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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도 웅장함이 엿보이던 연회장이 눈앞에 보였다. 멀리서도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금색으로 빛나는 아치형의 건물은 눈을 즐겁게 했다. 커다란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었고, 창문마다 테라스가 줄지어 있었다. 밖의 경치를 생각했는지 정원에 아름다운 꽃들이 심겨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와 제르펠이 주인공이었기에 신경을 쓸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런 밖의 손님을 초청하고 준비를 하는 것은 안사람인 황후의 몫이라고 제르펠이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중요시한다는 건가…….
“슈이렌, 들어가자.”
나를 부르는 제르펠의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알겠어.”
그제야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는 여전히 쭉 줄지어진 마차들이 보였다. 귀족들은 기사에게 초대장을 건네고 연회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를 곁눈질하면서, 나와 제르펠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차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으로 귀족들이 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한 영애는 한쪽 손을 치마를 잡은 채 굳었고, 기사들의 내리라는 소리에도 우리 쪽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귀족은 추태도 모르고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구경했다.
말로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진짜 귀족이란 귀족들은 총출동한 모습이었다. 많은 인파에 식겁한 난 제르펠의 한쪽 팔을 꼭 붙들어 매고 있었다.
“이게 다 귀족??”
“……쓸데없이 많지.”
그의 말에 우리를 곁눈질하던 귀족이 걸음아 나 살려, 하며 연회장으로 쑥 들어갔다. 확실히 귀족들에게 제르펠은 공포의 대상인 것 같았다. 하긴 쳐낸 귀족이 몇 명인데…… 몸을 사려야지.
나는 놀라서 벌어진 입술이 손으로 툭툭 쳤다. 그러고는 제르펠에게 배운 대로 자세를 유지했다. 긴장감에 입안이 말라 왔다. 나는 똑바르게 매듭진 타이를 다시 확인했다. 작게 한숨 쉰 나는 미소를 지으며 제르펠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거야?”
내 말에 살짝 눈이 커진 제르펠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게 닫힌 입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모든 귀족이 모이고, 황제가 오는 곳. 딱 선전하기 좋지. 나도 그를 위해 힘내지 않았던가. 제르펠이 항상 나에게 하던 말을 그에게 해 주었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주자.”
난 싱긋 웃으며 제르펠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정한 사람은 제르펠이라고. 누가 말하고 어떤 말을 하는지 중요하다. 그 말로 인해 사람들은 혼동되기도 하고, 따라오기도 한다. 나의 말에 제르펠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래. 그러자. 슈이렌,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난 그의 뒤를 따라붙으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말은 쉽지만 결코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황제와 황후가 온다면 더욱. 지금은 항상 곁에 있던 자들도 없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문 쪽으로 걸어가자 기사들이 제르펠을 봤는지 절도 있는 동작을 취하고는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휘황찬란한 파티가 한창이었다. 귀족들은 하하, 호호, 서로 수다를 떨고 있었으며 구석에는 푸짐한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잔잔한 음악이 들렸다.
침을 크게 삼킨 기사가 큰 소리로 제르펠과 내 등장을 알렸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음악이 뚝 멈추었다.
홀 안에서 연회를 즐기며 서로 떠들던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집중이 됐다. 아까의 시끄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정적과 함께 우리가 걷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를 들은 제르펠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항상 하던 대로만 하렴.”
“알, 알고 있어.”
인파에 잠시 기가 죽은 거뿐이야. 어깨가 절로 흠칫할 뻔했지만, 그에게 배운 걸음걸이를 기억하며 쭉 걸어갔다.
“저분이 사자님인가요? 확실히…… 아름답네요. 신의 사자라는 명성에 걸맞게요.”
“전하께서 부정부패한 귀족들을 숙청했다고 하지. 몰락 귀족이 된 자도 있다고 하더군.”
“군사권도 폐하께 넘겨받았다는 소문도 있다고 하네.”
“이제 즉위식만 치러질 날이 기대되네요…….”
“그런데…… 복장이 사자님과…….”
“공녀와 어떻게 되는 거죠?”
“약혼 사이라고 자자했잖아요.”
“아님…… 설마 그 소문이?!”
다양한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중 복장 이야기가 나오자 왠지 쑥스러워졌다. ‘이 사람이 내 거야!’라고 선언하려고 입은 옷이긴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뚫어지게 쳐다봐서 창피했다. 그리고 중간에 소문이라든가, 베르트 공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다. 제르펠과 베르트 공녀와 엮는 사람들의 말에 불쾌해졌다.
‘약혼?? 베르트 공녀라면…… 공작의 딸이잖아? 그리고 무슨 소문?’
귀족들은 나에 대한 이야기와 제르펠의 대한 이야기를 소곤소곤 말했다. 나에게도 들리는데 제르펠에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 묵묵하게 걸어갔다. 나도 그처럼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어갔다. 어느 정도 중심에 도착하자 언제 정적이었냐는 둥 음악이 재개됐다. 당연히 우리에게 접근하는 자들도 있었다.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큼, 전하 저는…….”
그들은 자신의 가문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제르펠의 공로에 대해 떠들었다. 제르펠은 무표정,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머쓱할 만한데 귀족들은 입가에 맺힌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때 제르펠의 옆에 있던 나에게 한 귀족이 접근했다. 제르펠이 안 되니 나를 찔러 볼 속셈이었던 것 같았다.
“사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하센 백작입니다. 사자님께서는 황궁에서 머무신다고…….”
나에게 말을 걸려고 했던 귀족은 제르펠의 매서운 눈빛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살짝 눈이 떨리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나한테 말을 걸어? 다른 귀족들은 눈치껏 제르펠이 내 앞을 가로막자 나에게 투명 인간 취급했다.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닌 제르펠이 내 앞을 굳건하게 막았기에 그 누구도 나에게 말을 선뜻 건네지 못했다. 난 뻘쭘하게 그의 등 뒤에 서 있었지만, 왠지 편안했다.
제르펠은 모두에게 똑똑히 보라는 듯이 경고처럼 말했다.
“그대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귀를 기울이던 귀족들도 그 말에 제르펠과 나를 곁눈질했다. 같은 디자인으로 제작된 맞춤옷. 그뿐만 아니라 난 황가의 증표를 달고 있었다. 뿌듯함에 가슴을 내밀고 그들이 잘 볼 수 있게 일부러 브로치를 만졌다.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증거였다.
하센 백작뿐 아니라 근처에 있던 귀족들은 헛기침하기 바빴다. 난 제르펠을 슬쩍 보았다. 그는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행동은 그를 만족스럽게 했는지 내가 보자 눈웃음을 지었다. 가까이 있던 귀족들은 그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전하께서…….”
“정말 소문이…….”
‘또 소문? 무슨 소문인데?’
사실 수군거리는 귀족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지만 뭐…… 다양한 이야기는 들리는 반면 내가 듣고 싶은 ‘그 소문’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약간 꺼리는 느낌? 그건 그렇고…… 시선 때문에 닳겠다. 닳아!
정작 제르펠은 태연해 보였다. 갑자기 주위를 에워싸던 사람들의 무리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베르트 공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이 왜 이리 모여 있나 했더니. 전하, 오셨습니까. 알았다면 가장 먼저 인사를 드렸을 텐데요.”
“신경 쓰지 마라.”
“어찌 신하로서 신경을 쓰지 않겠습니까? 사자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에게 인사를 하는 공작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은 눈을 빛내며 공작과 제르펠을 바라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귀찮은 것들.”
“그게 지금의 귀족들이죠. 그건 그렇고, 두 분 다 잘 어울리는 복장입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공작의 시선을 살짝 피했지만 제르펠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가.”
공작은 이상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이 많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무슨 일이냐고 말을 꺼내기 전에 제르펠이 치고 들어왔다.
“아직 황제는 오지 않았나?”
“네. 그렇습니다.”
“예상은 했다. 오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전하, 이번 일은 들었습니다. 역시…….”
제르펠이 손을 들어 공작의 입을 막았다. 난 제르펠의 옆에서 멀뚱멀뚱 듣고 있었다. 공작이 나를 살짝 보더니 이해했다는 듯이 물러났다.
“왜? 얘기해도 되는데.”
“네가 듣기에는 거북한 말이다.”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간 선을 긋는 그의 발언에 속이 상했지만 제르펠이 나를 생각한 말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공작과 이야기할 만한 건 정치인데…… 내가 들어도 별수 없기도 하고…….
“아, 잠시 다른 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공작은 공녀를 데리러 떠났다. 아까 나왔던 공녀의 이야기에 무슨 상관인지 제르펠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살짝 신경 쓰이기도 했다.
“공녀라면…… 공작의 딸? 그 사람이 왜?”
“너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다. 여기에는 너를 지켜 줄 사람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내 곁에서 떨어트리고 싶지 않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것이다. 나름 괜찮은 자더군.”
저 정도면 제르펠에게는 큰 칭찬이었다. 괜찮다는 말 이상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괜히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아까 약혼이라는 단어를 들어서……. 아니겠지. 잠시 기다리자 소란스러움과 함께 베르트 공작과 그 옆에서, 공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내 눈이 크게 동그래졌다. 주위 사람들도 공녀의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는지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그녀는 꽃이 피어나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학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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