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47화 (47/103)

-47-

세상이 고요하게 보일 만큼 신전은 온통 새하얀 곳이었다. 새하얀 대리석에는 더러운 얼룩 하나 없었다. 그곳에 옷이 펄럭이는 소리를 낼 정도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주인은 교황이었다. 교황은 벌컥 문을 열었다. 교단 앞에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는 성기사와 신관이 있었다. 그들은 미동 없이 교황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교황을 뵐 면목이 없다는 듯이 숙어져 있던 고개를 더욱 내렸다. 교황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부여잡았다.

“사자님이 결계에 영향이 없을 줄이야…….”

결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닌, 신관들에 의해 유지되는 결계였다. 해법을 모르면 절대로 풀 수가 없었다. 신의 성역인 만큼 고위 신관만이 해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통과한 데다가 안에 있던 사냥꾼과 마주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이다. 교황은 서신을 받자마자 황후에게도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마마께서는 서신을 주지 않더냐?”

“황후마마께서는 약이 준비되면 알리라고…… 시녀를 통해 이 말만 전달하셨습니다.”

“하하…….”

교황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성역은 오로지 신전의 구역이었다. 하지만 더는 성역을 지키는 것은 성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제르펠이 성기사 한 명 황실기사단 한 명을 배치했다. 그 황실기사단이 제르펠의 직속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하필 기사는 마력을 감지하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들켜도 증명할 길이 없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큰 착오였다. 그들은 마법을 감지하는 도구를 들고 있었다. 섣부르게 움직인다면 도리어 큰 해를 당할 수 있다.

“우리가 했다는 증거는 없겠지?”

“네. 마법의 흔적만으로 저희를 몰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희는 결계 밖에 있었고 몰랐다고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법으로 침입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뱀을 사냥하는 것은 한동안 그만해야 할 듯합니다.”

교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황후와의 거래를 위한 뱀들을 잡지 못한다는 건 큰일이었다.

“저하의 병세는 어떻지?”

“네. 검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답니다.”

“그런데도 서신을 주지 않다니…….”

교황은 슈이렌이 성역을 침입한 상황을 성기사에게서 들은 후 황후에게 바로 서신을 보냈다. 그 후로 황후의 태도가 급변했다. 태도가 순식간에 냉담해진 것이다. 서신조차 없고 그저 시녀에게 약을 들고 오라는 말뿐이었다. 거래의 성사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지금 와서야 과연 계약을 성사시켜 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처음에 황후가 내건 조건을 보고 상당히 놀랐지 않았는가? 신전을 제국 내에서 따로 분리해 준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국가로서 기능하게 해 준다는 말이었다.

‘아니다. 마마께서는 신을 증오하고 계신다.’

절대 그럴 일은 없어야 했다. 신을 저버린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데……. 교황은 황후를 잘 알고 있었다. 신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상당했다. 증오로 인해 신전을 없애거나 눈에서 치워 버리고 싶어 했다. 그랬기에 제안을 믿어 의심치는 않았다.

그 증오의 이유가 참으로 하찮다고 생각했지만 본심을 숨겼다. 교황의 위치인 만큼 많은 사람을 봐왔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신에게 기도를 하고 그런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증오로 바뀌는 것이다.

“한동안 뱀들은 잡지 않는다. 그동안 잡은 뱀들이 있으니.”

“네.”

황후는 모르겠지만 모든 뱀을 황후에게 바치지는 않았다. 성역에서 수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뱀은 교황의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몇 마리는 따로 신전에 가져오기도 했다. 그리고 알아냈다. 그것들은 아주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황궁에서 고생이 많구나. 앞으로도 노력해 주렴.”

교황은 그들의 어깨를 톡톡 쳐 주었다.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영광이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교황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는 긴 회랑을 걷고 걸어 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의 문은 무척이나 컸고 문 앞에는 커다란 용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혼자서 그 방으로 들어갔다. 교황이 들어가자 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곳은 교황이 기도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신에 대해 예의를 취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커다란 석상을 바라보기만 했다. 기도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석상을 향해 다가가 용의 발톱을 순서대로 누르기 시작했다. 하나씩 누를 때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석상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석상이 뒤로 움직이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생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그 끝에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구가 있었다. 이곳은 대대로 교황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의 공간이었다.

“이 구슬만 있으면 문제가 될 건 없지.”

마치 심해처럼 어둡고도 새파란 빛으로 빛나는 구슬이었다.

* * *

[왜 무슨 일이 있느냐?]

“주인도 무사했으면 좋겠고, 에이든도 해맑게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당연한 것을 이룬다는 게 제일 힘들어…….”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 키르가 말을 걸었지만 무시하고 침대에 누웠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황제와 황후에 대한 반발심만 커졌다. 황후 소생은 아니라지만 제르펠도 분명 황제의 자식이 맞잖아? 근데 에이든은 되고 주인은 안 될 게 뭐야? 에이든은 황제 되기도 싫어하는데…….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던 내가 격분하며 침대에서 날뛰자 키르도 그 반동에 따라 위아래 같이 흔들렸다. 키르는 진정하라면서 꼬리로 나를 툭툭 건드렸다.

[진정해라.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게냐?]

“내 마음대로 하라 이거지…… 좋아! 생각난 김에 만나러 가자!”

외출은 자제하라는 제르펠의 말이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또 어디 간다는 게야?]

“에이든 보러.”

[그게 누군…….]

난 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르를 낚아채 내 목에 두르고는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슈이렌 님?!”

돌발적인 내 행동에 월이 당황해했다. 방금 집무실에 갔다 왔으니 난 이제 방에서 뒹굴뒹굴해야 할 시간이었다.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굳은 얼굴로 벌컥 문을 열자 당황해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뒤를 졸졸 따라왔다.

“슈이렌 님. 대체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음…… 그게 말이지. 바람이나 쐬려고…… 호수에.”

내가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걸어왔으니 당황스러울 법했다. 말이 바람이지 혹시나 호수에 에이든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 무작정 뛰쳐나온 것이었다. 저번에도 호수에서 보았기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간 것이었다.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없다면 바람이나 쐬지 뭐…….

얼추 호수에 가까워질 때쯤 목에 가만히 둘려 있던 키르가 난리를 쳤다.

[아이들의 기운이다!]

키르가 돌돌 말고 있던 몸을 쭉 내밀었다. 마치 자신은 저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꼬리로 내 목을 감싸고 호수 쪽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난 그가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아 손으로 몸을 받쳐 주었다.

“갑자기 왜 이래?”

[아이들이 부르고 있어! 저쪽이다. 빨리 가자!]

“진정해. 떨어져!”

키르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다급하게 나를 재촉했고, 여차하면 스스로 갈 기세였다. 진정하라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다. 그 방향은 어차피 내가 가려고 했던 호수였다.

호수 앞에 반짝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 작은 체구는 공처럼 웅크려져 있었다. 굽은 등이 어딘가 우울해 보였다. 에이든은 누가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든은 울고 있었는지 눈이 붉었고, 황급히 일어나 옷으로 눈을 비볐다.

얘…… 운 거 맞지? 에이든의 모습에 당황한 난 우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안녕, 여기서 뭐 해?”

“슈, 슈이렌 형?”

심지어 에이든의 뒤에는 시종도 아무도 없었다. 이번에도 분위기상 몰래 도망쳐 나온 거 같았다. 내 시선이 계속 그의 뺨으로 갔다. 에이든은 아차 하더니 조심스럽게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슬쩍 가렸다. 그 자세가 어정쩡해서 더 이상하게 보이는 걸 모르는 듯했다.

“혀, 형은 어쩐 일로…….”

“난 그냥 산책. 너도 산책하러 왔어?”

“아…… 네.”

에이든이 어물쩍거렸다. 에이든은 손을 가져다 대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보였다. 그의 뺨에는 길게 생채기가 나 있었다. 딱 봐도 누구한테 맞은 상처였다. 하지만 누가 감히 황자의 볼을 때릴 수 있겠는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다…….]

키르는 내 귀 옆에서 살벌하게 말했다. 뭐? 내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키르가 에이든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헉하며 놀란 폴의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늦지 않게 키르를 붙잡았다. 쉭쉭 거리며 위협하는 키르의 얼굴을 꽉 잡고는 온몸으로 제압했다. 몸집이 크다 보니 조금 버거웠다.

나는 키르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황자를 위협하다니, 목이 덜렁 썰려도 아무 할 말이 없었다. 키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영감…… 미쳤어? 왜 이래??”

힘이 부족해 살짝 열린 키르의 입 사이로 말이 들렸다.

[저 아이임이 틀림없어! 우리 아이들의 기운이 느껴져!]

“뭐?!!”

놀란 마음에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이야? 처음 보았을 때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힘을 잘 다루게 되어서 그런가 에이든 주위를 떠도는 푸른 기운들이 보였다. 문득 호수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원통함과 슬픔. 그 감정이 에이든을 보는 순간 느껴졌다. 아연한 상황에 굳은 얼굴로 에이든을 바라보았던 것일까? 에이든이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무, 무슨 일 있어요? 그 뱀은…….”

에이든은 자신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키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르는 에이든에게 아이들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하지만 에이든이 직접 그랬을 리가 없었다. 뱀들의 사체, 교황, 그리고…… 수신의 호수가 위치한 곳을 생각하면 황제와 황후가 관련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깊은 탄식은 내 목구멍을 넘어오지도 못하고 턱 막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난리 치는 키르와 마찬가지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표정에 어설프게 싱긋 미소만 지었다. 외침은 슬프게도 내 속에서 쌓여만 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