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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이 처음으로 단경호를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봄이었다. 그는 강남의 명문 중학교를 다니다 이쪽으로 전학을 왔다고 했다. 전학을 온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처음에는 말수가 적었고 사내아이들 특유의 텃새에 적응하기 위해 조용히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짝이 된 도연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애썼다.
도연은 자진해서 옆자리를 비워두었던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등장이 못마땅했다. 누구도 도연의 옆에 앉거나 먼저 말을 걸려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은 어지간한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끈질기게 다가왔다.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에 쉽게 파고드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대답에도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듯 웃어줘, 그와 대화하노라면 자신이 평범한 또래 친구들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사실 둘 사이에 공통된 화제는 거의 없었다. 단경호는 강남에서 살던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도연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의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고, 도연은 그가 늘어놓는 TV 방송이나 연예인, 게임 등의 화제를 듣는 것이 좋았다.
“넌 다른 애들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
“뭐가?”
“어른스럽잖아. 여기 애들은 좀 유치하게 굴어. 나한테 하는 거 봤지?”
“네가 잘못 한 거야. 왜 전 학교하고 비교는 하고 그래?”
“다른 걸 다르다고 한 것뿐이잖아. 아아- 너까지 그러지 마라. 내가 여기서 너 말고 친구가 또 누가 있다고.”
친구, 먼저 말해준 단어는 달콤했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줬구나, 우리 사이는 친구구나. 도연은 가슴에 따뜻한 전율이 퍼졌다.
기분 나쁜 녀석, 귀신들린 아이,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를 맡아줬던 친척들은 모두 그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오물주머니처럼 다뤘다. 그것은 지금 있는 집도 마찬가지였다. 소중한 상대로 생각되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다. 그가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에 반 아이들과 어울리기 쉽게 도운 것은.
“반장은 개를 좋아해, 특히 백구. 옛날부터 많이 키웠어. 축구부인 인호는 어릴 때 할머니하고 자라서 부모님 이야기는 싫어하니까 걔 앞에서 엄마가 이랬네 하는 이야기는 하지마. 유정이는…… 죽은 오빠가 있는데 너하고 비슷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널 무시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어둡고 좁은 곳을 굉장히 싫어하니까 당번이 같이 되거든 대신 가줘.”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그냥. 난 관찰력이 좋거든.”
대단하네,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해준다. 칭찬이 기뻤다. 그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친구, 너밖에 없어, 넌 내 마음 알잖아. 같은 단어가 주는 기쁨에 중독되어 갔다.
단경호는 머리가 좋았다. 눈치 좋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물론 도연이 말해준 정보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도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는 빠르게 반에 융화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한 번 자리를 비우면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였고 차츰 방과 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도연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싸늘하게 변해갔다.
가끔 전처럼 도연이 먼저 말을 걸어 보았으나 이야기는 그때마다 중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더구나 대답에 어딘가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숨어있었다. 도연이 무슨 말을 하든 그는 화를 냈고, 공공연히 모두의 앞에서 무시하기도 했다.
냉정한 태도가 두려워 그의 눈치를 보면 볼수록,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자신은 점점 비굴해지고, 그는 점점 폭군처럼 변해갔다. 한 달 후 자리를 바꾸게 되었을 때, 도연의 옆자리는 다시 비었다. 그리고 도연의 학교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악화되었다.
* * *
젖은 안개와 매연이 섞인 공기가 여름 같지 않게 차다. 영준은 눈을 빠르게 깜빡여 초점을 맞췄다. 새벽 5시 45분,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곤히 든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리라. 방금 옆을 지나간 머리 없는 남자에게 다시 시선이 가려는 것을 꾹 참으며 영준은 도연의 뒤를 따랐다.
한참을 역 주변을 살피던 도연이 24시간 오픈하는 패스트푸드점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여기로 나오라고 해.”
“누굴?”
“동생 친구들. 전화해서 바로 나오라고 해.”
“걔들이랑 얘기는 이미 해봤었어. 다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걸 믿어?”
도연이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다시 전화해 봐. 이번엔 아는 사람을 통해서 유명한 무당을 만났다고 해. 네 동생만이 아니라 다들 큰일 났으니까 당장 나오라고.”
“이 새벽에?”
“아마 지금쯤 피똥을 싸고 있을 테니,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라도 나올걸.”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돌리자 반응들이 기가 막혔다. 아침부터 무슨 소리 하냐는 쪽은 예상 대로였지만, 마치 ‘걸렸다’는 듯이 태도가 다른 애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달려 나온 소영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동생이 아픈 뒤부터 내내 전화를 피하던 이들이었다.
하나같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머리는 산발에 옷차림도 거기서 거기였다. 울면서 쏟아내는 아우성들의 내용도 가관이었다. 밤마다 누가 귀에 대고 자살하라고 속삭인다 부터, 다른 녀석은 창문 밖에서 누가 자기를 24시간 지켜본다고 했다. 거울이 무서워서 못 본다고 하면서 울음을 터트린 애를 시작으로 다들 대성통곡이었다.
“너희들 다들 아무 일도 없다면서, 괜찮다고 했잖아?”
놀란 영준이 묻자, 울먹이며 대답한다.
“처음엔 괜찮았어요. 그런데 자꾸,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그냥 착각이나 노이로제라고 생각했어요. 소영이 일 때문에 우리가 놀라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들에게 이상이 나타난 것은 소영이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그러니까 증세가 심각해질 때쯤이었다. 마침 환청과 환각 증세에 극심한 우울증이 몰려와 힘들어하고 있던 차에 소영이 병원에 입원해 위험하단 말을 듣고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영준은 동생 일로 정신이 없어 그들과 연락을 계속 하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바뀐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만, 징징대는 소리 듣자고 부른 거 아니야.”
도연은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됐는지 말해봐.”
너나 할 거 없이 떠들던 이들이 갑자기 입을 다문 뒤 서로 눈치만 살피기 시작했다. 몇 분 간 침묵만 흘렀다.
도연이 남학생 한 명을 지목했다.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24시간 감시한다고 했던 이였다.
“너부터 말해봐. 일이 벌어진 건 MT때였어, 그렇지? 거기서 뭘 한 거야?”
“특별히……. 특별한 건 없었어요.”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언성을 높이자 매장 안을 청소하던 아르바이트생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봤다.
“너 누가 창문 밖에서 엿본다고 했지?”
도연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놀라 움츠려있던 남학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누군지 알아?”
“……아뇨.”
“누군지 말해줄까?”
“에?”
“지금 당장이라도 물어봐 줄 수 있어. 왜냐면 지금도 여기 와 있거든! 저 밖 보여? 포스터가 붙어있는 창 쪽, 지금도 널 보고 있잖아.”
도연이 남학생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창 쪽을 보게 했다. 신 메뉴 홍보 안내가 붙어있는 투명한 유리벽 사이로 뭔가 검은 것이 휙, 하고 움직였다.
아악, 하고 남학생이 뒤로 물러나며 의자가 날카롭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테이블에 있던 다른 소영의 친구들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기세였다. 도연은 틈을 주지 않고 윽박질렀다.
“저게 왜 널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다니는지 알려줄까? 기다리고 있는 거야. 언제쯤이면 네가 포기할지, 자기가 말하는 데로 건물에서 뛰어내릴지, 목을 맬지 말이야. 새로운 친구가 맘에 들어? 항상 같이 있고 싶어? 영원히?”
“아니요!”
“그럼 말해!”
도연이 학생의 옷깃을 놔주며 다른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지금 당장 죽겠다고 울상들인데, 이건 겨우 시작이야.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고, 그래서 결국 누구 하나가 죽어나가야 정신을 차리겠다면 그건 너희 마음이지. 하지만 만약 소영이 먼저 죽게 되면, 난 절대로 너희를 돕지 않을 거야. 그게 싫으면 지금 말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딜 갔는지, 뭘 봤는지!”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영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초췌하고 퀭한 눈가, 구석에 몰린 짐승처럼 몸을 의자에 바짝 붙이고 있다. 동생이 ‘친구’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가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설 수도 거들 수도 없었다. 질문도 설명도 내가 할테니 너는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도연이 미리 다짐을 한 것이다.
“…….”
몇 초간의 침묵이 더 흐른 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여학생 하나가 기침처럼 쉬고 낮은 소리를 냈다. 그녀는 음성이 잘 나오지 않는 듯 몇 번 더 입술을 달싹인 뒤에야 겨우 말을 시작했다. 소영과 가장 친했다고 한 소희라는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던 사이로,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MT 마지막 날 밤에 늦게 남아서 술 마시던 애들끼리, 담력시험을 하자는 말이 나왔었어요.”
말끝에 숨을 고르며 그녀는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누가 낮에 다리를 봤다고 했어요. 사진을 찍다가 발견했는데, 어렴풋이 나무 너머로 오래된 다리가 있더래요. 가로등도 없구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담력시험 하긴 딱인 장소처럼 보였어요. 근처까지만 가보자 그래서 손전등 가진 애들이 앞장서서 갔더니, 올라가는 길이 너무 험한 거예요. 풀이랑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길이 없었어요.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이게 다 추억이다 뭐 그래서 그냥…….”
점점 빨라진 말은 뒤로 갈수록 헐떡이는 울음으로 변했다. 눈물이 뚝 하구 떨어졌다. 회색 면 원피스 위로 검은 얼룩이 번져갔다.
“다리까지 갔더니 폐쇄된 데라고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어요. 철조망이 처져 있어서 남자애들이 밀어서 길을 내고……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좀 무섭기는 해도 특별히 이상한 것도 없었고 다리도 안전해 보였거든요. 앞에 뭐가 있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건너고 있는데, 그러다 다리를 건너다가, 갑자기 누가 저기 보라고 이상한 게 있다 저거 좀 보라면서…….”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던 다른 친구들도 기억이 떠오르는 듯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흥분해서 소리 지르고, 괜히 더 비명이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다들 새일 거라고 했지만 밤에 새는 다니지 않잖아요. 저희 할머니가 그랬었거든요, 새는 밤에 날지 않는다고. 다리를 건너갔더니 너머에 아주 작은 집이 있었어요. 이만한, 작은 건물 같은 게 있었는데, 조그만 미니어처 한옥 집 같은 거였어요. 크기는 꼭 개 집 만한 게 얼마나 정교하게 지어져있는지……. 그 옆에 무슨 항아리도 있고…….”
“집?”
“네, 집이요. 장독대도 있고, 마루도 있는 집이요.”
“더 자세히 말해봐.”
도연의 눈에 긴장이 서렸다.
“그 주변에 또 어떤 게 있었지?”
“천, 한복 천 같은 게 길게 둘러 있었어요. 집 주변에 치렁치렁하게.”
“성황당처럼?”
여학생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와달라는 듯 옆을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친 남학생 하나가 동의하듯 끄덕였다.
“그리고 또?”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혐오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치 더러운 곤충 같은 것을 떠올린 양 자신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 인형이 있었어요. 천에 솜을 넣어서 사람처럼 만든 인형이요. 팔뚝만한 크기에 한복 저고리랑 바지 같은 걸 입혀서 집 근처에 여기저기 놓여있었어요. 애들이 저주의 인형이라고 막 소리 지르고, 인증한다고 사진 찍으면서……. 호영아 너 그때 디카로 찍었지?”
호영이라 불린 남학생이 놀라 고개를 가로 저었다.
“블로그에 올리려다가 볼수록 기분이 나빠져서 그냥 지웠어. 진짜예요.”
도연은 어두운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앉았다.
“그래서, 뭘 만졌지?”
도연이 물었다. 질문이기 보다는 확인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만졌어요. 왠지 기분 나빠서, 아무도 손대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한옥 집 문을 한 번 열어보자, 안에 뭐가 있는지만 보자고 하는 애들이 있었어요.”
몇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무섭다고, 하지 말자고 그만 가자고 하는데 기어코 나뭇가지로 문을 건드렸어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녀는 앞에 앉은 남학생들을 가리켰다.
“건드리자마자 문이 활짝하고 갑자기 열렸어요, 꼭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는 더 작은 인형들이 있었어요. 손전등을 비추니까, 한복을 입은 아주 작은 인형들이 방안 가득 있는데, 그런 건 난생 처음 봤어요. 다들 문 쪽을 향해 앉아 꼭 이쪽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나서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갑자기 바람도 딱 멈추고 정적이었어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거기가 다른 곳이 된 것 같았어요. 아시겠어요? 꼭 현실이 아니라 꿈속처럼요. 아주아주 나쁜 꿈처럼. 뭔가 바뀌었는데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구 정말 죽도록 무서웠어요.
소름이 돋고 긴장이 돼서 가만있는데 소영이가 갑자기 나무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나무에 뭐가 매달려 있는 거 같다구, 좀 보라면서. 장난치는 거 싫다구 화내고 그만하라 했는데 소영이가 계속……. 제발 저기 좀 보라고……. 보니까 나무에 누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림자가, 한 둘이 아니라 사방에, 나무 마다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이쪽을 보고 있었어요.”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양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채 꺽꺽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 할 상태가 아니었다.
“이어서 해봐.”
도연이 앞에 앉은 남학생에게 말했다. 그는 몸을 돌린 채 타일로 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연이 그의 종아리를 세게 걷어찼다.
“윽…….”
그는 움찔 떨더니 겨우 바로 앉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다리를 건너서 숙소까지 뛰었어요. 다들 뛰다 보니까 정신이 없어서 넘어지고 다치고, 그러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보니까 소영이가 없었어요.”
“다리 건너기 전에 말했잖아!”
울던 여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반복해 외쳤다.
“다리 건너기 전에 내가 말했지! 소영이가 넘어졌다고! 그래도 다들 그냥 갔잖아! 애들이랑 다시 가야 한다구 내가 잡았는데 그냥 갔잖아!”
“그 상황에서 그럼 어떡하라고!”
궁지에 몰린 남학생이 마주 언성을 높였다.
“니들이 우겨서 거기까지 가놓고 버리고 오는 게 말이 돼?”
“그럼 니가 가지 그랬어? 넌 갔냐?”
“나 혼자 거길 어떻게 다시 가!”
“닥쳐!”
영준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화가 나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것 같았다.
“닥치라고!”
무서운 기세에 싸움이 멈췄다. 그러나 씩씩거리는 이들은 서로를 원수 보듯 노려보고 있었고, 다른 셋은 더 이상 듣지도, 말하고도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거나 숙인 채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들은 결국 소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으러 가지 않았고,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밤새 그곳에 혼자 남겨졌다. 그리고 해가 뜬 뒤 다리 아래 강가에서 그녀를 발견해 데려왔다. 소영은 물속에 허리까지 잠긴 채 반쯤 넋인 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외견상으로는.
죄책감, 도연은 그들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그들이 왜 이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고 외면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책과 공포가 섞이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도망치려 한다.
영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몇 초간의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여러 가지 충동에 사로잡혔다가 억눌려졌다. 아주 가는 실처럼 위태로운 절제였다. 결국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서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연은 그를 따라 나가기 전 앉은 이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 지금 상황은 너희가 다 자초 한거야. 이런 똥 같은 이야기를 참 오래도 숨겨왔다.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모든 게 머리 위로 흘러가 줄 거라고 생각했지? 천만에! 죽고 싶지 않으면 소영이가 낫기를 빌어. 매일 매일, 먹지도 자지도 말고 기도하란 말이야, 알겠어?”
가게에서 나오자 어디서 쾅쾅대는 소리가 들렸다. 옆 골목으로 가자 영준이 대형 쓰레기통을 마구 걷어차는 것이 보였다. 도연은 그저 벽에 기대 서 영준이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벽에 고정된 대형 쓰레기통의 두꺼운 철판이 걷어차일 때마다 움푹 하고 우그러졌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간간이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주춤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냥 두고 갔다니, 밤새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든 상관 안 하고 버리고 가!”
영준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꼴이 조금만 덜 비참했어도, 무섭다며 질질 짜고 있지만 않았어도 죽을 때까지 패줬을 것이다. 그러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누굴 죽이네 살리네, 또래 친구들이 농을 던지고 허풍을 떨었어도, 영준은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은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사고 이후 사람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옆에 있는 이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처음으로 영준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 * *
도연이 지도와 생수 등 필요한 물건이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들고 나왔을 때는, 들어갔을 때보다 30분은 족히 지난 시간이었다. 성큼성큼 걷는 걸음은 인파 속이 아니라 벌판이라도 걷는 듯 망설임이 없었다. 단정하지만 무표정한 얼굴. 출근하는 사람들로 바쁜 거리 속에서 도연은 누군가 붙여놓은 사진 조각처럼 이질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새로 알게 된 정보는 비보와 같아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도연은 서둘러 출발을 결심했지만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영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마련하는 잠깐의 시간, 환기의 순간이었다.
“집에 들렀다 가기는 힘들 것 같아. 생각보다 늦어져서 지금 출발해도 차가 꽤 막힐 테니 바로 가자. 말했다시피 대중교통으로는 못 가니까 차를 준비해야 하는데,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그래.”
흥, 하고 도연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깐 갸웃하며 주변을 살피더니 “일단 기다리고 있어.” 란 말만 남긴 채 횅하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40분가량의 기다림 끝에 하얀 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차는 서서히 속도를 낮춰 영준의 앞에 멈춰 섰다. 선탠된 창이 스르륵 내려가고, 도연의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도연은 차에서 내려 보조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운전석 문을 열자 분홍색 시트와 장식된 인형이 한눈에 들어왔다. 젊은 여성의 차 같았다. 영준은 뜯어진 키박스와 튀어나온 전선을 보고 황당해 물었다.
“훔친 거야?”
“그럼 어디서 차를 구한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묻는 도연의 얼굴에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렌터카를 빌리자는 말에 뭘 어떻게 굴렸는지 모를 차에는 타고 싶지 않다던 그의 말에 대강 눈치는 챘었다. 물론 영준 역시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운전 중 친 영혼들이 붙어 있는 차에 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가끔 렌터카 중에는 사고가 난 차를 가져다 대여하는 곳도 있다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훔쳐올 줄은 몰랐다.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모자를 고쳐 쓰는 도연의 맑은 얼굴과 전선을 번갈아 보며 영준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보기와 다르다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두 얼굴의 사나이 급이다.
요만큼의 가책도 없이 키티 쿠션을 집어 허리 뒤에 받친 도연이 의자를 뒤로 눕혀 앉았다. 뭐가 문제냐는 눈빛에 괜한 소리나 들을 것 같아 영준은 그냥 핸들을 잡았다. 그러나 몇 분 가지 않아 도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 세워.”
“뭐?”
“차 세워!”
영준은 차를 길가에 세웠다.
“너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도연은 다짜고짜 영준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데로 휴지를 뽑아 영준의 손에 밀어붙였다. 휴지를 움켜준 손을 조심스레 펴보자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잠깐 사이 핸들도 피투성이였다. 상처가 어느새 다시 열린 것이다. 언제부터 흐른 걸까, 영준은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상처는 쩍 벌어져 꽤 많은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 통증도 없었다. 마치 남의 손을 보는 것 같았다.
근처에 마침 약국이 있어 영준은 붕대와 약을 사 오겠다며 차에서 내렸다. 도연은 물티슈를 뽑아 핸들을 닦아내다 화가 치밀어 피 묻은 휴지들을 뭉쳐 집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조수석 앞을 걷어찼다. 동생의 일을 듣고 충격 받은 것이 보여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다고 했지만 자신의 인내심도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얼이 빠져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아까처럼 화를 내는 편이 났다. 그냥 분이 풀릴 때까지 패주지, 기껏 한다는 것이 뒷골목에서 혼자 화풀이나 하는 정도라니. 덩칫값을 못한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약국에서 영준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지나는 출근 인파를 가로지르지 못해 머뭇거리며 틈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헤치고 가면 될 것을 굳이 하나하나 양해를 구하다 결국 제자리다. 생기기는 맹견인데 성격은 양 못지않은 자식이었다. 도연은 혀를 차며 짜증이 조금 누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 * *
“아, 거참.”
중년의 남자가 영준의 어깨와 부딪히자 눈을 치켜떴다.
“거 아침부터.”
남자는 또 한 번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며 옆으로 물러나자 때마침 버스에서 내린 무리가 영준의 등에 부딪히고는 말없이 지나갔다. 비틀거리는 영준을 향해 남자의 살찐 얼굴과 작은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만만하게 생각됐는지 보란 듯이 병신, 이라고 입 모양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출근 시간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영준을 질리게 만들었다.
사람은 모두가 각자 인생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사랑의 상처일 수도 있고, 큰 후회를 남긴 실수 혹은 친구, 가족에게 받은 해묵은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상대와 어느 정도 가까워지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알리고 싶지도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영준은 그런 남들의 비밀을 상처의 형태 그대로 목격하고 있었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질수록 비밀도 많아졌다. 많은 이들이 남에게 도저히 말 못할 것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몹시 상처 입혀 깊은 원한을 샀거나, 젊은 시절의 실수로 너무 많은 수의 아이를 낙태시켰다. 또 어떤 이는 재미삼아 사냥한 짐승의 수가 수십에 이르렀다. 말끔한 양복을 차려입은 이십 대의 청년이 버스를 잡기 위해 뛰고 있다. 그의 잘 닦인 구두에는 몇십 마리나 되는 어린 짐승의 혼령이 붙어 있었다. 차이고 밟혀 터진 어린 것들이 끙끙거리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그가 쌓인 스트레스를 어디에 푸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물론 상대가 짐승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괴물들이 배회하는 거리, 도시의 사방에서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양이었다. 도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차로 돌아가려던 때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똑똑’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씩 분명해졌다. 영준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똑똑똑’
주위를 살피던 영준은 길가의 파란색 제설함을 발견했다. 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왔다.
‘똑똑’
제설함 안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망설이는 차에 다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이 빠르게 그 옆을 지나가기만 한다. 이거 어째 불안한데. 영준은 의심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제설함에 대고 물었다.
“안에 누가 있어요?”
“도와주세요…….”
작고 가냘픈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힘겨운 듯 말끝에 흐느낌이 묻어난다. 지친 어조로 누군가 제설함 안을 긁듯이 두드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분명 누군가 갇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아이가 짓궂은 장난으로, 혹은 사고로 제설함 안에 우연히 갇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영준은 서둘러 제설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어린아이도, 장난의 흔적도 없었다. 그저 벌거벗은 젊은 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영준은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병원에 전화를 해 엠뷸런스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모든 것이 날아갔다.
피멍이 든 팔과 다리, 창백한 얼굴에는 눈이 있던 자리에 구멍만이 뻥 뚫려 있었다. 바람에 실려 막 죽은 시체의 냄새가 훅, 풍겨왔다.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놀라 들이킨 숨이 덩어리가 된 것처럼 목에 걸려 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을 뿐이었다. 영준은 필사적으로 한쪽으로 밀었던 뚜껑을 찾아 더듬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뻗어온 손가락이 영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도와주세요…….’
차갑고 미끈한 감촉이 팔뚝으로 타고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영준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잡힌 팔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족쇄에 걸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새카맣게 뚫린 구멍에서 피와 눈물이 섞여 흘러내린다. 저 멀리 누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택시 문을 열고 반쯤 눕다시피 했을 때, 친구들도 자신도 모두 배가 아프게 웃어댔다. 몸이 제멋대로 흔들린다. 낄낄거리는 친구들과 출발하는 차의 창문으로 손을 흔드는 것을 거의 1분간은 한 것 같다.
차가 도로를 질주한다. 집 주소를 말하고 나니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시내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약 16분, 잠깐만 눈을 붙인다는 것이 나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다. 짧은 사이 꿈도 꿨다. 규칙적인 엔진의 진동에 어딘가 둥둥 떠서 흘러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부유감이 든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다.
눈을 떠보니 누군가 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뒷좌석에 누워있는 내 허리까지 걷어진 치마, 다리 사이에 통증과 함께 이물감이 느껴진다. 누군가 체중을 실은 몸을 들썩거리며 밀어붙인다. 씩씩거리며 움직이던 남자가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채고는 씨익 웃었다. 놀라 비키라고 소리를 지르자 입을 틀어막는다.
주황색의 작은 조명 사이로 비친 얼굴, 택시 기사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목덜미에 뿜어진다. 가슴을 움켜쥔 손이 아프게 쥐어짰다. 손가락을 있는 힘껏 깨물자 번쩍, 하고 눈앞이 빨갛게 변했다. 욕설과 함께 얼굴 위로 주먹이 마구 부딪힌다. 기운이 빠져 늘어지자 남자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2번, 3번 이어지던 것이 겨우 멈춘다.
나는 뒷좌석에서 질질 끌려나왔다.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했다. 그러나 어두운 차도 한구석에서 이번에는 목이 졸렸다. 두꺼운 손, 파고드는 힘을 이길 수가 없다.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이상한 소리, 내가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들린다. 죽는 순간까지도 정말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안 돼, 그냥 내버려둬. 내 몸을 만지지 마. 그는 내 옷을 다 벗긴 뒤 제설함 뚜껑을 열고 밀어 넣는다. 좁은 공간에 몸을 구기지만 잘 들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팔다리를 접고는 뚜껑을 닫아 버린다.
차가 출발하고, 아침이 왔지만 누구도 내가 있는 곳을 모른다. 집에 가고 싶어. 이렇게 끝나기엔 너무 억울해.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찾아줘, 누가 나를 구해줘. 여기서 꺼내줘…….
하지만 나는 발견되지 않는다. 봄, 눈이 녹은 지는 오래됐다. 누군가 모래주머니를 들고 이곳을 방문할 때까지, 나는 여기에 갇혀있어야 한다. 혹은 악취에 못 이긴 호기심 많은 사람이 다가올 때까지…….
검은 얼룩 같은 세상, 시야 속은 온통 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어딘가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준.”
어디를 봐도 어둠이다.
“……영준!”
“최영준!”
갑자기 무언가 쾅 하고 머리를 내리쳤다. 깊은 물속에서 수면으로 솟구치듯 영준은 돌연 정신을 차렸다. 날카로운 이명이 머릿속에서 윙윙 소용돌이쳤다. 누군가 웃고, 소리치고, 울부짖다가 휘파람을 불어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튕기듯 몸을 젖히자 땅이 솟구쳐 부딪혔다.
간신히 초점을 맞추자 도연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속이 뒤집혔다. 먹은 것도 없이 신물만 올라온다.
영준은 엎어진 채 바닥에 이마를 대고 일어서려 안간힘을 썼다. 출근하던 이들은 아침부터 취객의 소동이라 생각했는지 불쾌한 표정이었다. 차가운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자 천천히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씩 팔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살아있다, 죽은 것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한 모양이다. 도연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영준의 머리를 후려쳤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병신 짓을 하려면 살아있어야겠지!”
영준은 닫힌 제설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다시 뚜껑이 움직일 것 같았다.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아 겨우 몸을 끌어넣고 문을 닫자 도연이 운전석에 앉아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이 멍청한 새끼!”
무서운 속도로 그곳을 벗어나며 도연은 연신 욕설을 했다. 그러나 영준에게는 그것마저 위안이었다. 고맙다고 하자 또 병신이라는 말이 날라 온다.
“또 이런 짓 해봐, 그땐 국물도 없어! 무시하고 그냥 혼자 튀어버릴 거라고 알아?”
영준은 눈을 감고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엔진의 진동이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것은 자신의 기억이 아니었다. 무심코 잡혔던 팔을 쓸었다. 손목에는 시퍼런 멍 자국이 방금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영준은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다, 내 죽음도 아니었다.
영준은 전에도 그런 장면을 알고 있었다. 무덤에서 솟아 나오는 손, 허름한 폐가에서 살그머니 나타나 사람을 놀래키고 기겁하게 만드는 귀신의 손들. 그러나 그것은 괴담이나 TV에서 해주는 납량특집에서 보았던 이야기 속의 것이었다. 실제로 호의를 가지고 누군가를 구하려 했던 상대에게 들이대는 악의가 아니었다.
“네 말이 맞았어.”
영준은 미친 듯이 두들기는 가슴을 꾹 누르며 말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티셔츠가 짙은 색으로 변해갔다.
“상관하지 않는 게 낫다는 거.”
도연은 앞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시겠지.”
이가 뿌드득 갈리는 소리가 난다.
빠르게 달리던 차가 신호에 걸려 서서히 멈췄다.
“누군가 갇혀있다고,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겠지.”
정지한 틈을 타 도연이 몸을 돌려 말했다. 서늘한 눈매가 얼음
이라도 뚝뚝 떨어트릴 것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넌 이제 보통 사람이 아니야.”
덜컹, 귀 보다 가슴이 먼저 도연의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의심해. 조금이라도 불길한 예감이 들면 절대 움직여선 안 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하나하나 힘주어 강조하는 행동규칙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이 우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차가 거칠게 출발했다. 도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다. 더구나 소영의 친구들에 대한 분노도 잠시지만 잊은 것 같았다. 놀람과 두려움이 집중력의 연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신을 놓지 않는 것만 해도 최선이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도연은 아직도 정신없이 뛰고 있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