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45)화 (45/76)

45.

내 눈에 익숙한 얼굴로 부쩍 낯설게 구는 재차의가 신기해,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네.”

그리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시야가 다 가리도록 뿌연 입김이 용이 뿜은 한숨처럼 기다랗게 빠져나왔다.

그러자 재차의가 고개를 크게 갸웃거렸다. 그 움직임이 놀란 고양이처럼 갑작스럽고 유연했다. ‘후’ 소리 내어 입김을 불어 보는가 싶더니 그는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팔을 덥석 붙들었다.

재차의의 손이 내 팔뚝을 지나 손에, 목덜미에, 그리고 볼에 닿았다. 옷 밖으로 드러난 살갗을 온통 주물럭거리다가 그는 대뜸 나를 안았다.

“송모래. 추워?”

그리고 아주 센 포옹이 이어졌다. 재차의의 어깨에 부딪힌 턱이 아프도록 힘 들어간 포옹이었다.

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꾸만 부모님을 생각나게 하는, 이 거지 같은 게이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필 끝도 없는 바다라 우리 형, 송바다가 생각나는 것도 싫다. 엄마의 주황색 스카프로 만든 듯한 저 구명보트도 싫고, 눈치 없고 힘도 없어 어리둥절하니 눈만 굴리는 불쌍한 어린애도 싫다. 이 모든 것들이 나로 하여금, 재차의의 등을 토닥거리게 한다…. 그래서 싫었다.

잇새로 따닥따닥 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떨지 마, 송모래.”

재차의는 나를 오래 안아 주었다.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며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며 내 손가락을 옴찔거리며 잡는 아이에게 미안해질 정도로 오래…. 꽁꽁 얼어 경직됐던 목덜미가 느슨해지고 오그라붙었던 갈비뼈가 열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오래….

그리고 그는 부드럽게 귓속말했다.

“저 인간들 다 버려도 넌 데리고 나갈 거야.”

“…….”

그의 행동도 말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 몸이 식은 만큼 재차의의 체온은 따듯했다. 내 뼈와 살의 떨림은 물론이며 쓸쓸해진 마음까지 가라앉히기 충분한 온도였다. 나는 긴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고 입술만 소리 없이 벙긋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가 상냥한 태도를 보이니 부쩍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괜히 일을 벌인 것 같고, 그의 고생을 더해 버린 듯해 그저 미안했다. 죄송하다는 말이 입 안에서 꿈틀거렸다.

소심하게 주저하는 내 뺨에, 재차의의 뺨이 바짝 붙었다. 얼굴의 찬 기운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똑똑한 송모래…. 네 성에 차도록 처리해 주자면 내 힘을 아주 많이 써야 되겠는데. 네가 뭘 해야 하는지는 이미 알겠지?”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재차의가 내게 요구할 것이라면 가이딩과 섹스, 둘뿐이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 행위는 섹스보다는 가이딩이었다.

‘능력을 쓰기도 전에 받는 가이딩도 소용이 있나…?’

내심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꼭 끌어안으며 포옹에 동참하자, 재차의가 낮은 웃음으로 흉통을 들썩였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의 커다란 몸속에서 삐죽거리는 고통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아.’

재차의에게도 없는 텔레파시 능력이 내게 잠시간 생긴 듯하다. 그의 몸을 적극적으로 맞잡고 그를 고쳐 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나는 초능력자가 된다. 재차의가 지닌 나쁜 감각들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 앞에서 나는 도둑이다. 그의 나쁜 고통을 송두리째, 전부 다 빼앗기를 갈망하는 도둑. 그의 고통, 긴긴 아픔, 해갈되지 않는 오래된 밤들…. 모두 내 것 삼고 싶어진다. 반짝이는 재차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 못되고 고약하고 외로운 것들. 그것들을 모두 빼앗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내 인생에 맞지 않게 큰 편안은 다 재차의에게 보내 주어야 했다. 재차의의 영혼을 달래고 오래도록 그의 속을 끓여 온 어둠을 내 배 속에 쑤셔 넣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절도에 일가견이 있다.

문득 현실에서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주 이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무중력 상태가 나는 못내 익숙하다. 애초에 한 번도, 어디에 발붙이고 똑바로 서 있다고 느낀 적 없었으니까.

눈앞이 초를 다투며 흐려졌다.

‘잠깐 기절해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쓰러져도 재차의가 옮겨 줄 거고, 당장은 내 역할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생존자들을 로즈에 싣고 출발할 때쯤이면 나를 깨워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편안했다. 기절해도 된다니, 쓰러져도 된다니. 재차의가 나만큼은 반드시, 꼭 데리고 나가 줄 테니까 괜찮다니…. 참 이상하게 기뻤다. 기뻐서 이상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문소여의 조언을 지워 버리고야 말았다. 가는 거미줄 위에 두 발을 전부 올려놓고 비틀거리는 꼴이란 걸 자각하고서도… 허튼 감정에 사로잡혔다. 재차의의 얼굴을 예뻐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덜 힘겨운데, 차라리 그를 좋아하면 훨씬 더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

정신을 차리자마자 불쾌감이 밀려들었다. 등이 배기고 팔뚝이 저릿한 감각이 아주 익숙하고 역겨웠다. 놀란 숨을 크게 뱉으며 두 눈을 뜨고 보니 높다랗고 어두운 천장이 보였다. 휙 고개를 돌려 나는 팔뚝에 꽂힌 링거 주삿바늘을 확인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링거줄을 움켜쥐고, 주삿바늘이 꽂힌 방향에 맞추어 뒤로 뽑아냈다. 부랴부랴 뚫린 주사 자국에서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가로로 빨간 줄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팔뚝을 덮고 꾹 눌러 지혈하면서, 뒤늦게 내 손목을 살폈다. 파수꾼 전용 수갑이나 가느다란 사슬 줄은커녕, 피부가 눌리거나 쓸린 흔적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꿈인가?’

나는 아주 어리둥절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로즈 선실일 거라 생각하며 쓰러졌었다. 천천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 내 허리를 받치듯 쥐던 재차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누운 자리는 로즈의 딱딱한 소파 위가 아닌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 위였다. 천장 또한 좁거나 답답하기는커녕 아주 높고 쾌적했고, 멀찍이 달린 샹들리에는 너무 큰 탓에 실제 거리보다 훨씬 가까워 보였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장식도 천으로 된 갓을 쓴 스탠드형 조명도 모든 게 익숙하다.

‘대슈망 센터….’

여기는 내 방 안이었다.

가슴 밑으로 흘러내린 이불을 걷어 내고, 나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잠깐 쉬어야지, 쓰러져도 되겠지 했던 생각이 머릿속을 채 떠나질 않았는데, 체감하기로는 고작 몇 분쯤 지난 듯한데 게이트도 아니고 로즈 선실도 아니고, 대슈망 센터라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두꺼운 커튼을 걷고 밖을 확인하자, 대슈망 센터 본관이며 별관의 건물과 우아한 구름다리의 형체가 선명했다. 해가 질 무렵인지 뜰 무렵인지 하늘은 모호한 연홍색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과잉 진압의 대가로 너무 오래 기절했었나 보다.

“하아….”

낙담하여 침대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안도한 탓에 근육이 해이해진 모양이었다. 한 발짝 앞으로 딛자마자 나는 카펫 깔린 바닥에 무릎 꿇으며 앉았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정강이에 눌려 굵어진 허벅지를 주먹으로 툭툭 쳤다. 감각이 아주 무디고 더뎠다. 그제야 내 손이며 무릎이 파란 빛깔인 게 보였다. 온몸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당혹감에 부랴부랴 양손을 맞잡고 마구 주물렀다.

벌서는 사람처럼 무릎 꿇고 미적거리길 한참, 멀찍이 욕실로 통하는 통로가 보였다. 통로 중앙에는 커다란 전신 거울이 놓여 있었다. 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이상했다. 코 아래가 온통 거뭇거뭇했다.

‘수염이 돋을 정도로 오래 잤나?’

불길한 추측을 하며 손가락으로 슥 문지르자, 인중에서 새카만 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냄새를 맡아 그게 피딱지란 걸 알았다. 기절한 새에 또 코피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럼 그 여자애는, 생존자들은…? 다 게이트에서 구출된 건가? 내가 밖으로 나왔다면 그 사람들도, 재차의도 같이 나왔겠지?’

검지에 묻은 피딱지를 털어 내는데,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소리 없이 열린 문틈으로 각진 카트가 빼꼼 모서리를 내밀었다. 그대로 의료용 카트를 끌고 들어오는 이는 뿔테 안경을 쓴 의사였다. 그는 먼저 침대를 살피더니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빠르게 휘휘 흔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자빠진 나를 발견했다.

“송모래 님!”

그러더니 의사는 이미 연 문에 대고 노크를 두 번 했다. 내가 어서 들어오시라고 손짓하자, 수신호에 버튼이라도 눌린 사람처럼 후다닥 달려오더니 나와 마주 보도록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기분이 어때요. 균형 감각은? 특별히 아픈 곳은요?”

열기 넘치는 정성으로 나를 살피는 그의 태도가 고마운 한편 큰 목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귀가 아파요.”

눈을 감고 고개 숙이며 그렇게 말하자, 의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무너진 나를 부축하려다가 한 차례 실패하며 도로 주저앉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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