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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60화 (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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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은 고갯짓으로 앉으라는 뉘앙스를 취했고, 제르펠이 반대편에 앉자 에이든도 엉거주춤 앉았다. 차를 마시며 에이든의 말을 기다리던 제르펠은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에이든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예 마주치지도 않았을 시선이 잠깐잠깐 마주쳤다. 제르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든을 보았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였지? 키르 때문인가?”

“아, 아니에요. 그…… 개인적인 볼일 때문이에요. 혹시 바쁜데 제가 실례한 건 아니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에이든의 질문에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들이 떠올랐지만 태연하게 답했다.

“아니다.”

“아! 혹시 키르를 걱정하시나요?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돌볼게요.”

“신경도 안 쓴다.”

“네?”

하등 상관없다는 제르펠의 말에 에이든이 놀라 대답했다. 에이든이 생각하는 제르펠은 상냥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에이든은 제가 들은 게 맞는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볼일이 무엇이지?”

“아…… 저…….”

에이든의 입이 벙긋거렸지만 제르펠의 귀에 들리는 말은 없었다. 제르펠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말하지 않을 것이냐?”

“…….”

“그럼, 나부터 말하지.”

“네? 저에게요?”

에이든이 제르펠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지만 긴장한 티가 팍팍 났다. 제르펠은 에이든의 긴장도 풀어 주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에이든은 진지한 얼굴로 제르펠을 응시했다. 어떤 말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며 각오를 굳힌 얼굴이었다.

“슈이렌과 사이좋게 지내어 줘서 고맙군.”

“……네!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형한테 신세 지고 있는걸요.”

에이든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설마 제르펠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몸을 배배 꼬았다. 슈이렌은 에이든이 좀 어른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장난식으로 너랑 닮고 있다며 역시 형제 사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르펠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말해라.”

“그……. 혹시 슈이렌 형에게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게 제 입으로 말하고 싶어서요.”

볼 안의 살을 씹던 에이든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은 훌륭한 황제가 되실 거예요!”

“…….”

“저희 궁에서도 말이 많거든요. 사자님에게도 선택받았고, 전쟁도 끝냈고, 평민들이 살기 좋은 국가를 만들고 계신다고요. 세금도 낮추고 기근으로 고생하는 영지에는 보조금을 주신다고 들었어요. 전, 그런 분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속사포로 말을 쏟아 내던 에이든은 쑥스러웠는지 점점 고개가 낮아졌고, 귓가가 새빨갛게 붉어졌다. 제르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동시에 옆이 소란스러워졌다.

“황위를 포기하신다는…….”

대기하던 시녀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것이다. 이안이 재빨리 싸늘한 눈초리를 주자 시녀가 입을 다물었다.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 한 일은 아니다.”

제르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슈이렌의 닮았다, 라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이든은 번쩍 고개를 들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그 점도 멋져요…… 전 그렇게 되지 못할 거 같아요.”

“수업의 성취도는 괜찮다고 들었다만. 그렇게 부정적인 태도일 이유는 없지. 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르펠은 뒤에서 따가운 이안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하지만 전 황제가 되기 싫어요. 형님이 황제가 되면 옆에서 보좌할래요. 역사를 살펴보니 대공이라는 지위가 있더라고요. 황제의 핏줄에게 주는 지위 맞죠? 저는 그 정도로 충분해요. 다른 욕심은 없어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에이든의 얼굴은 흐린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제르펠은 슬며시 일어났다. 끼익 소리를 내며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에이든은 제르펠의 행동에 당황한 듯 안절부절못했다. 제르펠은 에이든의 옆에 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때 슈이렌이 제 손을 가지고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화사한 에이든의 금빛 머리카락이 제르펠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한때는 이 머리카락이 얼마나 미웠던지.

왜 금발이 아니어서…… 반쪽이라 불리는 제 자신이 싫었다.

제 반대처럼 보이던 에이든을 마주하기가 싫다는 생각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르펠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렸다.

“……기대하마.”

“네!”

에이든의 얼굴이 환해졌고 힘차게 답을 했다. 제르펠의 손길을 느끼며 다리를 흔들었다. 에이든은 긴말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제르펠의 마음을 엿보고 싶었다. 제르펠의 입술이 달싹였다. 에이든은 열리는 제르펠의 입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오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렴. 슈이렌도 너와 놀면 좋아할 거다. 도망치듯 나오지 마라. 오히려 당당하게 요구해. 그것이 너의 권리이다.”

에이든이 화사한 태양처럼 싱긋 웃었다. 제르펠과 네리아가 말한 권리는 각자 달랐다.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에이든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제르펠은 에이든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에이든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정원에서 볼 만한 꽃들이었다. 주머니에 쏙 집어 놓고 왔으니 싱싱했던 꽃이 축 쳐져 있었다.

에이든은 이게 아닌데 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게 뭐지?”

“아…… 그…… 선물을…….”

당혹감에 에이든은 울상이 돼서 눈에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제르펠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힘없이 내민 에이든의 손에 있던 꽃을 가져갔다. 목이 툭 꺾여 있지만 싱싱했다면 충분히 예쁜 꽃이었다. 그리고…… 슈이렌을 떠오르게 하는 꽃이었다.

에이든 딴에는 열심히 고르고 고른 선물이었다. 에이든에게 제르펠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제 방에 있는 물건들도 제르펠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듯했다. 그래서 밖을 한참을 헤매었다.

정원을 이 잡듯이 해치면서 가장 예쁜, 그리고 슈이렌 형이 생각나는 꽃을 하나 꺾어 왔다. “형님은 슈이렌 형을 좋아하니까!” 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얀 꽃잎에 암술이 붉어서 딱 가운데 붉은 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슈이렌 형이 생각나서 형님에게 선물해 주려고…….”

“꽃이라…….”

심심한 제르펠의 반응에 에이든은 잔뜩 풀이 죽었다. 너무 평범했나…….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꽃은 어디에 있었지?”

“네?”

“……꽃이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간직하고 싶어서 그렇다.”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에이든은 제게 부탁하는 제르펠의 말에 신이 나서 그를 이끌었다. 에이든의 작은 손이 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원래라면 에이든의 힘으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겠지만 제르펠은 그 힘에 이끌리듯 따라갔다.

“전, 전하?”

다소 당황스러운 이안의 외침을 뒤로했다. 어쩔 수 없이 이안이 뒤를 따랐다. 에이든은 해맑은 미소로 꽃들 사이를 헤치고 있었다. 그 꽃은 작았지만 화려한 꽃들 사이에 피어 있던 꽃이었다. 제르펠도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고 매의 눈으로 꽃들 사이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전하, 저희도…….”

“되었다. 내가 직접 찾지.”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는가. 궁에서 가장 고귀한 자인 두 명이 허리를 숙이고 꽃을 찾고 있으니 궁에 있던 시종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도와주었다.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던 슈이렌은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커튼을 걷고 내다보았고 다들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뭐 하는 거야??”

그의 눈에 햇빛에 빛나는 금발과 그 뒤를 따르는 칠흑 같은 흑발을 발견했다. 대수롭지 않게 침대에 다시 누우려던 슈이렌은 눈을 비비며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그들이 에이든과 제르펠이라는 걸 알았다. 이내 슈이렌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쳐졌다.

“잘들 논다.”

슈이렌은 창가에 몸을 걸치고는 하릴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에이든과 제르펠은 슈이렌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제르펠이 들어왔다. 그의 손은 숨기는 게 있는 듯이 뒤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뭔지 뻔히 알고 있지만 난 웃으며 다가갔다. 단정했던 그의 차림이 흩트려져 있었고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난 허리를 숙여서 무릎 쪽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면서 말했다.

“오늘 밖에 나갔어? 왜 흙이 묻었어?”

“아…… 잠시 갔다 왔다.”

“그래? 근데 숨기는 게 뭐야?”

난 능청스럽게 고개를 그의 옆으로 빼꼼 내밀었지만 그가 철통 방어로 못 보게 막았다. 살짝 헛기침을 한 제르펠이 내 앞에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꽃다발이었다. 서툰 솜씨로 만든 게 티가 나는 듯이 꽃을 모으기 위해 풀로 묶은 매듭 부분이 엉성했지만 정성이 엿보였다. 그의 손끝이 풀물로 물들어져 있었다.

창가는 멀어서 꽃은 보이지 않았었는데 이 꽃을 보자마자 꽃을 보고 누굴 생각한 건지 훤히 보였다. 새하얀 꽃잎에 붉은 점까지.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만개한 꽃을 보면 내 모습이 보였다.

‘하여간…….’

제르펠은 어서 받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았다. 다정한 향기가 맡아졌다.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고마워! 꽃 선물은 처음인데…… 마음에 들어.”

솔직히 꽃은 보기 좋은 떡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그도 흡족했는지 부드럽게 눈매가 휘어졌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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