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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건물 사이를 휘돌아 나왔다. 짙은 녹색의 잎은 비록 떨어졌어도 무게를 지니고 있어 쉽게 날리지 않는다. 바싹 마른 흙과 먼지를 감은 바람은 적당히 허공으로 모양을 만들어낸 후 자리를 맴돌았다.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 사람이 다니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가로등도 몇 개 없는 어두운 건물 사이로,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힐 소리가 잠시 울리다 멀어졌다. 키 작은 쥐똥나무 울타리 건너 주차장 쪽에는 누군가 잊고 간 자전거와 공이 어둠 속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바람이 다시 세게 불었다. 주차장 한쪽, 공과 대각선에 위치한 가로등이 금방이라도 꺼질듯 점멸하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 주위로 나방과 날벌레가 무수히 날아들어 타닥타닥 부딪혔다. 순간 의식을 되찾듯 파르르 떨린 불은 다시 환하게 켜졌다.
두 건물 사이로 난 작은 길로 누군가 달려오는 기척이 났다. 화단의 벌레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키가 크고 건장한 그림자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뛰었는지 숨이 무척 거칠었다. 헉헉거리며 뛰던 남자는 가로등 바로 밑에 멈춰 섰다. 바로 위에서 떨어진 주황색 불빛에 짙은 눈썹과 이목구비가 마치 칼로 깎아낸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남자의 얼굴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빨갛게 나 있었다. 회색 빈티지 티셔츠와 청바지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또 잘못 왔나……. 환장하겠네, 진짜.”
벌써 삼십 분이 넘게 헤매고 있었다. 낮에 왔을 때는 좀 헤매긴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았는데, 날이 어두워지니 완전히 미로였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여길 어떻게 다니나 싶었다. 분명히 슈퍼에서 방향을 맞게 잡았다 생각했는데 가다 보면 엉뚱한 장소였다. 가로등도 몇 개 없고 어떻게 된 아파트인지 수위실도 비어있었다. 거기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어두웠다.
잠시 숨을 고른 영준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슥 닦았다. 불빛에 영준의 팔이 드러났다. 오른쪽 손바닥이 길게 찢어져 있었다. 팔꿈치에서 피가 뚝 흘러 뜨거운 시멘트 바닥 아래 떨어진다.
창이 깨지면서 크고 작은 유리가 한 번에 영준의 몸 위로 쏟아졌었다. 날카로운 파편들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 얼굴과 목은 긁힌 정도의 작은 상처에 불과했지만 오른손과 팔은 조금 심했다. 꽤 큼직한 유리가 손바닥에 박히고 살을 찢어놓은 것이다.
응급실에서 치료받을 것을 권했지만 영준은 그냥 눈에 보이는 천으로 대강 묶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아무도 그를 말리거나 잡지 않았다. 치료를 권하던 의사마저도, 그가 자리를 뜨는 것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피가 흐르는 것을 확인한 영준은 칫, 하고 혀를 찬 다음 희미한 빛에 기대 김도연의 빌라로 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바람이 세게 불면서 큰 나뭇잎이 우르르 영준의 발치로 몰려왔다. 빌라 근처의 그 늙은 나무가 분명했다. 영준은 대강 손에 감은 천을 꽉 묶은 다음 무심하게 손을 털어냈다. 팔뚝을 따라 흐르던 피가 바닥에 흩어졌다. 영준은 성큼성큼 걸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발끝에 차였다. 영준은 한번 흘낏 본 다음 신경 쓰지 않았다. 노란 공이 건너편 차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영준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묻힐 때쯤 바퀴 근처에 머무르던 공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지만, 공은 마치 누군가 간지럼이라도 태우는 듯 움찔거렸다. 돌연 아무런 전조 없이 가로등의 불이 팍 하고 꺼졌다. 뜨거운 유리구 주변을 맴돌던 날벌레들은 이내 포기하고 다른 목표를 찾아 날아갔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무언가 작고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그것은 씩씩 거리는 호흡으로 영준이 있던 자리로 느리게 기어갔다. 그리고 그가 떨어트린 핏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도연의 집 앞에 도착한 영준은 문을 두들겼다.
“김도연 씨!”
텅 빈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지만 대답은 없었다. 문 사이로 들여다보자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인기척에 켜졌던 센서 등이 몇 분 후 다시 꺼졌다.
“김도연 씨!”
어두운 복도에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던 영준은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발로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야! 김도연, 나와!”
영준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안에 있는 것 다 아니까 열라고!”
쾅쾅쾅쾅.
“열어!”
영준은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 욱신거리는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몇 번의 발길질이 더 가해지자, 결국 문이 열렸다. 놀라고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문을 연 김도연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영준은 다짜고짜 그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에 허둥지둥 따라 들어온 김도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뭐, 뭡니까 당신! 미쳤어?”
영준은 대뜸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거실로 성큼 들어섰다. 드러눕는 한이 있어도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봐! 나가요!”
놀란 김도연이 외쳤지만 영준은 깨끗하게 무시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으니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못 나가요.”
영준은 등을 돌려 서서는 다리를 벌리고 섰다. 체격도 그렇고, 버틴다면 끌어내기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철컥,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혹시 나가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놀라 뒤를 돌아본 영준은 안심했다.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집 안에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노려보던 그는 곧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한번 젓고는 터벅터벅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안쪽의 작은 문을 열어 타월 하나를 꺼내 돌아왔다. 슥 타월을 내미는 그에게 영준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흘리고 있지 말고 닦아요.”
퉁명스러운 말에 영준은 그제야 손의 상처를 떠올렸다. 얼결에 타월을 받아든 영준은 싸고 있던 천을 풀어내고 그가 건네준 것으로 손을 감쌌다. 흰 타월에 순식간에 붉은 피가 스미기 시작했다. 계속 달려온 탓인지 피가 멈추지 않아 팔꿈치까지 온통 엉망이었다.
영준은 머쓱하게 수건을 받았다. 슬리퍼를 찾아 신은 김도연이 빈 박스를 하나 발로 걷어차서 이쪽으로 밀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쓰레기통인 것 같았다. 박스 안에 감고 있던 천 조각을 버리자 도연이 비닐봉지를 들고 와 박스를 통째로 싼 뒤 치웠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슬리퍼를 직직 끌면서 다시 부엌 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혼자 남은 영준은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도연이 자신의 페이스로 돌아가자 갑자기 흥분이 가라앉았다. 일단 집 안으로는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설득을 해야 했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을까 기대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뭐랄까, 정말 이상했다.
김도연의 집. 처음에는 무당집처럼 빨간 불에 이상한 부적이나 불상 같은 것이 있을 거라 상상했었고, 낮에 김도연을 본 후에는 평범하고 깔끔한 일반가정이겠거니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둘 다 멀었다. 뭐 하나 생각했던 것과 맞는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꽤 넓은 평의 빌라였지만 사람 사는 곳 같지가 않았다. 창가에는 모두 단단하게 비닐이 붙어 있었다. 벌레 하나 못 들어오게 테이핑이 된 창문은 창이라기보다는 벽 같았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이사를 가거나 온 것처럼 박스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박스가 아무렇게나 집 곳곳에 쌓여 개봉되지 않은 물건들이 태반이었다.
거실 한복판을 차지한 소파는 비닐도 벗겨지지 않은 채였다. 새로 샀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이 집에 붙어있었다는 쪽이 더 어울리는 소파다. 안락함이라고는 전혀 없이, 휑하기 그지없었다. 영준은 아저씨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시로 집을 옮기고 연락처가 바뀐다더니, 이 남자는 역마살이 끼었거나 혹은 이사중독이 분명했다.
영준은 소파 한쪽에 앉았다. 삐빅, 하고 비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때 부엌에서 한 손에 머그컵을 든 김도연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에게서 연하게 커피 향이 풍겨왔다. 혼자 마실 것만 만들어 온 것이 얄밉다기보다는 도리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영준이 앉아있는 것을 본 그는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래서?”
“네?”
얼결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김도연은 가볍게 한숨을 쉰 다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할 말 있다면서요?”
“……아.”
영준은 왼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 야밤에 남의 집에 무단 침입까지 할 정도로, 충분히 중요한 이야기여야 할 겁니다. 그리고 혹시 말이지만, 아까 오후의 일이라면 내가 이미…….”
선수 치려는 도연의 말에 영준은 이마를 만지던 손을 들어 내저었다.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던 도연은 그냥 어깨를 으쓱 하고는 커피를 마셨다.
영준은 몇 번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잠자코 기다리던 도연이 체중을 다른 발로 옮기느라 인기척을 냈다.
“먼저,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이렇게 무례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머리를 숙인 채 영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쪽한테 화풀이를 할 일이 아닌 건 아는데도…….”
“됐어.”
도연은 손을 저어 풀 죽은 사과를 끊어버렸다.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던 영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냉정한 얼굴을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저기, 난요 귀신이나 굿, 무당 이런 건 전혀 모릅니다. 그 비슷한 걸 본 적도 없고,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가위에 눌려 본 적도 없고, 분신사바 같은 걸 해본 적도 없는 데다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어둠을 무서워하거나 혼자 있다고 해서 불안해 한적도 없어요. ……그런데 지금, 다른 날이었다면 몰라도 오늘은.”
영준은 다친 손바닥을 슥 들어보였다.
“살면서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짐작도 안가니까 알아서 상상해봐요. 솔직히 지금 뭐가 뭔지, 뭘 믿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그나마 내가 한 가지 아는 건 당신이 뭔가 안다고, 당신과 내가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는 거예요. 난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고, 그러니까 정말 아니라고 할 생각이라면 내가 믿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할 거예요.”
말을 끊은 영준은 후웁, 하고 숨을 들이쉰 뒤 다시 이었다.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얼굴 볼 일 없이 살던 사람이 난데없이 친척이라고 나타난 것 염치없다고 나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금 집에 들어오려고 무리한 짓 한 것도 미안해요. 난, 그러니까 그냥 남이다 생각하더라도, 돈이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테니까.”
“저기 잠깐만. 아,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김도연이 답답하다는 듯 서둘러 말을 잘랐다.
“최영준.”
짧게 이름을 말한 영준은 짧은 머리카락을 쓸었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작은 유리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음, 그래요. 최영준 씨.”
그는 반쯤 마신 커피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연한 색의 면바지가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은데…….”
작은 박스를 하나 발로 끌어온 김도연이 영준의 앞에 앉았다.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 그는 눈에 띄게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알았어요.”
“난 당신이 기범이라는 사람을 고쳤다고 들었어요.”
“기, 누구요?”
“여수 아저씨 댁에 머무를 때, 산에서 다쳐 내려온 사람, 당신이 고쳤다고 했다고요!”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 다리가, 그래 다리가 아팠다고 했는데 그걸 당신이 고쳤다던데, 아니라면 설명해 봐요!”
“난 그런 기억 없어요. 대체 언제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이봐요, 흥분하지 말고 앉아요.”
달래듯 말한 김도연은 영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낮에는 내가 좀 무례하게 대해서 죄송했습니다. 그동안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하도 시달려서 말이 함부로 나갔습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왔던 사람이 최영준 씨 한 명이 아니에요. 봐요.”
김도연은 두 손을 벌려 보였다.
“내가 무당처럼 보입니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무슨 퇴마사나 그런 사람처럼 보이냐구요. 그쪽 사정은 잘 모르지만, 도와줄 수 없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병원에 맡기세요. 다 미신입니다. 그 아저씨란 분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연락도 안 하고 평소 만나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요. 어렸을 때 한두 번 만난 게 다인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는 지쳤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이나 저 밖의 사람들하고 똑같다고요. 내가 정말 그런 능력이 있다면 왜 이러고 살겠어요? 아마 괜찮은 돈벌이가 될 게 뻔한데. 안 그렇습니까?”
영준의 어깨를 잡고 꾹 누르며 그는 다시 말했다. 손을 밀쳐낸 영준은 소파에 털썩 앉아 다치지 않은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아무렇게나 쓸었다.
“……그럼 당신 말은, 여수 아저씨가 했던 이야기들이 다.”
“오해입니다.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 유난히 상상력이 강했던 모양이죠. 시골 사람들 눈에 그게 어떻게 비췄을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그걸 믿고 있다니 정말 어지간한 사람들이라니까…….”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그는 정말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영준은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의 완벽하게 말끔한 포장에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커피 한잔 타줄 테니까 좀 진정하고 일단 앉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부엌으로 갔다. 물을 끓이고 잔을 준비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간간이 그는 뭐라고 큰소리로 말했는데, 주로 영준의 현재 상황에 대한 동정과 위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누군가 밖에서 벨을 눌렀다. 벨은 길게 한번, 짧게 두 번 더 울렸다. 부엌에서 들리던 말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소파에 앉아 혼란스러운 상념에 빠져있던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왠지 문을 열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부엌에 있는 남자보다 자신이 더 가까이에 있다거나, 이 늦은 밤에 온 사람이니만큼 몹시 중요한 용건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현관 손잡이를 막 잡았을 때였다.
“뭐하는 거야!”
부엌에서 뛰어나온 김도연이 날카롭게 외쳤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다급하게 다가온 그는 영준의 손을 밀어냈다.
“병신 같은 놈! 내 집엔 벨이 없어, 문이 부서져라 치고도 몰라?”
깜짝 놀란 영준의 가슴을 세게 떠민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뒤로 몇 발 물러난 영준은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없다고? 그때 전선만 남기고 뻥 뚫려있던 벽의 모습이 떠올랐다. 헉하고 숨을 들이쉰 영준은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
다시 벨이 울렸다. 김도연의 얼굴이 휙하고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저건……?”
“조용히 해!”
매섭게 쏘아붙인 김도연이 현관에서 영준을 끌어냈다. 거실로 올라온 그는 영준의 팔을 꽉 붙잡은 채로 낮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입 다물고 있어.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알았어?”
다짐하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위협적이라기보다 필사적이었다. 영준은 그 기세에 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벨이 다시 울렸다. 유난히 큰 소리였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영준은 머리끝이 비쭉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분명 옆집이나 다른 집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바로 문밖이었다.
몇 가지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대부분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을 가장한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누군가 뜯어낸 벨 부분의 전선을 연결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문득 통증에 시선을 내려 보니 김도연은 여전히 자신의 팔을 꽉 움켜쥔 채였다. 안 그래도 하얀 손가락 관절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자신이 매달리듯 영준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그는 굳은 얼굴로 문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영준은 어쩐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라면 이 정도의 일에 놀라거나 하지 않고 먼저 확인을 하겠지만…….
잡힌 팔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들었다. 참지 못하고 아, 하고 소리를 내자 얼어붙어 있던 김도연이 흠칫 손을 놓았다. 깜짝 놀란 눈으로 영준을 바라보는 그는 마치 여기 자신 말고 누군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영준에게서 시선을 뗀 그는 낮게 말했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간 그는 탐색하듯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양손을 문에 댄 김도연이 도어뷰에 눈을 가져갔다. 몇 번을 반복한 듯 익숙한 자세였다. 문득 영준은 자신이 처음 찾아왔을 때에도 저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때 밖을 살피던 김도연의 무릎이 갑자기 휘청 꺾였다.
“어!”
깜짝 놀란 영준이 미처 잡기도 전에 그는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마치 바닥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왜 이래, 이봐요!”
영준이 다가가 어깨를 잡자 그는 감전된 사람처럼 부르르 떨더니 손을 밀어냈다. 그러나 힘이 빠져 시늉에 불과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영준은 깜짝 놀랐다. 창백한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풀려있었다.
“괜찮아요? 어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영준은 신경질적으로 외치고는 잡은 어깨를 몇 번 흔들었다. 차게 질린 남자의 얼굴은 보통이 아니었다.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무서움이 몰려와 영준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대체 문밖에 뭐가 있는데 이러냐고!”
“……어떻게.”
“뭐?”
힘없이 미끄러진 손이 영준의 팔을 붙들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영준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되물었다.
“어떻게 여길…… 그럴 리가, 난…….”
넋이 나간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은 지나치게 웅얼거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커다랗게 뜬 눈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어린애처럼 몸을 떨던 그는 문에서 멀어지려는 듯 안쪽으로 향했다.
“어떻게……저게, 저……나는, 난. 아니야. 그럴 리가.”
“저거?”
답답해진 영준은 자신을 잡는 손을 뿌리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뭐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미쳐 돌아가는 밤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듯 더 놀랄 것도 없다 싶었다. 망설이지 않고 도어 뷰에 얼굴을 붙인 영준은 작은 유리알 너머 보이는 복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굴절되어 둥글게 보이는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든 아니든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낡은 복도와 계단뿐이었다. 문에서 얼굴을 뗀 영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김도연은 소파에 앉아있었다. 방금 전보다는 진정된 것 같았지만 빈말로도 침착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뭐라고 끝없이 중얼거리면서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벨이 울렸다. 좀 더 분명하고 큰 소리였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난 김도연이 소파 뒤로 몸을 피했다. 영준은 다시 문에 달라붙었다. 복도는 여전히 말끔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영준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문밖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그게 뭐든지 간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단지 자신에게 보이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보이는 것이라곤…….
“……복도가 보이잖아.”
영준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감전된 사람처럼 문에서 떨어진 영준은 잠시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 늦은 밤에 복도가 분명하게 보이다니. 움직이는 것이 없으면 켜지지 않는 센서 등이 아까부터 계속 켜져 있는 것이다.
벨이 다시 울렸다. 애써 보지 않아도 누구도 서 있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연속적으로 세 번 반복되었다.
영준은 뒷걸음질 쳐 거실로 올라섰다.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반대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이고 싶기도 했다. 갑자기 극심한 공포와 혐오감이 밀려와 몸을 감쌌다. 묵직하고 차가운 것이 목덜미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억제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인 채, 영준은 김도연을 찾아 거실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소파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만 발갛게 충혈된 그는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영준은 순간 심각하게 자신이 혹시 정신이상이나 무슨 악몽 같은 것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논리적인 의심이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고통이 느껴졌다. 현관에서의 씨름으로 감싸놓은 타올이 풀려있었다. 더구나 겨우 지혈된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그때 공포에 흐려졌던 김도연의 눈이 초점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는 뚫어져라 영준의 손을 바라보았다.
“너!”
갑자기 파란 입술에서 성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에 차 자신 안으로 숨던 어린아이는 돌연 격분한 남자가 되어 영준의 손을 틀어쥐었다.
“너! 너였구나!”
“뭐?”
“네가 끌고 온 거였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길을 혼자 찾아올 수 있을 리 없어! 널 따라온 게 분명해!”
이를 악 문 그는 독기 오른 얼굴로 영준을 노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
“머저리 같은 자식이 내 집으로 저걸 끌고 오다니!”
“그만 좀 해! 알아듣게 말하라고!”
영준이 마주 고함을 질렀다. 그 말에 반응하듯 벨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은 벨이나 초인종 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트럭이 문 앞에 서서 크락션을 끝없이 울리는 것처럼 귀가 아플 정도로 거대한 소음이었다. 김도연이 뭐라고 더 소리를 질렀지만 묻혀 들리지 않았다. 영준도 뭐라고 마주 악을 써댔다.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으니 상대에게 전해지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마주선 둘 사이로 가상의 소음이 퍼부어졌다.
영준은 참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 미칠 것 같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김도연이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작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는지 큰 등산용 가방은 꽉 차있었다. 꾸깃꾸깃 뭉친 돈을 주머니에 함부로 쑤셔 넣은 그는 망설임 없이 비닐을 뜯어낸 뒤 거실 끝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방범창 없이 뻥 뚫린 창문으로 어두운 밤하늘이 비췄다.
“뭐하는 거야? 여긴 삼 층이라고!”
“그럼 여기서 죽치고 있던가!”
냉랭하게 대답한 그는 창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밖의 뭔가를 잡고는 순식간에 창문을 넘어 나갔다.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추락이나 비명 소리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영준이 몸을 숙여 살펴보니 그는 벽에 난 빗물받이통 비슷한 것을 잡고 내려가고 있었다. 위험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영준은 문을 한 번 보고는 창으로 올라가 그가 했던 것처럼 가느다란 플라스틱 구명줄을 잡았다. 다시 저 소리가 시작된다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던 영준은 1/3을 남겨놓고 결국 뛰어내리고 말았다. 충격으로 다리가 저렸지만 멈춰 서 있을 여유는 없었다. 먼저 내려간 김도연은 벌써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영준은 빌라의 입구 쪽을 흘낏 본 다음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청색의 배낭이 신호등처럼 어둠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무릎이 아파왔지만 이대로 그를 놓치면 다시 마주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절거나 아플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영준이 김도연을 잡은 것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 건널목이 있는 차도에 이르러서였다.
“멈춰!”
배낭을 움켜잡은 영준은 그를 바닥에 밀어 넘어뜨렸다. 숨이 턱까지 차 헐떡이면서도 그는 영준을 떨어뜨리려 몸부림을 쳐댔다.
“그만 좀 하라고 이 자식아!”
주먹질을 해대는 김도연의 팔을 잡은 영준은 상대의 배낭을 빼서 그의 얼굴에 콱 눌러버렸다. 읍, 하고 외마디 신음을 지른 그는 다리를 몇 번 더 휘두르고는 결국 바닥에 대자로 쓰러지고 말았다. 영준은 그 옆에 앉아 그의 허리춤을 꽉 움켜쥔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인도로 지나가던 사람들 몇이 그들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늦은 시간이니 취객이나 싸움패로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영준은 도연의 배낭을 들어 자신의 등에 멨다. 쨍그랑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뒤를 본 영준은 어이없는 기분으로 배낭에서 떨어진 단도를 주워들었다. 날이 잘 선, 군용 나이프였다. 영준은 한쪽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기가 막혀 바라봤다.
“헉, 헉……. 어이, 김도연. 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고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색색 숨 쉬는 소리만 계속되었다. 영준은 배낭을 벗어 뒤집어 보았다. 등에 멘 채 손을 돌리면 바로 닿을 만한 위치에 칼집이 달려 있었다. 고정된 끈이 낡아 부드러웠다. 여러 번 사용되었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섬뜩해진 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드러난 팔 아래, 턱과 뺨만 조금 보였다. 선이 가늘었다. 주황색 불빛 아래 누운 그는 자신에 비하면 남자라기보다는 아직 소년 같았다.
흰 승용차 한 대가 그들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갑자기 김도연이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는 입을 약간 벌린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몸을 돌려 그들이 온 길을 응시했다. 가늘게 뜬 눈이 어둠 속을 샅샅이 훑듯이 스쳤다. 갑자기 소름이 돋은 영준은 덩달아 그를 따라 길을 살펴보았다. 어두운 인도는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자신이 뭘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게, 따라올 수도 있어?”
영준은 숨죽여 속삭였다. 김도연은 아무 대꾸도 없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한쪽 팔로 몸을 지탱해 일어난 뒤 영준의 품에서 배낭을 뺏어 들었다. 만만치 않은 무게로 잠시 비틀거렸지만,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영준은 서둘러 따라 일어났다. 잠시 들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저 배낭의 무게는 상당했다. 저걸 메고 아무렇지 않게 건물을 내려가고, 여기까지 쉬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다. 그가 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뜻이다.
영준은 자신들이 지나쳐온 아파트를 뒤돌아보았다. 높이 솟은 건물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괴물처럼 수십 개의 노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영준은 손바닥으로 팔을 문질렀다. 땀이 식어 체온이 떨어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김도연은 벌써 멀찌감치 멀어지고 있었다. 영준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는 거야?”
“…….”
도로는 직선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높은 돌벽이 그들이 걷는 인도의 한쪽 면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벽에 뚫린 구멍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 음료수병과 과자봉지가 끼워져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빗물 때문에 만들어놓은 구멍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어둠이 단순한 어둠으로 보이지 않게 된 지 이미 몇 시간째였다. 영준은 이를 악물고 김도연의 뒤를 따라 걸으며 다시 물었다.
“이제 거짓말은 안 통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만 아니야, 맞지?”
“…….”
“그건 귀신이었나? 내 동생을 저렇게 만든?”
빠르게 걷기만 하던 김도연이 걸음을 멈췄다. 몸을 돌려 영준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몹시 차가웠다.
“그만둬.”
잘라내듯 날카로운 어조였다.
“대답해줄 건 아무것도 없으니 나에게 묻지 마. 따라오지도 말고. 당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김도연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몇백 미터 전방에 환한 사거리가 보였다.
“보여? 저기에서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 집, 가족, 학교든 직장이든 상관없으니 돌아가라고.”
휙 몸을 돌린 그는 거의 달리듯 걸었다.
“잠깐, 돌아가라니? 무슨 소리야?”
“귀가 막혔나, 가라고. 못 알아들어?”
“하지만…….”
“꺼지라고!”
갑자기 멈춘 김도연이 몸을 휙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한 영준은 서둘러 옆의 가로수를 붙들었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 아까부터 발바닥이 찌르듯이 아파 오고 있었는데, 그를 놓치게 될까 두려워 살피지를 못했다. 집 안에서 서둘러 도망치느라 신발도 신지 못해, 영준은 양말 차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상대보다는 나았다. 그는 바지 아래로 맨발이었다.
“뒤에서 지껄이지 말고 입 닥치고 가란 말이야! 동생을 날더러 어쩌라고! 내가 누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 내 일만으로도 숨차게 괴로워, 네가 해놓은 것 좀 보라고!”
그는 두 손을 벌렸다.
“내가 왜 널 도와야 하는지 말해봐! 덕분에 죽을 뻔했으니 고마워서라도 해드려야 하나?”
“내가 해놓은 거라니?”
면전에 대고 비난을 듣자 영준도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건데?”
“뭘 했냐고? 네가 그놈을 끌고 왔잖아!”
“내가 뭘 끌……?”
영준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창가에 찍혔던 무수한 자국들이 눈앞을 스쳤다. 콘크리트에 녹아든 여름밤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자신의 주변에만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영준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거리가 꽤 멀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병신처럼 사방에 피를 질질 흘리고 다녔다는 소리다!”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리는 김도연의 팔을 영준이 잡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지혈된 상처 주변으로 검은 딱지가 앉아있었다. 오는 길 내내 피가 떨어진 것이 기억났다.
“……내 피를 따라왔다는 거야?”
이제야 알아 들었냐는 표정을 지어 보인 김도연이 그의 손을 떨쳐냈다.
“너하고 한가하게 지껄일 시간 없으니 그만 따라와. 조금이라도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말이지.”
입술이 조금 비틀렸다. 웃음이 되려다 만 표정을 지은 채 김도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영준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섰다. 찡그린 얼굴에 땀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왠지 몹시 추웠다. 분명히 들었는데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따라왔다고, 나를. 영준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무슨 설명이 있어야만 했다.
“나를 따라왔다면.”
김도연을 따라잡은 영준이 서둘러 말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왔다면 내 동생하고 관련된 일이겠지? 그럼 돌아가도 소용없는 것 아냐? 계속 따라올 것 아니냐고.”
흘낏 쳐다보는 김도연의 눈빛이 묘했다.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그는 영준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어떻게? 방금 죽을뻔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날 찾아온 거였으니까. 너하고 관련된 게 아니라”
김도연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영준에게 말했다.
“택시 잡아.”
“뭐?”
“택시, 잡으라고!”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반문하려던 영준은 김도연의 낯빛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익숙한 공포였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저 앞의 길이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인도의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영준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키가 큰 남자였다. 낮지만 구두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위화감이 들었다.
“천천히……뒤로 물러나. 그리고 제발 좀 시키는 대로 택시를 잡아!”
뒷걸음질 치던 김도연이 낮게 쏘아붙였다. 영준은 시키는 데로 차도로 나섰다. 일단 차가 있나 살폈지만 도로에는 개인 자가용만 다니고 있었다. 택시나 버스를 잡으려면 사거리까지 가야 했다. 멀지는 않았지만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 빈 차 표시가 보이는 택시가 없는지 살피며 영준은 남자를 다시 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상당히 느리게 걷는 것 같은데 거리가 쉽게 좁혀졌다. 보폭이 넓은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키가 정말 컸다. 그가 입고 있는 롱코트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 한여름에 코트…….
영준은 티셔츠로 다친 손을 감싸 안았다. 이제야 그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멀리서 조그만 빨간 불이 켜진 차가 커브를 돌아왔다. 팔을 뻗어 흔들자 택시가 이쪽을 눈치채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뒷좌석 문을 열자마자 김도연이 들어가라고 밀어댔다. 영준은 비켜서서 그를 먼저 타게 했다. 양보하려던 것 보다는 길 저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차 문을 잡고 서 있는 영준의 허리춤을 잡아챈 김도연이 그를 확 잡아당겼다.
“뭘 멍하니 섰어?”
팔을 뻗어 문을 닫은 김도연이 영준의 머리를 콱 눌렀다.
“숙여.”
택시가 천천히 출발했다. 영준은 위에서 누르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택시가 빠르게 코트의 남자 옆을 스쳐 지나갔다. 폭염이 계속된 한여름에 중절모에 목깃까지 바짝 세운 채 입은 롱코트라니, 영준은 입안에 침을 바짝 마르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단 몇 초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고 두꺼운 코트 아래 거대한 구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규칙한 걸음걸이, 그림자는 불빛과는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의 고개가 택시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김도연의 손이 영준의 뒷덜미를 단단히 잡고 바닥으로 와락 찍어 눌렀다. 차가 속력을 높여 그의 옆을 지나 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뒷모습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눈이 마주칠 뻔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사거리의 신호등에 걸린 택시가 서서히 멈춰 섰다.
“저게 뭐야?”
숨이 막혔다. 도연은 누르던 손을 치우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앉았다.
“어디로 갑니까?”
느긋하게 말한 기사가 백미러로 눈웃음을 날렸다. 영준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옆을 보니 그 역시 뭐라 마땅한 대답이 없는 눈치였다. 그리고 보면 자신들이 도망친 곳이 그의 집이었다. 주저하는 것을 보면 갈만한 곳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영준은 일단 자신의 집 주소를 불렀다.
“우이동으로 가주세요.”
신호가 바뀌면서 차가 왼쪽으로 돌았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 갈 곳도 없잖아.”
시선을 느낀 영준은 변명하듯 말을 뱉고 등을 기대 푹 앉았다. 혼잡한 지하철 주변의 네온사인이 유리에 아른거렸다. 김도연은 배낭을 꽉 끌어안은 채 스치는 가로등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앉은 것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어디쯤에서 내려달라거나 차를 세우라고 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발한 지 십 분쯤 지났을 때 이런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집이 어떻게 생겼지?”
“그냥 평범한 주택인데, 단층의.”
“근처에 골목은 많아?”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적은 편도 아니지. 작은 사거리 골목의 한쪽에 있어.”
“나무는?”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영준은 순순히 대답했다.
“마당에 대추나무가 하나 있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사십 분 정도를 달린 차가 익숙한 거리로 들어섰다. 내내 불편한 자리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영준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가 듣고 있는 자리에서 귀신이니 괴물이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차가 주유소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지갑을 확인한 영준이 돈을 꺼내는 동안 김도연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차가 떠난 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동네라 벌써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은 후였다. 열린 지 얼마 안 된 작은 과일 가게 하나만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붉은 조명 아래 몇 개의 초라한 과일들이 바구니에 담겨진 채 놓여 있었다.
소영이 아프기 전에는 자주 들렀던 가게였다. 싸기만 할 뿐 팍팍하고 물기 없는 사과를 사서 둘이 앉아 깎아서 먹어치우곤 했다. 사거리의 끝에는 붉은 십자가가 켜진 교회가 있었다. 무슨 개척교회라고 들었는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준은 뒷주머니에 대강 지갑을 넣은 뒤 입 주변을 손으로 슥 문질렀다.
“이쪽으로…….”
골목을 따라 올라가 집 앞에 선 영준은 열쇠를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김도연은 그동안 가만히 서서 집을 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어깨끈을 잡은 채 그는 찬찬히 오래된 지붕과 벗겨지기 시작한 벽을 따라 시선을 이동했다.
영준은 괜히 머쓱해졌다. 전단지가 잔뜩 붙은 군청색 대문은 한동안 손보지 못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온갖 음식집 전단지에 인터넷선 관련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잡히는 대로 뜯어내 구겨 버린 후에 문을 열었다.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를 본 김도연이 작게 탄성을 질렀다. 잡초가 무성한 뜰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엉망이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한쪽에 선 나무는 줄기가 굵고 잎이 무성한, 서울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잘 생긴 나무였다. 오래전에 어머니가 알던 절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영준과 엇비슷한 나이였다. 예전에는 매년 대추가 가지가 휠 정도로 열리곤 했었는데, 요즘은 전만 못했다.
불을 꺼놓고 나가 집 안은 온통 어두웠다. 영준은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마다 다니며 불을 켰다. 짙은 색의 나무마루와 안방, 미닫이문으로 된 부엌까지,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영준은 창문을 열고, 닫힌 문마다 모두 열어두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동생이 문이 닫혀있으면 안쪽 방에 두 분이 계시는 것만 같다고 운 뒤로 생긴 습관이었다.
단 네 사람이 살던 집인데도 별로 조용한 기억이 없어 아직도 귀가 후의 이런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고요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부엌의 불을 켠 영준은 안에서 작은 상을 꺼내왔다. 냉장고를 열어 보리차를 따라온 영준은 서 있는 김도연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됐어.”
배낭을 한쪽에 내려놓은 김도연이 상 앞에 앉았다. 영준은 맞은편에 앉았다. 선풍기가 한쪽에 있었지만 틀 필요가 없었다. 주위 온도와는 별개로 몸이 차갑게 식어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전혀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았다. 조금 전의 일을 소화하고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여유가 필요했다.
영준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속되어온 긴장과 이완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추운 곳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따뜻한 장소에 들어왔을 때처럼, 오한이 든 기분이었다. 영준은 다치지 않은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풀었다. 손바닥이 차갑고 축축했다. 그리고 조금 떨리고 있었다.
김도연은 창에서 보이는 나무를 홀린 듯 관찰하고 있었다. 영준의 집은 한쪽 벽이 넓은 창으로 되어 있어 밖이 훤히 보였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원에 핀 꽃이나 열매를 구경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손질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했다. 밤벌레들이 풀 속에서 여러 가지 소리로 울었다. 어둠이 베란다 근처까지 짙었다. 한참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컵 표면에 생긴 물방울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저기…….”
영준은 가볍게 기침을 한 다음 심호흡을 깊게 했다.
“다친 손, 치료해야 하는 것 아냐?”
갑자기 김도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툭 던지듯 말했다.
“어? 음, 지금은 괜찮은데.”
워낙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저리고 아리한 느낌만 들 뿐이었다.
“내버려두면 썩거나 파상풍에 걸릴지도 몰라.”
“그렇긴 하지.”
영준은 멍하니 대답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좀 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말인데.”
하고 영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분명 뭔가 잘못 보거나 착각한 건 아니었어. 맞지?”
“……그래. 어차피 더 이상 우겨봐야 믿지도 않겠지.”
“그 집에서부터, 길에서 만난 것들 모두, 귀신이란 거지.”
“말하자면.”
“그럼 처음부터 뭐 때문에 거짓말을 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정말 듣고 싶은 걸 물어.”
김도연은 마치 처음 남의 집 마당을 보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날카로운 대답에 영준은 두서없이 튀어나오려는 질문들을 겨우 억누르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묻는다면 대답해주겠다는 거니 됐다.
영준은 다친 손을 천천히 폈다 쥐며 곰곰이 따져보았다. 병원, 동생의 병, 이상한 증세와 창가에 나타난 형상들. 김도연과 그의 집에서 들었던 괴상한 사건. 그는 진짜였고 지금은 자신의 집에 와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지만 자신은 그의 집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다. 영준은 그 부분에 대해 지금 사과를 해야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내가 귀신을 끌고 와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게 뭐였지? 어디서부터 뭘 말해야 할까?
“아까 그건 뭐였어? 벨 소리며, 뭐였길래 날 따라왔다는 거지? 내 동생하고 관련 있는 건가?”
“아니.”
짧게 대답한 김도연은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내 문제였어. 목적도 나였고. 방법이 너였을 뿐이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문제다?”
“그래.”
영준은 마당과 열린 창문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따라왔다면, 다시 쫒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귀신에게 거리나 시간이 상관이 있던가?
“여기에도 올까?”
“여기는 괜찮아.”
“그걸 어떻게 알아?”
“놈은 꽤 느리거든. 그리고 여긴 골목이 많고,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곳은 찾아오기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저 나무.”
김도연은 창밖의 대추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큰 나무가 있는 집은 좋은 집이야. 바보처럼 흔적을 남겨주지 않는 이상 안전하지.”
흔적이라면 자신의 피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스럽게 발을 확인하자 발갛게 부어있기는 했지만 피는 흘리지 않았다. 김도연을 보자 그 역시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보면 확실히 그가 살던 집은 보통사람도 찾기 힘든 복잡한 곳이었다. 죄책감과 호기심과 두려움, 불안감이 차례로 영준의 마음을 스쳤다.
“귀신도 그런 게 통하는 줄은 처음 알았군…….”
얼어붙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도연이 불쑥 말했다.
“나는 보는 것 말고는 아무 능력이 없어. 있다면 저런 놈부터 먼저 처리했겠지. 두 번이나 겪었으니 알겠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에 대한 답은 이거야. 당신의 동생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난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만한 힘은 없어.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이나 치고 있진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영준은 초조하게 다시 말했다.
“당신이 고쳤다는 그 남자는?”
“우연이었을 뿐이야.”
자르듯 말한 김도연은 영준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봐, 어렸을 때라 확실히 기억나는 건 아니야. 그냥 무슨 소리가 나서 방에 들어갔더니 웬 남자가 누워있었어. 한쪽 다리에 뱀이 감겨있었어. 이만한, 크고 흰 뱀이.”
김도연은 양손을 넓게 벌렸다.
“양다리에 칭칭 감겨있는데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것 같지는 않고. 나뭇가지로 치우려고 했는데 잘 잡히지가 않는 뱀이었어. 동네 노파가 뭐하는 거냐고 혼을 내려 하기에 뱀이 있다고 했더니, 그런 건 없다는 거야. 분명히 보인다고 했더니 노파가 백반가루를 가져다 물에 타서 먹였어. 그뿐이야”
“그럼 그렇게만 해줘.”
“뭐?”
영준은 다급하게 말했다.
“병원에 가서 동생을 그냥 한번 보기만 해줘. 뭐가 보인다면 그게 뭔지 말만 해주면 돼.”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천만에!”
영준은 그의 달래는 말투에 발끈해 언성을 높였다.
“귀신이든 뭐든 당신은 그게 보인다는 거잖아? 우연이었든 아니었든 한번은 누군가를 고쳤었고! 적어도 실마리는 줄 수 있잖아. 지금 내 동생은 병원에서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말라가는데 그냥 한번 봐주기만 하는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무당이든 점쟁이든!”
“그럼 당신은 왜 그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지?”
“…….”
“그냥 가서 한 번만 봐줘, 제발.”
“싫어.”
“왜!”
“그럼 네가 대답해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하나뿐인 동생이야! 아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상관없다 이거야?”
“그래.”
도연은 방어적으로 말했다.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말 그대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영준은 말문이 막혀 입을 딱 벌렸다.
“말했듯이 난 퇴마니 하는 것 몰라. 관심도 없을뿐더러, 저 밖에서 본 것들은 그나마 이쪽에서 피하면 되는 것들이야. 내가 왜 위험을 감수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널 돕기 위해 나서야 하는 거지?”
“대가가 필요하면 줄게!”
“뭐, 돈?”
“그래. 얼마가 필요한데?”
“…….”
도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가면 같은 무표정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돈 같은 건 충분히 있어. 여기는 어쩔 수 없어서 온 것뿐이야. 아침이 되면 나가겠어.”
열대야의 찌는 듯한 열기에도 불구하고, 영준은 뼛속까지 얼어붙는 분노와 추위를 느꼈다. 엎드려 빌고 싶은 마음과, 당장에 쓰러트려 패든지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 번갈아 솟구친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답이 나오지 않는 복잡한 문제 같았다.
영준은 초조하게 바지를 쥐어뜯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잡은 것이 어쩌면 모든 악몽 같은 일의 실마리인지도 모른다. 부인하고 회피하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계속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 숨기려는 게 남아있었다. 몇 번의 회유와 애원, 말다툼이 되풀이되었지만 그는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았다.
새벽 늦게까지 끈질기게 이어진 설득에 그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잠이 들었다. 기가 막히고 서글퍼진 영준은 그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침이 까마득히 옛날일 같았다. 병원에 혼자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했다. 생전 처음 듣는 병명을 말하던 의사도 설명 못 할 광경 앞에 질려 있었다. 그런 일이 치료가 가능할까?
영준은 막막한 좌절감에 그를 다시 한 번 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가져다준 이불을 몸에 말듯이 덮은 그는 배낭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이미 잠든 것인지, 혹은 잠든 척하는 것인지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단호한 등이 고르게 숨을 쉰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붙잡고 더 설득해 보자. 안되면 빌자. 빌어서 안 되면……. 영준은 무릎 위에 이마를 댄 채 머릿속을 텅 비우려고 노력했다. 조용해지니 자꾸만 눈앞에 무서운 광경이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실제보다 더 생생하고 변형된 환상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영준은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어디에든 기도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종교가 없었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그 무엇도 믿기에는 먼 상대일 뿐이었다. 영준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보고 있다면 제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영준은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창밖의 조용함에 귀 기울였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 *
도연은 어둠 속에 혼자 떨어져 있었다. 익숙한 공포가 몰려와 사지를 마비시키듯 찍어 누른다.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어 아무것이나 잡히는 데로 움켜쥐었다. 까슬까슬한 얇은 천이 잡힌다. 생생한 감촉, 이것은 꿈이 아니다.
도연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빛이 눈으로 쏟아져 내렸다. 환하게 켜진 형광등의 강렬함이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얼마나 오래 잠이 들었던 것일까. 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4시 반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어딘가 함부로 던져진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익숙하게 손을 들어 젖어있는 눈가를 훔쳤다. 가끔은 두려움도 일상이 된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스스로 다독이며 긴장이 풀리길 기다렸다. 낯선 집에서 깨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몸을 돌려 보니 남자는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세워 앉은 무릎 위에 팔과 머리를 기댄 채였다. 반듯한 손과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도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다친 손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깨어나면 통증과 염증으로 고생하게 될 것이다.
바보 같으니. 도연은 조그맣게 혀를 찼다. 그리고 살그머니 일어나 배낭을 멨다.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을 지나 현관에 다다른 도연은, 신발장을 열어 손에 잡히는 데로 낡은 운동화를 꺼냈다. 치수가 컸지만 못 신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구겨 신었는지 운동화는 마치 천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도연의 배낭이 뭔가를 쳤다. 달그락, 하는 소리가 어둠 속을 크게 울렸다.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남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도연은 뭘 건드린 건지 확인했다. 신발장 위에 놓인 작은 액자였다. 쓰러진 액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도연은 그것을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가족사진이 보였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남자와 여동생으로 보이는 소녀, 부모가 함께 활짝 웃고 있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의 사진 같았다. 소년의 얼굴은 어딘가 수줍고, 또 어색해 보였다. 교복이란 것은 왜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 그리운 기억에 가슴이 저려왔다.
“…….”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그러나 사진에만 남아있는 추억이었다. 신발장 위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고지서와 세금영수증이 잔뜩 쌓여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살림살이, 곳곳에 쌓인 먼지, 집 전체에 어색하고 냉랭한 공기가 감돌았다. 남은 가족은 둘 뿐이리라.
곧 날이 밝아올 것이다. 그런데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모두 활짝 웃고 있었다. 앞으로도 아무 근심도 없고, 불행도 없을 것처럼. 밀려온 그리움은 외면하고 싶은 죄책감을 함께 가져왔다.
그 순간 누군가 도연의 등을 살짝 건드렸다. 싸늘한 손이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놓는다. 그 감촉에 도연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움찔 떨린 등을 다독이듯 다정하게 두드린 손이 천천히 멀어졌다.
도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자신에게 닿았던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전달한 의지. 지금은 텅 비어 있는 집에 온화한 공기를 부여했을 사람들. 도연은 낡은 집 어딘가 남겨진 그들의 기억을 쫒아 보았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애틋한 애정과 걱정뿐이었다. 이토록 긍정적인 감정을 죽은 이에게서 느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선한 이들은 언제나 빨리 사라진다. 남는 것들은 질기고 독한 이들뿐이다. 도연은 천국도 지옥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악한 이들만 남는 이 장소가 바로 지옥이 아닐까? 빛, 따스함, 묻고 싶어도 대꾸조차 하지 않고 사라지는 이들.
멀리서 신문 던지는 소리가 났다. 도연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잠시 뒤, 도연은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는 열었던 문을 도로 닫았다. 그리고 신발을 벗고 쿵쿵 소리를 내며 마루로 돌아왔다. 남자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둔한 새끼, 억울한 마음에 욕설을 중얼거렸다.
“젠장…….”
단 하루만, 그리고 단 한 번만 시도해보는 것이다. 그놈도 그렇게 쉽게 찾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거기다 이 집은 꽤 안전한 편이다. 새로운 거처를 찾을 때까지 헤매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어차피 날이 밝으려면 멀었다. 어둠 속을 나설 용기는 아직 나지 않는다. 그리고……. 도연은 아픈 기억을 억지로 밀어내며 눈을 감았다.
* * *
어디선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었다 닫고, 서랍을 열어 뭔가를 뒤적이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 영준은 이불에 코를 파묻었다. 동생이 또 군것질거리를 찾는 모양이었다. 한 번씩 마트에 가서 과자를 잔뜩 사 와서는 다람쥐처럼 온 집안 곳곳에 숨겨놓곤 한다. 저렇게 생각 날 때마다 뒤져서 나오면 득 본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나.
조용히 좀 다니지, 계집애가 왜 저렇게 퉁탕거려. 영준은 이불을 머리 위로 확 잡아끌었다. 차가운 마루의 감촉이 뺨에 시원하게 달라붙었다.
“야.”
바삭바삭하고 머리 쪽으로 다가온 슬리퍼가 영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일어나.”
영준은 투덜거리며 돌아누웠다.
“황당한 새끼네…….”
기가 막힌 듯 중얼거리는 욕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민 영준의 앞에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동생의 것이라고 하기엔 좀 굵다. 눈을 들어보니 웬 남자가 서 있다.
“집에 밥이 없어.”
“……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영준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아직 멍했다. 얼마나 잔 건지, 사방은 벌써 훤했다. 어젯밤에 그에게 덮어주었던 이불을 자신이 덮고 있다. 영준은 눈을 비비며 마루를 휘둘러보았다. 어제 마시다 만 물과 컵, 한쪽에 입구가 살짝 열린 채 널브러진 그의 배낭,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현실이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집에 있는 게 어떻게 과자 몇 개가 다야?”
과자 두 봉지를 들고 온 도연이 바닥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익숙하게 봉지를 쫙 뜯고는 한 번에 여러 개씩 집어먹었다.
“……쌀은 있어.”
“배고파.”
도연은 손에 묻은 과자 가루를 탁탁 털어냈다. 영준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세게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세수 좀…….”
찬물을 받아놓고 다섯 번쯤 물을 끼얹고 나서야 잠에서 완전히 깰 수 있었다.
“꿈이 아니었어.”
거울 속의 얼굴에는 눈 밑이 퀭하게 그늘져 있었다.
욕실 밖으로 나와 보니 그는 완전히 자기 집처럼 앉아서 과자를 주워 먹고 있었다. 솔직히 날이 밝으면 당장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며칠이 넘게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있었는데 웬일로 이렇게 폭면을 취했는지, 행여 자신이 잠든 사이에 그가 가버렸다면 어쩔뻔 했나 뒤늦게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옷까지 갈아입은 그는 당장 밥부터 해내라고 난리였다.
“물 줘.”
뒤를 향해 손을 내민 것이 당당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자세였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지만 영준은 순순히 일어나 컵에 보리차를 따라주었다. 냉장고 안은 정말 텅 비어 있었다. 동생이 입원하고 나서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집에서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안 난다.
영준은 도연의 앞에 앉아 자신의 컵에도 물을 따라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나무 마루는 서늘했다. 흰색 박스 티와 반바지를 입은 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과자 먹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못 보던 옷인 걸 보면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영준은 조금 열려있는 그의 배낭을 힐끗 쳐다보았다. 아마 가지고 나온 물건 중 하나일 것이다.
“병원은 몇 시에 갈 건데?”
“1시에는 도착할 생각인데.”
“따라가 주리란 기대는 하지 마.”
“……?”
“병원에는 너 혼자 가는 거야. 물어볼 게 많으니까 미리 적어.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와 달랐던 건 뭐였는지. 하나도 빼지 않고 빠짐없이 알아와.”
“그럼……!”
놀란 영준이 얼른 무릎을 뚫고 바짝 다가앉았다. 도연은 픽 웃고는 빈 과자 봉지를 차곡차곡 접어 영준에게 쥐여주며 말했다.
“기대는 하지 말라고. 아무 소용없을 수도 있으니까.”
영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쁨에 거의 끌어안으려 하는 그를 밀어내며 도연은 질색을 했다.
“먼저 밥부터 먹자. 한 손으로도 할 수 있지?”
“그, 그래!”
벌떡 일어난 영준이 부엌으로 달려갔다. 물을 붓고, 쌀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저 손으로 뭐 하려면 힘들 텐데. 가만히 있기만 해도 통증이 상당할 것이다. 알게 뭐야. 도연은 마루에 남아 흘린 과자를 집어 씹으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 도연은 영준에게 동생에게 있던 일이나 했던 말들을 세세하게 물었다. 증세가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뭘 먹고 어디서 자고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대답해야 했다. 영준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렸다. 도연은 수첩에 몇 가지 질문을 적으며 말했다.
“어떤 일도 그냥은 일어나지 않아. 보기에는 난데없이 마주친 사고처럼 보이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름대로 몇 개의 순서가 있는 거야. 처음에 동생이 유난히 물을 많이 마시게 됐다고 했지? 그 전에 학교 여행이 있었고. 여행 가기 전에는 무슨 일 없었어?”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내내 학교 잘 다녔고, 전날에는 음식이랑 준비해서 가방 싸고, 갈 장소 인터넷에서 찾아본다고 했었지. 근처에 부모님이 다니던 절이 있어서 거기도 가고 싶다고 했고…….”
“절 이름은?”
“잠깐만, 어디 적어 놨을 거야.”
도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MT 장소가 어디였는데?”
“한탄강이라고 했어.”
영준은 대충 약을 바른 손에 붕대를 감았다. 도연은 노트에 몇 가지를 더 적은 뒤 영준에게 건네주었다.
“아무래도 그 여행이 시작인 것 같으니까. 자세히 알아봐 줘. MT라고 했으니 술을 먹고 무슨 실수를 했거나 사고 같은 것도 있었을 수 있어.”
“역시 같이 가는 게 어때?”
“사소한 거라고 생각해도 그게 다 중요한 거야.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잊지 않게 다 적어.”
“보는 게 더 확실하잖아. 직접 가서 보고 물어보는 게…….”
“난 안가.”
도연은 이마를 손으로 꾹 눌렀다.
“거긴 네가 혼자 가는 쪽이 훨씬 나아. 나뿐 아니라 너한테도.”
병을 낫게 하고 치료하는 곳이 병원이라지만 그곳은 동시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또 고통스러워하는 곳이기도 했다. 도드라지는 것은 죽음이다.
영준은 더 말을 꺼내보려다 포기했다. 무슨 생각으로 협조해주는지는 모르지만 어제의 강경했던 태도를 생각해보면 비위를 맞추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다녀올게.”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던 영준은 운동화가 나와 있는 것에 잠깐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곧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운동화 끈을 묶은 영준이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서둘러 나갔다. 그리고 막 문이 닫히기 직전, 다시 들어왔다.
“깜박하고…… 도와줘서 고마워.”
부담스러울 만큼 곧은 시선에 도연은 자신도 모르게 어, 하고 대꾸해버렸다. 씩 웃은 영준이 몸을 돌려 나갔다. 반투명한 유리의 문이 쾅하고 닫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운동화 소리 끝에 대문이 닫히는 낮은 울림이 이어졌다.
혼자 남은 도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집안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일부러 쿵쿵거리며 마루로 돌아와서는 아직 펼쳐 있는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마당으로 나 있는 창에서 빛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바람이 부는지 대추나무 잎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마당의 무성한 잡초들도 크게 보기 싫진 않았다.
“……멍청하긴. 이대로 내가 가버리면 어쩌려고.”
도연은 털썩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 * *
버스 안은 사람들의 말소리로 웅성거렸다. 생각보다 거리는 한산했다. 아직 오전이라 냉방은 하지 않아 열어놓은 창문으로 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버스 안을 한 번씩 휩쓸고 지나갔다. 영준은 창밖의 스쳐 가는 풍경에 눈을 고정했다. 해가 비치는 거리는 환하고 분명해서, 어제의 악몽 같은 기억들은 다 흩어져버릴 꿈같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기분만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영준은 알고 있었다.
버스는 사거리를 지나 직선의 도로를 달렸다. 해가 정면에서 눈을 찔러왔다.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던 날도 이랬다. 수업 도중 혼자 학교를 나와 버스를 타고 가던 오후, 거리는 온통 한산했고 교복 차림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머리가 멍해 주변의 소리는 그저 술렁이고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마다 창가에 부딪힌 햇볕이 눈을 날카롭게 찔러댔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동생은 복도에 혼자 앉아 눈이 빠져라 울고 있었다.
영준은 창가에 이마를 기댔다. 감상에 젖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버스가 병원 앞 정류장에 가까워 왔다. 영준은 벨을 누르고 카드를 찍은 후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의 옆쪽으로 앉은 노인들이 뭐라고 키득키득 웃으며 가방에서 음식을 꺼내서 먹고 있었다. 아마도 종점에 있는 산으로 가는 모양인지 모두 등산복 차림이었다. 누군가 농담을 했는지 그들이 와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버스가 멈추자 펑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영준은 뜨거운 공기 속으로 내려 손으로 눈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의 옆으로 빨간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경사진 도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신호에 걸려 멈췄다.
길을 건너기 위해 도로 쪽으로 선 영준은 순간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섰다. 버스의 높은 창안으로, 방금 전까지 여러 명의 노인들 중 한 명이 앉아있는 자리에 빨간 옷의 아가씨가 앉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모자를 쓴 할머니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털썩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노인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흐려졌다. 그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가씨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영준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빠르게 흘렀다. 신호가 바뀌고, 여러 개의 차가 그의 앞을 지나가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오가기 시작할 때야 영준은 얼굴을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거리에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들 중 몇은 계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다. 영준은 가방에서 야구 모자를 꺼내 푹 눌러 썼다.
기분 탓일 것이다. 의식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도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영준은 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긴장으로 머릿속이 싹 걷히는 기분이었다.
* * *
꽃바구니와 과일을 든 사람들이 나른한 걸음으로 병원 대기실로 들어섰다. 영준은 면회신청을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자꾸만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 형아다.”
복도를 지나던 작은 발이 멈췄다. 작은 꼬마가 반갑다는 듯 영준을 향해 가녀린 인사를 던진다. 이제 여섯 살 남짓, 또래보다 훨씬 작고 여린 아이는 매끈하게 깎은 머리 위에 부드러운 비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머리를 민지 오래됐는지 푸른 빛 없이 부드러운 피부는 핏기없이 얇았다.
“형 왜 약속 안 지켜?”
대뜸 따지며 달려든 아이는 익숙하게 영준의 발에 매달려왔다. 병원에서 몇 번 만났던 꼬아 아이였다.
“신형이 너 왜 여기 있어.”
“엄마하고 놀러 가기로 했어.”
“놀러?”
영준은 얼른 대기실을 훑어 아이의 엄마를 찾았다. 그러나 그 마르고 날카로운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영준은 걱정스럽게 턱으로 내린 아이의 마스크를 올려 주었다.
“그래도 돼?”
“어, 엄마가 그러는데 나 암 아니래.”
비밀이라는 듯 소곤거리는 말에 영준은 놀랐다.
“정말? 의사가 그래?”
“응, 아니래. 그러니까 이제부터 다른 검사 해봐야 한대. 그 전에 놀러 나갔다 올 거야.”
다시 마스크를 내리며 반갑게 대답하던 아이는 검사란 말에 이내 풀이 죽었다.
“허리에 또 왕 주사 맞아야 한다? 그니까 형이 자주 안 놀러 오면 안 돼.”
“그래…….”
영준은 답삭 안겨오는 아이를 옆 의자에 올려 앉혔다.
“잘 어울리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영준이 선물로 준 하늘색 비니를 툭 건드리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소영의 일로 병원에서 밤샘을 하던 중, 히스테리를 일으킨 아픈 아이의 엄마가 함께 죽겠다며 소아암 병동에서 아이를 끌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난동을 피우는 엄마를 뜯어말리던 중 아이는 도망쳐 버렸다.
영준은 자신의 일만으로 머리가 꽉 차 아이를 찾아다니는 간호사들이 무슨 일로 난리가 났는지 몰랐었다. 그러다 소영의 병실로 돌아왔을 때, 침대 밑에 숨어있는 작은 발을 발견했다. 간호사를 부르려 했으나 아이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해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러고 있니?’
‘내가 자꾸만 아파서 엄마가 죽으려고 해요. 나 때문에, 내가 안 아프면 안 죽어요. 아빠도 내가 아파서 갔어요.’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로 피곤이 극에 달해 있었지만 차마 외면할 수 없이 바닥에 앉아 삼십 분 가량을 달래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모두가 잠든 어두운 병실 바닥에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누워, 잘 먹은 음식은 무엇이고 좋아하는 색은 무엇인지, 강아지는 키워봤는지 등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야 침대 밑에서 기어 나온 아이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간호사 손에 끌려 병동으로 돌아간 이후 가끔 친한 간호사를 통해 영준을 부르곤 했다. 그 후 아주 가끔, 영준은 아이를 만나러 갔었다. 온통 어린 아이들만 있는 그곳은 세상에 비극이란 비극은 모두 모아 놓은 것처럼 처연하고 슬픈 곳이었다.
“형도 같이 놀러 가면 안 돼?”
“오늘은 안 될 것 같네.”
“동생 때문에?”
“응.”
치근치근 들러붙은 아이가 영준의 손안에 자신의 작은 손을 끼워 넣었다. 정과 관심에 굶주린 아이, 아픈 아이의 병수발이라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다. 암이 아니라고는 해도 정말일지 확실치도 않은 상황에 면역력이 약한 아이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지 불안해졌다. 아이에게 다시 엄마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신형아!”
날카롭게 째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서류 뭉치와 작은 싸구려 분홍색 카디건을 든 여자가 몇 걸음 떨어져 서 있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다가와 아이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 아무하고나 말하고 그럼 안 된다고 했지?”
휘청거리며 의자에서 끌어내려진 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변했다.
“형인걸, 영준이 형은 괜찮아.”
“안 돼!”
여자는 영준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뭐가 붙었는지도 모를 사람을…….”
꺼림칙하다는 듯 말한 여자는 아이를 끌고 빠르게 걸어가 버렸다. 아마 어제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준은 병원에서 유명인사였다. 엄마 손에 끌려가면서도 아이는 울먹이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 뒷모습을 보던 영준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
아이의 등, 환자복에 시커먼 얼룩이 있었다. 아니 얼룩이라기보다는 커다란 먼지 덩어리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뭔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여전했다.
저게 도대체 뭘까, 영준은 손에 들고 있던 건강검진에 관한 안내서를 비틀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멀어졌다.
불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말 신형이에게 저런 것이 묻어 있다면 보호자나 주변 사람들이 내버려 뒀을 리 없다. 별일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쓰여 영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영준의 어깨를 누군가가 톡 건드렸다. 돌아보자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서 있었다. 왼쪽 뺨에 살색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어젯밤의 그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따라오라고 말했다. 복도를 걸으며 영준은 사람들이 자꾸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주치면 피하는 시선들이 여럿이었다. 대부분 간호사와 의사들, 그리고 낯이 익은 병실의 사람들이었다. 영준은 모자를 깊게 썼다.
소영의 병실은 전에 있던 곳과는 달랐다. 밤사이에 옮긴 것이다. 작은 병실로, 환자는 소영이 하나뿐이었다. 의사는 묵묵히 차트만 넘겨보며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제 상의한 데로 동생 분은 1016호실로 입원실을 옮겼습니다. 현재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면회가 가능합니다만, 너무 무리를 시키거나 하지는 마세요. 혈압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기타 사항은 아실 테니 더 말씀드릴 것은 없습니다만…….”
그는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문 앞에 난 작은 창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준은 의사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생하고 할 말이 있는데, 단둘이서만 면회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환자분의 안전을 위해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해놓았습니다. 면회가 끝나면 너스콜을 누르시면 됩니다.”
그는 뭔가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미진한 얼굴로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영준의 손을 가리켰다.
“면회가 끝나면 치료부터 받으세요. 원래는 어제 했어야 했는데…….”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괜찮아요.”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희미하게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인 뒤 내려갔다.
병실은 긴 직사각형의 2인실이었다. 깨끗하고 아늑한 느낌이었지만 어김없이 이곳에서도 병원 특유의 냄새가 짙었다. 소영은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영준은 침대 밑에 있는 둥근 접이식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리고 의사가 말한 안전을 위한 조치가 무엇인지 보았다. 동생의 팔에는 흰색의 두꺼운 천 같은 것이 감겨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팔목과 침대를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았다. 구속구였다. 영준은 침통한 기분으로 마르고, 유난히 작아 보이는 동생을 깨웠다.
“소영아. 자니?”
“음…….”
그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묶인 팔 때문에 쉽지 않았다. 꼭 물에서 건져 올린 지 오래된 생선처럼, 힘없이 어깨와 가슴만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오빠?”
힘없이 깜박이던 눈이 천천히 초점을 맞춰갔다. 콱 잠겨 쇳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분명한 발음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의식이 분명한 모양이었다.
“응. 좀 괜찮아?”
“……그냥 그래.”
얼굴을 찡그린 소영이 상체를 일으키려고 용을 썼다. 영준은 얼른 일어나 베개를 가져다 등 뒤에 대주었다. 등을 세워 앉고 싶어 했지만 기운이 없어 자꾸 주르륵 내려왔다. 살이 많이 빠져 어깨와 가슴이 마르고 단단했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고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몇 번 힘을 주어 당겨보았다.
“……자해를 했대. 오빠도 봤어?”
“아니. 난 잠깐 나갔을 때였나 봐.”
“응. 지금은 괜찮은데 풀어주질 않네.”
“기억 안 나니?”
“응. 전혀.”
“그래, 일어날 수 있겠어?”
“해볼게.”
소영은 기운이 없는지 고개를 젖혀 기댔다. 턱이 날카롭게 드러났다. 가는 목과 뺨이 마치 약한 새 같아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마치 갓 태어나서 아직 혈색이 없는 새끼 새 같았다. 온통 터 피가 비치는 피부가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해서 더 했다.
“목말라…….”
그녀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녀도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다. 지속되는 지독한 갈증. 물을 마실수록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진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동생이 이렇게 정신이 똑바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영준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넘겼다. 도연이 꼼꼼하게 적어준 질문들이 번호를 붙여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대답할 수 있겠어?"
소영은 영준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눈만 천천히 감았다 떴다.
“소영아?”
“물어봐.”
“너, 여행 가서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 좀 하자.”
“……이미 몇 번이나 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
“다시 한 번만 해보자, 응? 천천히 해보자.”
영준은 도연이 적어준 질문을 짚으며 물었다.
“거기에서 뭐 처음 보는 게 있었어? 낯선 것, 무슨 용도인지 모르는 그런 거.”
소영의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퀭한 눈 주변이 바짝 말라 나이에 맞지 않은 깊은 주름이 길게 나 있었다.
“…….”
“뭐든지, 뭐든지 좀 이상한 거 없었어?”
“…….”
영준은 다음 질문을 짚었다.
“그럼 이상한 사람은 본 적 없어?”
동생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힘든 것 같았다. 당장 어제에 있던 일도 흐릿한 상황이니 거진 한 달 전의 일을 세세하게 대답하는 것은 무리일지 몰랐다. 그러나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영준은 잘 생각해보라고 동생을 격려하며 도연이 적어준 질문들을 천천히 해내갔다. 본 것, 들은 것, 간 것, 만진 것, 한 이야기와 그들이 들렀던 장소 모두에 대해서 물었다. 정말 귀 기울여 듣는지 아닌지 소영은 계속 부인하기만 했다. 그러나 장소가 MT마지막 날 물놀이로 갔던 계곡으로 바뀌자 반응이 달라졌다.
“……좋았어.”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데?”
“강이 참 이뻤어. 색도 곱고, 주변도 밝았어.”
내내 멍한 표정이던 그녀의 눈가가 눈에 띄게 생기를 찾았다.
“사람들도 참 좋아했어. 낚시를 했는데, 날이 덥다고 누가 수영을 했어.”
“……그리고?”
영준은 도연이 말했던 ‘이거다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물놀이를 하다가 다들 저녁을 먹는다고 했어.”
“넌?”
“난…….”
소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긴장이 풀려 느슨해진 눈매가 먼 곳을 보듯 그늘이 졌다.
“해가 지는 게 너무 이뻐서, 조금 더 보고 싶었어. 혼자 강을 따라서 걸었어.”
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 힘들게 말했다. 점점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떨려왔다. 영준은 쥐고 있던 펜을 놓고 소영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무슨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뭘 봤지?”
“친구들.”
소영은 멍하니 말하고는 침대 쪽 벽에 머리를 기대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누웠다. 숨이 색색 거칠었다. 영준은 동생의 손을 꽉 잡고 다시 재촉했다.
“어떤 친구들?”
“……아직 어린 애들,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어. 모래가 많은 곳에서…….”
“그 애들하고 뭘 했어?”
“놀았어, 같이.”
“뭘 하고?”
“다리를 건넜어. 같이 술래잡기……. ”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소영아, 야 조금만 더 말해봐!”
“물속에서…… 사람들이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점점 잦아들던 목소리는 그것을 끝으로 그녀는 갑자기 툭 떨어지듯 잠이 들었다. 가는 목이 시든 꽃처럼 꺾였다. 영준은 놀라 벌떡 일어나 동생의 몸을 안아 들어 자리에 눕혔다.
“소영아?”
그녀는 기절한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뺨을 가볍게 때려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몇 번 흔들고 불러본 영준은 단념하고 의자에 앉았다. 절망스러운 기분이 몰려왔다. 이런 것들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잠들고 나면 몇 시간이고 깨어날 줄을 모른다.
영준은 일단 노트를 넘겨 소영이 말한 것을 꼼꼼하게 적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단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면에 적고 보니 너무나 적었다. 산에 있던 숙소, 절에 갔었고, 강에서 낚시, 수영을 하고 아이들을 보고……. 아무것도 조합할 수 없는 단어들뿐이었다. 뭔가 거대한 퍼즐이 있는데,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그중 단 두세 개의 조각일 뿐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영준은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손에 잡을 수 있다면, 그래서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병실을 나온 것은 한 시간 사십 분 정도 지나서였다. 계속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돌아가 도연과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녀 혼자 덩그라니 누워있는 병실은 유난히 춥게 느껴졌다. 불신은 아니었지만 불안했다. 간호사들에게 잘 보이려 열심히 간식거리를 사다 날랐었는데, 층이 바뀌니 간호사들도 모두 바뀌어 버렸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 이런 건가. 영준은 조금 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소영의 병실을 지나 몇 걸음을 더 옮겼을 때였다. 영준은 갑자기 아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아주 깊은 물 속, 혹은 무척 높은 곳에 있을 때처럼 긴장이 밀려온다. 등에 소름이 돋아 영준은 무심코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뒤를 돌아보았다.
“뭐지……?”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밝은 불빛 아래 깨끗이 정리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 여기서 나가, 하고 본능이 외쳤지만 영준은 봐야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잠시 뒤, 벽에서부터 금속의 바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휠체어였다.
벽에서 마치 솟아나듯 느리게 나타난 휠체어 위에는 목이 없는 마른 몸이 앉아 페달을 구르고 있었다. 늙고 마른, 창백한 육체였다. 누군가 뜯어낸 것처럼 거칠게 잘린 목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삐걱대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휠체어의 뒷바퀴가 벽을 완전히 빠져나왔다. 목 없는 몸이 양손을 뻗어 사방을 더듬거려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뒤 독수리 발톱처럼 구부린 손가락이 정확히 영준이 있는 장소를 향했다. 아니 찾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휠체어가 정면을 향했다. 바퀴가 앞으로 구르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영준은 비명을 삼키며 복도 반대편으로 달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지나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내려갔다.
* * *
“뭐가 혼자면 괜찮아!”
얼굴이 시뻘개져서 돌아온 영준은 도연을 보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영준은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는, 우당탕거리며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허겁지겁 땀에 젖은 윗옷을 벗고 차가운 물을 끼얹었다. 도연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따라왔다.
“왜 그래?”
영준은 이익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머리로 찬물이 쏟아졌다. 몸서리가 쳐졌다. 영준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턴 다음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숨도 못 쉬고 뛰어온 탓에 아직도 폐가 지지는 것처럼 아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는 말도 안 되는 것들로 가득했다. 보이는 것이 한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방금 전까지는 멀쩡하던 것이 다음 순간 무너지고 있었다. 마주 오는 사람들 중 몇은 어깨를 부딪쳤고, 몇은 몸을 뚫고 지나갔다.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는 게 무엇인지 절실히 알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도연을 바라본 영준은 자신이 이미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멋대로 입이 움직여 정신없이 쏟아낸 것이다. 도연은 종잇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의심과 당혹감이 휩싸여 있었다. 마치 그 일을 겪은 것이 영준이 아니라 도연이기라도 하듯 떨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영준은 다리에 힘이 풀려 욕실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갑자기 왜, 그 소리, 그 이상한 냄새에.”
영준은 젖은 뺨을 쓸며 두서없이 말했다.
“사방에 가득했어. 몇몇은 눈도 마주친 것 같았다고."
아랫배에 손을 올린 영준이 끙하고 신음을 흘렸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그 사람들, 다 죽은 사람들인 거지? 공원 근처에서 봤던 건 아무리 봐도 사람 같지가 않았어. 다 썩어 있었다고. 머리가 꼭 터진 수박 같은 게…….”
“……보였다고?”
“그래, 봤다고!”
창백한 얼굴로 잠시 서 있던 도연은 얼른 기대고 있던 욕실 문을 닫아 버렸다. 안쪽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정확하지 않게 계속 이어졌다. 도연은 문에 기댄 채 양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이건 아니었다.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나다니. 차라리 꿈이 아닐까 싶었지만 수없이 꿔왔던 악몽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잠시 후 영준이 나왔다. 조금 전 보다는 진정된 것 같았지만 얼굴이 창백한 것이 자신이 한 이야기에 스스로 역겨워 토한 모양이었다.
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영준이 웅얼거리며 뭔가를 물었다. 도연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한숨을 푹 쉰 난 그가 마루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도연의 눈에 그의 손에 난 상처가 들어왔다. 24시간이 넘었음에도, 아무는 기색은커녕 마치 십 분 전에 난 것처럼 아직도 붉고 생생하다. 조금만 건드리면 다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리라. 상처의 원인은 깨진 유리였다. 그 정도로는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손 좀 줘봐.”
도연은 영준의 옆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길게 난 상처를 살짝 만져 보았다. 빨갛게 염증이 일어 뜨거워야 할 그곳은 몹시 차가웠다. 깊게 벌어진 곳을 손끝으로 꾹 눌렀지만 영준의 아프지도 않은 듯 무덤덤했다. 회복의 기미 없는 냉증을 동반한 무통, 예상대로였다. 손상을 입은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처음 그가 밤의 사냥꾼을 보았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그저 자신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알았을 테고, 그랬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했단 말인가? 도연은 영준이 손을 놓고 일어나 앉았다. 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무 발전도 없다니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런 거야?”
답을 구하는 불안한 목소리에 도연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는 그러나, 곧 안정을 찾았다. 무엇에든 빠르게 대처해온 습관은 이럴 때에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빌라에 올 때 흘렸던 피, 기억나지?”
도연은 상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 널 따라왔던 놈이 그걸 먹은 모양이야. 나한테 붙었다고 했던, 기억나지?”
도연은 벨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영준의 눈이 크게 홉떠졌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야. 오히려 그걸 그냥 지나쳤을 리가 없지…….”
정적이 흘렀다. 말을 잃은 영준은 잠깐 도연의 얼굴을 보았다가 자신의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살아있는 채로 먹히는 건 정상적인 일이 아니야. 재수 없는 경우 심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일이고…… 아마 그 일로 조금 눈이 트인 것 같아.”
영준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눈이 트인다고?”
“보인다는 말이야.”
“내 피를 귀신이 먹어서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이거야?”
“아니, 그래, 말하자면 그래.”
“그게 말이 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가끔은 말이 안 되는 일도 일어나.”
“언제까지 이러는 건데?”
도연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나도 확실히는 몰라.”
“모른다고?”
“그래.”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겠지? 원인을 안다는 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래.”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
“……내가 아는 한은 두 명뿐이야.”
“그리고?”
영준은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한 명은 죽었어.”
짧은 대답이었다.
“다, 다른 한 명은?”
“……15년이 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대로지. 하지만 걱정 마. 네 경우하고는 좀 다르니까.”
도연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올려보는 영준을 향해 가볍게 웃었다.
“어떻게 다른데?”
“내 경우엔.”
미소가 슥 사라졌다.
“완전히 먹혔다고 볼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