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 알파 리턴 (31/31)

외전 6. 알파 리턴

검은 세단은 속초의 어촌 마을에 들어섰다. 작은 마을답게 작은 해변이 있기는 하지만 볼 것도 없고 홍보할 것도 없어 그저 지나다니는 관광객이 호기심에 한 번 들르는 정도의 마을이었다. 그래도 민박집도 있고 슈퍼도 있고 동네 사람들이 들르는 작은 국숫집 겸 밥집도 있었다.

세단은 바닷물에 잔뜩 녹이 슨 소형 트럭 옆에 섰다. 금방 가지 않을 모양으로 제대로 주차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은 관광객이 들렀겠거니 힐끔 보고 말았다. 뒷좌석의 창이 두 마디 정도 내려가기는 했지만 사람은 내리지 않았다.

“진우야, 할아버지가 주시면 감사합니다, 인사하면서 받으면 돼.”

뒷좌석에 앉은 재강원은 들려온 목소리에 급히 몸을 돌렸다. 이무열이 네 살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5년 만이었다.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살이 오르고 피부가 좀 탔지만 멀쩡하게 걷고 있었다.

“뭔지 알고.”

“딱 봐도 사탕이잖아.”

에휴, 아이가 보란 듯이 한숨을 폭 쉬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아이를 교육하고 있던 무열의 입가가 실룩였지만 안 그런 척 볼에 힘을 주었다.

“무슨 사땅인줄 알고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바다.”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 그러면 안 된다면서 작은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치켜들어 무열을 올려다보는 눈이 제법 매서워졌다.

“아빠는 밖에서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을 막 받아 머거? 그러면 안 대. 머가 들었을 쭐 알고. 크닐 나.”

또박또박 야단치는 말에 무열은 당황했다.

“아빠가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잖아. 아는 어른이 주는 건데.”

“범제자의 99퍼센트는 어른이고 아동 범제는 아는 어른이 마니 저지른대.”

“이진우.”

말로는 이길 재간이 없어 이름을 부르며 짐짓 엄하게 굴었지만 이미 제압당한 후였다.

일하다 잠시 쉬느라 건물에 기대 담배를 피우던 중년의 남자가 지켜보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무열아, 진우 도련님 말이 맞지. 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함부로 먹으면 클나지. 특히 우리 진우 도련님처럼 똘똘한 아이는 위험해.”

“아저씨, 그런 것 때문에 야단치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어른이 주는 사탕인데 받고 고맙습니다, 정도는 말해야 하는데 얘는…….”

종종 있는 일인지 한숨이 깊었다. 남자가 성큼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우리 진우는 사탕보다는 돈을 더 좋아하지.”

“고맙습니다.”

넙죽 받으며 인사도 야무지게 한다.

“봐라, 이렇게 예의 바르잖아.”

“이 약은 녀석!”

무열은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간지럽혔다. 간지러워 아이가 몸을 틀며 도망치려 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아빠, 싫어!”

“그렇게 돈만 좋아하면 안 돼.”

“왜, 이 돈이면 사탕 여러 개 사 머글 수 있어! 하나보다 여러 개가 더 만자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자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주머니를 뒤적여 이번에는 오천 원짜리를 꺼내 주었다.

“우리 진우 도련님 벌써부터 셈에 밝은 거 봐라. 아저씨가 너 때문에 웃는다. 옜다, 이 돈이면 사탕 두 봉지는 사 먹을 수 있어.”

“아저씨, 애 버릇 나빠져요.”

“우리 진우 도련님 용돈 주는 맛에 내가 일하고 있어. 큰돈도 아닌데 뭐 어때. 덕분에 담배 하나 덜 사고 좋지.”

“감사합니다, 아조씨.”

평소 만지지도 못하게 하던 아이가 살포시 남자의 다리를 껴안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우리 진우!”

안으려고 했지만 냉큼 무열의 뒤로 도망갔다. 평소에도 종종 그러는지 서운해하지 않았다.

“이야, 계산 철저한 거 봐라. 우리 진우 도련님은 나중에 크게 되겠어. 어서 가 봐. 할매 기다리겠다.”

“예, 감사합니다. 진우야, 아저씨한테 다시 인사드려.”

“감사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왜 다시 인사하냐고 또박또박 물었을 아이가 얌전하게 아빠 말을 따랐다. 돈의 위력이었다.

무열은 아이 손을 잡고 부둣가 근처의 작고 허름한 식당으로 향했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웃는데 멀어서 재강원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서 지낸 지 제법 되었는지 동네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재강원이 보기에도 행복해 보였다.

5년간 이무열을 찾으며 그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르고.

처음 병원에서 무열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재강원은 가문의 직원들을 동원해 찾았다. CCTV에 제 발로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안도했다. 걷지 못할 수 있다고 하더니 멀쩡히 걸었다. 스스로 도망가서 다행이었다.

며칠이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해외로 나가지 않고 국내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는 것이 무에 어렵겠냐고 생각했지만 어디서도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기록도 없었다. 신용 카드도, 핸드폰도, 은행 기록도 전무했다.

검색 엔진의 로그인 기록도 뒤졌지만 죽은 사람처럼 전혀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조수석에 앉은 수행 비서가 태블릿을 보며 보고를 읊었다.

“이 마을에 4년 전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만삭으로 쓰러진 이무열 씨를 시골 국수의 조항년 할머님께서 거둬 주었고 그 후 같이 살고 있습니다. 현재는 시골 국수의 쪽방에서 자며 식당 일을 하면서 어촌 일을 돕고 있습니다.”

찾았다는 말을 듣고 속초로 오면서 보았던 보고서였다.

“어떻게 찾았지?”

“일주일에 한 번 인물 탐색을 돌리는데 SNS에 이무열 씨로 보이는 사람이 찍힌 것을 찾아냈습니다. 식당의 손님이 셀카를 찍었는데 뒷배경으로 이무열 씨가 찍혀 노출되었습니다.”

하, 기가 막혀 재강원은 숨을 토했다. 우연하게 걸리지 않았다면 찾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현재 네 살, 이진우 군은 태어날 때부터 알파로 발현한 상태여서 병원을 자주 다닌다고 합니다. 영리하여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재강원은 이무열이 들어간 식당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열을 찾았으니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물어볼 차례였다.

“아이 아빠는?”

“시골 국수의 조항년 할머님이 도와주었을 때는 혼자였다고 합니다. 동네에서도 미혼부라고 소문이 나 있고 누군가 찾아왔다는 얘기도 없답니다.”

머리로는 이미 계산이 끝났고 개월 수도 저와 맞지 않았다. 그래도 재강원은 물었다.

5년 전 의사의 진단으로 이미 한 번 유산했고 약한 자궁으로 아이를 더는 가질 수 없다고 들었다.

걸을 수 없다고 한 사람이 걸었고 아이까지 낳았으며 그 모습을 동네 사람들이 증언했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있었다.

“내 아이일 확률은?”

“없습니다. 임신 기간을 계산했을 때 병원을 나올 즘에 아이가 착상되었어야 했는데 그때 한 달 전으로 관계를 가지신 적이 없습니다. 유전자 검사도 했지만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무릎에 놓인 손을 주먹 쥐었다.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목으로 핏줄이 불거졌다. 사나운 알파의 페로몬에 수행 비서는 창문을 반쯤 내렸다.

수행 비서는 15년간 재강원을 모셨다. 그는 무열에게 유달리 신경을 쓰며 관심을 가졌다. 그저 오래된 인연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무열이 사라지면서 재강원이 변했다.

온 관심과 가문의 총력이 이무열의 소재 파악에 집중되었다. 날 선 페로몬에 곁에 사람이 있기 힘들었고 가문의 일에 소홀해졌다.

처음 2년은 지켜보았지만 사그라지지 않는 광기와도 같은 집착에 친족들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차기 후계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란 말도 나왔다. 이제 50을 갓 넘은 창창한 나이였는데. 직계의 아들 둘은 후계 거론에 올라가지 못했고 유력 후보자들은 물밑에서 작업이 들어갔다.

재강원에게 보고를 했지만 반응은 없었다.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드디어 이무열을 찾았다.

보고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재강원은 뛰어나가 무열을 붙잡지 않았다.

“직원들은 대기하고 있습니다.”

재강원이 원한다면 당장 데려갈 수 있다. 원래의 재강원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납치쯤 싸게 먹히는 일이 아닌가.

“아직.”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해.”

“예.”

그의 시선은 식당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 5년간 그는 불면의 밤을 지냈다. 생각이 많고 이무열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혹여 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눈을 감으면 온갖 걱정이 밀려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술이 그를 달랬고 타인의 몸으로는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당신 미쳤어?’

부인 오혜주는 보다 못해 신경질을 냈다. 짜증 내고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해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겉은 멀쩡하지만 집에서는 폐인처럼 연락만 기다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꼭 실연당한 사람 같네.’

그의 상태를 짧게 비웃고 오혜주는 집을 나갔다.

그렇게 5년을 지옥같이 살았는데 무열은 웃고 있었다. 누군가 오래 입었던 옷을 주워다 입은 사람처럼 낡은 점퍼를 걸치고 깨끗하지만 시간을 지우지 못한 자국이 있는 누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5년 전보다 살은 좀 쪄 보였고 표정은 더없이 편했다. 아이를 보는 시선은 애정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 찼고 웃으면 행복해 보였다.

재강원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어릴 때는 그의 앞에서 종종 웃기도 했지만 긴장이 남아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 웃기라도 하면 지레 놀라 낮게 줄였다. 그의 옆에서는 항시 긴장하고 주변의 눈치를 봤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지금의 모습이 확실한 행복을 보여 주었다. 재강원이 없기에 이무열은 행복했다.

* * *

매일 같은 자리에 찾아오는 세단은 작은 동네에서 화제가 되었다. 오전에 주차했다가 오후 늦게 떠났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앞 좌석에서 사람 둘이 오르내렸고 검은 슈트를 입은 모습에 다가가기 어려워 왜 오냐고 누구도 묻지 못했다.

괜히 외지인과 엮여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왔네. 뭐 하는 짓이야, 저게.”

할머니의 목소리에 무열은 양파를 까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항년 할머니가 환기를 위해 열어 둔 문으로 밖이 보였다.

“저 검은 승용차요?”

“그래, 저게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저러고 있는지. 풍기 문란한 짓은 하는 거 같지 않고, 누구 잡으러 왔나? 꼭 매복하는 놈들 같잖아.”

무열은 힐끔 식당 안쪽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진우를 보았다. 도서관에 출근하는 사람처럼 하루 한 번 아들과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 명의로 된 폴더폰은 있지만 검색이나 영상을 보기는 어려웠다. 호기심이 많아 TV로 정보를 접하지만 자세히 알아볼 수 없으니 금방 흥미를 잃었다. 이제 슬슬 아이에게 노트북이라도 사 줘야 하나 고민되었다.

주변에 또래의 아이가 없었고 어쩌다가 친척이나 동네 어른의 자식들이 와서 진우 또래의 아이를 보지만 그 아이들은 부모가 항시 옆을 떠나지 못하고 돌봐 줘야 했다. 하지만 진우는 혼자 책도 잘 보고 또박또박 말도 잘하고 사리 분별이 밝았다.

또래보다는 뛰어나다는 걸 알지만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느 순간 메뉴판을 읽었고 뉴스 자막을 읽으며 ‘왜 해외 유가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줘?’라고 묻기도 했다. 좀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어, 뒤에서 누가 내렸네?”

“그래요?”

관심 없지만 할머니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어촌의 일을 돕고 있지만 돈이 모이면 진우가 병원에 갈 일이 생겨서 모은 돈이 얼마 없었다.

“이쪽으로 오네. 식사하려나.”

점심시간이 지난 3시였다.

뜨거운 바닷가 햇빛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은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식당 손님이라고 여겼는지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 문을 가리며 한 남자의 그림자가 식당 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어서 오세요.”

고개를 들고 무열은 눈을 깜빡였다.

재강원이 허름한 식당 입구에 서 있었다.

* * *

밖은 내리쬐는 한낮의 햇빛으로 밝았지만 재강원이 문을 가리고 있어 식당 안은 어두웠다. 그는 들어오지도 물러나지도 않고 이무열을 보며 서 있었다.

밖이 밝아 그의 얼굴이 역광으로 어둠이 더 짙어졌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은 압박을 주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페로몬은 날카로워졌다가 흉포해졌고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고요한 무표정의 재강원과는 달리 그의 속은 사납게 널을 뛰었다.

이무열은 놀라지 않았다. 잠깐 의외의 손님에 눈을 크게 뜨기는 했지만 곧 평상시처럼 돌아갔다.

조용한 대치가 지속되는 가운데 시간은 갔고 주방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할머니가 물었다.

“무얼 드신대?”

그 소리가 긴장을 잘라 냈다. 무열은 잠시 선반에 가린 주방을 보았다가 쪽방의 아들을 보았다. 이상함을 느꼈는지 진우가 문에 선 재강원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제 손님이에요. 나가서 얘기하고 올게요.”

조금 전에 만났던 사람을 대하는 듯이 목소리는 평온했다. 긴장도 떨림도 그리고 반가움도 없었다.

무열은 재강원에게 다가가 턱짓을 했다.

“나가. 밖에서 얘기해.”

재강원은 안쪽 방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진우를 잠시 보았지만 몸을 돌려 나갔다. 아들이 식당에 있으니 도망치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 빠르게 머리를 지나갔다.

무열이 앞장섰고 재강원이 두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뒤를 따랐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았지만 무열은 스스로 막다른 곳으로 향했다.

식당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부둣가, 돌아온 배들이 짐을 올려 작업할 수 있게 만들어 둔 간이 천막 아래로 갔다. 앞은 바다였고 뒤는 재강원이 있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늘로 들어와. 한낮이라 금방 피부가 까매져.”

저가 그래서 탔다는 듯이 무열의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잘 그을려 건강해 보였다.

재강원은 손짓을 따라 그늘 안으로 들어갔다. 무열은 힐끔 그를 보았지만 이내 난반사하는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늘에 있지만 눈이 부셔 가늘게 떴다.

“언젠가 우연으로 만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왔네.”

절 돌아보는 무열을 보며 재강원은 머리가 멍해졌다.

“왜 왔어?”

왜냐니?

도망갔으니 찾으러 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던가. 그에게서 도망갔으니까. 제 것이 허락 없이 떠났으니까.

5년간 얼마나 찾았는데.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걱정했는데.

그런데 무열은 재강원이 걱정을 했을지, 그동안 찾기는 했을지 관심이 없었다. 평온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말들이 다 쓸모없다는 걸 알았다.

“돌아오세요.”

“음, 돌아오라는 말은 원래 자리로 간다는 뜻인데, 쓰임이 맞지 않아.”

말을 하고 살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아, 미안. 진우에게 설명해 주는 버릇이 들었어.”

이진우.

이무열의 아들.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열이 낳은 아들.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이무열에게 조용히 경고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다그쳐 묻고 싶었다.

어떤 놈팡이의 씨앗인지, 누구와 붙어먹었는지, 그 남자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당장 말하라고.

그런데 절 보고도 무덤덤한 이열을 보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다시 걸을 수 없다고 진단받은 사람이 하룻밤 만에 걸어서 병원을 나갈 수 있었나, 몸은 괜찮은지, 아픈 곳은 없는지, 왜 절 떠났는지 묻고 싶은 것은 끝도 없이 많았다.

내가 그립지 않았냐고.

재강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얀 침상에 누워 절 올려다보며 건조하게 말하던 무열이 떠올랐다.

‘너 때문에 평생을 오메가인데도 베타처럼 살아왔어.’

화내지도 않았고

‘아이도 잃었고 더는 가질 수도 없지.’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제 걸을 수 없고. 여기서 더 나빠지면 죽음밖에 남지 않았나. 내 목숨까지 가져가고 싶어?’

다 타 버린 재는 제 할 일을 끝내고 그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때의 무기력하고 생명력 없는 모습이 떠올라 무열을 다그칠 수 없었다.

“아이와 차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을 도와준 노인에게는 그만큼의 사례가 돌아갈 겁니다. 당신이 조용히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건조하게 말했지만 협박이었다. 주변 사람과 절 도와준 할머니와 아이를 인질로 삼았다. 그럼 겁을 먹어야 하는데 무열은 한숨을 쉬었다.

“그 집착은 아직이구나.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러네.”

어린아이의 떼쓰는 모습을 난감하게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대답은 너무 쉽게 나왔다.

“그래, 너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같이 갈게. 지금?”

가슴이 뻐근해졌다. 같이 간다니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심장이 조여들었다.

“지금 당장.”

“그래, 필요한 거 올라가서 다 사도 된다지만 가져가야 할 물건이 몇 개 있어.”

무열이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자 팔을 움켜잡았다. 억센 손아귀 힘에 무열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놔. 식당에 가서 짐을 챙겨야지.”

재강원은 무열을 놔주었지만 올 때와는 다르게 바짝 그 뒤를 따랐다.

무열은 약속을 지켰다. 식당으로 들어가서 내일 또 볼 사람처럼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저 가야 해요.”

“데리러 온 사람이야?”

“네. 사례는 해 준대요.”

무열은 작은 방으로 들어간 타폴린 백에 때가 묻은 작은 베개와 책, 옷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챙겼다. 그러나 대형 장바구니의 타폴린 백을 다 채우지는 못했다.

할머니는 입구를 막으며 서 있는 재강원을 잠시 보고 짐을 챙기는 무열을 보았다.

“사례는 무슨.”

“돈 많은 사람이니 주면 받으세요. 우리 진우 세 살 될 때까지 할머니가 병원비로 많이 썼잖아요. 오갈 곳 없는 절 거둬 주고 돌봐 주고 밥 먹여 주고요.”

재강원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넉넉히 값을 쳐주라고.

“돈 받아서 디스크 수술도 하고 가게도 좀 깔끔하게 정비하고, 이참에 이 쪽방 보일러도 바꾸세요. 겨울마다 고생했잖아요.”

“너나 잘 살아.”

조용히 아빠를 바라보고 있던 진우가 재강원을 올려다보았다. 똘망한 눈이 절 향하자 재강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빠, 우리 저 사람 따라가?”

“응, 챙길 거 있으면 챙겨.”

“베개만 있으면 대.”

“응, 챙겼어. 그 외에는 없어?”

“돈 많다며. 사 주겠지.”

그제야 무열이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는 떠날 줄 알았는지 무덤덤하던 할머니도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저녁에 우리 진우 좋아하는 닭볶음탕 하려고 했는데.”

“어, 할머니 닭볶음탕…….”

애는 애인지 좋아하는 음식 때문에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먹고 가도 되냐고 아이는 재강원을 보았지만 눈빛이 통하지 않았다. 일언반구 없는 그를 보다가 폭 한숨을 쉬며 할머니를 달랬다.

“곧장 가야 하나 봐, 할머니. 다음에 와서 머글게.”

“그래, 할머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 할머니는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

“할머니.”

평소답지 않게 할머니에게 안기며 진우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 제 아들을 무열은 지켜보았다.

짐은 다 쌌다. 진우가 할머니에게서 떨어지자 무열이 그녀를 안았다.

“자주 연락하고 종종 찾아올게요.”

“그래, 밥 잘 먹고.”

“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열은 한 손에 타폴린 백을 다른 손에 아들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섰다. 할머니는 주방으로 들어가 마중도 하지 않았다.

재강원은 그 뒤를 따르며 속으로 비웃었다.

연락? 종종 찾아가?

‘누가 허락해 준다고.’

저택으로 가면 아이와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제 아이조차 귀찮아 안아 준 적이 없고 공간도 따로 썼는데 제 씨도 아닌 아이를 허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무열이 다시는 나가지 못하도록 감금할 예정이다.

싫어해도, 울며불며 매달려도.

도망친 죗값이다.

이무열이 아들과 뒷좌석에 타자 반대쪽으로 재강원이 탔다. 그리고 검은 세단이 드디어 작은 어촌 마을을 떠났다.

* * *

차가 서울로 들어서자 아이는 창밖을 보며 놀랐다.

“아빠, TV와 또까타.”

옆에서 들리는 혀 짧은 목소리에 재강원은 피식 웃음을 참지 않았다.

‘또까타? 무슨 브랜드 이름 같군. 어떤 놈의 씨인데 저 나이에 제대로 발음을 못 해?’

보통의 네 살 남자아이가 몇몇 단어만 구사하는 것에 비해서는 굉장한 언어 구사지만 그는 아이의 성장을 몰랐다. 자기 아이들과도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가 서울이야.”

“서울. 우리 이제 여기서 살아?”

“당분간은.”

재강원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귀는 옆을 향해 열려 있어 대화가 들렸다.

당분간이라니, 헛된 말이다.

‘5년이나 떨어져 있었더니 눈치가 없어졌어.’

무열의 말을 짧게 평가했다.

무열과 얘기하면서 아이는 옆자리의 재강원을 힐끔거렸다. 묵묵히 앉아 있는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시골 국수의 건물과 부지 명의를 옮겨 주고, 속초에서 좋은 부지의 건물 하나를 매입해 월세 받고 살 수 있도록 정리해. 그 정도 사례면 만족하겠지.”

재강원은 집에 다 와 가자 수행 비서에게 명령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이무열이 끼어들었다.

“건물 관리는? 연세가 많은 분이라 힘드실 텐데.”

“……관리인도 괜찮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네, 번거롭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차는 부드럽게 저택 앞에 섰다.

“본가도 오랜만이네.”

차에서 내려 저택을 올려다보며 무열은 반가워했다.

“아빠가 어릴 때 이 근처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아빠가 살았던 집 보여 줄게.”

“아라써. 나 안아죠.”

“졸리구나.”

눈을 비비는 모습이 영락없는 아기라 무열은 웃으며 품에 안았다. 아이를 안으니 제 짐을 들 손이 없었다.

그때 재강원이 무열의 타폴린 백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수행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짐을 대신 들려고 했지만 재강원은 건네주지 않았다.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집사와 일하는 직원 다섯이 도열해 주인을 맞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집사는 재강원에게서 짐을 받아 뒤에 선 직원에게 건네주고 무열을 보았다. 재강원의 놀이 상대가 되어 빈번하게 오갔던 이무열을 집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열을 주인처럼 정중하게 대했다.

“저 사람의 방은?”

“2층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재강원은 무열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올라가서 쉬세요.”

그의 무덤덤한 말에 처음으로 무열이 당황했다.

“네 부인도 있을 텐데 별채에서 지낼게.”

본채는 주인의 거처다.

재강원의 부인인 오혜주와 그 자식인 재민용, 재민석이 사는 곳.

별채는 본채에서 떨어져 있고 보안 직원이 상주했다. 반면 본채는 직원이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성역이었다.

재강원은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편하게 쉬세요.”

집의 공기만큼 냉정했다.

* * *

“이쪽입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향했다.

재강원이 약혼을 한 이후에는 이 저택에 오지 않았다. 무열은 진우에게 머무는 시선을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사가 문을 열어 주었지만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맞은편 방이 재강원이 어릴 때 썼던 방이었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하지만 여기는 도련님들이 쓰는 방이 아닌가요?”

“부인과 도련님들은 해외로 나가셨습니다. 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신 지 4년이 넘었습니다.”

집사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무열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요?”

아이를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6시 반입니다. 곧 간단한 다과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네.”

“필요하신 물건이 있으시면 인터폰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제 짐은요?”

“곧 가져오겠습니다.”

무열이 할 말이 없어 보이자 집사는 짧게 인사하고 멀어졌다. 잠시 복도에 서 있더니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 *

“아빠, 힘드러? 공놀이하자며?”

재강원은 크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무열이 변명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 내내 아이를 챙기느라 두 사람이 제대로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밤새 방문을 살짝 열어 놓고 페로몬을 보냈지만 무열은 그의 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새벽에 깜빡 잠이 들었다. 무열을 찾았던 5년 내내 약과 술이 아니면 잠을 자지 못했는데 무열을 찾자마자 조여졌던 기분이 풀어졌다.

“아빠도 좀 쉬자.”

헐떡이는 무열의 목소리도 들렸다.

창밖을 보니 잔디밭에 드러누운 무열에게 아이가 공을 들고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길래 책 읽는데 왜 나가서 놀자고 해써.”

절 방해한 무열이 야속한지 타이르기까지 했다. 아이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끙끙거리며 일부러 신음을 뱉던 무열이 와락 아이를 잡아 제 몸 위로 껴안았다.

“잡았다, 이놈! 일부러 아빠 힘들게 하려고 공을 엉뚱한 곳에 보냈지!”

“아빠, 시러! 간지러!”

“아빠를 놀린 벌을 받아야지!”

“아빠도 나 방해해짜너!”

또박또박 말대꾸하면서도 간지러워 아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간지럽히는 손은 곧 멈췄고 무열은 아이가 사랑스러워 뺨에 입 맞추었다. 평소에도 종종 그러는지 애정 공세를 귀찮아하며 아이는 붉은 뺨으로 심드렁하게 다른 곳을 보았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재강원은 문득 이 저택에서 아이 웃음을 들은 적이 있는가 생각했다. 재민용, 재민석이 어릴 때는 주로 집에 없었던 적이 많았고 예의범절이 엄격해 집 안에서 뛰어다니지 못하게 했다. 놀이는 많기에 굳이 정원에서 몸을 더럽히며 뒹굴 일은 없었다.

똑똑, 노크는 크지 않았다.

“들어와.”

집사였다.

“오전에는 뭘 했지?”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는지 7시에 일어나셔서 식사하셨고 진우 님께서 서재의 책을 봐도 되냐고 물으셨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것 외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신경 써.”

“네. 그리고.”

재강원은 집사의 말을 막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에 직원에게, 진우 님과 드실 식사는 일부러 차려 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답니다. 본인이 챙겨 드시겠다고요.”

“그 서민 근성은 여전하군.”

무열은 대학교 때 재강원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 준다며 순대 국밥집을 데려가고 재래시장에 데려가 떡볶이를 사 주었었다.

‘이런 거 먹어 본 적 있어?’

음식을 뒤섞어 맛이 여기저기 다 배여 고유의 맛을 없애 버리고, 조미료와 달고 짠 맛으로 모든 미각을 대변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저렴한 음식이었다.

뭐가 대단하다고 굳이 그런 음식을 사 먹을까 의아했었다.

제 입맛에 잘 맞을까 걱정하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나쁘지 않아 맛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학생의 이무열은 기뻐했었다.

집에서도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제 할 일을 하는데 마음이 불편하다며 무열은 스스로 했었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 * *

재강원은 자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저녁은 보통 속에 부담 없는 한식이 차려졌다. 조갯국과 갈치조림이 메인으로 나왔고 매끼 겹치지 않는 반찬 구성으로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 식사하는 부자의 식단은 달랐다.

“아빠, 치즈도.”

“여기, 아.”

“아아.”

노릇노릇한 튀김을 반으로 잘라 들어 올리자 하얀 치즈가 주욱 늘어났다. 아이의 입에 넣자 진우가 기분 좋게 바삭바삭 씹었다.

사진으로는 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 번도 그의 집 식탁에 올라온 적 없는 음식이었다.

“그건?”

“치즈 돈가스?”

무열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아들었다.

“아, 진우가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았다고 하니까 주방에서 만들어 주셨어. 애들이 좋아한다고. 맨날 할머니가 해 주는 반찬만 먹다 보니까 돈가스 해 줄 생각을 못 했지 뭐야.”

재강원의 집에서는 재료 본연의 맛을 최대한 살리고 몸에 좋은 제철 식재료를 이용해 건강한 식단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튀김은 야채 튀김을 위주로 했고 고기는 구이나 찜, 육 사시미 등으로 즐겼다.

잡다한 양념의 진한 소스로 본연의 맛을 가리는 돈가스 같은 근본 없는 음식, 특히 치즈까지 섞어 튀기는 음식은 절대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

재강원은 갈색 소스가 뿌려진 돈가스를 노려보았다. 윤기가 돌고 빵가루의 바삭함이 살아 있어서 아이가 입에 넣고 씹자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밥 먹고 가서 잘 먹었다고 꼭 인사해. 내일은 함박 스테이크 해 주신대.”

그것도 먹어 보지 않았는지 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강원의 눈 또한 커졌다.

‘함박 스테이크?’

“함바스테크?”

“곱게 간 고기에 양념해서 동그랗게 만들고, 달짝지근한 이런 돈가스 소스를 뿌려서 먹는 거야. 먹으면 부드럽게 씹히면서 안에 육즙이 퍼지는데…… 먹어 보면 우리 진우도 좋아할 거야.”

꼴깍 재강원은 군침을 삼켰다. 함박 스테이크는 그도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었다. 애초에 먹을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 햄버거도 못 사 줬었지.”

무열은 그동안 먹고사느라 아이에게 소홀했구나, 반성했다.

“햄버거?”

“내일 간식으로 미니 햄버거 만들어 줄게. 함박 스테이크 만들려면 간 고기가 있어야 하니까 조금 떼어 달래서 만들면 돼.”

“우와! 아빠 최고!”

“이럴 때만 아빠 최고지. 맨날 아빠 무시하고 놀리면서.”

볼을 꼬집는 손이 부드러웠다. 아이를 향해 애정이 가득했다.

문득 그의 어머니도 무열처럼 저렇게 대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떠올랐다.

재강원의 아버지는 프라이머 알파지만 조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워낙 조부가 능력이 출중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조부는 재강원이 태어나고 로열 알파라고 진단받자 크게 기뻐했다. 손자가 다닐 학교를 창립하고 어릴 때부터 손수 교사를 선별해 교육했다.

재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이끌어 가기 위해 절제된 분위기 속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자기 자식이지만 함부로 애정을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웠다. 애정은 아이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하여 조부는 말로 칭찬은 해도 머리를 쓰다듬거나 꽉 안아 주지 않았다.

재강원은 들고 있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어졌다.

“내일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하세요. 물론 아이도 함께.”

“건강 검진?”

“아이 낳고 제대로 검진한 적이 있습니까?”

뻔히 아는 대답이지만 일부러 물었다.

“아니.”

돈이 없으니 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굳이 건강 검진까지는 하지 않는다.

“그 아이, 이미 알파로 발현해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기회에 제대로 진단받아 보세요.”

“아, 그렇지.”

떨떠름하게 듣고 있던 무열의 표정이 아이를 보며 풀렸다. 절 위해서는 받지 않아도 아이를 위해서는 거부하지 않았다.

“큰 곳에서 검진받아 본 적은 없지. 생각 못 했어. 고마워.”

자연스럽게 나온 감사 인사에 재강원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 저택에 무열이 들어오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야 겨우 대화다운 대화를 한 기분이었다. 무열과 대화를 몇 번 했지만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으니 말을 해도 금방 끊겼었다.

“고마우면.”

“아빠! 나 아!”

“오늘 잘 먹네?”

재강원의 말을 진우가 막았다. 돈가스를 한가득 입에 넣고 씹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아이는 씩 웃기까지 했다. 일부러였다.

“아빠, 오늘 가치 자.”

“진짜? 웬일이야? 다 컸다면서 혼자 자겠다며 아빠 버려 놓고?”

“잘 때 책 일거 주세요.”

“그래? 아빠가 동화책 읽어 줄게.”

“동화책은 재미업는데. 에휴, 알아써.”

아빠가 원하니 들어주겠다며 아이는 허락했다.

“애들은 동화책을 읽어야지.”

아이의 생각을 알면서도 무열은 입술의 소스를 닦아 주며 뺨에 입 맞추었다.

재강원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흡사 부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 * *

“내일 경비를 강화하고 혹여 도망치지 않게 잘 감시해.”

“네.”

“친자 확인 검사를 다시 하고.”

이미 결과를 아는 재강원이 재차 검사를 명령하자 수행 비서가 의아해했다.

“그럼 이무열 씨와도 해 두겠습니다.”

비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무열이 아이를 낳았지만 다른 아이를 데려다 키울 수도 있었다. 아무리 어촌 마을 사람이 낳았다고 증언했다지만 과학보다 신빙성이 있을 수 없다.

“그래. 행적은 어촌 마을에서 계속 역추적하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꼭 찾아내.”

“네.”

“그리고.”

말할 듯 말 듯 달싹이다가 재강원은 입을 다물었다. 수행 비서는 조용히 기다렸다. 무열을 찾은 이후 재강원은 서서히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다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그동안 미뤄 두었던 가문과 재단의 일을 하나씩 해결했다.

친척들이 아웅다웅하며 조금의 이권을 더 가지기 위해 들러붙었던 사업도 재강원이 나서자 깔끔하게 정리되며 뒷말 없이 받아들였다.

냉철한 로열 알파로 돌아왔다.

“내일.”

수행 비서는 말을 기다렸다. 조심스럽게 내뱉는 말이니 중요한 사업이 분명했다. 앞으로 재강원의 지시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두근거렸다.

“아이 저녁은 함박 스테이크라던데.”

“……네?”

“내 것도 같은 메뉴로 하라고 해.”

* * *

이무열이 그의 집으로 온 이후 재강원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이무열은?”

그가 돌아올 때 무열이 마중을 나온 적은 없었다. 서운함은 없다. 돌아온 집에 이무열이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묻는 요즘의 질문은 일관되어서 집사는 빠르게 대답했다.

“진우 도련님과 주방에 계십니다.”

“주방?”

이 집에서 도련님이라고 불릴 사람은 재민용과 재민석뿐이지만 직원들은 이진우도 똑같이 호칭했다. 다시 검사한 친자 확인의 결과는 똑같았고 이무열의 아이로 나왔다.

“네,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시겠다고 해서 요리를 배우고 계십니다.”

“한식 조리사 자격증?”

처음 듣는 자격증이었다.

“네, 나중에 작은 식당을 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요.”

그 말을 할 때 무열은 ‘이 저택을 나가면’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집사는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무열이 저택으로 오고 재강원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무기력함은 없어지고 예전의 재강원으로 돌아갔다. 저택은 아이의 웃음으로 활기가 생겼다.

차가워 가까이만 가도 얼어붙는 분위기를 풍기던 주인이 겉으로는 무표정해도 냉기가 없어졌다. 간혹 부드럽게 미소를 띠기까지 하니 모시는 직원의 입장에서는 무열이 계속 저택에 있기를 바랐다.

반면 무열은 직원들과 가까이 지내지만 언젠가는 나가게 된다는 미래를 버리지 않았다.

“식당? 요리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닌데.”

전에도 무열이 몇 번 음식을 해 주기는 했지만 즐겨서 하는 모습 같지는 않았다.

재강원에게 주방은 어릴 때 호기심에 가 보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장소였다. 식사는 다이닝룸에서 했고 방의 작은 냉장고에 차가운 음료가 항시 있으며 간식이 먹고 싶으면 직원에게 말하기만 하면 되니 주방까지 갈 일은 없었다.

집사를 물리고 그는 혼자 주방으로 향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잘 안 되네요.”

“연습하다 보면 늘어요. 실기 시험은 정해진 룰만 잘 지키고 깨끗하게 하면 반은 합격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선 필기에 합격해야죠.”

“필기 합격하고 2년 이내에 실기를 응시하면 되니까 같이 공부하면 되죠. 필기시험 어플도 있고.”

어휴, 무열이 한탄을 터뜨렸다.

“그러잖아도 깔아서 봤는데, 뭐가 뭔지. 말이 뭐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오래간만에 글자 읽으려니 눈도 아프고.”

“그래서 아빠가 나 책 못 일께 하는 거야?”

똘망똘망한 질문에 주방의 직원들이 웃었다.

“너는 너무 많이 읽어서 문제고. 애면 애답게 좀 뛰어놀고!”

“할머니네 있을 때는 하누가 있었는데.”

시무룩한 아이의 말에 주방 김 과장이 물었다.

“하누? 진우 도련님 친구예요?”

“유기견이에요. 누런 진돗개. 할머니가 밥을 챙겨 줘서 점심은 꼭 우리 집 와서 먹었거든요. 진우랑도 같이 놀고.”

“유기견이요? 무슨 병균이 있을지 모르는데.”

“하누는 갠차나요. 손 깨끄시 씨스면 되요.”

“그래, 맞아. 손 깨끗이 씻으면 돼.”

무열은 웃으며 아들을 칭찬했다. 김 과장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도련님들도 이렇게 자랐다면 좋았을 텐데.”

“재민용, 재민석이요?”

“네.”

김 과장은 오혜주가 시집오면서 채용해 아이들이 자라면서 주방 총괄을 맡게 되었기에 가족의 일을 계속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이렇게 진우 도련님 나이 때도 조용히 있어야 한다면서 뛰지도 못하게 했죠. 한창 사랑받으며 뛰어놀 나이인데.”

“각자 가정의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봐, 김 과장님도 넌 뛰어놀 나이라고 하잖아.”

“체.”

“어쭈, 이 녀석 봐라.”

“아빠아.”

진우는 분명 알파인데도 어리광을 피웠다. 알파로 발현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달랐다. 성격도 강하고 독립적이며 정이 많지 않았다. 진우처럼 감정이 풍부하지 않았다.

“무열 씨, 정말 이 집을 나갈 거예요? 계속 있으셔도 사장님이 뭐라 하지 않으실 텐데.”

“지금이야 그렇지만 저 변덕이 얼마나 가겠어요. 금방 귀찮아할걸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저는 김 과장님보다 오래 알았잖아요. 제 뜻대로 안 되어서 그렇지 이렇게 지내다 보면 결국 깨닫겠죠.”

지난 5년간 재강원이 무열을 찾아 왔기에 집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이무열에 대해 잘 알았다. 오래전 재강원의 놀이 상대였으며 애인으로 지냈다는 것도.

“뭐, 언제가 되든 간에 우리 진우랑 먹고살아야 하니 준비는 해 둬야죠.”

“진우 도련님이 떠나면 무척 보고 싶을 거예요.”

“저도요. 이렇게 뛰어나고 착한데 우리 사장님 아이가 아니라니.”

“아우, 이 주책은!”

“아, 미안해요.”

“신경 안 써요. 그 사람에게도 아들이 둘이나 있잖아요. 우리 진우는 내 거고.”

“아빠, 무더짜나.”

“미안, 미안.”

무열은 대화를 더는 이어 가지 않았다.

다시 연습하는지 또각또각 칼질을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며 주방의 대화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탁탁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아이가 주방에서 나오다가 재강원을 발견했다.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눈을 똘망하게 뜨고 바라보았다. 제 친자식조차 아버지를 두려워하는데 진우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2층 방으로 향했다.

무열을 잡아 두었고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무열도 반항 없이 그를 따라 주었다. 도망갈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변덕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단다. 미래를 준비하면서.

아이와 사는 무열의 미래에 재강원은 없었다.

법률상으로 그들은 타인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재강원에게는 별거하지만 이혼하지 않은 부인과 자식 둘도 있었다.

‘이혼. 그래서 그런가. 결혼할 때도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했었지.’

그가 결혼했을 때 한동안 바쁘기도 해서 무열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하지 않으니 무열에게서 전화도 없었다.

결혼으로 파생되는 집안 행사와 업무를 처리하고 무열이 생각나 연락처를 확인했었다. 그때는 이미 연락 안 한 지 10개월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무열은 꽤 냉담하게 반응했었다. 울며 소리치고 그를 때렸지만 뜨겁게 안아 주니 풀렸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저의 결혼이 불편했다. 무열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하는 느낌.

단순히 법적인 가족에 불과하고 언제든 정리할 수 있는 비즈니스 관계였지만 타인에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무열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

“슬슬 정리할 때도 되었지.”

오혜주는 미국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서로 원하니 원만하게 정리할 수 있다.

* * *

“변호사 통해서 처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은 없고?”

“네. 제안을 받아 보시고 흔쾌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오혜주와 이혼을 하기로 했다.

재씨 가문으로 온 이후 그녀가 맡았던 서초의 20층 빌딩은 혼인 선물이기에 오혜주의 몫이었고 그 외 성남과 제주, 세종시의 건물 하나씩을 위자료 목록에 넣었다.

언론과 출판 등에 재씨 가문의 일을 노출하지 않는다는 비밀 유지도 포함되었다. 오혜주 측에서 거부한다면 협상과 협박이 따르겠지만 원만히 정리되는 듯했다.

수행 비서의 보고를 들으며 서재 문을 열었던 재강원은 그대로 멈췄다. 뒤따르던 비서가 의아해했다.

“그래. 가 봐.”

“네.”

재강원은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서가의 높은 곳에 있는 책을 내리기 위한 놓아둔 작은 삼각 사다리에 이진우가 앉아서 그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 든 책은 내년도 경제 분석이었다.

아이는 눈만 깜빡이다 재강원과 잠시 눈싸움으로 대치했다. 그도 아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무열과 대화를 할라치면 이 아이가 중간에 끼어들어 방해하고 오붓하게 단둘이 있을 시간도 없었다.

눈을 부라리며 아이를 보고 있자 겁먹지도 않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더니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가 봐준다는 표정이었다.

“글을 알기는 하나?”

“간심 꺼.”

책상에 올려진 보고서를 들던 재강원의 손이 멈췄다.

“이무열이 어른에게 존대해야 한다는 예의도 안 가르쳤나?”

“아빠는 버릇 업는 노믄 무시하라고 해써.”

한마디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같은 어른이었다면 비웃을 텐데 네 살짜리가 혀 짧은 소리로 말하니 성질이 올라왔다.

“건방진 녀석.”

“당신보다는 차케.”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너, 너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너 낳아 준 이무열 말고.”

이무열이 누구와 붙어먹어 아이를 낳았는지 아직 찾지 못했다. 병원이나 병원을 나온 직후에 생긴 아이인데 딱 그때만 행적이 묘연했다.

아이가 갸우뚱했다.

“아빠 말고 아버지?”

“그래. 부모 두 사람이 있어야 아이가 태어나잖아. 그러니 네 아빠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해 들은 것 없어?”

“아빠는 내가 기적으로 생긴 아이래써.”

“모르면 됐고.”

기적, 웃음만 났다.

아이 상대로 유전적 부친을 말할 리 없었다. 괜한 시간 낭비였다. 재강원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았다.

그동안 미루었던 일을 하나둘 처리 중이었고 그가 소홀했던 사업들을 맡아 주었던 이들에게는 그만한 보상을 주었다.

비서에게 전화 걸어 지시하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재강원은 시선 한쪽에 자리 잡은 아이를 보았다. 네 살짜리가 두 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짜 책을 읽는 사람처럼 책장도 한 장씩 꾸준히 넘어갔다.

‘원래 아이란 정신없고 소란스럽지 않던가?’

아들들이 어릴 때 같이 식사를 하면 관심을 끌고 싶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말을 듣고만 있어도 피곤해졌는데 이진우는 아이 같지 않게 얌전했고 같은 공간에 오래 있어도 그에게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기특했다.

“개를 좋아하나?”

“어, 개? 좋아하는데 왜?”

얌전해도 아이인지라 ‘개’라는 단어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왜 묻나 경계했다.

“보안 팀에 하얀 진돗개가 있는데 이번에 새끼를 낳았다. 훈련소에 보내서 훈련을 시킬 거라는데, 줄까?”

무열의 아이였다. 관계가 나쁠 필요는 없었고 아이니 선물만 주면 쉽게 호감을 살 수 있다. 진우의 눈이 커지며 반짝거렸다. 보고 있던 책도 무릎에 안착했다.

“진도깨면 하누? 하얀 하누?”

“그래, 작은 강아지. 이만한.”

지나가면서 스치듯 본 크기를 어림잡아 손으로 알려 주었다. 마치 그 손에 강아지가 있는 듯 아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강아지.”

“며칠 뒤에는 훈련소에 보내니까 원한다면 지금 말해.”

반짝거리며 동그랗던 눈이 시무룩하게 처졌다.

“못 키워. 강아지 안 돼.”

금방이라도 달려와 ‘주세요’라고 말할 것 같던 아이가 체념하며 책으로 눈을 돌렸다.

“왜? 준다니까? 네가 키운다고 하면 같이 놀아 주기만 하면 돼. 사료는 직원들이 주고 배변훈련도 직원들이 알아서 해. 강아지와 놀고 싶지 않나?”

주고 싶어 구차하게 매달리며 설득하고 있었지만 재강원은 자각하지 못했다.

“아빠가 우리는 곧 나갈 거라고 했어. 할머니 집 작아서 강아지 못 키워.”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네 할머니 내가 돈 많이 줘서 이제 부자야. 집도 넓고.”

“안 돼. 아빠가 아저씨에게는 아무것도 받으면 안 된다고 해써.”

재강원은 허탈해 웃음이 났다. 이미 철저히 교육해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아이와의 바운더리에 재강원을 절대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진우! 이진우, 어디 있어?”

아이를 찾는 무열의 목소리가 복도에서 들렸다. 아이가 일어나려고 하자 재강원이 먼저 일어났다.

“책 보고 있어. 네 아빠라는 사람과 할 얘기가 있으니까.”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지만 책은 보고 싶은지 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재강원은 복도로 나가 서재 문을 닫았다. 그를 보고 무열이 다가왔다. 아이가 보이지 않아 당황해 표정이 흐트러졌다.

“우리 진우, 봤어? 두 시간째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아.”

두 시간 동안 찾았다면서 그에게는 어떤 일언반구도 없었다. 같은 집에 살지만 무열은 절대 재강원에게 기대지 않았다.

‘뭘 기대했지?’

애초에 무열은 재강원에게서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가 싫어서.

“그만큼 아이와 시간을 보내게 해 주었으면 충분하지 않았나요?”

서늘한 목소리와 눈빛에 무열의 눈이 커졌다. 그는 무열의 팔을 움켜잡았다.

“이제 도망친 벌을 받을 시간입니다.”

* * *

벽을 치든 바운더리에 넣지 않든, 경계를 하든 상관없다. 무열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원하고 그가 바라고 그가 하고 싶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무열을 끌고 가 침대에 던졌다. 침대에 강제로 눕히자 놀라 올려다보는 표정에 눌러 두었던 욕구가 튀어나왔다. 재강원은 넥타이를 풀며 페로몬을 쏟아 냈다. 무열도 오메가이니 그의 페로몬을 느꼈다.

“읏!”

짙은 향기에 무열은 팔로 코와 얼굴을 가렸다. 그런다고 로열 알파의 페로몬을 막을 수 없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쓸데없이 감상에 젖어 제 성미에 맞지 않게 무열을 부드럽게 대했더니 분수를 모르고 떠날 궁리만 한다.

셔츠를 벗고 침대 위에 무릎을 올렸다. 무열의 허벅지 옆으로 무릎이 닿았지만 저항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기다렸군.’

궁핍한 환경 속에서 자존심상 그를 찾아올 수 없으니 찾아오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먼저 손을 내밀며 ‘강제로 당했다’는 구실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계기.

끝난 관계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계기일 뿐이다.

짙은 페로몬을 무열에게 쏟았다. 제 페로몬으로 흠뻑 적셨다. 사고가 나기 전의 뜨거웠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의 페로몬에 녹아내리며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구멍을 열어 쑤셔 달라고 요구하던 사람이었다.

페로몬을 흘리면 뒤로 질질 애액이 넘쳤고 풀어 줄 필요도 없이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뜨겁게 조이던 내부가 5년 전의 일임에도 생생했다. 몸이 뜨거워졌다.

재강원은 더운 숨을 뱉으며 입술을 핥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얼굴을 가리고 다리 사이에 누워 있는 무열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음흉한 상상이 떠올랐다.

아이를 가진 남성 오메가도 젖이 나온다. 이무열도 그랬을까.

오직 재강원만 물어 본 그 젖꼭지를 아이에게도 물렸을까.

그가 공들여 빨아 검붉고 민감해진 그것을 다른 사람도 빨았을까.

무열의 니트를 올렸다. 색은 짙었지만 예전만큼 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이를 키우는 사이에는 다른 사람이 빨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혀를 내밀어 핥았다. 젖 냄새는 나지 않았다. 재강원은 집요하게 양쪽을 번갈아 가며 빨았다. 가슴을 그러모아 소담하게 올라올 수 있도록 만들어 입에 넣고 한껏 빨았다. 혀끝을 세워 젖꼭지를 간지럽히고 무열이 느끼던 대로 이빨 사이에 끼워 가볍게 잘근거리다가 당겼다.

추웁, 추웁 그의 머리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나며 거친 숨이 가슴을 훑었다.

“이무열,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마.”

이 몸이 그리웠다.

초등학교 때 연이은 수업이 피곤해 집에 돌아가지 않고 놀이터에 앉아 있으면 어느새 그의 곁에 무열이 앉아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사 온 하드를 먹으라고 그에게 주었다. 합성 착향료의 저렴한 단맛은 양치를 해도 입 안에 맴돌았었다.

“질려 버려질 날을 기다리겠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아.”

식사할 때 크게 웃고 떠들어도 된다고 무열 때문에 알았다.

“절대 놔주지 않아,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너는 내 거야. 그 피 한 방울, 뼈, 그 몸은 모조리 다.”

피부를 쓸며 손을 내렸다. 마른 근육을 지나 그의 페로몬에 흠뻑 젖은 무열의 성기를 눌렀다. 뻣뻣한 재질의 천이 닿았다.

재강원은 고개를 내려 무열의 하체를 보았다. 바지 안의 것은 말랑했다. 무열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방 안에 그의 성페로몬이 가득 차 있고 무열의 몸에 쏟아부었는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오메가 이무열은 이미 5년 전에 죽었어.”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무열의 목소리에 열은 없었다. 가슴이 빨리고 애무당했지만 당황도, 흥분도 없었다.

팔을 내렸지만 얼굴에 홍조는 없었다. 무덤덤한 눈이 경악한 재강원을 올려다보았다.

“우리 진우를 낳자마자 페로몬이 딱 끊겼어. 덕분에 좀 편했지. 억제제 살 돈이 굳었거든.”

진심인지 짧은 웃음을 흘렸다. 페로몬은 알파와 오메가에게 정체성과 마찬가지였다. 본질이었다.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는데 이무열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하고 싶으면 해. 그걸로 네 성이 풀리고 나한테 더 빨리 질린다면 몇 번이든 뒤를 대 줄게. 평생 그랬으니 몇 번 더 하든 상관없어.”

“페로몬이 나오지 않는다니, 오메가인데, 페로몬이 나오지 않으면 큰일인데.”

친자 확인을 보느라 이무열의 건강 검진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어차피 평생 억제제를 먹으며 베타로 살았어. 페로몬은 없이 살았으니 불편하지 않아.”

“불편한 일이 아니라!”

재강원은 턱에 힘을 주며 입을 다물었다. 그 페로몬을 나오지 못하게 막아 놓은 것이 재씨 집안이고 그의 어머니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속이 울렁거렸고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괜찮아. 당신은 날 사랑하잖아. 메말랐어도 알파의 페로몬을 받다 보면 다시 젖겠지. 다시 나올 거야.”

“사랑했었지. 예전에는 사랑했었어.”

희망은 무열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재강원은 자신을 얄팍한 말로 속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당신에게 심장이 뛰지 않아.”

마음의 사망 선고에 희망은 와르르 무너졌다. 창백해지는 재강원의 얼굴을 보아도 무열은 걱정도 들지 않았다. 조금은 안쓰러웠다.

“우리 진우가 알파로 발현할 거라고 들었을 때 걱정했어. 로열 알파가 될 확률이 높다고 했지. 알파는 차갑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배려를 모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더라.”

부드러운 미소가 이무열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우리 진우는 섣불리 사탕을 받지 않아도 힘들어하면 옆에 앉아 줄 줄 알고 괜찮아, 하고 물어. 자기 또래나 저보다 어린 아이를 귀여워하고 약한 강아지도 좋아해. 상처 입힐까 봐 세게 만지지도 못하지. 알파라도 당신과 참 달랐어.”

재강원은 어릴 때 보았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직원이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어 똑같은 시간이 뒤면 뒷마당에 나타났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질색해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워 보니까, 당신이 참 불쌍해지더라. 제대로 사랑받으며 자랐으면 당신도 이렇지 않았을 텐데.”

제발 놓아 달라는 말보다 지금의 말이 더 강하게 그를 거부했다. 무열의 마음에 그가 있을 자리는 단 한 점도 없었다.

다급히 말했다.

예전에 오혜주가 이무열을 찾지 못해 엉망이 된 그를 보며 실연당한 사람 같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알았다.

실연이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생기는 것임을. 그는 이무열을 사랑했다.

“안 돼, 안 놔. 놔줄 수 없어! 나도 사랑해. 나도 이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이제!”

진심도 때가 있다.

“당신은 아직 몰라.”

무열은 씁쓸했다. 절박하게 외치는 모습도, 그 말도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자기 마음을 강요하는 행동은 사랑이 아니야. 상대에게 사랑받으려고 행동하고 그 사람을 배려하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해야지. 나도, 그걸 몰랐어. 내 사랑만 당신에게 강요했었지.”

사랑에 빠져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달렸던 젊은 날을 이제 웃으며 추억할 수 있었다. 그때 사랑했던 남자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했다.

아, 나도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때가 있었지, 하고.

그 그리움에 재강원은 없었다.

“이제 달라질 수 있어, 나도 알았으니 바뀔 수 있어!”

말은 닿지 않았고 무열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피어올랐던 마음은 오랜 풍화와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열은 이제 재강원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재강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을 감싸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등을 굽혀 몸을 옹송그렸다. 벗은 등이 이무열의 몸을 감싸며 떨렸지만 팔로 감싸 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쉬던 재강원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재밌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작게 웅크렸던 몸이 커지고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강한 로열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붉어진 그의 눈에 물기는 없었다.

“당신의 남은 평생을 가지는 대신 내 평생도 걸겠어. 죽기 전까지 그 마음을 움직여 보지. 집요하고 이기적인 알파니까.”

무열의 뒷덜미를 움켜잡아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잡아먹을 듯이 삼켰다.

격한 공격에 평온했던 무열은 당황하며 그를 밀어냈지만 혀가 빨리며 목 안쪽까지 침범당해 범해졌다. 굵직한 살덩이가 입 안을 헤집고 점막을 사납게 문질러 생리적으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헉, 콜록, 콜록!”

그가 놓아주자마자 무열은 기침하며 침대에 엎드렸다.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턱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형형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로열 알파를 보며 무열은 짧게 몸을 떨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지나갔다.

“대 준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이렇게 봐주지 않습니다.”

재강원은 선포하고 방을 나갔다.

문을 열자 이진우가 서 있었다. 한참이나 큰 그를 노려보았다. 기백은 성인의 알파 못지않았다.

만약 이무열과 저의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까.

잠시의 달콤함을 삼키고 재강원은 피식 웃으며 아이를 지나갔다.

* * *

재강원과 이무열은 평행선 위에 서 있었다. 서로 바라는 바가 달라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평행선이지만 멀리 바라보면 그 끝은 서로 가까워졌고 어딘가에서는 끝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눈의 착시라도 재강원은 기꺼이 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로열 알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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