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브리콜라주 (57)화 (57/76)

57.

한나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현실은 내 생각보다 더 매정하고 차가웠다. 나는 S급, 윤도곤은 A0급. 그 등급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었다. 다른 수많은 조건에서 나는 윤도곤에게 패배했다. 두 단계 이상의 등급 차이를 놓고도 월수금, 화목토. 동률의 점수를 받고야 말았다.

‘…아니지.’

3대 3도 아니고 4대 3이다. 일요일은 또 윤도곤을 찾겠다고 그랬으니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재차의가 베푼 작은 다정에, 그저 가이딩이 목적이었을 뿐인 접촉 몇 번에 혼이 빠져서는 내 자존감이 너무 높아져 몰랐을 뿐이지…. 나보다야 윤도곤이 더 예쁜 사람이었다. 키도 작아 체구가 아담한 편이고, 목소리도 부드럽고, 근육도 적어 호리호리하니. 외형뿐만 아니라 성격도 그랬다. 아주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표정을 보여 줬다. 자신감 넘치고 친화력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다가오는 태도가 딱 그랬다.

피차 좆 달린 남자끼리 섹스를 하자면,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반응 좋은 쪽이 나은 게 당연했다. 묵묵부답 각목인 나와 달리 윤도곤은 재차의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할 테고 섹스를 무서워하는 등신도 아닐 터였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키는 대로, 말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껏….

…결국 재차의는 성능보다는 편리를 더 추구한 거다. 그 앞에서 입 꾹 다문 나는 ‘대화가 불가능’한 덜 돼먹은 별종이지만 윤도곤은 그렇지 않다. 가이딩 능력이 조금 부족할지언정 소통도 잘되고 남의 눈치도 보지 않는 훌륭한 가이드이자, 진정 파트너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파트너다.

아마도 재차의는 그런 윤도곤과 물고 빨고 뒹구느라 내 빈 자리를 느낄 겨를도 없을 터였다. 그가 나를 떠올리는 순간이라곤 윤도곤의 훌륭함에 견주어 내 우물쭈물한 태도나 어리숙한 말투를 비하할 때뿐일 테지.

대슈망의 다른 가이드들도 현 상황에 매우 만족할 것이다. A0급 윤도곤이 돌아왔으니 재차의를 위한 하렘, 대기조 가이드팀도 다시 결성할 게 분명하다. 그럼 실직했다고 슬퍼하던 이들 모두가 그리워하던 일자리로 돌아갈 것이고, 번갈아 재차의의 발가락이나 빨아 주면서 ‘내가 재차의 님을 달래 드렸어’ 하고 뻗대며 하하호호 행복해할 성싶었다.

마음이 무거워져 침묵하는 내 긴 상상을 노사장이 끊어 놓았다.

“아니. 재차의는 널 찾을 거야.”

검지 하나를 곧게 펴 보이며 그녀는 나를 지적하듯 손가락질했다.

“무조건 그럴 수밖에 없어. 너는 허접쓰레기 같은 마취약도 못 끊어서 이 똥통에 기어 들어왔었잖아. 그래 놓곤 S급 가이드를 맛본 뉴타입더러 너를 끊어 내길 기대하니?”

그 말에 내 표정이 슬그머니 구겨졌다. 재차의가 나를 찾을 것이란 가정 자체는 듣기 좋은 말이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상황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특히나 노사장이 말하여 더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었다.

‘되게 가이드 많이 맛본 뉴타입처럼 말하네.’

입술을 다물고 나는 침묵했다. 내 침묵이야 이미 익숙하다는 듯, 노사장은 제 오른쪽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건성으로 말했다.

“재차의한테 잡힐 거면 바깥에 나가서 잡혀. 괜히 우리 동네에 똥물 튀기지 말고.”

그 말이 나를 받아 주겠노란 선언처럼 들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가슴팍으로 작은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두 손으로 텁 소리 나게 받고 보니 그건 명함이었다. 회색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낯선 이름과 전화번호, 사업장 주소지가 쓰여 있었다.

“물건 받아 와. 그럼 방이랑 밥 줄게, 멍멍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더러운 사무실의 구석 자리로 가 바닥에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금방 다녀옵니다.”

그러니 가방을 잠시만 맡아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시겠지.”

혀끝으로 제 윗니를 훑으며 노사장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수신호를 인사로 알아듣고 나는 빌라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바이크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사실은 당장 일을 시작하지 않아도, 작은 방을 잡고 밥을 사 먹을 돈 정도는 있었다. 그래도 내게는 일이 필요했다. 아주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고 여유를 부리면, 왜 도망까지 나온 거냐는 의문이 속에서 솟구치기에.

‘왜, 굳이.’

어차피 재차의를 싫어했으면서, 재차의에게 안기는 일이 죽도록 혐오스럽고 끔찍했으면서, 재차의가 하루라도 나를 내버려 두었으면 소망했었으면서. 그럼 윤도곤이 돌아왔다고 쾌재를 불렀어야지, 싫은 일은 나누어 할 수 있어 잘됐다고 기뻐했어야지, 재차의가 윤도곤을 더 좋아하고 더 찾으면 기뻐해야지, 왜….

왜 이렇게 무너져 내려앉는 것이냐고.

***

한나절 만에 나는 노사장의 심부름을 완료했다. 평생에 단 한 번도 대슈망 소속 가이드였던 적 없었다는 듯, 돌산의 거칠기 짝이 없는 길을 바이크로 오가는 일이 편안했다. 아무래도 내 적성은 푹신한 침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단한 파수꾼과 노니는 일보다는, 딱딱한 장판 바닥에 구겨져선 인스턴트 음식이나 주워 먹으며 몸을 쓰는 잡일꾼이 맞나 보다.

“에휴, 일이나 못하면.”

도통 받아 내기 힘들다던 물건을 갈취하듯 챙겨다가 가져다주자, 노사장도 나를 칭찬했다. 입술을 비죽거리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마지못해 내게 방과 밥, 그리고 웃돈을 주었다.

그렇게 노사장네 빌라 2층 맨 구석 방에 짐가방을 집어넣자마자, 나는 짧게 잠을 잤다. 딱 두 시간 눈 붙이고 일어났을 땐 내 손이 짐가방 안에 들어 있고, 손아귀엔 부드러운 재킷이 구겨져 있었다. 호텔에서 훔쳐 온 재차의의 재킷이었다. 나는 그 옷을 두어 번 어루만지다가 외면했다.

그리고 노사장이 시켜 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이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이라는 노사장의 소개와 달리 반찬도 국도 영 맛이 없었다. 의무적으로 씹어 삼킬 뿐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반을 먹고 반은 버렸다.

주머니를 채운 웃돈도 곧장 다 썼다. 당장 헬멧이 하나 필요한데, 얼굴 전체를 다 덮는 풀페이스 디자인으로 구하자니 중고로 찾아도 가격이 비싸서였다. 그래도 최대한 많은 면적을 가리는 검은 헬멧을 샀다. 이곳 그레이존의 사람들이야 내가 재차의의 가이드인지 노사장의 똥개인지 신경 쓰질 않는다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었다.

머리에는 턱까지 단단히 조이는 헬멧을 쓰고, 상체는 형의 낡은 점퍼로 덮고서 나는 노사장의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노사장은 도수 높은 안경을 껴 콩알만 해진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내리더니, 소파 테이블 위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말했다.

“노란색은 갖다 줄 물건, 빨간색은 받아 올 돈. 노란 건 삥땅 쳐도 봐주는데, 빨간 건 안 돼. 한 푼도 빠뜨리지 말고 싹 다 받아 와. 이번에 실패하면 다신 너한테 일 안 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대답 대신, 나는 쳇바퀴 돌리는 생쥐를 몇 초간 구경했다. 그리고 스테이플러 철심으로 꽁꽁 고정된 명함들을 챙겨 들었다. 빳빳한 종이끼리 타닥타닥 부딪치는 소리가 나도록 훑어보니 ‘노란색’ 스티커가 붙은 명함이 네 장, ‘빨간색’ 스티커가 붙은 명함은 한 장이었다. 자연스레 소파 발치에 놓인 사각형의 알루미늄 가방을 네 개 챙겼다.

“다녀옵니다.”

재킷 안주머니에 명함을 쑤셔 넣으며 밖으로 나서는 내게, 노사장이 볼멘소리를 흘렸다.

“치! 언제부터 인사성이 그렇게 밝았다고.”

“…….”

헬멧을 가면 삼아 나는 온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바이크를 탄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뻐근하도록 바삐 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분이 참 엿 같았다.

빚은 많고, 가진 건 없고, 가족에게선 버려진 어린 가이드들을 모아 놓은 불법 가이딩 시술소에 가 약이 든 가방을 넘길 때면 나도 그 착취에 가담한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렸다. 그놈의 ‘약’이 한때 내가 중독되었던 마취제인지라, 배달 온 나를 반기는 꾀죄죄한 가이드를 마주하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혹시 ‘다른 약’은 가져오지 않았냐며 기웃거리는 녀석에게 나는 점심 겸 저녁으로 사 두었던 소보로빵을 던져 줬다.

그렇게 크고 작은 가게 네 군데를 들르며 네 개의 가방을 전달하고 나니 그보다 더 위험한 일만이 남았다. 바로 수금이었다.

보통 노사장의 고객이라는 것들은 죄 약을 받을 땐 기뻐하면서 값을 치를 땐 도망을 쳐 대기 바빴다. 고작 한 고객에 불과하더라도, 잡아다가 돈을 받아 내는 데에 며칠이 걸릴지 몇 주가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노사장도 그 습성을 십분 이해해서, 내게 일을 주니 마니 하는 경고를 남긴 것이리라.

마지막 명함에 붙은 빨간 스티커와 주소지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한숨부터 크게 쉬었다.

‘차라리 도망만 치면 무섭지나 않지….’

돈 받으러 왔다고 내 두 발을 뻗대야 하는 곳이 하필이면 ‘신산시’다. 신산시는 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무정부 상태의 범죄 소굴이었다. 20년 전에도 범죄와의 전쟁을 끝내지 못한 조직폭력배 도시로 유명했는데, 그 조직의 보스가 하필 뉴타입으로 발현한 탓에 게이트 붕괴를 기회 삼아 아예 시 전체를 잡아먹고야 말았다.

한 치의 오타도 없이 정확하게 쓰인 그의 이름, 한천마 세 글자를 보며 나는 낙담했다.

‘…어떻게든 돈은 받아 올 수 있겠지.’

그래도 몸이 성치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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