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참 이상하다. 누군가 내 두개골을 열고 마취제라도 짜 넣은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아무런 긴장도 되질 않고 생각도 들질 않고 둔할 수가 없다.
아무렇잖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충격을 받았냐면 그렇진 않았다. 살면서 이보다 더러운 꼴이며 잔인한 일을 많이 겪어 보았다. 당장 닥쳐온 상황을 충분히 납득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속에서 빗발치는 의문이 많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범벅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걱정되지 않는다. 그저 멍하다.
그저 멍하니, 나는 재차의에게 붙들려 흔들거렸다. 그가 내 팔뚝을 움켜쥐고 당기는 대로 비틀거리며 일어났고 휘청휘청 걸었다. 왁자지껄하진 않더라도 누군가 다른 방에서 흘린 목소리며 쿵쿵대는 층간 소음이 항시 울리던 사무소 건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재차의가 나를 데리고 빠져나오는 동안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백색 세단이 눈에 들어왔다. 차에 대해 문외한인 내 눈에도 비싸 보였고, 운전석 쪽 루프에 사이렌을 올린 채였다. 뿜어져 나오는 불빛은 경찰의 상징인 빨강이나 파랑이 아닌, 대슈망을 상징하는 보라색 빛이었다. 재차의는 조수석 문을 벌컥 열더니 좌석 위에 나를 던지듯 밀어 넣었다. 그러곤 문을 퉁 소리 나게 닫고 운전석으로 넘어왔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차를 몰았다. 나는 차창 너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혹시 근처에 게이트가 생겼거나 괴수가 나타났나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요란한 보랏빛 사이렌이 무색할 만치 주변은 고요했다. 번쩍거리는 경고등은 단지 우리 앞의 차를 전부 갓길로 몰아내는 용도에 충실했다.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며 차도 위를 질주하는 작금의 상황보다도, 내 신경을 더욱 끌어당기는 건 재차의의 오른손이었다. 왼손으로 핸들을 쥐고 거칠게 차를 몰면서 그는 오른손으론 내 한 손을 옭아매듯 쥐고 있었다. 깍지를 아주 세게 쥔 탓에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하고 손끝에 쥐가 올라 간질간질할 지경이었다.
감정 한 올이라도 읽어 보려,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옆얼굴을 살폈다. 그때 재차의가 빠르게 핸들을 꺾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의 몸에는 미동 하나 없는데 내 몸은 차창에 어깨를 부딪치도록 크게 흔들렸다. 둔한 정신에 뒤늦게 경각심이 피어올라, 안전벨트를 얼른 맸다.
창밖의 풍경은 아주 빠르게, 부지런히 바뀌었다. 건물은 초를 다투듯 화려하고 부유해졌고, 도로는 더욱 깨끗하고 넓어졌다.
이내 회색 차도 위엔 어떤 차량도 보이질 않게 됐다. 늦은 새벽의 어둠에 잡아먹힌 검은 산이 문득 보였는데, 그 모습이 배를 깔고 엎드린 거인 같았다. 산의 중앙엔 대뜸 톨게이트가 존재했다. 멋모르는 내게조차, 재차의의 백색 세단을 향해 가드를 활짝 올리는 톨게이트는 통행료를 걷기보단 오가는 차량을 식별하는 용도로 느껴졌다.
단 한 번도 브레이크를 밟거나 속도를 늦추는 법 없이, 재차의는 톨게이트를 지나 환한 터널 속을 질주했다. 터널을 다 지나기까지 나는 그 터널이 긴지, 짧은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차의 속도가 너무 빨라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콧바람 내쉬듯 부웅 소리를 내며 독주하던 백색 세단이 마침내 정지했을 때, 창밖으론 호텔이 올려다보였다. 재차의는 곧바로 운전석에서 뛰어내렸고, 순식간에 건너와서는 조수석 문을 벌컥 열었다. 그가 내 팔뚝을 거세게 쥐고 잡아당기는 통에 어깨가 빠질 듯 아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허둥지둥 안전벨트를 풀고 그의 손아귀에 이끌려 질질 끌려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서 눈앞의 큰 건물을 빠르게 관찰했다. 다시 살펴보니 이곳은 호텔이 아니었다. 커다란 건물을 뒤덮은 반사 유리가 폭포처럼 흐르는, 이곳은 대슈망 센터였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재차의를 따라, 반은 자의로 걷고 반은 타의로 운동화 밑창을 끌어 가며 움직였다. 성대하다는 느낌이 들 만큼 화려한 건물의 초입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이 멀찍이 보였다. 정장을 입은 치들을 보자마자 문득 위화감이 내 뺨을 쳤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난생처음 보는 남자에게 이끌려 그의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내게 오질 않던 위화감은 지각생이었다. 늦게나마 안간힘을 써, 나는 두 발을 땅에 박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당기지 마세요. 제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나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머리는 팽팽 돌고 심장은 당황하여 엇박자로 뛸 지경인데, 혀는 굳어 버린 것이다. 그게 놀라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혹은 두려워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한 내 반항은 아주 약한 주춤거림을 낳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어 서는 데에 성공했다. 상체는 재차의의 손에 붙들려 당겨지고, 억지로 멈춰 세운 두 다리는 허물어져 회색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이었지만, 아무튼 멈췄다. 그래도 내 무릎은 땅에 닿질 않았다. 재차의가 꽉 붙든 팔뚝만은 제 높이에 있어, 무너진 전신이 그 손에 매달린 꼴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
재차의가 말했다. 내가 아닌,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직원들에게 뱉은 명령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제자리에 우뚝 선 이들의 표정이 곤혹스러워 보였다. 재차 얼굴을 들어 나는 재차의를 살폈다. 그러자 시선이 마주쳤다.
재차의는 진작부터 날 보고 있었다. 그의 시커먼 눈동자가 따가울 만큼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이렇다 할 폭력도 없고 욕설도 없지만, 차라리 한 대 맞고 욕지거리를 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서웠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순식간에 삐져나온 식은땀이 내 이마를 타고 흘렀다. 재차의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아예 내 몸을 방패 삼듯이 앞세우며 걸었다. 죄인처럼 비틀비틀 걷는 내내 두 다리가 연신 휘청였다.
재차의의, 거인이라고 생각될 만큼 큰 키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될 만큼 압도적인 미모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의 힘이었다. 꽉 잡힌 팔뚝을 시작으로 나는 손끝까지 마비됐다. 피가 통하질 않아, 피부 위가 저릿저릿하고 뼈가 다 아팠다. 얼핏 내려다본 손등 색은 푸르스름했다.
그래도 재차의의 행동이 크게 강압적이라 여겨지진 않았다. 나를 막 다루는 이들이야 어디에나 있기에 익숙해서인지, 혹은 편안한 차내와 화려한 배경에 현혹되어 그런 건지, 재차의의 존재 자체에 압도되었는지 경각심이 마비됐다.
그냥… 꿈을 꾸는 중인 것 같다.
쓰레기촌 빌라에서 괴수 시체 냄새를 풍기며 살아온 나다. 미친 황소 같은 태도로 나를 떠미는 재차의는 제멋대로지만,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무섭고 또 아름다웠다. 그 성질은 카리스마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다. 아우라라고 칭하자니 또 모자랐다. 그의 커다란 존재감이 내게는 두 발을 댄 땅보다, 긴 밤보다, 내 갈비뼈를 때리며 뛰는 심장보다 직접적이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상했다. 오금 저리게 무서운데, 그러면서도 편안해서… 이상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화려한 건물 외관이며 넓은 파사드, 아주 높고 성대한 내부 천장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1층 로비에 접어들자 직원들이 아주 많이 보였다. 그들 모두 재차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재차의의 명령을 의식하는 듯 가까이 다가오진 않고, 거리를 유지하며 멀리 선 채 무전기에 대고 중얼거리기 바빴다.
수많은 시선과 방관 속에 재차의는 승강기 앞까지 나를 끌고 갔다. 종국에는 내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딛는 시간보다 옆면이 주르륵 미끄러지는 시간이 더 길었다.
방인지 무언지 헷갈리게 넓은 승강기에 타자마자 잠시 기절한 것 같다. ‘같다’는 불분명한 표현을 써야 할 만큼 나는 정신이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백색 카펫이 깔린 복도가 보였고, 다시 감았다 뜨면 전과 다른 색의 빛을 내는 조명등이 보였다. 재차의는 앞장서서 나를 끌기도 했고 부축하듯 어깨를 받쳐 안기도 했고, 비몽사몽하며 기절한 내 몸을 짐짝처럼 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계속 걸었다.
끝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방 안에 나를 집어넣었다. 그쯤 되니 낯선 공간에 대한 걱정보다도 더는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쿵 소리를 내며 의자 자리에 주저앉은 뒤에야, 겨우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삐, 삐, 삐… 다시 소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루프가 찌그러진 차량이 내는 도난 방지음, 그 소음의 메아리였다. 삐, 삐, 삐… 머릿속에 울리는 이명을 닦아 내려 나는 두 귀를 틀어막았다. 지친 다리를 길게 뻗고 고개 숙인 내 앞에, 재차의가 다가와 섰다.
징징 울리는 이명에 시달리며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빨간 혀끝을 내밀어 제 입술 새를 핥으며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질 않았다. 그 모습에 내가 더 눈이 시리고 목이 말랐다.
벙긋벙긋, 재차의가 입을 움직였다. 귓바퀴 위에서 미끄러지는 이명으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입술을 읽을 수는 있었다.
‘찾았다.’
말끝에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는 입술에 나는 시선이 사로잡혔다. 재차 방긋방긋, 그의 입술이 내게 말했다.
‘송모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