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다시 학교생활
대강당 화재로 일주일간 학교는 휴교했다. 그동안 한주는 집에서 푹 쉬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우강희는 그 일주일간 연구실에서 테스트가 있어서 한주와는 같이 귀소할 수 없었다.
그 얘기를 듣고 의외로 조은석이 운전해 주겠다며 나섰다. 엄마 박예주는 최근 꽃집이 바빠져 정신이 없었으니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한주가 뒷좌석에 앉는데 옆자리에 형질 보호부 홍보 팸플릿이 몇 권 있었다.
“가는 길에 읽으세요. 출발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저희 형질 보호부에서 우강희 님과 더불어 박한주 님도 함께 케어하기로 했습니다.”
한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형질 보호부는 알파나 오메가에게 주로 도움을 주는 기관이었다.
“저 베타인데요?”
“네, 잘 압니다.”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요?”
“그건 이제부터 하시면 되고요. 전혀 해될 것 없고 손해날 얘기도 아닙니다. 그냥 평상시처럼 지내시다가 갑자기 변호사 부를 일이 있으면.”
“제가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 걸면 돼요.”
룸미러로 조은석이 제 말을 빼앗아 대답하는 한주를 잠시 보았다.
“아, 그랬었죠. 그래도 갑자기 경찰과 관련해 일이 생기면.”
“뒤로 처리하면 불법입니다.”
“……하하, 저희는 언제나 합법적으로 일합니다. 역시 빈틈이 없으시네요.”
이쯤에서 조은석은 짜증을 내야 하지만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갑자기 아프거나 갑자기 급전…… 뭐 이것도 알아서 처리 잘하시겠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있을 때 딱 저희에게 연락해 주시면 신속·정확 하게 잘 처리해 드릴 겁니다. 쉽고 빠르게 신속 처리. 생활 해결사쯤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최근에 어머님의 꽃집이 바쁘시죠?”
“어, 네. 다음 달도 바쁘면 직원을 뽑아야겠다면서 갑자기 기관 주문이 늘었다고…… 그것도 형질 보호부에서 한 일이에요?”
“네, 미리 직원 채용해 두시라고 하세요. 피곤하면 건강 해칠 수 있으니까요.”
술술 대답하는 조은석을 보며 한주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
“아, 도움을 주고 부채 의식을 느끼게 해서 나중에 거절을 못 하게 하려는 의도.”
“하하 예리하십니다. 과연 그분의 페어.”
페어. 알파나 오메가의 연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그보다는 좀 더 끈끈한 유대감이 있는 사이를 일컬었다. 뗄 수 없는 사이, 운명적 반려 그런 식으로도 불렸다.
‘페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닌데.’
볼이 뜨끈해졌지만 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가 잘 알 테니 상의해 볼게요.”
“네, 그분도 좋게 생각하실 겁니다.”
조은석은 우강희에게 하는 것의 반 정도로 친절해졌다. 그 이전에도 친절함은 있었지만 그건 협박으로 끌어낸 연기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지금은 조은석의 말이나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한주와 우강희가 사귀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사귀기는 마찬가지였는데.
“우강희 때문인가요? 저까지 형질 보호부에서 관리하려는 것이.”
“네엡.”
조은석은 감추지 않고 말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그분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 박한주 님이시죠. 그동안 그분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한주는 조용히 경청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제어하지 못하니 불안한 존재였죠. 그렇다고 타국에 주면 안 되니 큰일이 터지지 않도록 잘 관리만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재강원 고등학교 화재에서 그분이 뛰어난 제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주 소름 끼치도록 경이롭기까지 한 능력을.”
그때 일을 떠올리며 조은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일부의 사람만을 제외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수선하고 정신없는 환경 속에서 그런 뛰어난 제어력이라니. 마치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영웅의 탄생 말입니다!”
한주는 그 현장에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 조은석의 말처럼 경이롭기까지 했다.
우강희의 페로몬이 퍼져 나가며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통제에 속했다. 그러면서 차원구와 황치운, 이성진만을 빼는 고도의 제어를 보여 주었다.
그것이 킹 알파의 페로몬.
조은석은 힐끔 한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을 이었다.
“저희는 제어력의 원천이 그분의 곁에 박한주 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신적인 안정과 지지가 집중력과 제어에 도움을 주었던 겁니다.”
“그 말은 제가 옆에 없으면 우강희의 제어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인가요?”
“기분이 불안정하면 아무래도 영향이 있죠.”
대수롭지 않게 포장했지만 한주는 속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수월하게 통과해 기숙사 앞에 차가 섰다.
“어, 다 왔네요. 어떻습니까? 편하게 왔죠?”
“네, 감사합니다.”
한주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형질 보호부의 조건을 들어 보고 판단할 테니 조건은 문자로 보내 주세요. 우강희와 상의해 볼게요.”
“네, 결코 박한주 님에게 바쁘지 않은 일이 될 겁니다.”
재차 강조하며 조은석은 트렁크에서 한주의 캐리어 가방을 내려 주었다. 제법 무거운지 넣을 때도 끙 신음하더니 꺼내고도 손을 털며 힘든 티를 냈다.
“이제 와?”
반가운 목소리에 한주는 기숙사 입구를 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우강희가 때마침 나왔다.
평소라면 우강희를 반가워하며 없는 꼬리도 흔들고 달려갔을 조은석이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사람처럼 가 버렸다. 의아하지만 한주는 우강희를 반갑게 보았다.
“네가 먼저 도착했네? 연구실에서 곧장 오게 되어서 늦는 줄 알았어.”
“핸드폰으로 날 사칭해서 조은석이 널 빼돌렸어.”
“어쩐지.”
그는 제 것인 양 한주의 캐리어 가방을 가져가더니 다른 손은 한주와 깍지를 꼈다.
“형질 보호부에서 제안받았지?”
“어, 알아?”
“그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나중에 이용하기 쉽도록 뽑아 먹으려고 잘해 주는 거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저쪽에서 조건을 제시하면 더 불려서 요구해.”
우강희를 신처럼 여기는 담당 공무원 조은석이 조금 불쌍해질 정도로 냉정한 말이었다.
“형질 보호부에서는 절대 널 잡으려 할 거야. 난 네 거니까.”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이 자연스러워 한주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네,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그냥 좀 가까운 사이일 뿐인데.”
한주는 이런 일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기에 강희는 재차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 휴교 후에 다시 시작되는 일요일.
기숙사로 귀소한 학생들로 번잡해진 로비지만 그들 주위는 한산했다. 사람들이 너나없이 우강희를 선망의 눈빛으로 보았다.
이전의 알파들은 그를 신경 쓰기는 하지만 관심 없는 척, 힐끔거릴 뿐이었는데 지금은 지하철 입구에서 일반인에 둘러싸였던 상황처럼 대놓고 주시했다.
일주일 만에 보았지만 우강희는 달라지기는 했다.
키나 체격, 또렷한 이목구비와 계속 바라보게 되는 외모는 여전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전에는 타인을 경계하며 벽을 치고 섣불리 접근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위태로움도 있었는데 학교의 화재 이후 병원으로 흩어지기 전에 본 그는 개화를 시작한 꽃처럼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껍질을 벗어 변태한 나비는 아름다우며 막강했다.
전교생이 우강희의 페로몬에 걸렸다가 풀렸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무의식적인 흔적은 그렇게 겉으로 드러났다.
“지금 오네.”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던 차원구와 황치운이 다가왔다. 한주는 강희에게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놔주지 않았다.
“재민석 얘기는 들었어? 정신과 치료를 위해 별장으로 요양을 보냈대. 말이 돼? 방화로 살인 미수를 저지른 새끼를 심신 미약으로 빼돌렸어.”
오혜주가 어디선가 발급한 정신과 의사 소견서를 들이밀어 사건이 처리되었다.
‘그러면 이전에 겪었던, 졸업식 때의 화재도 재민석이 한 일일까?’
화재로 한주는 생이 끝나 버렸으니 범인을 알 길은 없다.
“가는 곳마다 이 얘기 꼭 빠뜨리지 않고 하고 있어.”
지긋지긋하다며 황치운은 혀를 찼다. 그러면서 강희가 밀고 있는 캐리어 가방을 힐끔 보았다.
원구가 치운의 등에 매달렸다.
“그럼 열 안 받아? 거기서 잘못됐으면 한두 명의 사상 사고가 아니었어. 전교생과 초대되어 온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기필코 항의해서 감옥에 처넣을 거야. 그 자식 때문에 입원해서 검사받고 트라우마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고! 트라우마 따위 없는데도!”
마지막 말이 원구의 본심이었다.
우강희가 방이 있는 7층에 내릴 때까지 원구와 치운은 내리지 않았다. 때때로 치운은 우강희가 잡은 한주의 캐리어 가방을 보았다. 마치 가방을 대신 들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여서 한주의 시선을 끌었다.
“우린 카페테리아 간다. 뭐 사다 줄까?”
“아니.”
거절하고 내리자 원구와 치운을 태우고 엘리베이터는 올라갔다.
같이 내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세 대 정도 보내 버리며 기다려서 용건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저 마중만 받은 느낌이었다.
한주의 가방을 신경 쓰던 황치운도 이상하지만 차원구도 변한 점은 있었다.
이전에는 대화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우강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거나 몸이 닿았는데 오늘은 일절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가볍게 얘기하지만 어려워했다.
‘좀 이상하네?’
의아해하며 강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는데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한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일주일 만에 만났다.
강희는 화재 이후 연구실로 곧장 가서 지냈기에 매일 통화만 했었다.
“잘 쉬었어?”
몸 전체를 감싸듯이 안아 오는 팔이 얇은 티셔츠 위에 닿았다. 옷이 얇아지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매일 통화했잖아.”
“보고 싶었어.”
그의 한숨에 머리카락이 살짝 날려서 한주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사귀는 사이니까 아무렇지 않을 말이지만 아직은 어색했다. 이전의 삶까지 통틀어 처음 하는 연애였다.
우강희의 가슴에 뺨이 눌렸다. 얇은 옷 너머에서 쿵쿵 맥박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주와 비슷하게 조금 빠른 비트로.
‘나도 보고 싶기는 했으니까.’
멈칫거리며 강희의 등을 마주 껴안으려고 손을 들었다.
“나.”
“호텔 알바는 그럼 끝난 거지?”
끌어안으며 ‘나도 보고 싶었어.’라고 말하려는데 우강희가 한주를 놓아주었다. 조금 전보다 그의 표정은 풀려 있었다.
“어. 입원으로 계속 빠졌으니까. 어떻게든 사람을 구했나 봐. 빨리 구할 수 있었는데 어물쩍 미루었던 것이 분명해.”
“너 같은 능력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지.”
그의 손이 한주의 머리를 헝클었다.
사귀는 사이.
이미 이전에 사귀기로 했지만 납치당하고 화재 사건이 있어서 정신없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 지내는 것처럼 있으면 되는데 아무렇지 않게 만지는 손길이 의식되어 자꾸 귀가 뜨거웠다.
‘방을 같이 써야 하는데.’
엄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키스 다음의 진도.
무심코 강희의 얼굴을 보았다가 시선을 내렸다. 얇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단단한 몸의 굴곡이 드러났다. 그 아래의 하체 중심도.
“머, 먼저 씻을게!”
욕실로 들어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거길 왜 보냐고! 나한테도 똑같은 게 있는데!’
무심코 제 것을 내려다보았다가 한주는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래에 열이 몰려 앞섶이 불룩하게 올라와 있다.
이전의 삶과 합쳐서 살아온 연수로만 따지면 스물네 살이 되었을 나이. 생각도 몸도 혈기 왕성할 나이에 사귀는 사람과 한방을 쓰고 있었다.
그동안 생각하지도 않았던 부분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머릿속이 복작복작해졌다.
이대로 평소처럼 지내도 되나?
방에 단둘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하지?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다 휩쓸어 버렸다.
경험은 없어도 일반적인 성 지식은 있었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남녀 간의 섹스 같은 것들. 그리고 우강희와 몇 번이고 키스도 했다.
‘같이 지내니 앞으로 키스보다 더한 것도 하겠지?’
생각하다가 무심코 소리를 냈다.
“키스보다 더한?”
밖에서 들었을까 봐 한주는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로 들어갔다. 물줄기를 맞으며 입술을 간지럽히는 물을 핥았다.
영상으로만 키스를 접했을 때는 ‘그렇게 좋나?’라는 감상이 먼저 떠올랐었다. 우강희에게 처음 키스당했을 때는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이 녀석 왜 이래?’
‘어?’
‘이게 뭐야?’
라는 생각만 했었다.
의식하게 되면서 그가 잡았던 손, 손등을 문지르던 엄지, 어깨를 감싸던 팔,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이 피부를 잘근거리는 아찔한 이빨.
입술을 오물거리며 간지럽히고 입 안쪽의 점막을 핥으며 움직이던 느낌이 떠올라 주저앉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내가 좋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우강희를 놔두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도 집중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으, 그만, 그만!”
생각이 자꾸 키스로 튀었다. 소리가 들렸는지 강희가 욕실 문을 노크했다.
“무슨 일 있어?”
“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갈아입을 옷 줄까?”
“아.”
급히 들어오느라 갈아입을 옷을 챙기지 않았다. 문이 닫혀 보이지 않는데도 허리에 수건만 감고 한주는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입었던 옷 있어.”
“먼지 묻었잖아. 문 앞에 둘게. 속옷도 필요하지?”
“아니, 어, 지금 열게! 속옷도 줘!”
머리카락을 닦지 않아 물이 주르륵 벗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느낌이 이상해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전에는 갈아입을 옷을 안 가지고 들어왔으면 수건만 두르고 욕실을 나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우강희 앞에서 수건으로만 가리고 알몸으로 서다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다고 문 앞에 옷을 놔두면 열다가 그와 마주칠 수 있었다. 유난을 떠는 기분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문 열게.”
문을 빼꼼 열어 손만 내밀었다.
“얼른 줘.”
팔랑팔랑 손끝을 흔들었다.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내보이는데 우강희가 손등을 감싸 왔다.
옷을 올려 준다고 생각해 빳빳하게 힘을 주며 폈는데 팔뚝에 간지러운 털이 닿았다. 펼쳐진 손바닥에 ‘쪽’ 젖은 접촉이 있었다.
“뭘 그렇게 의식해?”
웃음과 함께 강희가 옷을 올려 주었다. 쾅 문을 닫았지만 웃음은 계속 들렸다.
“몸 사리지 않아도 돼. 건드리지 않아.”
한주가 왜 그러는지 다 알고 있어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안절부절못하며 닿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은 우강희였는데.
한주는 뻘게진 얼굴로 손바닥을 긁었다.
‘왜 건드리지 않아? 방금 손바닥에 뽀뽀했잖아. 그 정도는 건드리는 축에도 안 낀다는 뜻이야?’
얼굴에 열이 올라 한주는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썼다.
그럼 건드린다면 어디까지일까?
대충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나갔지만 그때까지 열은 식지 않았다.
* * *
한주는 엄마가 꾸려 놓은 캐리어 가방을 열었다. 어쩐지 묵직하다 했더니 보약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 역시.”
한주의 목소리에 강희가 옆으로 다가와 안을 보았다.
“어쩐지 무겁다고 생각했는데 보약을 잔뜩 넣어 놨네. 어차피 주말에 집에 가는데.”
원탕과 재탕까지 합쳐서 두 박스가 들었으니 캐리어가 무거울 만했다.
“최근에 병원에 자주 입원했으니 그러실 만도 하지.”
“아는데. 한약은 써서 싫어.”
“방 냉장고는 작아서 다 들어가지 않으니까 일부는 관리실 측에 맡겨. 상할 수 있으니 보관해 줄 거야.”
“그래야겠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납치 건으로 갈비뼈가 부러지며 입원했고 학교 강당에 불이 나 현장에 있던 전교생과 방문객, 관계자들이 전부 종일 입원해 검사를 받았다.
연속된 병원행에 한주의 엄마 박예주는 전학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이 기회에 재강원에게서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었지만 한주는 거부했다.
화재까지 겪은 마당에 인제 와서 전학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전학 얘기는 잘 무마했지. 하필 김시훈 일까지 들켜서 진땀 뺐잖아.”
“너 전학 못 가.”
엉뚱한 소리에 한주는 고개를 들어 우강희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재강원 고등학교는 중간에 유학 가는 학생도 종종 있는데.”
“너나 나는 안 돼. 형질 보호부에서 널 전학 보내지 않을 거야.”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거 맡기고 와야겠다.”
박스 하나를 들자 우강희가 다른 박스를 들었다. 냉장고에 반만 정리해서 넣고 확인할 겸 냉동실을 열어 보았는데 텅 비어 있었다.
“편의점도 들러야겠는데. 아이스크림이 하나도 없어.”
“관리실에 남은 약 다 맡길 거지?”
“응.”
우강희는 양손에 박스 하나씩 들었다.
아직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다 우강희를 보았다. 알파가 한약 박스를 들고 있으니 눈길을 끌었다.
“어, 줘. 하나는 내가 들게.”
“양쪽으로 들어야 균형이 맞아.”
그는 아무렇지 않은데 한주는 얼굴이 붉어졌다.
관리실에서도 알파가, 그것도 소문이 무성한 우강희가 한약 박스를 들고 와 맡기자 잠시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편의점 간다고 했지?”
“직원들 편의점으로 가야 해. 거기 가야 내 취향의 아이스크림을 팔아.”
“그래.”
우강희는 손이 자유롭게 되자 어김없이 잡아 왔다. 손가락을 밀어 넣어 엮으며 깍지를 꼈다.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손잡는 게 좋아?”
“떨어져 있었잖아.”
“계속 손잡고 싶을 만큼 내가 그렇게 좋아?”
대답은 알고 있지만 듣고 싶어서 농담처럼 던졌다.
“글쎄. 그 정도로 가볍지는 않은데.”
의뭉스럽게 웃으며 바라보는 시선이 짙어졌다. 눈이 동그래진 한주를 안심시켜 주듯이 덧붙였다.
“걱정 마. 지금은 이 정도로도 만족하니까.”
그럼 ‘지금은’이 끝나는 것은 언제인데?
차마 그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재강원 이사장에게서는 다른 연락 없고?”
“그 집에서는 연락 없었어. 아마도. 엄마에게 따로 들은 얘기는 없어.”
매일 통화를 했지만 할 말은 많았다.
그는 한주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 한마디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었다. 그리고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눈웃음을 지었다.
“네 선택을 존중하지만 돈 때문에 재강원을 선택하지는 마. 그 정도 돈은 나 졸업하면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
“그게 네 돈이지, 내 돈이야?”
“네 거야.”
고민도 없이 우강희는 대답했다.
“뭐?”
“내 모든 것은 네 거야. 그러니 고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 나는 너만 무사하고 건강하면 돼.”
한 번씩 한주의 마음에 들어와 흔들었다.
“하, 누가 들으면 청혼하는 줄 알겠다. 넌 뭐 먹을래?”
도망치듯이 한주는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어찌 나올지 알고 무슨 말을 하는지 예상했지만 막상 들으면 도저히 얼굴 맞대고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이런 감정도 익숙해질 수 있을까?’
한주에게는 아직 무리다.
* * *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열 개 사 하나를 먹으면서 기숙사로 향했다. 강희는 한주가 사 준다는 말에 작게 포장된 초콜릿 봉지를 골랐지만 뜯어서 먹지는 않았다.
다시 산책로에 들어섰다. 토요일 밤이라 오붓하게 걷는 연인들이 보였다.
멀리 가로등 아래의 벤치에 앉은 커플이 입술을 부딪치는 모습이 보여 한주는 강희의 손을 끌어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의 눈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저렇게 좋을까.’
자신은 민망해서 절대 못 할 행동이었다. 단둘이 있다면 몰라도.
“알바 그만두어서 주말은 이제 쉬나 했더니 토요일에는 치료 센터 가게 되었어.”
“불 공포증?”
“응. 알았으니 치료해 둬야지.”
한주는 자신에게 불 공포증이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다.
하긴, 그럴 만했다. 이전에 대형 화재로 죽었으니 트라우마가 남을 만했다. 지금까지야 작은 모닥불을 보는 정도여서 느끼지 못했다.
“작은 불에는 괜찮은데 큰불에서는 공포 때문에 얼어붙으니까.”
“무사히 빠져나왔다고는 해도 트라우마가 생길 만하지. 평범한 사람도 화재 앞에서는 몸이 굳어 버려. 아, 묻었다.”
“응?”
되묻자마자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이 올라와 한주의 입꼬리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 주었다.
그는 한주의 얼굴을 보며 자기 입술을 핥았다.
“어, 말하지. 내가 닦으면 되는데.”
이미 다 닦았지만 한주는 다시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닦아 주면서 왜 자기 입술을 핥는데!’
가끔 보이는 강희의 행동 때문에 저만 난감하고 민망해져서 미칠 거 같았다.
어색하게 웃으며 넘어가기는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 그의 행동이 생각나 소리 없이 고함을 질렀다.
얼굴이 홧홧했다. 숯불을 앞에 둔 사람처럼 뜨거웠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우강희의 하체로 향했다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다른 곳을 봤다.
멜론 맛 하드가 입 안의 열기에 빠르게 녹아 갔다.
저도 남자이다 보니 욕구를 모르지 않는다.
‘먼저 리드해야 하나.’
그런데 아는 것이 없다.
키스도 우강희에게 끌려가기 일쑤인데 그 이상의 일에서는 자신 없었다. 언젠가의 날을 위해서 검색하며 공부를 좀 해야겠다. 하드 끝을 입술로 물며 생각하고 있는데 강희가 툭 말했다.
“맛있어?”
“응?”
그의 눈이 한주가 든 하드를 향해 있었다. 열 개를 샀기에 다른 것을 먹겠냐는 뜻으로 들고 있는 검은 봉지를 내밀었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맛만 볼게.”
“어, 그래.”
전에 한주의 입에 물고 있던 사탕도 뺏어 갔으니 먹던 하드도 먹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밀었다. 손목이 잡히며 우강희가 고개를 숙였다. 할짝 한주의 입술을 핥고 갔다.
“향이 진하네, 달다.”
“너, 너!”
다른 커플을 보며 민망하지 않나 생각했던 행동을 우강희가 했다. 밖에서는 자중하라며 소리치려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헉! 우강희가 박한주와?”
2학년 이창원이 눈을 부릅뜨며 보고 있었다. 퇴원한다는 말은 들었었지만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무사히 퇴원한 모습을 보니 한주는 반갑기까지 했다.
“어, 퇴원하셨어요?”
“방금 키스! 우강희가 너한테 왜?”
이창원은 놀랐는지 ‘키스’라고 크게 외쳤다. 지나가던 직원들이나 학생이 발을 멈추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창원이 더는 소리치지 못하게 막으려고 다가가려는데 강희가 한주와 깍지 낀 손을 어깨높이로 들었다.
“사귑니다.”
“뭐?”
사이가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본인 입으로 사귄다는 말을 한다.
눈만 깜빡이는 이창원을 보며 우강희는 친절하게 경고했다.
“그러니, 박한주 건드리지 마세요. 손끝 하나 용납 못 합니다.”
“아, 진짜. 소문 다 퍼졌네.”
끄응, 한주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조용히 학교 다니기는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