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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시녀들은 얼음이 담긴 주머니를 네리아의 이마에 위에 올려 두고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했다. 황궁 연회가 개최되는 것은 양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신년제와 함께 개최된다면 말이 달라졌다.
“폐하께서는 어찌 허락하셨습니까!”
“황후. 진정하시오. 나도 별수가 없었소. 주변 귀족들도 동의하는 바람에…….”
“하필 신년제와 함께 하다니요. 신년제가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가 아닙니까!!”
신년제는 새해를 맞이하여서 하는 연회로 모든 귀족이 모이는 연회였다. 평범한 황궁 연회라면 선별된 귀족들에게만 초대장이 간다. 하지만 신년제는 모든 귀족에게 초대장이 갔다. 그랬기에 신년제를 전쟁과 기근을 핑계로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당시 제르펠이 막 궁으로 돌아왔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고, 귀족들이 제르펠의 편으로 돌아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황제도 결코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회의 때 황제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제르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슈이렌의 등장으로 은근슬쩍 성역과 관련된 자들은 발을 빼기 일쑤였다. 다행히 그와 관련된 자들은 발언할 수 없게 ‘금언’을 걸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이제 와 새삼 신이 무서워졌는지 발을 빼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황제파는 줄고 있는 시점이었다.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지만, 등을 돌린 자들은 말이 없었다.
“……연회는 언제입니까?”
“보름 후로 정해졌소. 걱정하지 마시오. 난 갈 생각이 없소이다.”
“아니요. 가셔야 합니다.”
“화, 황후의 말이 그렇다면…….”
황후는 부릅뜬 눈으로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는 이러다가 황후가 쓰러지지 않을까 옆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황후는 나지막이 말했다.
“……후작을 부르도록 하죠.”
황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후작을? 하지만 후작은 카지노 건으로 바쁘지 않소? 이번에도 무리를 했다고…….”
“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미, 미안하오. 프란시아 후작은 오랫동안 짐의 옆에서 귀족들의 수장이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황후의 매서운 일침이 황제에게 향했다. 황제는 쩔쩔매며 황후를 다독였다. 그녀는 황제의 태도에 혀를 찼다.
“뭣들 하느냐? 당장 서신을 준비해 오지 않고! 후작에게 서신을 보낼 것이다.”
“네, 네!”
황후는 가만히 있던 시녀를 대신 잡았다. 시녀가 공손하게 편지지를 내밀었고, 편지지를 가로채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제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 황궁 연회 때 모든 귀족이 참석하니 그때 부르는 게 어떻겠소? 그가 복귀 선언을 한다면 제르펠의 견제가 가능하겠지.”
황후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미 건강과 사업으로 정치계를 떠난 인물이었다. 그를 다시 들여오게 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아무 이유 없이 들어온다면 제르펠의 견제를 위해 온 것이 너무 뻔히 보였고, 귀족들이 뒤에서 수군거릴 것이 분명했다.
‘명분이 있다면 그나마 나을 것이지만…….’
황후의 고민을 눈치챈 황제가 제안했다.
“베르트 공작 때문에 그랬다고 하면 되지 않겠소? 공작은 좀 다르지만 그도 다시 복귀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베르트 공작에게 감응 받았다고 말하면 되지 않소?”
황제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황후는 마저 서신을 적고는 황실의 직인을 찍었다. 어차피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의 명분이 필요했다. 황후는 완성한 서신을 시녀에게 건넸다.
“프란시아 후작가로 보내라.”
“네. 알겠습니다.”
서신을 들고 시녀가 나서자 그 뒤로 다른 시녀가 들어왔다. 황후는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녀는 한 서신을 들고 왔다. 황후는 보낸 이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나이프로 서신을 뜯고는 펼쳐 보았다.
“하. 꼴도 보기 싫은 것. 이건 폐하가 해결하십시오.”
황후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면서 망설임 없이 황제에게 서신을 주었다.
“교황이로군.”
서신의 내용은 자신이 황궁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겠냐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황후를 흘끔 쳐다보았다. 불편한 기색이 명백한 황후에게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황궁 연회는 귀족들만 올 수 있는 장소. 사자도 신전에 머무르지 않으니 교황을 초대할 필요는 없지.”
딱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황제와 신전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일 때는 출입을 거부당하기도 했었다. 황제의 눈에는 황후가 교황에게 단단히 실망한 듯 완전히 마음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하지 못할망정 곧바로 무리라고 서신을 전하다니…….’
황후의 입장에서는 괘씸했다. 성역에 들어가 뱀을 잡고, 에이든에게 신성력을 주는 대가로 얼마나 많은 기부금이 신전으로 들어가는지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먼저 성역의 존재를 들먹인 것은 교황이었지만 그 방법을 강구한 것은 황후였다. 그 기부금을 무를까 하고 생각했지만 에이든은 신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훗날이 어찌 될지는 그 누구도 몰랐기에 우선 그에 대한 처리는 생각 중이었다.
하필 프란시아 후작의 사업도 카지노를 제외하고 베르트 공작에 의해 사사건건 참견을 당하는 중이었다. 카지노는 아직 건드리지 않은 걸 보면 존재를 모르는가 보지.
“쯧.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 * *
난 멀리서 보이는 에이든에게 손을 흔들었다. 역시나 같은 힘끼리 끌리는지 에이든이 기다릴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그가 먼저 와 있었다.
“키르도 왔네요? 안녕.”
에이든은 키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이든을 만나러 갈 때 키르를 데려갈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키르는 에이든을 볼 때마다 그들의 원통함과 분노가 전해지니 거부감이 심한지 따라나설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었다. 하긴…… 그에게는 뱀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에이든과 계속 만남은 유지하지만 그를 구할 별다른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에이든의 상태가 악화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항상 에이든과 헤어질 때 황후가 주는 약은 먹지 마! 라고 목소리가 성대로 나가는 것을 꾹 참았다. 내 고민스러운 표정을 보았는지 에이든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응? 아니야…… 음…… 그냥 은근히 예법이 어렵더라고…… 너도 연회 때 와?”
모든 귀족이 오는 연회이기에 에이든도 당연히 올 줄 알았다.
“아! 이번에 연회를 개최한다고 듣긴 했는데요……. 아마 전 가지 못할 것 같아요.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니까요.”
“아쉽다.”
“어쩔 수 없죠.”
에이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에이든은 어른스러워지고 있었다.
“왜 사람마다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다를까요?”
“누구 말이야?”
“형님이나…… 부모님이요.”
이러니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질문을 던질 때마다 에이든은 의외로 생각이 깊은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답을 내려 줄 수는 없었다. 반짝거리며 빛났던 금색 눈동자가 미묘하게 흐려져 있었다. 고민하는 것이겠지. 황제와 제르펠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선택하는 건 자신이야.”
“네?”
“누가 무얼 잘했든, 잘못했든 자신이 믿고 싶은 걸 믿으면 돼. 아니면 알고 있어도 그자의 편을 들어준다든가…… 그리고 그 책임은 네가 지는 거야.”
에이든은 약간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딱밤을 박아 주었다. 에이든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는 거에만 신경 써! 요즘 좋은 일이나 이상한 일은 없었어?”
에이든을 계속 만나면서 느낀 게 있었다. 나와 에이든은 서로 감응하고 있었다. 그걸 먼저 눈치챈 것은 키르였다.
[다행히 너의 힘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들이 너를 봐서 기뻐하고 있다는 뜻이다. 원래 영혼은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겠지. 너도 자연스럽게 에이든에게 힘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몰랐느냐?]
내가 멍한 표정으로 키르를 보았고, 그는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낌새로 알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인 거지. 부작용을 최대한 적게 할 수 있다는 거니까. 늦춰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기쁜 소식이었다. 내 힘이 통한다는 것은 키르의 힘도 통한다는 뜻이었다. 한줄기의 빛이 보이는 듯했고 참담했던 기분이 훅 날아갔다. 난 수신에게 직접 힘을 받지 않았는가. 에이든의 몸이 뱀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건강해진다면 뱀들의 저주를 빼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다.
키르의 말을 듣고 기뻤던 난 그의 몸을 한참이나 두들겼다. 아프다는 키르의 말을 듣고 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랬기에 난 희망에 찬 목소리로 요즘 무슨 일 없냐고 물어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에이든의 말에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다.
“음…… 사실 요즘 이상한 꿈을 꿔요. 뱀들이 저를 옭아맨다고 해야 하나…….”
“뱀?”
“네.”
“…….”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언제부터?”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약간…… 악몽 비슷한 거 같아요. 좀…… 수업이 힘들었나 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꿈인데요. 아마 별거 아닐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겨우 한두 번 꾼 꿈이었다면 나에게 말할 리가 없었다. 여러 번 꿈을 꾸었을 것이 확실했다. 난 작게 키르를 불렀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그리고 말했지 않았느냐. 어차피 시간이 늦춰질 뿐. 죽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날이 늦게 다가오기를 비는 수밖에 없지.]
키르의 입에서 부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에이든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최대한 입가를 올리며 말했다.
“걱정 마. 그저 꿈이야.”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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