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70화 (70/103)

-70-

놀란 듯 내 이름을 부르는 제르펠의 목소리가 들리고 위에서 빛이 들어왔다.

주인아…… 너 왜 커졌어?

제르펠은 상당히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눈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나에게 다가오는 손이 컸다. 왠지 익숙한 기분인데? 제르펠은 나를 가볍게 손 위로 올렸다. 고개를 휙휙 돌려서 내 몸을 살피니 뱀으로 변해 있었다. 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내 시야를 가렸던 것은 내가 입고 있던 옷이었다.

“이 모습은 오랜만이구나. 변할 수도 있었나?”

제르펠은 약간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좋은 거 아냐? 당황했지만 제르펠의 마의 손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키르가 에이든에게 간 후로 물을 다루는 연습을 했지 뱀으로 변하는 연습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내가 키르의 큰 뜻을 알지 못했구나. 다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

변한 몸이 신기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어디 이상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변신은 완벽했다. 저번에는 막막했던 변신이 손쉽게 됐다. 사람은 역시 계기가 있어야 해……. 나 홀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르펠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쓰다듬었다. 그도 막상 내가 이 모습이 되니까 예전이 그리웠는지 머리부터 꼬리까지 쓸어 주며 비늘의 촉감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뱀의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제르펠에 목에 둘러서는 그의 체온을 나누었다. 뱀의 몸은 단점이 있었다. 추위를 너무 잘 타……. 제르펠은 내가 사람으로 변하지 않으니 약간 서운했지만 난 지금의 상태를 즐기고 싶었다.

어차피 둘째 날은 참석해도 되고 안 해도 되니까 방에서 뒹굴어야지. 뱀의 모습이 된 나는 따스한 온기에 얼굴을 비볐다. 제르펠의 명령이 있었는지 그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슈이렌. 같이 춤을 추러 가야지.”

그는 계속해서 연회에 참석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가기 싫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수군거릴지…… 생각만 해도 질색이었다. 2일째 날은 불참해도 상관이 없다지만 마지막 날은 참석해야 했다. 귀찮은데…….

제르펠은 옆에서 끊임없이 설득했고 결국 난 다시 사람으로 변했다. 제르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슈이렌?”

“왜?”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구나.”

“……옷이나 내놔.”

난 그저 손을 내밀었고 그는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옷을 주었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내 입은 불만스럽게 삐쭉 솟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브로치를 달아 준 제르펠이 말했다.

“예쁘다.”

“……역시 가야겠지?”

“가기 싫나? 같이 춤을 추자고 약속했잖니?”

카밀라와 춤을 춘 사람이 누군데……. 평소에는 그렇지 않던 제르펠이 강아지처럼 나에게 칭얼거리니까 좀…… 귀여웠기도 했다. 따로 연습한 거 아니야? 은근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 제르펠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그럼. 가자.”

고개를 살짝 기운 채로 말하는 제르펠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는 그가 하는 행동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돌렸지만 귓가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아, 알겠어. 나랑 추는 거지?”

“물론이지. 오늘은 절대 혼자 두지 않으마. 무슨 일이 있어도.”

살짝 부끄러워 콧등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연회장에 들어오고 바로 후회했다. 첫날에도 인파에 식겁했는데 오늘은 더했다. 이안의 말로는 마지막 연회에는 첫날 불가피한 이유로 빠졌던 귀족들을 위해서 모두 모인다고 했다. 그리고 더불어 이 시선…… 벌써 소문이란 소문이 다 퍼졌는지 노골적으로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다.

제르펠과 나는 따로 준비된 소파에 앉았다. 그는 이상하게 가장 정중앙의 소파에 앉았다. 난 구석에 가고 싶었는데…… 보라고 광고를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춤을 추는 날이었지만 귀족 몇을 제외하고는 우리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내 입은 끊임없이 오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다시 변하니 밥을 달라고 배에서 아우성쳤다. 그랬기에 제르펠은 춤을 추기 이전에 발길을 돌린 것이다.

“믿을 수가 없네요…….”

“그러게요. 어제 본 게 사실이었다니.”

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떠들어 댔다. 그래…… 이해된다……. 난 옆에 제르펠을 보았다. 누가 봐도 기분 좋아 보였다. 난 익숙하지만 그들에게는 직접 수발을 드는 제르펠의 모습이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어떻지?”

그는 바쁘게 움직이는 시종을 시켜 모든 음식을 하나씩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전처럼 음식을 직접 떠먹여 주고 있었다. 재미가 들렸는지 아니면 그 행위가 즐거운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먹겠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건 무리했으니 자신에게 맡기라는 말이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리고 이미 근육통은 다 나았다. 제르펠이 큰 소리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귀족에게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헉!”

“저거 보세요!”

갑자기 귀족들이 순식간에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뒤. 내 뒤통수에 뭐가 있나? 머리를 긁적거렸다.

“설마 저 자국…….”

“자국? 내 뒤에 뭐 있어?”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제르펠에게 물었다. 내가 아무리 고개를 옆으로 젖혀도 보이지 않았다. 제르펠은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아…… 신경 쓸 필요 없다.”

아리송한 대답에 더 의구심만 커질 때 목덜미에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들에 움츠려졌다. 대체 뭐야? 하며 손으로 쓱쓱 만져 보았는데 울퉁불퉁한 것이 잡혔다. 큰 깨달음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미친…….”

한 번에 사태를 파악했다. 제르펠은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 말도 해 주지 않았다. 내가 벌떡 일어나서 삐꺽거리는 다리로 연회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의 손에 붙잡혔다.

“가서 연회를 즐겨라.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살벌한 제르펠의 시선에 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제르펠은 됐어? 라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없어져서 좋긴 한데…… 그게 아니란 말이지. 이런 나와 달리 제르펠은 마음 편히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연회를 즐긴 적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마음이 허물어졌다.

‘엄청 즐거워 보이네.’

그래, 이미 다 보였고 마음대로 하자는 식으로 그의 품에 기대었다.

“아.”

먹을 걸 달라고 손가락으로 입안을 가리켰다. 쿡쿡거리는 작은 웃음소리를 낸 제르펠은 작은 음식들을 내 입안에 넣어 주었다. 또다시 주변의 귀족들은 경악했다. 이제 보니 경악한 귀족들의 얼굴들도 볼 만하네.

* * *

제르펠은 연회가 끝나고 며칠 뒤에도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드문드문 마음속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만족감이 있었다. 연회 중 모두에게 똑똑히 제 사랑스러운 연인을 자랑했다. 그를 배려한다고 카밀라와 춤춘 시간조차 아쉬웠다.

슈이렌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연회를 끝으로 더욱 밀려오는 서류에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불길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제르펠은 들어오라고 말하자 이안이 들어왔다.

그는 한 서신을 들고 찾아왔고,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제르펠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 교황께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꼭 사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를 하더군요.”

“이번 연회에 참석조차 못 했으니 애가 타겠지. 무시해. 지금은 카지노의 건이 중요하다.”

제르펠은 대차게 서신을 거부했다.

“그게…… 상황이 묘하게 흘러갔습니다.”

이안은 품에서 한 신문을 펼쳤다. 제르펠의 탁자에 신문이 펼쳐지고 눈대중으로 읽고 있던 그의 심기가 단번에 사나워졌다. 어느 한 영지 쪽에서 사망률이 높은 병이 돈다는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 영지에서 봉사와 연설을 하는 교황이 있었다.

황제와 제르펠, 또는 슈이렌에 대한 기사가 주를 차지했기에 구석에 작게 실려 있는 기사였다.

제르펠은 두 눈을 의심했다. 교황이라면 절대 가지 않을 지역이었다. 그것도 수도 멀리 떨어져 있는 부유하지 못한 영지였다.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귀족도 신성력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평민에게, 무료로 봉사를 하고 있었다.

교황은 평민을 선택받지 못한 자라며 열등하게 여겼다. 신성력을 가진 신관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그였다. 스스로가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교황이 갈 곳은 절대 아니었다.

“신문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슈이렌 님을 신성시하며 그가 영지를 구해 줄 것이라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어떻게 해서든 슈이렌을 꿰고 싶은 건가. 조용하다 했더니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군.”

“병자들 사이에서는 오지 않는 슈이렌 님을 원망하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것이라며…….”

순식간에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보고 받은 이안도 황당한데 제르펠이 쉬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그런 이유로.”

“아무래도 한 번은 가야 할 듯합니다. 폐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민심이 가장 중요한데 잘못하면 저희에게로 화살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연회에서 슈이렌 님을 등장시켰으니 오히려 시기가 적절할 듯합니다.”

제르펠은 고민이 되는지 이마를 짚었다. 작은 소리라도 가만히 둔다면 터져 버리고 만다. 황제의 상황이 딱 그 꼴이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찼다.

“어쩔 수 없군.”

이참에 궁 밖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지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제르펠은 입가에 작은 조소를 띠었다.

“교황에게 전하도록, 슈이렌을 보낸다고. 물론 나도 갈 것이다.”

“네. 당연하죠.”

제르펠이 슈이렌을 혼자 보낼 리가 없었다.

“카지노 건도 있으니 하루빨리 가도록 하지.”

쓸데없는 주작을 부리는 교황의 입을 다물게 할 필요가 있었다. 한때는 신전과 척을 지는 것은 고려했지만 자신의 곁에는 슈이렌이 있었다.

“한동안 프란시아 후작은 공작에게 맡기지.”

“공작에게도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도록. 긴 여정이 될 테니 흔들림이 없는 최대한 좋은 마차를 준비해라.”

슈이렌의 멀미를 알았기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이어서 하려던 제르펠의 손이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슈이렌과 처음 하는 외출이었다. 갑자기 무언가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가는 길에 여행지를 들리도록 하지.”

“네?”

대충 예산을 계산하던 이안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카지노 건으로 빨리 가자는 사람이 여행을 타령하니 그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슈이렌이 궁 밖에 나간 적이 없더군. 슈이렌도 제국을 둘러볼 기회는 있어야지. 유명한 여행지는 꼭 들리도록 하지.”

“전하…… 일하러 가시는 거 맞습니까?”

“아닌 것 같나?”

제르펠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난색을 보였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 같았지만 눈물을 머금고 말없이 여행 일정을 표시했다. 잘하면 혼자 궁을 지켜야 할 날이 길어지겠다고 생각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