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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31화 (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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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평화로운 하루. 연무장에서 에이든은 한창 검술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체력이 붙은 에이든은 목검 중에서도 가장 가벼운 재질로 만든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기사는 자세가 흐트러질 때마다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가벼운 목검일지도 몰라도 연약한 에이든의 손목은 몇 번 휘두르니 무리가 왔다. 에이든의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하. 이제 그만 하지요.”

“괜찮습니다!”

에이든은 꿋꿋이 검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결국 근력이 모자라 목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시 주우려고 하는 에이든을 기사가 강경하게 막았다. 옆에 있던 유모도 에이든을 만류했다.

“그래요. 너무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수업도 있어요.”

유모는 에이든이 검술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어떻게든 수업을 줄이려고 하지만 그의 고집이 만만치 않았다. 경제학, 군주학 등 공부할 게 많았다. 몸이 약한 분인데 무리해서 더 안 좋아진다면 큰일이었다.

에이든이 머뭇거리자 기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적정한 양이 중요합니다. 무리하시면 다음 날에 수련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혼자서 무리하게 수련하여 한동안 팔에 힘이 안 들어가 수련을 쉬게 된 날도 있었다. 그걸 아는 에이든이 기사의 말에 따랐다.

“그럼 내일 계속하도록 하죠.”

기사는 목검을 주워 물러났고, 곁에 있던 유모가 얼른 다가와 수건으로 에이든의 땀을 닦아 주었다.

“오늘은 한층 더 자세가 좋아지셨습니다.”

“그래?”

유모의 칭찬에 뿌듯해진 에이든은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궁으로 가는 중 멀리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들은 웅성거리고 있었다. 멀었기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나르고 있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한 시녀가 에이든 일행 쪽을 보더니 헐레벌떡 달려왔다.

“지금 큰일 났습니다!! 기사들이 쳐들어와서는 폴리나 님의 방을…….”

얼마나 급히 뛰어왔는지 에이든에게 예의를 차릴 새도 없이 유모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유모와 에이든, 뒤에 있던 시종, 시녀들까지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때 시녀 뒤에서 처음 보는 기사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누가 저하의 궁에 함부로…….”

한 시종이 말했지만 그 말은 기사들의 사이에 있던 이안의 말에 묻혔다.

“폴리나 브란트가 맞나?”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제르펠의 곁에 있던 이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에 어깨가 움츠려졌다.

“네. 제가 폴리나 브란트입니다.”

이안은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기사들에게 턱짓으로 유모를 가리켰다. 기사들은 유모 양쪽에 서더니 그녀의 팔을 들었다. 당황한 유모는 한껏 목청을 높였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놓지 못할까??”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단련한 기사들에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안은 두루마리를 펼쳐 유모의 앞에서 죄목을 읽었다.

“황궁의 재산을 사사로운 사치를 위해 횡령한 죄, 황궁의 고용인을 자의로 해고한 죄, 시녀, 시종들을 폭행한 죄로 인해 구속됨을 알린다. 끌고 가.”

“네!”

유모는 죄목을 듣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니라고 소리치지만, 기사들은 꿈쩍을 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중 인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에이든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에이든을 본 유모는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저하.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저들이 거짓을 고하는 겁니다.”

“마, 맞아. 유모는…….”

유모는 에이든이 마지막 구원인 듯 변명하기 바빴다. 그런 모습에 이안은 혀를 찼다. 에이든이 유모를 감싸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안은 에이든을 슬쩍 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저 사치품들은 어떻게 해명할 거지?”

기사들이 유모의 방에 쳐들어가 값비싼 도자기, 명화, 장신구들을 모아 두고 있었다. 그중에는 온통 금으로 된 조각품도 있었다. 저 많은 물품이 개인의 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저건 선물을 받은 것이다! 난 황자님의 유모로서 부끄러운 점 하나 없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밝히면 되는 일이지. 무죄라면 풀려날 것이고 아니라면 추방이다.”

“화, 황후마마가 무섭지도 않으냐? 마마께서 용서할 리가 없다!”

“그건 법정에서 보면 될 일이지. 빨리 끌고 가.”

결국 유모는 기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에이든은 어안이 벙벙한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깊은 탄식이 나왔다. 이안도 에이든에게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에이든에게 충고했다.

“저하. 자신의 사람을 고르는 눈을 기르세요. 이럴 때일수록 단단히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이안도 이렇게 매정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황궁이고 지금의 상황이었다.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위 상황을 정리하며 떠났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에이든의 궁은 침묵만이 맴돌았다.

* * *

“마마! 큰일 났습니다.”

“조용히 해라! 마마의 어전 앞이다!”

에이든의 유모가 기사들에게 끌려간 것을 목격한 시녀가 황후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황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황후가 에이든의 궁에 심어 둔 시녀였다. 황후는 손짓으로 조용히 하라는 의사를 밝혔다. 황후의 뒤에서 말리던 시녀가 뒤로 물러섰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시녀가 조용히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말을 전달할 시녀와 황후 뒤에 서 있는 전담 시녀를 제외한 나머지 시녀들은 재빨리 사라졌다. 시녀는 조심히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황후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녀의 심기를 알려 주었다.

“하…… 그것이 기어코…… 그래서 어찌 되었지?”

“계속 마마님을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전담 시녀가 황후의 의중을 물었다. 황후는 그저 자신의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면에서 결론이 났는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에이든도 건강해졌으니 쓸모없는 것은 치워야지. 얼마나 먹었다고 하던?”

“방 안에서 귀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많이도 먹었구나.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이지.”

황후는 후후거리며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일이 생기면 격분하던 전의 태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황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오히려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황후로서는 유모가 사라져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에이든의 유모를 찾던 당시 에이든의 황태자 임명이 물 건너갔었다. 왜 이리도 약하게 태어났는지 원망도 하였다. 힘들게 낳은 아이였기에 더욱 못마땅했다. 귀족들은 성급하게 나서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자신이 유모가 되겠다며 자처했다. 그녀의 신분은 백작이었지만 몰락 귀족이었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했다. 하지만 신분은 나름 괜찮았고 거기에 그녀의 눈에 깃든 욕망을 눈치챘었다. 그녀를 선택한 것에 큰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의 배짱과 용기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저런 자는 이용하기도 쉬웠다. 자신을 알현했을 때 유모가 되고 싶은 이유가 가문을 부흥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입에 발린 말인 건 한눈에 눈치를 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와 가문은 쓸모를 다한 상태였다. 에이든의 병도 나아지고 있는 시점으로 격이 떨어지는 자는 쳐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한때 제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 있던 자. 제르펠의 술수에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처받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거슬리는구나. 폐하가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황후는 차를 마시고는 황제의 험담을 했다. 제국의 일인자를 모욕하는 말이었지만 시녀들은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서서 그녀의 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황제가 홧김에 군사권을 내준 것이 잘못이었다. 자신이 옆에서 조언했지만 그 자존심이 무엇인지.

황궁 연회도 못마땅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줏대 없이 황태자에 빌붙을 귀족들이 훤했다. 교황의 말을 들어 보니 신의 사자도 한 성격 하는 모양이었다. 회유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넘쳐 있을 때는 언제고 된통 당해서 왔을 때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나같이 하찮은 것들이……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후는 혀를 차더니 말했다. 시녀는 공손히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에 말한 것은 준비가 되었느냐?”

“지금이라도 가능합니다.”

그 말에 눈꼬리를 내리며 활짝 웃은 황후는 옆 시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시녀는 가만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후의 입가는 부채에 의해서 가려져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으…… 햇빛.”

내 눈앞에 아른거리는 햇빛에 의해 비몽사몽하게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찌 된 게 이놈의 잠은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몸을 쭉 기지개를 켜니 우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뻐근했다. 어깨를 돌리다가 옆에 있어야 할 제르펠이 보이지 않았다.

“응? 주인은?”

항상 내가 일어나면 인사를 건네던 제르펠이 없었다. 옆을 보니 커튼이 쳐서 있음에도 빛이 통과해 비칠 정도면 이미 해가 진작에 뜨고 남은 듯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왜 안 깨웠지?

“일단 움직이자…….”

옆 탁자에 개어져 있던 옷을 집어 들고 하나씩 입기 시작했다. 내가 스스로 입으니 좀 어색했다. 옆에 오일과 빗이 있었다.

“딱히 머릿결에 신경 쓰지 않는데…….”

환생해서 머리에 오일까지 바르게 되다니…… 허리까지 오는 머리의 끝을 잡아 들어 올렸다. 제르펠이 어찌나 관리를 철저하게 해 주는지 처음보다 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주인이 좋아하니까…….”

빗으로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은근히 팔 아프네. 워낙 긴 머리카락에 처음부터 끝까지 빗어 내리는 게 힘들었다. 한 몇 번 정도 빗었을까. 팔이 슬슬 아파왔다.

“팔 아파! 안 해.”

결국 빗을 집어던졌다.

“밥부터 먹자.”

일어나면 밥부터 먹어야지! 식당에서 깨작깨작 밥을 먹었다. 말동무가 없으니까 심심했다. 그래도 식사는 같이했는데…… 내가 늦게 일어났긴 했지…… 주인은 밥이나 먹었나?

“오늘 주인 바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사에게 물었다.

“처리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후쯤에는 끝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바쁘구나…….”

집무실에 가서 놀려고 했더니 오늘은 주인이 바쁜 것 같았다. 어제 제르펠의 입으로 들은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오늘도 다른 급한 볼일이 있는 거겠지. 주인도 열심히 일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를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안 그래도 교황의 태도에서 수상한 점이 발견되어서 신경 쓰이는 찰나였다. 수신이 말한 사악한 자가 교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수신은 잠에 빠진다고 말했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수신에게도 전해 줄 겸, 그리고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만간 한번 찾아가 봐야 한다고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수신의 숲은 아무도 들어가서는 안 되는 성역이었다. 내가 들어갈 수는 있나? 기우제 때는 신관이 결계를 해지했던 것으로 기억됐다. 아무리 내가 신의 사자이긴 하지만 불가침 영역이니 혹시나 못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신의 호수에 들어갈까 하는데…… 가도 괜찮나?”

카사는 상관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사자님이 아니십니까.”

“그럼, 가자.”

이것들 다 죽었어. 대체 어떤 짓을 해서 수신의 힘을 빼앗고 있는지 샅샅이 파헤쳐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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