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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뱀은 무척이나 작았고 햇빛에 반사되어 하얀 비늘이 더욱 반짝거렸다. 계속 시선이 느껴졌는지 제르펠 쪽으로 다시 휙 고개를 돌렸고 서로의 눈이 맞았다. 제르펠은 뱀의 새빨간 눈이 동글동글해서 언뜻 무척 순해 보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마치 뭘 보냐고 시비를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혀를 계속 내밀고 입을 멍하니 벌리는 것이 넋이 빠져 있는 듯했다.
분명 관심이 생긴 이유는 그것일 것이다.
옆에서 세드릭이 잔소리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말했다.
“세드릭. 시끄럽다. 그건 그렇고 왜 뱀이 이곳에 있지?”
“네? 이런 곳에 뱀이 있을 리가…….”
옆에서 처리하겠다는 세드릭이 검을 뽑자마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뱀이 세드릭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기겁을 하고 다른 곳으로 기어갔다.
뱀은 세드릭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아는 건지 온 힘을 다해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그 모습이 제르펠의 눈길을 잡았다. 제르펠은 뱀이 눈앞에서 싸늘하게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거슬려졌다. 그는 옆에서 난리 치는 세드릭의 검을 거두게 하였다.
세드릭의 검을 거두게 하니 생명의 은인인 마냥 눈이 말똥말똥해져서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도 비늘이 괜찮다고 하자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자신의 비늘에 감추더니 꼬리로 땅을 탁탁 치고 있었다.
행동이 마치 사람 같군. 내 말을 알아듣는 것도 같고…….
제르펠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상상력도 풍부해졌군 하며 생각을 지웠다. 뱀에 시달린 기억도 많아 오히려 싫어하는 축이었는데 막상 대놓고 감상하니 햇빛에 비쳐 반짝거리는 비늘이 볼 만은 했다. 제르펠은 시기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시기는 겨울잠을 자는 시기로 뱀이 나올 리도 새끼가 태어날 시기도 아니었다. 가만히 둔다면 추위로 죽을 것이다. 제르펠은 다시 한번 뱀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표정 변화가 다양해. 재미있군.”
“네?”
“기뻐하고 있지 않으냐.”
제르펠은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세드릭에게 말했지만, 세드릭의 입장에서는 바닥을 꿈틀거리고 있는 뱀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전하가 이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면전에 대고 말했다간 오히려 자기가 썰릴 것 같아 입을 꾹 닫고 뱀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그냥 혀를 날름날름 거리는 평범한 뱀일 뿐이었다. 물론 이상하게 몸을 비비 꼬는 것 같긴 하지만 표정 변화가 다양하다는 전하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로부터 백사는 신의 사자라고 하지.”
“예…… 솔직히 보기 힘드니까요.”
“아일펠트 제국은 물에 축복받은 나라지. 그래서 수신의 존재를 믿고 있지. 거기서 백사는 신의 사자라 하더군.”
기우제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는데 눈앞에 잘 보이지도 않는 백사가 나타나다니. 딱히 신을 믿지는 않지만 이렇게 타이밍 좋게 나타난 거로 보아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라는 건 지어내기 나름이니. 뱀은 당황한 건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도 입을 떡하니 벌려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입안에 있는 혀까지 드러내면서.
아니 사실 그건 변명에 불과할 수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뱀이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뱀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몸을 제르펠 쪽으로 내밀었다. 시선을 계속 맞추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르펠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뱀에게 내밀었다.
“이리로.”
그 손을 바라보던 뱀은 이내 슬금슬금 기어 왔고 손목에 감겼다. 뱀은 애교를 떨 듯이 얼굴을 손목에 비벼왔고 입맛을 다시는 건지 핥고 싶은 건지 혀가 계속 손에 닿아 간지러웠다.
그런데 너무 작군. 겨우 내 손에 올라갈 만하니. 많이 먹여야겠어. 손을 갖다 대니 순간 움찔하는 모습을 보여 잠시 멈추었다가 긴장을 풀자 한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기분 좋다는 듯이 색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데려가기로 했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지.
“슈이렌. 앞으로 너의 이름은 슈이렌이라고 하지.”
기억하겠다는 듯이 슈이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꼬리에 머리를 파묻고 잠이 들었다.
자 그럼 이제 불청객을 보러 가 볼까? 예정보다 시간이 길어졌긴 했지만, 그의 걸음은 느긋했고 얼굴에는 자신도 모를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혹시라도 떨어질라 뱀을 감싸 안은 채 응접실로 걸어갔다.
* * *
응접실 앞에는 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르펠이 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그는 도착하자 문을 열려고 했지만 제르펠이 이를 막았다.
“쿠션을 가져오도록. 아, 혹시 모르니 담요도.”
영문 모를 명령에 어리둥절하며 제르펠을 바라본 이안은 이상하게 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설마 상처가 생겼나 싶어 당장 시종을 시켜 신관을 불러오라고 했다.
“그게 아니다.”
제르펠은 손을 풀어 안에 있던 생물체를 보여 주었다. 마치 하얀 팔찌처럼 보였지만 부풀었다 줄어들었다 하는 모양이 숨을 쉬고 있다고 알리고 있었다.
“전하…… 그것은…….”
“슈이렌이라고 한다.”
이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슈이렌과 제르펠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언제 그랬다는 듯이 노련하게 표정을 감추며 재빨리 옆에 있던 시종을 시켜서 쿠션과 담요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러고는 조심히 손을 뻗어 데려가려고 했다.
“전하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흠 잠시 내가 하지.”
제르펠은 손목에 매달려 있던 슈이렌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면서 떼어 냈다. 그사이 시종이 들고 온 쿠션을 공손히 내밀었고 그 위에 슈이렌을 올려두었다. 슈이렌은 꿈틀거리면서 잠결에 사라진 온기를 찾으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런 잠이 깨 버렸나.”
그가 슈이렌의 머리를 다시 쿠션에 눕혔다. 슈이렌은 그를 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안심한 듯 다시 자세를 잡고 웅크려 잠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런 제르펠의 모습이 놀라웠지만, 조금 전처럼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세드릭에게 눈빛으로 물어봤지만, 그는 왜 그러냐는 듯이 오히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슈이렌에게 어떤 대우를 해야 할지 고민이었던 그는 제르펠의 의도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이 뱀은 어인 일로 데려오셨습니까. 동물이라고는 질색하지 않으셨습니까?”
질문한 이안을 잠시 눈으로 흘겨본 그가 말하였다.
“백사는 보기가 드물지. 게다가 소문이란 건 지어내기 나름이니.”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의아하다가 백사와 소문……. 그 뜻을 알고 이안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역시나 나름의 이유가 있어 데려오셨구나 하며 감탄을 했다.
“……귀엽기도 했고 나름 나쁘지는 않더군.”
하지만 그의 말은 속삭임에 가까워 어찌할지 머리를 굴리던 이안의 귀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얘기를 끝내고 올 터이니. 뱀에 대해 아는 자를 부르도록.”
응접실에 들어가려고 하던 제르펠은 곤히 자는 슈이렌을 보고는 아직 거처를 정해 주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 말을 덧붙였다.
“내 방으로 데려가.”
그 말을 끝으로 제르펠은 세드릭을 대동하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은 방에 데려다 두라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무나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시종, 시녀 심지어 자신이나 세드릭도 방에 출입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분이 방에 데려다 놓으라 하다니……. 이용하는 목적으로 데려온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 작은 뱀이 마음에 드셨나 보다. 역시 아까 느낀 상냥함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상하더라도 명령은 명령. 아무나 함부로 전하의 방에 출입시킬 수 없어 이안은 자신이 직접 걸음을 옮겼다.
* * *
응접실에는 하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하얀 옷이었지만 새긴 금 자수는 그 옷의 가격을 짐작하게 했고, 과하게 금이 반짝거렸다. 그는 신의 종자라고 하기에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들어오는 이를 보고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먼 길 오느라 수고했군. 교황. 먼저 연락을 했다면 이리 기다리는 일이 없었을 것을…….”
“아닙니다. 귀하신 분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요.”
분명 몇 번이나 서신을 보냈지만 무시했던 건 제르펠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교황은 모르는 척 대답하였다. 한차례 날카로운 시선들이 오가고 맞은편에 앉은 제르펠이 손을 들어 시종에게 차를 달라고 하였다.
“아, 앉지.”
마치 깜빡했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손짓으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제야 교황은 고개를 들고 마주 앉았다. 둘은 안부를 물으면서 대화했지만, 속뜻은 절대 좋지 않았고 눈빛 또한 날카로웠다. 교황은 문 쪽에 서 있던 세드릭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 기사가 있어야 하는지요.”
“나의 죽음을 바라는 자가 많더군. 혹시라도 모를 상황을 대비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아니! 그런 불손한 자가 있답니까! 전하의 목숨보다 중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의 말을 들은 제르펠은 똑바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정말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혹시나 큰 상처를 입게 된다면 언제나 불러 달라고 이야기했다.
요즘 암살자를 보내는 자 중에 저자도 있을 텐데 참으로 능글맞군.
서로 속마음을 숨긴 채 안부를 주고받다가 이제 차가 반쯤 남았을 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벌써 비가 오지 않은 게 몇 달인지…… 다행히 지금은 겨울이라지만 봄에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큰일입니다. 아, 제가 보낸 서신은 보셨습니까?”
“서신이라면 잘 받았지.”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기우제는 꼭 해야 합니다. 유례없는 가뭄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지고 있습니다. 전하. 이제 전하의 대답만 확실하다면…….”
그 말에는 이미 황제의 허락은 떨어졌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제르펠은 입가를 손으로 가려 고심하는 하는 척하였고 잠시 침묵이 유지되었다. 서신을 받은 순간 기우제를 하게 될 것이라는 건 알았다. 백성들의 불만이 섞인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는 것을 미뤄 곤란하다는 표현을 하여 상대의 방심을 유발한 것뿐이었다.
“……그러지.”
“다행입니다. 아, 폐하께서는 전하께 주최를 맡기신다고 합니다. 백성들에게도 친숙한 분이 좋으시겠죠. 무려 영웅이 아니십니까. 기우제는 전하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릴 좋은 기회라 생각됩니다.”
제르펠이 승낙의 말을 꺼내자 교황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웅이라……. 과연 영웅이라 칭할 수 있다는 게 의문이군. 교황의 말에 대놓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그는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본래의 목적이 끝나고 사소한 말을 주고받은 뒤 교황은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하고는 떠났다.
제르펠은 밀린 일들을 하기 위해 집무실로 걸어갔다. 응접실의 상황을 지켜보았던 세드릭은 무척이나 화내면서 말했다.
“참으로 뻔뻔한 자입니다. 전하께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니까 이번 기회…….”
“조용. 언제 어디서 누가 듣고 있는지 모른다. 돌아왔을 때부터 각오한 바 아니던가.”
그의 말을 듣고는 세드릭은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전쟁터에서 만났을 때부터 항상 곁에서 모셔온 분이다. 저분이 처한 상황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끔찍한 지옥 속에서 같이 굴렸고 끝내 살아남았다.
나 또한 전하처럼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동질감을 느낀다는 건 불충하겠지만, 그의 옆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 거기나 여기나 목숨 부지하기 힘든 곳인 건 마찬가지니.”
“언제까지 따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주군.”
제르펠은 예를 갖추는 세드릭을 깊고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쟁이 끝난 그 날 자신의 피인지 다른 자의 피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온몸에 뒤집어쓴 채로 그저 검만을 휘두르고 있었을 때, 상대편의 퇴각 소리가 들리고 주위에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기뻐하고 있을 때도 고민했었다. 전쟁터에 있게 된 순간부터 고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과연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주위에는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제르펠은 그저 멍하니 기뻐하고 있는 자들을 지켜보며 더는 검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악착같이 쥐고 있던 손의 힘이 풀리고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검을 주워 드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전쟁터가 아닌 그 어디에서도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어리석긴. 아직도 변함이 없더냐.”
제르펠은 그런 그를 지나치며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지 않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그저 밝았다.
“하지만 비가 안 오는 건 큰일이군. 어디에나 어설픈 생각을 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반응은 비웃음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