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 리턴 5권
24. 우강희(2)
음압 침상에 실려 한주와 우강희는 여러 의료진의 호위를 받으며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들은 한주의 상처 치료보다 소취를 먼저 진행했다. 상처에 소취액이 닿아 따가웠지만 소독용 알코올이 포함되어 문제는 없었다.
한주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맞거나 넘어지면서 피부에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부러진 곳은 없었다.
정신없이 소취와 치료, 검사를 하고 눈을 떠 보니 1인실 병동이었다. 검사를 하는 와중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 밖이 환했다.
눈뜬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차례 의사가 진찰하고 나간 후 조은석이 한주를 찾아왔다. 그 전까지 우강희의 상태를 물었지만 누구도 답해 주지 않았다.
“우강희는요? 괜찮나요?”
“네, 현재 안정된 상태이고 면회 금지입니다.”
“왜요? 안정된 상태라더니.”
“우강희 님이 원해서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전의 한국 호텔에서의 일 이후에도 한동안 사람을 멀리하며 혼자 있기를 원하셨죠. 페로몬 폭발로 인한 후유증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추가로 말했다. 딱 오늘 날씨를 설명하는 말투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도 박한주 님이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가 들어 있지 않은 심드렁한 표정에 그다지 화도 나지 않았다.
“왜 오셨어요?”
“박한주 님의 어머니가 오고 계십니다.”
한주는 허리를 세웠다. 놀란 표정을 보며 조은석은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뒤져 오렌지 주스를 두 병 꺼냈다.
한주는 있는지도 몰랐다. 하나는 한주에게 주고 하나는 조은석이 마셨다.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페로몬에 의한 사고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서 우강희 님을 제외할 생각인데 박한주 님만 선택하시면 됩니다.”
“……납치와 폭행은요?”
“물론 그건 저지른 죄가 있으니 그대로 놔둘 겁니다. 그 현장에 우강희 님이 있었고 그분의 페로몬에 의해 사고가 났다는 일만 은폐할 생각입니다.”
말은 쉽지만 재강원이 걸렸다.
“재강원 이사장은요? 그 사람은 우강희를 죽이려고 목을 조르기까지 했어요.”
“아, 그건…… 짜증 나기는 하지만 우강희 님의 존재를 지우려면 덮어야 합니다.”
“아니요, 그 일이 아니라, 재강원 이사장이 순순히 합의할까요?”
“합의했습니다. 합의하지 않으면 향후 30년간 매해 대대적으로 재씨 가문과 관련한 모든 사업체와 개인의 세무 조사를 강력하게 하겠다고 협박하니 아주 협조적으로 나왔습니다. 세무 조사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죠.”
협박이라는 말을 공무원이 아무렇지 않게 썼다.
한주는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다시 물었다.
“일의 시작은 어디부터 하기로 했는데요?”
“그건 박한주 님이 선택하셔도 됩니다. 우강희 님도 박한주 님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라고 하셨습닌다.”
조은석은 우강희의 의지를 우선시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한주는 결정했다.
“이무열 선생님과 재민석은 빼주세요.”
“네, 그럼 재민용 군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아들을 말리기 위해 재강원이 찾아온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민석을 빼지 않으면 그 자리에 불러낸 무열까지 문제가 된다. 민석은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무열에게는 고마운 부분이 많았다.
사실을 알고 받았을 충격을 감안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도 아니었고 한주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조은석은 볼일이 끝났는지 나가려다가 다시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우강희 님은, 너에게 흔들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 앞으로의 세상이 그분이 어떻게 뜻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정도로 대단한 알파지.”
조은석의 말투가 바뀌었다.
“또 이번에도 당신 때문에 우강희 님이 문제를 일으켰어. 조심하라고 경고했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거두고 한주를 노려보았다.
“너 하나 때문에 그가 흔들려서 문제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이 많아. 그들은 우강희 님에게 위해가 되는 사람을 가볍게 처리할 정도로 능력 있는 존재들이야. 목숨을 지키고 싶으면 이 경고를 머리에 넣어 두어야 할 거야.”
우강희에게 독이 된다면 언제든 한주를 세상에서 지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경고는 절대 가볍지 않았고 위압적이었다.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자유자재로 표정을 바꾸기에 위협은 더 크게 느껴졌다.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아는 조은석은 분위기를 환기하듯 허리를 세우며 다시 표정을 가볍게 바꾸었다.
“음, 우강희 님은 박한주 님이 질문하면 가르쳐 주라고 했지만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해 두죠. 아무래도 우강희 님과 관계를 지속하실 거 같고요.”
어린아이에게 자랑하는 듯이 조은석은 싱긋 웃었다.
“우강희 님 페로몬의 영향력은 대략 예상하고 계시겠죠.”
‘너는 이런 거 모르지?’ 정도의 표정이었다.
“우리가 왜 그런 알파를 밖에서 지낼 수 있게 놔두는 걸까요? 페로몬으로 간단히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우강희 님을 왜?”
“이유가 있으니 그렇게 했겠죠.”
왜 국가가 우강희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우강희의 페로몬이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한주는 관심은 없었다.
시큰둥한 한주의 표정이 그저 고등학생의 허세라고 생각하며 조은석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은 알파와 오메가, 베타로 나뉘었고, 알파와 오메가는 프라이머, 로열로 또 등급이 나뉩니다. 프라이머는 그저 페로몬을 감지하는 정도, 로열은 프라이머와 베타에게 페로몬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만 그 범위가 한정됩니다. 그런데 우강희 님은 다르죠.”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페로몬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생명에 위협이 되면 피해자는 자기 보호 본능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당연한 본능인데 우강희 님은 페로몬으로 혈육을 죽게 했어요.”
혈육.
문득 충격받은 우강희가 할아버지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호텔의 작은 연회장 안의 사람들에게 성욕을 불러일으켜 이성을 잃게 했고, 창고에서는 여러 사람에게 실신에 이르는 공포감을 선사했습니다. 아니, 조금만 늦었으면 그들이 어찌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죠.”
죽음을 얘기하면서 뿌듯해했다.
“그 힘이 마치 전지전능의 신 같지 않습니까?”
조은석은 눈을 반짝였다. 뺨이 홍조로 붉었다.
“일설에는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메시아가 알파나 오메가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가진, 사람을 매료시킨 매력이 일반적인 힘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죠. 그들이 상위의 알파, 혹은 오메가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조은석이 말을 하면 할수록 주변의 공기가 긴장했다.
광신도와 닮은 열정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종교를 매개로 맹목적으로 한 사람을 믿고 따르는 현상이 그저 그 사람의 인품이나 말솜씨, 매력으로 이해하기에는 기이한 힘이 작용했다고밖에 볼 수 없죠. 형질이 명명된 이후에 유명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로열 알파나 로열 오메가임이 밝혀졌고요.”
예수나 부처가 사람을 매료시키며 신자를 만들었듯이 조은석도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로열 위를 칭하는 단어는 없지만 우리는 이렇게 부르죠. 로열보다 막강한 페로몬의 영향력을 가지며 가히 폭탄급이고 그 범위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래서 모든 사람의 위에 군림하는 ‘킹’.”
두 팔을 벌리며 조은석은 기쁘게 말했다.
“‘킹 알파’. 우리는 우강희 님을 킹 알파라고 부릅니다.”
* * *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조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해졌다. 한주는 놀라지도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보았다.
침묵은 무겁지 않았지만 조은석이 그 순간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 가벼운 한숨이 분위기를 바꾸었다.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한주가 입을 열었다. 광기에 잠시 압도당해 말을 잃었지만 요점을 놓치지 않았다.
“알겠어요.”
협박했는데 한주의 목소리에는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왜 우강희를 가만히 놔두는지 아냐고 물었죠? 이제 알겠어요.”
확신에 찬 어조였다. 어딘가 도발이 섞인 말투여서 조은석의 신경을 건드렸다.
고등학생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한주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이유?”
“우강희를 놔두는 것이 아니었어요.”
“뭐?”
한주는 조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죠. 우강희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놔둘 수밖에 없는 거였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저 관리라는 이름을 붙여 잘 포장만 했을 뿐이죠.”
조은석은 가만히 한주를 보았다.
웃든가 겁을 주는 등 표정을 꾸미지 않고 무표정하게 보았다.
“그런데 우강희라고 모를까요? 그 녀석도 적당히 당신들을 봐주고 있어요. 당신들이 선을 넘지 않으면 최소한 지금의 분위기는 유지하겠죠.”
꿈틀, 조은석의 입매가 흔들렸다.
“그러니까 신경 곤두세우며 견제하고 협박하기보다는 회유하고 날 그쪽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조금 부끄럽지만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우강희와 나, 사귀는 사이거든요. 그 녀석이 날 무척 좋아해요.”
굳이 그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은석은 우강희의 전담 공무원이었고 강희를 좋아했다.
좋은 관계로 지내고 싶으니 우선 조은석을 회유해야 했다.
그러나 조은석은 찬물을 끼얹었다.
“세상에 커플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복도에서 다급히 달려오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은석이 문 옆으로 몸을 비키자 벌컥 병실 문이 열리며 박예주가 뛰어 들어왔다.
“한주야! 이게 무슨 일이야?”
조은석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하, 요즘 애들 건방진 건, 참…… 맹랑하네. 저러니 우강희가 반한 건가.”
건방지기는 하지만 전혀 불쾌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 * *
“한주야! 납치라니! 네가 납치를 당하다니! 누구 짓이야?”
박예주는 사색이 되어 병원에 들이닥쳤다가 한주 얼굴에 난 상처를 보더니 코를 훌쩍였다.
“어떡해.”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어. 갈비뼈에 금이 간 정도야. 그냥 겉에만 좀 다쳤고.”
“누가 내 새끼 갈비뼈를! 누구야? 알파지? 가만두지 않겠어! 이래서 내가 재강원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걸 말렸는데!”
“경찰이 잘 처리할 거야.”
재강원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경찰에 의해 알게 될 테니 벌써 알려서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도장을 다녔는데……. 다 나으면 사부에게 좀 더 확실히 배우자, 한주야. 엄마가 사부에게 당부해 둘게.”
“아니! 그건 좀…….”
곧 도끼눈으로 바라보는 박예주의 시선에 한주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널 믿지만…… 다치지는 마.”
“응, 미안.”
뺨을 감싸는 엄마의 손길이 애틋했다.
* * *
수업이 끝나고 고용진이 병문안을 왔다.
노트북을 두 대 가져와 한주와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박예주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면서 경찰 명함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 안타깝게도 저녁 식사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 시간이 다 되어 방문한 손님을 고용진이 맞았다.
“와…….”
용진의 눈꼬리가 삐딱해졌다. 지영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 번 스캔하며 훑어보았다.
“영상으로 보기는 했지만 알파 버프 사기네.”
이미 영상 통화로 김지영의 변한 외모를 확인했지만 실물로 보니 그 느낌이 다른지 천하의 고용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영은 용진의 반응은 무시하고 한주를 보았다. 이마 옆에 드레싱 밴드가 붙어 있고 입꼬리에 상처가 있었다. 환자복을 입어 더욱 창백해 보였다.
지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용진이 끼어들었다.
“얘 왜 이래? 김지영이 드디어 고백한 거야?”
풉! 한주는 주스를 마시다가 뿜어냈다.
지영은 얼굴이 빨개져 당황했다.
“어, 어떻게?”
“알고 있었어?”
기가 막혀 한주의 목소리가 커졌다. 용진은 노트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야, 김지영이 그렇게 너한테 치근덕거렸는데 모르겠냐? 누가 남자에게 마음도 없으면서 엉기겠어. 보아하니 고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난 빠져 줄 테니 둘이 얘기해.”
용진은 조은석이 공물로 가져온 케이크를 냉장고에서 꺼내 들었다. 빈손으로 와서 자기 몫을 챙겨 가는 모습이 고용진다웠다.
병실에 두 사람만이 남자 지영이 한숨을 쉬었다.
“봐, 고용진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잖아.”
“원래 당사자는 잘 못 느끼는 법이야. 우린 어릴 때부터 친구였는데 어떻게 알아차리냐고.”
“우강희의 약혼자가 납치한 거라며? 그와 같이 지내면 계속 이럴 거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또 생길지도 몰라. 그래도 계속…….”
차마 단어로 관계를 정의 내리지 못해 지영은 말을 흐렸다.
한주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대답은 지영도 알고 있었다.
“몸은? 다른 곳은 괜찮아?”
“갈비뼈 하나 금 간 것 외에는 괜찮아.”
“그나마 봐 줄 만한 얼굴이었는데. 치료 잘해.”
“그래.”
“……나는 너 포기 못 해. 포기할 생각이었으면 말하지도 않았어. 네가 날 택할 때까지 계속, 평생이라도 기다릴 거야.”
“가능성 없어.”
“내 선택이야.”
한주는 김지영의 이런 성격을 좋아했다. 속을 숨기며 꿍꿍이를 가지지 않았고 물러날 때를 알았다.
“그런데, 너 이렇게 만든 거, 재민석의 형이라고 했지? 파혼할 수도 있지, 그런 일로 납치라니. 설마 재민석도 가담했어?”
눈이 제법 매서워졌다. 생김이 달라졌다고 기분에 따라 분위기도 제법 날카로워졌다.
“아니. 단독으로 벌인 일이야.”
“그 말을 믿으라고? 재민석이 널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데 그 기회를 놓치겠어?”
“아니야, 믿어.”
지영의 눈빛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와 키스 한 번만 제대로 해.”
한주는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너, 전에 동의도 없이 막무가내로 했었잖아, 두 번이나. 실연당했으면 확실히 정리해.”
“그때는 엉겁결에 했고. 나한테는 첫사랑인데 추억으로 제대로 첫 키스를 남겨 주면 안 돼?”
라고 말하면서 지영은 자기 입술을 핥았다.
예전의 작은 지영이라면 한주도 조금은 망설였을 텐데 알파인 김지영은 한주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덩치도 있었다. 어깨 듬직한 알파가 아무리 연약한 척 연기해도 그 아래는 이빨을 가진 짐승의 것이었다.
“안 돼.”
“죽을 사람 마지막 소원도 들어준다잖아.”
“너 안 죽었어.”
“언젠가 죽어.”
“안 돼.”
한숨은 좋은 신호였다.
지영은 한 발짝 침대로 다가갔다.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며 한주는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았다.
“우강희가 싫어할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이런 일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우강희랑 사귀어? 아니지? 설마 아니지?”
“……사귀기로 했어.”
“……좋아, 네 마지막 남자는 내가 될 테니 잠시 다른 놈과 바람피우는 것은 눈감아 줄게. 간다.”
지영은 어른스럽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지만 병실을 나가며 닫은 문에서 큰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박예주가 병실로 들어왔다.
“지영이가 울면서 가던데 무슨 일 있어? 한주 너 얼굴이 빨개. 열 있어?”
걱정하며 한주의 이마를 만졌다.
한주는 침대에 누워 박예주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눈가가 빨갰다. 경찰서에 가서 재강원의 아들이 범인이라고 들었을 것이다.
한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먹었어? 경찰서에서는 빨리 끝나고 나왔는데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늦었어.”
“먹어야지. 엄마, 나 화장실 가게 좀 일으켜 줘. 몸을 일으킬 때 갈비뼈가 뻐근해서 좀 불편해.”
엄마가 없을 때도 혼자서 화장실은 잘 다녔지만 한주는 일부러 어리광을 부렸다. 박예주는 한주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피하더니 부축했다.
“합의금 높게 불러. 이번에 아예 학비나 왕창 벌자.”
“못 하는 말이 없어!”
박예주는 타박하면서도 옅게 미소 지었다. 그제야 한주도 안심했다.
그날 밤, 박예주는 보조 침대에서 자며 한주의 옆을 지켜 주었지만 다른 일은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았나, 재강원을 만났냐는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박예주가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기에 한주가 먼저 재강원에 관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 * *
갈비뼈에 금이 가서 외면적으로는 얼굴의 타박상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있고 움직일 때 조심해야 하지만 움직임에는 큰 불편함이 없어 우강희의 병실을 찾아갔다.
“면회 금지입니다.”
한주는 VIP 병동 앞을 지키는 직원의 저지에 인상을 찌푸렸다. 숨을 쉬다가 갈비뼈의 통증이 올라왔다.
직원은 이제 고1밖에 되지 않는 놈이 어른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고 오해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깨어났다고 들었는데요.”
“페로몬이 폭주한 알파입니다. 작은 자극에도 다시 폭주할 수 있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직원은 너만 출입 금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우강희가 제정신으로 다시 폭주를 일으킬 리는 없다.
“전 페로몬 무감증이라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규정입니다.”
정해진 말만 하는 직원을 보며 한주는 한숨을 쉬었다.
“우강희 님이 거부하고 있어요.”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직원이 한주의 뒤쪽을 보며 인사했다.
조은석이 태블릿을 들고 서 있었다. 한주의 조언을 듣고 조은석은 겉으로나마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역시 어리니 건강하네요. 그렇게 맞았는데도 잘 돌아다니고 부럽습니다.”
그러면서 지지대도 없이 서 있는 한주를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사고 이후에는 섬세한 정신적 케어가 필요합니다. 우강희 님도 그래서 타인과의 면회를 거부하고요.”
“제가 만나고 싶다고 해도요?”
뻐근하지만 한주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우강희에게 말해 주세요. 박한주가 만나고 싶어 찾아왔는데 거부할 거냐고.”
* * *
“박한주가 만나고 싶어 찾아왔는데 거부할 거냐고 물어보랍니다.”
조은석이 기가 막혀 혀를 차며 우강희의 의사를 물었다. 간이 음압실로 만든 비닐 막 너머의 우강희는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한주의 질문에 그는 대답만 하면 되지만 금방 입이 열리지 않았다. 거스러미로 거칠어진 입술이 달싹였다. 강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들여보내세요.”
외할아버지처럼 또다시 지옥이 반복되었다. 또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해 문제를 일으켰다.
한주를 구하겠다는 생각에 창고를 찾아갔는데 막상 위험에 처한 모습을 본 순간 제어를 해야 한다는 판단을 할 사이도 없이 페로몬이 쏟아져 나왔다.
창고 안의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고 더는 위험하지 않게 제압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천희가 나타났다.
우천희는 우강희의 역린이었다.
자신의 페로몬이 얼마나 위험하며, 조금만 제어력을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본 증인이고 죄의 증거였다.
보는 순간 여덟 살 때 알파로 발현하던 날의 악몽이 떠오르며 제어력을 잃었다.
자신의 페로몬이 어떤 짓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최악의 광경을 마주했다.
페로몬에 의해 조종당해 베란다에서 몸을 기울인 외할아버지를 보며 놀라 멈추었다. 그때 페로몬의 강제력은 풀렸지만 외할아버지가 느낀 공포를 보았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우강희에게는 외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던 그 시간이 길게 다가왔다. 언제나 인자하고 따스하게 바라보던 시선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우강희.”
신음하며 괴로워하던 사람들. 창백하고 곧 죽을 듯이 눈을 부릅뜨며 살려 달라고 외치던 사람들.
전부 저의 페로몬 때문이었는데 한주가 잡아 주었다.
페로몬으로 다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고 죽일 수 있는데 박한주는 흔들리지 않고 그를 이끌어 주었다.
그 다정함은 여전했지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나약하고 어리석으며 여전히 겁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우천희를 정리하고 박한주를 지키기 위해 강해지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 우천희를 마주하자 여지없이 무너졌다.
페로몬 제어에 실패해 박한주의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만나겠다는 말을 거절할 수 없고 보고 싶었다. 만나서 그 몸을 껴안고 싶었다.
한주는 이제 그가 살기 위한 필수 요소인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 * *
문이 열리며 한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헐렁한 환자복을 입은 한주는 금이 간 갈비뼈의 통증이 불편한지 조심스럽게 걸어 다가왔다. 당장 달려 나가 끌어안으며 그 체취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지만 우강희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박한주.”
“구하러 와서 먼저 쓰러지는 놈은 처음 봤어. 페로몬 폭주까지 일으키고. 진짜 대책 없다.”
다시 한주의 너그러움에 기댔다.
“이리 와.”
가증을 떠는 나약한 모습의 연기를 알면서도 그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통증이 올라와 한주는 옆구리를 누르며 잠시 가만히 있었다.
우강희는 그 모습을 다 눈에 담았다. 자신 때문에 한주가 다쳤다. 손을 잡고 싶은데 제 잘못이 있어 닿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한주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잡아. 이럴 때는 괜찮냐고 물어보고.”
바보같이 용서의 손을 내민다. 어찌 잡지 않을 수 있을까.
“박한주.”
그 몸을 끌어당겨 끌어안았다. 몸을 기울이느라 통증이 있을 텐데 신음을 내지 않았다.
다정함에 파고들었다. 감정이 끓어올라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살냄새를 맡았다.
“박한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줄 알았어.”
한주를 향해 봉을 휘두르려던 재민용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었다. 항상 냉정하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한주가 위험하자 한순간에 무너졌다.
“우천희는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줄곧 날 괴롭혔어. 참을 수 있는 범위의 장난에 불과했는데…… 그때는 발현 직전이어서 예민했나 봐. 페로몬이 나오는지도 모르고 죽으라고 말해 버렸어.”
과거의 그날을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한주를 안고, 체온을 느끼자 마음이 풀어졌다.
옥죄이며 꽉 묶어 둔 매듭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무서워하며 도망칠 수도 있지만 믿고 싶었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어. 내 페로몬에 그대로 노출되어서 베란다에서 스스로, 아니 내 페로몬 때문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목숨을 구하지는 못했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숨이 거칠어졌다. 한주의 어깨를 잡고 거리를 벌렸다.
정말 말해도 되는 일일까. 치부를 보여도 한주는 이해할까.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판단을 하기 전에 말이 나왔다.
“내가…… 외할아버지를 죽였어.”
결코 신 앞에서도 하지 못할 고해 성사를 한주에게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한주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떤 얼굴로 자신을 봐도 감내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한주의 눈에는 그를 향한 공포는 없었다.
감정이 출렁였다.
“나는 위험한 알파야. 살인자야. 그러니까.”
자신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 한주에게만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다음에, 내가 또 페로몬 폭주를 하면, 위험한 순간이 오면…….”
오직 박한주만 할 수 있는 일.
“날 죽여.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전에, 네가 먼저 날.”
죽으면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
원치 않게 다른 사람을 해치기 전에, 자신을 막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한주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한주가 아무리 제 100퍼센트의 페로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지만 우강희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었다. 혼자서 그 사람들까지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한 명, 두 명, 어느 정도까지의 사람은 상대하겠지만 체력은 한계가 있다. 결국 자신의 페로몬에 조종당한 사람이 한주까지 해칠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최악의 순간에 끝내야 한다.
“존나 이기적인 새끼네.”
화난 사람처럼 한주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한쪽 눈이 일그러졌다.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말하면서 나한테 살인죄를 씌우고 싶냐? 죄책감만 남길 생각이야? 그게 네가 생각하는,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야?”
“아니, 널 위해서.”
한주는 강희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네가 그 죄책감 때문에 그동안 우천희에게 맞아 준 건 이해하겠어. 그런데 너, 우천희를 정리했다고 했잖아. 날 위해서 더는 찐따 짓 안 하겠다고 말했었잖아. 그 마음은 어디 갔는데?”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치며 말을 뱉었다. 냉정하지만 더없이 따뜻했다.
“어리광 피우지 마. 죽을 생각까지 한 놈이 왜 죽을 만큼 노력해서 페로몬을 제어하겠다는 생각은 안 하는데!”
화내는 한주의 팔을 잡았다. 밀쳐졌지만 다시 붙잡았다.
“박한주, 한주야.”
“놔!”
“박한주.”
“다 놓아 버리고 싶고 죽고 싶어지면…….”
“아니, 아니야. 미안해. 다시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아.”
한주는 강희의 멱살을 잡아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죽고 싶으면, 지금 이 순간을 떠올려.”
한주의 숨이 뺨을 간지럽히며 머리카락이 피부에 닿았다. 우강희의 입술에 부드러운 점막이 눌렸다.
* * *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한주는 눈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한주가 일어나 앉으면서 어깨를 감싸고 있던 우강희의 팔이 힘없이 떨어져 배에 놓였다.
우강희는 푹 잠들어 있었다.
한주가 일어나는 기척에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깰 만도 한데 숨소리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조용히 잠든 모습에 한주는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로 나왔다.
늦은 시간인데 조은석은 한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강희는 자요.”
“다시 폭주할까 봐 불안해져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이후 계속 수면제도 거부하며 뒤척였죠.”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조은석은 한동안 병실 안을 바라보았다. 미련을 떨치듯이 한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꾸벅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들어갈 때와 눈빛이 달랐다.
하지만 여전히 엉뚱한 말을 했다.
“히어로물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죠. 히어로의 어린 시절, 의지하던 가까운 사람을 사고로 잃게 되며 히어로는 생명의 소중함과 주적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로 바뀌죠. 그런데 우강희 님은 자신의 페로몬 때문에 가까운 혈육을 잃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악이 되어 버렸죠.”
뜬금없는 히어로물 설명에 한주는 눈만 깜빡였다. 조은석의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저분의 멘털을 가장 염려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어 우강희 님을 놔두었던 겁니다. ‘킹 알파’라 부를 정도로 막대한 페로몬이라서.”
위험한 말을 하면서 조은석은 웃고 있었다.
“좋게 쓰면 왕이든 신이든 될 수 있지만 길을 잘못 든다면 악마로 변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주는 그의 맹목적인 말에 질려 버렸다.
강희와 좋은 사이로 지낸다면 앞으로 계속 볼 사람인데 심히 염려되었다.
“우강희 님이 죽음으로 향하려는 도피를 막음으로써 당신이 이 세계를 구한, 진정한 히어로일지도 모르겠군요.”
한숨이 나왔다.
반드시 강희에게 얘기해 담당자를 교체하라고 말해야겠다. 조은석의 건강을 위해서도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좀 쉬세요. 피곤하면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아요.”
“그러잖아도 우강희 님이 좋아지셨으니 교대를 할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라 못 미덥겠지만 저는 아주 잠시 휴식을 가질 뿐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섯 시간 뒤에는 돌아오겠습니다.”
“제발 24시간 푹 쉬세요. 더 오래 쉬면 좋고요.”
* * *
다음 날, 우강희의 면회 금지와 격리가 풀렸다. 그는 곧장 퇴원해도 되지만 여러 가지 검사를 하자며 병원에서 잡아서 하루 더 입원하기로 했다.
우강희보다는 우천희가 더 문제였다.
어릴 때 우강희의 페로몬 때문에 쇼크받은 적이 있기에 이번에 또 우강희의 페로몬을 경험해서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우상진이 우강희의 병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오셨습니까.”
나가려다가 우상진과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우상진은 건장한 아들을 훑어보고 병실로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천희에게 갈 거다.”
우강희는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었다.
우천희는 강희가 마주해야 할 죄였다. 이미 그의 페로몬 때문에 죽을 뻔했고 이번에도 위험한 상황까지 갔었다.
“죄송합니다.”
우상진을 따라가며 강희는 사과를 했다.
“나한테 사과하지 말고 천희에게 해야지. 이번 일로 천희가 어릴 때 일을 기억해 내서, 좀 피곤해질 거다. 날카롭더군.”
“그럴 만하죠.”
조용히 수긍하는 모습에 우상진은 혀를 찼다.
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알파인 우강희는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형질을 짐으로 느꼈다.
그 인간적인 면이 우상진은 재미있었다. 알파들도 우러러보며 어려워하는 우강희는 원한다면 신이 될 수도 있는데 인간으로 남고 싶어 했다.
우천희는 VIP 병동 한 층 아래의 1인실에 입원했다.
가능한 한 우강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희미하게 흘러나온 우강희의 페로몬이 우천희를 자극할 수도 있기에 조심했다.
우천희의 병실 앞에는 담당 의사와 병원 원장, 그리고 한수원이 서 있었다. 한수원은 우상진에게 인사하려다가 뒤에 서 있는 우강희를 보더니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우상진은 수원의 불손한 시선을 무시하며 병원 원장에게 인사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천희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병원 원장은 뒤에 서 있던 의사를 돌아보았다. 난감한 빛을 감추지 않았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기다리지는 못합니다.”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하는 우상진의 말투에 수원이 끼어들었다.
“우천희는 피해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피해자를 배려해 주세요. 아들이잖아요.”
“그래서 가족이면서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피하는 모습을 보라는 거냐? 나약한 꼴을 지켜보라고?”
“의원님, 우천희에게 시간을 달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막무가내가 아니라 본인 의사를 묻고.”
“내 아들 우천희는 그렇게 약한 놈이 아니야.”
“의원님!”
우상진은 단호했다. 고등학생의 말이라 무시하지 않지만 의지를 밀어붙였다.
밖의 소란이 안까지 들렸는지 병실 문의 유리에 그림자가 비쳤다. 우천희가 문을 열었다.
며칠 사이에 살이 빠졌는지 볼이 홀쭉했다. 창백한 얼굴로 우강희를 노려보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전 괜찮습니다.”
우천희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 * *
우상진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 강희를 데려가마.
일방적인 통보였다. 트라우마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그 냉정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상진은 국회 의원이라 바빴고 집안일은 우강희의 어머니에게 맡겨 두었다. 식사 중에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아들들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우강희를 볼 때는 눈빛이 달랐다. 열망 같은 뜨거움이 있었다. 애정을 구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적인 배려를 기대했는데 우상진에게는 과한 기대감이었다.
어릴 때, 우강희가 발현했을 때 벌어진 일은 기억에 없었다.
전에는 사고 몇 개월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이번의 일로 어른들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병원에서 눈을 뜨니 이혼한 어머니 김자경이 옆에 있었다.
‘이 어린 애가 페로몬 쇼크라니! 천희의 형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고요!’
‘페로몬으로 제 외할아버지를 죽이는 애와 절대 우리 천희를 그 집에서 키울 수 없어요!’
그리고 깊은 밤 잠시 잠에서 깬 저에게 김자경이 했던 말도 생각났다.
‘천희야, 그 애를 이길 수 없어. 그런 알파는……. 넌 이 집안에서 패배자만 될 거야.’
우강희를 보며 페로몬의 공포에 질려 떠올리게 된 기억은 더한 공포였다.
우강희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렸고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어찌 폭행을 하고 괴롭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뼛속까지 덜덜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아버지가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해 병실 안을 서성이고 있는데 문밖에서 담당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트라우마가 더 강해질 뿐입니다. 아들이 받을 충격은 생각도 안 한답니까?”
“이 교수.”
“원장님, 아시잖아요. 이제 사흘이 지났을 뿐입니다. 아무리 쇼크 요법이라고 해도 페로몬 폭발을 일으킨 동생을 만나게 하다니요.”
“이 교수,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원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수원의 목소리. 우천희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비아냥대며 놀리기도 했지만 수원과 얘기하다 보면 긴장이나 걱정이 사라졌다.
“미쳤습니까? 천희에게 우강희를 만나게 한다고요? 가해자를 대면시킨다는 겁니까?”
“우상진 의원님이 바라는 바입니다.”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수원의 목소리가 커졌다.
“부모가 원하면 자식은 무슨 일이든 해야 합니까? 우천희가 받을 충격은 누구도 생각 안 합니까?”
“보호자가 결정했으니 타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네.”
“당신들 의사 맞습니까?”
“조용히. 목소리를 죽여요. 오셨습니다.”
왔다는 말에 우천희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우강희와 함께 왔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병실이라 잠금장치가 없었다. 우천희는 주위를 둘러보며 병실 문을 막을 만한 것을 찾았다. 소파가 보여 끌고 오려고 몸을 돌리는데 우상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당 의사가 재차 만류했지만 우상진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우강희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천희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친자가 아님을 알았지만 아버지가 냉담하거나 관심이 없는 모습에 불안과 안심을 오갔다.
혹시 자신이 친자식이 아님을 알까?
하지만 아들이 저 혼자이니 아버지라도 어쩌겠어.
그러나 그 안심의 공식은 우강희가 나타나면서 깨졌다. 아버지를 닮은 외모와 유전자 검사로 친자 확인을 했다는 말에 우천희는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이 집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초조함과 불안은 의외로 우강희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반쯤은 해소되었다.
아버지 우상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자식의 일에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냉담했다. 특별히 우강희라고 잘 대해 주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그 안에서도 미세하게 다르게 대하는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차이 하나하나가 천천히 숨통을 조여 왔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날카롭게 깃을 세우고 칼날 위를 걷듯이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우강희가 반항하면서 불안은 가중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가 준 선물이 우천희를 진정시켰다.
우강희의 피가 묻어 있는 볼펜.
우상진과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될 경우 절 살릴 물건이었다.
복도에서의 대화가 들려왔다. 우천희가 상처받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말을 듣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친아들이든 아니든 저는 우상진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지만 확인을 받은 느낌에 우천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강희의 페로몬에 당한 굴욕과 공포보다 더한 최악이 있었다.
“우천희는 피해자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피해자를 배려해 주세요. 아들이잖아요.”
수원은 상대가 우상진이라도 의견을 피력했다.
의미 없는 노력이다.
우천희의 눈에 테이블에 놓인 유리잔이 보였다. 깨지면 날카롭게 날을 세워 피부를 가를 수 있는 물건이었다.
테이블로 향하려는데 우상진의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가족이면서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피하는 모습을 보라는 거냐? 나약한 꼴을 지켜보라고?”
이어진 우상진의 말에 우천희는 가슴이 죄어 왔다.
“내 아들 우천희는 그렇게 약한 놈이 아니야.”
내 아들. 내 아들 우천희.
그 한마디가 뭐라고 우천희는 문으로 다가갔다. 우상진의 기대에 어긋나고 싶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잡는 손이 떨렸지만 힘을 주었다. 우상진의 아들로 의연한 모습을 보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천희에게 몰렸다. 우상진도, 한수원도, 그리고 우강희도.
우천희의 눈에는 우강희만이 들어왔다. 그를 보자 몸이 떨렸다. 공포에 한순간 시야가 점멸하며 어지러웠다.
숨이 턱 막혔지만 우상진에게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페로몬이 몸을 감싸 주었다. 아버지의 페로몬에 마음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익숙한 아버지의 페로몬 향기는 언제나처럼 위압적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우천희를 지켜 주고 있었다.
“들어와.”
우상진의 입꼬리가 움직이는 모습에 우천희는 자신이 정답을 말했음을 알았다.
수원이 따라 들어오려 하자 우천희는 손을 들어 막고 문을 닫았다. 병실에는 우상진과 우천희, 그리고 우강희만이 있었다.
“몸은 괜찮아 보이는구나.”
“네, 의사만 허락하면 내일 퇴원할 생각입니다.”
“그래.”
후유증으로 밤에 불을 끌 수 없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우상진은 우천희의 상태를 보고받았고 어떤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는지 알았지만 퇴원한다는 말을 막지 않았다. 우상진은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뒤에 선 우강희를 불렀다.
“우강희.”
짧은 부름이었지만 우천희도 우강희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우천희는 주먹을 꽉 쥐며 우강희를 노려보았다. 우강희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났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긴장했다. 그가 페로몬을 내보내지도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그런 반응이 일어났다.
우강희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짧았지만 그 외의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단지 며칠 전의 일에 대한 사과가 아니다. 오래전, 우천희가 잊었던 그날의 사과였다.
우천희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우상진이 보는 앞에서 우강희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등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래, 받아들이지.”
우강희를 괴롭히고 처벌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던 감정의 응어리가 그 순간 풀렸다. 기억 못 하던 어린 시절의 공포가 드디어 우천희를 떠났다.
“나도…… 나도 미안했다.”
우천희도 그동안 괴롭혔던 일을 사과했다.
* * *
한주는 일주일은 더 입원해야 했다.
금이 간 갈비뼈는 따로 치료할 방법이 없지만 박예주가 더 입원하자며 강력히 원했다.
학교를 일주일 더 쉴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전날 낮에는 오지한과 계무원이 병문안을 왔다. 오지한은 누워 있는 환자의 몸을 여기저기 만지작거리더니 “괜찮네.”라는 한 마디만 하고 병실을 나갔다.
단 5분 만의 짧은 병문안이었다.
그런데 10분쯤 지났을까 계무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너 퇴원하면 큰일 났다. 네 사부가 육체 강화 커리큘럼 짜고 있어.]
이모지나 자음을 쓰지도 않았는데 계무원이 킥킥대며 웃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주는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오, 그럼 전 사부와 더 오래 같이 있겠네요.]
약이 오른 계무원이 새로운 훈련 커리큘럼을 줄여 주길 바랐다.
밤에는 한주가 자고 있을 때 이무열이 조용히 다녀갔다. 움직임에는 문제없기에 엄마는 집으로 보내서 병실에는 혼자였다.
잠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어두운 병실에서 한주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울며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한주야. 이런 일이 벌어질 줄도 모르고…… 그저 네가 재강원의 아들이라는 말에 그 사람이 미워서…… 너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미안해…… 미안하다…….’
한주는 무열이 떠날 때까지 자는 척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다음 날 용진과 한주가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재강원의 아내인 오혜주가 찾아왔다.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병실로 들어온 그녀는 병실을 훑어보며 표정만으로 ‘겨우 이런 곳에 입원해 있다니.’라는 속마음을 뻔히 보여 주었다. 그래도 1인실인데.
그녀는 침대에 누워 용진과 핸드폰 게임을 하는 한주를 보더니 말을 가리지 않고 용건을 내뱉었다.
“베타라고 해서 방심했더니 나름대로 재주가 있구나. 우리 민용이에게서 우강희를 빼앗아 가다니, 제법이야.”
고용진은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챘으면서도 일부러 한주에게 물었다.
“한주야, 이 아줌마 누구야?”
“날 이렇게 만든 재민용의 어머니이고 재강원 이사장의 부인.”
“가해자의 엄마가 찾아와서 자기소개도 안 하고 사과도 안 한다고?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면 자기 아들이 일을 벌여 이렇게 입원했으면 널 보자마자 사과해야지. 재강원 이사장의 부인이 맞아? 예의도 없네.”
매번 인터넷 방송으로 일방적인 방송만을 해 온 고용진이기에 오혜주를 눈앞에 두고도 신랄하게 말했다.
오혜주를 무시하며 둘이서만 얘기를 하자 그녀가 짜증 냈다.
“애송이가 건방지게. 상관없는 제삼자는 나가.”
“기본예절도 없는 아줌마를 존중할 필요는 없죠.”
예절을 운운하는 말이 좋은 가문에서 자랐다고 자부하는 오혜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너, 이름이 뭐지?”
그녀는 주눅 들지 않고 따박따박 맞받아치는 용진을 노려보았다. 고용진은 혀를 날름 내밀어 약 올렸다.
“말해 줄 리 없잖아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왜 말하겠어요. 바보도 아니고, 아줌마가 세상 물정을 모르네.”
“너!”
오혜주의 목소리가 커지자 벽 한쪽에서 칙칙, 병실 안에 소취제가 뿌려졌다.
“어?”
용진은 자동 소취제와 오혜주를 번갈아 보더니 풋,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나이 먹어서 고딩 베타를 상대로 페로몬을 내보내네. 병원 가 봐야겠어요. 나이 먹으면 페로몬 제어가 떨어진다더니 사실이네. 아직 젊어 보이시는데 어째요. 가시면서 진료나 받고 가세요.”
“……박한주.”
오혜주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한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용진을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만한 표정이 돌아왔다.
“가문에서는 널 재강원 씨의 자식으로 인정하고 호적에 넣기로 했단다. 서류가 정리되는 대로 널 우리 집으로 데려올 거야.”
“네?”
황당해 한주는 무슨 소리를 들었나 눈을 깜빡였다.
“우와, 이게 무슨 개소리야.”
용진이 탄성을 터뜨렸다. 짝짝, 손뼉까지 쳤다.
오혜주가 신경을 거스르는 용진의 리액션에 발끈해 소리치려는데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박예주가 들어왔다.
“야! 남의 자식한테 이게 무슨 소리야?”
박예주는 한주를 감싸며 오혜주와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내 자식을 재씨 집안에 입적해? 미쳤어? 한주는 내 아들이야!”
박예주가 등장하자 오혜주는 오히려 여유를 찾았다.
“한주가 재강원 씨의 아들인 것을 알았으니 재씨 가문의 혜택을 받게 해 줘야죠. 촌스러운 이름도 바꾸고 촌티 좀 벗고요. 타고 태어난 피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살살 건드리며 어린애에게 받았던 수모를 풀었다. 하지만 박예주는 그동안 독을 품고 있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웃기네. 한주는 내 아들이고 재강원도 이미 예전에 모든 권리를 다 포기했어! 내가 재강원과 헤어질 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거 같아서 서류 사진을 찍어서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다녔지!”
박예주는 핸드폰 갤러리를 열어 집에 보관해 둔 서류 사진을 오혜주에게 보여 주었다.
“변호사에게 공증도 다 받은 서류야! 재씨 가문 변호사도 참여해서 작성했으니까 사본이 재강원에게도 있을걸! 우리 한주는 그 잘난 재씨 가문에서 모든 권리를 다 포기했으니 완벽한 내 아들이야.”
친권 포기 각서였다.
양육비도 받지 않으며 박한주에 대한 친부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앞으로도 행사하지 않을 거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만약 재강원이나 재씨 가문에서 박한주를 데려가겠다고 나올 때를 대비한 조건도 적혀 있었다.
오혜주는 박예주의 핸드폰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박한주를 데려갈 경우 재강원에게 법적 아내가 없어야 하며 한국 1순위 언론사에 한 달간 이를 공개하며 사과문을 올린다? 당신 미쳤어?”
푸흡, 듣고 있던 용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장면을 보고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어머님 진짜 찐이세요. 제대로 막았네요.”
“야! 너 나가!”
“그게 끝이 아닌데, 밑에도 봐야지.”
의기양양한 말에 오혜주는 화면을 내리더니 눈을 크게 떴다.
“박한주를 제외한 다른 자식의 친권을 포기하며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다…….”
박예주는 재강원에게 친권 포기를 받아 냈을 때를 떠올렸다.
이미 애정이나 기대는 사라졌었지만 태연한 재강원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친권, 양육권 포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로, 재강원이나 그의 부인이 절대로 한주를 데려갈 수 없도록 계약서에 문장을 추가했다.
자존심 강한 사람이니 자신의 치부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재강원의 부인이 한주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머리를 썼다.
오혜주의 손에 힘이 실리자 박예주는 냉큼 핸드폰을 뺏어 갔다. 화를 내며 던지기라도 하면 핸드폰을 바꾸어야 한다. 핸드폰의 할부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귀찮아서다.
오혜주는 박예주를 노려보았다.
“이걸 노리고 있었구나. 날 내쫓으려고. 감히 내 아들들의 권리까지 포기시킬 생각까지 해?”
“우리 한주를 데려갈 생각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 없어. 우리 애, 건드리지 마. 다시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음에는 인터넷에서 날 보게 될 거야. 고용진! 너 너튜브 구독자 몇 명이랬지?”
“엊그제 10만 넘었어요. 아, 참고로 일전에 있었던 재강원 고등학교의 학교 폭력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일조한 채널이 제 채널입니다.”
용진은 히죽히죽 웃었다.
턱에 힘을 주며 오혜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박한주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다만 베타이고 재강원이 신경 쓰지 않기에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재강원의 특출 나지 않은 혼외자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재강원이 오혜주에게 말을 흘렸다.
‘박한주가 내 아들이더군.’
재강원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의도를 말하지 않아도 오혜주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재민용의 약혼자인 우강희를 뺏어 간 박한주를 재강원이 원하고 있었다. 이미 다 큰 혼외자를 집안에 들이는 일은 문제도 아니다.
짜증 나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며 왔는데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 박예주와 한 계약을 알고 있을 텐데도 오혜주로 하여금 데려오게 한 것이다. 어떤 계약인지 알면서도.
모멸감에 오혜주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재강원은 오혜주와 재민용, 재민석을 버릴 생각이었다.
“가지.”
그녀 또한 좋은 집안의 자제였다.
재강원의 재씨 집안에 비하면 별거 없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재씨 집안에 시집와 물심양면으로 친정집을 밀어주어 입지가 커졌다. 그래서 이제 재씨 집안에서 발언권이 높았다.
쉽사리 밀어낼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다시는 오지 마! 다시 오면 물세례를 각오해야 할 거야!”
오혜주는 가죽에 자국이 남는 것도 상관하지 않으며 백을 꽉 쥐고 병실을 나갔다.
씩씩대며 오혜주가 병실을 나가자 용진이 굳은 분위기를 풀려는 듯 박예주를 칭찬했다. 한주의 친아버지에 대해 처음 들었으면서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니, 진짜 대단하시네요. 굿잡입니다.”
“흥,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당연하지. 저렇게 나올 줄 알았어. 지금에 와서야 내 아들을 노리다니, 누가 줄 줄 알아?”
“그런데 이대로 물러날까요? 재강원 이사장의 집안이면…… 꽤 셀 텐데.”
“걱정 마. 나도 이제 옛날 순진한 대딩이 아니야.”
“역시 어머니!”
박예주를 추켜세워 주는 용진에게 한주는 고개를 까딱여 감사를 표했다.
오혜주의 등장으로 우울해질 수 있는데 박예주는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큰 감정 동요 없이 대응했다.
용진은 신이 나서 만약 재씨 집안에서 강하게 나올 경우 어떤 식으로 대응하며 정보를 풀지 박예주와 머리를 맞대며 궁리했다.
* * *
“일어났어?”
낮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한주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머리를 베개에 비비며 몸을 뒤틀었다.
“5분만 더…….”
몸을 돌리자마자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그제야 병원에 누워 있는 현실을 떠올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우강희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한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잔잔하게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처럼 한주를 향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한주가 그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신의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한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어딘가에 파고들어 가 숨고 싶은데 누워 있어서 우강희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그는 환자복이 아니라 검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퇴원해?”
“여기 있다가 오후에 학교 들어가려고. 저녁에 다시 올게.”
“오긴 뭘 와. 다음 주면 나도 퇴원해.”
“……입 맞추고 싶어.”
훅 내뱉은 말에 한주는 당황했다. 부끄러움도 없이 원하는 바를 솔직히 말하면 난감해졌다.
자신이 원할 때는 덤벼서 얼굴을 붙잡고 입술도 비비지만 우강희가 먼저 적극적으로 나오면 방어적이 된다.
“안 돼.”
“넣지는 않고 닿기만 할게.”
“뭘 넣는다고…… 안 돼.”
“입술만.”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곧 우강희의 손이 그 손을 잡더니 움켜쥔 손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살을 비비듯이 좁은 곳으로 밀어 넣는 강희의 눈매가 깊어졌다. 목마름에 입술을 핥았다.
금방 잠에서 깬 한주의 손은 메말랐지만 따뜻했다.
그저 손가락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을 뿐인데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그렇다고 피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딱 박한주 같았다.
뭘 원하는지, 어떤 뉘앙스로 접촉하는지 알면서 순진한 반응을 보였지만 저가 원할 때는 저돌적으로 행동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
한주의 손을 맞잡았다.
“널 느끼고 싶어. 네 피부에 닿고 싶어.”
“……지금 잡고 있잖아.”
뺨을 붉히며 애써 말을 돌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강희는 허리를 숙이며 한주의 몸 위로 몸을 밀착시켰다.
갈비뼈에 금이 가 압력을 주면 안 되기에 다른 팔로 몸을 지지해 무게를 싣지는 않았다.
긴장했는지 한주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갈비뼈에서 통증이 올라와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아니, 참을 만해.”
찡그린 얼굴이 우강희의 욕구를 부추기며 참고 있던 음심을 건드렸다.
“그럼 더 안아도 돼?”
“안 돼.”
늑골에서 올라온 통증에 숨을 고르며 한주는 눈을 떴다. 뺨이 붉었다.
강희의 얼굴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마를 훑고 눈을 보더니 한주의 입술을 원했다.
강희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원하는 것을 말하는 듯 시선을 마주쳤다.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며 강희는 한주를 살폈다. 먹이를 사냥하려고 수풀 속에 숨어 숨을 죽이는 짐승처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체를 눌러 오는 강희의 무게가 한주의 허락을 재촉했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입술, 열어 줘.”
우강희가 졸랐다. 조른다는 귀여운 말이 무색하게 목소리는 한층 낮았다.
“싫어?”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안 돼.”
대답은 똑같았지만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
둥글게 접히는 강희의 눈을 보며 한주는 턱에 힘을 주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로열 알파도 뛰어넘을, 상위 알파이든 말든 한주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히어로물 스토리를 듣는 기분일 뿐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가, 오롯이 한주만을 바라 오는 눈길과 애정이, 구하기 위해 달려온 모습이 마음을 흔들었다.
“조금만.”
“……안 된다고.”
거절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강희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다. 위에서 덮치듯이 시야를 가렸다. 한주의 가슴을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리를 좁혔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틈도 없이 닿았다.
“조금만.”
거절을 못 들었다는 듯이 능청맞게 되묻는 말에 한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했다.
거절하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닿고 싶어 발버둥 치며 졸라 오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거대한 고양잇과 맹수가 골든레트리버처럼 빤히 바라보며 조른다. 그런데 그 눈빛은 절대 순진하지 않았다. 마음의 틈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우강희는 쪽, 짧은 간격을 순식간에 좁혀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읏.”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어 다시 고개를 숙여 쪽 입술을 맞댔다. 이번에는 좀 더 눌러 입술 안쪽 살이 닿았다.
흡,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입술을 벌렸다. 당황해 이리저리 떠돌던 한주의 눈이 감겼다.
“입술, 벌려.”
그때 똑똑, 누군가 병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간다.”
강건한 목소리에 한주는 놀라며 우강희를 옆으로 밀어 문 반대쪽으로 떨어뜨렸다. 다행히 보조 침대가 밑에 있어서 그 위로 떨어졌다.
한주는 낙상 방지 가드를 올려 그 위에 이불을 덮었다. 우강희가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그와 동시에 병실 문이 열렸다.
박예주의 엄마이며 한주의 외할머니인 송이연이 들어왔다.
갈비뼈에 금이 갔지만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문제없어 박예주를 집에 보냈었는데 한주가 혼자 있을 시간을 노리고 찾아왔다. 송 여사는 박예주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재강원이 널 데려가길 원한다지.”
송 여사는 안부도 묻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박예주가 있었다면 궁금하지도 않은 한주의 건강을 물었겠지만 병실에는 한주뿐이었다.
“재씨 가문으로 들어가.”
송 여사의 용건을 예상했지만 정말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가족에게 배척당하는 상황은 익숙해질 수 없다. 알고 있지만 송 여사는 한결같이 한주를 못마땅해했다.
“네가 먼저 간다고 말해. 그러면 예주라도 고집부리지는 않겠지. 이제까지 네 엄마의 앞길을 막은 것으로 충분하잖아.”
송 여사의 태도는 항상 일관적이었다.
언제나 손자를 자식의 짐으로 취급했다.
“예주도 이제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뒤늦게라도 재강원이 네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예주에게도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지. 네가 네 엄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면 그렇게라도 키워 준 보답을 해.”
한주가 키워 달라고 한 적도 없고 태어나게 해 달라고 한 적도 없이 예주 본인이 원해서 아이를 낳고 키웠는데 송 여사는 보답하라고 강요했다.
“예주에게 너만 한 자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걸림돌이야. 이제 예주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너만 빠져 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니?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그랬죠. 잊지 않았어요.”
“그래, 되바라진 녀석이라 겨우 중1짜리가 날 찾아와 협박을 하며 천만 원을 빌려 갔었지.”
“네, 할머니가 어릴 때 저에게 했던 폭력적인 말을 엄마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했고 고등학생이 되면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했었죠.”
수십 수백 차례 밀려오는 파도에 뾰족한 돌도 동글동글하게 마모된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도 보석처럼 깎였다.
한주에게는 이제 아픔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폭력적인 말? 또 그 주장이구나. 네 엄마에게 짐이고 너 때문에 예주의 인생이 망가진 건 진실이야.”
보조 침대에 누워 숨어 있는 우강희가 이불 밑에서 한주의 손을 꽉 잡아 왔다. 한주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단단한 손이 잡아 주었다.
그래서 한주는 웃을 수 있었다.
“설마 치매 와서 그때 빌려 간 돈은 그해 9월에 이자까지 합쳐서 다 갚았다는 거 잊지 않으셨죠? 영수증 아직 가지고 있어요.”
치매라는 단어에 송 여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넌 진짜 애 같지 않아서 정이 안가.”
“원래 저 싫어하셨잖아요. 할머니는 엄마만 많이 사랑했죠.”
“당연하지. 내 자식이니까.”
“그리고 전 엄마의 자식이고 할머니의 손자이기도 하고요.”
“남들은 내리사랑이라며 손자를 더 귀여워한다지만 난 내 자식이 더 소중하구나. 내 자식에게 짐이 되는 네가 좋게 보이지는 않아.”
“……알아요. 할머니는 예전부터 그랬잖아요.”
“그래. 그리고 넌 내가 뭐라 말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어린것이 무섭게.”
시간이 지난다 해도 쌓이지 않는 것이 있고 생기지 않는 것이 있다.
길 가는 똥개도 계속 보다 보면 머리라도 한 번 만져 주고 눈길 한 번 주기라도 할 텐데 송 여사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한주를 싫어했고 여전히 자식의 짐으로 여겼다.
“전 박한주예요. 앞으로 계속 엄마 자식이고, 할머니 손자일 거예요. 할머니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저도 엄마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재씨 가문에는 가지 않아요. 우리 약속은 이미 다 끝났어요.”
송 여사는 쯧, 혀를 찼다.
재강원의 부인이 한주 병실로 찾아와 데려가려고 했다면서 박예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떻게 막았는지도 다 들었고 송 여사는 자식의 편을 들어 주며 같이 화냈지만 속으로는 한주가 재씨 집안에 들어가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박예주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식이 없어야 좋았고 한주의 앞날을 위해서도 부유한 재강원의 자식인 편이 미래가 밝았다.
무한한 재력으로 원하는 공부와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고집 센 놈.”
“엄마를 닮아서요.”
송 여사도 꺾을 수 없었던 고집이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 집에 가면 네 엄마가 해 줄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어. 넌 그 기회들을 다 버리는 거야.”
“하고 싶으면 제힘으로 해야죠. 언제까지 엄마에게 기대라고요.”
쯧, 송 여사는 다시 혀를 찼다. 좁아진 미간의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병원비에 보태라고 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달라고 하고.”
할 말이 끝났는지 송 여사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언성 높이는 소란은 없었지만 한주는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송 여사가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박예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 아들, 엄마 이제 병원에 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우강희가 몸을 일으켜 한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한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불편한 가족 관계를 다 들었는데도 강희의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애정은 한결같고 변하지 않아 한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떤 행동을 해도 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허니 맛 치킨.”
- 다른 건?
“국물 떡볶이도.”
- 그럴 거 같았어. 치즈 올린다?
“치즈 느끼해서 싫은데.”
- 정말 싫어? 엄마는 먹고 싶은데.
“그럼 마음대로 해.”
강희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매트리스 한쪽이 무겁게 눌렸다. 전화를 끊고 한주는 그에게 말했다.
“먹고 가.”
“다음에. 날 보면 좋아하지 않으실 거야. 나 때문에 네가 다쳤으니까.”
“그래도 쫓아내지는 않을 텐데.”
강희는 콧잔등을 찡그리는 한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자기 귓불의 검은 피어스를 가리켰다.
그의 귀에는 검은 피어스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우강희의 성격상 피어스를 할 사람 같지 않았지만 섹시해 보였다.
“이거, 위치 추적기. 국가에서 채워 준 목줄이야.”
“……뭐? 그런 것까지 해?”
“그래야 안심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이해했어. 왜 그들이 그렇게까지 나에게 이걸 채우고 싶어 했는지. 네가 사라졌을 때 절실하게 느꼈어.”
한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한주는 혈육의 폭언에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엄마의 짐이라든가 다른 집으로 가 버리라는 말을 듣고도 태연했다.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익숙해져서 흔들리지 않을까.
강희는 메마른 한주의 눈꼬리를 쓸며 볼을 어루만지다 귓불을 문질렀다. 손길은 자연스러워 한주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도 하자. 내 걸 줄게.”
“뭐?”
말랑하고 작고 동글동글한 살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뭉개며 자극했다. 손톱 끝으로 귓불에 자국을 내자 한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어깨를 틀었다. 싫지만 거세게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것을 안에 넣을 때도 이러할까.
우강희는 말로 꺼낼 수 없는 의문에 하체가 묵직해졌다.
손에 잡힌 작고 동글한 살은 한주의 가슴에 매달린 유실을 떠올리게 해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따로 반응하기 때문에 하나는 네가 하고 있어도 돼. 그들도 허락했어.”
“……같이 학교에 다니고 같은 방을 쓰는데 그럴 필요가 있어?”
“있어.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
물러나지 않겠다며 강희는 한주의 귓불을 계속 문질렀다. 귓불이 뜨거워졌다.
들불이 퍼지듯 작게 지펴진 불이 한주의 얼굴에서 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야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을 거 같아.”
한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픈 갈비뼈의 고통을 참으면 언제라도 강희의 아래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프지 않게, 부드럽게 해 줄게. 하자.”
송 여사의 날카로운 말을 들을 때 그는 이불 안에서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커다란 억센 손이 단단하게 한주를 잡았다. 흔들리지 않게.
“괜찮아, 믿어 봐.”
달콤하게 유혹한다. 한주는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뺨이 뜨거웠다.
“……아프면 안 해.”
“그래.”
너무 순순히 대답해서 한주는 강희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우강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 혼자만 긴장한다고 생각했는데 우강희 또한 한주와 같았다.
그의 손이 한주의 뒷머리를 감싸며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한주의 귓불을 이빨로 깨물었다. 퍼뜩,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몸에 힘이 들어가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야! 뭐 하는 거야?”
“만져서 통증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아프지 않아.”
낮은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타액에 젖은 혀가 귓불을 빨며 질척한 소리를 냈다. 귀 가까이 들리는 젖은 목소리에 강희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그냥 손으로 만지면 되잖아!”
“손으로는 부족해.”
입을 벌리고 작은 살을 입 안에 넣어 강희는 귓불을 빨았다. 이빨로 잘근거리며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이빨 사이에서 굴렸다. 젖은 혀가 이빨 사이의 귓불 끝을 문지르는 느낌이 야릇했다.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고 허리가 뒤틀렸다. 다리를 움직이다가 한주는 몸이 굳었다. 무릎에 단단한 샅이 닿았다.
다른 곳에 정신이 쏠려 있음을 눈치챘는지 귓불에 이를 세우며 깨물었다.
“읏!”
우강희가 몸 위로 올라왔다.
누워 있는 얼굴 옆으로 팔뚝을 놓고 가슴에 무게를 싣지 않도록 배려하며 혀를 움직였다. 귓가에서 할짝이고 쪽쪽 빠는 젖은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온 신경을 빼앗아 갔다.
“잠깐!”
“움직이지 마. 아프게 할 수 있어.”
“너!”
아픔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강했다.
우강희는 한주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귓불을 빨았다.
쩍, 질척하게 젖은 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이어졌다. 머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감싼 강희의 손은 한주의 목으로 내려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표본에 꽂힌 나비를 누르듯 단단하게 붙잡았다.
“읏!”
처음 겪는 감각에 몸을 뒤틀자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주가 버둥거릴수록 좋아했다. 낮은 웃음이 귓가에 퍼졌다.
“귀가 민감해.”
“그, 그만해도 되니까 빨리 꽂아!”
음, 그가 목을 울렸다.
“그렇게 급히 넣으면 네가 아파.”
“아파도 되니까 빨리!”
재촉하는 말, 움켜쥐며 끌어당기는 손에 강희는 호흡을 멈추었다.
아파도 된다고 말하며 한주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재촉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곳으로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했다. 붉어진 얼굴을 더 울리지 않으려고 참았다. 움찔거리며 튀는 몸을 누르며 한쪽 귀에서 피어스를 빼냈다.
강희는 날카로운 끝을 부드럽게 풀어지다 못해 타액에 통통해진 살에 댔다. 빨갛게 달구어진 귓불은 붉다 못해 검붉은 진한 색이 되었다. 그가 하도 물고 빨며 괴롭혀서 그렇게 변했다.
타액에 젖은 살이 번들거렸다.
“아!”
귓불에 닿은 날카로움에 한주는 아픔을 예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강희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피어스를 밀어 넣었다.
미간이 좁아지며 아픔을 참는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얇은 막을 뚫고 날카로운 침이 살 안으로 들어가는 감각을 손으로 생생하게 느꼈다.
오목해지는 살은 마치 빨아들이듯이 피어스를 삼켰다.
툭, 뚫리는 느낌에 한주의 어깨가 퍼뜩 떨렸다. 붉게 흘러나오는 피를 강희가 핥았다.
“흣.”
한주가 밭은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우강희를 찾듯이 머리를 감싼 팔에서부터 시선이 올라오며 그를 바라보았다.
“박한주.”
참을 수 없었다.
강희는 한주의 머리를 움켜잡고 입을 겹쳤다. 한주도 참았는지 열렬히 호응하며 입을 벌렸다. 거친 호흡이 뒤섞이며 몸이 겹쳐졌다.
왜 태어났을까.
왜 알파로 태어났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며 소중한 사람을 옆에 둘 수도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강희는 항상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알았다.
그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 * *
재민석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지영은 책상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었다. 손이 빠르게 태블릿 위를 움직였다.
민석이 무단으로 학교를 빠졌지만 부모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식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재강원은 원래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오혜주는 화가 나 아들이 결석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재씨 집안 재단의 학교이니 출석률은 중요하지 않았다.
‘애들을 버릴 생각이에요? 날 버리고 그 애를 데려올 생각이냐고요! 아무리 각서라지만 어떻게 날 밀어내고, 우리 애들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각서까지 쓸 수가 있어요?’
‘예전에 쓴 각서야. 베타라 데려올 생각도 없었어.’
‘하지만 이제 데려오고 싶은 거잖아요! 애들을, 날 버리고!’
날카로운 오혜주의 목소리에 재강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오혜주는 그를 따라 들어가며 다시 따졌다.
‘아무리 우리가 정략결혼이라지만 같이 지낸 시간이 20년이 넘는데, 어떻게 나한테…… 민용이와 민석이는 생각도 안 해요?’
‘알파도 아닌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
‘박한주도 베타예요!’
‘우강희를 가진 베타지.’
‘……당신이 문제잖아! 씨가 그따위니까!’
그것은 금기였다.
재강원은 로열 알파였지만 그는 어디서도 알파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것이 재강원의 약점이었다. 본인이 뛰어나 봤자 그 뒤를 이을 후계를 가지지 못한 왕은 반쪽짜리일 뿐이다.
‘닥쳐.’
재강원은 화를 숨기지 않았다. 숨 막히는 페로몬에 저항하며 오혜주는 소리 질렀다.
‘절대로 난 못 물러나! 애들은 내가 지킬 거야! 절대 그따위 베타에게 재씨 가문을 줄 수 없어!’
싸움은 매일 밤 계속되었다.
자식들이 들을 수 있는데 상관하지 않고 오혜주는 소리를 질렀고 재강원은 짜증을 내며 집을 나갔다. 민석은 그 소리를 일주일 동안 계속 듣다가 견딜 수 없어 학교로 돌아왔다.
재민용은 퇴원하자마자 외국으로 보내졌다.
경찰이 조사하기 전에 대리인에게 뒤집어씌우고 외국으로 보내 버렸지만 박예주가 화를 내며 인터넷에 글을 올려 버렸고 재수사가 진행되면서 지명 수배가 내려졌다.
민석은 형이 공범이라고 말할까 봐 마음 졸였다. 재강원도 분명히 창고에서 저를 보았는데도 탓하지 않았다. 죄를 묻지 않았다.
재민석의 존재란 겨우 그 정도였다.
‘그래도 알파만 되면, 알파로만 발현한다면 벗어날 수 있어.’
지영은 여전히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태블릿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재민석이 일주일 만에 방으로 돌아왔는데도 인사하거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김지영, 페로몬, 페로몬을 주기로 약속했잖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방은 어두웠고 지영의 책상에 놓인 스탠드와 주방의 간접 등만이 은은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다.
외부의 빛은 창에 드리워진 암막 커튼을 뚫지 못했다.
분명히 말을 걸었는데 지영은 움직이지 않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지영!”
덜컹, 지영이 태블릿을 들고 일어나자 의자가 거친 소리를 내며 밀렸다. 거칠게 취급해도 페로몬을 받는 일이 우선이라 민석은 한 발 다가갔지만 지영은 그 앞을 지나쳤다.
급히 옷을 잡았지만 차갑게 쳐 냈다.
“건드리지 마. 죽여 버리고 싶은 거 참고 있으니까. 말 붙이지 마.”
그대로 지영은 방을 나가 버렸다. 재민석은 기숙사에서도 혼자였다.
* * *
어떻게 움직이든 다 아팠다.
멍이 들어도 괴롭힘당할 때 맞은 곳이 아파도 참을 만했는데 이상하게 작은 아픔에도 앓는 소리가 잘 나왔다. 한주가 ‘윽’ 소리만 해도 우강희가 달라붙어 임신한 부인을 애지중지하는 남편처럼 팔을 부축하며 움직임을 도왔고 모든 일을 도와주었다.
샤워를 도와주겠다는 말은 결사적으로 말렸다.
어쨌든 우강희가 옆에서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을 박예주도 지켜보았다.
심상치 않은 알파임은 보기만 해도 알았고 재강원이 한주를 탐내는 이유 또한 그 때문임을 알았다.
베타에게 알파가 구애하는 모습이 불만이기는 했지만 의외로 용진은 쿨하게 받아들이며 한주에게 조언했다.
“알파가 한번 꽂히면 마음을 잘 바꾸지는 않지만 반대로, 한번 돌아서면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네가 휘어잡아 버려. 그러면 재강원이 배 아파하겠지?”
은근히 즐기는 말투였다. 게다가 수시로 병원에 와 한주를 핑계로 매일 학교 끝나고 오는 우강희를 부려 먹어 음식 심부름을 시키며 살뜰히 이용해 먹었다.
어쩔 수 없이 한주는 퇴원을 앞당겨 기숙사로 돌아갔다.
* * *
우강희와 함께 퇴원해서 학교로 돌아오니 오후 수업 중이었다.
이번 주는 기숙사에서 쉬고 다음 주부터 수업에 참여하기로 했기에 한주는 침대에 누워 매트리스 밖으로 떨어뜨린 발을 까딱였다.
“너 이렇게 수업에 빠져도 돼?”
강희는 한주가 먹을 약을 정리하고 병원에서 가져온 물건을 옷장에 넣었다.
퇴원하는 날이라고 자연스럽게 아침부터 그가 병원에 와서 도와주었기에 오늘이 평일임을 잊었다. 며칠 입원했다고 시간 감각이 둔했다.
강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연간 출석 일수만 채우면 졸업할 수 있어.”
졸업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예전에 문제 일으키지 않고 졸업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학도 관심 없나?’
문득 멀리서 강희를 열렬히 지켜보던 공무원 조은석이 떠올랐다. 강희가 부르지 않으면 다가가지 않으면서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듯이 주위를 맴돌았다.
국가에서 전담 팀까지 두어 관리하는 알파.
“너 졸업하면 공무원 되는 거야?”
“공무원?”
한주의 질문에 되레 황당해하며 강희가 돌아보았다.
“국가에서 널 케어해 주잖아. 네가 미래의 고위 공무원이 될 예정이라 그런 것 아니야?”
“아니, 전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라 그는 웃었다.
국가에서 우수 형질에게 제공하는 서포트 서비스는 그저 목줄을 채워 기르는 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관리하고 통제하기 쉽도록 다달이 일정한 금액이 통장에 월급으로 지급되었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국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
무슨 일이든지.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분란 없이,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살아 달라는 뇌물이었다.
그래서 우강희는 해외에 나간다면 경호라는 핑계로 감시원이 두 명 붙었고, 눈에 띄지 않도록 전담 팀이 항시 감시한다. 우강희라는 알파가 타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이다.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는 한주는 단순히 국가 공무원이 알파를 도와준다고만 생각했다.
“그럼 대학은?”
“당장은 생각이 없어. 돈을 벌 생각이야. 너는?”
“막연히 생각해서…… 어디든 들어가지 않을까.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뭘 하고 싶은지 목표도 없으니까. 엄마는 대학 가지 않는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을 분이고.”
“좋은 분이더라.”
어머니를 칭찬하는 말에 한주는 히죽 웃었다.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학교 한 바퀴 산책하고 올 건데 같이 갈래?”
“오늘 퇴원했는데 쉬지 않고?”
“병원에 계속 있었더니 몸을 움직여야겠어.”
“그럼…… 승마장 갈래? 너는 못 타겠지만 말은 볼 수 있어. 동물 좋아하지?”
“말? 좋지!”
반가움에 급히 방을 나서려다가 갈비뼈에 통증이 와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급히 옆으로 온 강희는 심각한 얼굴로 한주를 지켜봤지만 곧 같이 방을 나섰다.
그의 등쌀에 다시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 * *
승마는 클럽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회원이 아닌 학생들도 자기 말만 있으면 탈 수 있었다. 학교 구경을 왔을 때 승마장을 와 본 적이 있을 뿐인 한주는 교관이 우강희의 말을 데리고 나오자 감탄했다.
늘씬하지만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검은 말이 걸어오는 모습만으로도 절로 입이 벌어질 만큼 멋졌다.
강희가 손을 뻗자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비비며 눈을 깜빡거리는 모습이 마치 애교 부리는 애인 같았다.
“와, 예쁘다.”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고 그의 옆에 서서 한주는 바라보기만 했다. 강희는 한주의 손에 당근을 쥐여 주었다.
강희만 보고 있던 말이 고개를 쭉 빼서 한주의 손에서 당근을 빼앗아 가더니 한입에 먹어 버렸다.
“우와…….”
“이름은 베라야. 우아하고 예의를 알지.”
“진짜 멋져.”
우강희는 한 바퀴 타고 오겠다면서 훌쩍 말에 오르더니 가볍게 트랙을 돌았다. 멀리 가지 않았고 종종 고개를 돌려 한주를 확인했다.
승마가 취미라는 말을 했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강희의 표정을 보니 정말 승마를 좋아하는구나, 느껴졌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교관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우강희 님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요. 마치 뽐내며 구애하는 공작새 같으십니다. 혹시 저분, 요즘 연애하시나요?”
별 뜻 없이 한 말이지만 한주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 *
한주는 먼저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시로 돌아보며 미소 짓는 강희를 보고는 소문에 둔감한 교관도 결국 알아차리고 말았다. 교관은 연신 한주를 힐끔거렸다.
강희에게 더 타고 오라고 말하고 쫓아오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처럼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그중에 지영이도 있었다.
“한주야! 퇴원한다고 들었는데 벌써 기숙사로 돌아온 거야? 괜…… 흠, 괜찮아?”
무심코 신나게 뛰어와 반겼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뻔히 읽히는 표정에 한주는 웃고 말았다.
“나중에 노트 빌려줘. 너 수업 빠졌을 때 내 노트 빌려줬었으니까 갚아.”
“……네 필기는 하나도 도움되지 않았어.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지영은 한주의 얼굴을 살폈다. 입원 초기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푹 쉬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면서도 우강희와 사귀어서 그런 건 아닐까, 괜히 생각이 삐뚤어졌다.
한주의 얼굴을 살피던 지영의 눈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한주의 오른쪽 귀에 검은 피어스가 있었다.
“같이 가. 혼자 가다가 쓰러질 수 있어.”
강희가 곧 따라왔다. 그를 본 지영의 눈이 커졌다.
그의 머리 스타일이 어떻게 바뀌든 관심 없었지만 피어스가 빠진 우강희의 귓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한주의 귀에 있는 것과 디자인이나 색이 똑같았다.
“조심히만 움직이면 아프지 않아.”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우강희는 한주의 옆구리를 보았다. 금이 간 갈비뼈를 투시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시선이 뜨거웠다.
“보지 마.”
속살을 보인 것처럼 한주는 강희를 경계하며 몸을 틀었다. 그는 서둘러 따라갔다.
“조심해.”
다정한 모습이었다.
한주는 누구에게도 스스럼없이 행동했지만 반대로 곁을 잘 주지 않기도 했다. 낯을 가리는 성격과는 달랐다. 일견 평소의 한주와 다르지 않았지만 오래 알아 온 지영에게는 우강희에게 얼마나 바운더리를 허용했는지 보였다.
두 사람이 사귄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게 되니 숨이 막혔다. 기다리겠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타인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강희의 손을 피하며 한주가 고개를 드니 지영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지영이는?”
“기숙사로 들어가던데.”
“그래?”
차 버린 당사자라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강희는 한주의 한숨을 보지 못한 척 방으로 향했다.
* * *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 보니 사골 국물이 든 페트병이 세 통 들어 있었다. 퇴원해서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박예주가 강희에게 커다란 타폴린 백을 줄 때는 그저 옷이나 이불이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사골국이었다.
한주는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통증이 있으니 먹을 생각이 들었다.
“세 통이면 양이 많은데 먹다가 상할 거 같네.”
“얼리라고 하셨어. 냉동실 공간 충분해.”
“하나는 지영이 주면 돼. 걔도 갑자기 뼈가 자라서 먹으면 좋을 거야. 나머지 한 통은 얼리면 되고.”
“나도 요즘 무릎이 쑤셔.”
냉큼 강희가 말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 말에 눈이 가늘어졌다.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체격이 너무 출중해서 며칠은 굶어도 될 몸이었다.
“양심 좀 챙겨라. 부러우면 내 거 같이 먹어. 뭘 지영이 주는 것까지 질투를 해.”
뺏어 가지 않게 미리 가져다주려는데 강희가 페트병을 잡았다. 손아귀 힘에 페트병이 홀쭉해졌다.
“야, 터져. 놔. 왜 이런 것으로 욕심을 부려?”
“욕심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는 널 좋아하잖아. 받아 주지 못하니 정리할 수 있게 거리를 둬.”
“그래도 줄 거야. 너와 사귄다고 해서 분위기가 더 껄끄러워졌는데…….”
강희의 손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꽉 잠가진 뚜껑을 날려 버렸다. 팍, 페트병이 내용물을 터뜨렸다.
얼굴과 옷에 튀고 한주의 머리카락을 타고 뽀얀 국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세게 내용물이 뿜어졌는지 페트병 한 병을 꽉 채우고 있던 사골이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야! 무슨 짓이야? 아깝게! 아무리 지영이를 주기 싫다지만 너무하잖아!”
화를 내는데 그의 얼굴이 붉었다. 새빨간 개양귀비의 물이 옮겨 온 듯 강희의 귀와 볼이 붉게 물들었다. 제 얼굴을 타고 흐르는 국물을 느끼지 못하며 한주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 왜…….”
그의 열이 한주에게도 옮았다.
강희의 입술에 꾹 힘이 들어갔고 그 미세한 변화를 한주도 보았다. 가끔 보는 강희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한주는 몸을 뒤로 물리며 무조건 부정했다.
“아니야, 하지 마. 도대체 뭐에 또 버튼이 눌려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사귄다고 말했어? 나와 사귄다고?”
“아, 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키스도 하고 피어스도 나눠 꼈지만 그와 사귀겠다고 정확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는데 한주의 입에서 그와 사귄다는 말이 나왔다.
강희는 한주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지영이를 단념시키려다 보니까 말이 그렇게 나간 거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야.”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뒤로 물러났고 등으로 냉장고가 닿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오묘해지는 분위기에 발가락이 말렸다.
점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페로몬을 느낄 수 없고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왜 베타나 오메가들이 알파에게 달려드는지 느껴졌다. 강희가 작정하고 한주에게 직진하자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이 한층 가까워졌고 숨이 얼굴에 닿았다. 코가 먼저 스치듯이 닿으며 강희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틀었다. 입술이 스치지 않았는데도 입술이 만져지는 것처럼 존재가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갈비뼈 눌리지 않게 조심해.”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강희는 대부분 이렇게 시작했다. 감질나게 만들며 더 불을 지폈다. 그가 더 좋아하는데 여유를 부리며 한주가 다가오도록 조절했다.
“아, 우강희, 진짜 싫어.”
고개를 내밀어 강희의 입술에 입술을 눌렀다. 단단한 입술은 한주가 움직이는 대로 눌려 모양이 틀어졌다. 사골 국물의 밍밍한 맛이 났다.
잠시 틈을 주며 한주는 그에게 요구했다.
“입술 벌려 봐.”
먼저 다시 닿기 전에 강희가 움직였다. 냉장고를 팔뚝으로 지지하며 한주의 입술을 삼켰다. 쿵, 뒤통수가 냉장고에 약하게 부딪혔다.
“음!”
단단하지만 매끄러운 살덩이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숨구멍을 막듯이 안쪽 깊은 곳까지 살을 밀어 넣었다. 구멍을 가득 채운 질량감, 좁은 곳에서 자신의 영역을 주장하듯이 구석구석을 핥는 움직임이 한주를 자극했다.
조금의 상처에도 찢어지는 연약한 살이 얇디얇은 내벽을 문지르며 입천장까지 긁었다. 목구멍에서 절로 소리가 울렸다.
한주는 고개를 밀며 입을 한껏 벌려 강희의 혀를 감았다. 퍼뜩 떨리는 살덩이가 자극에 단단해졌다.
혀 밑의 얇은 막을 문지르자 불룩한 혈관이 느껴졌다.
꿀떡, 군침을 삼키는 강희의 움직임이 한주에게도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닿아 오던 그의 기세가 달라졌다.
“한주야.”
쉰 목소리로 이름이 불리자 한주는 소름이 끼쳤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며 인터폰이 켜졌다.
- 우강희. 한주 왔다면서.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인터폰에서 이성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방에 있지?
- 우강희가 방으로 가는 거 봤다고 했어. 한주도 함께 있겠지?
차원구와 황치운도 와 있었다.
한주는 얼른 강희의 어깨를 밀었다. 끄응, 아쉬워하는 그의 신음이 제법 가슴을 간지럽혀서 눈을 피했다.
“씻고 나올게.”
욕실로 도망치는데 그의 손이 한주의 목을 쓸 듯이 스쳤다. 여린 피부를 간질이는 잠깐의 순간에 화끈 불이 튀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한주는 욕실 문을 닫았다.
* * *
막상 샤워하고 보니 입을 옷이 없었다. 바지는 젖지 않아서 대충 다리에 끼워 넣었다.
거울을 보니 샤워해서인지, 아니면 사골 국물의 기름 때문인지 피부가 반지르르해 보였다. 상관없는데 중간에서 끊긴 입맞춤이 생각났다.
“앞으로 어떻게 참지?”
사귀는데 같은 방을 쓰기까지 한다. 혈기 왕성한 청소년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자제력이 없고 충동적이라며 어른들이 걱정하는 나이였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술 수련이 소용없었다. 방어하고 공격하며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은 배웠는데 그것은 상대가 한주를 거부하거나 공격할 때였다.
강하게 여린 살을 문지르며 입 안을 건드리던 느낌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서로 마음이 같은데 어떻게 방어를 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좋은데.
“오늘 밤부터가 큰일이네.”
다시 양호실로 가서 자야 하나, 고민하면서 한주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욕실을 나왔다.
“어, 한주야! 뭘 했는데 목욕을…….”
“어, 나왔…….”
“드디어 퇴원 파티를…….”
한주를 돌아보면서 말을 하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바지만 입고 욕실에서 나온 한주는 그들이 보든 말든 옷장을 열어 새 옷과 속옷을 꺼냈다. 바지는 젖지 않았지만 깨끗이 씻었으니 얼른 새걸로 갈아입고 싶었다.
욕실로 다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강희가 한주를 덥석 끌어안았다.
“눈 돌려.”
한주의 헐벗은 상체를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지키려고 그가 으르렁대며 경계했다.
푸핫, 원구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하나둘 웃기 시작했다.
“……단단히 빠졌네.”
“와, 어쩌냐. 박한주는 너 거절할 생각만 할 텐데.”
“너네 곧 계약대로 한 달 되어 가지 않아?”
“야, 우강희가 차이는 꼴을 다시 보겠네. 동영상 찍어야지.”
웃음이 이어지며 그들은 강희를 놀렸다. 놀리든 말든 강희는 한주를 안고 욕실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움직이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자 한주의 손에 들린 티셔츠를 가져가 대신 입혀 주려고 옷에 팔을 끼워 주었다.
“팔 들어.”
쑥, 머리에 옷을 끼우고 한주의 팔을 소매에 집어넣으려고 고군분투했다.
제법 귀여웠다.
별거 아닌 노출에도 기겁하며 경계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한주는 강희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쳤다.
웃으며 놀리던 친구들의 소리가 뚝 그쳤다. 그의 어깨 너머로 경악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주는 선언했다.
“우리, 사귀기로 했다.”
강희가 그대로 한주를 꼭 껴안았다. 따끔하게 찌르는 듯 갈비뼈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한주는 밀어내지 않았다.
“아, 역시?”
“……이겼어. 나중에 정산해.”
“그래도 박한주, 네 뚝심을 믿었는데 너마저 우강희에게 넘어가냐.”
자기들끼리 내기를 했는지 항의가 들려왔지만 그 후 축하 인사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