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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슈이렌의 목소리 언성이 줄었다. 은연 중에 응어리가 풀어졌다는 증거였다. 제르펠의 입술 사이로 피식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미 슈이렌의 마음이 살살 풀리고 있었다.
“나의 연인은 너뿐이다. 그녀와는 정치적 동맹일 뿐이다. 응?”
“……그걸 누가 알아?”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음……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릴까…….”
“……됐어.”
슈이렌은 어느새 제르펠의 무릎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슈이렌은 손을 뻗어 옆에 남은 새 와인을 노련하게 땄다.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제르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슈이렌을 바라보았다. 슈이렌이 술을 입에 대려는 순간 제르펠의 큰 손바닥이 잔의 입구를 막았다.
“응? 뭐야? 저리 치워! 나 술 마실 거야!”
“슈이렌. 너무 취했다. 그리고 아직 술은 안 돼. 성인이 되고 마셔도 충분하다. 그때 같이 술을 마시도록 하자. 이런 싸구려 술 말고 귀중한 술로.”
계속되는 제르펠의 방해에 슈이렌은 빽 소리를 질렀다.
“이미 성인이거든! 그럼, 됐지?? 술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이럴 때 술을 마셔야 한다고.”
순간 방해하던 제르펠의 손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슈이렌은 술을 단번에 마셨다. 맛 좋다 하며 슈이렌은 무아지경으로 술을 연거푸 마셨다. 그때 뒤에서 쿡쿡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왠지 음산한 웃음소리에 슈이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르펠은 웃고 있었다. 환하게. 뭐지? 슈이렌은 그의 웃는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르펠의 눈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성인이라고.”
“딸꾹.”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슈이렌은 큰 소리로 말했던 자신의 발언을 떠올리며 시뻘겋게 물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술이 확 달아났다. 계속 눈치 없이 딸꾹거리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딸꾹질이 나올 때마다 몸이 흠칫 뛰었다.
슈이렌은 이제 연인이 되었겠다. 솔직하게 말할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른 채로 지내왔는데 말하기에 어색하고, 환생했는데 전생의 나이는 아무 상관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제르펠은 말하지 않아도 그간 잦은 실수 때문에 눈치를 챈 듯하기는 했지만……. 입술이 바짝 말랐다.
‘주둥이가 문제지. 이놈의 파멸의 주둥아리…….’
기분 좋게 술을 마셨던 게 화를 불러일으켰다. 뒤에 있던 제르펠은 조용해졌다. 슈이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하하…… 주인아 그게 말이지…….”
“성인이라……. 정말이냐?”
슈이렌은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리고 슬쩍 그를 보더니 손바닥으로 옷을 문질렀다. 슈이렌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 제르펠이 슈이렌의 목에 입술을 대었다. 슈이렌은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몸이 펄쩍 뛰었다.
“뭐, 뭐 하는…… 읏.”
그를 때기 전에 입술이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슈이렌은 그다지 연기에 소질은 없었다. 가끔 하는 말실수나 행동을 보면 막연하게 그러지는 않겠냐고 생각했지만 슈이렌은 말을 돌리며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숨기려 하는 슈이렌을 파헤치고 싶기도 했지만 기를 쓰고 숨기려는 모습을 보니 들킨다면 후다닥 도망칠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고, 그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제르펠은 슈이렌을 놓아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연인은 제르펠이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기다리려 했다. 딱 1년만 기다리자는 심정으로 제어하고 있었다. 그게 확 풀린 것이다.
“슈이렌. 황제와의 면담이 끝난 뒤, 상을 주겠다고 했던 말. 기억하느냐?”
“그, 그랬지? 그게 갑자기 왜……?”
“기분 좋은 거 할까?”
슈이렌이 위를 올려보자 제르펠은 짓궂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슈이렌은 입을 달싹였다. 몇 번 벙긋대다가 겨우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미, 미친. 뭐, 뭐를 해?? 우리 진정을…….”
말릴 새도 없이 제르펠이 슈이렌의 입술을 먹었다. 술로 인해 이미 달구어진 몸이 그의 열기로 인해 더 뜨거워졌다.
‘일 났다!’
손은 가볍게 제압당했고 슈이렌의 커진 눈은 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르펠의 눈동자에는 열기로 가득했고 입맞춤이 길어짐에 따라 슈이렌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갔다.
제르펠의 손이 슈이렌의 허리로 손이 옮겨갔다. 허공을 배회하던 슈이렌의 손은 제르펠의 어깨를 잡았다. 문득,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슈이렌은 화들짝 놀라 제르펠의 가슴을 밀쳤다.
“잠, 잠깐! 진정해 봐! 여, 여기 밖이잖아!”
분위기에 휩싸여 여기가 야외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테라스 간의 거리가 아무리 멀다고 하지만 누군가가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슈이렌은 숨을 죽이고 말했다.
“누가 봐……. 저리 떨어지라고…… 갑자기 왜 이래…….”
슈이렌의 눈동자는 불안감에 떨렸다. 제르펠은 대꾸하는 슈이렌의 입을 머금었다.
“읍……. 주인아…… 잠시…….”
슈이렌은 발까지 동동거리며 제르펠을 힘겹게 밀어냈다. 제르펠은 슈이렌의 등이나 배, 또 슈이렌이 가장 좋아하는 목 주위를 공략했다.
“슈이렌. 응? 나에게 허락해 주렴.”
“뭐, 뭐, 뭐 허락해?”
“응?”
승낙해 줄 때까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밀어붙였다. 누가 제르펠에게 불씨를 던졌는지 그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슈이렌은 우선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아, 알겠으니까. 여기서는 말고…… 밖이잖아…….”
결국, 항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허락한 것 맞겠지.”
“어……. 알겠어……. 근데…… 뭐를…….”
슈이렌은 해탈한 듯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슈이렌은 제르펠이 하자는 행위를 ‘키스’라고 생각했다.
옜다. 하는 마음으로 그의 목깃을 잡아당겼다. 제르펠의 얇은 입술이 휘어지더니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살짝 나와서 입맛을 다셨다. 막상 상을 차려 주었지만 그의 얼굴은 다가오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이 슈이렌 마음속에 박혔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느 웃음보다 화사했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너의 말이 옳다.”
“에?”
“모두에게 알려 주어야지?”
슈이렌은 서서히 번지는 미소에 멍하니 아름답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 하는 순간 제르펠은 번쩍 슈이렌을 품에 안고 일어섰다.
슈이렌의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에 비친 제르펠의 입가는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내딛는 걸음에는 힘이 있었다. 제르펠은 커튼 쪽으로 걸어갔다. 슈이렌은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말했다.
“잠, 잠깐. 어디가???”
제르펠은 커튼을 확 걷었다. 테라스 밖에는 제르펠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어슬렁거리던 귀족들이 있었다. 귀족들의 눈에 그들의 행각이 목격되었다.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슈이렌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르펠은 고개를 숙인 슈이렌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웠다. 한 귀족이 들고 있던 잔이 바닥과 부딪쳐서 깨진 것이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슈이렌은 더 제르펠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제르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내려 줘…….”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확실히 하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그! 그렇다고 이런 식은 아니었다고……!”
큰 소리를 내던 슈이렌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려 주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내려가겠다는 듯이 그의 가슴을 밀치고 바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제르펠은 살짝 슈이렌의 이마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그만하라고!”
“알겠다. 방으로 가자.”
“바, 방? 방은 왜??”
“응? 이제 쉬러 가야지?”
슈이렌에게 다정하게 말한 제르펠은 고개를 들어 주위 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이만 가 보지. 알아서 즐기도록.”
그 말을 끝으로 제르펠은 슈이렌을 안고 망설임 없이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남겨진 귀족들은 소곤소곤 떠드는 걸 넘어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아직도 멍하게 연회장 문을 바라보는 사람,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 등 많았다.
“공, 공녀님…… 전하와 약혼하신 게…….”
“어머? 제 입으로 약혼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카밀라에게 진의를 물었던 영애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지 않았다. 카밀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연회장을 떠나는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기껏 선보인 게 쓸데가 없게 되었네요. 전하.’
약간 허탈한 감도 있었지만 그녀도 연인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질색이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마차를 탔으며 방에 도착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어두컴컴한 방 안이 나를 반겼다. 마치 불구덩이로 보인 건 착각일까.
그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난 후다닥 재빠르게 구석으로 피신했다. 불을 켠 제르펠이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제르펠의 입이 열리고 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했다.
“그럼 시작할까?”
“아니, 뭘 시작한다는 거야?!!”
제르펠은 싱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기가 막힌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옷깃을 부여잡았다. 잡아먹힌다. 라는 생각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 그전에 물을 게 있잖아!”
“뭐지?”
“그…… 내가 속였잖아.”
제르펠의 눈이 가늘게 뜨더니 침대 끝에 앉았다. 살았다……. 진짜 위험을 느꼈어. 차가운 바람에 술이 어느 정도 깨어 있는 상태였다. 난 무릎을 모아 진지하게 말했다.
“숨겨서 미안…… 사실 말하려고는 몇 번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을 마주칠 용기가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군. 그럼, 전부 말해 주렴.”
“전부?”
“그래. 어릴 적 이야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
어차피 전부 말할 생각이었다. 살짝 멍해졌지만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어…… 그러니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에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았다.
“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왔는데…….”
난 제르펠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점. 죽어서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것. 내가 온 이유는 수신의 부탁 때문이라는 점. 흘끔 제르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뱀으로 환생해서…… 주인한테 들러붙으려고……. 나이도 사실은 스물여덟 살이야. 하하…… 아저씨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제르펠은 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실망했겠지……. 괜스레 눈가가 빨개지는 걸 느끼며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역시 그랬나…….”
잠자코 듣고 있던 제르펠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반응에 쿵하고 내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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