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의 말대로 몇 시간이 지나 마을로 내려갔던 무속인 무리는 다섯으로 늘어나 돌아왔다. 그들은 각자 주렁주렁 뭔가를 들고 있었다. 맨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의 머리에는 커다란 고무 대야가 올려 있었다. 그들은 중년의 여자를 선두로 해 산을 올랐는데, 생각과는 달리 다리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일정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가던 영준은 그들이 강을 거슬러 최상류층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길도 없는 짐승의 통로로 산을 오르던 이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한적한 곳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다. 그리고는 여자 몇이 중년의 여인에게 화려한 무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색색의 무복은 어두운 산속의 녹음 속에서 이국의 꽃처럼 이질적이었다.
그녀는 흥을 돋우기 전의 가수처럼 한참이나 목을 풀거나 몸을 움직이다 서서히 그 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몸을 곧추세운 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끝없이 뛰던 그녀는 방울과 부채로 허공의 전기를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굵은 음성으로 커다란 대야를 들고 있던 남자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렸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그들은 내려진 붉은 고무 대야에 들고 왔던 과일들을 썰어 넣기 시작했다. 수박과 참외, 사과 등을 대야 가득 차자, 여자 하나가 하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왔다. 비틀거리는 것이 꽤 무거운 것 같았다. 그녀가 대야 안에 물통을 기울이자 끈적하고 붉은 액체가 꿀럭거리며 쏟아졌다. 가깝지 않은 거리에서도 비릿한 내음이 느껴졌다.
“저게 뭐야?”
식겁한 영준이 물었다.
“돼지 피.”
옆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도연이 작게 말했다. 영준은 눈앞의 광경에 두려움과 동시에 이상한 매혹을 느꼈다. 강렬한 힘과 분명치 않은 본능에 따른 움직임에는 나름대로의 법칙과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이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뿌연 장막 너머의 것이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여자가 무어라 길고 구성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피와 과일이 담긴 대야에 두 손을 파묻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고 정성이 담긴 손길이었다. 그녀는 군침이 난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피투성이 손을 뻗어 막걸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야 속으로 골고루 섞었다.
영준은 그녀가 피 묻은 손가락을 맛있다는 듯 빠는 것을 보고는 역겨움에 몸서리를 쳤다. 마치 한 방울이라도 아까운 양 그녀는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혀를 빼 핥고 있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번뜩이는 여자의 눈은 더 이상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이 차갑고 번들거리는 파충류의 그것 같았다.
손에 묻은 피를 모두 핥은 여자가 일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애가 탔다. 혹시 들었나 싶어 도연을 보자,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이 아니라 얼어붙을 듯 냉정한 얼굴이었다.
그때 무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야에 담겨있던 과일을 한 줌씩 꺼내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피 묻은 과일은 마치 방금 잘린 고기조각처럼 싱싱하게 보였다. 넓지 않은 공간이 순식간에 도살장처럼 변했다.
남아있던 호기심이 싹 걷혀졌다. 영준은 차가운 손을 꽉 쥐었다. 식은땀이 흘러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들이 하는 짓이 무엇이든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자 시간은 어느새 6시 반을 넘어갔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것일까. 영준은 도연의 팔을 툭 쳤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눈썹을 모은 채 그는 찡그린 얼굴로 여자의 노래와 행동에 집중해 있었다.
정말 이대로 두어도 좋은 걸까? 자꾸만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영준은 불안한 마음에 도연에게 묻고 싶었지만 공기 중의 무거운 분위기와 심상치 않은 행위에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 냄새에 순식간에 꼬인 날벌레들이 웅웅거리며 몰려들었다. 영준은 잔디밭에 납작 엎드린 채 이마에 달라붙는 벌레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갑자기 신경이 쓰여서인지 온몸이 근지러웠다. 그러나 밑을 본 순간 기분 탓이 아님을 알았다. 땅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든 벌레들로 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영준은 순간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이십몇 년, 제아무리 터프하다 해도 벌레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소름이 돋아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영준은 이를 악물고 도연을 불렀다.
“야, 야…… 김도연!”
그러나 도연은 어깨와 머리 위로 타고 오르는 벌레들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손등 위로 커다란 풍뎅이처럼 생긴 놈이 기어올랐다. 영준은 등줄기가 오싹한 감촉을 억지로 누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많은 벌레는 정상이 아니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아직…… 조금만 더 기다려.”
“느낌이 안 좋아……!”
“쉿!”
그때 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가벼운 쇳소리는 연속으로 세 번 반복되더니 빠르게 이어졌다.
무당의 손에 들린 것은 작고 둥근 접시 같이 생긴 징이었다. 둥근 손잡이 끝에는 길고 붉은 술이 땅에 닿을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빠르게 치며 그 자리에서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치마가 바람을 품고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챵챵- 하고 연속으로 울리는 날선 소리를 타듯 쉼 없이 도는 몸이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쿵,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났다. 소리뿐 아니라 땅이 울렸다.
어떻게 하는 걸까. 영준은 의아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다. 땅에 닿은 온몸이 고동치고 있었다. 무당이 하는 것이 아니었다. 땅속에서 뭔가 울리고 있었다.
영준은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짜건 진짜건 정말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이거였나? 하지만 위험해, 위험해. 본능이 목청 높게 외치고 있다. 멈추게 해야 해.
“젠장!”
갑자기 도연이 이를 악물고 낮게 내뱉었다. 외마디 욕설에 배어 있는 당혹에 소스라치게 놀란 영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리에 쥐가 났다고 생각했다.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이라 생각하고 상체를 돌리려 했는데 팔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단순한 근육통이나 혈액순환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누르는 것은 공기 중에 실제로 존재하는 무게였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발과 등, 어깨를 밟고 지나가듯 쿵 쿵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눈을 돌려 위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거기 존재했다.
공포 속에서도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꽤 자주 겪었던 가위눌림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깨는 방법은 분명하다. 영준은 온 신경을 모아 손가락 끝을 겨우 움직였다. 그 순간 끈이 탁 하고 끊어지듯 몸이 풀렸다.
옆을 보자 도연은 마치 거대한 짐을 진 채 넘어진 사람처럼 끙끙거리고 있었다.
“괜찮아?”
땅에 얼굴 반이 묻힌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NO의 의미로 받아들인 영준은 안간힘을 다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공터에서는 여전히 그들은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야…….”
더듬거리는 필사적인 말이 거친 숨소리 사이로 잦아든다. 영준은 도연을 일으켜 세우려 어깨를 잡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무릎 걸음으로 뒤로 가 그의 발목을 잡아 세게 끌었다. 무거운 나무둥치처럼 지익 소리를 내며 도연의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있는 힘을 다해 몇 미터 조금 더 갔을 쯤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일어설 수 있겠어?”
“그래.”
입에 들어온 나뭇잎을 퉷, 하고 뱉은 도연이 대답했다. 그러나 아직 힘이 드는 듯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영준이 손을 내밀었지만 도연은 옆에 있는 나무를 잡고는 기어이 혼자 일어섰다. 그리곤 무당들이 있는 쪽을 한 번 흘낏 본 뒤 반대편 길로 몸을 돌렸다.
“가자…….”
“잠깐만, 여긴 어떻게 하고?”
“내버려 둬.”
도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더 올 거야. 아직 한참…….”
도연은 허겁지겁 풀을 헤치고 험한 산길을 구르듯 내려갔다. 영준은 잠시 망설였지만 두려움이 도연을 따라 움직이게 했다. 공터에는 머리털이 솟구칠 듯한 아슬아슬한 불안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지거나 몸에 꽂힐 것 같은 무엇이었다.
자리를 뜨는 그들의 뒤에 빠른 속도로 울리는 징의 음율이 따라붙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날수록 몸은 가벼워졌지만 물속을 걷듯이 다리는 무거웠다. 공기 중에 무언가 가득 차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영준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지나온 길 가득히 무언가 희미한 것이 보였다. 마치 담배 연기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했다. 둥글고 무거운 회색 덩어리들이 희미하게 공기 중에 모습을 드러낸 채 징이 울리는 장소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너도 보여?”
도연이 뒤를 흘깃 보고는 영준의 옷자락을 잡고 세게 당겼다.
“쉿, 빨리 걸어.”
“저게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영준은 멈췄다. 머리가 어지럽고, 본능은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지만 뭔가 이상했다. 도연은 벌써 비탈이 심한 내리막길을 달리듯 내려가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에 저들을 따라오자고 한 것은 도연이 아니었던가.
저 연기 같은 존재가 아무것도 아닐 리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형체, 징 소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무당이 불러낸 것이 분명하다. 도연은 그녀를 이용해 동생에게 붙은 것을 잡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데 왜 도망치는 것이지?
영준은 산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확인해야 했다. 무섭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놀란 도연이 쫒아와 영준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뭐하는 거야, 멍청아!”
“저게 소영이한테 붙어 있다는 놈의 정체야, 맞지? 저 사람들이 불러낸 거잖아!”
도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가 기다리던 게 바로 이거였잖아!”
“아니야!”
“네가 네 입으로 말한 거잖아!”
영준은 화가 나 외쳤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땀이 흘렀다. 몇 초간의 침묵, 새나 벌레의 소리조차 완전히 사라진 산속에서 둘은 잠시 말을 잃었다. 도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영준을 설득하려 했다.
“봐, 해가 지기 전에 여기서 최대한 멀어져야 해. 이럴 시간 없단 말이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여기서 알아야 할 건 다 알았어. 더 이상 볼일은 없다고. 해가 지기 전에 내려가자. 나중에 설명해줄게.”
“저 사람들이 저것들을 불러오게 만드는 거, 그게 계획이었잖아. 왜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건데?”
“…….”
“뭔가 잘못됐구나. 그렇지?”
대답은 필요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 도연의 어깨를 움켜쥔 영준이 그를 흔들었다.
“뭘 숨기는 거야!”
“그래!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어. 이래서는 도저히…….”
영준의 팔을 밀어낸 도연이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러나 열은 없었다. 그는 그냥 겁먹은 개가 그렇듯 큰 소리로 방어를 할 뿐이었다. 와락 내뱉는 말은 너무 빨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뭐가 많은데?”
“저놈들!”
마주친 눈에 핏발이 섰다.
“너무 많다고! 넌 들리지 않겠지만 난 귀청이 터질 것만 같아. 이래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조차 없어. 너, 너무 많이 죽었어. 저 사람들은 영력이 약하니까 괜찮을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래 내가 실수했다구! 여긴 산이니까 더 약할 거라 생각했단 말이야! 저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어!”
“그럼…….”
“해가 지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저 사람들은?”
“몰라!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때 뒤쪽에서 아아악- 하는 긴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
이어서 남자와 여자의 고함과 비명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놀란 영준이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가려 하자 도연이 막아섰다.
“가면 안 돼!”
머리털이 모두 솟구치는 것 같다. 저녁이라고는 해도 아직 사방은 밝다. 이 숨 막히는 녹음 속에서 들리는 아우성은 심상치 않은 상황을 말하고 있었다. 영준은 모르는 척 도연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처절한 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차마 외면할 수 없는 마음에 몸이 둘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끔찍하지만 귀에 익은 것이다. 소영이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내지르던 비명과 같았다. 사람 살려, 여자의 말은 미처 끝을 내지도 못하고 끊겼다. 무언가 강제로 입을 틀어막은 것처럼.
영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도연을 밀치고 공터로 달렸다.
처음 소영이 발작을 일으켰을 때를 기억한다. 눈이 돌아가고,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데도 말이 터져 나왔다. 친숙한 얼굴은 낯모르는 이의 것처럼 변해 영준을 향해 온갖 저주와 원망의 말을 토해냈다. 자신의 몸이 아닌 양 휘두르는 팔에 물건들이 쏟아지고, 깨진 유리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동생을 잡아야 했지만, 영준은 말 그대로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암담한 두려움과는 달랐다. 너무 생생해, 거의 만져질 것 같은 날 것의 절망이었다. 그것이 지금 숲 속 공터에 안개처럼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덤불을 헤치고 도착한 영준은 순간 놀라 뒤로 넘어졌다. 어억, 하는 비명은 소리가 되지 못하고 삼켜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공터의 사람들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변해 여기저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뒤틀린 사지는 오래된 소나무 마냥 비비 꼬여있었다. 그리고 한결 같이 하늘에서 내리는 뭔가를 받으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쳐든 채였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길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 몇 분 사이, 여기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이든 이미 끝나 있었다. 모든 이를 끝장내고.
숨 막히는 긴장 끝에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영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디뎌 겨우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시야가 높아지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당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그 또한 누군가 세게 쥐어짠 젖은 천처럼 변해 있었다. 일그러진 채 크게 벌려진 입은 더 이상 입이 아니라 어떤 구멍처럼 보였다. 무언가 강제로 쑤셔 넣어진 것처럼 혀가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그들의 눈은 활짝 열려있었지만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텅 빈 눈동자에 남은 것은 희미한 공포와 경악의 흔적뿐이었다.
의심과 망설임, 두려움이 차례로 스쳐 갔다. 차마 손을 댈 수 없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몇 초, 혹은 몇 분이 지났을 무렵,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모두 죽었다. 다섯 명 모두.
영준은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양 비틀거렸다. 꿈과 현실을 잇는 가느다란 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주 살짝만 헛디뎌도 광기 속에 빠질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부모님의 염을 할 때도 보았고, 병원에서 침대를 비우는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과 함께 지나가던 시신을 본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무참히 살해당한, 아니 도살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욱……!”
갑자기 속이 뒤집혔다. 나무에 기대 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나올 것 없는 빈속이라 쓴 물만 올라온다. 감은 눈 위로 참혹한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져놓은 것처럼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왜?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다. 영준은 그들에게 소영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무당들의 몸을 차지하고 앉아 같은 짓을 벌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혹시…….”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죽은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영준은 급한 마음에 가까이 선 남자의 몸에 손을 댔다. 그러나 소스라치게 놀라 바로 뗄 수 밖에 없었다. 사람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딱딱함, 그는 바위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도연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죽었어.”
돌아보자 도연은 멀찍이 서 있었다. 나무 사이로 우연히 마주친 사슴처럼, 금방이라도 훌쩍 사라질 것 같았다. 결코 공터 안으로는 들어서지 않았다. 늘어진 나뭇잎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왜- 죽은 거지?”
새와 벌레가 울지 않는 숲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너무 조용해 거리와는 상관없이 도연의 숨소리까지 똑똑히 들렸다.
“같은 놈들의 짓이잖아,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늘에 보이지 않는 도연에게서 희미하게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빠른 대답이 흘러나온다.
“……스스로 불러들였으니까. 그건 망자를 부르는 굿이었어. 네 동생은 억지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침입자일 뿐이지만 이 사람들은, 초대받은 거야. 자진한 거라고. 누구든 들어올 수 있게 활짝 열린 문이나 마찬가지였어.”
오른쪽으로 가다 직진을 하면 된다, 는 식의 길 안내라도 하는 듯한 덤덤한 설명.
아직 가시지 않은 불쾌한 냄새, 비릿하게 썩은 민물의 냄새가 공터에 남아있다. 게걸스럽게 몰려든 놈들이 남긴 흔적이다. 사람이 집이라면, 그리고 영혼이 집주인이라면 그들은 압사 당했다.
“일이 잘못될 거라는 거, 알았어?”
“…….”
“나, 난 느낄 수 있었어. 이렇게 되기 전에, 멈출 기회가 있었어. 우린 이걸…… 막을 수 있었어.”
계속해서 밀려오던 불길한 예감이 짧고 불규칙한 호흡처럼 반복되었었다.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자신의 감을 믿고 멈추게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도연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뭐?”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 위험을 무릎 써야 할 이유가 있어? 우린 네 일로 왔어. 그리고 상대에 대해 알아야 했고. 눈앞에 방법이 있었고, 기회를 잡았을 뿐이야. 어차피 굿은 내가 아니어도 이뤄졌을 일이야.”
한마디 한마디가 찬물처럼 영준의 몸을 식혔다. 그래, 우리가 오지 않았어도 그들은 어쨌든 굿판을 벌였을 테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고일 뿐, 누구의 책임도 없는 그저 눈앞에 벌어진 어떤 재수 없는 죽음. 그러나 우리는 여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바위에서 오랜 시간 바람에 시달리며 자란 나무처럼 보인다. 이것이 틀리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 없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내려가서 하자.”
도연은 가면 같은 무표정을 두른 채 말했다. 영준이 저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생과 사일 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목표는 정해져 있었고,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은 안전을 위해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학살은 순식간에 끝났다. 지금은 배가 부를 테니 하루 정도는 조용할 것이다.
영준은 눈을 세게 비볐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별로 좋지도 않은 머리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고교 시절 감독은 자주 볼을 쥔 주먹으로 학생들의 머리를 내려치며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머리보다 배짱과 빠른 발이라고 했었다. 이렇게 하면 네놈들 머리통이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지겠지, 생각하기 전에 일단 치는 연습부터 해.
영준이 공터 밖으로 나와 도연의 곁으로 다가갔을 쯤, 갑자기 가늘게 찍찍대는 소리가 들렸다. 쥐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고 애처로운 소리였다. 그것은 공터 반대편, 한쪽에 웅크리고 뒤틀린 채 앉은 젊은 여자로부터였다. 아직 돌덩이처럼 굳었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다가가 흔들리는 몸을 잡자 그녀는 그대로 쓰러지듯 영준의 가슴에 기대왔다. 굳은 몸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그녀는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기대며 신음을 흘렸다. 약간 긴 얼굴에 얇은 입술이 흐느끼듯 떨린다. 여전히 차가웠고, 여전히 단단했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영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도연을 보았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아있어!”
“그……그으…….”
크게 벌려진 입이 겨우 움직이며 뭔가 말하려 애썼다. 그녀의 창백한 양 입술의 끝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눈가에 화상의 흔적처럼 얽힌 흉이 있다. 다리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창백하고 마른 얼굴만큼 하얀 옷이 종이처럼 얇게 느껴지던.
영준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손이 떨려 여는 것조차 되지 않았다. 답답함에 급한 마음에 도연에게 핸드폰을 던졌다.
“그읍……급…… 사…….”
“괜찮아요, 금방, 병원에 데려가 줄 테니까.”
영준은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팔다리를 펴 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비틀린 손가락으로 영준의 옷을 꽉 틀어쥔 채 놓지 않았다.
“급……사알……을…….”
“가만, 있어 봐요. 이걸 어떡해.”
여자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몸을 뒤틀었다. 왜 아직 전화를 하지 않는지 도연을 재촉했으나 그는 발치에 떨어진 핸드폰에는 눈도 주지 않은 채였다. 그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급살……을……시켜어.”
“뭐 하는 거야? 빨리 전화 하라고!”
“급, 살 급살을…….”
웅얼대는 여자의 말이 이해되기까지는 몇 초가 걸렸다. 평소에는 들어보지 못한 단어, 그 낯설음이 원인이었을까. 영준은 여자가 말하는 ‘급살’이란 말이 무엇인지 느리게 깨달았다. 저주의 말 사이사이, 악문 이를 가는 소리가 우득우득 들린다. 누군가 찬 손으로 목덜미를 만진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도연을 보자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에는 혐오감이 떠올라 있었다.
“내려놔!”
도연이 한발 물러나며 말했다. 영준은 여자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녀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익……!”
강제로 떼어내려는데 감촉이 이상했다. 옷을 움켜잡은 여자의 손가락 중 여럿이 뒤집혀 완전히 꺾여있었다. 점점 부어오르는 손은 보라색 색으로 변해 있었다.
손뿐이 아니었다. 전신이 다 그랬다. 얇은 한복 천 아래 드러난 팔, 다리의 부러진 뼈들이 연약한 살을 찌르고 있었다. 그제야 영준은 여자의 몸이 정상이라면 있을 수 없는 형태로 뒤틀려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어서 내려놔, 어차피 그 여잔 곧 죽을 거야!”
도연이 재촉했다. 그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했었다. 영준 역시 이런 곳에서 밤을 맞는 것은 싫었다. 그러나 어디를 손대도 온통 상처였다. 그럼에도 아프지도 않은지 오히려 더 바짝 붙들고 늘어진다.
“급살……. 죽…….”
여전히 끔찍한 말을 내뱉는 입과는 달리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로 인한 생리적인 것이든, 고통에 인한 것이든 눈물이었다. 부은 팔목을 잡자 몸이 움찔, 떨린다. 이제 스물 남짓, 품 안의 부서진 몸에 힘이 빠진다. 영준은 더 이상 여자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 차가운 몸도, 초점을 잃은 눈동자의 혼란도 영준에게는 낯익은 것이었다. 거의 매일 밤 발작을 시작한 동생과 힘겨운 몸싸움을 벌이던 시간, 가장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눈앞에 있다.
해는 이제 반 이상 산에 가려졌다. 산속의 밤은 이르고 놀랄 만큼 빠르다.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영준은 고개를 숙였다. 바보 같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몇 분간의 차가운 침묵 끝에 바스락,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해가 산 너머로 완전히 삼켜지고, 산은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어둠에 휩싸였다. 떨리는 눈을 들어보니 도연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도시의 밤과 산의 밤은 밀도부터 다르다. 어둡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완벽한 암흑. 바로 눈앞의 것도 보이지 않아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혼란이 올 지경이다.
품 안의 몸은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고 있다. 차갑고 마른 감촉이 어린 시절 사 왔던 병아리를 떠올리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그라드는 육체, 마지막 숨을 쉬고 나면 종이처럼 얇아지리라.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스쳐 가듯 만난 타인이다. 말 한 번 나눠보지 못한 타인의 죽음이 슬플 이유는 없다. 그저 유감일 뿐.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누구도 이런 식으로 고통 속에서 혼자 죽어서는 안 된다.
‘사망 시간은 3시에서 4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복강 내에 다발성 출혈로 인해…….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호흡이 멈춰 있었으며 30분간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마지막 통화는 아침 7시에 했다. 이제 서울로 올라간다고, 저녁은 집에서 같이 먹자고 했다. 집 깨끗하게 치워 놓으면 참 좋겠어, 우리 착한 아들, 할 수 있지? 내일은 맛있는 거 해줄게. 재밌었지 그럼- 사진 많이 찍었어. 다음에는 다 같이 오자.
수업 중 불려 나가 마주한 담임은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고가 난 시간은 9시 경. 인적 드문 커브길, 마주 오던 차를 피하려던 낡은 소형차는 벼랑 아래로 추락했다. 상대 차는 신고도 없이 그대로 도망쳐 버렸다. 성벽처럼 세워진 낮은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 박살이 난 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대로 몇 시간을 방치 되었다. 피가 몸에서 모두 빠져나가고, 심장이 멈출 때까지.
경찰이 무심하게 설명해준 사고경위를 몇 번이나 되새겼는지 모른다. 만약 조금만 빨리 구조되었다면, 그토록 오래 방치되지 않았다면, 상대방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긴 침묵 속 오직 매미 소리만이 가득했을 그 시간을 영준은 오랫동안 반복해서 악몽으로 만났다.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아무리 달려도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고, 다리는 천근처럼 무거웠다. 제발 누군가 도와 달라 외치는 소리는 엄청난 매미 소리에 가려 한 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매번 다르게, 조금씩 더 끔찍하게 변주되는 꿈의 끝은 항상 깜깜한 장막 같은 어둠이었다.
마지막 숨이 길고 가늘게 토해진다. 희미하던 생명의 징후는 모두 사라졌다. 누군가 훅, 하고 불어 꺼버린 것처럼 그녀의 인생은 이렇게 끝난 것이다. 그녀에게도 부모님이 있겠지. 이런 곳에서 죽은 것을 알면 슬퍼할 것이다.
여자의 얼굴은 밤의 그림자에 더 이상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결 편안해진 것이 느껴진다. 영준은 아직도 자신의 옷을 단단히 쥐고 있는 손을 감싸 떼어냈다. 그리고 반쯤 열린 눈을 부드럽게 감겨 주었다. 천천히 웅크린 채 굳은 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혼에 무게와 질량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이나 동물이나 무엇이 죽게 되면 왜 이리 야위는 걸까. 마치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어 저린 손을 들어 본다. 바로 얼굴 앞에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이토록 두꺼운 어둠,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고개를 들자 흐린 밤하늘에는 별도 없이 뿌연 반달만이 떠 있다.
몸을 일으켰다. 걱정하던 데로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괜찮다, 이게 현실이라면 아직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겠지.
영준은 공터 밖으로 조심스레 나갔다. 도연이 그토록 밤의 산에 남아있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내려가자, 그리고…….
가슴이 욱씬거렸다. 그가 정말 떠나버렸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소영의 일과 자신의 상태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준은 그 비밀스러운 남자에게 서글픈 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그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싫었다.
영준은 눈을 세게 문질렀다. 긴장하자. 아픈 다리를 꾹 누르고 영준은 공터를 지나 더듬더듬 숲의 길로 들어섰다.
숲은 고요했다. 어디선가 들리는 낮은 밤새의 울음소리만이 간혹 들릴 뿐이었다. 빛도 없는 산길을 촉각과 기억만으로 내려가자니 자꾸만 넘어진다. 어느 정도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몇 미터를 진행하고 나면 멈추고 주변을 살핀다. 돌이 굴러가는 소리, 우거진 덤불의 흐트러진 형태가 의심스러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진다.
차라리 몸을 낮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영준은 바닥에 앉듯이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구르듯 한참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길이나 방향에 대한 것은 포기하고 그저 밑으로 가는 것만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무작정 움직이고 있자니 점점 시간, 공간개념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은 누구인지 같은 근본적인 의문까지 들기 시작해 그럴 때마다 영준은 하늘을 보고 달이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잠시 멈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임세에……’
움찔,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 목소리였다. 둘 이상이 대화하는 듯 주고받는 음성이 띄엄띄엄 들려왔다. 몸을 숙이고 소리가 들린 쪽을 보자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등산객? 그러나 배낭도 없었고 어둠 속에서 불도 없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일단은 그냥 지나치기로 결심하고 영준은 가능한 조심스럽게 그들을 피했다.
발걸음마다 부슬부슬 돌이 굴러떨어지고 흙이 스친다. 언제 어디서 뭐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을 때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바투……잘……이리……깽지근하게 굴 거가?’
50미터, 방금 전과 같은 거리였다. 마찬가지로 둘, 조금 전보다 확연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고, 억양이 귀에 익지 않은 낯선 투였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영준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의 낙천적 희망은 싹 걷혀졌다. 이런 밤 중에 산에서 예사롭게 말을 나누는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다시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다시 50미터 거리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굴구석 같이……기렇카구……응.’
‘……뭐이 어드래?’
또 같은 거리, 같은 목소리.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저게 무엇이든 위에서 본 것과 같은 놈들이다. 설마 내가 계속 뱅뱅 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영준은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도망치려고 멀어지려고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계속 같은 자리를 돌고 있더란 이야기가 많이 있지 않던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달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이를 악물고 숨을 고르는데 턱이 덜덜 떨린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어디서 물소리가 난다. 왼쪽, 영준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잡목림을 헤치니 갑자기 눈앞이 화악 밝아진다.
바로 앞은 절벽이었다. 눈 아래 달빛에 반사된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틀린 방향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저 강을 기준으로 하면 되리라. 그때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으이구, 으이구.’
‘……나 되보랬다구……작작하라마.’
가깝다. 영준은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초췌한 얼굴의 두 남자가 채 1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두런두런 말을 나누고 있다. 낡은 한 옷, 헤진 모자 차림의 작고 마른 얼굴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두 얼굴이 풍선처럼 급격하게 커졌다.
‘보이는구나 야! 보여!’
‘이거 아까 꿀종지기처럼 생긴 아랑 같은 놈이구나야!’
‘아까 뿌루루 뛰던 그놈?’
‘뭐이 자꾸 어수간하니 기신기신 꾀누나!’
‘너나 되보랬다구 둑어봐야 알건!‘
양 뺨을 맞댄 사내들은 이북 사투리로 고함을 지르더니 영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늘을 다 덮을 것처럼 거대해진 입이 연신 침을 튀기며 악을 쓴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영준은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깔깔 웃는 소리가 산이 떠나가라 울린다.
‘어째 이렇게 새도래이를 떨구 꽥꽥거리니?‘
쑤욱, 커다란 얼굴이 바로 옆에 따라 붙었다.
‘거 별뚝스럽구나 야, 악지가리를 쓰면 도깨비 나온다.’
낄낄 웃는 얼굴은 아무리 달려도 멀어지지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금방이라도 기절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놓으면 정말 끝장이다.
‘경성 것들은 다 이리 별뚝스럽나?’
‘체신머리 없이 노는구나, 둑어보련?’
정신없이 뛰던 영준의 발에 뭔가 걸렸다. 앞으로 넘어지면서 구르자 멈춰지지가 않는다. 우르륵,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그대로 튕기듯 덤불을 뚫고 떨어졌다.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이 온몸을 뚫고 지나간다.
“우와악!”
영준은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있는 힘껏 허공을 걷어차고, 뭐가 되었든 자신에게 닿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댔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대던 영준은 자신이 자갈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름이 반쯤 가린 달이 조소하듯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주변은 조용했다.
울퉁불퉁한 자갈이 등과 엉덩이를 찌른다. 튕기듯이 몸을 일으키는데 어디서 피가 뚝 떨어진다. 입이 쓰라리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자 시큰한 느낌과 함께 물기가 묻어났다. 헉헉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거칠다. 그것이 자신인 줄 알면서도 또 지레 소스라치고 만다.
뒤를 돌아보자 어두운 산이 마치 거대한 거인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신없이 사방을 살폈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을 따라오던 귀신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짓말인 양 사라졌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뒤에서, 혹은 옆에서 나타날 것만 같아 조마조마했다. 영준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강물 소리가 가까이 들린다. 조금만 더 내려가면 된다는 생각에 몸에 힘이 붙는다.
절뚝거리며 경사를 내려가자 검은 비단 같은 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태어나서 물이 이렇게 반가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쨌든 여기는 상류가 분명했다. 아무리 방향을 모르고 뛰었다지만 정반대로 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영준은 걸었다. 한 장소에 가만히 있는 것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끊임없이 옆을, 뒤를 확인하고 만다. 어쨌든 움직이면, 걸을 때마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방향에 대한 집중으로 앞만 보게 되니까.
“덜 생각하고, 움직이자, 몸이 생각하게 만들자.”
어느새 영준은 운동할 때 외우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부상 후 야구를 접은 것이 벌써 몇 년이지만, 습관이란 그런 것이다. 한눈팔지 않고, 기묘하게 생긴 바위와 소용돌이치는 물길, 덤불 속에서 바스락대는 불빛의 변화에도 눈을 주지 않기 위해.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것들을 자세히 보면, 그래서 확인하고, 그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우니까. 무섭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혼자가 되자 절실히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깨닫게 된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기절할 것 같은 긴장의 연속에서 멀리 불빛을 발견한 영준은 그야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급하게 뛰느라고 발밑에서 미끄러지는 자갈에 넘어질 뻔했다. 손을 땅에 몇 번이나 짚었는지 거의 네발로 기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간 불빛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뭔가를 끓이고 있는 남자들 옆에 긴 낚싯대가 놓아져 있었다.
“아, 아저씨!”
밤낚시 중인 낚시꾼들, 그렇다면 아는 사람들이다. 낮에 보았던 이들이다. 반가움에 목이 멨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이들이 영준을 보고는 아는 척을 한다. 허겁지겁 불가로 뛰어들다 와락 넘어졌다. 가지런히 놓여있던 소주병을 쳤는지 와르륵 무너지며 유리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그러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꽤 놀란 듯했다.
“낮에 봤던 친구 아냐? 이 시간에 웬일이야?”
영준은 옆에 있던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겨우 일어났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그냥 바닥에 주저앉았다.
낚시꾼의 손을 꽉 쥔 채로 반쯤은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었다. 살았다, 살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뜨악하니 잡힌 손을 빼낸 남자는 별일을 다 본다는 듯 머리를 갸우뚱 거렸다.
“자네 그거 피 아냐?”
낚시꾼 하나가 영준의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같이 왔던 친구하고 싸우기라도 했어?”
“아뇨 저는, 저기 산에서…….”
쏟아내려던 말이 턱 하고 막힌다. 영준은 침을 꿀꺽 삼킨다. 지금 내가 뭘 설명하려고 하지? 길게 이어진 어둠은 아무것도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잔잔하게 흐르는 강, 조금 전 산에서의 일도 쫓겼던 일도 모두 거짓말 같기만 하다. 이런 이야기를 누가 믿어줄까.
“산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창백하니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구만.”
영준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른 데서 대꾸가 나왔다.
“귀신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요즘 세상에.”
“왜? 이 동네에서 귀신 봤단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또, 또 허풍은…….”
“모르면 가만히 있어. 한탄강에서 빠져 죽은 사람만 얼마나 되는데. 거기다 6.25때 여기가 국군하고 북한군하고 박 터지는 곳이어서…….”
“아 속 시끄러운 소리 고마하고. 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잔해.”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 속에 건네주는 잔을 순순히 받았다. 뭐가 어떻든 일단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니 정말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내용은 어찌되든 좋았다. 농을 던지고 웃는 살아있는 사람들. 떨림이 조금 진정된다.
갑작스러운 영준의 등장에 잠시 멈췄던 술판이 곧 다시 이어졌다. 연신 소주잔이 오간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동들. 영준은 그 둥그런 빛 속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그래 여기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자. 버너에서 나오는 불은 작지만 안락하다. 이 작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주고 있었다. 여기에서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그런데 진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설마 낚시하려고 온 건 아닐 테지?”
“그럼, 밤낚시 하려면 저러고 다니면 안 되지, 이 양반아.”
“그게…….”
“얼큰하니 자알 익었다. 자네도 좀 먹어봐. 속이 확 풀릴 테니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불쑥 수저를 쥐여준 남자가 냄비를 열었다. 뚜껑을 열자 뜨거운 김이 확 올라왔다. 냄비 속에서 매콤한 양념냄새가 났다. 밤에 낚은 고기로 또 매운탕을 끓인 모양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수저가 연신 냄비를 오갔다.
“캬아- 끝내주는구만.”
“시워언허다!”
걸신들린 사람들처럼 뜨거운 국물을 불지도 않고 입에 떠 넣는다. 영준은 등 뒤의 어둠이 무서워 도저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흐름에 섞이고 싶은 욕구에 일단 먹는 척이라도 하려고 냄비를 들여다보았다.
붉은 거품이 자글대는 냄비 속, 고추기름에 얽혀 끓고 있는 것은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양념된 야채가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익고 있었다.
쇠 수저가 젖은 머리카락 위를 탁탁 내리친다.
“국물은 좋은 데 여긴 아직 덜 익었네.”
“그냥 먹어, 뼈는 발라내면 되지 뭘.”
고개를 들 수도, 시선을 뗄 수도 없다. 심장이 짓눌려지는 것 같다. 쩝쩝대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뭉툭한 수저 끝에서 뭉그러드는 살점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얼굴을 들었다.
얼룩덜룩하고 미끈한 얼굴에 튀어나온 눈, 넓적하게 좌우로 길게 벌어진 입. 불가에 앉은 네 남자들은 물고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두꺼운 입술 아래 긴 수염이 입에 넣은 찌개를 삼킬 때마다 흔들거렸다. 맞은편, 번들거리는 둥근 눈알이 영준을 마주봤다.
밤의 장막이 일순간에 영준을 덮쳐왔다. 악몽 속의 괴물처럼 잠복해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씨익, 가로로 길게 벌어진 물고기의 입이 웃는다.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숨도 쉴 수 없었다. 영준은 주춤, 일어섰다. 앉아있던 낮은 의자가 넘어졌다. 뒷걸음질을 하는 그를 네 쌍의 눈이 빤히 바라보고 있다. 뻐끔, 뻐끔 대던 그들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히 하고 시작된 갑작스런 웃음은 박장대소로 변했다. 벌어진 입이 동굴 같았다.
어떻게 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끝없는 어둠뿐이었다. 입구 없는 긴 터널처럼 빛이라고는 한 점도 들지 않는다. 이대로는 자신의 존재도 흐려져 희미하게 사라져버릴 것이다.
쾅!
뭔가에 세게 부딪혀 몸이 뒤로 나가 떨어졌다. 충격으로 숨을 쉴 수가 없다. 허벅지를 붙들고 잠시 신음하고 있자니 통증이 놓고 있던 정신을 빠르게 되돌린다. 영준은 손을 뻗어 자신이 부딪힌 것이 무엇인지 더듬어보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커다란- 차였다.
“흐윽…….”
반쯤 흐느끼며 정신없이 차 문을 열었다. 몸을 운전석에 밀어 넣고 실내등을 켰다. 손이 떨려 버튼을 누르는 데 몇 번이나 미끄러진다. 뒷좌석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영준은 운전석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건 악몽이 분명했다. 여기서 나가야 했다.
헤드라이트를 켜자 긴 주황색 불빛 밖으로 어른거리는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것은 희미한 다리, 혹은 긴 머리 같은 너울거리는 그림자였다. 거칠게 엑셀을 받자 차바퀴가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음을 낸다. 자갈이 튀기고, 정신없이 출발시킨 차는 조심성 없는 운전으로 흔들거리며 도로 위로 올라갔다. 기우뚱, 차가 크게 흔들리자 뭔가 쿵 하는 소리를 냈다. 너무 놀라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소리가 들린 뒷좌석을 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영준은 정말 이러다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소리의 원인을 찾았다. 가방이었다. 뒷좌석에 올려 있던 것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던 영준은 흠칫 뒤를 재차 확인했다. 청색의 배낭, 도연의 것이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처음 만났을 때, 이성을 잃어가면서도 끝내 챙기던 것이 저 배낭이다. 안에 뭐가 들었냐고 묻자 그는 생필품이라고 대답했었다. 언제든지 이사 갈 준비를 해놓은 집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라고.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필요한 것만 준비해 놓은 그것을 도연은 강에도 들고 왔다. 언제든 다시 또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가 배낭을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넘어갔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물건이 왜 아직 차에 있는 것일까.
답은 하나였다. 도연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영준은 순간 솟아오르는 기쁨에 두려움도 잊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떠나지 않았어! 영준은 안도와 반가움이 당장이라도 그가 어디선가 나타나지 않을까 싶어 차를 세우고 환하게 헤드라이트를 켰다.
텅 빈 도로는 조용했다. 중앙선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선 차는 침묵 속에서 불안한 기다림을 이어갔다. 영준은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니 도연은 자신보다 훨씬 일찍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왜 아직도 오지 않은 것일까. 혹시 여기가 아니라 반대편으로 간 것은 아닐까? 산에서 보았던 소도시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곳은 높은 곳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까웠던 것뿐 거리상으로는 상당히 먼 곳이었다. 낮에 이 근처에서 숙박업소를 눈여겨 본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문이 맴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번쩍,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섬광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늘보다 더 검은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눈에 박힌다.
영준은 순간 소름이 쭉 끼쳤다.
‘이거 아까 꿀종지기처럼 생긴 아랑 같은 놈이구나야!’
‘아까 뿌루루 뛰던 그놈?’
산에서 들었던 이북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도연, 영준은 어두운 산을 노려보았다.
“아냐, 말도 안 돼.”
고개를 세게 저었다. 자신이 그곳에서 내려왔는데, 그가 못 했을 리 없다. 아직 해가 지기도 전에 출발했는데,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도연은 차로 돌아오지 않았다. 중요한 배낭은 아직 여기에 있다. 생각이 끝없이 같은 자리를 맴돈다.
땀이 흘러 턱을 타고 흘렀다. 어쩌면……. 영준은 방금 지나온 지옥 같은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 저 터널 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