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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가 창문 밖에서 불퉁한 얼굴로 빨리 열라고 항의하고 있었다.
“아, 맞다…….”
[잊고 있었느냐?]
키르가 톡 쏟아 붙였다. 미안한 마음에 얼른 창문을 열고 키르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미안, 미안. 근데 언제 나갔어?”
[난리로 피투성이가 된 곳에서 잘 수 있겠느냐? 틈 봐서 빠져나갔다.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간 거냐? 어디 아프냐?]
“응? 얼굴?”
키르의 말에 창문을 보았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게? 왜지?”
[쯧. 실없기는. 아픈 게 아니라면 되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들킨 사람처럼 허둥지둥 창문을 닫았다. 키르는 침대 위에 자리를 잡더니 꼬리로 바닥을 치며 말했다.
[앉아 보거라.]
키르는 고개를 위로 쭉 올리면서 위협적으로 쉭쉭 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키르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우선 바닥에 앉았다. 키르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자신을 잊어버린 것에 대한 잔소리인 줄 알았던 것과는 다른 말이었다.
[어제의 그 꼴은 뭐냐? 내가 힘을 썼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한 거 아느냐!]
왠지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말투였다. 왠지 웃음이 나왔지만 진지한 키르의 모습에 꾹 참았다. 역시 넘어졌을 때 나를 구해 준 건 키르가 맞았었다.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
[그럴 때 쓰라고 주어진 힘이다!]
키르가 벌컥 화를 냈다. 어제의 일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힘이 있어도 실전에서 쓰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근데……. 잠시만…… 게슴츠레 뜬 눈으로 키르를 바라보았다. 어제 빛의 속도로 사라지던 키르를 봤었다.
“키르…… 너, 창문이 깨지자마자 침대 밑으로 쏙 기어들어 가지 않았나?”
[그, 그건 말이다. 본능이라는 게 말이지. 무시할 수가 없더구나. 나도 많이 당황했지.]
“지금 당황한 게 아니고?”
키르는 얼버무렸지만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난 팔짱을 끼고 키르를 추궁했고, 키르의 몸은 한껏 움츠러들었다. 키르는 기침을 연신 하더니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래도 다시 도와주러 나왔지 않느냐! 아무튼 너에게는 힘을 다루는 게 시급하다는 걸 알았다. 신의 사자가 인간의 손에 죽다니 말도 안 되지. 애초에 뱀으로 돌아갔으면 작은 틈새에 숨을 수도 있었지 않느냐?]
응? 뭐라고? 뱀? 키르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당연히 인간이 되었으니 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뱀이 될 수 없다고 확정 지은 것이 이상했다. 굳이 따지자면 뱀에서 사람이 된 꼴이 아니었나……
“뱀으로 될 수도 있어?”
[당연하지 원래는 너도 뱀이지 않느냐? 네가 인간이 된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수신님은 인간들을 좋아하더군……. 그들과 소통을 잘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그럼 네가 정말로 인간이 된 줄 안 것이냐?]
당연하다는 키르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그가 나를 뱀이라고 생각할 만도 했다. 난 환생을 했고 전생이랑은 별개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전생에서 인간이었기에 인간으로 되돌아 왔구나가 아닌, 뱀으로 환생했으니 뱀에서 인간으로 변했다가 맞았다.
“뱀에서 인간으로 변했으니 뱀으로도 돌아갈 수가 있구나…….”
하지만 난 딱히 뱀으로 변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선호도를 따지자면 움직이기 편한 사람의 몸이 좋았다.
[실제로 나도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진짜? 보여 주라!”
[싫다!]
“왜? 어째서?”
키르의 말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키르에게 매달려 보여 달라고 떼를 썼다. 키르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나이에 맞게 할아버지일까나? 키르는 내가 계속 흔들자 귀찮았는지 입을 벌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크 없이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주인이다.
제르펠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성큼 다가오더니 내 앞에 있던 키르를 낚아챘다.
“이건 뭐지?”
[컥…….]
키르는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제르펠은 키르를 죽일 듯이 손에 압력을 주고 있었다. 손등 위로 솟아오른 핏줄이 선명하게 보였다. 키르는 괴로움에 몸을 배배 꼬았다. 난 벌떡 일어나서 힘을 풀라고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앗! 주인아. 그러니까. 이 애는 키르라고 하는데 말이지. 내가 어제 수신의 호수에 갔는데 거기서 만난 아이야. 나 알고 보니 뱀이랑도 말이 통해서…….”
열심히 그의 옆에서 횡설수설 떠들었다. 제르펠의 기세는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필 제르펠이 들어온 타이밍이 키르가 짜증을 내며 입을 벌렸던 순간이라서 내가 위험한 줄 알고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내 말을 끝까지 듣던 제르펠이 드디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게 카사가 말한 뱀이었나.”
다행히 카사가 대충 전달은 했었는지 금방 알아듣는 눈치였다. 제르펠은 툭 손을 놓았다. 키르는 숨이 차서 컥컥거리고 있었고, 난 키르의 등을 쓸어주었다. 키르의 눈치를 보면서 제르펠의 옹호를 했다.
“음…… 주인이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위험한 상황인 줄 알아서…….”
[저…… 저…… 이래서 인간은 싫다!!]
내 말은 키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키르의 인간 불신을 더 키우게 된 것 같았다. 제르펠은 상황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미안하군.”
하지만 그 말에는 한 톨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키르도 그걸 알았는지 난리를 쳤다. 난 둘 사이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야! 저것이 너의 주인이냐? 너를 지켜 주는 거 보고 괜찮은 놈이라 생각했더니 내가 잘 못 봤구나!]
키르가 제르펠에게 덤벼들려고 하는 걸 온몸으로 막았다. 제르펠은 소란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그는 주저앉아 있던 나를 일으켰고, 키르는 혼자 바닥에 남겨졌다. 내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정도로 쌀쌀맞은 태도였다. 서로 같은 공간에서 지내게 될 텐데 벌써 삐걱거리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슈이렌. 잠시 갈 곳이 있다.”
“응? 어디?”
“가 보면 안다.”
그 말에 제르펠은 나를 이끌고 밖으로 나섰다. 나서는 순간 키르가 혼자 방에 남을 수 없다며 내 다리에 칭칭 꼬리를 감았다.
[나도 데려가라! 저놈한테 맡길 수가 있어야지. 또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잔뜩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내 걱정이라 작게 웃음이 나왔다. 싫지는 않았기에 키르를 들어 올리면서 제르펠에게 말했다.
“키르도 같이 가고 싶데.”
[인간아. 내가 같이 가 주는 걸 감사해라.]
키르는 한껏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키르는 잘난 척을 하며 제르펠을 깔보고 있었다. 주인이 못 들어서 다행이다……. 첫인상부터 제대로 망친 건지 키르는 제르펠에게 날을 세웠다.
뱀을 잡을 때 보통 목을 잡는다. 물리지 않기 위해서 나도 실제로 한번 잡혀 보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은 나도 알았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음만 지었다. 제르펠도 나를 위해서 키르를 잡아챈 거긴 했지만 왠지 둘 사이에 꺼서 고생하게 될 거라는 암울한 미래가 상상됐다.
제르펠은 키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상관은 없다만…… 너에게는 무거워 보이는구나.”
제르펠은 내 팔 굵기와 키르의 몸 굵기를 비교하고는 말했다. 내 팔 굵기가 가늘면 가늘랬지 키르보다 굵지는 않았다. 제르펠은 내가 키르를 들기에는 버겁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밀었다. 키르는 무겁다는 말이 살졌다고 들렸는지 온갖 험한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르펠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 목으로 순식간에 올라와 제르펠을 향해서 위협을 하고 있었다. 키르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가기 싫다며 내 목에 칭칭 감겨 있었다. 제르펠의 손을 피하고자 목에 더 감겨 왔다.
“영감. 나 숨, 숨 막힌다.”
그 힘에 목이 조였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키르의 몸을 탁탁 치면서 말했다. 그 소리를 제르펠이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쯧.”
제르펠은 키르를 떼어 내기로 맘을 먹었는지 키르의 머리를 잡더니 쑥 잡아챘다. 키르가 내 말에 살짝 힘을 푼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키르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사이 쫓겨난 것이다. 키르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미안, 영감. 사실 제르펠의 말처럼 무거웠다. 제르펠은 시중에게 키르를 내밀었다.
“들어라.”
“…… 네”
시종은 키르의 크기에 살짝 식겁했지만 제르펠의 명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시종은 공손히 키르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사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세드릭의 말에 의하면 본래의 업무로 돌아온다고 했었다. 그래도 같이 붙어 있던 녀석이었는데 완전 까맣게 잊어버려 미안한 감이 좀 들었다.
“근데 카사는?”
“지금 가는 곳에 있다.”
금방 도착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상당한 거리를 걸었다. 이쪽 길로는 한 번도 오지 않았던 곳이었다. 제르펠을 따라가서 도착한 곳은 연무장이었다. 기사들은 세드릭의 지시 아래에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구호에 맞춰 움직이는 자세는 힘 있고 절도 있는 자세였다.
세드릭은 맨 앞에서 고함을 지르며 지시하고 있었다. 그가 큰소리치는 걸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여기서 들을 줄이야. 제르펠의 옆에 있던 그는 항상 근엄한 기사의 표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기사들을 굴리고 또 굴리고 있었다. 어찌나 매의 눈빛으로 기사들을 노려보는지 자세가 흐트러진다고 하면 허리를 들어라, 검에 쥔 손에 힘을 주라며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귀신이 따로 없었다.
어제 일로 경각심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연무장에서의 세드릭을 처음 본 나로서는 이전에는 어땠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사들은 죽을상을 지으며 힘찬 기합 소리로 휘두르는 자세를 무한반복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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