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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이렌은 제르펠의 손을 피해 뒤로 주춤 물러갔다. 슈이렌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차 싶은 제르펠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피가 묻어 있었다.
‘또 실수했군.’
궁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이든의 초대를 받고 차를 한잔 마셨다. 섭취한 것이 독이라는 걸 깨닫고, 검부터 휘둘렸다. 그게 제르펠에게는 당연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당하는 건 내가 되리라 생각했다. 주위의 비명과 에이든의 공포에 질린 모습이 기억난다.
언제나 한번 각인된 모습은 나를 괴롭힌다. 일부 사람들 자신을 영웅이라 부르지만 자신은 절대 아니라는 걸 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이용할 건 다 이용했다. 나로 인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아도 내가 살기 위해 눈을 감았으며,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스스럼없이 행했다.
제르펠은 바닥에 있는 깨진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는 손에서 상대방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있으면 죽음에 가까워진다며 말했고, 전쟁에 승리해 영주민들은 감사하면서도 떨리는 손을 감추지 못했다. 어린아이와 눈을 마주치면 피하거나 울기 일쑤였다. 피에 물든 모습을 본 자들이야말로 자신을 악귀라 칭했다. 그만큼 자신에게는 피 냄새가,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고 생각했다.
‘악귀라 불리는 게 당연하지. 슈이렌이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한가…… 무서워하지 않게, 안전하게 지켜 준다고 맹세했거늘…… 언제나 이 모양이군.’
애써 떨쳐 버린 과거가 자신이 좀먹어 오는 것을 느꼈다. 슈이렌은 뒤로 잔뜩 움츠린 자세로 덜덜 떨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심이었다. 제르펠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한심함에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과거는 떨쳐 내자고 결심했지만 벗어나지 못했고, 슈이렌에게 무서운 모습을 보이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그는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 꼭꼭 담아 두었던 감정의 틈으로 후회가 한없이 쏟아져 내렸다.
제르펠은 뒤로 돌아섰다. 슈이렌과 멀찍이 떨어진 그가 말했다.
“방을 치우고 슈이렌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라. 난…… 잠깐 나갔다 오지.”
* * *
자책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방금 피한 거야?? 주인을??
제르펠은 나와 등을 지고 있었다. 옆에서 이안은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내 얼굴에 튄 피를 닦아 주고 있었다. 내 상태를 보고 패닉에 빠진 거로 생각한 듯했다. 그러면서도 제르펠의 눈치를 보았다.
“슈이렌 님 상처를 치료하러 가시죠.”
이안은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더는 피가 나오지 않게 상처 부분을 묶었다. 난 이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항상 듬직하게 보였던 제르펠의 등이, 언제 기대도 든든하게 나를 받쳐 주었던 그의 등이 무척이나 작게 보였기 때문이다. 주인은 항상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피했다. 암살자들로 가득 찼던 머릿속은 방금 내 태도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이 아닌지 걱정으로 가득 찼다.
돌아설 때 보았던 제르펠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살벌했던 눈빛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제르펠은 그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를 피해 버렸다. 피가 묻은 손을 뻗으니 몸이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의 피인지 상대방의 피인지 모를 만큼 많은 양의 피가 제르펠의 옷에 묻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투로 그가 상처 입었을 수도 있다.
주인은 괜찮나? 다친 데는 없어? 말하고 싶었지만 내 목소리는 나오는 걸 거부했다. 목이 한없이 메어왔다.
세드릭은 제르펠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피를 닦으라며 건넨 손수건은 제르펠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세드릭을 지나치며 말했다.
“되었다. 어차피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 목소리가 나에게만 우는 목소리로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말을 듣자 제르펠에게 무조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여!
떨리고 있는 다리를 주먹으로 치면서 일어나야 한다고, 가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했다.
“슈이렌 님?”
나의 돌발 행동에 이안이 당황한 게 느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각오했잖아! 살아 있던 사람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 결심했었다. 익숙해지자고, 어차피 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했다. 떨리는 감정과 몸을 숨겼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다…… 시각적으로 직접 다가오니 숨겼던 불안감과 공포심이 문을 열고 나왔다. 겉으로만 태연한 척. 말로만 괜찮다며 강한 척을 하고 있었다.
성역에서는 한순간에 일어났고 피를 흘린 것이 아니었다. 카사가 눈치 좋게 자루 속에 담아 시체를 숨겨 주었다. 지금은 달랐다. 피가 공중으로 튀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나와 눈을 마주쳤던 사람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와 피 냄새는 정신을 어질하게 했다.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본 건은 딱 한 번이었다. 바로 내 죽음. 꺼져 가는 시야 속에서 내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그를 피해 버렸다.
다리가 한번 움직이자 총알처럼 쏜살같이 뛰어나가 제르펠이 나가기 전에 그를 잡을 수 있었다.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갑자기 내가 달려 안겨 오자 그도 놀랐는지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커져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도 잠시 제르펠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슈이렌. 피가 묻는다. 떨어지렴.”
저번에 나보고 시선을 피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정작 지금 내 눈을 피하고 있는 건 제르펠이었다. 떨어지긴 누가 떨어져? 잡은 건 좋았지만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괜찮아? 구해 줘서 고마워? 아니면…….
“주인아 다친 데는 없어?”
“…….”
“다친 데는?”
“……없다. 걱정하지 마라.”
“그래? 다행이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과 다르게 말은 쉽게 입 밖으로 나갔다. 내 말에 제르펠의 입이 작게 열었다.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아 듣기 힘들었지만 온 신경을 제르펠에게 집중하고 있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반응이 없는 그에게 다시 한번 더 말했다. 다친 데가 없어서 대행이라고. 최대한 밝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로 전에의 태도는 잊어 주길 바라며.
“주인아. 멋있었어! 나 구해 준 거지?”
“……. 당연하지. 널 위협에 처하게 하다니 미안하구나……. 내가 좀 더 주의했다면……. 무섭지는 않았니?”
“괜찮아. 주인이 바로 왔잖아.”
제르펠은 습관처럼 손을 뻗어 내 볼을 다정하게 쓸었다. 난 그 커다란 손에 얼굴을 비볐다. 이제 괜찮아졌나 하고 바라본 눈은 아직 탁해 보였다. 그는 내 눈을 똑바르게 응시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내가…… 무섭지는 않은가.”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보더니 말했다.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더니 내 볼에도 그 피가 묻은 게 느껴졌다. 자신에 의해 내 얼굴에 피가 묻었다고 생각한 건지 다시 거두는 손을 재빨리 내 두 손으로 맞잡았다.
“아니! 전혀! 나를 구해 준 건데 왜 무서워?”
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얗게 질린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제르펠의 괴로운 표정에 내 입가에 희미하게 서려 있던 미소가 잠적을 감추었다.
“음…… 아까는…… 그냥 놀라서,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뿐이야. 내가 주인을 무서워할 리가 없잖아. 그럼 이렇게 다가오지도 않았어.”
난 그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그의 손은 나를 마주 앉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쓴웃음이 나왔지만 난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같이 씻으러 가자.”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피 냄새도 심했고 제르펠뿐만 아니라 나도 피가 묻어 있었다. 피를 씻어 내기 위해 그를 욕실로 이끌었다. 제르펠의 등을 밀며 이안에게 욕실 물을 부탁한다며 말했고, 제르펠이 볼 수 없게 손짓으로 시체들을 콕콕 집으며 치우라고 했다.
욕실은 평소와 달리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다. 좀 지나면 따뜻해지겠지. 제르펠을 욕조 안에 앉히려고 했지만 그는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주인아, 앉자.”
그제야 제르펠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난 물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그동안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나도 그도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이안이 재빨리 움직였는지 금방 따뜻한 물이 나왔다.
“이제 따뜻한 물 나온다. 씻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바로 머리 위에서 물을 끼얹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씻겨 내려가는 핏물을 보며 이야기했다.
“죽음은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군. 끈질기게 내 손에 피가 묻지.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어. 전쟁에서도 여기에서도…… 내가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건 변함없다. 내가 살아남았던 게 과연 이유가 있을까……. 사람들은 난 영웅으로 칭하기도 하지만 영웅 따위가 아니다. 악귀라 불린 것도 당연하다.”
그의 고해성사에 내 입이 벌어졌다 닫히길 반복했다. 얼굴을 숙이고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너도 무서워했지.”
차분하게 이어진 말은 내가 아까 무서워한 게 맞다고 확정 짓고 있었다. 난 절로 나오는 탄식을 삼켰다.
“……아니야. 무서워했던 게 아니야.”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이 제르펠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그를 피한 게 큰 충격인 듯했다. 자신의 한심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펠에게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침묵 속에 할 말을 정리
했다. 사족을 버리고 그대로의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 길게 숨을 내쉬고 그를 불렀다.
“주인아.”
내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이 없었다. 그의 무릎으로 올라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초점이 없는 황금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는 지워 버리고 싶지만 지워 버리지 못한 과거가 담겨 있었다.
“잘 들어. 난 네가 무섭지도 않아. 내가 피한 건…… 사람이 죽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이지. 절대 너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네가 다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걸.”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무치는 감정이 내 기분을 지배했다. 한순간에 보인 내 행동으로 그가 상처받은 것이 눈에 훤했다. 제르펠이 안쓰러워 눈물이 나왔다. 제르펠의 얼굴에 내 눈방울이 떨어져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려 버린 눈물이었다.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울어야 할 건 내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기대지도 못하고 자신을 좀 먹고 있는 제르펠이 눈에 보였다. 내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제르펠의 눈동자는 커져 있었다.
“사람을 죽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잖아.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었을 거잖아. 그렇지? 너무 자책하지 마. 그리고 악귀? 누가 그래? 악귀라고 말하는 사람 다 나오라고 해. 내가 혼내줄게. 이렇게 멋진 악귀가 어디 있다고, 넌 나한테 이미 영웅이야.”
나는 네가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의 목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전하고 싶은 말을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다른 누구보다 주인이 더 소중해. 그니까…… 네가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설령 네가 그 과정에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그 일로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난 곁에 있을 거고 항상 네 편이 되어 줄게.”
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얼굴 모르는 누구보다 그가 살아 있으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