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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볕이 따갑게 나를 깨웠다. 이불을 젖히고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축 늘어졌다. 저번 일이 무색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르펠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항상 똑같은 일상이었다.
뱀일 때와 다름없는 일상.
제르펠은 나를 귀여워하고, 나는 그에게 애교를 부리면서 변함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원래 사람이었다는 건 이미 다 들통난 거 같았다. 그럼에도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여전히 내 애교를 보며 지어 주는 입가의 잔잔한 미소와 나를 보는 그의 다정한 눈빛. 그리고 내게 해 준 말을 생각하면 결코 주인에게 버려질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주인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되면 애교 부리는 게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제르펠은 내가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그를 대하자, 좋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애초에 그전부터 주인의 남모를 집착은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누구한테 기어가거나 애교 부리는 걸 싫어했지.
예전에 들러붙기 위해 주변 사람한테도 잘해 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점수를 얻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하에서 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는 건 제르펠의 사나운 눈빛이었다. 아, 물론 나 말고, 다른 사람들. 그러니 지금 이 생활은 전과 별반 차이는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자. 제르펠이 빗을 들고 와 침대에 걸터앉더니 내 몸을 돌렸다.
“머리 빗자.”
요즘 제르펠의 취미였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내 비늘을 만지면서 시작했었다. 하지만 비늘이 사라졌기에 내 머리를 빗겨주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내 뒤에서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난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너무 길면 빗는데 힘들 것 같아 그에게 물었다.
“이거 관리하는데 귀찮지 않아? 자를까?”
“안돼. 이리 예쁜 머리를 왜 자르려고 하지?”
내 말이 탐탁지 않았던 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예뻐?”
“당연하지. 이렇게 예쁜 은발 머리는 본 적이 없다. 빗겨주는 게 별로 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주인이 귀찮을까 봐 그랬지.”
“신경 쓸 필요 없다. 좋아서 그런 거니.”
계속 빗겨주는 손길은 상냥했고, 솔직히 나도 싫지는 않았기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제르펠이 좋다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 순간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안이 들어왔다.
“전하, 잠시.”
그는 제르펠에게 볼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그런가.”
“네. 어찌하겠습니까?”
“내가 직접 가서 이야기하지.”
“나 또 방 안에 있어?”
한동안 방 안에 있어 삭신이 쑤실 지경이었다. 눈을 반짝이며 제발 나가게 해 달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계속 방 안에 홀로 두어서 미안했는지 이번에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르펠은 빗을 탁자에 올려놓고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크게 쓸어 넘겼다. 나의 간절한 눈이 통했는지 그는 긍정의 답변을 해 주었다.
“카사를 붙여 줄 테니 잘 데리고 다녀라. 목걸이는 꼭 하고.”
“응. 응. 잘 다녀와.”
이상하게 목걸이를 강조했지만 밖에 나간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신의 결정이 옳은 건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재촉하자 미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런 그의 심정과 반대로 신이 난 나는 팔이 아플 정도로 그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는 한참 동안 내 붉은 목걸이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점차 나에게 다가왔다. 난 목걸이를 보려고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의 목표물은 내 이마였다. 쪽 하는 짧은소리와 함께 제르펠은 이마에 입맞춤을 하였다.
“조심하고, 비가 내린 덕분에 꽃이 탐스럽게 피었더구나. 구경이라도 하렴.”
이안은 그 장면을 목격하자 바로 푹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그런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난 얼굴이 빨개졌고, 손을 턱 이마에 대었다. 내 눈동자는 댕그랗게 떠지고 입은 떡 벌렸을 게 분명하지만, 그는 귀엽다는 듯이 작게 웃으며 떠났다.
문이 닫히자 홀로 남겨진 나는 기운이 쭉 빠진 듯 침대에 스르륵 쓰러졌다. 베개를 꼭 붙잡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손으로 입맞춤 받았던 부위를 슬쩍 만져 보았다.
“정말이지 곤란하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제르펠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당당한 걸음으로 문을 덜컥 열었다. 제르펠의 말을 따라 정원이나 구경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밖에는 카사가 서 있었고 내 걸음을 막지 않았다. 내가 따로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뒤에 따라붙었다.
사람으로서의 첫 산책으로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건축물이나 조각상, 그림 등을 일일이 구경하며 지나다녔다. 뱀이었을 때는 고개를 위로 치며 세워야 보였기에 목이 아파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정원에 도착했다. 상쾌한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켜고 내쉬었다. 확실히 제르펠의 말대로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3일 동안의 비로 인해 피어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러 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는 광경은 볼 만했다. 정원을 구경하면서 어느 정도 걸었더니 슬슬 허기가 느껴졌다.
“아. 좀 출출하네.”
그 말에 여러 시종과 시녀들이 앞다투며 나에게 간식거리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딱 한 번 나온 거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다 방 안에서 지냈으니 시종이나 시녀들의 힐끔대는 시선들이 많았다. 딱히 접근이 없어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리 갑자기 달려드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사자님. 비를 내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번 농사는 잘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 영상 하나 가지고 있어요!”
“언제 또 비를 내리시나요?”
“제가 구운 쿠키인데, 맛있어요!”
“아름다워요!!!”
서로 앞다투며 자신의 말과 물건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간에 약간 거슬리는 말이 들렸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정말 사는 사람이 있구나…… 뒤를 흘끗 보니 카사는 전혀 상관없다며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주인과 합의가 된 거겠지. 그들은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들의 반응이 싫지는 않았고 배가 고팠던 건 사실이었기에 주위에서 주는 간식거리를 집어서 먹었다.
“감사합니다.”
환하게 웃자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빨개졌다. 그들은 나에게 이것저것을 건네주며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두 손에 가득 받아야 했다. 양으로 봐선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 미운 애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뒤에 있던 카사에게도 간식거리를 권해 보았다.
“먹을래?”
“임무 중에는 먹지 않습니다.”
“아, 그래. 그럼 말고. 무거우니까 이거나 들어 줘.”
그의 말에 딱히 사양하지 않았고, 내가 들고 있던 간식거리는 그에게 주었다. 주머니 중 아무거나 집어서 안을 열어 보았다. 알록달록한 사탕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난 그중 노란 사탕을 던져 입에 넣었다. 약간 건방진 내 태도에 그는 약간 놀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계속 주인이랑 같이 있는 나를 보았으니 이런 태도가 이상하겠지. 주인한테는 내가 빌붙으려고 그런 거고, 너한테는 그럴 필요 전혀 없거든.
정원을 돌아보던 중 물을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꽃잎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목격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이슬을 톡 건드려 보았다. 근데…… 이제 비는 알아서 오나? 내가 잠들었던 사이에 비가 왔다고 했지만 그 뒤로 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든 의문점에 카사에게 물었다.
“그 뒤로 비가 온 적은 없지?”
“네.”
카사 내 질문의 의의를 파악하기 위해 내 얼굴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수신이 나에게 말했던 힘은 물을 다루는 능력에, 상처 치유에,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번에 비가 내렸다지만 수신의 말하는 투를 들어 보면 비를 내릴 힘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비를 내려야 하는 것은 나였다.
사악한 자들이 자신의 힘을 뺏고 있다고…… 일단 나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 근처에 분수 있어? 아니면 호수라도.”
카사는 그 말을 듣더니 따라오라는 듯이 앞장을 섰다. 난 그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이런 호수가 있었구나 하는 곳으로 상당히 큰 호수였다. 무슨 호수인지 물었더니 황족들만이 가끔 오는 피크닉 장소라고 한다.
“이런 데 데려와도 돼……?”
얼떨떨한 얼굴로 물어보자 그게 무슨 대수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에 당황한 건 나였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 괜찮겠지.”
그런데 어떻게 사용하지? 저번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기절해서 아무런 기억이 없단 말이지. 그래도 비를 3일 동안 내렸다는데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지 않겠어? 한번 비를 내려 보자.
우선 호수 정 가운데를 노려보았다. 이런 건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나……? 머릿속으로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이미지를 그려 보았다. 주위에는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호수가 잔잔하게 흔들리는 소리조차 배제하고 어두운 의식 속에서 열심히 상상했지만, 호수의 표면은 끓어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사기당한 거 아냐? 알고 보니 일회용이었다던가…….”
뭐가 잘못됐는지 팔짱을 끼고 턱을 괸 채 고민하고 있었다. 나오지 않는 답에 결국, 잔디가 촘촘히 자란 호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멀리서 고운 미성이 들렸다.
“신의 사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