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재차의의 까만 눈동자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가 팔걸이 위에 얹었던 팔을 뒤집어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끔 바꾸는 게 주변 시야로 보였다.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나는 재차의의 팔 위에 내 팔을 얹었다. 내 손에는 그의 굵은 팔뚝이 잡혔고 내 팔꿈치는 그의 손바닥에 자리했다. 그러자 옷이 무색해졌다. 재차의의 손등에서 퉁퉁 뛰는 박동이 마치 북소리처럼, 내 것처럼, 가감 없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내달리는 그 속도에 내 심장도 따라 달렸다. 편안한 와중에 섬찟섬찟한 기운으로 어깨의 근육이 꽉 뭉치고, 등줄기의 솜털까지 뾰족하게 일어섰다. 문득 머리 꼭대기에 소름이 끼쳤다.
내 속에 내 것이던 것들과 내 것이 아닌 낯선 것들이 한데 뒤엉켜 뭉쳤다. 본래부터 내게 있던 감각은 끔찍하게 나빴고 새로이 발생한 감각은 만나 본 적 없는 산들바람이었다. 낯선 것들은 모두 친절하고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그건 뾰족하게 다듬어진 나쁜 것들이 내 명치를 찌르지 않게 막아 주는 방패이자 쿠션이자 보호막이었다.
재차의의 커다란 흉곽이 서서히 부푸는 걸 느끼면서,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부풀었던 폐가 납작해지고 팽팽해졌던 가슴이 꺼지도록 내 안의 공기를 전부 밖으로 빼내었다. 내 안의, 모든 좋은 감각들을 재차의의 피부 아래로 밀어 보냈다.
그와 동시에 복장뼈 아래에 돌이 꽉 찼다. 날 선 감각이 내 급소에 제대로 꽂혔다.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차의에게 아주 몰입한 탓에 나는 그의 눈동자에 깃든 검정과 흐려지는 시야의 탁한 빛깔을 분간하지 못했다. 이러다 쓰러지겠다는 경각심이 든 때엔 이미 늦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나는 그의 허벅다리 한편에 머리를 기댔다.
진을 다 뺀 탓에 의식이 어둑어둑하게 꺼져 가는 와중에도 나는 두 손안에 쥔 팔뚝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열중하여, 느꼈다. 재차의의 기분이 날듯이 좋아지는 걸…. 그의 심장에 뭉친 낡은 통증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백 년은 거뜬히 묵은, 끔찍한 악몽이 끝을 맺었다는 걸.
‘이제 알겠어,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옷자락의 재질,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감각, 칭찬하듯 ‘송모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거. 아무런 방황 없이 외롭지 않다는 거….
***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나는 깨어났다. 기절이나 혼절을 한 게 아니라, 잠시 잠들었다가 깬 듯 기분이 몽롱했다. 몸무게는 평소보다 1.5배쯤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끝, 발끝에서 쥐가 오르고 전신의 피가 천천히 도는 감각이 둔했다. 정신을 차리려 눈살을 찌푸리고, 무감각한 마른세수를 하는 내게 다가온 이는 윤희수였다.
“송모래 님. 일어나셨어요?”
친절한 목소리에 현실 감각이 느릿느릿 돌아왔다. 재차의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수상쩍은 게이트, 신기한 조명이 설치된 미스터리한 임시 기지, 난생처음 경험한 ‘진짜’ 가이딩, 그리고….
“네. 제가 잠시… 잠들었나 봅니다.”
얼떨떨하니 무딘 목소리를 내어 그렇게 답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로감과 전신에 몰아치는 졸음이 버거웠다. 게이트의 영향을 받았거나 나쁜 병에라도 걸린 걸까 생각하는데, 내 옆자리에 뒷짐을 지고 선 윤희수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그런 걸 과잉 진압이라고 해요. 뉴타입에게 필요 이상의 가이딩을 해 주는 바람에 온몸의 진이 빠져 버리는 거죠.”
“…….”
아, 그렇구나…. 재차의에게 무얼 해 주어야 하는지, 또 해 줄 수 있는지 본능적인 깨달음에 그저 심취한 순간이 기억난다. 첫 파견이랍시고 나를 이곳으로 보내면서 왜 아무도 내게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명령만큼은 내리질 않은 건지 마음 깊이 이해됐다. 내가 해 놓고도 그, ‘가이딩’이라는 걸 정확히 어떤 행위라고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건 남에게 알려 주며 지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나 잘했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어디까지가 필요한 정도인지 몰라서, 낯선 우물에서 지하수 끌어 올리듯 마구잡이로 안간힘을 다한 것도 뇌리에 선명했다. 나로서는 처음 해 보는 일이고, 평생 못 해 본 일이라 내심 신이 났던 모양이다. 기운을 다 쏟아부으면서도 무리하는 중이라고 인식하질 못했다.
‘그대로 잠들어 버릴 줄은 몰랐는데….’
떨떠름한 와중에도 후회는 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윤희수를 살폈다. 그는 회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만 호를 그려 웃고 있었다.
“재차의 님은요?”
내 질문에 윤희수가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임시 기지 밖, 하얀 안개 속을 내다보며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S급 가이드가 혼절할 때까지 가이딩을 해 줬으니, 어떨 것 같아요?”
“…….”
어…, 글쎄. 모르겠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내가 지나치게 가이딩을 해 준 바람에 재차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주 훨훨 날아다니고 계시죠, 뭐.”
“…….”
아, 잘됐다는 의미구나. 왜 그런 말을 뜸을 들여 가며 하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대체로 뒷말을 기다리는 입장에 놓이는 나로서는 수 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데 말이다.
멀뚱멀뚱하니 생각을 늘이는 날 향해 윤희수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저, 송모래 님. 다 쉬셨으면 혹시, 침대 좀 써도 될까요?”
내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조차 그제야 깨달은 나였다. 느리게 두 눈을 깜빡거리며, 나는 가슴 위에 덮인 얇은 담요를 걷어 내렸다. 잠이 덜 깬 채 침대 밖으로 발을 뻗으려다가 맨바닥에 누워 있는 파수꾼을 발견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조금 전, 재차의가 포대 자루 쥐듯이 멱살을 움켜쥐고 끌고 온 여자 파수꾼이었다. 함께 끌려 들어왔던 가이드가 제 다리를 베개 삼아 내준 채였다.
나는 뛰어내리다시피 침대에서 벗어나 기절한 파수꾼에게 달려갔다. 근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돌보는 가이드는 건장한 사내이긴 하나 오른팔이 부러졌는지 부목을 댄 채여서, 혼자 힘으로 파수꾼을 옮기긴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와 눈짓을 잠시 나눈 뒤 그들 바로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축 늘어진 파수꾼의 허리와 무릎 밑을 받쳐 주려 두 팔을 조심스럽게 비집어 넣고, 얼른 안아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위험한 능력을 지닌 파수꾼임은 잊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부상을 입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 뿐이래도 그랬다. 혹여 몸이 흔들려서 깨어나기라도 할까 봐,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팔을 모으고 되도록 빨리 걸었다. 빈 침대 위에 최대한 살살 파수꾼을 눕혔고, 조금 전 쓸데없이 내 가슴이나 덮고 있던 담요를 덮어 주려 허공에 대고 탈탈 털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윤희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엄청 세시네요…?”
느닷없는 말에 나는 눈이나 깜빡이곤 말았다. 기절한 여자를 바닥에 버려둘 수 없어서 옮겼을 뿐, 칭찬받을 만큼 대단한 노동도 아니었다. 평소 스무 자루씩 들어 나르던 100kg짜리 일감에 비하면 성인 여자 한 사람이야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윤희수는 내 사소한 도움에 감동받은 듯, 또다시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붙여 왔다.
“구속복 무게가 상당할 텐데요. 대단하시네요.”
그에 나는 잠든 파수꾼을 다시 살폈다. 윤희수의 말마따나 그녀의 셔츠 소매며 바지 밑단 아래로 갈색 벨트 같은 장비가 비쳐 보였다. 그제야 다른 파수꾼들도 새로이 보였다. 상처 입고 기절한 그들에게 가이드가 일일이 구속복을 챙겨 입힌 게 아니라, 하나같이 진작부터 내복 입듯 구속복을 착용하고 온 모양새였다.
몰랐던 사실을 깨닫고 나니 파수꾼을 향해 가볍게 품었던 동정심이 휘발됐다. 언제 흥분 및 패닉 상태에 빠져 누구를 해치게 될지 모르니, 그땐 자신의 자유를 억압해 달라며 자진하여 준비해 온 구속복이라는 게…. 신뢰하는 보호자에게 제 목줄을 물어다 주는 큰 개를 연상하게 했다. 실수로 잘못 물렸다간 즉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쿨쿨 잠든 파수꾼으로부터 두 걸음 멀리 물러서는 나에게, 윤희수가 말했다.
“재차의 님께선 오늘 프리한 상태던데…, 송모래 님은 수갑도 안 가져오셨고요.”
“…….”
얼핏 상냥하게 들리는 그 말을 이해하긴 쉽지 않았다. 없는 눈치를 열심히 굴려 보았지만, ‘프리한 상태’라는 표현은 여전히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직역하자면, ‘자유롭다’…? 내가 봐 온 재차의는 언제 어디에서건 ‘프리한’ 상태였는데 그게 꼭 오늘일 이유는 또 뭐고, 그래선 안 될 이유는 또 무언가 싶었다.
작은 의문에 눈동자를 굴리면서도 나는 윤희수에게 어떠한 반문도 내놓지 않았다. 어려 보이는 얼굴로 상냥하게 속닥거림에도 그의 눈빛에서 나를 향한 못마땅한 기운이 느껴져서, 석상처럼 입을 다물고 얼굴을 굳혔다.
묵묵히 파수꾼에게 담요를 덮어 주는 내게 윤희수는 연이어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래요. 그렇게 무리해서는요, 이 일 오래 못 하세요. 아무리 대단한 가이드라도 금방 쇠약해져서 안 돼요.”
“…네.”
…죄송합니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려다 멈칫했다. 당장 이 자리엔 재차의가 없었지만, 내가 ‘죄송합니다’ 다섯 글자를 입에 담는 순간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듯 순식간에 나타나 내 목을 비틀어 꺾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