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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27화 (2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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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비굴할 정도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카사는 절대 비킬 수 없다는 듯이 꿋꿋이 내 앞을 막고 있었다. 카사의 성격상 이런 행동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한 가지. 주인의 명령이었다. 내가 교황을 만나는 걸 막는 것. 교황은 자신을 대놓고 불청객 취급하는 카사의 태도에 충분히 화낼 만도 하건만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과잉 반응은 하지 마세요. 그저 인사일 뿐입니다. 숨기려고 하시면 사자님께서도 답답해하십니다.”

어이없는 말에 한숨이 나왔다. 나를 언제 봤다고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전에 교황의 시선에 짜증이 났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교황은 나를 안쓰러운 아이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내가 안쓰럽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말도 오해하기 쉽게 꼬아서 말했다. 피칠 못할 사정을 강조했고 그 뒤에 숨기면 답답해한다는 말까지 했다. 카사를 슬쩍 쳐다보며 한숨 짓는 것이 그를 방해꾼 취급을 하고 있었다. 교황의 나무라는 말투에 카사의 시선은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어찌 된 것이 궁에 접근조차 할 수 없어 저희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리 만나게 된 것도 수신님의 인도이겠지요.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저희도 마음이 놓이네요.”

그러니까 말들을 조합해 보면, 궁에 가지도 못해서 접근도 못 했고, 소식도 못 들었고, 내가 걱정되어 헤매다가 수신님의 인도로 만나게 되었다. 이런 말인데. 교황의 은근한 말투는 술수로 인해 나와 만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소식을 알아보니 궁 안에서 나오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방 안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좋은데? 교황의 말투에 내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슈이렌 님 가시지요.”

카사는 더는 상대를 하지 않을 생각인지 궁으로 나를 밀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사자님께 손을 대는가? 사자님, 괜찮으신가요?”

그는 내가 아주 큰 무례를 당했다는 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알았는지 카사 입에서 작은 한숨이 나왔다.

“사자님,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신가요? 저에게 말씀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어떤 말이라도 들어줄 듯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이없는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많이 황당했다. 수신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고 하더니만 교황이 저 모양이니 그럴 만도 하지. 신의 종이라는 사람이 검약은 어디 갔는지 저렇게 사치를 부리고 있으니. 귀족 뺨치는 장신구들이 그의 옷가지에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 모습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지 그는 나에게 의미심장한 목소리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보려고 했더니. 더 안 들어도 확신했다. 교황은 주인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딜 감히.

“슈이렌 님 어찌할까요?”

카사는 조용히 내 귀 옆에서 속삭였다. 여차하면 검도 뽑을 용의가 있다며 살짝 손을 가져다 댔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각도였다. 난 그의 손을 탁 쳤다.

여기는 뭐만 하면 검을 뽑아. 넌 모르겠지만 내가 있던 곳에서는 먼저 주먹질을 한순간 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를 뒤로 제치며 앞으로 나섰다.

신전 사람이 신의 사자를 데려가려고 하는 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거기 수신 믿잖아? 그럼 사자도 당연히 신전에 와야 한다는 생각하고 있을 텐데 난 갈 생각이 전혀 없거든. 쓸데없는 희망을 미리 박살 내 줄 필요가 있었다.

“넌 신의 종이야?”

“네. 그렇습니다. 사자님의 종 또한 되지요.”

내가 톡 쏘아붙이듯 말하자 교황은 살짝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교황은 내 말에 자비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많은 신관을 보여 주며 나에게 말했다.

“신전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사자님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사자님의 자비를 구하시는 신도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싫은데?”

“네?”

내 말에 당황스러웠던 것일까? 뒤에 있던 신관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나와 전혀 상관없었다. 소중한 보금자리 버리고 갈 필요가 전혀 없잖아? 물러서지 않는 내 모습을 보더니 카사도 조용히 뒤에 섰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왜 너를 따라가야 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가.”

“저희는 수신님을 믿고 모시며 수신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입니다. 수신님의 부름을 받고 내려오신 사자님이 아니십니까? 저희 신전으로 모시는 게 정상입니다!”

“맞습니다! 수신님의 사자가 황궁에 머문다니요.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사자님으로서 신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황은 이제 인자한 미소는 어디 갔는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허거리고 있었다. 신관들도 나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지어야 할 표정이거든? 그 말에 내 얼굴은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가서 어떤 꼴을 당할지 눈에 훤했다. 정상은 무슨 정상.

“누가 그래? 내가 있을 곳은 내가 정할 건데? 그게 여기인데? 그리고 책임은 무슨…… 누가 달라고 했어?”

“네???”

난 귀를 후비적거리며 안 들린다는 태도를 취했다. 내 태도에 신관들은 애가 탔는지 교황을 부르기 시작했다. 교황은 신관들을 진정시켰다.

“교황님…….”

“아직 사자님이 어려 잘 상황을 이해하시지 못하는 겁니다. 다들 진정들 하세요.”

“어리긴 누가 어려?”

내 말은 신관들의 웅성거림에 묻혔다. 교황은 신전에 가면 좋은 점들을 들먹이며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궁에 갇혀 지내기는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저희는 신도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이래 봬도 기부금도 많이 내려오는지라 사자님을 잘 대접할 자신이 있습니다.”

“전혀. 안 답답한데? 기부금이 많다고? 주인보다 돈 많아?”

“…….”

교황은 직설적인 나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난 교황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 없겠지? 바깥세상? 그런 위험한 데를 왜 가? 집이 제일 안전한데 그것도 몰라? 그리고 주인은 나한테 일 잘 안 시켜, 빈둥거려도, 돈 지랄을 떨어도. 근데…… 신전에 가면 신도들 만나, 사자님으로서 일해야 해,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순례를 돌아야 해, 나 멀미 진짜 약하거든 저번 기우제 때도 멀미가 나서 죽을 뻔했다니까.”

난 백수로 살 건데? 어디서 내 인생을 망치려고. 신전 가면 사자님 사자님 하며 온갖 일에 이용해 먹을 게 훤하다.

“여기보다 좋은 점이 없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안 좋은 점을 이야기했다. 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이 끝난 뒤 교황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꿈 깨라며 그에게 비웃음을 날려 주었다.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귀찮은 파리 쫓듯이 손을 저으면서 발걸음을 뗐다.

“교황님…….”

“그럼 사자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요.”

발걸음이 다시 멈추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없어. 주인이 다 해 주거든.”

당연히 물러갈 거라는 생각과 달리 교황은 나를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교황은 나에 대해 파악이 끝난 건지 방금 태도는 어디 가고 거래를 제안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내 눈을 가늘게 좁혀졌다.

“주인이라…… 그분의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까?”

어이없는 표정으로 교황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내 표정에 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사자님의 도움으로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아닙니다. 다른 귀족들의 경계심을 강하게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사자님이 휘말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아주 적절하게 수위를 조절하며 말했다. 절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 누가 그 말에 담긴 뜻을 모를까. 내 굳은 표정을 보았는지 더욱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저희는 사자님을…….”

“야, 내가 싫다고 했잖아. 너희들 살길은 너희가 알아보지? 나한테 기대지 말고. 제안이고 뭐고 집어치워. 관심 없어.”

더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난 교황의 말을 잘라 버렸다. 난 손을 흔들며 그들과 멀어졌다. 교황은 떠나가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신관들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로 소리쳤다.

“수신님의 힘을 개인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나눠 줘야 합니다.”

개소리가 따로 없지. 누가 달라고 애원했나?

“걱정하지 마. 비는 꼬박꼬박 내려 줄게. 그리고 말이야, 모두에게 나눠 줘야 한다면 기부금 같은 걸 화려한 옷 장식에는 쓰지 않겠지?”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독설을 날렸다. 교황과 신관들은 꿀꺽한 기부금이 생각나는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쨉도 안 되는 게 . 이제 조용하네. 그러고 보니 수신이 사악한 자들이 자신의 힘을 빼앗고 있다고 했는데…… 설마…… 한번 찔러 볼까.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돌아보자 그들은 적대적인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신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수신이 비가 안 오게 된 이유가 사악한 자가 힘을 빼앗고 있어서라고 하던데…….”

“그게 대체 무슨…….”

“사악한 자가 있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의 태도는 달랐지만 내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문 사람,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었다. 교황의 눈이 선뜩하게 빛난 건 찰나의 순간으로 내가 정확히 본 건지도 확실치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를 보니 의심이 생기기는 충분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 * *

“교황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자님은…….”

“그만 갑시다. 아쉽긴 하지만 사자님의 마음은 변함없는 듯하군요.”

교황은 맹랑한 슈이렌의 태도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인자한 미소 뒤에 숨긴 주먹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리 신의 사자라고 하지만 수신님과 대화까지 나눌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순간 목덜미가 서늘했다.

단지 오래된 전설일 뿐이라 생각했거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수신님은 사자를 통해 말을 전달하고 힘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유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매몰차게 돌아간 슈이렌의 모습을 보면 방도가 없었다. 그렇다면 교황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황후마마의 말대로 사라지면 되는 일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슈이렌이 ‘그건’에 대해 알고 있는 뉘앙스를 풍겼기에 교황으로서도 그가 사라져야 이득이었다.

“앞으로 바빠지겠군요.”

“네?”

“황후님께 갑시다.”

수를 써야겠어.

옆에서 조언하던 신관은 교황이 황후에게 간다고 하여 의아해했지만,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황후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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