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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은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체와 핏자국, 깨진 장식품들이 모두 사라졌다. 오로지 바뀐 장식품만이 그 일이 있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이안은 나오지 않는 우리가 걱정되었는지 부산하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었다. 우리가 나오자 이안과 세드릭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들이 보기에도 제르펠의 상태가 이상했었는지 욕실에서 나온 제르펠의 걱정을 하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안이 말하기 전에 세드릭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세드릭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잠깐 멈칫했던 제르펠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부족해 너희에게도 걱정하게 했군.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제르펠은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개운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제르펠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안의 경우에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난 제르펠의 품에 여전히 안긴 채로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제 좀 내려 주었으면…….
“에취. 킁.”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지만 참지 못하고 내 입에 작은 재채기가 나왔다. 물에 젖은 상태라 몸이 덜덜 떨렸다.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제르펠의 말에 멍한 표정으로 있던 이안이 화들짝 놀라며 준비한 수건과 옷을 들고 왔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 있습니다. 근데…… 왜 옷을 입은 상태로…….”
“아…….”
그러네. 그를 건드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옷을 벗길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제르펠은 물기가 떨어지는 옷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르펠은 말없이 손을 뻗어 수건을 가져갔다.
제르펠은 나를 침대에 앉힌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지만 젖은 옷 때문에 쉽지 않았다. 젖은 옷 덕분에 찝찝하기도 했고, 옷을 벗으려고 한 순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제르펠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손이 자동으로 꼼지락거렸다.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의 귓가 옆에서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들리면 쪽팔리잖아?
“옷…… 벗어도 돼?”
내 말에 그는 내가 귀엽다는 듯이 픽 웃었다. 네가 저번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벗지 말라며?? 제르펠은 웃음을 멈추고 이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안. 슈이렌의 상처를 치료할 약은 준비되어 있나?”
“네. 탁자에 올려 두었습니다.”
“그렇군.”
제르펠의 손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빼내었다. 그 목걸이는 항상 몸에 간직하라고 제르펠이 나에게 선물해 준 레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언제나 간직하라는 말도 있었고 내 눈과 잘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항상 착용하는 애장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목걸이 빛이 나지 않았나? 난 그 목걸이를 보며 말했다.
“주인아. 아까 그 목걸이가 빛나더니 검을 튕겨냈던데 그건 뭐야?”
“잘 발동해서 다행이었군. 아니었으면…….”
목걸이를 쥔 그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핏줄까지 보였다. 그는 이내 목걸이를 이안에게 넘겼다.
“보강해서 내일 아침까지 가져오도록.”
“저, 전하. 그럼 전…….”
“내일까지 부탁하지.”
제르펠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안은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며 목걸이를 손에 받았다. 받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세드릭이 이안의 등을 두드리며 힘내라고 전하는 것 같았다. 이안의 다크서클이 좀 더 진해진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이겠지? 난 제르펠을 꾹꾹 찔렸다.
“뭘 보강해?”
내가 보기에는 목걸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착용했는데. 흠집조차 안 나도록 조심히 다루었다. 설마 아까 넘어지면서 흠집이라도 난 거 아냐? 그 외에는 보강해라는 의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르펠은 친절히 알려 주었다.
“저 목걸이에는 마법이 깃들어져 있다. 너를 위험에서 막아 준 것도 그 덕분이지.”
“그게 이안과 무슨 상관이야?”
영상구를 통해 충분히 마법이 있는 세계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이안과 무슨 상관인지는 몰랐다. 이안은 보조관이잖아? 나의 의문점을 이안이 해소해 주었다.
“제가 조금 마법에 소양이 있습니다.”
“와…… 대단하다.”
마법이 신기했던 난 눈을 빛내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뒤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제르펠과 눈이 마주쳤다. 살짝 움찔한 이안은 눈치 좋게 뒤로 빠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한번……. 내일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안은 현실을 직시하고 침울하게 방을 떠났다. 이안을 따라 세드릭도 예의를 갖추고 물러가려고 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다.
“근데 카사는?”
카사가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있어 의무실로 보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본래의 업무로 돌아갈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많이 다쳤어? 어깨에 단검이 스치는 걸 봤는데 이상하게 휘청거리더라고…….”
“괜찮습니다. 워낙에 튼튼해서 끄덕도 없을 겁니다. 그럼 좋은 밤이 되시기를…….”
세드릭이 미묘한 말을 남기고 떠나 약간 눈치가 보였지만 찝찝한 옷을 벗어 던지는 게 우선이었다. 그 후 물기를 닦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르펠은 내 다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 때는 괜찮았지만 둘만 남겨지니 자연스럽게 눈치를 보게 되었다. 방금 고백 맞겠지……? 치료가 끝났는지 제르펠이 시선이 위로 향했다. 난 흠칫 놀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슈이렌.”
“응, 응?”
“그래. 치료하는 동안 아프지는 않았니?”
“괜찮았어.”
고심하는 동안 제르펠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상처는 따가웠지만 제르펠은 치료하는 동안 내가 조금이라도 움찔하면 더 조심스럽게 약을 발라 주었다. 그의 상냥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한숨이 나왔다.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얼굴도 잘생겼어, 능력도 돼, 돈도 많아. 내 주인이지만 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 아닌가? 한숨만 푹 나왔다. 왜 날 좋아한다는 거야?
그때 아직도 물기가 떨어지는 옷을 입고 있는 제르펠이 보였다. 난 옷을 다 갈아입었지만, 아직도 제르펠의 옷에는 물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감기 걸리면 어쩔 거야.
“주인아. 너도 옷 벗어.”
당연히 제르펠도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춥고 찝찝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옷의 단추를 풀어 주려고 했다. 위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흠칫 손이 움츠러들었다. 아차 싶었다. 그의 고백 직후였다. 내 행동이 어떻게 비추어질지는 나도 알았다.
흠칫한 내가 손을 떼자 제르펠은 스스로 옷을 벗고 잠옷을 입었다. 나는 그동안 뒤돌아서 무릎을 모아 앉아 있었다. 이제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왠지 봐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침대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주인이랑 같이 자잖아! 이 분위기에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방금 같은 일이 있었는데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기에는 내 머릿속에 복잡했다. 좀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잘 곳은 마땅히 생각나지 않지만 손님 방 같은데 있지 않겠어?
“오늘 많이 힘들었다. 그치? 주인 너도 따뜻하게 옷 입고 쉬어. 난…… 오늘은 다른 데서 잘래. 괜찮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제르펠에게 권했다. 제르펠은 마뜩잖은 표정을 짓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내 숨이 턱 막혔다. 내 마음을 간파한 제르펠은 나를 안심시키듯이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왜 그러지? 고백 때문에?”
당당하게 고백이라고 말하는 제르펠의 말에 입을 떡 하니 벌렸다. 대놓고 고백이라고 말하니 확 와닿았다. 아니겠지…… 설마 했던 마음에 대놓고 못을 박았다. 난 손을 사정없이 휘저었다.
“어? 어……. 그……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아무래도…….”
난 볼을 긁적이며 난감하게 웃었다.
“당장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럼 당연하지! 너 나한테 뭔 짓을 하려고 했었어??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네가 허락할 때까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다.”
그는 긴장으로 빳빳하게 곧게 세워져 있던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몸이 움찔거렸다.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난 따로 자고 싶다고! 이 상황에서 너랑 자면 잠이 오겠니? 어찌 나에게 이런 시련이……. 대체 날 왜 좋아하니…… 내가 불안해. 내가!
긴장감이 가시자 이제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제르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사이 제르펠은 이부자리를 다 폈는지 내 어깨를 잡고 침대에 눕게 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그는 마주 보며 누웠다.
“자자.”
그는 태연하게 말하더니 눈을 감았다. 그 뻔뻔한 태도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숨소리는 그가 잠에 빠졌다는 걸 알려 주었다. 빨리도 잠이 들었다. 어휴. 걱정한 내가 바보 같았다. 내가 애를 데리고 뭐 하겠어.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만졌다. 방금 했던 키스가 생각나 이불을 발로 찼다. 키스는 처음이 아니지만……. 내가 당한 건 처음이었다고! 뒤척이는 소리에 제르펠이 깨는 게 아닌가 싶어 옆을 보았다.
“휴…… 다행히 안 깼네.”
조용히 베개에 주먹질했다. 씨발. 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여기는 그런 쪽에 개방적인 곳인가? 동성이 흔해?? 근데 주인 황제 될 거잖아? 후계자 같은 거 신경 써야 하지 않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퍽 머리를 베개에 박았다. 옆을 보니 곤하게 자는 제르펠이 보였다.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는데 잘도 잔다. 잘도 자. 그래…… 오늘 마음고생이 많았으니까 잘 자라.”
밤에 있었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풀렸다. 암살 사건에 심란해졌고, 고백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암살은…… 황후 아니면 교황이겠지. 그 둘 빼고 생각나는 사람은 없다. 암살 사건에 대해 고민하려는 찰나, 제르펠의 고백이 생각났다. 뭐, 싫지는 않았……. 난 손을 휘적휘적 저으면서 생각을 지웠다.
“……. 잠이나 자자. 원래 이런 건 잠 푹 자고 다시 생각하는 거야.”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몸을 꿈틀꿈틀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욕실에서의 제르펠의 모습이 아련하게 생각나 얼른 지워 버렸다. 모습을 지우기 위해 양을 세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 * *
제르펠은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일어났다.
“너의 말처럼 왜 담아 두고 있었던 걸까. 막상 끄집어내니 별것 아니었는데……. 아니, 그건 아닌가…….”
쉽게 떨쳐 버린 건 슈이렌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제르펠은 하염없이 슈이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슈이렌은 밑바닥까지 내려앉았던 기분을 한 번에 끄집어 올려 주었다. 자신의 얼굴을 잡으며 말했던 슈이렌을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슈이렌의 다정한 목소리가 선명했다.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항상 네 편이 되어 준다는 그 말.
제르펠은 피식 작은 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귀까지 새빨개졌던 슈이렌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후회는커녕 만족스러웠다. 어둠을 비추는 달처럼 환하게 웃는 슈이렌의 모습에 제르펠은 목구멍을 넘어 나올 듯한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시간은 많다며 조금 여유를 두고 싶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하루빨리 슈이렌을 가지고 싶었다.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나를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이 눈을.
싫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희열까지 느꼈다. 그 순간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슈이렌은 알지 못할 것이다. 제르펠은 슈이렌이 자신의 고백에 당황한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고백을 무를 생각도 전혀 없었다. 제 예상이지만 슈이렌도 자신에게 조금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고민할 뿐. 부디 빨리 인정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 오면 될 일이다. 슈이렌이 빨리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 오길 바랐다.
“잘 자는군.”
제르펠은 몸을 일으켜 곤히 자는 슈이렌을 훑어 내려다보았다. 붉은 눈이 지금은 눈꺼풀에 가려져 있었다. 제르펠은 조심히 슈이렌의 눈꺼풀을 만졌다. 언제나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슈이렌은 붉은 두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이름을 부르고, 품에 안겨 온다. 얼굴을 감싸고 붉은 두 눈에 입을 맞추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슈이렌은 제 안의 이성을 끊어 내고 욕망을 끓게 했다. 슈이렌은 알까. 자신이 뒤에서 머리를 한없이 빗는 이유를. 슈이렌의 눈에, 입술에 입을 맞출 수는 없으니 참기 위해 그 몰래 부드러운 머릿결에 입을 맞춘다는 사실을. 제르펠은 슈이렌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곤히 잠든 틈을 타 슈이렌의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짓눌렀다.
자신의 곁에 있겠다고, 자신만을 위한다고 말했을 때, 그때 보았던 환한 미소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애정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처음 한번이 어렵다고 했던가. 이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면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진다.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던 슈이렌의 턱을 잡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슈이렌이 사랑스러워 본래의 모습을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과 자신의 채취로 물들이고 싶다는 마음이 충동했다.
슈이렌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내심 그가 잠을 못 이루기 바랐다. 고백에 설레하고 잠을 못 이루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심인 것 같았다. 그래도 편히 자는 모습을 보면 그만큼 자신이 편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빨리 시간이 지나야 할 텐데…….”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기다릴 수나 있을까. 하필 연회에 대한 말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날짜가 문제지 곧 개최되는 것은 확정이었다. 누가 이 아이를 탐내기 전에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시선이 빼앗긴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 있겠다고 말한 건 너였단다. 슈이렌……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가지 못해.”
어두운 밤, 제르펠은 슈이렌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제르펠은 팔로 슈이렌을 꼭 끌어 앉은 뒤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