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기적
- 일주일간 화재 처리를 위해 휴교하기로 했습니다. 몇몇 학생들이 전학을 결정했습니다.
학교 측의 보고에 재강원은 미간을 좁혔다.
“피해 학생들은?”
- 페로몬으로 충격을 받은 학생들 학부모와는 합의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
재강원은 한숨을 쉬었다.
그날 강당에서 불이 났을 때 방화를 저지르는 재민석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재강원 고등학교 이사장의 아들이 방화했다. 스프링쿨러를 망가뜨리고 문을 잠갔다. 강당 안의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재강원에게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지만 조만간 그의 이사장 퇴임 건으로 이사회가 소집될 예정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나마 우강희가 나서서 도와주었기에 죽은 사람 한 명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재강원 자신조차 목숨을 구원받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을 뜨니 본관 밖의 운동장에 서 있었고 동백제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멍하니 타오르는 대강당을 보고 있었다.
기억의 바로 직전에 그들이 서 있었던 곳이 불타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고 결국 그 일은 적당히 무마되었다.
“원하는 대로 합의해 줘.”
- 네. 알겠습니다.
학교를 폐교한다는 말도 나왔지만 졸업생들과의 인맥을 무시할 수 없는지 학부모들은 한발 물러나 합의하기로 했다.
민석은 감시자를 붙여 별장으로 보냈다. 사실상 감금이었다.
오혜주는 아들 둘이 그렇게 된 일이 재강원의 탓이라며 히스테리를 부렸고 마주치기만 하면 소리를 질렀다.
학교의 상황이든 아들들의 범죄든 아내의 히스테리든 재강원에게는 큰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사소한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재강원은 차에서 내렸다.
양평 외곽에 있는 재활 병원이었다. 긴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이 장기간 입원하기 위해 찾아오는 병원이었다. 간병인들이 휠체어를 밀며 환자들의 산책을 돕고 있었다.
재강원은 그들에게 잠시 시선을 준 후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매일 이 병원에 방문했다.
3층의 동남향으로 창이 나 있는 1인실 병실은 비어 있었다. VIP 병실이 아닌 그저 장기간 입원한 환자들을 위해 작게 꾸며진 1인실이었다.
빈 병실을 본 재강원이 급히 복도로 나오자 그를 알아본 간호사가 환자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오셨어요. 이무열 씨는 7층 하늘정원에 가셨어요.”
재강원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당장이라도 서울의 재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이무열이 극구 반대했다.
극구라는 단어는 온건한 표현이었다.
무열은 서울로 데려가면 병실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재강원을 협박했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 목숨으로 협박하는 모습이 짜증 났지만 무열의 눈에 서린 차가움에 강제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화재 이후 이미 그의 앞에서 두 번이나 자해했다.
서슴없이 자신의 목동맥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재강원이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정말 죽을까 봐 겁이 나 무열을 옮길 수 없었다.
조잡하게 꾸며진 하늘정원은 정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저 벤치만 놓여 있고 지붕이 없는 옥상에 불과했다.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아래는 환자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무열은 휠체어에 앉아 밖을 보고 있었다. 난간이 유리 벽으로 되어 있어 밖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한낮의 햇빛을 모자도 없이 받고 있었다.
그늘을 찾아 구석진 화단에 앉았던 간병인이 재강원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누가 보면 재강원이 간병인의 고용주라고 오해할 만큼 그에게 굽신거렸다.
“오, 오셨습니까.”
“환자를 땡볕에 두면 어쩌자는 겁니까? 일사병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할 겁니까? 모자를 씌우든가 양산을 챙겨 주든가.”
“그만해. 귀찮아서 내가 거절했어.”
건조한 말이 재강원의 화를 막았다. 휠체어를 혼자 밀며 무열은 재강원에게 다가왔다.
“왜 또 왔어? 오지 말라고 했잖아.”
“햇볕이 뜨겁습니다. 들어가세요.”
“피곤하게.”
무열은 한숨을 쉬었다.
재강원이 휠체어를 밀자 무열은 가만히 등을 기대며 그에게 맡겼다. 기댄다는 느낌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그가 올 때마다 오지 말라는 말을 하는 무열은 재강원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치지 않았고 아예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다 타 버린 재처럼 조용히 그를 거부했다.
휠체어가 묵직하게 밀렸다. 한 사람의 무게가 온전히 실려 있었다.
재민석의 각목은 이무열의 머리를 가격했다. 우강희의 페로몬에 의해 사람들이 강당을 빠져나갔지만 정신을 잃은 몇몇 사람이 강당에 남겨졌고 운 나쁘게 천장 자재 일부가 그 위를 덮쳤다.
운이 나쁜 사람 중에 이무열이 있었다.
무너진 철재는 이무열을 덮쳤고 신경을 눌러 버렸다. 그리고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나흘 동안 했던 검사를 또 하며 상태를 진단했지만 인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온 무열은 이제 걸을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요양 병원으로 이송해 달라고 했다.
국내에서 안 된다면 해외도 있지만 재강원의 도움은 받지 않았다.
간병인은 재강원이 오면 항상 밖으로 나갔기에 병실에는 재강원과 이무열만 남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은 무열을 안아 침대에 눕혀 주었다.
“이제 오지 마.”
병원에 입원한 이후 무열은 재강원을 한결같이 거부했다. 전에는 열렬히 그를 불러내며 불타올랐으면서 유효 기간이 끝난 사람처럼 태도를 바꾸었다.
“내일도 올 겁니다.”
“힘들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네 아들 때문인 건 알고 있어?”
날카롭게 찌르는 오혜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무열의 말이 더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래서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이 이상 내가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는데?”
한숨과 함께 나온 말에 재강원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너 때문에 평생을 오메가인데도 베타처럼 살아왔어.”
재강원도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강원이 천한 집안의 오메가를 안아 실수할까 봐 미리 이무열에게 약을 먹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오메가라는 형질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독한 약을 먹어야 했다.
약은 무열이 약을 먹지 않아도 더는 오메가로서는 살 수 없도록 몸을 망가뜨렸다.
“아이도 잃었고 더는 가질 수도 없지.”
재강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열이 다쳐서 정밀 검사를 할 때 유산했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혜주에게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그날이었다.
누구의 아이도 아닌 재강원의 아이였다. 재강원과 이무열의 아이는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걸을 수 없고. 여기서 더 나빠지면 죽음밖에 남지 않았나. 내 목숨까지 가져가고 싶어?”
“네.”
차라리 그를 원망해 주길 바랐다.
오혜주처럼 그를 탓하며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상처를 입히고 감정을 표현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무열은 그조차도 싫은지 재강원을 조용히 거부했다. 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재강원은 눈을 떠 이무열을 보았다. 망가지고 다시는 걸을 수 없는 이무열이 건조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그 목숨, 내가 가질 겁니다. 원래 내 것이니까. 절대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무열은 한숨을 쉬었다.
재강원은 차라리 기뻤다.
언제나 이무열을 가지지 못했다는 불안함이 있었다. 옆에 있어도 불안했고 어딘가로 도망가지 않을까 초조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이무열을 가지게 되었다.
도망칠 수 있는 두 다리를 잃고 절 향한 감정을 잃었지만 재강원은 무열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기에는 잃은 것이 많았다.
이무열은 두 번 다시 그를 향해 웃어 주지 않을 것이다.
재강원은 저항하지 않는 무열을 껴안았다.
몸을 긴장하지도 않는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재강원에게 몸을 맡겼다.
가끔 무열이 이렇게 자신에게 몸을 맡겨 주면 기쁠 텐데, 하고 생각했던 그 상황인데 속이 쓰렸다. 그 몸을 놓칠까 봐 더욱 힘을 주었다.
“절대로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피곤해.”
어깨가 젖어 갔지만 무열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이무열의 심장은 더는 재강원을 향해 뛰지 않았다.
드디어 온전한 평온을 얻었다.
* * *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잘 수 없다. 내성이 생긴다면서 신경 안정제만 처방하는 의사가 짜증 나 몇 번 손목을 그었더니 재강원이 수면제를 처방하라며 명령했다.
몸에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재강원은 서툴게 상처를 소독해 주고 말없이 이무열을 바라보기만 했다.
“피곤해.”
눈을 뜨며 무열은 한숨을 쉬었다.
잠을 자도 피곤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피곤했다. 분명 자기 전에 수면제를 먹었는데 한밤중에 잠이 깼다.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선을 돌리는데 침상 옆에 우강희가 서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숨소리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고요히 바라보기만 하는 우강희를 보며 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조차 피곤하니까.
언제 죽을까, 그날만을 기다렸다.
재강원이 쉽게 놓아주지 않겠지만 분명 끝은 올 것이다. 숨이 끝나고 심장이 더는 뛰지 않고 영원히 안식을 얻을 그날이.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속삭이듯 조용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인식되지 않았다.
무열은 달싹이며 움직이는 우강희의 입술을 보았다.
“당신이 한주를 위험에 빠뜨리기는 했지만 목숨을 구해 주었죠. 은원을 정리할 겁니다. 소원을 말해 보세요.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램프의 지니도 아니고 소원을 말하라는 말이 우스웠다. 웃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울컥 울음이 터졌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재가 되어 버린 이무열의 가슴에 작은 감정의 불씨가 타올랐다.
죽고 싶다.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 힘들어 인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정말?”
울음이 섞여 불분명한 목소리에 우강희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네.”
흐어,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터뜨렸다. 깡마른 손을 힘들게 뻗어 우강희의 옷을 잡았다.
“정말로? 무엇이든?”
“네. 소원을 말하세요.”
깊은 밤, 침대맡에 악마가 내려와 속삭였다.
소원을 말하라고.
이무열은 얼마든지 영혼을 바칠 수 있었다. 다음 생을 기약하는 환생도 필요 없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온몸을 바쳐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아이, 내 아기…… 내 아기를 살려 줘…….”
죽은 생명은 살릴 수 없다. 자연의 법칙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무열은 아기를 살리고 싶었다.
“내 아기…….”
펑펑 눈물을 흘리는 이무열은 우강희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 못했다.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네요.”
우강희는 왼 손바닥을 펼쳐 이무열의 아랫배를 지그시 눌렀다. 약간의 압력만 느껴지는 정도였다.
작은 접촉인데 따뜻한 기운이 이무열을 안아 주는 기분이 들었다.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에서 이무열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