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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은 슈이렌을 떼어 놓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하는 회의는 황제와 교황 그리고 중앙 귀족까지 참석하는 회의였다.
홀로 두는 게 이리 마음에 걸리다니.
아까 보았던 눈빛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다. 그 눈은 꽤 충격받은 눈이었으니까. 슈이렌의 원망스럽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눈이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그 사실을 슈이렌이 알았다면 화를 냈겠지. 꼬리로 때릴 것이 분명했다. 슈이렌에게 시종을 붙이기는 했다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는 제 생각에 놀라워했다. 언제부터 이리 마음을 주게 된 것인가.
미세하게 미소 지은 그는 곧 회의실에 도착했고, 감쪽같이 미소를 지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회의실 앞에 선 그를 보며 기사들이 문을 열었다. 그는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가장 상석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제르펠은 상석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옆을 보니 저번에 봤던 교황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려 답해 주고 주위의 얼굴들을 둘러봤다.
다들 한몫 챙기려는 마음만 있는 자들이었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품격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전쟁과 가뭄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정치에 관심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재산을 불린 썩어 빠진 귀족들이 넘쳐나는 시국이었다. 특히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세금이었다. 제국에서 정한 세금율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근과 전쟁으로 고생하는 백성의 세금율을 무리하게 높였다. 황제는 황궁으로 들어오는 세금만 무사하다면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되는 백성들이 수두룩했다.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수는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얼마쯤 흘렸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우렁찬 소리로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그는 뒤에 많은 사람을 대동하고 들어왔으며 눈이 찌푸려질 만큼 화려한 장신구들이 달린 복장이었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가장 상석인 의자에 턱 앉았다.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가 들어오자 너 나 할 것 없이 일어서 고개를 숙였고 그가 손짓하자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귀찮다는 듯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지.”
그 말과 동시에 주변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처음에는 세금에 관한 문제였다. 국경 부근은 아직도 전쟁에 의한 피해가 남아 있는 상태에 기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폐하.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기근으로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는 국경을 지키고 있는 백작가의 가주로 원래는 거리가 멀어 참석하지 않지만 도움을 요청하고자 온 것이었다. 그의 옷이 현 상황을 알려 주듯이 장식품 하나 달리지 않는 옷차림새였다. 귀족 중에는 비싼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자가 있어 그 대비가 더욱 선명했다. 한 귀족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기근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요. 예외를 두면 안 됩니다.”
즉 반대하겠다는 말이었다. 중앙 귀족들은 대부분 안전하게 수도에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끝난 전쟁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쟁 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였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다른 곳이 세금이 줄면 자연스레 자신의 세금이 늘어나기에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것이었다. 예상대로의 일이었기에 제르펠은 웃음이 나왔다. 황제는 다리를 꼰 상태로 거만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근은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라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제르펠은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눈치를 보던 한 귀족이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전하. 하지만 전쟁 중에 충분한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지원? 무슨 지원을 말하는 거지? 식량? 보급품?”
그가 살벌하게 이야기하자 찔리는 곳이 있던 귀족들은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실제로 식량이 도착했지만 모래를 섞어 무게를 더 나오게 만들었고, 보급품은 제대로 도착한 적이 드물었다. 황제는 제르펠이 죽기를 바랐으니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일이 많았고 그걸 눈치채지 못할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보급품이 제대로 도착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럼 전쟁으로 남은 피해는 한 영지의 것이라면 그 전쟁으로 얻는 전리품 또한 어느 정도 주는 게 맞지 않겠느냐.”
귀족에게 하는 말인 듯했으나 그건 황제에게 하는 말이었다. 전리품은 모두 황실에 바쳤기 때문이다. 지금의 체제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 황제에 질린 귀족들,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족이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에 도움을 줘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그들의 편의를 봐주어 세금 비율을 줄여 달라고 요청했다. 제르펠과 싸운 자들은 그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내심 혁명을 원하는 자들, 황제의 폐위를 원하는 자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편을 들었다. 제르펠은 이미 황제를 대신해 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에 그의 능력을 인정한 귀족들도 있었다. 그리고 제르펠과 서신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 회의는 정리하자면 황제파와 황태자파들의 싸움이었다. 두 파의 싸움이 점차 격해졌다. 황제가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아 황태자파가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는 추세가 되었다. 그러자 황제파 귀족들은 자신들도 기근으로 상황이 안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복장에서부터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기 전에 옷에 붙어 있는 그 화려한 장식품이나 떼시오.”
“무, 뭐라?”
“내가 틀린 말 했소?”
이건 회의라기보다는 싸움판이군. 이러다가는 결판이 나지 않겠다 싶은 제르펠이 탁자를 톡톡 치며 시선을 모았다. 벌떼같이 덤벼들어 싸우던 자들도 그의 눈치를 보더니 다시 열기를 가라앉혔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결국, 안건을 결정하는 것은 황제의 몫이다. 제르펠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는 제르펠과 똑바로 눈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같은 황금빛 눈동자였기만 결의에 빛나는 제르펠의 눈과 다르게 황제의 눈동자는 안개에 낀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그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때까지 논의했던 게 무색하게 간단히 결론을 내었다. 황제는 손에 턱을 대더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은 많으니 그걸로 영지에 보탬을 하여라. 아직 복구되지 않은 영지들은 세금을 줄여 주도록 하지.”
귀족들 사이에서 불만은 있었지만, 황제의 말에 반박은 하지 않았다. 보통 기근 등으로 세금이 줄어들게 되면 그만큼의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다른 영지의 세금이 올라가게 마련이었다. 제국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리품으로 채워질 테니 황궁에 바치는 세금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자신의 재산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는 다른 귀족들이 지켜보는 회의 때 기우제 건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세금 관련해서는 제르펠의 편을 들어주었다.
제르펠도 황제의 속셈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는 황제가 선뜻 세금에 관한 사항을 편들어 주었을 때부터 예상한 바였다.
“그런데 태자. 기우제를 하기로 했다 하지?”
“네.”
“그렇군. 나이도 나이니. 이제 이 자리를 너에게 맡겨도 되는지 시험할 좋은 기회지. 이번 기우제를 잘 성공해 보도록. 실패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로 생각한다.”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군. 기대하도록 하지. 전쟁터에서 비를 내릴 수 있는 재주를 배워 왔으면 좋겠다만.”
자신이 생각한 태도와 달랐는지 황제는 적잖이도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내며 거칠게 자리를 일어났다. 지나가면서 제르펠을 노려본 것은 당연했다. 황제는 백성과 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기우제로 결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신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고 제르펠은 모르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추락하는 제르펠의 모습을 볼 생각에 황제는 비소를 지으며 떠났다.
귀족들은 두 사람의 신경전을 예의 주시했다. 신경전이 끝날 때까지 아무 말조차 하지 않았고 누가 우세를 잡는지 지켜보았다. 전쟁터에서 황태자가 온 순간 권력의 구도는 변하기 시작했고 자신들도 어디에 붙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황제의 평판이 백성들 사이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지는 오래였고, 제르펠은 그와 대비하여 상승 중이었다. 백성들과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의 제위를 주장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지금의 태양인가, 떠오를 지금의 태양인가.
회의는 흐지부지하게 끝났고 황제가 사라졌으니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그중 교황은 제르펠에게 다가왔다.
“폐하도 참 무심하시지. 격려의 말을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강하게 성장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한 거지요.”
“그러길 바라야지.”
걱정하는 척하는 교황의 말투에 뒤에 있던 이안은 콧방귀를 꼈다. 제르펠은 교황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황제가 사라지고 아첨할 사람이 없었던 황제파들은 제르펠의 심기를 살살 긁다가 꼼짝을 하지 않는 그를 보고는 뿔뿔이 흩어졌고 황태자파 귀족들만 남았다. 그들은 기우제가 걱정되는지 안부를 물었다.
“전하. 어찌할 생각입니까?”
“내 운을 믿어 봐야지. 비를 내릴 재주는 없으니.”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갈 길은 하나였다. 그들은 자리를 옮겨 앞으로 정치에 대해 논의했다.
* * *
귀족들에게 벗어난 그들은 회랑을 지나 궁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안은 귀족들에게 시달린 것이 힘들었는지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꽤 늦어졌네요.”
“어쩔 수 없지. 이제 시작이니.”
“정말 운에 맡기실 겁니까?”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세드릭이 말했다. 제르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나아가면서 말했다.
“죽을 뻔한 위기는 몇 번이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이런 일로 무너질 것 같은가?”
제르펠 자신에게 하는 다짐의 말이기도 했다. 이안과 세드릭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