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25)화 (25/76)

25. 

고개를 들자 그의 굵은 목과 바람에 날려 흐트러진 뒷머리가 보였다. 나를 등지며 윤희수 앞에 서, 그는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말했다.

“들은 소문이 있다며? 그럼 알 거 아냐. 송모래는 내가 아닌 다른 파수꾼 앞에선 E급에 불과해. 능력이 안 되니 거지처럼 살았지. 급 떨어지는 가이드가 A급 파수꾼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의 말이 한 마디 두 마디 길어질수록 윤희수의 안색은 파랗게 질렸다. 입술마저 보라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부탁에 대한 대답이 내가 아닌 재차의로부터, 그것도 거절로 돌아올 줄은 몰랐던 기색이었다.

“재, 재차의 님….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때라서….”

“고양이는 벌레라도 잡지. 송모래는 무능력자야.”

“하지만….”

“송모래한테 도움을 구하고 싶은 거야, 망신을 주고 싶은 거야?”

…미리 망신 주어서 고맙네요….

그들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갈증이 났다. 아니지, 대화라고도 할 수 없겠다. 이건 재차의의 일방적인 폭격에 지나지 않았다. 말로는 윤희수를 향하지만, 실질적으론 날 향한 폭격이었다.

지지부진한 앞담화를 그만두게 해야겠다. 허리를 애써 곧게 펴며 나는 재차의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 윤희수를 향해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긴 힘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휙 재차의를 돌아보았다. 이제 됐죠? …그런 의미를 담아, 별 뜻 없이 마주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재차의의 표정이 이상했다. 시커먼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문 채, 그는 놀란 사람처럼, 그리고 화난 짐승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그러뜨린 눈살은 짜증스러워 보였고 두 눈동자 안에선 차가운 불이 타는 듯했다.

재차의가 까딱 턱짓하자 윤희수가 빠르게 자리를 비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그의 뒤통수를 나는 잠시간 눈으로 좇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와 같이 이 무서운 뉴타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재차의는 내 앞에 바짝, 아주 바짝 마주 붙어 섰다. 그러더니 왼발과 오른발을 각각 움직이며 제 두 다리 사이를 넓게 벌렸다. 나와 눈높이를 맞추어 주겠다고 키를 한껏 낮춘 것이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태도가 내심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높이가 나보다 높기에 더욱 그랬다.

“송모래. 너는 누구 편이지?”

재차의가 물었다.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질문이었다. 재차의가 하는 말들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직관적으로 듣기엔 어렵지 않고 이해가 쉬운데, 그 함의를 짐작하기가 내겐 너무나 어렵다.

좀 전에는 아주 잠깐, 방심한 덕에 말을 할 자신감이 내게 왔었는데, 이젠 사라지고 없었다.

“…….”

머뭇머뭇 침묵하며 나는 눈을 굴렸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내 눈길과 달리 재차의의 두 눈동자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 내 얼굴에 가만히 꽂혀 있었다. 목구멍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다. 내가 나서서 대답을 한 게 잘못이었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어서 기분이 상한 건가? 아니, 애초에 저, 윤희수라는 가이드가 내게 걸어온 대화에 먼저 끼어든 이는 재차의였다.

‘같은 짓이라도… 급 떨어지는 놈은 그러면 안 된다, 이건가?’

이내 재차의가 휙 돌아선다. 한숨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그 태도는 무심하다. 무심해서 오히려 사람을 무섭게 했다.

“저는….”

나는 뒤늦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재차의가 이대로 나를 무시하고 가 버려도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재차의는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다시금 나를 눈에 담았다.

유난히 퍼석한 혀를 움직여 나는 사실만을 말했다.

“저는 재차의 님의 파트너입니다.”

“그래?”

“네.”

“그건 내 편이라는 뜻이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네.”

힘주어 소리 내어 대답했다.

이내 콕, 재차의의 손가락이 내 오른쪽 볼을 찔렀다. 장난질하듯 쑤시는 손짓에 당황해 쳐다보아도, 재차의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그가 찌른 오른쪽의 입꼬리만 억지로 위로 말려 올라갔다.

“송모래.”

“…….”

“그럼 사과하지 마.”

재차의가 연이어 말했다. 숨결이 느껴지도록 가까이서 건네 온 속삭임은 상냥했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남에게 고개를 조아렸다간 그 예쁜 목을 부러뜨릴 줄 알아.”

…살해 협박…?

게이트 붕괴가 예고된 쓰레기촌에서도 두 발 뻗고 자던 나다. 재차의의 이런 횡포에도 그새 적응이 되었는지,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소리조차 크게 무섭진 않았다. 조금 아리송하긴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재차의의 기분이 좋아 보여 괜찮았다.

콕, 콕, 연신 내 볼살을 쑤시며 재차의가 말했다.

“여기에 납작 엎드려서 기다려. 너한테 맞는 일을 만들어 올 테니까.”

콕…. 다시 내 볼을 꾹 누르더니, 재차의가 등을 돌렸다.

“다녀올게.”

그리고 조명의 어둠이 닿는 색채의 구역 너머, 흐린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한 발짝 만에 그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됐다. 텅 빈 것 같기도, 꽉 찬 것 같기도 한 완벽한 백색이 무감각하게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물끄러미 백색 구역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기다림만이 내게 주어졌다. 싹싹하게 말을 붙여 오던 윤희수의 친절은 더는 없었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제 할 일을 하기 바빴다. 구속복을 찬 파수꾼의 잇새에 약물을 흘려 넣고,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대어 가며 흥분을 달래는 식이었다.

그 모습이 여러 차례 기사를 통해 봐 온 엘리트 가이드의 사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그들만의 세계인 점까지 딱 그랬다. 제 일에만 몰두하느라 자연스럽게 남을 배제하는 윤희수와 달리, 다른 가이드는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기색을 도통 못 감췄다. 내 쪽을 티 나게 힐끔거리면서 그는 윤희수의 옆에 딱 달라붙어 일했다. 속닥속닥 무어라 귓속말을 나누기도 했다.

신음하는 파수꾼을 달래는 그들을 구경하며, 나는 구석진 자리를 찾아가 몸을 앉혔다. 그러고 나니 재차의를 기다리는 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두 발을 얌전히 모아 놓고, 검은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백색 안개만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이대로 재차의까지 실종되진 않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다녀온다고 말하고 떠났으니까, 다녀오겠지. 돌아오겠지… 하고.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재차의는 금세 기지로 돌아왔다. 시계가 없어 정확히 알 순 없으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겠다 싶게 빠른 속도인 데다, 두 팔에 각각 낯선 이들의 멱살을 움켜쥔 채였다. 오른손에는 검은 슈트를 입은 여자, 왼손에는 흰 셔츠가 찢어진 남자를 들었는데, 각각 파수꾼과 가이드처럼 보였다.

기절한 이들을 기지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와, 재차의는 그들을 바닥에 던졌다. 쓰레기봉투 버리듯이 동료를 내던지는 태도도 놀라웠지만, 그러면서 얼핏 비친 그의 손바닥이 피에 젖어 새빨개서 더 놀라야 했다. 잠깐 사이 상처라도 입은 건가 걱정되어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주춤거렸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내게 주어진 기대도 없었다. 무작정 재차의에게 달려가서 연고나 발라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

내가 고민하는 사이 재차의는 기지 한편의 철제 의자에 몸을 풀썩 앉혔다. 그의 양옆으로 두 가이드가 빠르게 다가갔다. 약상자와 물수건, 붕대를 챙겨 재차의의 옆에 서더니, 의자 팔걸이에 놓인 그의 손을 한쪽씩 닦아 주었다. 그러더니 열었던 약상자를 도로 닫았다. 치료해 줄 상처가 없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안엔 작은 무력감이 피어올랐다. 손을 닦는 일 정도는 나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레 위축되어 제자리에 박힌 발바닥 밑이 간지러웠다.

둔한 태도로 얼어붙어 선 날 향해 재차의가 까딱까딱 손짓했다. 그러자 두 가이드가 재차의를 한 번, 나를 한 번 살피더니 멀찍이 떨어졌다. 자연스러운 관심을 더부룩하게 느끼면서, 나는 그가 키우는 개라도 된 기분으로 빠르게 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는데, 그저 무표정했다. 문자 그대로,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재차의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그도 다른 파수꾼들이 그러듯이 흥분 상태인지, S급씩이나 되는 대단한 파수꾼이다 보니 괜찮은 건지,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혹은 담담한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하게 인지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불에 그을린 무어처럼 그저 시커먼 재차의의 눈동자를 직시하면서, 나는 본능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눈길을 집착적으로 빤히 노려보면서, 그의 발치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순간에는 피부 밖의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타인의 존재도 시선도 목소리도 전부 남의 것으로 내팽개쳐 놓고, 그저 재차의에게 집중한 순간이었다. 알기에 그렇게 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재차의가 그 무엇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 전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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