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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있던 제르펠은 내가 다가오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내밀자 얼른 위로 올라갔다. 난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타고 위로 계속 올라갔고 몸으로 목을 감았다. 저번에는 한 손에 딱 들어갈 크기였는데 이제는 팔까지 두를 수 있게 되었다. 제르펠의 목에 목도리처럼 둘려 있는 게 취미가 되었다.
이제 세월이 흐른 만큼 자란 거지! 게다가 전망 좋고 운반도 해 줘. 얼마나 좋아?
제르펠도 싫지는 않은지 내가 스스로 목을 두를 수 있도록 내어주는 편이었다. 내가 슬금슬금 올라갈 때마다 간지럽다는 듯이 그의 잇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자세를 편히 잡을 수 있도록 교정해 주었다. 내가 자리를 잡자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안부를 물었다.
“별일은 없었나?”
그럼! 넌 밥은 잘 먹고 다녀? 심심하다. 이안이 분명히 고비를 넘긴 식으로 말했지만 아직도 그는 한가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나는 그의 목에 얼굴을 비볐다. 아마 내가 고양이었다면 갸르릉 거리는 소리가 났을 거다.
“근데 이건…….”
제르펠은 나의 꼬리를 보고 말했다. 꼬리에는 아까 받은 흑요석 브로치가 꼬리에 감겨 있었다. 이거 선물. 난 브로치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브로치를 가지라며 그에게 계속 내밀었다. 제르펠이 손을 펼치자 거기에 떨어뜨려 놓았다. 난 눈을 반짝이며 제르펠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어때? 어때?? 들고 오느라 힘들었다고.
오기로 질질 끌고 오긴 했지만, 집무실 가는 중간에 만나지 않았으면 카사에게 진작에 넘겨주었을 것이다. 그는 잠시 그 브로치를 바라보고는 카사에게 말했다. 참고로 나의 전용 공물 주머니가 따로 있었다. 제르펠은 내가 공물을 받는다는 걸 알자 카사를 시켜 받은 공물들을 거기에 넣어 두게 했다.
“슈이렌이 이걸 들고 오게 한 것이냐?”
내가 일부로 따로 챙겨 놓은 건데?
그는 선물에 대한 감상평을 하기 전에 애꿎은 카사를 잡았다. 들고 가려고 했던 손을 거절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카사는 변명도 하지 않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카사는 오늘 받은 공물 주머니를 그에게 주었다. 제르펠은 내 속도 모르고 준 브로치를 다시 넣으려고 했다. 얼른 꼬리로 막았다. 내가 일부러 생각해서 친히 들고 왔더니!
난 그의 볼을 꼬리로 사정없이 찌르며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브로치와 그를 번갈아 가면서 가리켰다. 그제야 내 행동의 뜻을 짐작했는지 자신의 옷에 브로치를 달았다.
“괜찮나?”
아이고. 역시 잘 어울려. 딱 보고 너 생각났다니까.
그의 타이에 자리 잡은 브로치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멋진 그의 모습에 엄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그도 마음에 들었는지 브로치를 손으로 살살 만지더니 고맙다고 나의 목을 긁어 주었다.
제르펠은 이제 내가 좋아하는 부위는 다 꿰고 있는지 만지는 손길이 예사가 아니었다. 손길을 받고 있으면 몸이 흐물흐물해지곤 했다. 따뜻한 온기에 몸이 풀어지기도 했고, 공물 받으러 돌아다녔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자 그는 쿡쿡 웃었다. 살짝 나의 얼굴을 잡는 손길이 있었다. 그는 얼굴을 돌려 내 볼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화들짝 놀라 몸이 움찔했다. 저번의 뽀뽀로 입맞춤이 아주 가벼워졌다. 그만큼 내가 귀엽다는 거겠지.
하지만 난 훌륭한 반려동물. 이런 뽀뽀쯤은 이제 가볍게 스치는 스킨십으로 넘긴단 말씀! 그런 나의 다짐과는 다르게 절로 몸은 움찔거리고 꼬리는 사정없이 파닥거렸다. 뱀도 마찬가지로 꼬리로 감정을 표현하던가…….
제르펠에게도 파닥이는 꼬리가 보였다. 그는 이러는 내가 귀엽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뾰로통해진 내가 꼬리로 찰싹 때려도 그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고맙구나. 내 생에 가장 값진 선물이다, 평생 간직하마.”
상당히 후한 평가였다. 그의 말이 기뻐 씰룩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했다.
* * *
한 남자가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 통로에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쭉 걸려 있었고 종류 불문하고 진귀한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길을 쭉 따라 들어가 어느 문 앞에 멈추었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나온 시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밖의 고요함과 다르게 들어가자마자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인이 분에 겨워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청을 찢는 매서운 분노였다.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가 오자 숨을 고르며 소파에 턱 앉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그녀의 분노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걸 알 수 있었다.
“황후마마. 고정하십시오.”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왜 하필! 그자가 그놈을 도와준단 말이야! 계속 영지에 처박혀 있었으면 편했을 것을!”
“베르트 공작 각하께서 전하를 도와준 건 예상외였습니다. 하지만 이럴수록 더 고정하셔야 합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에이든을 황태자로 임명하는 것을 막은 것도 그자가 아니더냐.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끼리 붙었구나. 그쪽 집안은 마음에 드는 자가 없어. 대체 그를 어떤 말로 꾀어낸 거지?”
사사건건 부딪쳤던 공작을 겨우 영지로 쫓아 보냈는데 제르펠에 의해 자신의 노력이 무산되자 이를 아득 갈았다. 제르펠의 잦은 외출은 이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행보를 주시했지만 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겠느냐는 황후의 방심이 초래한 결과였다. 황후는 분을 풀기 위해 차를 마시며 진정했다. 차 한 잔을 드는 자세에는 우아함이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어수선한 것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이 들게 했다. 시녀들은 발 빠르게 방을 청소하고 교황 앞에도 차를 한 잔 주었다.
“마마. 진정하시지요. 저희가 고대하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 발버둥 쳐도 어차피 추락할 것을.”
“그럼요. 마마. 기우제가 머지않았습니다. 기우제로 비가 절대 올 리가 없습니다. 그건 저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그때 알아서 추락하실 겁니다. 저희는 때만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녀는 가장 궁금한 사실을 교황에게 물었다.
“에이든은 확실히 차도가 있는 것이냐?”
“물론이죠. 이제 완쾌하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거 다행이야.”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를 찾은 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방을 난장판으로 만든 자의 웃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교황도 마주 보며 웃었다. 서로 다른 웃음소리는 기괴한 멜로디를 이루어냈다.
“물건은 가져왔겠지?”
황후는 웃던 도중 눈을 빛내며 교황에게 물었고 그는 황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건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 병에는 검붉은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힘 좀 써 보았습니다. 혹시라도 모르니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평소보다 많게 3배를 잡았습니다.”
“그대의 공이 크다.”
그녀는 병을 흔들어 보았고 액체는 그에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시녀들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숨죽이고 있었다. 긴 복도의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왔지만, 그들이 들어간 방 근처에는 햇빛도 닿지 않는지 어둠이 감돌고 있었다.
* * *
한 시녀가 약이 든 병을 여인에게 전해 주었다. 약을 받은 여인은 사발에 약을 붓고는 들고 서재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자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에이든이 있었다. 그는 수업이 어려운지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책을 부여잡고 있었다. 학자는 문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그에게 고개로 인사를 하며 에이든에게 다가갔다.
“저하,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내일까지 복습해 오세요.”
학자는 자신의 책을 챙기고는 서재 밖으로 나갔다. 에이든은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책에 얼굴을 파묻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든 님, 약 먹을 시간입니다.”
“응?”
유모가 가까이 와서야 에이든은 그녀의 존재를 깨닫고는 책을 덮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사발을 보고는 손을 뻗어 받아 마셨다. 그리고 재빨리 유모가 건네주는 사탕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행동이 습관처럼 고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은 약의 비릿한 맛이 올라오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물었다.
“이거…… 어머니가 주신 약이지?”
“어떻게 아셨나요?”
“어…… 그냥 이 약은 느낌이 좀 달라. 맛이 너무 비릿해…….”
“황후마마께서 특별히 준비한 약입니다. 꼭 다 드셔야 해요.”
“칫…….”
에이든은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지만, 유모는 단호했다. 그녀는 수업이 어찌 진행되는지,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지 에이든에게 물어보았다. 아무래도 막 시작한 수업이라 어려움이 많을 거로 생각했다.
“음…… 확실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빨리 검술도 배웠으면 좋겠다.”
“그러면 더 약을 꼭꼭 챙겨 드셔야죠. 이번에는 어느 정도 여유분을 같이 보내셨네요.”
“구하기 어려운 거 아니었어?”
“저하께서 이리 노력하시니 마마께서도 노력하신 거죠. 그러니 꼬박 다 드셔야 합니다.”
유모는 당부하며 말했다. 에이든은 약의 맛을 생각하더니 혀를 내밀었지만, 검술을 배우겠다는 집념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에이든은 다시 자신의 책을 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모는 학구열을 불태우는 에이든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자신의 공인한 것 같아 뿌듯함을 느꼈다. 제르펠도 궁으로 돌아왔고 에이든은 하루빨리 건강해져 황위 계승자 1위가 되어야 했다. 하필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셔서 백성들은 전하를 지지하고 귀족들도 이리저리 눈치를 보고 있는 판이었다. 다행히 폐하와 마마께서 견제하고 있지만 불온한 싹은 미리 잘라 내 버리는 것이 좋다.
애초에 전쟁터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에이든이 좀 더 근엄한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라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이었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똑바로 정신 차리고 보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귀족으로 기본 교육은 받아 왔다. 그녀는 에이든 옆에 앉아 막히는 부분이 없는지, 있다면 해답을 주면서 그의 공부를 도왔다.
‘빨리 황태자 자리에 오르시기를.’
‘빨리 건강해져서. 형님한테 검술 배워야지.’
서로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두 사람이 생각하는 바는 전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