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집무실 책상 위에는 많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중 중요한 서류는 따로 표시를 해 두었다. 서류에는 에이든의 유모가 궁에서 향한 횡령, 횡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안은 손을 뻗어 표시되어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에는 쓸데없는 지출, 정확히 말하자면 나올 수 없는 금액들이 적혀 있었다. 황후가 뒤에 있다는 자신감과 황자의 유모라는 지위를 잘 써먹은 흔적이었다.
“참 이것도 재주네요. 어떻게 식기 하나, 음식 재료 하나에 이런 금액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이안은 들고 있던 서류를 손으로 치며 말했다. 절대 들키지 않는다는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그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전혀 숨기려는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서류가 증명했다. 제르펠의 보좌를 하는 이안의 입장에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서류였다.
서류만 봐도 자신의 몫을 야무지게 잘 챙겨 먹었는데 비공식적으로 받아먹은 뇌물 또한 상당한 금액일 것이다.
“더 파고들 것도 없이 이 서류만 해도 횡령죄는 충분합니다.”
입수 과정도 정말 쉬웠다. 에이든의 앞에서 상냥했던 유모는 시종, 시녀들에게는 엄격했고,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해고된 사람들, 분풀이로 이용된 사람들 또한 있었다. 유모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옆에서 떠받들어 주는 사람을 좋아하기에 스파이를 심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보안이 어찌나 허술한지 궁에 들어가는 조건도 큰돈을 쥐여 주니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시종을 덜컥 채용해 주었다. 그 뒤는 뻔했다. 스파이는 옆에서 듣고 싶은 말만 해 주었고, 기회를 틈타 몰래 훔쳤다. 궁 예산 관리는 궁의 시녀장이나 시종장이 할 일이다. 하지만 유모인 그녀가 관리하는 모습이 궁내 그녀의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짐작해 주었다.
제르펠은 만년필을 들어 금액 측정이 이상한 부분을 쭉쭉 긋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의 80%가 줄이 그어졌다. 이안은 기가 찬 듯 서류를 보았다.
“대체 이 많은 돈이 어디로 가는 건지…….”
이안은 혀를 쯧 차며 말했다.
“딱 봐도 자기 개인 용품을 사고 사치하는 데 썼을 게 뻔하네요. 말을 들어 보니 개인 방에 드레스며, 목걸이가 잔뜩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귀족이었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녀의 수입의 몇 배나 되는 값비싼 도자기, 조각상, 명화까지 걸려 있다고 하네요. 아무리 귀족이지만 명백히 유모의 방인데 말이죠.”
확실히 에이든의 유모가 귀족으로 최소한 옷차림은 허용이 되지만, 유모라는 건 변함이 없다. 궁 예산으로 개인적인 사치를 부렸다는 것은 충분히 징벌 감이었다.
“서류는 완벽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당장 쳐들어가 잡아 와도 아무 말 못 합니다. 군사권도 있으니 기사들을 대동하여 수색하면 될 듯합니다.”
궁내의 일을 제르펠이 한다고 하지만 기사를 대동하여 수색하는 건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그렇기에 군사권의 권한을 노리고 있었다. 황궁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황제였고 황궁을 수색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순순히 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귀족들의 횡령 건으로 군사권을 얻었고, 제르펠은 직속 기사단을 동행하여 수색할 권리를 얻어 내었다.
“이 일을 위해 저번에 손을 쓰신 것 아닙니까. 솔직히 이렇게 쉽게 넘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접전을 예상했는데요.”
“가지기만 할 뿐 다루지는 못하니. 그러니 나에게 이 수많은 일을 맡기는 거 아니냐.”
“좀…… 허탈하긴 하더군요. 공작을 설득하고 증거를 모은다고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꼬투리를 잡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으니.”
베르트 공작을 설득시킨 후에 열린 중앙 귀족 회의 때 그가 나타나자 모두가 놀라워했다. 절대 복귀하지 않을 것 같던 공작이 제르펠의 편에 선 것이다. 덕분에 귀족들 모두 눈치를 보았다.
이안은 전쟁과 기근 동안 세금의 상승과 황궁 내에서 따로 측정되었던 군사금을 몰래 빼내었던 증거 자료를 제시했다. 증거가 완벽하니 무어라 말도 못 했고, 다른 귀족들 또한 제르펠과 공작이 밀어붙이자 자신들의 죄도 들통날까 봐 몸을 사리기 일쑤였다.
제르펠은 처음부터 모두를 노리지는 않았다. 제르펠은 황제파 귀족들 중 도가 지나치게 심한 자들만 노렸다. 제르펠은 이안이 준비한 서류로 재주 좋게 귀족들의 목을 조였다. 그는 황제에게 조사한 증거물을 내밀었다.
“이 서류들은 귀족들이 자신의 사치를 위해 횡령했다는 증거입니다. 심지어 군자금도 건드렸습니다. 이는 제국이 전쟁에서 지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폐하! 억측입니다!!”
“억측이라……. 그런 이 자료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너희들의 가문 도장이 똑똑히 찍혀 있는 서류 말이다.”
“그, 그것은…….”
황제는 억측이라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눈감아 준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추기까지 했다. 이제 와 목을 조여 올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아니, 애초에 제르펠이 살아올 줄 몰랐다. 황제는 제르펠의 이야기가 떠돌고 나서야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는 아무 말 못 하고 입술을 꾹 물었다. 서류는 완벽했고 귀족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귀족들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전쟁에 패하도록 조작했다는 수치를 얻을 수 없었다. 황제는 귀족들을 외면했다.
황제는 베르트 공작을 흘끔 보았다. 중립이었던 귀족들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의 등장으로 노선을 바꾸어 황태자 쪽에 붙어 버렸다. 제르펠은 노발대발하는 귀족들에게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귀족들은 이대로 추락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그 서류가 진짜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제르펠은 눈을 번뜩 빛냈다. 미끼를 드디어 물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황제에게 말했다.
“그럼 이 자료를 증명할 수 있도록 군사를 대동할 수 있는 권리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 그게 무슨…….”
“저택을 조사한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다. 떳떳하다면 문제가 없지 않으냐? 아니면…… 혹 짐작 가는 것이라도?”
황제는 제르펠의 뜻대로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황금빛 눈동자에 들끓듯이 분노가 차올랐다. 분노로 몸이 떨렸지만 황제는 침묵했다.
“저, 저택을 조사하다니요?”
“왜 그러지? 문제가 없다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터.”
“폐하. 저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조사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시는 이런 사태를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
베르트 공작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귀족도, 황제도 알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황제는 치욕스러웠던 건지 부들부들 떨었다. 심지어 증거 자료에 언급되지 않은 황제파 귀족들도 옹호했다. 제 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제르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차피 황제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아첨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제 자리가 위험해지자마자 바로 황제에게 등을 돌리고 제르펠에게 붙었다.
대다수의 귀족이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용!!”
황제의 큰소리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황제는 제르펠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비웃음으로 되받아쳤다.
“수색하는 것을 허락한다.”
결국, 황제는 수색을 허락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안 황제파 귀족 중 몇 명이 물러서면 안 된다며 말렸다.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 문제가 없지 않느냐!! 더는 듣지 않겠다. 태자에게 군사권 일부를 주도록 하지. 태자는 반드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도록.”
황제는 제르펠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그 뒤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기우제도 보기 좋게 성공해 버리자 더욱 심통이 난 황제는 여러 가지 일을 제르펠에게 던져 주고 있었다. 서류 하나하나가 그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는 줄도 모르고, 한때는 강경했던 제국에 전쟁이 일어난 것 또한 무능력한 지도자 덕분이었다.
제르펠은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황제를 떠올렸다. 그는 이안이 조사한 유모에 대한 서류들을 따로 챙겼다. 이번에도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하면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덕분에 잘되었지.”
“그런데 왜 갑자기 일을 터트릴 시점을 당겼습니까? 원래는 카지노와 동시에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것 아닙니까? 괜히 경계심만 더 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기선 제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카지노 건은 어떤 상황이지?”
“네, 조사한 바로는 겉으로는 그저 방탕한 귀족들이 돈 놀음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손님만 가는 공간이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아직 침입은 하지 못했으나……. 뒷문으로 마차가 들어가는 걸 목격했는데 사람이 묶여 있었다고 합니다.”
제르펠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카지노는 중앙 귀족들이 참여하는 곳으로 돈이 남아 주체하지 못하는 귀족들이 자신의 재력을 뽐내는 곳이었다. 엄연한 불법임에도 수도에서 떡 하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귀족을 처단한 일로 주춤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아직도 카지노는 왕성했다. 쉽게 끊어 낼 수 없다는 것인가. 제르펠은 카지노를 해체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조사 중이었다.
이안은 제르펠에게 다른 서류 봉투를 주었다. 그 서류에는 국경 끝, 아직도 전쟁의 피해가 남아 있는 영지에서 전쟁으로 생긴 고아, 집을 잃은 영지민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보고가 쓰여 있었다. 국경 끝뿐만 아니라 제국에서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수가 전년도보다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외모가 뛰어난 자들이 많았다. 억측일 수도 있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있었다.
제르펠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하나씩 넘겼다.
“이 자료를 얻는다고 고생했습니다. 특히 외진 곳이니 조사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한 노파의 말에 따르면 마차가 한 대 와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고 합니다. 버려진 곳이라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 하고, 가족이 끌려가는 걸 바라보기만 했다고 합니다. 방해하는 자는 가차 없이 구타하는 통에 반항 한번 못하고 잡혀갈 수밖에 하네요.”
“사라지는 주민들과 노예매매라…… 더러운 짓은 골라서 하는군.”
“확실한 정보는 아직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저 심증뿐이라.”
“자료로 봐서는 거의 확정이군. 입증할 자료는 필요하지. 좀 더 많은 자료를 조사해 와. 뿌리부터 뽑아내야지.”
“전하, 맨 뒤의 페이지를 봐주십시오.”
이안의 말에 제르펠은 마지막 페이지를 보았다. 거기에는 카지노의 핵심 인물. 즉 운영하는 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제르펠은 자연스럽게 두 눈이 찌푸렸다. 그에게서 살벌한 기운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이안은 제르펠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제르펠이 매서운 눈초리로 보았다.
“확실한가?”
“네.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 정말 바닥까지 떨어졌군.”
마지막 페이지에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 중 하나는 프란시아 가문이었다. 황후의 아버지. 즉 황제의 외가 쪽이었다.
“가지고 있는 자가 더한다더니 딱 그 꼴이군.”
제르펠은 보았던 서류를 다시 모아 이안에게 넘겨주었다.
“잘하면 한꺼번에 무너지게 할 수 있겠어.”
노예는 비인간적이라며 오랫동안 제국에서 금지되고 있는 제도였다. 우아함과 고귀함을 강조하는 귀족들이 노예를 사고 있다는 사실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는 충분했다.
“이번 건은 확실한 자료를 모으도록.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우선 눈앞에 있는 건부터 처리한다.”
“네.”
이안은 서류를 하나도 남김없이 챙겼다. 빠진 서류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방문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