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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지만 황금빛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제르펠은 품에 꼭 붙어서 자는 슈이렌을 응시했다. 이미 어둑한 밤이어서 슈이렌은 깊은 잠에 빠졌지만 그는 쉽사리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은 느리지만 아직도 격하게 뛰고 있었다.
언제나 꿈꿔 왔던 온기였다.
제르펠은 슈이렌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체향을 맡았다. 그리고 오늘 낮에 있던 일을 상기했다. 자신도 안다. 오해라는 것은. 집무실을 나갈 때만 하더라도 이안의 제안대로 슈이렌이 생각나 그를 데리러 갔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슈이렌은 알지 못하는 남자와 같이 있었다. 그것도 옷을 다 벗은 상태로. 분노로 정신이 나갈 뻔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건 싫었을 텐데 당장에라도 그자의 목을 치고 싶었다. 슈이렌은 결코 모를 테지. 슈이렌의 눈앞에서 피를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분노를 참았고 키르라는 말에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들끓어 오르는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제르펠은 자신이 인내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와도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자만이었다.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독점욕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본능이 속삭였다. 얼른 너의 것으로 만들라고, 어디에 가지 못하게. 제르펠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기 위해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밀어붙이라는 이안의 말이 떠오르면서 감정의 회오리에 몸을 맡겨 홧김에 저질러 버렸다.
‘너에 관한 것은 감정이 잘 제어되지 않는구나.’
이안의 충고가 옳았다. 슈이렌은 거절하지 않았다. 입술이 닿으려고 하자 살포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혀를 받아들이고, 품 안에서 쾌감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슈이렌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고 입술 안의 과실을 마음껏 탐했으니 만족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아래에 붉게 물든 눈시울이 보였고, 숨이 벅찼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슈이렌의 두 뺨이 장밋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답으로 슈이렌은 먼저 입맞춤을 해 주었다.
“나만…… 나만 바라보렴.”
제르펠은 잇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의 입매가 느릿하게 풀어졌다.
* * *
제르펠은 개운하게 일어났다. 슈이렌의 마음을 확인했고 눈에 거슬렸던 키르를 내쫓았기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슈이렌은 몰랐지만 키르는 틈만 났다 하면 제르펠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슈이렌과 제르펠 사이를 커다란 몸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건 기본이고, 얼굴에 구멍이 날 정도로 제르펠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제르펠은 무시를 했다.
하지만 둘만 있던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상황에 그런 행동이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이제 사라져서 좋군.”
슈이렌에게 손을 뻗어도 방해하는 키르의 꼬리가 없었다. 그는 여유롭게 슈이렌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슈이렌의 말을 듣자마자 시종을 시켜 키르를 보내 버렸다. 시종의 말로는 에이든이 살짝 당황했지만 기뻐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하녀를 죽인 사건 이후로 에이든은 제르펠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고, 누군가의 등 뒤에 쏙 숨기 바빴다. 그런데 에이든이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며 시종에게 직접 말한 것이다.
“……나를 만나러 오겠다라.”
중얼거린 제르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침대에 누워 있던 슈이렌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일어났느냐?”
“응……. 좋은 아침…….”
슈이렌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쭉 기지개를 켜고는 축 늘어졌다. 잠이 덜 깬 슈이렌의 고개가 이리저리 까딱거렸다.
제르펠은 그의 고개를 잡아 어깨에 기대게 했다. 슈이렌은 칭얼거리며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제르펠은 그런 슈이렌을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는 손으로 슈이렌의 턱을 잡아챘다. 흐릿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제르펠은 슈이렌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비몽사몽간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슈이렌이 이내 정신을 차린 듯 하느작거렸다. 슈이렌이 제르펠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힘이 없었다. 하지만 제르펠은 순순히 물러갔다.
“아침부터 뭐야…….”
“연인들은 모닝 키스를 한다더군.”
“이때까지는 어떻게 참았대…….”
슈이렌의 툴툴대는 말투에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이제부터 참지 않을 생각이다.”
제르펠은 슈이렌의 손에 깍지를 껐다. 살짝 입을 벌렸던 슈이렌이 큼큼거렸다. 그러면서 싫지 않았는지 손을 마주 잡았다. 고개를 돌린 슈이렌의 귓가가 빨갛게 물들어져 있었다.
“연인이 된 기념으로 갖고 싶은 것은 없느냐? 내 뭐든지 가져다주마.”
슈이렌의 눈초리가 살짝 가느다래졌지만,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딱히 가지고 싶은 건 없어. 평소에 주인이 제때 챙겨 주잖아. 갖고 싶은 건 이미 다 가졌는걸? 이번에 맞춤복도 주잖아. 그걸로 충분해.”
“그건 연회를 위한 것이지 너를 위한 선물은 아니다.”
살짝 한숨을 내쉰 슈이렌은 치대듯이 품에 안겨 왔다.
“괜찮아. 이미 많은 걸 받았는걸.”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막 연인이 된 슈이렌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제르펠의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음……. 그럼 머리 쓰다듬어 줘.”
제르펠은 속마음을 감추고 옆에 있던 빗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알겠다. 그럼 우선 머리를 빗도록 하자.”
슈이렌은 자동으로 뒤를 돌았고 제르펠은 그의 머리를 뿌리부터 끝까지 빗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냥 귀찮아하던 슈이렌도 잠자코 손길을 허락했다. 기분이 좋은지 중간중간 허밍음이 들렸다.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어? 아…… 주인이랑 연인이 되고 처음으로 맞이한 아침이잖아. 의미가 색다르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던 슈이렌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스스로 말하고는 좀 부끄럽다고 싶었는지 냉큼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그렇다고 하면서 흘러가듯이 한 말이 귀여워 제르펠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제르펠은 틈틈이 슈이렌의 머리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슈이렌이 뒤를 흘끔거렸지만 제르펠은 오히려 보라는 듯이 요사스럽게 웃었다. 재빨리 시선을 회피하고 툴툴대던 슈이렌은 문득 고개를 든 창문가를 바라봤다.
“주인아 많이 늦은 거 아니야? 왜 이안이 안 오지? 오늘 한가해?”
흘끔 눈치를 보며 하며 말하는 투가 같이 있자는 무언의 말이었다. 제르펠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싶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제 이안에게 따끔하게 말했기에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것뿐이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 훤했다.
그는 슈이렌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슈이렌은 이제는 말도 필요 없이 행동만으로 그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쳇. 이럴 줄 알았어……. 그래도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준 거지? 일 열심히 하고 와.”
“나중에 같이 식사하지.”
제르펠은 가기 전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슈이렌의 머릿결을 감상하듯 두 손으로 빗어 내렸다. 그리곤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말했다.
“다녀오마.”
제르펠은 한마디를 하고 일어났다. 그런 제르펠의 손을 턱 슈이렌이 붙잡았고, 이리오라며 손을 까딱하는 슈이렌의 손짓에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제르펠의 볼에 촉촉한 입술이 붙었다가 순식간에 떨어졌다. 커진 눈으로 제르펠이 돌아보자 짓궂은 얼굴로 웃는 슈이렌이 보였다.
“주인아. 다녀와.”
“……그래.”
제르펠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제르펠이 집무실에 도착하자 미간을 좁힌 채로 잔뜩 서류를 들고 있는 이안이 보였다. 어제도 서류를 마저 마무리하지 못하고 갔으니 그만큼 일이 쌓여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제르펠이 의자에 앉자 서류의 산을 턱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맨 위에 있는 서류 종이가 공중을 떠다니더니 사뿐히 제르펠의 눈앞에 놓였다.
“오늘은 못 가십니다.”
결의에 찬 다부진 말이었다. 제르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척척 정리해 가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다소 빠른 손놀림으로. 방 안에는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펜이 끄적이는 소리만 울렸다. 문득 이안이 입을 열었다.
“어제 시종에게 에이든 님이 찾아오신다고 전달받았습니다만, 만나실 겁니까?”
제르펠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제르펠은 무심하게 말하고 손을 움직였다.
“만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응접실에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이안은 시종을 불러 응접실에 다과를 준비하도록 일렀다. 그리고 조금 뒤 타이밍 좋게 시종이 에이든이 왔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전하.”
“가도록 하지.”
제르펠은 서류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이안이 응접실 문을 여니 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에이든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르펠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오로지 에이든 혼자였다.
“혼자인가? 시종은?”
이안은 조용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종의 말로는 누군가를 피하듯이 황급히 궁으로 왔다고 합니다.”
에이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르펠이 들어온지도 모르고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에이든.”
에이든은 제르펠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차를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났다.
“안, 안녕하세요.”
에이든은 뻘쭘하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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