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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67화 (6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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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트 공작 덕에 목숨줄을 연명한 애송이가.’

프란시아 후작은 제르펠이 지금까지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베르트 공작이 뒤에서 봐줬다고 생각했다. 그의 측근들은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패배자의 말이라고 후작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제르펠에게 찍소리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주도권을 빼앗긴 사람의 말이다.

확실히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위협적이었지만 후작은 오랫동안 귀족들의 수장이었고 아직 애송이인 태자가 자신에게는 당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본 사업인 카지노와 노예 매매는 아직도 활발했다. 그곳에 대한 작은 단서조차 잡지 못했겠지. 카지노에 들어오기 위한 초대장은 비밀리에 보내지고 또 노예 경매에 참석하기 위한 조건은 더욱 까다로웠다.

후작은 잠시 발끈했지만, 카지노를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카지노와 경매는 아직도 건전하고, 나를 위해 돈을 소비해 줄 귀족들도 많으며, 내 말을 들은 귀족, 고용할 사람들도 많습니다.’

후작이 자신만만했던 이유는 긴밀하게 연관된 다른 세력들 덕분이었다.

“그렇군. 사업이 다시 회복하기를 기도하지.”

제르펠의 말에 프란시아 후작의 눈이 살짝 가느다래졌다. 얼핏 응원의 말이었지만 경고장이었다. 건조하게 말한 제르펠의 어투가 후작에게는 비웃음으로 들렸다. 프란시아 후작은 제르펠의 뒤에 서 있는 공작을 보며 말했다.

“베르트 공작, 돌아왔다더니 정말이었군. 연을 끊다시피 영지에 갔기에 복귀 마음이 없는 줄 알았다네.”

“세상일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더군요. 저도 제국을 위해 한 몸 바치기로 맹세했습니다. 후작께서도 오랫동안 제국의 충신이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안타깝게 물러나셨지만 그 뒤를 제가 이으려고 합니다.”

“허. 허. 좋은 생각일세. 하긴 나랏일보다 중한 것이 있겠는가. 음…… 마침 전하께서도 이 자리에 계시니 제 결단을 말하고자 합니다.”

비장하게 말한 프란시아 후작은 웃음기도 싹 뺀 채로 제르펠을 쳐다보았다. 후작의 복귀에 대해 듣지 못한 귀족이 넌지시 물었다. 귀족은 보기 좋게 후작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어떤 결단을 말씀하시는지요?”

“나도 복귀를 하려 생각 중이네.”

후작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프란시아 후작의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가 황후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가 다시 귀족 회의에 참석한다는 뜻은 제르펠의 세력이 맹렬한 기세로 강대해지고 있으니 억누르겠다는 말이었다.

신분으로는 베르트 공작이 우세하지만 현 황후의 외가라는 위치를 무시할 수 없다. 베르트 공작이 확실하게 그의 의중을 물었다.

“후작께서는 물러나신 것으로 알았는데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말입니까?”

프란시아 후작은 허울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이리 제국을 위하시니 저도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연회로 밝히고자 했습니다.”

“앞으로 제국을 위해 열심히 해 주시게.”

후작의 말로 대치할 거라는 귀족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제르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오히려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프란시아 후작은 제르펠의 태도에 살짝 눈썹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제르펠은 더는 말을 섞을 뜻이 없다는 듯 그를 스쳐 지나갔다.

거리가 멀어지자 베르트 공작이 제르펠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프란시아 후작이 복귀한다면 여파가 크겠습니다. 전하. 하루빨리 후작을 처단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후작에게는 미안하지만 복귀와 동시에 영원히 퇴장해야지.”

제르펠은 후작의 끝을 고했다. 조사는 순탄하게, 은밀하게 진행 중이었다. 후작이 손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미 늦었다. 꼬투리 하나라도 걸린다면 벌떼같이 백성들이 달려들 것이다.

황제에 대한 민심은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반대로 제르펠은 귀족들에게는 협력을, 백성들에게는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귀족들은 국민을 하등시하고 그들이 기껏 하면 무엇을 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큰 착오에 불가했다.

“역시 황후마마의 짓일까요?”

“심각성을 느낀 거겠지. 후작에게 부탁한 것을 본다면.”

“황후마마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못하는 분이시죠.”

공작은 동감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아 후작이 복귀를 선언한 순간부터 싸움은 시작되었다. 제르펠은 이전부터 중립을 유지하는 귀족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의 등장으로 좀 고난을 겪을 터,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이 연회가 끝나고 태평하게 방관한 죄를 톡톡히 치르도록 해 주지. 우선 후작부터다. 그 뒤는 저 상석에서 지켜보는 그들이 되겠지.”

제르펠은 황제와 황후가 떠나고 쓸쓸하게 자리가 빈 상석을 보며 말했다.

* * *

제르펠은 곧바로 슈이렌이 있었던 장소로 갔다. 공작이 그를 테라스로 안내해 주었다. 본래 테라스로 나간 자들은 휴식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동석을 요구하거나 볼일이 있다면 시종에게 지시하여 의견을 듣는다. 하지만 제르펠은 망설임 없이 커튼을 걷었다. 거기에는 술에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탁자에 엎드려 있는 슈이렌이 있었다.

제르펠은 슈이렌 옆으로 걸어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탁자에 나뒹굴고 있는 술병과 풍기는 술 냄새, 풀린 눈과 빨개진 볼은 그가 술에 취했음을 알려 주었다.

슈이렌은 인기척에 제르펠을 쳐다보았고 손가락질을 하며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어눌한 말로 인해 알아듣지 못했다.

“전하. 사자님이 술에 취한 듯합니다.”

“보면 안다. 나가라.”

“알겠습니다.”

제르펠의 단호한 말에 베르트 공작은 커튼을 닫고는 조용히 물러갔다.

“슈이렌.”

탁자에 엎드려서 자는 자세는 나중에 목에 부담될 것이 뻔했다. 제르펠은 슈이렌을 흔들었다. 슈이렌은 누군가 계속 흔들자 짜증이 났는지 귀찮다며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말했다.

“귀찮게……. 저리 가…….”

“일어나야지. 의자에서 자면 목이 아프다.”

“아, 진짜!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그리고 슈이렌은 고개를 들어 제르펠을 돌아보았다. 그를 보고는 심기 불편한 얼굴이 한층 더 찡그려졌다. 슈이렌은 고개를 팩 돌리며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다는 티를 냈다.

“왜 왔어? 카밀라라는 여자랑 있으면 되잖아.”

“무슨 소리지? 당연히 너와 있어야지. 공녀가 너와 비교가 될 리가 있겠나?”

“그러면서 춤은 카밀라랑 췄으면서 말은 잘해…….”

까칠하게 툭툭 내뱉는 말에 제르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슈이렌은 심통하게 입을 쭉 내밀고 있었다. 단단히 삐져 있었다.

“나보고는 다른 사람이랑 추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기는 여자랑 추고……. 이게 바로 내로남불이라고…… 진짜. 어이가 없어서.”

작게 중얼거리며 불평을 늘어놓는 슈이렌을 보며 제르펠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이를 어찌할지…… 사태를 모색했다. 슈이렌이 단단히 삐졌기도 했고, 술에 취해 열이 오른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르고 달래 줘도 쉽사리 풀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슈이렌이 카밀라와 춤을 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는 건 확실했다.

“미안하구나. 너와 춤을 추었다간 접근하는 귀족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되면 귀족들을 상대하는 것이 버거울…….”

“너, 넌 진짜!”

의자가 넘어지도록 세게 탁자를 치면서 슈이렌이 일어났다. 격한 반응에 제르펠은 멍하니 슈이렌을 바라보았다. 슈이렌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제르펠의 손이 그에게 다가갔지만 먼저 슈이렌이 제르펠의 멱살을 잡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내 눈앞에서 연인이 딴 여자랑 춤출 수가 있냐고!”

보통 같았으면 속으로 말하고 끝낼 일이었지만 슈이렌은 제르펠을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내가 애새끼처럼 행동하니까 진짜 애인 줄 알아? 나도 사회생활 좀 해 봤고 그깟 사교 생활 잘할 수 있거든? 얕보지 말라고!!”

슈이렌은 멱살을 놓더니 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제르펠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곤란한걸…….’

달래야 한다는 마음보다 슈이렌의 질투가 기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급히 손으로 입가를 가렸지만 슈이렌에게 손가락 사이로 미소 짓는 제르펠의 표정이 보였다.

“웃어? 됐어! 나도 다른 사람이랑 춤출 거야! 주인이랑 추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다 쓸모없게 됐잖아!”

“…….”

슈이렌은 제 말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발끈했다. 그 말에 제르펠이 슈이렌의 한쪽 팔을 낚아챘다. 슈이렌은 탁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치워 버렸다.

슈이렌의 말을 들은 제르펠에게서 암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제르펠은 슈이렌이 홧김에 말하는 것이라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애초에 슈이렌을 혼자 두고 약속을 어긴 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쯧, 하필 후작이 복귀를 선언하며 연회에 등장하는 바람에…….’

그도 카밀라와 춤을 출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공작의 조언도 있었고, 후작의 시선을 슈이렌보다는 공작 쪽으로 돌리고 싶었다. 황제가 황후를 사랑한 덕도 있었지만 근 10년이 넘게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 황후가 그 자리를 유지한 것도 후작의 도움이 컸다.

뻔뻔하게 카지노에 더불어 노예 매매까지 손을 뻗친 인물이었다. 그 마수의 손길을 슈이렌에게 뻗칠지도 모른다. 무시하기에는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왜, 왜? 맞잖아.”

제르펠의 분위기를 느낀 슈이렌이 움찔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일단 슈이렌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르펠은 슈이렌의 거친 동작으로 쓰러진 의자를 세우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채 삐져 있는 슈이렌의 팔을 잡아당겼다. 슈이렌은 힘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술에 취해 몸을 쉽게 가두지 못하는 이유 탓에 손쉽게 슈이렌이 품에 들어왔다. 슈이렌은 눈을 껌뻑이며 놓으라고 발버둥 쳤지만 제르펠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마주 앉은 슈이렌의 등을 달래듯이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평소와 같이 슈이렌의 몸은 그에게 허물어졌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붉게 물든 귓가가 슈이렌의 반응을 알려 주었다.

“슈이렌, 이쪽을 봐줘야지. 내가 미안했다. 너의 생각을 하지도 않고 멋대로 정해 버려 미안하구나.”

“떨어지지 말라고 한 게 누군데…… 춤이 끝나도 오지 않고…….”

“너를 홀로 두어서 미안하구나. 내가 그리하면 안 되었는데…… 앞으로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테니 화를 풀어라. 응? 웃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지.”

제르펠은 슈이렌의 말랑말랑한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해 주었다. 촉. 촉 거리는 소리가 부끄러웠는지 슈이렌은 손바닥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이미 술로 빨개진 얼굴이 다시 한번 더 붉어졌다.

“이, 이걸로 내 화가 풀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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