한주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불러 주었잖아요.”

“난,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무열은 할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민석이 위험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한주가 재강원의 아들이라는 말이 충격적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수긍하며 사세요.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민석은 차를 타고 별장을 떠났다. 무열은 한주를 함정에 밀어 넣은 죄책감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 * *

전날, 재민석이 무열의 숙소로 찾아왔었다.

재강원이 자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민석이 얼마나 아버지의 인정을 원하는지 가끔 멀리서 지켜볼 때도 충분히 보였기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민석을 불쌍하게 생각했다.

재강원의 반려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의 아이를 원했지만 가지지 못했기에 민용과 민석을 보면 미움과 부러움이 솟았었다.

그가 어떻게 자식을 대하는지 알기에 불쌍한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더 일부러 재강원의 자식들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애인임을 알고 난 후부터는 민석은 아예 무열을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편이 편했다.

그런데 먼저 민석이 숙소로 찾아왔다. 무열은 어쩔 수 없이 민석을 방 안으로 들였다. 절 혐오하며 노려보던 아이는 무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차를 내줄 시간도 없이 민석은 본론을 꺼냈다.

‘알려 줄 일이 있어서 왔어요.’

말투는 정중했다. 그 순간 자신에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러나 예상만으로 쫓아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걱정도 되었다.

‘무엇을 알려 주겠다는 거지?’

‘왜 당신이 그렇게 박한주를 싸고도는지 알 수 없었어요. 베타이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박한주에게만 친절할까, 의문이었죠.’

무열도 자각하고 있었다.

‘같은 베타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나한테 잘해 주지도 않고 다른 베타를 신경 써 주는 것도 아니고. 오직 박한주만.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 말 그대로 이상하게 박한주에게 끌렸다. 재강원에 휘둘리고 그가 사생활에 상관없이 불러내어서 인간관계는 엉망이었다. 주변에서 다가오려는 사람이 있어도 거리를 두었고 친분을 쌓지 않았다.

그런데 한주는 보자마자 호감이 갔다. 시선이 가고 사소한 것이라도 챙겨 주고 싶었다.

‘나한테 알려 주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서 왜 한주 얘기야?’

민석이 한주의 이름을 꺼내자 무열은 긴장했다.

좋지 않은 신호다. 불안에 본론을 꺼내라고 말하자 민석은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곧 그 미소는 일그러졌다.

‘본능이라는 걸까요?’

‘본능?’

‘박한주의 비밀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아, 정말 선생님이 아버지를 좋아하는구나.’

무열의 등으로 소름이 지나갔다.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솜털이 오스스 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제대로 말해!’

학생들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무열이 날을 세웠다.

민석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놀리는 모양새였다. 무열의 불행을 안다는 듯한 표정이라 더 초조해졌다.

‘말하라고!’

민석은 둘밖에 없는데도 비밀을 말하는 사람처럼 상체를 무열에게 가까이 숙였다.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고 가운데 탁자가 있어 그저 조금 거리가 가까워졌을 뿐이다.

‘선생님도 몰랐죠? 그러니 박한주에게 그렇게 잘해 줬겠죠.’

재민석의 입이 길쭉하게 벌어졌다.

‘박한주가 아버지의 아들이래요.’

무열은 무슨 폭탄을 터뜨리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며 분위기를 잡는가 긴장했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질 나쁜 장난에 또 놀아났다.

믿지 않는 생각이 표정에 나타났는지 민석이 다시 말했다.

‘박한주의 엄마가 아버지의 애인 중 하나였대요.’

‘……그래서?’

‘선생님도 믿기지 않죠?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집안 직원에게 형이 물어보았어요. 형을 서포트해 주는 이 과장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사람이 그랬어요. 박한주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이…… 과장이 그런 말을 했단 말이야?’

‘베타라 호적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친자 확인 검사를 한 아버지의 혼외자래요.’

이무열도 이 과장이라는 직원을 알고 있다.

재씨 집안사람들은 그들을 서포트해 주는 직원이 있는데 그들은 어릴 때부터 재씨 집안의 후원을 받으며 자랐고 그들 중 될성부른, 자질 있는 자들이 그 자리에 뽑혔다.

재강원에게도 보좌하며 정보를 모으고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 주는 이 과장이 있었고 재강원의 어머니인 큰 부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서포터는 재씨 집안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룰이었다. 돌려 말하기는 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박한주의 조사 서류에 부친의 칸이 공란이었어요. 재씨 집안 후계자인 나에게 보고하는 서류예요. 선생님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잖아요.’

재씨 집안의 사람으로 살아온 무열은 그 의미를 알았다. 부친이 재씨 집안의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다른 친척의 혼외자라면 그 이름이 있겠지만 민석에게 보고되는 박한주의 서류에 아버지난이 비어 있었다면 뜻은 단 하나였다.

민석의 육친, 재강원이 그 공란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 후 민석이 어떻게 숙소를 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흠칫 놀라며 정신을 차리니 여전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새벽이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인데 움직일 수 없었다.

박한주가 재강원의 아들이다.

그것의 의미는 무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재강원에게 인정받지 못한 혼외자는 여럿 있었고 누구인지 한 명 한 명을 알지는 못하지만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한주, 한 명만이 아니다.

알고 있는데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던 학생이 재강원의 아들임을 알게 되자 무열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주를 볼 때면 이유도 모르게 정이 갔다. 민석의 괴롭힘이 시작되기 전에도 그랬다. 다른 학생에 비해 한 번 더 말을 걸었고 자질구레하게 챙겨 주게 되었다.

그저 인간적인 끌림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 가끔 무조건적인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재강원의 아들이란다.

재강원의 아들이기에, 그 유전자 때문에 박한주에게 끌렸다는 뜻이다.

자신은 본래의 형질도 거세당하고 오메가이면서 베타로 살았다. 그것을 숨기고 재강원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겨우 생긴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재강원이 미웠다. 그리고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랬으면서 알지도 못했던 재강원의 자식에게 호감을 느낀, 그 본능이 무서웠고 재강원을 원망하며 복수를 다짐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재강원의 아이인 한주에게 잘해 준 자신이 소름 끼쳤다.

충격을 받은 사이에 재민석의 말에 휘둘려 한주를 별장으로 불렀다. 저가 원망하고 미워하는 대상은 재강원이지 그의 자식은 아닌데.

머리가 멍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주가 재강원의 아이임을 알고 냉정하게 굴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지는 않았다.

떼어 낼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허우적거렸지만 무열은 떨리는 손으로 뒷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재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한주를 구할 수 있는 사람, 재민석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신호음이 갔다.

“받아.”

신호음은 계속 이어졌다.

“받으라고! 재강원! 한주가…… 네 아들이 위험해!”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신호는 계속되었다.

* * *

우강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방에는 그 혼자였고 한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약속이 있다 해도 기숙사로 돌아왔어야 할 시간이었다.

전화가 꺼져 있다는 안내 말에 우강희는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한주가 핸드폰을 끌 리 없다. 수업이 있어 평일 저녁에 핸드폰의 배터리를 다 쓸 리 없고 한주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지, 핸드폰으로는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는 방을 나가 지영의 방으로 향했다. 지영이 한주에게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해서 그 방에 갔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을 두드리자 지영이 나왔다. 우강희를 보자 대번에 미간이 좁아졌다.

“왜?”

“한주는?”

“……한주를 왜 여기서 찾아? 여기 없어.”

강희는 믿지 않고 지영의 어깨를 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무례야!”

방 안을 훑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영은 강희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너 한주에게 무슨 짓을 했어? 방에 있을 한주를 왜 이 시간에 찾아?”

“재민석은?”

“몰라, 아직 안 왔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강희는 방을 나갔다. 태풍처럼 방의 공기를 뒤집어 놓고 간 그를 생각하며 지영은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저 자식!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자신의 페로몬으로 가득 찬 영역을 강희가 더럽혔는데, 더 기분 나쁜 일은 그의 페로몬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소름 끼치는 컨트롤. 김지영에게 페로몬 컨트롤을 가르쳐 준 강사도 그 정도로 완전한 컨트롤을 하지 못했다.

지영은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우강희가 나한테까지 찾아오는 거야? 집에 들어가면 귀찮아서 나가지도 않으면서!”

차여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생각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한주의 번호를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말이 흘러나왔다.

“전원이 꺼져 있어? 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한주와 알고 지내는 동안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어?”

지영은 눈을 깜빡이며 안내 말이 끝날 때까지 화면을 보았다. 불길한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 * *

우강희는 일전에 만들어 둔 한주의 복제 폰을 확인했다. 한주가 우상진을 만났던 날 이후의 내용은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아, 박한주. 스파이 앱을 지웠어.”

연락을 받고 한주는 불편한 표정 없이 순순히 만나러 갔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의 사람에게서 온 연락 같지는 않았다.

재민석이나 우천희였다면 우강희에게 말했을 것이다.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일전에 친자 확인 검사를 맡긴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박한주가 사라졌습니다. 오늘 오후 4시부터의 문자, 통화 이력과 위치 추적으로 신호가 어디서 끊겼는지 알아보세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합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고 우강희는 방을 나섰다. 차라리 한주가 오메가였다면 아무리 컨트롤이 뛰어나도 미세하게 몸에 묻은 페로몬으로 추적을 할 수 있지만 베타였다.

계속 학교 부지 내에서 같이 생활했기에 최근에는 따로 추적 페로몬을 묻혀 놓지 않았다.

실수였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놓칠 수 있는데.

학교를 돌아다니는데 우강희의 눈에 학생회실에서 나오는 우천희가 보였다. 이전에 한주를 거론하며 위협하던 말이 떠올라 그의 눈이 번뜩였다.

* * *

“그만 가자.”

한수원은 우천희를 재촉했다.

우천희는 의자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을 듣지 못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최근 우천희의 상태가 이상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유독 창백하고 멍하니 있었다. 어찌 보면 겁에 질려 보이기도 했다. 남들에게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긴장하며 바른 모습을 보이는 우천희답지 않았다.

한수원의 입술이 길쭉해졌다.

미미하게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페로몬은 바리톤처럼 농도가 높고 묵직한 편이었다. 빠르게 퍼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농도가 짙어 무게가 있어 바닥으로 깔렸다.

한수원의 페로몬이 닿으려는 찰나 우천희가 고개를 들어 경고했다.

“치워.”

“너 정신 차리라고 그런 거야. 요즘 무슨 생각이길래 그래? 이만 나가자.”

우천희는 알파 페로몬을 좋아하지 않았고 본인의 페로몬도 좋아하지 않았다.

1학년 때까지는 발작적이기까지 했지만 무리 안에서 학생회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가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타인을 누르기 위해 페로몬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페로몬을 웃으며 무시할 정도는 되었지만 가까운 한수원과 단둘이 있으면 성질을 참지 않았다.

한수원은 핸드폰을 들었다.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을 거야? 그때부터 이상해졌어.”

우천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노려보는 시선에 수원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신경 꺼.”

“신경 쓰이게 하잖아. 도대체 오른손으로 무슨 짓을 했길래 틈만 나면 그 손을 들여다봐?”

한수원은 키득거리며 자기 오른손을 약간 둥글게 말며 흔들어 보였다. 농도 짙은 행동에 우천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혀를 차며 일어났다.

먼저 학생회실을 나선 사람은 우천희였다. 수원이 뭉그적거리다가 문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져서 수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 어깨가 잡혀 복도에 내동댕이쳐졌다.

우천희가 우강희를 괴롭히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고 우강희가 일부러 맞아 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삼자인 수원에게는 그것이 보였다. 절대 맞거나 괴롭힘당할 사람이 아님에도 우강희는 우천희의 말이라면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가 우천희를 먼저 건드리든가 시비를 건 적은 없는데 우강희가 일전부터 변했다.

지금도 우천희를 끌고 학생회실로 들어가 버렸다. 철컥, 자물쇠의 쇠공이 맞물리며 문이 잠겼다.

“……우강희?”

황급히 수원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우강희 때문에 이전에도 우천희가 정신을 잃었었다. 절대 단둘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어?”

그러데 몸이 얼어 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 *

우강희는 우천희의 어깨를 잡아 학생회실로 밀어 넣고 안에서 문을 잠갔다.

단지 그뿐이었다.

때리든가 어떠한 접촉도 없었고 우강희는 문에 등을 기대고 바라볼 뿐이었다.

우천희는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안으로 떠밀린 직후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려던 찰나 우강희와 눈이 마주치자 숨이 턱 막혔다.

분명 입 안에, 아니, 목을 막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형의 공이 입 안을 꽉 채우고 숨구멍을 막고 있듯이 목을 옥죄는 느낌이 났다.

우천희는 몸이 떨려 왔다. 겨우 코로만 숨을 쉴 수 있었는데 숨이 가빠지며 호흡이 힘들어졌다.

숨은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우강희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쳐다볼 수도 없었다.

“박한주.”

우강희의 말이 마치 허락처럼 우천희에게 공기를 돌려주었다.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우천희는 갑자기 밀려들어 오는 공기를 들이마시며 헐떡였다.

우강희는 고저 없이 물었다.

“박한주, 어디 있지?”

“모, 몰라!”

살기 위한 외침이었다.

그동안 때리며 지배했다고 생각한 우강희에 대한 괘씸한 마음이 생길 틈도 없이 다급히 외쳤다. 본능적인 대답이었지만 말을 하고 나서 우천희는 몸이 싸늘해졌다.

몸이 먼저 말을 뱉었다. 자의가 아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우천희는 몸이 떨리며 무서워졌다. 이제까지 상대하던 우강희가 아니었다.

“박한주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누구지?”

“아…….”

질문이 바뀌었다.

가쁜 호흡을 하며 우천희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우강희에게 시선이 붙잡혔다.

불현듯 머릿속에 어제의 전화가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머리에 손을 집어넣어 기억 하나를 끄집어내는 느낌으로 툭 생각났다.

“재민용…… 어제 재민용에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어, 맞아, 전화가…… 와, 완전히 파혼했다고…… 울면서…….”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우천희는 정신이 멍해져 몸 상태를 느끼지 못했다.

“부, 분통을 터뜨렸어. 베타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머리가 멍해지며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 관자놀이에서 시작해 점점 머리 전체를 뒤덮었다.

우천희는 머리를 감싸며 몸을 구부리며 신음했다.

“아으…… 머리…….”

마치 직접 보았던 일처럼 하얗게 날리는 커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열린 베란다에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에 커튼이 부드러운 율동을 그리며 움직였다.

‘뭐지? 무슨 기억이지?’

그 자리에 우강희도 있었다. 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린 나이의 우강희가.

“아악!”

심해지는 통증에 우천희는 머리를 감쌌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 통증과 함께 괴롭혔다.

우강희가 집으로 들어온 후 몇 달 뒤, 우천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병원에서 눈을 떴다. 몸은 다친 곳이 없는데 입원해 있었고 그 후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아야 했다.

우천희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명령이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우강희와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물을 사람이 없었다.

우천희가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니 일하는 사람들이 싹 바뀌어 있어서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재민용? 그 사람이 한주를…….”

우강희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마치 주박에서 풀려나듯이 우천희는 몸에서 힘이 풀렸다. 세포 하나하나, 솜털까지 긴장하며 쭈뼛대던 몸이 물에 퍼지는 화장지처럼 흐물흐물해지며 허리에서 힘이 빠졌다.

안도할 순간도 없이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에 우천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바닥에 토해 버렸다. 그곳이 학생회실이라는 생각에 참고 싶었지만 구토를 막을 수 없었다.

마치 물을 토해 내듯 우천희는 속의 것을 게워 냈다.

“우천희! 괜찮아?”

한수원이 뒤늦게 들어오더니 바닥에 엎드려 구토하는 우천희를 발견했다. 등을 두드려 주며 안색을 살폈다.

“꺼져!”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했어? 페로몬은 아닌데.”

“……페로몬?”

수원의 말에 우천희는 벼락을 맞은 듯 몸이 경직되었다. 학생회실 안에는 타인의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우천희는 미세하다 싶을 만큼 옅게 남은 잔재를 느꼈다.

모르는 것을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알고 있는 것은 구분하기 쉬웠다.

우천희는 우강희의 페로몬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구토했다. 나오는 것은 없는데도 뒤집히는 속에 계속 뱉어 내 묽은 위액까지 나왔다.

“우천희!”

“……우강희, 우강희를 따라가. 막아야 해…….”

“우강희보다 네가 더 문제야. 기다려. 직원을 부를 테니까.”

한수원은 밖으로 나가 가드를 불렀다. 다급한 외침과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다. 우천희는 더는 힘이 없어 옆으로 쓰러져 누웠다. 머리를 때리듯이 어린 목소리의 외침이 꽂혔다.

“「너나 죽어!」”

눈앞에서 노인이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모습이 떠오르자 우천희는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았다.

우강희의 페로몬에 한 사람이 죽었다.

* * *

- 박한주 님의 핸드폰은 인근의 소재지에서 한 시간 전에 마지막 신호가 잡혔습니다. 죄송합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경이 곤두섰다. 눈앞이 잠시 흐릿해졌지만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빠르게 정리되었다.

“재강원의 아들, 재민석의 위치를 추적하세요. 재민용도. 그들이 어디 있는지 당장 확인해서 연락하세요.”

- 네.

재민용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최근 파혼당했고 그 이유인 박한주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민용이 움직였다면 민석도 같이 동참했을 것이다.

우강희는 핸드폰에 문자 도착 알림이 뜨자 확인했다. 한주의 핸드폰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사람은 이무열이었다.

담임이자 한주를 잘 챙겨 주던 사람.

우강희는 빠르게 번호를 눌렀다. 무열은 통화 중이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라면서 가지고 싶은 것은 없었고 소유욕을 느낀 적이 없어서 그저 박한주라는 존재가 그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다가왔다는 감정에 취해 안일하게 행동했다.

살아 있는 것은 어떤 사고로든 사라질 수 있는데.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우강희는 실수를 해 버렸다.

우강희의 앞으로 검은 세단이 멈추자 뒷좌석에 탔다.

위치를 말하지 않았지만 직원은 묻지도 않고 보고받은 내용을 브리핑했다.

“박한주 님의 핸드폰 신호가 마지막으로 잡힌 곳과 이무열의 위치가 똑같습니다. 재씨 집안 소유의 별장으로 재강원이 최근 자주 이용하는 곳입니다. 인근 CCTV를 확보했고 박한주 님의 핸드폰이 끊긴 시간 전후로 별장에서 나온 차량의 번호를 추적 중입니다.”

“차량 번호 조회는?”

“하나가 대포 차량이라 CCTV를 확보해 동선을 추적 중입니다.”

직원은 뒷좌석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바짝 긴장했다. 조금의 실수라도 한다면 목이 날아갈 것처럼 우강희의 기운은 날카로웠다.

출발해 학교 본관 앞을 떠나는데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순간 뒷좌석의 우강희가 밖으로 뛰어나가 차 앞을 막은 이무열의 멱살을 잡았다.

“박한주 어디 있어?”

속을 떨리게 하는 저음이었다.

“우강희, 한주, 한주가 잡혀갔어.”

“누구 짓이지?”

“재민석, 그 애가…… 내가 어리석어서……. 어떡해, 한주…….”

“어디로 갔지?”

“그건 몰라……. 남자들과 갔는데…….”

울며 후회하는 이무열도 허겁지겁 왔는지 모습이 엉망이었다. 대답을 듣자마자 차에 타려는데 이무열이 소리쳤다.

“재민석이 사람을 움직여도 결국 재씨 집안 직원들이야. 그쪽을 추적해. 재민석도 따라갔으니까 멀지 않은 곳일 거야.”

그 말을 듣고 우강희는 차를 타고 떠났다. 직원은 운전하면서 빠르게 이무열에게서 들은 내용을 부하에게 지시했다.

멀어지는 차를 보며 이무열은 주저앉았다. 우강희라면 어떻게든 구해 줄 거라는 믿음에 힘이 빠졌다.

제 말에 충격받던 한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해, 한주야. 미안해…….”

제발 무사하기를.

우강희가 늦지 않기를.

* * *

재민석이 한주를 끌고 간 곳은 인근의 창고였다.

공장용으로 토지를 개발해 외부에 임대라고 써 붙여 내놓은 새 건물이었다. 외형만 조립식으로 지어 놓았기에 내부는 깔끔했고 들여놓은 물건이 없어 텅 비어 있었다.

어스름하게 조명이 들어와 있는 공간 가운데에 한주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재민석과 재민용은 한주를 노려보았다.

그들 뒤로 정장을 입은 체격 좋은 이들이 몇 명 서 있었다. 느긋하게 벽에 기대거나 핸드폰을 보는 등 자기 하고 싶은 행동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든 명령이 내리면 기민하게 움직일 전문가들이었다.

재민석은 새삼스럽게 한주를 관찰했다.

정신을 잃어 눈을 감은 모습에서 재강원과 닮은 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의 자식이라지만 전혀 닮은 곳이 없으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베타라도 같은 베타가 아니다. 재강원의 피를 이었다지만 자식이라도 다 같은 자식이 아닌 것이다.

턱에 힘이 들어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옆에 선 재민용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 핏줄이라고 닮았네.”

“뭐? 눈 삐었어?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봐, 뜯어보면 묘하게 닮았어. 눈매나 입술이.”

재민용은 재민석과 한주를 비교하고 있었다.

저와 박한주가 닮았다는 소리에 민석은 짜증 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재수 없게!”

같은 피가 흐른다. 얼굴이 닮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몸 곳곳으로 흐르는 혈관이 간지러운 듯이 예민해졌다. 긁어내 뜯어내고 싶은 간지러움이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피를 모조리 바꿔 버리고 싶었다.

박한주와 같은 DNA와 피가 흐르다니, 더러웠다.

“아니, 내가 왜? 바꾸려면 박한주가 바꿔야지.”

민용이 힐끔 동생을 확인하고 한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민석은 턱에 힘을 주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피를 바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한주였다.

자신은 어엿한 재씨 가문의 차남이었다. 재강원의 둘째 자식이며 앞으로 알파가 되어 재씨 가문을 물려받을 인재였다.

박한주와는 급이 다르다.

“깨워.”

재민석은 한주를 노려보며 명령했다.

“물이라도 끼얹어서 빨리 깨워!”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직원 하나가 준비해 둔 드럼통의 물을 한주에게 끼얹었다.

촤아악, 머리와 어깨를 적시며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물이 끼얹어져 놀랄 만한데도 한주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는지 머리를 살짝 흔들어 얼굴의 물기를 떨었다.

드디어 한주가 눈을 떴다.

여전히 태연했다. 전등이 있지만 어둑한 공장에서 의자에 묶여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겁먹은 표정도 없었다.

언제나 그 무심함이 민석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은 다를 줄 알았다. 겁먹은 표정을 보일 줄 알았다. 살려 달라고 빌어야 마땅했다.

비굴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아버지의 핏줄이라 그런가.’

더 화가 나는 일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을 떠올린 자신이었다.

“네가 뭐가 그리 잘났다고…….”

옆에 놓여 있던 빈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

“민석아!”

민용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퍽, 손에 충격이 전해졌다. 의자를 휘둘러 묶여 있는 한주의 몸을 쳤다. 의자와 함께 한주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프기는 한지 한주는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재민석은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자는 민석의 손에 잡혀 있었다.

꽉 손에 힘을 주는데 민용이 민석의 팔을 잡았다.

“진정해.”

“……내가 뭘 했다고.”

팔을 털어 내고 싶어 더 세게 의자를 쥐었다. 민용의 손힘도 강해졌다.

“벌써 죽일 셈이야?”

그 말에 민석은 침착해졌다. 죽일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게 편하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아니.”

죽으면 끝이다.

“그렇게 편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지.”

“그럼 의자를 놓아.”

“걱정하지 마.”

혀를 차며 민석은 의자를 바닥에 던졌다. 캉, 쇳소리를 내며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굴렀다.

위협적인 소리일 텐데도 한주는 그 소리에 몸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시체 놀이 할 거야?”

민석은 직원을 턱짓으로 불렀다. 지시를 읽은 직원은 바닥에 쓰러진 한주의 어깨를 잡아 거칠게 일으켜서 다시 앉혔다.

어른의 힘에 한주의 몸이 힘없이 딸려 왔다. 젖어 있어 모습이 더 불쌍하게 보였다. 넘어지며 바닥에 얼굴이 쓸렸는지 피가 배어 나와 물기에 젖어 피가 번졌다.

민석은 장갑을 낀 손으로 한주의 턱을 움켜잡았다.

상처 주고 싶다. 자신이 받은 만큼의 깊이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상처를 내고 싶었다. 얼굴을 보면 누구나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선명하게 낙인을 찍고 싶었다.

깊게 새겨져서 다시는 지워지지 않도록.

“어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그렇게 널 아껴 주던 담임도 네가 누구인지 알자 널 버려 버리네.”

바닥으로 시선을 던지며 재민석의 폭행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한주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거슬리는지 미간을 찌푸렸지만 시선은 또렷했다. 민석은 손에 힘을 빼지 않고 한주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그 힘에 한주의 고개가 돌아갔지만 뻘게진 얼굴로 다시 민석을 보았다.

“건방진 새끼. 더러운 피를 가진 주제에.”

“더러운 피?”

“그럼, 네 존재가 깨끗하다고 생각해? 아버지에게 버려진 애인의 자식이?”

잠시 한주의 눈이 커졌다가 평온해졌다. 민석은 그 변화를 읽었다.

한주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했다.

“네가 이무열 선생님에게 말했어?”

“알고 재강원에 들어온 거지? 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재산을 노리고! 그래서 형의 약혼도 방해하고!”

“피해망상이야. 난 재강원과 엮일 생각 없어.”

민석의 손이 나가기 전에 짝, 소리가 나며 한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민용이 뺨을 때렸다.

“아버지는 네가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야!”

언제나 유약하고 유연한 민용은 민석이 억지 주장을 해도 한숨을 쉬며 맞춰 주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폭력을 휘둘렀다.

“형.”

적당히 조절하라고 민석은 형을 자중시켰다.

프라이머 오메가이지만 보통의 프라이머보다 수치가 낮았다. 민석이 베타여서 그나마 민용이 인정을 받았지, 만약 동생이 알파였다면 민용은 집안에서 시선도 받지 못했을 존재였다.

일반 가정이었다면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를 받았겠지만 재씨 집안이었다.

본가의 정통 혈육인 재강원이 건재해 자식이 베타나 오메가라도 재씨 집안에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럼에도 가문의 모임이나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친척들의 견제를 받았다.

두 사람이 듣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식들이 재강원의 뒤를 이어 재씨 가문을 물려받을 거라고 말했다. 장남인 민용과 차남 민석을 대놓고 무시했다.

우수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사회에서 특별해야만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냉혹한 분위기 속에서 재민용이 겨우 어깨를 펴기 시작한 것은 ‘우강희’의 약혼자가 되면서였다. 불쌍하게 바라보며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집안에서 키우는 개를 보는 시선이 약혼하면서 바뀌었다.

사고로 우강희에게 각인하고 약혼하게 되면서 ‘그래도 역시 재씨 집안사람이다.’라며 인정받게 되었다.

민용은 빛이 있어야 생기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오직 우강희가 있어야 존재감이 드러났다.

약혼자로 있는 기간 동안 그 달콤함에 젖어 자신의 위치를 망각했다. 우강희가 가족들 앞에서 파혼을 말한 그날부터 다시 집안 공기가 바뀌었다. 아니, 원래대로 돌아갔다.

자신이 그저 먼지 한 톨처럼 느껴졌다. 우강희를 잡고 싶어도 재강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파혼으로 가문의 수치가 되었지만 그 파혼을 되돌리기 위해 매달린다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왜, 왜 너인데!”

우강희는 민용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베타에게 어떤 매력을 느껴 우강희가 그렇게 변심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파를 흥분시킬 수 없는 베타이고 페로몬이 없는데도 우강희는 깊이 빠졌다.

그게 더 민용은 수치스러웠다.

“베타 주제에! 오메가도 아닌 베타면서!”

겨우 버티던 자존심이 진실을 알자 깨졌다. 저와 같은 재강원의 피를 이어받은, 배다른 형제였다.

같은 피인데. 하나는 오메가이고 하나는 덜 떨어진 베타인데. 어머니만 다를 뿐 아버지의 유전자는 같은데. 아니, 재민용의 미모가 더 출중하고 알파를 유혹할 페로몬도 발산할 수 있는데도 우강희는 베타를 선택했다.

짝, 짝 민용은 다시 한주의 뺨을 때렸다. 때린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분풀이로 내리쳤다.

“베타 주제에 우강희를! 남의 약혼자를 뺏어 가? 제 엄마와 다를 것 없는 첩년의 피는 어쩔 수 없지! 경박하고 천한!”

프라이머 오메가와 로열 알파 사이에서 최소한 프라이머 오메가와 알파가 태어나야 한다.

평균치의 프라이머는 되어야 했다.

그러나 민용은 프라이머에도 못 미치는 오메가로 발현해 어머니의 힘으로 겨우 프라이머 오메가라는 형질로 판정받았고 반년에 한 번씩 동생과 함께 비밀리에 형질 테스트를 받았다.

변화는 없었고 스무 살이 넘어서야 어머니는 민용을 포기했다. 그 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우강희를 뺏어 간 베타가 재강원의 혼외자임을 알면 어머니는 어떻게 나올까.

생각만으로도 민용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형, 그만해!”

민용은 행동을 멈추었다. 그제야 손이 욱신거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군데군데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박한주의 양 뺨이 붉었다.

입 안에 고인 피를 바닥으로 뱉고 한주는 고개를 들었다. 손이 아플 정도로 때렸는데 그 눈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와서 좋아한다고 들이대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난 우강희가 약혼했는지 당신을 만난 날 알았어.”

“뻔뻔하게, 역시 네 엄마 피는 못 속이네. 결혼한 유부남과 놀아난 그 핏줄은 어디 가지 않지.”

“그럼 결혼했으면서 어린 대학생을 꾀어 사귄 사람은 뭔데? 자기 자식도 버린 사람이야. 그 몰인정한 패륜의 피가 당신들에게도 흘러.”

재강원을 모욕하는 말에 민용은 혈압이 올라 옆에 놓인 빈 양동이를 휘둘렀다.

깡, 찌그러진 양동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거친 모서리에 부딪혔는지 한주의 왼쪽 머리부터 얼굴로 피가 흘러내렸다.

“언제까지 그 입을 놀릴 수 있는지 보자.”

턱에 힘을 주며 민용은 물러서 있는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우선 이 녀석 양 발목을 부러뜨려. 평생 절뚝거리며 제 처지를 비관할 수 있게 만들어.”

뿌득 이를 갈았다.

“나는 이 자식 입에서 ‘나는 쓰레기입니다.’라는 말을 들어야겠어.”

건장한 남자들이 어깨를 털며 다가왔다. 한 명이 한쪽에 세워진 야구 방망이를 손에 쥐었다.

“괜히 난리 치지 말고 깔끔하게 끝냅시다.”

히죽 웃으며 직원이 경고했다. 직원 하나가 한주가 앉은 의자를 발로 밀어 옆으로 넘어뜨렸다.

한 명은 넘어진 의자를 발로 누르며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했고, 한 명은 어디선가 시멘트 블록을 들고 왔다. 그리고 바닥에 놓은 블록 위에 한주의 다리 하나를 올리려고 발목을 잡았다.

그 순간 한주는 다른 쪽 다리로 발목을 잡은 직원의 팔을 휘감아 조이며 끌어당겼다. 남자가 넘어지면서 그 반동에 한주는 일어났다.

“저 새끼!”

의자를 매단 채 벽을 향해 달리더니 몸을 부딪쳤다. 벽의 튀어나온 날카로운 철근에 몸을 묶은 박스테이프가 찢어졌다.

의자를 잡아 뜯어 던져 버리고 한주는 얼굴을 닦으며 민용을 보았다.

“저 새끼 잡아!”

직원들을 상대로 한주는 처음에는 버틸 수 있었다.

인터넷 세계에서 ‘편집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사람들이 믿지 못할 실력의 사부 오지한에게 배운 무술은 잠시의 시간을 벌어 주었다.

가르칠 때는 실전처럼 혹독하게 한주를 굴렸지만 기본적으로 상대에게 상해를 입힐 의도가 없기에 피를 볼 정도로 하지는 않았다. 반면 실전은 달랐다.

그들은 한주가 다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게만 잡아 두려는 목적이었기에 힘에 가감이 없었다.

제한은 죽지 않을 정도.

한주는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알파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일전에 납치를 당하기도 했지만 아마추어는 아마추어였다. 그러나 직원들은 달랐다.

초반에는 한주도 대항하며 버텼지만 몇 대 맞은 대미지가 쌓이면서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느려졌다. 이전에 겪었던 이들보다 더 실력이 높았다.

“고1짜리도 제대로 못 잡아? 당신들 프로 맞아? 어서 잡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민용의 히스테릭한 고함이 빈 창고 안을 울렸다.

직원들의 표정에 짜증이 섞이며 한주를 향한 폭력에 좀 더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빨라졌어!’

숨이 거칠어졌다.

“적당히 해. 넌 어차피 여기서 도망 못 쳐. 그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면 굉장하지만…….”

짜증 내며 한주의 저항을 받아 내고 있던 직원이 말했다. 그들 중에는 제법 점잖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실전에는 약해.”

휙, 뒤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며 소름이 끼쳤다.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옆으로 굴렀다.

훅, 머리 위로 빠르게 몽둥이가 지나갔다.

“이 녀석 감 좋네. 키워 보고 싶을 정도야.”

깡, 소리가 나며 바닥에 쇠봉이 뒹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다.

“그만 놀고 빨리 끌고 와!”

한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우다 보니 어느새 민용에게서 멀어졌다.

의식을 차렸을 때 창고 구조를 먼저 파악했기에 돌아보지 않아도 자신의 뒤로 문이 있음을 알았다.

멈칫하는 모습에 직원들은 한주의 동선을 예상했다. 몸을 돌려 뛰는 것과 동시에 그들도 한주를 향해 뛰었다.

“나가 봤자지!”

간발의 차이로 잡으려는 손을 피하고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밖에서 문이 열렸고 한주는 몸을 멈추지 못해 문 앞에 선 상대와 몸이 부딪쳤다.

어른. 단단한 남자의 가슴팍에 돌진하듯이 몸이 부딪쳤다. 창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는데 상대가 한주의 팔뚝을 잡았다.

“놔!”

단단하게 붙잡는 남자의 손을 쳐 내고 몸을 뒤틀어 팔꿈치로 상대의 머리를 쳤다. 빡! 소리도 컸고 제대로 가격했는데 남자는 잠깐 휘청이고 말았다.

“아, 아버지!”

“헉!”

민석은 사색이 되어 한주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더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뒷문을 향해 달렸다. 마치 야차를 본 것처럼 기겁하며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재강원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주를 보았다.

놀란 사이 재강원의 뒤에서 나온 직원들이 한주를 붙잡아 바닥에 눌렀다. 재민용이 부른 직원들보다 빈틈이 없었고 한 수 위였다.

민용이 놀라며 창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황망히 보았다.

“아버지…….”

바닥에 몸이 눌렸지만 한주는 고개를 들어 재강원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주가 왜 여기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재민석의 주도가 아니라 이 사람이 그랬나? 조잡하게 이런 짓을 했다고?’

재강원이 등장하면서 창고 안이 조용해졌다.

한주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읊조리는 목소리는 커서 누가 듣든 상관없는 태도였다.

“전혀 닮지 않았는데 아들이라고.”

이미 한주가 저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아, 아버지. 왜 오신 거예요? 우리끼리의 일이에요.”

재민용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자신이 한 짓이 들통나 재강원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는데 한주의 생각은 틀렸다.

재강원은 사람을 납치했다는 이유로 화낼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까지 전화가 오지 않도록 했어야지. 오래전에 버린 것이 이제 와 아들의 약혼자를 뺏다니, 우습군.”

것.

갑자기 나타난 아들에게 물건과 다름없는 지칭을 했다.

재강원의 목소리에 감정은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재밌어하는 태도였다.

태어나자마자 베타로 판정되어 버렸던 자식이 나타났는데 재강원은 평온하기만 했다. 어떠한 동요도, 안타까움도, 미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런 남자였지.’

졸업식 며칠 전에 재강원 고등학교에서 잘 버텼다는 충동에서인지 재강원을 만나러 갔었다.

‘당신 아들 박한주입니다. 이번에 재강원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래서?’

‘……네?’

‘돈이 필요한가? 수행원에게 말해.’

그 대화가 끝이었다.

아들이라는데, 진짜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표정에 변화도 없이 재강원은 가 버렸다.

딱히 한주에게만 그런 행동이 아니라 같이 사는 친자식에게도 태도는 다르지 않았다.

* * *

재강원은 한주의 삐뚜름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자 흥미로워졌다. 직원이 가져온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았다. 재강원을 올려다보느라 한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우강희를 유혹했지?”

마치 일부러 우강희를 꼬여 냈다는 듯이 말한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럴 만한 증거가 있다고 믿을 만큼 확신에 찬 어조였다.

“그렇게 복수하고 싶었나? 내 아들에게 흠집을 내고 싶었어? 아니면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건가?”

혼자 말하고 혼자 결론을 냈다.

“그래도 넌 안 돼. 베타니까.”

마치 왜 물건을 반품할 수 없는지 이유를 말하는 콜센터 직원보다 더 감정이 없었다.

“자신이 알파가 아님을 원망해. 네 부족함을 탓해라. 알파였다면 가문에 입적했겠지만 베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아들 중 둘째는 베타인데도 재강원은 냉정하게 말했다.

한주는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우스웠다.

“근자감 오지네. 그따위 재 씨 성, 줘도 안 가져.”

겨우 이런 사람이 아버지인데 한번 만나겠다고 발버둥 쳤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겨우 이딴 사람이었다. 태어나고 처음 만난 자식인데 반가움이나 미안함보다 ‘왜 내 앞에 나타났나.’를 생각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한주는 웃음이 났다. 피식거리며 웃자 재강원의 눈이 차가워졌다.

“당신한테나 집안이 중요하겠지,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어.”

재강원의 말이 우스웠다.

“복수?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에게 무슨 복수를 해? 소설 쓰지 말고 그런 상상 할 시간에 당신 아들이나 제대로 단속해. 상관없는 나한테 민폐 끼치지 않게 하라고. 가문에만 그렇게 신경을 쓰니 자식이 이 꼴이지.”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는 한주의 되바라진 말에 재강원의 눈이 빛났다.

“타인을 납치하고 폭력을 써도 죄책감은 없고 피해 의식만 가득해서 노력하기보다 상대를 밟을 생각만 하잖아. 자식들이나 똑바로 가르쳐.”

유약한 첫째와 눈치만 보는 둘째, 그 외에도 성인이 된 다른 혼외 자식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재강원의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건방지고 베타지만 성질은 재강원의 마음에 들었다.

“아쉽구나. 알파였다면 입적시켰을 텐데.”

“바라지 않아. 나는 돌아갈 테니 이 사람들 보고 비키라고 해.”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몸을 흔들자 제압하고 있는 직원의 몸이 잠시 흔들렸다.

“겁도 없어.”

재강원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 그렇지. 네가 일전에 일을 키운 그 녀석이었어. 재강원 고등학교를 학교 폭력으로 언론을 타게 해서 사과문을 내게 만든.”

눈이 가늘어지며 재강원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화내지 않았다.

지켜보던 민용의 가슴이 다글다글 질투로 끓어올랐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거나 경멸할 뿐인데 그런 아버지가 인정하지도 않는 베타 아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켜봐 온 민용, 민석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던 표정.

아무리 성적이 잘 나와도, 재강원이 싫어하는 집안의 아들을 이겨도 표정 변화 없이 ‘그렇구나.’라고 말하던 사람이.

우강희에게 각인해서 약혼자가 되었을 때에서야 민용에게 온기라는 것을 보여 주었으면서.

차갑기만 하던 아버지가 박한주를 10분 넘게 보고 있었다. 민용조차 그렇게 길게 본 적이 없는데.

우강희도 빼앗고 아버지의 시선까지 가져갔다. 재민용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이미 예전에 포기했고 더는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이, 이제 욕심부리지 않고 해탈했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아버지가 베타인 혼외자를 향해 칭찬하자 몸이 떨려 왔다.

포기하지 못한 동생이 어리석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동생과 다를 것이 없었다.

왜 동생이 박한주에게 그렇게 날을 세우며 싫어하는지 이해했다. 버려지고 알파도 아니면서 재강원의 관심을 받았다. 우강희는 오메가인 재민용보다 베타인 박한주를 택했다.

“왜 오신 겁니까?”

재강원이 민용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족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아니라면 아들이 아파도, 학교 행사에서 발표를 해도, 무대에 올라도 와 주지 않는 아버지였다.

아니, 아들이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1년 전, 파티에서 약을 하다가 들켜 경찰에 잡혀갔을 때도 변호사만 보냈을 뿐 혼내지도 않았다.

그런 남자가 아들이 다른 사람을 납치했다고 해서 올 리 없었다.

재민용이 주먹을 꽉 쥐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쁘신데 왜 오셨습니까?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자식이 무슨 짓을 하는지 부모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물론 아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는 재강원에게 보고되었고 민용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아버지는 무관심했고 어떤 일에도 움직이지 않았었다.

“관심 없으시잖아요.”

“약을 하며 노는 것과 타인을 해치는 일은 다르지.”

민용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재강원의 말을 듣자 그가 박한주 때문에 왔다는 확신이 더 강해졌다.

“달라도…… 제가 살인을 했다고 해도 안 오셨겠죠.”

“나의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지?”

재강원은 재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았다. 그렇기에 적당히 무심하며 하극상을 싫어했다. 대번에 눈이 싸늘해지며 페로몬을 발산했다. 재강원은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고 주저하지 않았다.

민용은 어깨를 누르는 힘에 자신도 모르게 더러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몸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재강원의 페로몬에 굴복했다.

“아, 아버지…….”

박한주가 놀란 눈으로 절 보고 있었다. 눈을 돌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재강원의 페로몬에 눌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겁을 주고 위협을 주려고 납치해 온 박한주 앞에서 민용은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네가 무엇을 하든 좋다. 하지만 최소한 가족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도 내 혈육이야.”

가족, 내 혈육. 그 단어가 민용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누가 가족이라는 겁니까, 아버지! 어떻게 저런 녀석을 가족이라고!”

“재민용.”

낮은 부름이었지만 어떤 고함보다도 더 영향력이 컸다.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이 부르르 떨렸다. 힘이 빠져 민용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재강원은 자식에게 칭찬하지 않았지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니요. 드,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힘이 없고 떨렸다. 자신이 내뱉고도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겪어 본 적 없는 굴욕에 민용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기어오르지 마라.”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울음처럼 거친 숨을 뱉었다.

“누리는 모든 것은 내가 허용한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건방지게 기어오르면 자식이라도 용서하지 않아.”

“……네.”

“그래, 이제야 착하지.”

흐어, 울음이 나왔다. 차마 크게 소리를 낼 수 없어 참았지만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며 재강원은 말했다.

“품위 없게. 데려가.”

대기하던 직원들이 민용에게 다가와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했다. 재강원의 아들이기에 거칠게 대하지는 않았다.

일어선 재민용은 창고를 항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우강희였다.

수십 번의 전화를 하고 수백 통의 문자를 보내고 매달리며 부탁해도 한 번을 만나 주지 않던 우강희였다. 무슨 짓을 해도 가질 수 없는 두 사람이 베타 한 명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나만 안 되는 거였어…….”

직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경찰봉이 민용의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할 순간도 없었다. 민용은 무의식적으로 경찰봉을 빼냈다.

“도련님?”

한 번 짧게 휘두르자 경찰봉이 차륵 소리를 내며 길어졌다. 길어도 그저 남자의 팔뚝 길이였지만 묵직함이 손에 감겼다.

“도련님!”

말리려는 직원들을 피해 민용은 박한주 앞으로 달려가 경찰봉을 치켜들었다.

“차라리 없어져.”

“박한주!”

우강희가 다급히 외쳤다. 드디어 그를 흔들었다는 생각에 민용은 경찰봉을 내리치며 웃었다.

“가질 수 없으니 우강희, 너도 못 가져.”

* * *

이무열에게 전화가 왔을 때 재강원은 양평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근에 이무열을 만나기 위해서 자주 양평을 방문했다.

제일 처음으로 욕정을 느꼈던 상대여서 그런지, 아니면 제일 오래 만나 온 사람이라 그런지 이무열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냉정해지지 않았다.

무열 외에도 애인이 여럿 있어서 재강원의 부름을 거절하면 다른 사람을 불렀지만 무열이 없어도 된다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한 적이 없고 말만 하면 언제든지 신상품으로 교체했다. 그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였다.

어제 찼던 시계를 오늘 다시 손목에 걸지 않았고 차도 1년 이상은 가지 않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무열은 재강원의 아내보다도, 주변에 가장 오래 데리고 있는 수행 비서보다도 오래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무열을 불러 미래의 수행원으로 미리 얼굴을 익히라는 의미로 소개했었다.

재강원은 이무열을 처음 소개받은 그날, 처음 본 그 순간 강한 갈증을 느꼈다. 저에게 ‘안 돼’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어른들 사이에서 무열은 재강원의 의사를 종종 반대하고 거절했으며 ‘싫다’라고 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재강원은 성에 대한 것을 배우기 전부터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 사람은 내 거다.

하지만 그도 서툴렀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는 애송이였다. 시간이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열을 어떻게 하길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뚜렷해지는 욕망을 모를 수 없었다.

꿈은 노골적이어서 자각하지 못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알려 주었고 재강원은 처음으로 참을성을 배워야 했다.

망가진 장난감은 복구할 수 있었지만 망가지지 않은 상태로 되돌릴 수 없었고 그 흔적은 반드시 남는다.

재강원은 무열이 그렇게 되길 바라지는 않았다. 가지더라도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

저를 보며 웃는 모습을 원했기에 긴 계획을 짰다. 그리고 시간은 걸렸지만 계획대로 무열을 가졌다.

삐걱거리는 때도 있었고 무열이 먼저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결국 재강원을 먼저 유혹하며 몸을 열었다.

긴 기다림 끝에 얻은 열매는 달았다. 끝 맛에 남는 그 씁쓰름한 맛까지 좋았다.

어떨 때는 왜 이무열이라는 사람 하나를 가지기 위해 저가 게임을 하는가, 자조하기도 했지만 결국 게임에서 이긴 보상을 받았다.

여러 취미 생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무열을 흔들었고 가지기 위해 때로는 구석으로 몰아넣고 때로는 마지막 연인처럼 자상하게 대했다.

가끔은 그런 연기가 질려 차갑게 대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무열에게 충실했다.

이무열이 저에게 빠지면 어떨까.

질려서 버린 여자나 남자들처럼 금방 정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무열의 유혹에 그런 우려는 가볍게 날아갔다. 이제 언제쯤 전화를 해 올까 기다리게 되었다.

불러내도 되었지만 몸이 달은 무열이 부르는 쪽이 더 뜨겁게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전화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 주문한 반지가 도착해 먼저 양평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열이 전화를 하면 양평 별장으로 오라고 말하면 되니까. 그리고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무열의 목소리는 흐트러져서 젖어 있었고 제 이름을 절박하게 불렀다.

말의 내용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 한주가…… 당신 자식이, 재민석이 박한주를 납치했어! 당신 아들을 납치했다고!

박한주.

재강원의 둘째 아들인 민석이 유난히 신경 쓰며 싫어하고, 첫째 아들인 민용의 약혼자 우강희를 유혹한, 우강희의 룸메이트.

재강원의 기억 속에는 그저 건방진 녀석쯤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무열이 ‘당신 아들’이라고 언급하자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박한주가 누구를 닮았는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던 대학생이 기억났다.

- 한주를 데려갔는데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오히려 그 애를 밀어 넣었어. 한주를 구해 줘……. 재강원……. 네 아들이잖아.

흐느껴 울며 무열이 부탁했다. 재강원은 치솟는 짜증과 반비례하게 냉정해졌다. 운전하는 수행 비서는 그의 기분을 빠르게 파악했다.

“지금 당장 재민용에게 가. 재민석도 같이 있을 거다.”

겁이 많은 민석이 납치 같은 짓을 할 리 없다. 그의 자식 중 하나가 박한주를 납치했다면 민용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한주에게 우강희를 빼앗겼으니까 동기는 충분했다.

“네.”

조수석의 수행 비서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 *

차는 양평 외진 산길을 달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창고에 도착했다. 입구에만 가로등이 있고 창고 문 위에 달린 등이 전부였지만 외부는 어둡지 않았다. 차 세 대의 헤드라이트가 창고를 비추고 있어 외부는 밝았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알파 페로몬은 너무 희미하고 저급했다. 재씨 가문의 직원이지만 저급한 이들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재강원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재강원의 수행 비서는 알아보았다. 재빠르게 재강원에게 90도로 인사하며 창고 문을 열어 주었다.

창고 내부의 소란이 쏟아졌다.

재강원은 민용과 민석 외에도 다른 자식이 있었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는 받았지만 궁금하지 않아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가문에 흠집을 내거나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살든 관심 없었다.

직원들 또한 박한주라는 존재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해 보고서는 중요 서류로 표시하지는 않았다.

재강원은 자기 품으로 돌진한 박한주에게 머리를 얻어맞았다.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았다. 무열을 제외하고는 맞아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직원들이 박한주를 바닥에 제압했다. 발버둥 치는 어린 베타는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저와 닮은 구석은 한 곳도 없으니 핏줄이라고 알아볼 턱이 없다.

처음 느꼈던 인상대로 건방짐은 건재했고 상처가 나고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어도 그 눈의 생기는 죽지 않았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괜히 눈앞에 나타날 리 없다.

재강원이 생각하기에, 박한주가 재강원 고등학교에 입학한 목적은 분명했다. 민석과 엮이고 민용의 약혼자인 우강희에게 접근한 이유는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쉽게 알아차릴 일이었다.

극구 아니라며 부정하면서 노려보는 시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탐났다.

알파는 아니지만 여느 프라이머 알파 못지않은 기개를 가졌고 베타지만 우강희가 빠진 상대였다.

그것이 중요하다.

우강희가 애지중지하며 감정을 가지고 집중한 상대. 그 대상이 재강원이 버린 자식이었다.

자식 중 하나는 변변치 못한 오메가였고 하나는 관심을 받고 싶어 발버둥 치는, 열등감 많은 베타였다.

친척들은 재강원이 살아 있음에도 후계자로 자신들의 자식을 밀어 넣으려 버둥거렸지만 하나같이 우강희처럼 강한 존재감을 보이는 알파는 없었다.

우강희를 흔들 수 있는 패.

그런 박한주를 재민용이 쇠파이프로 내리치려고 했다.

그 순간 재강원은 이무열의 얼굴이 떠올랐다.

- 한주를 구해 줘……. 재강원…….

“「멈춰!」”

페로몬을 발산하는데 등 뒤에서 더 거대한 페로몬이 빠르게 재강원의 몸을 지나 재민용을 향해 쏟아졌다.

“박한주!”

우강희가 다급히 소리쳤다.

우강희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뻗어 나와 사라지자마자 몸을 짓누르는 압력을 느꼈다.

누군가 머리 위를 짓누르는 강한 충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털썩, 소리가 나며 주위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창고 안의 모든 사람이.

재강원은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돌려 우강희를 보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 꿇은 민용을 노려보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페로몬을 내보내지는 않았다.

재강원은 소름이 끼쳤다.

우강희는 페로몬을 내보내지 않았다. 페로몬이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분명 느꼈는데.

“어떻게……?”

한주를 향해 우강희는 곧장 움직였다.

건물 안의 사람들, 특수한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고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여야 할 프로들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중력에 끌리듯이 모두가 우강희를 보고 있었다.

로열보다 높다는 말만 들었다. 정확한 보고서는 국가 보안에 걸려 빼낼 수 없었지만 전대미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강희?”

반가워하는 목소리와 함께 박한주가 일어났다.

창고 안의 모두가 우강희에게 눌려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는데 박한주만이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박한주.”

우강희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주에게 다가가려 했다.

우강희를 보고 반가워하다가 그의 뒤로 한주의 시선이 향했다. 시선의 방향을 따라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는데 멀지 않은 곳에 우천희가 있었다. 한수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천희를 잡고 있지만 두 사람 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우천희를 보고 우강희의 눈이 커졌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그는 호흡을 멈추었다.

하얗게 질리는 우강희의 안색을 본 재강원은 한순간 시커먼 우주에 내동댕이쳐졌다. 사방이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암흑에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방금까지 창고였다.

당황해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목을 움직이는 것도 모를 정도로, 한 치의 빛도 없는 어둠이 사방에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빈 창고의 페인트 냄새나 먼지 냄새도 맡아지지 않았고 언제나 두 발짝 뒤를 따라다니던 수행 비서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차단당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있지? 이게 무슨 일이야?”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그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메아리도 없고 작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후각이 막히고 시각이 막히고 청각도 차단당한 상태. 옷이 스치는 소리나 신발에 밟힌 흙이 부서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촉각은 있었지만 바닥을 더듬어도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아니, 몸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느꼈을 뿐이다.

재강원은 숨이 턱 막혔다.

갑자기 좁은 관 속에 갇힌 듯이 숨이 막히며 심장이 다급히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밀폐감. 이대로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제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감이었다.

재강원의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말 한마디에 사람이 바뀌고 물건이 바뀌었으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는 만능의 세계였다.

그는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었다.

그런 자신이 작은 힘에도 찌그러져 죽을 개미처럼 하찮은 존재로 느껴졌다. 지금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곧 끊길 것처럼 희박하게 느껴지자 더 마음이 다급해졌다.

헉, 헉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

“이게 뭐지? 왜 이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다리가 휘청이는 느낌은 났다. 무릎 꿇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어그러지고 믿지 못할 불확실이 되었다. 우습게도 무릎을 강타한 아픔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고통이 생존 본능을 일깨웠다.

“나, 나는! 로열 알파야!”

제어가 풀린 페로몬이 흘러나와 몸 주변을 감쌌다. 밀도 깊은 안개 속을 억지로 손으로 휘저으며 날려 보내지만 그 자리를 다시 꾸역꾸역 안개가 차지했다.

거대한 젤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치워도 치워도 빈틈을 노리고 밀고 들어왔다. 페로몬을 내보냈지만 평소처럼 쉽게 뻗어 나가지 못했다.

재강원은 페로몬을 전력을 다해 발산한 적이 없었다. 페로몬 컨트롤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였기에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난 재강원이야!」”

마침내 억지로 페로몬을 내보내 주변을 채우는 것에 성공했다.

갑자기 문이 열린 것처럼 시야가 밝아졌다. 귀가 뜨이고 먼지투성이였지만 답답하지 않은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감각이 돌아온 것과 동시에 비명이 고막을 때렸다.

“뭐야? 뭐야! 싫어! 살려 줘!”

“허억, 허억!”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오지 마! 내 잘못이 아니야!”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는 직원들이, 재강원의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냉정한 수행 비서조차도, 그의 아들 재민용도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닥을 손으로 긁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숨이 막힌 사람처럼 새액거리는 새된 소리를 냈다. 곧 거친 비명을 질렀다. 어떤 사람은 계속 벽에 머리를 찧어 피가 얼굴을 덮었고 어떤 사람은 손가락으로 시멘트를 긁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지 자해를 계속했다.

지옥 같았다.

모두가 바닥을 기며 죽을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그 지옥 속에 우강희와 박한주,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 * *

“뭐야? 왜 이리 어두워?”

“이거 뭐야? 아무도 없어?”

“눈이 안 보여! 손이 이상해!”

감각이 둔해진 듯 주먹을 쥐어 보며 바닥을 내리쳤다. 그들은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바닥을 긁었고 머리를 부딪쳤고 자해를 했다. 아픔을 느끼지 않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느끼지 못하는지 그들은 살고자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살려 줘! 사람 살려!”

“누구 없어요? 허억! 숨이!”

누군가 목을 조르듯 한두 명씩 목을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였다.

더한 공포는 그들이 거의 동시에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조종된 듯이, 누군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듯이.

한주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대단하다는 재강원조차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우강희를 보았다.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그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보고 있었다.

“우강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미동도 없었다. 언제나 한주의 목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던 우강희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오케스트라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듯이, 격해지고 다급해졌다.

“뭐야? 뭐야! 싫어! 살려 줘!”

“허억, 허억!”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한주는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지만 페로몬이 다수에게 이런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알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호텔에서 겪었다.

그때와는 양상이 달랐지만 이 상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원인은 페로몬밖에 없었다.

“호텔?”

한주는 다시 우강희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우강희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갈구하며 원했었다. 탐욕스러운 시선이 강렬했었다.

“우강희, 너야?”

유독 자신의 페로몬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우강희였다.

한주의 검사를 했던 사지석 박사는 우강희의 형질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로열보다 우수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아!”

절규에 한주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더 심하게 자해하기 시작했다.

옷을 뜯으며 피부를 긁었다. 피가 나는데도 그들은 행동을 멈추지 않고 마치 내장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긁으며 괴로워했다. 그나마 반응이 얌전한 재강원조차 얼굴이 하얗게 질려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렸는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재강원은 우강희를 노려보더니 한주와 눈이 마주쳤다. 한주를 향해 소리쳤다.

“사람들을 죽일 셈이야? 우강희를 막아!”

우강희가 원인이라고 외치는 재강원은 유일하게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일어나지 못했다.

한주는 그에게 뛰어갔다. 우강희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바로 앞까지 온 한주를 인지하지 못했다. 손을 잡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우강희, 정신 차려!”

뺨을 찰싹 때리며 외치자 우강희가 흠칫 놀라며 한주를 알아보았다.

“박한주?”

“우강희, 페로몬이 나왔어. 조절해 봐.”

“박한주…….”

무너지듯 우강희의 상체가 한주에게 쏟아졌다. 와락 몸을 끌어안으며 절박하게 어깨를 잡았다.

“내가 죽였어…….”

오한에 걸린 사람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한겨울의 냉수를 맨몸으로 맞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몸은 차가웠다.

“흐억!”

“커헉, 헉!”

사방에서 들려오던 신음이 절정을 향해 가듯이 급박해졌다. 숨이 곧 끊어질 것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는데 순간 뚝 그쳤다.

“내가…….”

그 침묵이 더 소름 끼쳤다.

우강희의 신음 같은 독백만 들렸다.

마침내 지옥의 문이 열리기라도 하듯이 조금 전까지 머리를 부딪치며 비명을 지르며 숨을 헐떡이던 소리가 딱 끊겼다. 한주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죽는다.

“제길!”

한주는 입술을 깨물며 우강희를 떼어 놓고 다시 뺨을 때렸다.

“우강희, 정신 차려!”

그의 눈이 한주를 담았다. 눈물이 고이며 흘러내렸다. 한주는 그의 얼굴을 붙잡고 오직 자신만을 보게 했다.

“우강희, 페로몬을 제어해.”

“박한주…….”

눈동자가 떨리고 금방 쓰러질 듯이 창백했다. 그의 불안함을 한주도 느꼈다.

“날 봐. 할 수 있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그의 이마가 닿았다.

식은땀에 피부가 차가웠다. 그리고 다시 주위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 아파.”

“뭐, 뭐야? 피?”

“이게 뭐야? 내가 왜?”

사람들은 자해한 상처와 피를 보고 놀라 당황했다.

다행히 페로몬 제어에 성공했다.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한주의 몸에 기대며 우강희가 쓰러졌다.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안았지만 의식을 잃은 사람의 무게에 주저앉아 버렸다.

숨을 쉬고 있었다. 그저 기절한 것뿐이었다.

“진짜 간 떨어지게 만드네.”

안심할 사이도 없이 불안정한 발소리가 한주에게 가까워졌다.

“이 새끼…….”

한주는 가까이 다가온 재강원을 올려다보았다.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른 재강원은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볼품없이 흘러내려 와 얼굴에 붙었고 눈은 충혈되어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재강원은 우강희를 시뻘게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비켜. 그 녀석은 죽여야 해. 페로몬으로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런 괴물은 이 자리에서 끝내야 해.”

한주는 우강희의 어깨를 끌어안아 감쌌다.

“당신이 페로몬으로 남을 제압하는 건 괜찮으면서 자신이 위협당하니 괴물이라고?”

“비켜!”

“못 비켜. 내가 있는 한 누구도 우강희를 건드리지 못해.”

우강희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페로몬에 의한 사고 신고 번호로 전화를 하려는데 재강원이 움직였다.

우강희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한주는 우강희를 끌어안은 상태로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옷이 붙잡혔다.

확 끌고 갔지만 힘이 없는지 우강희의 몸이 바닥에 끌렸다.

“제길!”

재강원은 평소 같지 않은 몸 상태에 욕을 뱉었다. 일어나지 못해 우강희의 몸 위에 올라가 목을 잡았다.

우강희의 얼굴을 내려다보자 잠시 느꼈던 공포가 떠올랐다.

처음 느껴 본 공포였다.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보다 철저히 고립된 어둠 속에서 계속 그렇게 혼자만 남겨진다는, 그대로 굴복당해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가 제일 컸다.

“죽여야 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을 위협한 공포의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한주는 달려들어 그 손목을 떼어 냈지만 재강원은 여물지 않은 몸을 밀치고 다시 목을 졸랐다.

“이놈은 위험해. 존재하면 안 돼. 페로몬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했어.”

“당신이 뭔데!”

몸통으로 재강원을 들이받았다. 무영권의 대부분은 상대가 공격한다는 전제에서의 방어와 함께 진행하는 역공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강희의 위에 올라간 재강원은 우선 몸으로 밀어내야 했다.

“그걸 결정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이 건방진!”

덤벼 오는 재강원의 팔을 피하며 비껴 잡았다. 당기면서 발목을 노렸다. 한주에게 당한 재강원은 꼴사납게 바닥을 두 바퀴 굴렀다.

“어떻게 태어났다 하여도, 아무리 부모라도! 누구도 사람의 쓸모를, 가치를 결정할 수 없어!”

“너!”

일어나 한주에게 덤비려 했던 재강원이 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뱉었다. 그리고 곧 가슴을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한주는 우강희의 옆으로 가 숨을 확인하며 바닥에 뒹구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가고 있습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상황을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우강희의 전담 공무원 조은석은 빠르게 말했다.

재강원의 반응이 떠올라 잠시 망설여졌다. 하지만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조은석이라면 우강희의 상태를 알고 있을 테니 솔직히 말했다.

“우강희가, 페로몬 사고가 났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 쓰러졌어요.”

- 네. 곧 구급차와 안전 팀이 도착합니다. 절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고 가능한 한 바람이 잘 부는, 환기되는 외부에 있도록 하세요. 닫힌 곳이고 이동이 어렵다면 창이나 문을 열어 놓으면 됩니다. 우강희 님은 괜찮으십니까?

조은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요. 몸은 괜찮아요.”

- 당신이 옆에 있어 다행입니다.

그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져 한주는 안심했다.

조은석이 재강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 * *

15분쯤 지나자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구급차와 검은 밴 여러 대가 창고에 도착했다.

창고에서 멀찍한 곳에 주차하고 사람들이 안전복을 입고 다가왔다.

“여기요.”

결국 재강원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주만이 그 현장에서 멀쩡했다. 손을 흔들며 그들을 부르자 안전복을 입은 사람들이 놀라 주춤거렸지만 팀장이 나서서 지시하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팀장이 다가왔다.

“박한주 님.”

안전복에 가려 눈만 보였지만 목소리는 조은석이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처리하겠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다친 곳은 있지만 다른 이상 증상은 없어요.”

“상처가 있군요. 우선은 격리해서 병원으로 이동 후 소취 처리를 한 다음에 치료를 진행하겠습니다.”

“강희는요?”

“같은 한국 병원으로 이송할 겁니다. 안심하세요.”

먼저 우강희를 음압 침상에 눕혀 침상 내부의 공기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한주도 다른 음압 침상에 누웠다.

다친 것도 있지만 사고 발생자와 붙어 있기에 페로몬이 강하게 묻어 있어서 소취를 하기 전까지는 격리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응급차에 실렸지만 우강희와 한주는 검은 밴에 태웠다.

길고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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