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재
동백제가 열리는 날이 왔다.
“동백제에 나도 갈게.”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일어서는 한주를 보며 강희는 못마땅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계속 과보호했다.
“어차피 앉아 있을 뿐이잖아.”
“힘들 거야.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움직일 때마다 조심하고 있고.”
“박한주.”
“가자.”
툭, 강희의 어깨를 치고 한주가 먼저 방을 나섰다. 한주의 몸이 좋지 않은 이상 그도 고집을 막을 수 없었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주말까지 쉴 수 있어 좋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침대에만 누워 요양하자 몸이 근질거렸다.
“어, 박한주. 너도 대강당 가게?”
차원구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들을 반겼다.
“못 갈 정도로 환자는 아니야.”
“환자야.”
강희가 팔을 잡아 주려 하자 한주는 몸을 피했다. 급히 움직여서 통증이 올라와 인상을 찡그리자 그의 표정이 변했다.
“가지 마. 참석하지 않아도 돼. 같이 있어 줄 테니 방에 있자.”
“절대로 갈 거야.”
일그러지는 원구의 표정을 보고 한주는 더 단호히 말했다.
강희가 곤란해하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만큼 절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자기도 모르던 삐뚤어진 마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강희는 좋다니 어쩌겠는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성진과 황치운이 왔다.
강당 앞에서 무열이 학생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밤에 조용히 병문안을 온 이후 처음 만났다. 한주를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담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픈가?”
“얘네가 입원했을 때부터 안색이 좋지 않았잖아. 너네 일에 책임을 느끼나 보지. 관계는 없어도 담임이니까.”
원구와 치운은 사건을 제대로 모르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한주는 무열에게 괜찮다는 말을 하거나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한주가 잡혀가고 뒤늦게 무열이 강희를 찾아가 창고로 올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
무열이 재강원을 얼마나 열렬히 생각하는지 마음은 짐작하지만 한주를 부정하던 모습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을 원망하거나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다.
그 감정을 이해하는 것과 위험을 알고도 한주를 불러낸 일은 별개였다.
무열을 지나쳐 한주는 우강희와 함께 자리로 향했다.
학생들 사이로 민석이 보였는데 홀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 나오고 있네.”
“응?”
“아니.”
많은 학생이 반별로 의자에 앉아 무료하게 동백제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반 알파들은 일주일 만에 본 한주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한주는 그들을 둘러보다 강희에게 물었다.
“재민석은 학교에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 아까 봤는데 없네.”
“그는 신경 쓰지 마.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나 보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나?”
강희가 창고에서 재민석을 마주치지 않았기에 그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주도 굳이 범인 중 하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행사가 강제 참가는 아니니까.”
한주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고 자리에 앉았다.
며칠 전부터 민석이 기숙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지만 수업에 참가한 것은 오늘부터였다고 들었다. 창고에서 노려보며 미워하던 모습이 불안한 기억으로 남았다.
지독하게 미워하며 원망하던 얼굴.
독기라고 느껴질 만큼의 미움을 드러냈다.
며칠이 지났다고 사라질 마음이 아니다. 오히려 조용해서, 폭탄이 터지기 전의 느낌이라 더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3학년 때도…….”
3학년 2학기부터 재민석은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유학 준비나 인턴십 등으로 빠지는 학생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때때로 기숙사에서 한밤중에 민석이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창백한 민석은 힘든 일을 겪은 사람처럼 전보다 마르고 눈가가 퀭했다. 흡사 유령처럼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의 재민석이 상태는 나았지만 분위기가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졸업식 때도 재민석은 참석하지 않았지.’
참가하지 않은 덕분에 민석은 운 좋게 화재를 피했다.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자신은 죽어 버렸으니까.
-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재강원 이사장님이 들어오십니다.
강당 안에 아나운스가 퍼지며 연단으로 재강원이 올라오면서 재강원 고등학교 창립자를 기리는 기념 행사가 시작되었다.
* * *
재강원 고등학교는 올해 유례없는 구설에 휘말렸다. 학교 폭력은 물론이고 재강원 이사장의 장남이 학생을 납치·폭행했다. 그들 세계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도 외부에 알려져 사건 처리가 되기까지 하니 말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 재강원은 동백제를 강행했다.
재강원 고등학교는 그런 일에 휘둘리지 않으며 건재하다고 알려야 했다.
최근에 TV에 많이 나오는 유명 인권 인사와 차기 외교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강연이 준비되었고 졸업생들과 학부모도 초대되었다.
재강원 고등학교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은 인맥에 도움이 되었기에 다들 가능한 한 학교 행사에 참석했고 학교에서도 초대장을 보내며 관리했다.
많은 사람들로 강당 안은 북적였다.
- 모두 발언이 있겠습니다. 재강원 고등학교의 창립자의 손자인 재강원 이사장님이십니다.
연단 위에 앉아 있던 재강원이 일어나자 주위의 연사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학생들도 분위기에 동조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 앞에 선 재강원이 강당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시선이 잠시 한주에게 머물렀고 우강희는 견제하며 재강원을 노려보았다.
알파 오메가의 부부들 사이에서 따로 애인을 두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혼외자가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베타라고 자기 자식을 버리고 뒤늦게 나타나 다시 데려가려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금전적으로 어려움 없이 한주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게 된다고 해도 그 정도는 우강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한주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였다.
최근 그는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주와 어떻게 하면 계속 있을 수 있을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려움 없는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하고 그런 돈을 장기적으로 빠르게 벌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
내일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고 무의미하게 보내던 우강희는 하루하루가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왜?”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강희의 시선이 뜨거워 한주는 물었다.
그는 한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앞뒤로 같은 반 학생들이 줄지어 앉아 있고 양옆으로 다른 반 학생들도 있었다.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한주는 몸을 움츠렸다.
“너 뭐 하려고!”
높아진 목소리에 황급히 손으로 가리자 강희가 속삭이듯이 손을 올리며 귀의 피어스를 핥았다.
“읏! 너!”
“떠들면 사람들이 볼 거야.”
“너…….”
얼굴이 빨개져 강희를 노려보는데 뒤에서 불쑥 차원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적당히 해라. 뒤에서 다 지켜봐야 하는 고충도 좀 생각해. 눈이 썩고 있어.”
놀려도 강희는 평온하게 마이웨이였다. 그는 한주의 손을 잡아 깍지를 껴서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
“야!”
손을 놔주지 않았다. 손을 빼려다가 갈비뼈가 움직여 통증이 올라왔다.
“아, 진짜.”
한주는 미간을 좁히며 의자에 등을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손을 빼려 했다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원하는 대로 했겠지만 한주도 강희의 고집을 적당히 받아 주고 있었다.
그런 허락 때문에 그가 더 그렇게 행동을 하는 걸 알면서도.
강희는 깍지 낀 한주의 손등을 엄지로 살살 어루만지며 정면을 보았다.
재강원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주를 데려가지도 않았지만 자기 아들이 우강희와 잘되어 가는 모습을 주시했다.
강희의 눈과 마주치자 재강원은 인사말을 시작했다.
- 재강원입니다. 재선철 조부님이 재강원 고등학교를 창립한 지 32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연단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주도 올려다보았다.
베타이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생물학적인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어머니의 애정으로 베타여도 괜찮다며 구김 없이 자랐지만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왜 알파가 아니냐고 탓했다.
아버지라는 재강원을 만나고 싶어 재강원 고등학교에 들어와 알파가 되려고 버텼다. 가지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것을 좇은 상처뿐인 삶이었다.
우강희를 만나 깨달았다.
스스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사람이고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그가 한주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에 따라 재강원의 태도가 변하자 아버지라는 사람이 참 작게 보였다. 아무리 거대한 재씨 가문의 머리라도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일 뿐이었다.
알파든 오메가든 베타든 페로몬을 내보낼 수 있는 차이만 있을 뿐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형질로 알파, 오메가, 베타로 나뉜 이후 사람들은 흥분했고 좌절했으며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 치고 포기하기도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유전적인 형질은 스스로 정할 수 없지만 이후의 삶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형질로 좀 더 유리할 수는 있지만 딱 그 정도일 뿐이다.
한주는 재강원을 보며 그것을 깨달았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고 영향을 받지 않는, 페로몬 무감증을 가진 한주에게는 그저 다 똑같은 사람이었다.
왜 저에게만 기적적으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성공했다. 한주는 재강원을 봐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불, 불이야!”
강당 한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불이야! 가드! 소화기 가져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몇몇이 일어나 소리 나는 곳을 보았다. 강당의 입구에서 몸집을 키운 붉은 불길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당황하며 소화기를 찾았고 학교 관계자들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소리쳤다.
“스프링쿨러가 작동할 겁니다! 침착하세요. 비상구로 안내할 테니 직원의 지시에 맞추어 신속히 움직여 주시기 바랍니다.”
“불! 여기도 불났어! 비상구가 막혔어!”
다른 입구에서도 불이 피어올랐다.
학생들은 일어서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화재에 강한 자재들로 지어져 마른 나무에 불붙듯이 손쉽게 불길이 붙을 리 없는데 마치 잘 닦여진 길을 따라 타오르듯이 인위적으로 번져 갔다.
“불! 불이야!”
“여기서 나가야 해! 도망쳐!”
연기가 강당 천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매캐한 냄새와 더운 공기에 사람들은 공포를 느꼈다. 알파든 베타든 다들 당황하며 도망치기 위해 비상구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문은 잠겨 있었다.
“사, 사람 살려!”
“이 문 열어!”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문을 흔들며 열려고 했지만 살려고 뒤따라오던 사람들에 밀리면서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밀어도 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이 잠긴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길은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갔다. 내연성 자재들로 이루어졌지만 그 위를 꾸미고 있는 인테리어 제품들은 그렇지 않았다.
보기 좋게 꾸며진 강당 벽에는 불이 붙기 쉬운 커튼과 자재들이 있었다. 불길은 쉽게 옮겨붙어 더 크기를 키웠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알파들이 내보낸 페로몬 때문에 패닉은 더욱 심해졌다.
“화재는 졸업식이었는데…….”
한주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분명 대강당의 화재는 3년 뒤의 졸업식에서 일어난다. 그 전에는 다른 큰 사건이나 화재는 없었다.
“설마…….”
3년 뒤의 화재가 지금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와 양상이 같았다.
문들이 다 막혔고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며 탈출하지 못하고 천장의 자재들에 깔려 한주는 죽는다.
* * *
“사람 살려!”
“이게 뭐야?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난 이런 곳에서 끝날 수 없어!”
사람들은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모르고 이리저리 달렸고 비상구로 몰렸지만 잠겨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불길은 거세지는데 믿었던 스프링쿨러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연단 뒤로 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도에 재강원은 급히 연단을 내려가려는데 학생 한 명이 길을 막았다. 하얀색의 기름통을 들고 재강원이 가야 할 비상구 주변에 내용물을 뿌리고 있었다.
휘발유 냄새가 강하게 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학생을 알아보았다.
“저 학생, 재민석 군 아닌가? 이사장님의…….”
“어, 설마 이사장님의 아들이 왜? 저거 기름이야?”
“재민석 군이 불을 질렀어?”
사색이 된 재강원이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재민석!”
고함을 들었을 텐데 민석이 태연하게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딸칵, 작은 부싯돌 소리와 함께 지포 라이터 위로 불꽃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막는다고 덤볐다가 지포 라이터가 떨어지면 휘발유에 불이 붙어 도망칠 마지막 희망조차 잃게 된다.
“재민석! 이게 무슨 짓이냐?”
“없애려고요.”
아버지의 호통에도 민석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재강원의 앞에서 보이던 주눅 들고 눈치 보며 겁을 먹던 비루한 모습이 아니었다.
팟, 화재로 강당 안의 전기가 끊겼다.
낮이라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있지만 민석이 서 있는 비상구 앞은 어두웠다. 들고 있는 지포 라이터의 빛에 의해 민석의 얼굴이 같이 일렁였다. 빛에 따라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라이터를 꺼!”
“중간에 그만둘 생각이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어요. 차라리 없는 게 나아요. 이런 학교, 알파들 따위. 아예 싹 다 없애 버려야 해요.”
재민석은 보란 듯이 라이터를 휘발유 위에 던졌다. 바닥에 닿자마자 폭발하듯이 라이터의 불이 옮겨붙어 불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위험한 순간이고 불이 제게도 옮겨붙을 수 있는데도 민석은 하하, 마른 웃음소리를 냈다.
“멍청한 자식!”
“그 멍청한 자식이 바로 당신 아들이야!”
미친 듯이 웃는 재민석을 황망히 보며 재강원은 페로몬을 이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기가 막혀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민석을 잡지 못하고 타오르는 불길만 보았다.
나이 들어 언젠가는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죽음이 코앞에 있었다.
* * *
불길이 거세지며 사방으로 번져 갔다. 마치 살아 있는 동물의 움직임처럼 걷잡을 수 없이 부피를 키우며 빠르게 퍼져 갔다.
“아악! 사, 살려 줘!”
움직이다가 옷에 불이 붙은 학생에게 사람들이 달려들어 입고 있는 웃옷을 벗어 두드렸다.
불에 공기는 더워지며 숨쉬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점점 강당 안은 연기가 차올라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목을 태웠다.
피부와 머리카락을 태우던 뜨거움이 되살아나 한주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홧홧한 열기가 피부에 느껴질 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고 불타는 천장에 깔려 죽게 된다.
죽는다.
졸업식에서도 화재 때문에 한주는 죽었다. 빠져나갈 수 없어 불에 타 죽게 된다.
“박한주!”
손을 잡아채는 힘에 한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강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파악하고 있었다.
차원구와 황치운, 이성진이 옆을 지키며 패닉에 빠져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부딪치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비명이 난무하고 고함을 지르고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밀치고 때리며 사람들은 이성을 잃었다. 지옥이었다.
“문에 사람들이 몰려서 열 수 없잖아! 좀 비켜야 뭘 하지!”
황치운이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고자 문으로 향한 사람들의 인파가 오히려 막아 버린 형태였다. 잠겨 있다 해도 열 방법은 많았지만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시도할 수도 없었다.
강희는 한주의 손을 잡아끌며 문을 향했다.
“입구로 가 보자.”
그의 리드로 친구들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다가가도 사람들에 막혀 문에 닿을 수 없었다.
황치운과 차원구, 이성진이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냈지만 살고자 하는 저항 때문에 싸움에 휘말렸다. 이성을 잃은 알파들은 더욱 포악해졌고 본능적이어서 위험했다.
“죽을 거야…….”
신음 같은 목소리에 우강희는 한주를 돌아보았다. 창백해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주가 불을 보고 떨고 있었다.
“여기서 죽었어. 나도, 너도……. 그때는 3년 뒤의 졸업식이었는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은 평소의 강건한 한주가 아니었다.
“불 공포증인가.”
그는 한주를 끌어안았다.
“보지 마. 나한테만 집중해.”
말하고 보니 언젠가 한주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창고에서 패닉에 빠진 우강희가 페로몬을 폭발시키자 한주가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페로몬을 조절하라고.
“페로몬.”
강희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았다.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며 난폭해진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이 내보낸 페로몬이 뒤섞이며 이성을 잃은 사람들을 더 자극했다. 열기와 연기에 실려 페로몬이 사방으로 뒤섞였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알파들의 공포에 질린 페로몬 때문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안고 있는 몸이 그보다 더 떨고 있었다.
한주를 지켜야 한다.
한주를 지키고 이 화재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우강희가 가지고 있었다.
“박한주, 날 봐.”
얼굴을 감싸며 한주의 고개를 들었다.
꼭 감긴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며 그를 보았다. 숨을 허덕이며 한주는 이 상황을 힘들어했다.
“페로몬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거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한주는 눈만 껌뻑였다.
“약속했지. 내가 폭주하면 너만이 날 막을 수 있어.”
“뭐?”
“페로몬을 제어하겠지만 집중력을 놓치면 위험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제길.”
거칠게 머리를 헝클지만 우강희는 다시 한주를 보았다.
“이대로 있으나 페로몬을 제어하다 실패해서 사람들이 더 패닉에 빠지나 위험하긴 마찬가지겠지?”
자신에게 확인하듯이 우강희는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페로몬 제어를 놓치면…… 기절시키는 것만으로도 진정하지 않으면 죽여야 해. 그래야 내 페로몬이 멈추고 너와 여기의 사람들이 살 수 있어.”
우강희를 죽인다.
그제야 한주는 정신이 들었다. 시야가 또렷해지며 긴장한 우강희의 얼굴이 보였다.
이 상황에서도 그는 한주를 보며 웃고 있었다. 절 죽이라면서 웃는다.
한주도 우강희의 페로몬이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었다. 두 번이나 목격했다. 호텔에서의 일은 사건이 끝난 후 어떤 파급력으로 얼마나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는지 직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서 알았다.
알파, 오메가, 베타를 가리지 않고 밀폐된 공간 안의 모든 사람을 자극해 200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한 번은 창고에서 보았다.
과연 그 힘이 강당 안의 패닉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도 통할까.
그때와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있겠어?”
“해야지.”
우강희의 페로몬, 그것은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의 칼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고 사랑하는 외할아버지는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 그저 독이었고 폭탄이었지만 이제는 이용해야 한다.
각오를 읽고 한주는 우강희의 양손을 잡았다.
“해.”
한주는 그의 시선을 단단히 붙잡으며 약속했다.
“옆에 있을게. 위험해지면 내가 막아 줄게. 널 죽게 놔두지 않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우강희를 향해 무릎 꿇더라도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박한주였다.
“널 믿어.”
깊은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처럼 단단했다.
강희는 한주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저 입술이 닿는 것뿐인데 주위의 아우성과 비명이 멀어지며 마치 주변에 막을 치듯이 한 겹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감각이 둔해졌다.
뜨거운 입술을 느끼며 우강희는 눈을 떴다.
한주의 손을 잡고 문에서 멀어져 강당의 가운데로 향했다. 그나마 중앙이 사람도 적었고 불길도 아직 미치지 않았다.
“차원구, 이성진, 황치운. 따라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이성진이 경고했다.
“실패하면 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야.”
차원구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턱에 힘을 주었다.
“우리를 제외하고 움직여야 해.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한데 이 난장판에서 할 수 있겠어?”
“해야지.”
강당의 중앙에 선 우강희의 주위로 차원구, 황치운 이성진이 섰다. 페로몬을 제어할 때의 외부 방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한주는 그의 앞에 서서 양손을 맞잡았다.
“사람들을 페로몬으로 움직일 거야. 문에서 떨어뜨리고 문을 열도록 조종하겠지만 그 정도로 섬세하게 되지 않으면 너희가 가서 문을 열어야 해. 가능한 한 빨리 문을 열어서 사람들을 내보내. 화재라는 눈에 보이는 위험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고, 그래서 더 위험해질 수 있어.”
강희의 지시를 들으며 한주는 손을 꽉 잡았다. 대답하듯이 그도 손에 힘을 주었다.
“한다.”
우강희의 페로몬이 아비규환의 강당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한주는 우강희를 바라보았다.
주변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 듯 그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만을 보면 그저 이곳이 기숙사 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가 정말 페로몬을 내보내고 있는지 아닌지 베타는 알 수 없어야 하는데 한주는 그의 페로몬이 어떻게 퍼져 나가는지 볼 수 있었다.
아우성치며 비명을 지르고 난폭하던 사람들이 우강희를 중심으로 둥글게, 수면 위의 동심원처럼 파동이 퍼지듯이 뚜렷하게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강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변화를 보였다. 조금 전까지 소리를 지르던 사람이 갑자기 실이 끊어진 사람처럼 표정이 풀어지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일순의 변화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느낌이 들지 않아 한주는 소름이 돋았다.
우강희의 페로몬 영향력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영향을 받으며 변하는 과정을 보자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그의 페로몬에 저항하며 몸을 떨던 알파들도 결국 이기지 못하고 잠식당했다. 페로몬이 퍼져 나감에 따라 강당 안의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몇몇 알파의 저항하는 신음이 들리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서 있는 사람은 한주와 우강희, 그리고 지켜 주는 황치운, 차원구, 이성진이 전부였다. 그들 역시 우강희의 페로몬을 알면서도 정말 성공하자 놀랐다.
공무원 조은석은 우강희를 메시아에 비유했다.
과거 메시아들을 ‘킹’ 알파나 오메가였을 거라고 추측하며 우강희는 ‘킹 알파’라고 했다.
그때는 그저 그 정도 급으로 대단하다는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우강희를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킹 알파.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는 왕, 그 힘과 영향력은 신에 가까웠다.
경이로웠다.
우강희는 천천히 눈을 떠 한주를 보았다.
“문을 열어.”
명령과 함께 차원구, 이성진, 황치운이 그나마 불이 덜 붙은 문을 향해 뛰었다.
“박한주, 우강희를 지켜!”
잠긴 문을 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다가 한주는 우강희를 확인했다.
절 보며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지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만 버텨.”
한주도 미소를 지으려는데 바람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바로 코앞에 무열이 있었다.
그 몸이 퍽, 소리와 함께 흔들렸고 꺾인 꽃대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뒤에 서 있던 재민석이 보였다.
페로몬 차단 마스크를 쓴 재민석이 각목을 들고 부들부들 떨며 노려보고 있었다.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네 탓이야, 박한주! 너만 없으면!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재민석이 소리를 지르며 한주를 향해 달려오려고 발을 뗐다. 각목을 들어 올렸다.
그때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에 맞은 듯이 재민석의 몸이 한 번 경련하더니 뒤로 넘어갔다. 털썩 쓰러지며 사지를 트는 발작을 일으켰다.
“아아악!”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우강희밖에 없었다.
불길한 생각에 한주는 그를 돌아보았다. 재민석의 폭력으로 우강희의 제어력이 흐트러지면 강당 안은 지옥이 된다.
“괜찮아.”
그는 웃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키스할 거야.”
그는 한 번도 제어를 놓치지 않았다.
‘이 사람 때문이었구나.’
거대한 산처럼 침착하게 제 페로몬을 제어하는 우강희를 보며 한주는 왜 자신에게 두 번째 삶이 주어졌는지 깨달았다.
불길이 치솟는 졸업식 화재 현장에서 우강희는 울며 중얼거렸었다.
‘널 일찍 만났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시간을 되돌린 사람은 우강희였다. 그가 한주를 다시 만나길 바랐다.
* * *
- 양평의 한 고등학교에서 화재가 일어났습니다. 행사를 치르고 있던 강당에서 불이 시작되어 많은 인명 피해가 예상되었으나 다행히 학교 측에서 신속하게 대피시켜 사상자 없이 화재가 진화되었습니다. 이 고등학교에서는 평소 재난 대피 훈련을 꾸준히 해 침착하게 학생들을 대피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저녁,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화재가 뉴스에 짧게 소개되었다.
큰 인명 피해 없이 화재는 진화되었고 사람들은 그저 뉴스에 나온 대로 대피 훈련의 성과라고 생각했다.
〈베타 리턴〉 본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